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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일반산행 ♣/梵如의 山行記

다시 길을 나서다

by 범여(梵如) 2024. 11. 7.

 

 

 

☞ 산행일시: 2024년 10월 20일

☞ 산행날씨: 맑음

☞ 산행거리: 도상거리 8.2km / 4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나 홀로 산행

☞ 산행코스: 도선사- 용암문- 노적봉 아래 쉼터- 백운봉암문-백운대- 다시 백운봉암문

                     백운산장-북한산 산악구조대-하루재- 백운탐방지원센터-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

☞ 소 재 지: 서울특별시 강북구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내가 개포동에 자리잡고 40여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아파트가 재건축을 하며서

상가도 같이 재건축을 하는 바람에 2016년 근처에 있는 빌딩으로 매장을 옮겨서

8년동안 영업을 해왔는데,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한다고 비워 달라고 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사업을 접어야 하나 하고 많은 고민을 했다.

 

가족들은 70 나이에 이제는 쉴 나이라면서 사업을 접으라고 강하게 말렸지만,

40년을 훨씬 넘게 내 삶의 터전이었으며, 내 분신과도 같았던 매장을 접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아침에 일어나서

갈 때가 없을까봐 가장 두려웠다.

 

그리하여 바로 맞은편에 있는 건물로 이사를 하는데, 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고

비도 많이와서 이사를 하는데 참으로 힘이 들었다...예전에 인테리어만 할 때는

몰랐는데, 요즘은 조그만 업체에서 직원을 두고 하는게 쉽지 않아서, 지금은

철물과 건재상을 겸하고 있는데, 업종의 특정상 상품의 종류가 수천가지에

이르기에 전부 남의 손으로 이사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나 하나 내 손으로 정리를 하면서 이사를 하다보니 이사 기간이 정확하게

3개월이라 시간이 소요됐고, 90여일동안 추석날 절에 부모님 제사 지내러

간다고 하루를 쉬고 그 외는 하루를 쉬지 못하고 이사를 하면서 더위에

지쳐서 2번이나 쓰러졌고, 링겔을 맞으면서 이사를 했더니만 몸무게가

무려 5kg 이상이 빠져 버렸다...내가 살면 얼마나 살끼라고, 과연 이 짓을

하면서 사업을 이어가야하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이제는 어느듯 조금씩

안정을 되찾으면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한 달에 대여섯번씩 가던 산을 3개월동안 가지 못했는데, 당장에 대간이나

지맥길을 나서기에는 조금은 무리인 듯 싶어서 물과, 쥬스, 초콜렛만

가지고 오랫만에 북한산으로 향한다

 

북한산 등산 지도

집에서 지하철을 3번이나 갈아타고 우이역에 도착하여 택시로 도선사에

도착하니 절집 입구는 등산객 절집 신도들이 뒤엉켜(?) 마치 돗대기 사장을

방불케하는데 나에게는 生硬스럽게만 느껴진다.

북한산(삼각산) 자락인 우이동에 자리잡고 있는 도선사는 풍수지리에 해박했다는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에 의해 862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큰 바위를 주장자로 갈라서 조성했다는 마애관음보살이 유명한 곳으로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 반드시 들어준다는 절집으로 소문난 곳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서울 근교에

있어서 교통이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기도하러온 불자들로 북적거린다.

 

*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는 풍수지리설의 대가(大家)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그에 대한 자료는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10조>와 1150년(의종 4) 최유청이 편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병서> 등

10여 편이 있는데, 최유청의 자료인 비석은 남아 있지 않고 그 내용만이 <동문선>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841년(문성왕 3) 15세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불경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대의를 통달하고 법문을 깊이

깨달았으며, 846년 화엄종의 관념적·현학적 성격의 한계를 인식하고 선종으로 개종했다.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도선이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신봉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왕건은 <훈요10조>의 제2조와 5조, 8조에 풍수지리설을 반영한

당부를 남겼는데, 저서로 전해지는 것은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등이 있다.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을 배우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에 유학가서 밀교 승려이며 중국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꼽히는 일행에게서 전수받았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옥룡사에 자리잡기 전 지리산 구령에 머물 때 이인을 만나 구례현의 경계인 남해변에서

전수받았다는 설이다... 그런데 첫번째 설은 일행이 당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은 당 말기에 생존한 인물이기

때문에 연대상 모순이 있어 신빙성이 없는듯 하다.

