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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白頭大幹 4차 북진(終)

제45-1구간- 댓재에서 고적대 삼거리까지

by 범여(梵如) 2024. 7. 10.

 

 

頭陀第一  迦葉尊者시여!... 마음은 뻔한데

몸뚱아리가 안 따라주니 어케 해야 하나요?

 

 

☞ 산행일자: 2024년 06월 29일

☞ 산행날씨: 맑음...바람한 점 없고, 아주 습한 날씨

☞ 산행거리: 도상거리 14.2km +날머리 6.7km / 12시간 20분 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댓재- 산신각- 댓재 옛길- 햇댓등- 작은 통골재- 명주목이

                      쉼터- 조망처- 무명봉- 1032.3m봉- 1,029.2m봉- 1021m봉

                      1015.7m봉- 통골재- 쉼터- 합류점- 무명봉- 쉼터- 조망바위

                      두타산- 안부- 무명봉- 1171.8m봉- 무명봉- 박달령- 문바위재

                      번천리 갈림길 문바위재?- 학등- 청옥산- 안부- 연칠령성

                      1243.1m봉- 조망바위(망군대)- 무명봉- 안부- 안부- 고적대

                      안부- 장아리 갈림길- 쉼터- 1,220.8m봉- 고적대 삼거리- 암봉

                      암봉- 사원터- 문간재- 안부- 방화계- 베틀바위 전망대 가는 갈림길

                      운영교- 쉼터- 학소대- 관음암갈림길- 삼화사

☞ 소  재 지:  삼척시 미로면, 하장면 / 동해시 삼화동 / 정선군 임계면

 

하루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체력 탓인가, 갈수록 산길이 힘들어진다.

6월에 사무실이 좀 바쁘기도 해서 그런면도 있지만, 삼척쪽의 지맥길을

걸으면서 산에서 먹는것을 제대로 못한 탓도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이번주는 4번의 백두대간 코스중에  2군데 남은 구간이 있는데, 건의령에서

댓재 구간과, 댓재에서 이기령 구간중에 난이도 높은 댓재~이기령 구간을 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이 코스가 백두대간 구간중에서 거리도 거리지만, 난이도 또한 만만치 않아서

해가 긴 하지(夏至)쯤에 걸어야 늦어도 낮이 어둡지 않을것 같아서 택했다.

 

요즘 주말마다 계속되는 비 때문에 난리다... 이번주 일요일부터는 전국적으로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다행히 토요일에는 저녁 늦게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아예

금요일날 일찍 사무실 문을 닫고, 베낭을 메고 서둘러 집근처에 있는 경부 터미널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발 → 삼척행 버스표

집에서 대충 베낭을 챙겨서 경부고속터미널에 도착하니 18시 30분쯤...

예매한 버스표를 찾은 다음에 유부우동 한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삼척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삼척행 버스는 영동고속도로 횡성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가 강릉을 통과하고, 동해를 거쳐 밤 11시가 다 되어가서

삼척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삼척고속버스터미널(22:58)

구룡모텔(23:10~04:10)

지금 모텔에 들어가봐야 잠을 서너 시간밖에 못잘것 같아서 찜질방으로 갈까

하다가 1시간을 자더라도 푹자고 산에 갈려고 터미널 근처에 있는 허름한

모텔로 가서 숙박비를 물어보니 거금 50,000원이나 달라고 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주고 방으로 들어가니 헐!~~~케케한 곰팡이 냄새에다 낡아빠진 시설이

마치 1975년에 개봉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여인숙 수준이다.

 

다시 후론트로 돌아와서 지저분한 이런 방을 오만원씩이나 달라냐고 하면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하면서 돈을 달라고 하니, 능글맞은 주인 영감이 현금으로

30,000원만 달라고 한다.

 

그래...이 영감도 먹고 살아야지, 기꺼 자봐야 3시간인데 하면서 다시 방에 들어가서

자는둥 마는둥 하다가 3시반쯤에 모텔을 나와서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를 사서 먹고, 생수와 식혜, 이온음료를 사서 베낭에 넣은후에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댓재로 향한다

삼척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미로면을 지나 九折羊腸의 28번 도로를 따라서

댓재로 향하는데, 정상을 거의 도착할 무렵에는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귀가 멍멍하다...삼척 시내에서 30여분에 댓재 정상에 도착하니 黎明이

시작되는 듯  하지만 아직도 고개는 어둠속에 갇혀있다.

 

30,000원의 요금을 지불하고,택시에 내리니, 시멘트를 실은 커다란

트럭 한대와 산악회에서 온 듯한 버스 한대가 서 있다.

자세히보니 서울 자유인산악회에서 온 대간꾼들이 산행을 준비하는 듯하며,

일부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댓재(803.6m:04:48)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상사전리와 활기리, 하장면 번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상에는 넓은 광장에서 각종 시설물들이 있고, 삼척과 태백으로

이어지는 두타로라 불리는 28번 2차선 일반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댓재라는 지명은 ‘큰 줄기라는 고개’라는 의미로 일컫는  '대고개(大峙)'라는

뜻의 말이라 생각되며, 대동여지도에는 이를 죽치(竹峙)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대고개-댓재를 뜻 옮긴 한 표기로,  여기서의 ‘대’는 곧 대들보-대보름 등과

같은 크다는 의미로서 “竹”의 훈을 빌려 표기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댓재 서쪽 기슭 죽현천(竹峴川) 부근에 고대 죽령현(竹嶺縣)

터가 있었던 곳으로 표기하고 있고, 삼국사기 지리권(권 35) 삼척 군조에 의하면,

죽령현은 고구려 시대에는 죽현현(竹峴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죽령현으로 개칭되었다.

 

이에 의하면 댓재는 고대 시절에는 竹峴 →竹嶺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竹峙로도

불렀고, 우리말 땅이름으로 댓재로도 속칭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댓재도로개통기념비

‘삼척시 미로면 상사전리에 위치한 고개로 두타산으로부터 10km쯤

남쪽의 산줄기에 있다’고 있으며, 조선지도, 해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죽령(竹嶺)이라 표기되어 있다.

 

진주지(眞珠誌)에 "죽치(竹峙)는 삼척군 서쪽 60리에 있다.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서쪽의 하장면으로 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고개를 넘으면 대동여지도서

말하는 죽현천(竹峴川), 즉 하장면 번천으로 갈 수 있어 예로부터 영동과 영서를 넘나드는

보행로로 이용해 왔다.

 

* 진주지(眞珠誌)는 1963년에 편찬된 삼척 지역 종합 지리지로, 삼척 지역에서 발간된 기존의

  지리지를 대부분 참고하여 발간한 삼척 지역의 마지막 한문본 종합 지리지인데, 삼척군

  유도회에서 새로운 삼척지리지 간행을 결의하여 최만희(崔晩熙)와 홍종범(洪鍾凡:1905~1991)이

  주도하여 신임 전교 이태현 등이 7개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간행한 필사본으로 4권 1책이다.

 진주(眞珠)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현재의 삼척 지역을 지칭하던 별호로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와 『고려사(高麗史)』에는 삼척(三陟)의 별호(別號)가 ‘진주(眞珠)’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척을 왜 진주라고 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심의승(沈宜昇)은 『삼척군지(三陟郡誌)』에서 진주는 실직주(悉直州)의 ‘직주(直州)’

 두 글자를 문치상(文致上) 개서(改書)한 것이라고 하였다.

댓재는 삼척시 미로면 상사전리에서 가장 높은 재로 죽치라고도 하며

미로면과 하장면의 경계에 있고 두타산 산줄기가 남으로 뻗은 곳에

있는데, 예부터 영동에서 영서로 넘나드는 보행도로이었으나 1984년

10월 20일 28번 도로가 개통되어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댓재공원 맞은편에는 댓재휴게소가 있는데 영업을 하지 않는 시간인데도

불은 환히 켜져있다...이곳 댓재에서 두타산으로 향하는 등로는 2군데로

되어 있는데, 표시된 저 곳으로 가서 작은통골재에서 백두대간  마루금과

합류하는 코스가 있고, 또 하나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서 산신각

뒷쪽으로 가서 햇대등으로 가는 코스가 있는데, 이 코스는 백두대간을 걷는

산꾼들이 걷는 코스이고, 댓재공원 방향으로 가는 등산로는 두타산으로

향하는 일반 등산객들이 걷는 코스로 약 30여분의 시간 차이가 난다 

댓재 수준점​(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 산 57-6)

수준점의 번호: 07-00-44-04

높이(표고, 해발고도) 804M

지리적 위치: 경도 129도 00분 44초

                     위도 37도 23분 06초

산행을 시작하다(05:00)

댓재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산행을 시작하는데 조금전까지

왁자지껄하던 자유인 산악회 산꾼들은 남진을 하는지 시끄럽던

댓재는 곧바로 적막속에 빠져들고, 나홀로 산신각 뒷쪽으로 오르는데

산속으로 들어서니 아직도 어둠속이라서 똑닥이 카메라의 낮은

화소로는 사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니 아쉽구나...