저서로 전해지는 것은 〈도선비기 道詵秘記〉·〈송악명당기 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 등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법정스님 좋은 글

– 산에는 꽃이 피네 中에서-

 

대웅전에 들리기 전에 우측에 있는 공양미와 양초를 하나 사기위해

공양미 판매점을 가서 공양미와 양초를 사려고 하다가 정말 깜짝 놀랬다.

판매점 안에는 공양미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아예 공양미를 搗精하는

기계까지 있어서 이곳이 절집인지, 정미소인지 헷갈리는 느낌이다.

 

공양미와 양초를 사서 소원 글귀을 적으려고 메직을 좀 달라고 하니 판매하는

남자분이 귀찮은 듯 이곳에는 없으니 양초켜는 곳에가서 찾아보라고 한다

나도 불자이고, 조계종 포교사로 30여간 활동하고 있는데 이런 절집은 처음이라

상당히 불쾌하다.

 

불자님들은 이런 배부른 절집에는 이제 그만 시주하고, 정말 수행을 열심히하는데

신도들이 잘 찾아오지 않은 가난한 절집의 스님들을 도와주소

도선사 대웅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로 불자들 뿐만 아니라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퇴옹당(退翁堂)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은 절집이 부처님의 正法을

도외시하고, 물질에 의지한다면 부처를 팔아 먹고사는 장사나 다름 없다’과 질타를

했는데, 이 도선사는 성철스님의 권유로 불교에 歸依한 청담(靑潭)대종사가 주석하고

계셨던 곳인데 청담큰스님이 원했던 도선사는 지금 형태의 도선사는 아니였을것이다

며칠전에 우리 長兄의 49재를 참석하지 못해서 장조카에게

미안하기도 했고하여, 미안한 마음에 공양미를 부처님께 올린다

큰형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양초에 불을켜고, 대웅전과 참회도량이라 불리는

석불전에 가서 큰형님을 생각하며 초를 켜려고 하니 이곳은 석불전 전용

양초가 있다고 하면서 다른 양초를 켜지 말라고 하는게 아닌가.

기분이 영 거시기하지만, 하는 수 없이 석불전 양초를 별도로 산다.

1시간을 넘게 도선사 경내 이곳저곳을 참배한 다음에 도선사를 빠져 나오면서

산행을 시작한다(10:20)

도선사를 빠져 나와서 북한산 자락에 있는 용암문으로 향한다.

이곳은 북한산 능선으로 오르는 최단거리 코스중에 하나이며

등산객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라 마음이 참으로 편한 코스이다

조금씩 고도를 높히기 시작하지만 서울 근교라서 큰 두려움은 없다

가다가 힘들면 다시 내려오지 뭐 하면서 아주 천천히 길을 걷는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라 산행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다

용암문으로 오르는 길에 바위에 암각된 이름들이 많이 보이는데

예나 지금이나 자기를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나보다

김치를 담가 먹기도 한다는 노란색의 꼬들빼기 꽃이 오랫만에

산길을 나선 범여에게 ‘그 동안 어케 지냈냐고 인사하는 듯 하다

 

고들빼기는 나물로 워낙 유명해 농가에서 많이 재배되는 품종이며, 맛이 쓰다고 해서

고채(苦菜) 또는 고도(苦茶)라고 하던 것이 ‘고독바기’로 바뀌었다가 ‘고들빼기’가 되었다고 한다

 

국화과에 속하며 참꼬들빽이, 빗치개씀바귀, 좀두메고들빼기, 애기벋줄씀바귀라고도 한다.

또한 쓴맛이 강해 씬나물이라고도 부른다. 어린순과 뿌리는 식용으로 쓰이며,

나물로도 무쳐 먹고 김치로도 담가 먹으며, 민간에서는 약재로도 사용하며,

우리나라와 중국에 분포한다.

쉬엄쉬엄 걸으면서 커디션을 조절하면서 걷다보니 용암문에 도착한다

용암문(龍岩門:11:00)

북한산성의 대동문 북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조선 숙종37년)에

지어졌으며, 용암봉 아래에 있어 용암봉 암문(暗門:성벽 위에 누각 없이 만들어 놓은 문)

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關門)으로, 암문은 일반 성문과는 달리

은밀한 곳에 만들어져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다

 

그 모양이 홍예가 아닌 병행이라는 것이 특징이며 상부에 문루도 만들지 않은

용암문은 보국문과는 달리 성 내부쪽을 홍예(虹霓: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으로 만들었는데, 용암문 상부의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라고 한다

오랫만에 대동문쪽으로 가서 문수봉, 향로봉, 족두리봉을 거쳐서

불광동으로 이어지는 비봉능선을 한번 타볼까 생각을 했다가

그래도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를 안보고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우측의 북한산 주능선을 따라서 백운대로 향한다

3개월만에 산길을 걷는데, 이사를 하면서 그동안 힘들었던 滯症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느낌이다...역시 산만큼 뛰어난 名醫는 없는듯 하다.

백운대로 향하는 주능선에는 생각보다 등산객들이 많지 않다... 머릿속에

복잡한 기억들은 싹 지워버리고 스틱에 몸뚱아리를 의지한 채 걷고

또 걷는다 

노적봉으로 향하는 길에 뒤돌아 보니 등로가 열리면서 맞은편으로

문수봉에서 갈라져, 의상봉, 대서문으로 이어지는 의상봉 능선이

산꾼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구나...오랫만에 보는 능선이라 참으로

반갑구나.

 

신라시대 高僧이었던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가 머물렀던 곳이라 붙은 지명인데

양쪽으로 깍아지른듯한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지만, 의상봉(義湘峰:502m)정상은 평탄한

편이며, 북쪽의 맞은편으로는 역시 신라의 고승이셨던 원효대사(元曉大師618~686) 의

이름을 딴 원효봉이 있는데, 의상능선은 북한산의 등산 코스중에 가장 험한 곳으로

북한산의 공룡능선이라 부르는 능선으로, 문수봉에서 715m봉~나한봉~나월봉~증취봉~

용혈봉~용출봉으로 이어진다

두 다리로 이렇게 산길을 걷는다거...난 참 복받은 사람이 틀림없다

간간히 지나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걷다보니 노적봉 아래

쉼터에 도착한다

노적봉 아래 쉼터(11:25~35)

노적봉 아래 쉼터에 도착하여 도착하여 베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한다.

노적봉 방향으로 올라가는 등로에는 위험지역 출입제한 표지판이 있는데,

이곳은 출입제한지역으로 릿지장비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출입을

제한하는 곳이다... 10년전에 겁도없이 맨손으로 저기를 올라가서 홀로 망중한을

즐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휴식을 취하는데 오랫만에 온 북한산은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등산객들중에는 외국인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마치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노적봉 쉼터에서 바라본 용암봉은 북한산의 봉우리 중 3번째로 높은

만경대(800m)에  딸린 봉우리로 주변의 면적으로는 가장 크다.  
 아침에 들렸던 도선사가 이 봉우리 바로 밑에 있으며,이 일대는

무당골이라고 불리고 있다. 

잠깐 쉬는 사이에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약간의 寒氣를 느끼는 듯 하여

서둘러 베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입고, 용암봉을 바라보면서 다시

길을 나선다

노적봉(露積峰:718.0m)

노적봉은 북한산의 산성주능선 만경대 서쪽 아래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716m이며,

북한산에서 두 번째로 큰 암장(巖嶂)으로 지명의 유래는 봉우리 모양이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졌으며,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한다.

 

임진왜란 때 백제관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위기에 처하였는데, 밥할머니가 꾀를

내어 이 봉우리에 볏짚을 쌓고 창릉천에 쌀 씻은 물처럼 보이도록 석회를 뿌리게 함으로써

왜적으로 하여금 버틸 만한 군량이 충분한 것으로 판단하게 하여 물러가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봉우리다

저 봉우리 아래에 있는 노적사는 나와 동국대 불교대학원 같은 학기 도반인

동인당 종후 큰스님이 주지로 계셨던 절인데, 참으로 인자하시고 온화하신

분인데 뵌지가 오래되에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늘 健安하시고

언제 한번 시간나면 찾아 뵙겠습니다

2014년 9월 10일... 맨손으로 노적봉에 올라가서 똥꾸바위를 배경으로

저 때만 해도 세상에 겁나는게 없었는데...가는 세월이 아쉽기만 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여름을 방불케한 더위였는데 어느새 북한산의

가을은 우리곁에 다가와 버렸구나...올해 처음으로 가을 맛을 느낀다

가을이 가는구나 / 김용택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 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빛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 산에 기댄
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등로에서 바라본 염초봉(662m:右)과 원효봉(元曉峰:505m)