댓재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의 편액에는 두타영산지신(頭陀靈山之神)이라 적혀 있지만

어둠속에서 카메라가 편액을 읽어내지 못해서 많이 아쉽다

상당히 고난도의 마루금을 걸어야 하는 오늘의 무사 산행을 기원하며

산신에게 예를 올리려는데, 산신각은 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선 채로 저두삼배의 예를 올리고, 오늘 산행의 첫 발걸음을 내 딛는다

 

원래 이 산신각은 조선시대에는 쉬음산 정상 부근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지며, 쉬음산 산신각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그 석축

제단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고 한다

댓재 옛길(05:15)

이정표(←두타산 6.1km, →댓재정상 0.52km, ↑ 댓재 옛길(상사전리) 3.38km)가

있는 희미한 댓재 옛길을 지난다...예전에 지금의 댓재로 지나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이 곳을 지난 모양인데, 그러고보면 이곳이 실질적인

댓재인 셈이다 

이정표가 있는 남쪽으로 가보니 민초들의 哀歡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커다란 돌무더기가 보인다... 나 역시 이곳에다 돌 하나를 얹어놓고

무사 산행을 기원한다...남쪽으로는 미로면 상사전리로 이어지는

희미한 등로가 보이는데 맥산행의 레전드이신 대구의 비실이부부님의

시그널 하나가 상사전리 방향쪽에 걸려있다.

 

삼척시 미로면에 속해있는 상사전리(上士田里)는 본래 새밭[초전(草田)]으로 부르다가

사밭[사전(士田)]으로 속전된 것으로, 나중에 상사전리(上士田里)와 하사전리(下士田里)로

분리되었으며, 조선 인조 때 정일준(鄭一俊), 영조 때 김종옥(金宗玉)과 박영도(朴永道),

고종 때 최정심(崔正心) 등 각 성씨가 이주하며 형성되었다.

 

미로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동산리, 서쪽은 하장면, 북쪽은 삼거리, 남쪽은 하사전리에

각각 접하며, 동서 4㎞, 남북 6㎞이다... 성조암, 이곡, 고사전, 중촌 등의 자연마을이 합쳐진

법정리로 동쪽에 덕괘병산, 서쪽에 죽치, 남쪽에 선거치, 북쪽에 입암산 등이 각각 있다.

죽치에서 발원하는 사전천(士田川)은 상정리로 흘러 오십천과 합류한다

멋진 소나무 숲사이를 걷는 동안에 벌써 일출은 시작되었다.

최근에 계속되는 궂은 날씨 탓인지 이 높은 산에도 바람한 점이 없다

산행을 이제 막 시작했는데도 땀이 비오듯 쏟아지니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햇댓등(962.8m:05:32)

삼척시 하장면과 미로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유래를 보면

횟대는 경상도와 이북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햇대"로 변음되는 사투리로

 "햇댓"은 "댓재"와 합하여 "햇댓"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뛰어 나온(岬이나 臺)부분을 말하는 것이므로 세 곳의

뜻을 합성하여 "햇댓등"이라 지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잇는 7.5km 능선은 해발 1,300m의 백두대간 능선 길로서

마치 거대한 횃대 같다고 하여 옷걸이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의가등(衣架嶝)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청옥산-두타산-쉰움산으로 연결되는 산맥을 햇대등이라 한다.

횟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인데 햇대라 발음한다

아무래도 이 햇댓등은 댓재 부근에 있는 산신각 때문에 생긴 지명인듯 싶다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山神이 강신하기 가장 좋은 곳에 횟대를 세우고

山神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여기서 말하는 횟대란 대나무(生竹)를 말하며,

두 개의 대나무를 잘라서 통째로 세우고 꼭대기에 오색천을 걸었다.

* 횃대란 긴 장대를 잘라 두 끝에 끈을 매어 벽에 달아 놓고 옷을 거는 막대를 말한다.

댓재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최근에 쌓였던 피로 때문인가, 발길이 무겁다.

거기다가 이런 높은 곳에 바람한 점이 없이 습한 날씨가 초반부터

산꾼을 지치게 한다...비교적 완만하게 올라온 마루금은 서북쪽으로

꺽어져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가야할 마루금 능선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두타산은 흐릿한 모습을

한 채로 그리로 가야할 산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두타(頭陀)란 “속세의 번뇌를 끊고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을 말하는데

사바세계의 衆生들이 접근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래도 너무 쫄지말자...이 길을 벌써 4번이나 걷고 있는데 한번 부딪혀 보는거야

길가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노루오줌꽃이 저질 체력으로 걷고있는

범여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옛날 생각 하지말고 가는 세월에

도전하며 역행하지 말고, 順應하면서 살아 가라고 충고한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실천이 잘 안되는데 우짜면 좋겠는교...

햇댓등에서 등로는 좋으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주중에 쌓인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0.5km의 내리막길에

13분이나 걸려서 내려오니 댓재광장에서 햇댓등을 오르지 않고

두타산을 가는 지름길로 이어지는 꼭지점인 작은통골재에 도착한다 

작은 통골재(05:43)

이정표(→두타산 5.2km, ←햇댓등 0.5km, ↑ 댓재 0.9km)가 산꾼을 반긴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대간 마루금...

원래 대간길의 마루금 트랙은 직진하여 저 윗쪽에 있는 족보있는

929.7m봉을 찍은 다음에 우측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올라가는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고 편안한 사면길로 마루금을 이어가고 있다

나 역시 野性을 잃어 버린채, 편안한 사면길을 따라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꿩의 다리(꽃말: 순간의 행복)

꿩의다리란 이름은 꽃대가 꿩의 다리처럼 날씬한데서 유래 된 이름으로 잎은 어긋나는데

밑동의 잎은 잎자루가 길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짧아져 없어지며 턱잎은 가장자리가

막질이며 밋밋하며, 전체가 삼각형을 이루고 2~3회 깃 모양으로 갈라진다. 작은 잎은

길이 1.5~3.5cm, 나비 1~3cm의 거꿀달걀꼴이고 끝 부분이 얕게 3~4개로 오리발처럼

갈라지는데 끝이 둥글다.

 

꽃은 7~8월에 지름 1.5cm 정도의 꽃이 흰색 또는 엷은 녹색으로 피는데 줄기 끝에 산방

모양의 큰 꽃차례로 달리는데, 꽃잎은 없고 꽃받침잎은 4~5개이며 타원형인데 꽃이

피기 전에는 붉은빛이 돌기도 하며, 수술은 많고 수술대는 주걱 같으며 꽃밥은 넓은

선형으로서 황백색으로, 금꿩의 다리, 꿩의 다리, 한라꿩의 다리, 산꿩의 다리, 연잎꿩의 다리,

돈잎꿩의 다리, 참꿩의 다리, 자주꿩의 다리, 좀꿩의 다리가 있다

조금전에 오르지 않은 929.7m봉에서 내려오는 등로를 만나서 동쪽으로 향한다

명주목이(05:50)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에서 하장면 번천리를 넘어가는 고개로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갑자기 시작되는 오르막길...이곳부터 苦行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전엔 펄펄 날면서 지났던 이 길에서 고행길의 주범은 

당연히 베낭 무게였다...나홀로 산행이다가 보니 산악회를

따라 다닐때보다의 베낭 무게는 배가 되는 느낌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였다...우선 하산하여 갈아입을 옷과 비상 구급약품,

산행을 하면서 수분 보충과 섭취할 음식물(주로 쥬스와 식혜 등 마실거리임),

거기다가 여름이라 생수에다, 이온음료까지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어림잡아

베낭 무게만 10kg가  훨씬 넘는듯 하다...거기다가 주중에 업무 땜에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에 氣力이 많이 떨어진데다가, 어젯밤 늦게 삼척에 도착하여

모텔에서 곰팡이 냄새를 물씬 맡느라(?) 잠을 못잔 탓도 있는듯 하다

갑자기 뚝 떨어진 오르막길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짐을 잔뜩 실은 트럭이 저속 차선을 따라서 천천히 가는 

꼴이 되어 버렸다

힘들게 올라서니 멋진 황장목(黃腸木)이 정상을 지키고 있는 쉼터에 도착한다

쉼터(06:02)

예전에 경복궁 같은 조선 시대 궁궐은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는데, 그 나무가

바로 이 황장목이 아니던가... 나뭇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의 폭이 좁아 강도가

높고 잘 뒤틀리지 않는 까닭도 있지만,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뎌냈던 소나무가 황장목...나무의 속고갱이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는

궁궐이나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던 배를 만들 때, 관을 짤 때 썼으며,

이렇게 속이 누런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불렀으며 황장금표 같은 표식을 세워

보호하고 육성하였다는데, 지금은 그 효용가치를 잃어 버렸지만, 이렇게 대간길을

지키고 있는 니가 너무나 좋구나...

황장목이 있는 쉼터를 지나 잠시 편한 길을 걷는다.

예전에 이곳을 3번이나 지났지만 별로 기억이 없다.

2번은 어둠속에 지났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갔고,

남진을 할 적에는 비를 쫄딱 맞으면서 걸었기에 아무런

생각없이 지나가서 그런 모양이다...그러고 보니 오늘에서야

山川景槪를 제대로 보면서 걸어가는 셈이다

조망처(06:05)

우측으로 삼척시 미로면의 산그리메를 조망할 수 있는 조망처이지만

말이 조망처지...숲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게

아쉽기만 하다 

너의 이름이 뭣이냐?...물개냐?...개구리냐?

두타산을 향한 warming-up인가...

산은 범여에게 체력을 회복할 기회를 주는 듯 하다

산은 늘 인간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베푸는데 인간은

산에게 아무런 것도 주는게 없다...그런데도 자기의 아픔과

시련은 감춘체 싫은 내색을 하지않은 엄니의 품안같은 산...

그런데도 우리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살지 않나 모르겠다

무명봉(06:18)

비록 느린 걸음이기는 해도 범여의 산을 향한 열정은 누구도

막을 수는 없을기라...아무런 생각없이 無心으로 걷다보니 

이정표가 서 있는 족보있는 1032.3m봉에 도착한다

1032.3m봉(06:22)

구조이정목을 겸하고 있는 이정표( →두타산 3.9km, ←댓재 2.2km)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1032.3m봉에 도착하여 물 한모금 마시면서

힘든 몸뚱아리를 추스린다

1032.3m봉에서 잠깐의 내리막으로 향하는데...

대간꾼들 사이에서 로보캅 바위라 불리는 곳을 지나는데

Oruxmaps의 지도상에는 이곳을 명주목재라 표기를 해놔서

약간은 헷갈리는 곳이다

로보캅 바위라... 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구나

어느덧 해는 중천으로 올랐고, 해발 고도가 1,000m가 훨씬

넘는 곳이건만 바람한 점 없이 습도가 높으니 아직까지

아침이건만, 벌써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고

몸뚱아리는 벌써 지칠대로 지친 상태이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나타난 넓은 공터가 지도상의 1,029.2m봉이다

1,029.2m봉(06:36)

1,029.2m봉 정상 삼각점(△443 재설 / 77.8 건설부)

1,029.2m봉에서 가야할 능선이 조망되는데 맨 끄트머리에 있는

가야할 두타산이 멀게만 느껴지지만, 누가 대신 가줄것도 아닌

내 두 발로 해결해야 하기에 愚公移山의 심정으로 걸어가 보련다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어떤 일이든

  꾸준하게 열심히 하면 반드시 이룰  있음을 이르는 나이가 90에 가까운 

  우공(愚公)이란 사람이 왕래를 불편하게 하는  산을 대대로 노력하여 옮기려고 하자

  이 정성에 감동한 옥황상제가 산을 옮겨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출전(出典)은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서 인용한 글이다

다시 고도를 조금씩 낮추면서 내리막으로 향한다

내리막길은 늘 긴장을 한다...그 이유는 다시 내려간만큼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표( →댓재 2.8km, ←두타산 3.3km)는 사면의 내리막길로

향하는데 좌측 옆에 있는 지도상의 1021m봉으로 가본다

1,021m봉(06:44)

1,021m봉에서 또다시 내리막길이다.

사람들은 산을 닮아가나 보나...힘든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편안한 내리막이 있다는 걸, 오늘 산길에서 터득한다.

하기사 세상 살아가면서 無間地獄같은 괴로움의 연속이라면

어찌 살겠는가, 苦과 있으면 반드시 樂이 있는게 세상사는

이치가 아니던가...

내려올만큼 다 내려온 모양이다.

편안한 등로를 지나니 족보있는 1,015.7m 봉이 나온다

1,015.7m 봉(07:00)

정상에는 이정표(→댓재 3.5km, ← 두타산 2.6km)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지맥길 같으면 산꾼들의 시그널들이 도배를 하듯이 많이 걸려있을

봉우리 같은데, 대간 산꾼들은 젊잖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족보있는

봉우리에 그 흔한 시그널 하나도 안 보인다

간간히 들리는 이름모를 새의 울음소리만 들린 뿐...

적막 그 자체이다...오늘은 내 산행의 동반자인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하루종일 걸어도 사람 구경을 못하는 지맥길과는

달리 대간 능선에는 언제든지 산꾼을 만날 수 있기에, 내가

편하자고, 남을 불편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라디오를

아예 가져오지도 않았는데...나름 조용해서 참 좋다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으로 두타산으로 향하는데...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갑자기 넓은 임도가 나오더니 좌측의 하장면 중봉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대간길은 임도 우측의 능선으로 올라간다

습하고 더운 날씨이긴 해도 상쾌한 공기가 꿀맛이다

이곳이 청정지역 강원도의 산길임을 확인한다

통골재(木桶嶺:980m:07:08)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두타산과 댓재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목통령이라고도 부르며 두타산 남쪽 허리가

잘록한 노루목으로 거무소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다.

 

삼척시 미로면 삼거리 방향으로는(무릉계곡) 내려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보인다...목통령은 넘나드는 고개는 아니고 단순한

허리부분에 해당되는 곳이다...목통령은 원래 순수한 우리말로

동물의 '목'에 해당하는 '목통'인데,  한자어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木桶嶺'은 적당히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까지 왔으니 두타산을 향하는 오르는 길만 남았다.

지금 컨디션은 최악이고, 어깨를 펴지 못할 정도로

힘이 든다...하지만 내 언제 편하게 산행을 했던 적이

과연 몇번이나 있었던가...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묵묵히 걷는다.

노루오줌(꽃말: 기약없는 사랑)

노루오줌은 노루가 다닐 만한 산에 사는데, 뿌리에서 지린내가 나서 노루오줌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오줌 냄새를 내는 이유는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각처의 산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산지의 숲 아래나 습기와 물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며, 키는 60㎝ 내외이고, 뿌리줄기는 굵고 옆으로 짧게 뻗으며 줄기는 곧게 서고

갈색의 긴 털이 나 있고, 잎은 넓은 타원형으로 끝이 길게 뾰족하며, 잎 가장자리가

깊게 패어 들고 톱니가 있으며 잎은 어긋나고 잎자루가 길며 2~3회에 걸쳐 3장의 작은잎이

나온다.

 

잎의 길이는 2~8㎝이며 꽃은 7~8월에 연한 분홍색으로 피고, 길이는 25~30㎝ 정도이다.

9~10월에 열매가 달리는데 갈색으로 변한 열매 안에는 미세한 종자들이 많이 들어 있다.

범의귀과에 속하며 큰노루오줌, 왕노루오줌, 노루풀이라고도 한다. 어린순은 식용으로,

뿌리를 포함한 전초와 꽃은 약으로 쓰인다.

아무런 생각없이 묵묵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뒷쪽에서

인기척이 나서 뒤돌아보니, 미니쌕에 물한병만 넣고

나를 추월하는 젊은 친구를 만난다...행색을 보니 대간꾼은

아닌듯하고, 아마도 두타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인 듯 하다

잠시 선 채로 머물다가 숨한번 쉬고 다시 오르막을 향하는 고행은 시작된다

세속에 살면서 누군가는 행복하고, 왜 누군가는 괴로운 삶을 살아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苦樂의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苦樂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苦의 총량과 樂의 총량은 0.1g도 다르지 않다.

다만 그 행복과 괴로움이 나타나는 시간이 다를 뿐이다.

1초안에 苦樂이 나타나기도 하고, 1시간, 하루 때론, 1년,

일생, 三世로 까지 이어지며, 苦와 樂이 출렁인다

 

그러니 지금 좋다고해서 좋아할 일이 아니다.

언젠가는 그만큼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큰 스님의 “선 명상 아카데미” 법문 중에서

쉼터(07:58)

얼마나 몸뚱아리가 힘이 들었는지 0.7km밖에 안되는 거리를

50분이나 걸렸서 이곳에 도착하여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버린다

그렇다고 지맥길처럼 길이 나쁘지도 않는데...

 

그만큼 오늘의 컨디션이 최악이란 이야기다

넓은 쉼터에는 이정표( →통골재 0.7km, ← 두타산 1.4km)와

산림욕 안내판이 자리를 잡고 있고, 대간 마루금은 직진의

오르막으로 올라가서  유인 김해김씨지묘가 자리잡고 있는

1,242.0m봉을 찍고, 우측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곳에서

대부분의 산꾼들이 정상을 오르지 않고 우측의 편안한 사면길로

향하는지 사면길 방향으로 대간꾼들의 시그널이 잔뜩 걸려있다

1,242.0m봉으로 향하는 직진의 오르막길의 original 대간길의 모습

예전에 3번이나 1,242.0m봉을 지나 왔기에 오늘은

편안한 사면길을 따라서 두타산 방향으로 향한다

저 윗쪽으로 보이는1,242.0m봉.

 원래 백두대간은 능선 윗쪽이 마루금인데, 오늘은 눈팅이만 하고 그냥 패스한다

합류점(08:06)

1,242.0m봉에서 내려오는 등로를 만나서 마루금에 복귀를 하는데

명색이 정통산꾼이라 자처하는 범여가 저 곳을 패스하고 가다니...

영 맘이 편치가 않는구나...집에와서 예전의 산행길를 확인하니

1,242.0m봉에서 피는 분홍바늘꽃을 놓치는 憂를 범한다.

분홍 바늘꽃...2017년 7월 9일 백두대간 3차때의 사진

 꽃이 진 뒤 씨방이 마치 바늘처럼 가늘고 길게 자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꽃봉오리 모양도 길쭉하고, 꽃이 피었을 때 수술 꽃밥 끝도 바늘귀처럼 생겼으며,

꽃은 연한 홍자색인데, 분홍색 꽃이 피는 종을 분홍바늘꽃이라고 한다.

 

강원도 대관령 이북 산록의 개활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서 자라며 키는 약 1.5m 정도이고 잎은 어긋나며 앞이 뾰족한 피침형으로

양끝은 좁고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고, 잎 뒷면은 분백색으로 잎맥 위에 구부러진

털이 있고 길이는 8~15㎝가량이며, 꽃은 7~8월에 줄기 끝에 뭉쳐서 피는데 지름은

2~3㎝가량이고, 열매는 9~10월경에 맺으며 길이는 8~10㎝로, 종자에 갓털이 있다.

 

바늘꽃과에 속하며 큰바늘꽃, 버들잎바늘꽃이라고도 하며,관상용으로 쓰이고 강원도

황병산에 분포하는데, 참고로 바늘꽃과는 전 세계에 640종이 분포하며, 특히 온대

지방에 많이 자라며, 우리나라에도 26종이나 분포하고 있으며 꽃말은 “섹시한 연인

, 떠나간 이를 그리워해요”이다

조금씩 고도를 높히면서 두타산으로 향하는 오름길이 시작된다

무명봉(08:08)

오늘 산에서 만나는 들꽃은 몇가지가 되지 않는다.