북한산의 원효봉능선의 원효봉 윗쪽에 있는 염초봉의 본래 이름은

영취봉(靈鷲峰)이며, 완만한 경사에서 수직벽까지 다양한 경사를 갖춘

암장(巖嶂)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추락사고가 잦아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출입이 제한되는 봉우리다

 

원효봉은 고양시 북한동에 속해있는 북한산의 원효봉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지명의 유래는 봉우리 아래에 있는 원효암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라시대

원효(元曉) 대사가 수도하였던 토굴로 원효봉능선은 북문~염초봉으로

이어져 백운대로 향한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의 모습

북한산은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 오악(五嶽)에

포함되는 명산으로, 해동(海東) 오악(五嶽)이라고도 불렀는데 해동이란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발해의 동쪽나라라는 뜻으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그렇게 불러 왔다.

 

세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三角山) 또는 삼봉산(三峰山), 화산(華山)으로

불렸고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불렀는데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 형상을 닮았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잡고 살 만한 땅을 고를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서울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세개의 봉우리에 따온 이름인 삼각산이라고 불렀다

북한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서울의 옛이름인 한산(漢山)에서 유래한 것이며 한산의

북쪽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는데, 백운대의 남쪽에 있는 만경대는 주변 경관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예로부터 국망봉이라 불렸다...무학대사가 조선의 도읍지를 정할 때

삼각산에 올라서 내려다보고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각산은 수도 한양을 방비하는 천혜의 방어막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을 겪은 효종이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산성을 축성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숙종 재위 37년인

1711년에 산성이 만들어졌으며 이를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고 불렀다.

북한산 능선에는 북한산성이 8㎞에 걸쳐 펼쳐지는데, 평균높이는 7m이며, 14개 성문

가운데 대남문(大南門)·대서문(大西門)·대성문(大成門)·보국문(輔國門)·용암문(龍岩門)

등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산은 서울 근교의 산 중에서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하여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불렸는데,서울의 북쪽과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있으며 최고봉인 백운봉(836.5m)이며

서울 외곽에 있으면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명산으로 인기가 높은 산으로, 연중 등산객과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으로 1983년 도봉산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3년 10월 31일 명승 제10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특별시 강북구가 관리한다

위문으로 향하는 빡센 오르막길에는 데크목 계단을 만들어놔서 예전보다

훨씬 쉽게 위문으로 올라서니 강한 바람이 암문을 통과하면서 몸뚱아리가

부실한 범여를 괴롭힌다... 오랫만에 찾아오니 예전에는 위문(衛門)으로

불리웠는데 지금은 백운봉 암문으로 이름마저 바뀌었구나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12:05)

북한산의 주봉(主峰)인 백운대(836.5m)와 만경대(799.5m) 사이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성문중에 가장 높은곳에 자리잡고 있는 성문이다

1711년(숙종37)에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조성한 8개 암문중 하나로 

일제강점기부터는 위문(衛門)으로 불려왔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로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개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백운봉 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으며, 성문 양쪽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그 위 천정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拒式)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백운대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긴다

북한산의 主峰인 백운대가는 길에 바라본  만경대(萬景臺:799.5m)

만경대는 만수봉(萬壽峰)이란 이름이라도 불리웠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와 함께 국도(國都)를 논의했다고 하여, 국망봉(國望峰)

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지금은 만경대라는 지명으로 불리우고 있다.

만경대의  ‘ 은 봉우리 자체가 기묘하고 험준하여 시간과 각도에 따라서

만(萬)가지의 경치로 보인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만경대 너머로 보이는 서울시내

오늘은 생각보다 시야가 참으로 좋다

인수봉 너머로 보이는 도봉산의 주릉이 시원스레 보이는데

백운대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이

산에서 인물 사진을 잘 안 남기는 범여로서는 생경스럽기만 하다

줄을 서시요

백운대 가는 길에서는 바라본 인수봉(仁壽峰:810.5m:12:35)

백운대와 만경대와 더불어 삼각산을 불리는 인수봉의 지명유래는

공자의 논어(論語) 옹야편에 나오는 仁者藥山 仁者 에서 유래되었으며,

암봉으로 된 봉우리 사면이 마치 어린이를 업은 형상과 같다고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백운대에 이어 북한산에서

2번째 높은 봉우리로 암벽 등반가들 사이에는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논어의 옹야( 雍也)에 나오는 글귀

子曰 知者藥水 仁者藥山 知者動 仁者淨 知者藥 仁者壽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仁)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인한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인한 사람은 장수한다."