노루오줌과 꿩의 다리인데, 그중에서 단연 노루오줌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천상의 화원을 걷는 느낌이다 

세수 / 박소란

눈물 자국이 만든 

하나의 얼룩을 보았지

오래된 수건으로 무심코

뺘믈 문지르고 목덜미를 쓸다

거기 생겨난 한 사람의 표정을

 

아아 이제 나는 어디서든

그 얼굴을 만날 수 있겠네

눈을 맞출 수 있겠네

울고 난 뒤라면 언제 어디서든

나는 사랑을 하겠다

눈물이 맺어준 사랑

흐린 창밖 녹슨 못처럼 솟은 첨탑 위로

미색 낮달이 한 장 걸려 있고

울어도 좋아,

보드라운 속삭임이 일렁이고

나는 사랑을 하겠다

금방이라도 왈칵 창을 열어

쏟아지는

물크러지는, 나는 없는 채로

오직 사랑만 남은 채로

잠들기 전 한 번을 물어봐야지

나를 닮은 사랑에게

울음이란 게 어째서 생겨났을까 하고

그는 대답하지 않겠지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겠지 눈가를 훔치며

막 욕실을 빠져나온 사람처럼

젖어

젖어

혼자가 아닌 어둠 속에

조용히 말라가겠지

쉼터(08:15)

두타산가는 길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싸리꽃

두타산이 가까워지는지 두타산 방향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남.녀간의 짝을 맞춰면서 내려오고 있다

서로 交行을 하면서 인사를 나누는데, 조금전에

목통골에서 물한병만 넣은 쌕을 메고 나를 추월한

등산객이 댓재로 되돌아 가는 모양이다...나에게

어르신!... ‘안산하셔요’ 하고 휘익 지나가버린다

두타산에서 내려오는 또 다른 등산객을 만나면서

올라서니 사방이 두루두루 보이는 조망바위에 올라선다

조망바위(08:35)

약간의 흐릿함이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조망은 一望無際이다

북쪽으로는 잠시후에 가야할 청옥산(좌) 고적대(중)와

갈미봉(우)이 우람한 근육질을 뽐내면서 지친 산꾼을 겁박한다

서북쪽으로는 지난 5월에 힘들게 지맥길을 끝낸 어천(신산경표:금대)지맥

산줄기가 보이고, 남쪽으로 고랭지 채소밭으로 유명한 매봉산도 어렴풋이

보이는구나

예전에는 없었던 목책도 설치되어 있고...

우측 아랫쪽에 샘터도 있다고 하나 갈 일도 없다

사실 이렇게 힘이 든 것은 마실것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힘이 드는데 마음 같아서는 버리고 싶지만

가야할 길에 어찌될 지 몰라서 미련하게 이곳까지 지고왔다.

댓재를 출발한 지 4시간 40분만에 힘들게 두타산 정상에 도착한다

두타산(頭陀山:1,357.0m:08:40~50)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하장면과 미로면, 동해시 삼화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삼척의 모산(母山)으로도 불리는 두타산 정상에는 2개의 정상석과 넓은 공터에

쉼터 의자와 이정표, 1등 삼각점이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 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청옥산·고적대 등과 함께 백두대간

동·서간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데, 북쪽과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어 험준하며,

서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하다... 북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이 무릉계곡을 지나

살내(箭川)를 이루며,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이 오십천을 이루어 동해에 흘러든다.

 

한편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한 하천은 골지천과 하류해 한강 상류로 흘러드는데,

산이 깊고 험준해 비교적 식물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동남쪽에 있는 쉰움산에는

산제당이 있으며, 두타산과 청옥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무릉계곡이 있다.

이곳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삼화사를 비롯해 무릉반석·관음사·학소대·금란정 등이

있고, 학소대에서는 4단폭포가 기암괴석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두타산 중턱에 오십정이 있고 그 곁에 산제당이 있어 각처에서 봄과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며, 또 날씨가 가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도 '두타산사가 있어 봄, 가을에 제사하며

날씨가 가물면 기우한다'고 하였다. 동북쪽 산허리 험준한 곳에 둘레 8607척의

석성이(石城) 있어 이것을 두타산성이라고 한다.

 

고려 충열왕 때에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전중시어(殿中侍御: 왕의 뜻을 거스른 죄로 파직)

벼슬에 있으면서 정사를 말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파직을 당했다... 이승휴는 이 산 밑에

터를 잡고 은거하면서 스스로 “두타산 거사(頭陀山居士) ”라는 호를 지어 부르면서 제왕운기(帝王韻紀)

저술하였으니 지금의 전은사터가 그 유적지이다.

 

* 제왕운기(帝王韻紀)는 고려후기 문신 이승휴가 저술한 상,하 2권의 역사서로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1224-1300)가 고려시대 말기인 충렬왕 13년(1287)에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의 형식으로

  읊은 것으로, 1965년 보물로 지정된 것은 공민왕 9년(1360)경에 판각된 책판을 바탕으로 조선초기에

  인쇄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본이다.

  『제왕운기』는 정치폐단을 시정하여 국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국가질서의 회복을 바라고,

  국외적으로는 원나라 지배 하의 만족적 정통성 회복을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시로 엮은 것이다.

 

  상권은 서문에 이어 천지개벽(天地開闢)과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원나라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 사적을

  칠언고시(七言古詩)로 읊었으며,  하권은 동국군왕개국년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년대

  (本朝君王世系年代)’의 둘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것은 ‘지리기(地理紀)’에 이어 단군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칠언고시로 엮어서 단군신화의 편린도 확인할 수 있다.

  뒤의 것은 고려의 조상인 작제건(作帝建) 설화에서 당대의 임금 충렬왕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오언고시로

   노래하였다.

두타산에서 산줄기는 둘로 나뉜다 서북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백두대간 분수령이요

동북으로 갈라진 산줄기는 두타산성과 쉰움산으로 거쳐 동해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임진왜란때 왜군 5,000명이 백두대간을 넘어  강릉거쳐 이 지방까지 쳐들어 왔을때

바닷가 사람들이 두타산성으로 피난하고 의병을 조직 왜군과 싸운 전적이 있는 산이다  

 

박달령을 사이에 두고 청옥산과 쌍둥이처럼 서있는 두타산은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처럼 보이는데 부처의 모든게 아련히 베어있는 이 능선길을 걷는 즐거움

수도자가 두타행의 즐거움을 얻는 그 기분과 같을까?

 

두타산은 인도 초기불교의 두타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타(頭陀)라는 말은 범어(梵語:산크리스트어)인 “dhuta” 를

소리나는대로 음역한 것으로  버리다, 씻다, 닦다 등의 뜻으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심신을 수련하는 행위, 즉 스님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세상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佛道를 닦는 수행을 뜻하는데 오늘 청옥산을 지나

두타산을 걷는 오늘 대간길은 세속의 길을 벗어나 정진의 길을 걷는 두타행이다.

어찌 함부로 걸을 수 있는 만만한 길이겠는가?

 

조선중기에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은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에서, ‘천하에

산수가 빼어난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난 고을은 영동만한 데가 없으며, 영동의

산수 중 최고는 금강산이고  그 다음이 두타산이다‘고 기록하였다.

인증샷

두타산은 현재 최고봉인 1,407.2m봉이 청옥산, 그 동쪽 1,357.0m봉이

두타산이라 불리고 있으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본래는 최고봉인

청옥산이 두타산, 현 1,357.0m봉인 두타산이 청옥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즉 다시 말하면서 두타산과 청옥산이 뒤바뀐 셈이다.

 

두타산이란 산 이름은 자연스럽게 바위산으로 형성되어 있는 현 1,357.0m봉

쪽으로 이동되어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두타산 정상부에 올라보아도

청옥산은 곧 원만한 형상을 한 육산(陸山)의 모습이고, 두타산은 첨봉(尖峯)을

이룬 골산(骨山) 모습이다.

두타산 안내판과 산꾼을 기다리는 의자

불교에서 두타(頭陀)란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는데,

초기 인도의 수행자들은 수행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 열두 가지 두타행을 실천으로 삼았다.


인가(人家)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에 머물면서 수행을 하고 항상 걸식을 하며 걸식할 때는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으며 하루에 단 한번만 음식을 먹고 과식하지 않고 점심 이후에는

과실즙이나 꿀 등도 먹지 않고, 헌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으며 삼의(三衣)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또한 무상관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 곁에 머물고 나무 밑에 거주하거나 지붕이 없는 곳에 앉고

단정하게 앉아 눕지 않는다.


수행자들은 불교 초기에는 잘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산이나 들, 세상을 편력하며 고행하고

수행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는데, 부처님의 상수제자(上首弟子)였던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칭송되었다.

두타산 우측으로는 두타산성을 지나 삼화사가 있는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뚜렸한 등로가 보이는데 대간꾼이 아닌 두타산을 찍고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등산객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무릉계곡의 무릉은 중국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세상과 따로

떨어져 복숭아꽃이 만발한 별천지 같은 곳이라는 의미인데, 실제 무릉계곡은 그

명칭에 손색없으며, 길이는 약 4㎞ 된다. ..입구 호암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용추폭포까지를 말하는데, 무릉반석, 쌍폭, 용추폭포, 학소대,

양사언 석각 등 기암괴석과 조선시대 기우제를 지낸 산답게 끊이질 않는 깊고

푸른 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 무릉도원에 온 듯 환상적인 착각에 빠지게 한다. 

두타산 정상 1등 삼각점(△삼척11)

참조팝 나무(꽃말:노력)

중부 이북의 산 속 바위지대에 자라는 낙엽 떨기나무로 세계적으로는 중국, 일본,

러시아 동북부 등지에 분포하며, 줄기는 높이 1-2cm, 연한 갈색 또는 붉은 갈색을

 띠며 잎은 어긋나며, 난형 또는 난상 타원형, 가장자리에 고르지 않은 거친 톱니가 있다.

잎 앞면은 녹색이며, 뒷면은 연한 녹색, 양면에 털이 없고 꽃은 5-6월에 가지 끝의 겹산

방꽃차례에 피며, 붉은빛이 도는 흰색이며 꽃받침통은 종 모양이며, 안쪽에 털이 있다.

 

꽃잎은 난형으로 수술은 많으며, 꽃잎보다 길며 열매는 골돌이며, 털이 거의 없고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는데, 뿌리에는 알카로이드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해열, 신경통,

말라리아및 토담증(吐痰症) 치료제로 쓴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이어가는 7.5km의 능선은 해발 1,300m의 백두대간을

능선으로 마치 거대한 횃대 같다고 하여 같다고 하여 ‘옷걸이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의가등(衣架嶝)이라 불리기도 하는 등로이기도 하다

두타산 정상에서 휴식을 겸한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서 10분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에...

청옥산으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숲길에서 빠져 나오니 청옥산에서 고적대,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백두대간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왜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등뼈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두타산을 벗어나자 박달령을 향하는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등로 주변에 피어있는 노루오줌꽃이 

산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는데, 오늘 걷는 산길도,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전과는 달리 구조이정 표시판이 

설치되어 있고, 야광 안전로프가 있지만 등로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한 여름이었는데도 무릉계곡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추울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습한 날씨에

바람의 협조도 전혀 없으니, 내리막길인데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두타산을 내려서면서 2번째 만나는 구조이정판

내리막길 우측으로 잠깐 등로가 열리면서 두타산에서 무릉계곡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보이는 저 곳이 두타산성이 있는 곳으로 언젠가는

꼭 저곳을 한번 걸어볼 생각이다

 

 

천당 극락 세계

어디냐

묻지를 말게


찾아갈일 없는데

물어서 무엇하리
찾아든 이곳이 무릉인 것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는가?...이정목도 새것으로 교체되었구나.

많이도 서러웠겠구나...근데 서러워 말고, 운명이라 받아 들이자꾸나.

서러운게 어디 너 뿐이겠느냐...세속에 사는 나이먹은 노인들도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문명속에 헷갈리며 살고 있다

입은 좋은 말을 하라고 있고,

눈은 좋은 대상을 보라고 있으며

귀는 좋은 소리를 들으라고 있다

 

법정스님 말씀 중에서

안부(09:18)

지금이야 비록 저질 체력으로 걷고 있지만, 그래도 범여는

늘 산에만 들어서면 세속의 모든 힘듬을 내려놓고 산을

걷는 이 짓거리가 좋아도 너무 좋다

무명봉(09:22)

우측의 무릉계곡쪽은 등로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의 천길 낭떠리지라 아찔하다

뚜렸한 등로에 너무 자주 만나는 구조이정 표시판... 過猶不及이 아닐까...

누군의 간섭도 받지 않은 체, 호젓하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인기척이 들리기에 쳐다보니, 4명의 산꾼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나처럼 기진맥진하는 모습이다

 

나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래, 댓재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들은 어두운 시간에 무릉계곡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선 채로 이 분들과 5분정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안부를 지나고...

오늘은 왜 이리도 바람이란 존재가 인색한 지, 등로의 나무 이파리 하나도

까닥하지 않는구나... 그래!..자연을 이기려고 하면 안된다고 했지...

그러려니 하고 순응하면서 길을 걸어간다

1-15 구조 이정판을 지나니 이정표가 서 있는 1,171.8m봉에 도착한다

1,171.8m봉(09:35)

그 흔한 대간꾼들의 시그널 하나 안 보이고 이정표(← 박달령 0.9km ,

→ 두타산 1.3km)가 홀로 외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다

야간에 걷는 대간꾼을 배려함인지 간간히 등산로 표시 팻말도 보인다

우측으로 등로가 열리고...

백두대간 갈미봉 능선에서 우측으로 이어져 있는 느루봉(1,142m) 보인다

청옥산은 조금씩 범여 곁으로 다가오건만

가야할 청옥산은 멀게만 느껴진다

무명봉(09:38)

어랴!...쌍이구먼...남진과 북진을 하는 대간꾼의 배려인가...

션한 바람의 협조가 없어서 조금은 섭섭하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초록으로 물든 청정지역을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지...

체력이 떨어지니 무거운 베낭이 어깨를 짓누른다.

등로 가운데에 선 체로 왔던 길을 뒤돌아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두타산이 얼굴을 내밀면서 한마디

툭 내볕는다...몇십년동안 산을 타면서 베낭 무게를

조절도 못하냐고 하면서 혼을 내는듯 하다

그래 맞아요...산행 짠밥이 얼마인데...아직도 버벅거리니,

이제 무거운 베낭을 내려놓을 때가 다가오는 모양이다

걷다보니 평평한 안부가 나오는데 지도상에 박달고댕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의 박달고댕은 이곳에서 조금 더 가야한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우고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라

했는데...

난 오늘 무엇을 채우고 
또 무엇을 비우야 할까...

걷고 또 걷다보니 박달고댕이라 부르는 진짜 박달령에 도착한다

박달령(朴達嶺:10:05)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밝달”에서 온 말로

“밝”은 광명을 비추는 높고 큰 산을 의미하고 “달”은 산과 들을 뜻하는 말로 청옥산과

두타산을 향하여 광명을 주는 맑고 큰 산이라 하여 두 산을 연결하는 안부를

박달령으로 부른 것이라 하는데 정확치 않다.

 

청옥산과 두타산의 중간에 위치하며, 무릉계곡의 박달폭포로 내려서는

분기점이기도 하며, 삼거리에는 너른 쉼터가 있고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다.

박달골과 박달폭포의 뒤편 고개를 뜻하며, 박달고댕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댕이'는 '고개'의 강원도 방언이다.

 

또 다른 유래로는 산이 험하고 박달나무가 많았다 하여 박달고개라 한다.

박달재 이정표

박달령 코스 2- 10

이정표(←청옥산 1.4km, →두타산 2.3km, ↑ 무릉 계곡 관리사무소 5.6km)가 있고...

무릉계곡 방향은 등산로 폐쇄되어 출입 금지 팻말이 보인다

박달령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마루금을 이어 가는데...

연칠성령 2.5km라 적혀있는 이정표가 길을 막는다...트랙상의 원 마루금은

이정표 뒷쪽으로 이어지나 현지에서는 좌측의 사면길로 등로를 안내한다

이정표를 따라서 사면길로 향하는데...

오룩스맵에서는 등로를 이탈했다는 멘트가 계속 흘러나오다가

이제는 지쳤는지 맵을 안내하는 여인의 멘트 자체가 안 나온다

잠시후에 누워있는 대리석이 있는 문바위재에 도착한다

문바위재(10:12)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 문바위골 맨 윗쪽에 있는 곳으로 이정표와 표시석,

하산금지 팻말이 있는데,  지명의 유래는 이곳에 있는 바위가  ‘문(門)을 닮은 바위’

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이곳에서 문바위골로 내려가는 계곡은

오늘 내가 걸어온 백두대간길의 좌측 계곡을 따라 번천으로 향하는 흑소(黑沼)의

발원지로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문바위재 하지않고 이곳에서 조금을 더 간 다음에

있는 능선을 문바위재라고 부른다

 

실재 트랙상의 대간 능선은 이 정표 뒷쪽 숲길이 마루금인데 올라갈 수 없다.

이곳부터는 마루금을 벗어나 한참을 돌아서 청옥산으로 향한다

실제 마루금을 한참 벗어니서 서쪽으로 가는 길에 조금씩 고도를 높힌다

가련하고 청순한 여인처럼 보이는 산꿩의 다리꽃들도 간간히 만난다

서쪽으로 계속 가다가 이정표가 있는 능선으로 올라서는 길...

바람한 점 없는 날씨에 무거운 베낭의 무게 탓인지 숨이 막힌다

번천리 갈림길(10:24)

청옥산 방향으로 이정표(고적대↑3.1km)가

남쪽으로는 하장면 번천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삼척시 하장면에 있는 번천리로 내려가는 길에는 누군가가

알바를 하지 말라고 배려를 한 듯 나무로 막아놨다.

 

번천( 番川)의 유래는  들판이 조금 넒다 하여 처음에는 벌안(伐內:버당안)이라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번천(飜川:番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하장면의

동부에 위치한 산간마을로 동쪽에 댓재, 남쪽에 황장산, 서쪽에 화차봉이 있다.

흑소(黑沼)에서 발원한 번천이 남쪽으로 흘러 숙암리로 들어가며, 도화곡, 흑소,

운무곡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천근만근이 되는 무거운 발길...그러나 걸을 수 있다는게 어딘가...