인증샷을 남기려는 등산객 사이를 한참동안 기다린 다음에

백운대 정상에 발을 디딛는다

사진을 찍고있는 외국인에 부탁하여 나역시 인증샷을 남긴다

백운대 정상에 있는 3.1운동 암각문(巖刻文)

인증샷

백운대 아래로 염초봉과 원효봉이 줄을 서듯 서 있고, 바로 너머에는

한북정맥 산줄기에 있는 노고산이 손에 잡힐듯이 가깝게만 보인다.

예전에 홀로 한북정맥을 걸을 때 도봉산 주능선에서 내려와 출입금지

구역인 상장능선을 따라서 노고산을 지나면서 개고생을 한 기억이

새롭게 소환되는 느낌이다

조선조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다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파직된 김상헌(金尙憲:1570~1652)... 강직한 의기로 나라의 절개를 지키다가 

1639년(인조 17)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 압송되면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지었다는 시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작금의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형태를 보면 국가를 위하겠다는

자들은 눈을 씻고도 볼 수가 없으니 자꾸만 민초들의 삶은

고달퍼지기만 하니 걱정이다.

 

이곳에 서서  김상헌의 詩를 떠올리니 歌皇 나훈아가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코로나가 한창 극성을 부릴때 나훈아가 콘서트에서 한 말

 

여러분 우리는 지금 힘듭니다.

우리는 많이 지쳐 있습니다.

 

저는 옛날의 역사책을 보든, 제가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냐 하면.

바로 오늘 여러분(국민)들이 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백운대 내려오면서 만난 북한산의 명물 오리바위

오리바위 너머로 보이는 만경대와 용암봉...그 뒤쪽으로

북한산의 주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게 정말 장관이다

 

오르 내리는 등산객에 시달리면서 내려오는 좌측으로 예전에는 없었던

숨은벽으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인다...이곳으로 내려가면 밤골로 향하는

등로인데 우리집으로 가는 길과 너무 멀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간다

 

숨은벽은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에 있는 암벽으로 이 암벽에서 펼쳐지는 암릉을

숨은벽능선이라고 하는데 명칭의 유래는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에 가려져 숨어 있는 듯

잘 보이지 않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이 암릉은 경기도 고양시 효자동 방면이나

사기막골 방면에서만 제대로 보인다. 초급자도 등반할 수 있는 암릉이지만 양 옆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어 주의하여야 하며, 1970년 고려대 OB 산악회가 숨은 벽

(hidden face) 岩壁코스를 개발하여 숨은 벽이라 命名하였다

산행을 하면서 이렇게 가시거리가 좋은날은 거리 많지 않다.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는 뒷쪽으로는 수락산과 불암산이

뚜렸이 보이고, 그 뒷쪽 저 멀리는 예봉산과 검단산, 남한산성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구나...오늘 산에 오길 참 잘했다

백운봉 암문(12:55)

다시 백운봉 암문에 도착하여 북한산장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오늘은

유난히도 외국인 등산객이 많은 느낌이다...그 중에서도 산에서 떠들고

난리를 치는 짱깨 등산객들이 자꾸만 범여의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천천히 내려다보니 백운산장에 도착한다

백운산장(13:10~13:20)

예전의 백운산장이 아니다...간단하게 먹거리를 팔면서

등산객들에게 제공했던 편의 시설은 사라지고 지금은

북한산 홍보를 위한 전시장으로 변해 버렸다

백운산장 내의 안내문들...

 

이곳에서 베낭을 내려놓고 빵과 따뜻한 물로 허기를 면하면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에 천전히 하산을 시작한다

백운산장 하산길에서 바라본 수락산(水落山:641m)의 모습

서울의 노원구와 경기도 의정부시남양주시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조선 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으며, 내원암 일대 계곡에 바위가 벽을 둘러치고 있어 물이 굴러

떨어지므로 수락(水落)이라 이름 하였다는 설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이 수락(首落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한자 표기는 달라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골짜기 물이 맑아 금류(金流) · 은류(銀流) · 

옥류(玉流)라 하는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산의 자태에서 이름이 유래된 것 같다.