이곳에서 다시 트랙상의 마루금에 복귀한다

문바위재?(10:46)

너덜길을 지나 우측으로 꺽어지는 고개에 오르는데 지도상에는

이곳을 문바위재라고 표기를 해놨다... 조금전 문바위 뒷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original 마루금의 문바위 윗쪽이라 그리

부르는 모양이나 대부분의 대간꾼들은 지나온 곳이 문바위재로 알고 있다

세속에서 답답함을 해소하기에는 산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

편하면 편한데로 힘들면 힘든데로 喜悅을 느끼면서 청옥산으로 향한다

청옥산을 향하는 길에는 노루오줌풀이 산상화원을 이루고 있다

청옥산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50m전방인 학등에 도착한다

이정표가 있고, 우측으로 무릉계곡으로 이어지는 곳에

등산로가 폐지되었다는 경고 팻말이 보인다

학등(鶴嶝:11:02)

청옥산 정상의 50m전 지점에 학등이란 팻말이 보이고 무릉계곡으로

이어지는 하산길인데 멀리서 이곳을 보면 학(鶴)의 등처럼 보인다고 해서

학등이라 부른다고 한다

산이 주는 여유로움이 이렇게도 좋은데, 내 몸뚱아리는 생각과

따로 놀고 있으니 우짜면 좋노...

청옥산 가는 정상 직전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샘터 0.11km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마음 같아서는 지고가는 물도 버리고 싶으나, 앞으로의 일이

우찌될 지 몰라서 무거운 베낭을 메고 이곳까지 왔다

천신만고 끝에  청옥산 정상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고, 온갖 잡목에

가려진 청옥산 정상은 두타산에 비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지

명성에 걸맞지 않게 홀대받는 느낌이다

청옥산(淸玉山:1,407.2m:11:04~07)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타산,

고적대와 함께 '해동삼봉'으로 불리는 산으로 정상에는 잡목이 무성하며, 2개의

정상석과 무인산불 감시초소와 4등 삼각점과 이정표 등이 있는데, 청옥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청옥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청옥'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보석으로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을

상징하는 일곱가지 보석(七寶)중 하나로 일곱가지 보석은 금, 은, 수정, 적진주,

마노, 호박 그리고 청옥이다...그러니 청옥산은 곧 극락이다. 이 땅에 있는 극락의 세상이다.

 

한 정진의 길, 수행의 길…,하지만 이 길은 또한 역사의 피비린내를 맡아야 하는 아픔의

길이기도 한데, 대동여지도와 여암 신경준선생이 저술한 산경표에는  두타산으로 표기

되어 있고 지금의 두타산보다 50m 높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보석 중 하나인 청옥에서 온 지명이라 하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유생들이 의병들의 정신이 죽지 안했다는 뜻으로 “청옥산”이라 했다고

하기도 하고 동해시 쪽에서 바라보는 산세가 “푸르다”:고 하여 청옥산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청옥산 주봉에 있던 소나무는 임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 하기위한

대들보용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나무는 한 그루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산 아래 샘이 있고 정상부는 넓은 공터가 있어 고적대와 함께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고

있는 곳이 이곳 청옥산 정상이다

조선후기 지리학자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1804~1866)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두타산과 청옥산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청옥산-두타산- 쉰음산으로 연결되는 산맥을 햇대등 이라 한다.

횟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인데 햇대라 했는데, 햇대등에서는 청옥(靑玉)이라는 약초가

많이 생산되므로 청옥산(靑玉山)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삼척시지(三陟市誌) 에 의하면 청옥산 주봉의 소나무는 1865년(고종 2)에 경복궁을 증건할 때

가장 적합한 동량재(棟粱材: 한 나라나 집안을 떠받들어 이끌어  젊은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로 사용되었으며, 서울까지 운반할 때는 뗏목을 만들어 골지천(骨只川)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553(명종 8)에 경복궁 화재가 났을 때에도 10월에서 다음 해 7월까지 영동지방

각 읍(邑)의 백성과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중봉리 소나무 300주를 베어서 서울의 마포(麻浦)까지

수송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북쪽으로는 고적대, 동으로 두타산과 연결되어 있는 해동 삼봉(海東三峰)중의

하나로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청구도(靑邱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등장하는 산이다

 

청옥산과 두타산을 걷다보면 ‘李承休’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약 700여 년전인 고려 충렬왕 때 直言과 罷職(파직)을 거듭하면서 帝王韻紀(제왕운기)를

집필한 인물로, 상, 하권으로 구성된 제왕운기는 상편은 帝를, 하편은 王을 언급하고 있다

.帝는 중국의 황제, 王은 고려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니 상편은 곧 세계사이며 하편은 국사인 셈이다.

우리나라가 중국과는 구분되는 독립국가임을 천명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승휴는 하편에서 우리 민족은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신화로 전승된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편입시켰으며, 특히 발해를 최초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여

만주 일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영토회복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중국이 최근에 이르러 동북공정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발해뿐만 아니라 고구려마저도 자기들

역사라고 우기지만 이미 700여 년 전에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이승휴의 안목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대간 관점에서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백두와 지리를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또 하나 이승휴는 親家가 경상도 경산임에도 外家에

머물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했다는 점이다.

 

이승휴의 외가가 강원도 삼척이며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 여기 청옥-두타 아래

흐르는 무릉계곡인데, 청옥-두타가 대간의 중요 부분임을 감안하면 이승휴가 여기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것이 예사롭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풀섶에 숨어있는 청옥산 정상 삼각점(△임계 422 / 2005 재설)

이곳까지 오면서 체력 저하로 인해서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초과되어 이기령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지만, 차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때 생각하기로

하고 청옥산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난다

마귀할멈의 똥꼬?

내리막길에는 구조이정판이 자주 보인다

구조이정판 2번째를 통과하고도 계속 내려간다

참!...곱다

탄수화물을 섭취하지 못하고, 주로 마시는 걸로 체력을 유지하니

몸뚱아리가 힘에 부치는지 내리막길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진다

산상화원을 이루고 있는 노루오줌꽃이 한마디 툭 내볕는다.

세상사 어디 쉬운게 있었던가요?

70 평생을 사신 분이 새삼스럽게...요런걸 가지고 힘드냐고

힐난을 한다

안부(11:20)

비가 온 후라서 그런가...철이른 노루궁뎅이 버섯이 보인다

연칠령성을 향하는 완만한 오르길이 시작된다

 들꽃의 노래 / 정연복


유명한 이름은
갖지 못하여도 좋으리


세상의 한 작은 모퉁이
이름 없는 꽃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몰라봐도 서운치 않으리


해맑은 영혼을 가진
오직 한 사람의
순수한 눈빛 하나만
와 닿으면 행복하리


경탄을 자아낼 만한
화려한 꽃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소박한 꽃과 향기로
살며시 피고 지면 그뿐


장미나 목련의 우아한 자태는
나의 몫이 아닌 것을
무명(無名)한
나의 꽃, 나의 존재를
아름다운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리

힘들면 힘든대로 뚜벅뚜벅 걷다보니 연칠령성에 도착한다

연칠령성(連七星嶺:1,224m:11:45)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과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을 이어주는 고개로, 

고적대(1,357.0m)와 청옥산(1,407.2m)의 중간쯤에 있으며, 정상에는

돌탑과 이정표, 연칠령성 안내 유래판이 있으며, 우측으로는 하산

주의 경고판이 있으며, 백두대간 당일치기 하는 산꾼들이 무릉계곡으로

하산하는 중간 기착이기도 한 곳으로 지명의 유래는 청옥산과 망경대 사이에

북두칠성처럼 이어진 고개라는 뜻이다도 하며...

 

다른 일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 개의 봉우리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하는데,

무릉계곡에서 문간재(신선봉 갈림길)를 넘고 호계를 지나 막다른 골짜기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넘나 들기가 험난하여 난출령(難出嶺), 고고험(鼓高險)

이라고도 불려 왔다.

연칠령성 정상을 지키고 있는 돌탑

대동여지도에서 말하는 아곡천(阿谷川), 즉 지금의 하장면 중봉당골(中峰唐谷)에

이르게 되는 산마루가 연칠성령으로, 넘나들기가 험준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고

하며, 동여도에는 고고험(鼓高險)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연칠령성의 윗쪽

봉우리가 택당(澤堂) 이식(李植)선생이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망군대이다

연칠령성 안내판에 의하며 예로부터 삼척시 하장면과 동해시 삼화동을

오가는 곳으로 산세가 험준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 불렸다.

 

이 난출령 정상을 망경대(望京臺)라 하는데, 인조 원년 명재상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였을 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사모하여 망경(望京) 한 곳이라 전해진다

綠陰芳草로 뒤덮인 등로를 따라서 고적대로 향한다

1,243.1m봉(11:50)

트랙상의 대간 마루금을 벗어나서 사면길로 이어지는데

우측의 암릉 방향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나 편한 사면길로 향한다

등로옆에 있는 기린초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컨디션으로 고적대를 넘을 수 있을라나...

잠시 편안한 사면길로 걷다보니...

 망군대 아래의 조망바위에 도착한다

조망바위(11:54)

조망바위 우측 위에 있는 암릉이 망군대인데, 너무 힘들어서 눈팅이만 한다

망군대(望君臺:1,244m)는 연칠령성에서 고적대로 가는 길에 있는 암봉으로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와 동해시 삼화동의 경계에 있는데 지명의 유래는

조선조 16대 임금인 인조 원년(1623년) 때 택당(澤堂) 이식(李植) 선생이 낙향하여

중봉산(삼척시 하장면 소재 ) 단교암(斷橋庵)에 기거할 때 이곳에 올라 서울(한양)을

사모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해서 망경대(望京臺)라고도 불렀으며, 지금은 "서울에 계신

임금을 바라 보았다" 하여 망군대(望君臺)라고도 부르는데, 망군대는 연칠성령의 또 다른 이름이다

 

* 이식(李植:1584~1647)선생은 조선 중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로 주자학을 정도()로 신봉한

  중세 봉건시기의 전형적인 지식인으로서 유가()의 현실긍정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의 시는 각 체에 모두 능숙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직서적인

것이 많은데,  그는 고체()에 능하였다고 하나 오언율시에 특색을 발휘하였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中峯里)계곡의 모습

삼척시 하장면에 속해있는 중봉리(中峯里)는 이 지역의 중앙에 망주봉(望柱峯)이

있어서 본래 주봉동(柱峯洞)이라 불렀다가 이것이 와전되어 중봉(中峯)이 되었다.