편안한 걸음으로 내려오니 멋진 인수봉이 보이는 그 아래에 예전에는

보지 못한듯한(기억이 안 남) 인수암이란 조그만 절집이 보인다

북한산 산악구조대(13:40)

인수봉을 올려다 보면서 왜 부아악(負兒嶽)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것만 같다

북한산 산악구조대를 지나면서 바라본 영봉(604m)의 모습

영봉에 서면 북한산 최상의 아름다운 조망인 인수봉과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 뒤로 숨어 있는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가 한 눈에

보이는 조망이 뛰어난 봉우리다

하루재(490m:13:50)

북한산 산악구조대에서 도선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예전에 서울 동대문밖의 사람들이 북한산 영봉 인근으로 와서

땔깜을 베어서 지게에 지고, 하루가 걸려 오고 갔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하며, 또 다른 설은 1941년에 생겼다가 1968년에

없어진 돈암동 전철 종점에서 하루가 걸린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란다

이곳에서 잠깐 고민을 한다...이곳에서 도선사로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좌측의 영봉으로 올라가서 육모정, 용덕사를 거쳐 육모정

탐방지원센터로 내려갈까 하다가, 3개월만에 산을 탄 탓인지 아니면

체력 저하 탓인지는 몰라도, 다리에 통증도 시작되고, 하여

그냥 도선사 방향으로 향한다

도선사로 내려가는 길에는 다른 국립공원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등로에다 돌을 깔아 놓아서 다리에 통증이 너무 심하다

드디어 산행의 끝지점이 보인다

백운탐방지원센터(14:15)

 

배부른 절집 도선사 셔틀버스의 횡포

백운탐방지원센터에 내려오니 도선사에서 우이동으로 연결하는 셔틀버스가

있기에 무심코 셔틀버스에 오르는데 갑자기 경비원인듯한 험상궂은 남자가

오더니만 버스를 타지 말라고 제지를 한다...도선사에 기도하고 잠깐 산에 올랐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버스를 좀 탄다고 하니. 등산객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상당히 난감했지만, 나도 불자이고, 조계종단 포교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다리가 아파서 그러니 버스를 좀 타면 안될까하고 사정을 하면서 포교사증을

제시하니, 그 사람이 그 윗선에 보고를 하더니 도선사 신도증이 있느냐고 묻기에

도선사 신도증은 없다고 하니, 그러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핑계가 보살들이 등산객의 땀냄새를 싫어하기에 안된다는데

기가 찬다...조계종 포교사로 30여년간 활동하면서 절집에 가서 이런 푸대접

받아보기는 난생 처음이다...도선사 절집의 횡포는 해도해도 너무하다.

정녕 등산객도 도선사에 들려 기도를 하고, 시주를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텐데

등산복을 입고, 땀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셔틀버스를 안 태워주는 건 분명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다.

 

부처님께서도 왕이 부처님 앞에 바친  개의 ()보다, 가난한 여인이

 종일 굶으며 구걸을 하여 동전 한 푼을 얻어서 바친 ()을 더 소중히

여겼다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일화를 도선사는 모르는가 보다

아침부터 이래저래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기보다는 물질 만능에

젖은듯한 도선사에 대한 씁쓰레함을 가슴에 안고 우이역으로 향한다

 

하루재에서 육모정, 용덕사 코스로 가지 않은게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빈대가 안 남는다"는 속담이 있듯 도선사의

형태를 더 이상 보고 싶지않아 다시는 이 절집에 오지 않으리라

도선사에서 우이역으로 가는길에 우이구곡(牛耳九谷)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셔틀버스를 얻어 타려고 비굴하게 굴었는데...걷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이구곡(牛耳九谷)

 

제1곡 만경폭(萬景瀑)

옛 이름은 미륵폭(彌勒瀑 )으로 석벽에 조현명 과 이주진이 병인년(1746)여름 미륵폭에서

함께 유람을하다, 와서 정유년(1777)겨울에 이은이 선친 을 그리다, 라는 각자가 남아있다

 

높은 산이 병풍처럼 늘어서서 허공을 가로질러 끊고 있으며, 난간처럼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앞에 큰 벽의 높이가 10장(丈)쯤 되고 넓이는 높이의 절반을 넘는다.
모든 돌이 깎아 놓은 듯 하여 날다람쥐나 원숭이도 부여잡을 만한 것이 없다.

물이 그 꼭대기를 통해 비단을 널어놓은 듯이 날아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몇 리(里)를 진동시킨다.

 

제2곡 적취병(積翠屛)

큰 돌이 옆으로 누워있는데 평평하고 넓어서 상과 같고, 수십, 백 명도 앉을 만하니

성석(醒石)이라 이름 지었는데, 여기서부터 산이 점점 낮아지고 골짜기가 다시 합한다.