 

하장면의 북부에 위치한 산간 마을이며 고적대가 동쪽에 높이 솟아 있고 그 남쪽에 청옥산과

두타산이 위치하며, 서쪽에서 발원하는 중봉천은 남류하여 갈전리로 흘러들어 가는데

사곡, 김천, 당곡, 기곡, 음기, 간평, 후평, 마전곡, 청룡내 등의 자연부락이 있으며

고적대의 연칠성령, 청옥산, 두타산 등은 봄, 가을로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조금전에 지나온 청옥산은 한없이

온화한 울 엄니의 품안처럼 포근하고 자애로운 모습이다

지나온 청옥산과는 달리 잠시후에 오를 고적대의 까칠한

모습은 지쳐있는 범여의 氣를 완전히 꺽어버리는 느낌이다

예전에도 이곳을 여름에 걸었을 때, 춥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는데, 오늘은 바람한 점 없는 날씨에다 편안한 사면길을

걷는데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정표( ←고적대 0.5km, →연칠성령 0.5km)가 있는데 

고적대와 연칠령성 사이의 딱 중간 지점으로 서서히

고적대를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무명봉(12:15)

밋밋한 봉우리에 산림청에서 설치한 산림욕 안내판이 있고

좌측으로는 하장면 중봉리로 내리가는 흐릿한 등로가 보이는데

앵초와 노루오줌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등산로 구분이 잘 안된다

안부(12:18)

안부 우측으로 보이는 갈미봉...

고적대를 지나서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자꾸만 겁이 난다

비온 뒤의 산 능선에는 높은 습도에다 바람한 점이 없는 탓인지 멋지게

보여야 할 능선들이 모든게 흐릿하게 보이니 내 마음도 탁해지는 느낌이다.

 

무릉계곡의 삼화사를 外護하고 있는 등로 우측으로 보이는 능선은 백두대간

갈미봉에서 느루봉(1,142m), 문수봉(643.5m), 철산(467.5m)으로 이어져

동해바다로 향하고 있는데 肉眼으로는 비교적 뚜렸하나, 똑닥이 카메라의

렌즈로는 동해바다가 보일락말락 하니 답답하다

고적대를 행하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연칠성령 코스 4-13

이정표(←고적대 0.3km, →연칠성령 0.7km)가 있는데, 0,3km

남았다는 고적대의 거리는 별 의미가 없다...거의 직각으로

곧추선 등로에다, 습한 날씨 탓인지 수술 부위의 통증이 시작되는데

참을 수 없는 고통...하는 수 없이 베낭을 내려놓고, 아스피린 2알을

한 입에 털어놓고 통증을 가라 않기를 기다린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걸을때 마다, 숨이 끊어질듯한

통증이 수반되지만, 그렇다고 누가 대신 걸어줄 것도

아니고, 힘들지만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고적대로 향한다

太山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다 보면 끝이 보이겠지...

안부(12:45)

암릉에 올라서서 이곳이 고적대 정상인줄 알았는데

또 더 가야 하는구나...끝나도 끝이 아닌 모양이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올라서니 고적대 전위봉이 나온다

고적대 정상 직전의 봉우리에 오르면서 조금전에 걸었던 능선을 뒤돌아 본다

맨 뒷쪽의 두타산과 가운데의 두리뭉실한 청옥산...이곳 고적대를

합쳐서 海東三峯이라고 부른다

중봉리 계곡 너머로 보이는 능선이 지난해와 올 봄에 참으로 힘들게 걸었던

지장(신산경표상:노목)지맥과 어천(신산경표상:금대) 지맥이 아련하게 보인다

저 힘든 오지도 걸었는데, 대간길이야 저기에 비하면 고속도로인데, 오늘은

컨디션 조절을 하지 못해서 개고생을 한 셈이다

능선 북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의 끄트머리에는

설악산이 흐릿하게 보이지만 워낙 遠景이라 구분이 잘 안된다

고적대 전위봉에서 고적대 정상으로 향한다

동남쪽으로는 名刹 삼화사를 품고있는 무릉계곡 너머로 보이는

동해 시내와 동해바다는 미세먼지 탓인지 사물 구분이 힘들다

가야할 갈미봉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갈미봉에서 이어지는

느루봉 능선은 동해바다로 입수할 준비를 하지만, 대간길이

아니니 갈 일은 없다

고적대(高積臺:1357.3m:13:05)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와,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 동해시 삼화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 고적대는 동쪽으로 뻗혀진 청옥산, 두타산이 아울러 해동삼봉(海東三峰)이라

일컬어지며, 신선이 내려와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으로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수계(水系)는 전천(箭川)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임계천(臨溪川), 남서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골지천(骨只川)으로

각각 흐르는데, 동쪽 비탈면은 급경사를 이루나 국민관광지 제1호로로 지정된

무릉계곡으로 이어져 경관이 수려하고, 서쪽 비탈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다.

고적대 정상 삼각점(△ 임계 306 / 2005재설)

빛바랜 고적대 안내판과 고적대 코스 5- 10, 이정표(← 백봉령, 무릉 계곡 관리사무소 7.7km,

두타산 6.0km, 청옥산 2.3km가 있고, 안내판 좌측으로 대간길에서 갈라지는

분맥이나, 단맥이 있는 능선인지 좌측 방향으로 우리나라 맥꾼들 사이에 전설(?)로

통하시는 竹泉선생의 시그널이 보이는데, 대간길에서 갈라지는 분맥이나 단맥인듯 하나

자세히는 모르겠다 

인증샷

오늘은 참으로 힘들게 산행을 하는 듯 하다...예상시간보다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길을 나선다

저 경고판과 나와는 상관이 없다...신경을 끄고 내려간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우측의 무릉계곡 방향은 천길 낭떠러지... 발한번

삐끗하면 황천가는 지름길처럼 보인다

책바위일까...시루떡 바위일까...나도 몰러...

안부(13:15)

이제 내리막길은 거의 다 내려온 느낌이다

갑자기 나타난 편안한 대간길...저수령 이후부터 북쪽으로는

대간길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점점 등로는 野性을 잃어가는

느낌이지만 오늘의 나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반갑기만 하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대간길을 따라서 걸어가는데 

등로 사이로 보이는 갈미봉이 엄청나게 압박으로 다가온다

장아리 갈림길(13:20)

좌측으로 뚜렸한 내리막길 등로가 보이는데 지도를 보니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 장아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쉼터(13:21)

쉼터 뒷쪽으로는 멋진 조망바위가 있다

저 바위에 올라서면 해동삼봉이라 부르는 고적대, 청옥산,

두타산이 한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정말 멋진 곳이다

쉼터의자를 지나 우측의 조망바위로 올라가는 길에는

등산로 폐쇄구간이란 팻말이 보이고, 흐릿한 등로로

보아 지금은 대간꾼들이 잘 가지 않는 모양이다.

컨디션이 좋았으면 氣를 쓰고 올라갔을텐데 오늘은

올라가라고 고사를 지나도 안 갈끼다

우리동네 뒷산인 대모산 둘레길 걷듯이 잠시동안 편안한 길을 걷는다

1,220.8m봉(13:33)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 등장하는 족보있는 봉우리이건만

등로를 깍아버려 봉우인지 확인조차 어려운데, 무영객님께서

시그널 하나가 족보있는 봉우리임을 알려준다

이런 곳에서는 정상적인 산행 속도가 나오는데

잠시후에 고적대 삼거리에 도착한다

고적대 삼거리(13:37)

다리가 풀려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다...이곳에서 이기령까지

가서 다시 이기마을까지 내려 가려면 현재의 컨디션으로는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4시간 이상 걸릴듯 하고, 오름 내림이 있다.

 

이곳에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서 무릉계곡 관리사무소까지 가는 길도, 

6.5km거리라 그리 만만치는 않으나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라 이 길이

편할 듯 하여 이곳에서 과감하게 대간길을 접고 우측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이기령까지 가려는 맘을 먹었지만 컨디션 조절의

실패로 이곳에서 마감하면 담에 6여km의 대간길을 걸으려고

교통비와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나 생각을 해봤지만,

산에서는 상황이 어찌될지 몰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과감히 포기한다

등로는 희미하나 잡목의 저항이 별로없는데다가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라 체력 안배를 하면서 천천히 내려간다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갈미봉에서 느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방불케하는 멋진 코스이다

구조이정 표시판이 보이니 제도권 등로인가?

스마트폰의 트랙을 확인하는데 이곳은 통화불능지역으로

나오지만 오랜 산행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조심스레 내려간다

날씨가 습하고 바람조차 안 불어주니 그 많던 생수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지금부터 목이 말라도

왠만하면 참아가면서 생존을 위한 생수 조절에 들어간다

등로는 희미하나 이곳으로 내려간 산꾼들의 띠지가 보여서 조심스레

내려가는데 최근에 온 비의 영향인지 등로는 상당히 미끄럽다

계속해서 통화불능 지역 표시는 뜨고....

암봉(13:58)

까칠해지는 등로...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5-4번도 지나고...

5-3번도 지나 꽤 많이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안 보이는구나

암봉(14:28)

조심스레 암봉을 내려서니...

묵은 묵밭이 나오고 잠시후에 연칠령성으로 이어지는

바른골에서 내려오는 등로가 만나는 사원터에 도착한다

사원터(15:05)

지도상에는 사원터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인데 ‘동해시 무릉계곡 대피소’라고 

표기가 되어있고, 이곳에서 연칠령성에서 내려오는 등로를 만나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간다

‘동해시 무릉계곡 대피소’를 지나자마자 무릉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청옥산과 연칠령성, 고적대 삼거리 갈림길에서 비가 올 때는 이곳으로

하산로를 잡자 말라는 경고 문구의 뜻을 알 것만 같다

비가 많이 올 때는 계곡물로 인하여 상당히 위험할 것 같다

무릉계곡 주변의 멋진 기암괴석들...왜 이곳이 무릉도원인가 알려주는 듯 하다.

도연명(陶淵明:365~427)이 꿈꾸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이런 곳이었을까.

이런 이상향(理想鄕)의 세계를 서양에서는 유토피아(Utopia)라 불렀던가...

*무릉도원(武陵桃源) 이란

 도연명(陶淵明) 《도화원기(桃花源記)》 나오는 가상의 선경(仙境)으로 

 중국 후난성의  어부가 발견하였다는복숭아꽃이 만발한 낙원이다.

 ‘별천지(別天地)’ ‘이상향(理想鄕)’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계곡물길 옆을 따라서 무릉계곡을 내려간다

무릉계곡 옆의 계단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뒷쪽에서 사람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대구의 모 산악회에서 오신 분들이 나를 추월한다

어디서 오시는지는 몰라도 발걸음이 상당히 가벼워 보이는데 참으로 부럽다.

난 지금 파김치처럼 죽을 맛인데...

안부에 도착하고 우측의 철계단 방향으로는 학등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기가 되어있고, 죽어나 사나 무릉계곡 대피소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이정표를 보니 아직도 3.2km나 남았다고 하니 다리에 힘이 빠진다

그래...이제 거의 평지 가까이 내려왔는데 죽기야 하겠는가!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안부가 나오는데 문간재란다.

문간재(15:50)

옴팍파인 문간재 우측으로 50m지점에 신선봉이 있다는데

어차피 다음에 한번 더 와야 하기에 오늘은 눈팅이만 하고

그냥 통과한다

문간재를 지나니 급경사의 철계단이 나오는데 오금이 저릴 정도이다

안부(15:58)

우측으로 가면 용추폭포가 나오는 곳이지만 그냥 계곡을 따라서 내려간다

삼화사로 이어지는 편안한 등로로 내려서는데 고적대삼거리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면서 고도를 1,000m 이상을 낮춘듯 하다

 

무릉 구곡중에 제6곡인 수류천 안내판이 보인다

무릉구곡은 이곳 동해 출신인 조선시대 유학자인 최윤상(1810∼1853)이

35세 되던 1844년(헌종 10년) 부친의 뜻에 따라 청옥산 아래에 들어가

무릉계 시냇가에서 독서하며 무릉계곡 호암소부터 용추폭포 구간 중 9곳을

무릉구곡으로 정하고,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로 무릉구곡가를 지었던 곳으로

구곡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몸과 마음을 쉬고 달래는 휴양지이자 힐링지이기도 했다.

 

1곡 맹호암(猛虎巖), 제2곡 와룡추(臥龍湫), 제3곡 학소대(鶴巢臺), 제4곡 운영교(雲影橋),

제5곡 방화계(訪花溪), 제6곡 수류천(隨柳川), 제7곡 함월지(函月池), 제8곡 낙하담(落霞潭),

제9곡 영귀탄(泳歸灘) 인데, 원문과 해설이 담겨 있는 안내판이 보인다.

동해 무릉계곡은 동해시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호암소에서 시작해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 약 4km에 달하는 계곡으로, 맑은 계류와 소(沼),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계곡이다. 무릉계곡이라는

이름은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며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그 풍광이 빼어나 무릉도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계곡의 입구를 들어서면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학소대, 옥류동, 쌍폭포, 용추폭포 등 수려한 풍광과 마주하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동해안 제1의 산수’라고 칭송했다고 하며, 이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위해 예로부터

많은 명인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고려시대 이승휴가 이곳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했고, 조선시대 4대 명필 중 한사람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 풍광을 찬미한 글을

지어 각서했다.

이곳은 비가 별로 오지 않았는지 무릉계곡의 水量은 많지 않다

제5곡 방화계(訪花溪:16:05)

철다리를 지나니, 베틀바위 전망대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베틀바위 전망대 가는 갈림길(16:12)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인데 산행의 끄트머리는 보이지 않는구나

거제사터는 좌측 위로 200m지점에 있다고 한다

제4곡 운영교(雲影橋:16:21)

관음폭포가 있다는데 내가 잘못 본 건지 폭포는 보이질 않는구나

쉼터(16:27)

쉬엄쉬엄 걷다보니 학소폭포가 있는 학소대에 도착한다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 건폭(瀑)이 되어버린 학소폭포의 모습

제3곡 학소대(鶴巢臺:16:32)

『척주지』에 게재된 「두타산기(頭陀山記)」에 "동대사를 지나자 암벽에 바짝 붙어

기어 올라가야 해서 두 발을 나란히 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이에 학소대에서 쉬었다.

이곳에 이르니 산의 기세가 더욱더 우뚝하고 높고 험하여 해가 높이 올랐는데도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고 있었다. … 앞산 봉우리에는 옛날에 학의 둥지가

있었으나 학이 날아오지 않은지가 60년이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에서 학의 둥지와 관련해서 이름이 생겼음을 엿볼 수 있다.

동골에서 흘러 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날 때 폭포를 이루는데 학소폭포라 한다.

관음암(觀音庵) 갈림길(16:40)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에 속해있는 삼화사(三和寺)의

부속암자로, 「관음암중건모연기(觀音庵重建募緣記)」에 의하면, 918년(태조 1)

용비(龍飛)스님이 창건하여 오랫동안 지조암(指祖庵)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6·25 때 회진된 것을 1960년 유해룡(兪海龍)이

삼화사(三和寺)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부인신도회(婦人信徒會)를 만들어서 시주를

얻어 중건한 뒤 관음암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현재 비구니들의 수도처로 사용되고

있다...현존하는 당우로는 인법당(因法堂)과 요사채가 있고, 주변에 소나무와 암벽,

그리고 폭포가 있어 경관이 매우 좋으며, 특히 계곡 건너편 산을 바라보는 전망이 뛰어나다.

 

관음암 갈림길을 지나면서 우측의 계곡으로 내려가서 깔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에 메모해 온 동해택시 전화번호로 택시를 호출하고 삼화사 방향으로 향한다 

잠시후에 삼화사 담벼락이 보이고...

계단을 따라서 삼화사 절집 마당으로 내려간다

수륙재()로 유명한 삼화사는 다음 구간에 찬찬히

구경하기로 하고 삼화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삼화사(三和寺:17:20)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642년(선덕여왕(11) 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黑蓮臺)라 하였다.

삼화사는 인근 천은사, 영은사, 지상사 등과 더불어 영동 남부지역의 중심 사찰로 선종의

종풍을 가진 깊은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삼공암, 측연대, 중대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사찰과 관련하여서는 세가지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삼화사사직> <진주지>

등에 의하면,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지장율사가 흑연대를 창건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한편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말 굴산사의 개창주인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척주지>에는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범일국사가 산에 들어와

불사를 지어 삼공암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과 아울러 현존하는 유물들을

감안하면 삼화사는 대체로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고려 태조 때에 와서 삼화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삼공암에서

후삼국 통일을 빌었으며, 삼화사라는 이름은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는 뜻이다. 


이 사찰은 본래 동쪽 약 1.3km의 반릉 부근에 있었던 것을 무릉계곡 내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여러 차례 화재로 인한 소실과 중창을 거듭한 삼화사는 1905년에 삼척지방

의병들의 거점으로 이용되었으며, 1906년에 일본은 의병의 거점 파괴라는 이유를 붙여 대

웅전, 선당 등 2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 이듬해인 1908년 대웅전. 요사채. 칠성당 등을 다시 건립하여 유지해오다 197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지금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범종각, 육화로, 천왕문, 요사채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문화재로는 삼층석탑과 철불, 목조지장보살상, 부도 및 비가 있다.

동해시종합버스터미널(18:00)

서로의 의사 통행이 제대로 안된 탓인지 생각보다 삼화사 주차장에 택시가

늦게 도착하고, 택시를 타고, 동해 터미널에 도착하니 저녁 6시다...

힘들었지만, 억지로 한구간을 마쳤지만, 뭔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이다.

다음 구간에 6km정도의 대간 마루금을 와야 한다고 좀 억울한 면도

있었지만, 편하게 땜방을 한다고 마음을 먹고 표를 예매하러 대합실로

향한다

잠깐동안 밍기적거리는 사이에 18시에 서울 강남으로 가는 고속버스는

놓치고, 그 다음차는 동서울로 가는 18:45분 버스가 있고, 19시에

강남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데, 2군데 다 좌석이 많다고 한다.

우선 대합실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컵라면에다 김밥한줄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강남가는 버스표를 예매하고는 30여분간 대합실 의자에서

꿀맛같은 쪽잠을 잔다

동해발 → 서울행 버스표

삼척에서 출발하여 동해를 거쳐가는 버스인데 좀 편하게 가려고 

오랫만에 프리미엄 버스를 탔는데 날씨 탓인지 손님이라곤

대여섯명 밖에 없다...너무 피곤하니 잠도 오지 않는다.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면서 멍때리기를 하고 있는데,

대관령을 지나서 평창을 통과할 즈음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는 서울에 도착하니 더 굵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