좌우에 푸른 절벽이 들쭉날쭉하게 마주 솟아 있다. 빠른 물줄기가 거꾸러지듯 쏟아져서

사람들이 벽면을 따라 비스듬히 가야하고 양발을 디딜 수가 없다. 급한 물길이 가로질러

달려가며 찧고 두드린다.

 

제3곡 찬운봉(撰雲峰)

언덕을 의지하여 물을 따라 내려가면 돌 색이 알록달록하게 무늬가 있는데 물이 그 위를 흐르니,

무늬 있는 주름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왼쪽 언덕에 층층이 선바위가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깎아지른 듯 하여 두려울 만하니, 가히 구름을 잡고 가고 먼 들판을 바라볼만 하다.

 

제4곡 진의강(塵衣崗)

큰 돌이 몇 장(數丈) 정도 되는데 물 흐름을 막고 우뚝 서서 평평하고 넓게 가득차 있다.

부여잡고 올라가면 여러 골짜기가 다 보인다. 솔바람 물소리가 숙연하게 귀에 가득 찬다.
둥근 돌(圓石)이 있는데 모양이 큰 종과 같아서, 물이 때리면 울리고 맑고 멀리까지 들렸다.

 

제5곡 옥경대(玉鏡臺)

계곡을 따라 아래로 백 궁(弓) 정도 내려가면 큰 바위가 대(臺)를 이루고 있는데, 가로로

골짜기 입구를 막고 있는데, 하얀 게 뭉게구름 같고 밝기가 닦은 옥과 같으며 맑은

물줄기가 잔물결로 사방으로 흘러 내려간다.
매끄럽기가 숫돌처럼 평평해서 큰 글자를 쓸 만했는데 가운데 터져서 우묵한 구멍을

이루어서 위를 향해 있는 것이 큰 구유 같아서 세묵지(洗墨池)라 하였다.

 

제6곡 월영담(月影潭)

하얀 바위가 울퉁불퉁하게 사방에 널려있고 밝고 맑아서 거울로 삼을 만한데

가운데 둥근 웅덩이가 있어 넓기가 반 무(畝)정도 되며, 여러 봉우리가 둘러 안고

골짜기의 하늘이 탁 트여 있어 앞으로는 수락산과 도봉산 같은 여러 산을 볼 수 있는데,

하늘 높이 솟아 빼어남을 드러내니 그림 병풍을 늘어놓은 듯 하며, 달빛 아래 그림자가

비치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맑아지게 한다.

 

제7곡 탁영암(濯纓巖)

확 트인 골짜기에 괴석이 있어 격류가 작은 폭포를 이루었다.
오른쪽에는 큰 바위가 물길을 누르고 있어 반원 모양으로 휘어 마치

지붕과 같으니 앉아서 술잔을 돌릴 만하다

 

제8곡 명옥탄(鳴玉灘)

이리저리 돌무더기가 늘어져있는 것이 여러 양이 들판에 흩어져 있는 듯 하고

진(陳)중의 말이 물을 마시는 것 같으며, 물살이 말아 오르기도 하고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솟구치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여 옥소리처럼 맑은 소리가 넘쳐났다.

 

제9곡 재간정(在澗亭)

양 언덕이 밝게 트이고 물은 맑고 모래는 흰 곳으로 몇 개의 기둥을 돌에 얹어 물가에

임한 것이 있는데 이를 재간정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재간정이 소실되었으며 인근에서

조선시대 집터의 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곳 일대가 재간정이라는 별서가 있었던

9곡의 위치로 추정된다

우이구곡(牛耳九谷)중에 제6곡 월영담(月影潭)의 모습

월영담은 달이뜨면 달그림자가 뜨는 못이라는 뜻으로 홍양호(洪良浩:1724~1802:

조선후기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谷記)에서 흰바위가 사방에 널려있고, 그 가운데 맑고

깊은 못이 있어 달빛아래 그림자가 비치면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한다고 하였다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14:45)

도선사 셔틀버스의 횡포(?)로 기분도 잡치고, 다리가 아파서 힘이 들었지만

우이구곡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

하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우이경전철역으로 향한다 

우이경전철역을 타고 신설동에서 1호선 열차로 갈아타고, 종로5가에서

내려 광장시장에 들려 육회비빔밥에 막걸리 한병을 마시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