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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금북정맥 (終)

금북정맥 제1구간 - 칠장사에서 배티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0. 9. 6.

 

1. 산행지: 금북정맥 제1구간(칠장산~칠현산~덕성산~옥정재~배티고개(이티재))

2. 산행일시: 2010. 09. 05(일) 

3. 날씨: 아주 덥고 퇴악볕에 엄청 고생이 심했음. 오후 4시 이후에는 폭우로 인해 새앙쥐꼴

4. 위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금광면.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이월면, 백곡면.

5. 도상거리: 약18.8km(실거리 약22.0km)

6, 시간: 약 6시간 30분소요

7. 주요지점 시간: (10:30)칠장사-(10:45)3정맥(한남금북,한남,금북정맥) 분기점-(10:50)칠장산-(11:05)

                        칠장사 갈림길-(11:10)헬기장-(11:15)중고개.칠순비부부탑-(11:20)칠현산-(11:30)곰림정상 표지석-(11:40)

                        송전철탑 임도-(11:50)덕성산갈림길-(11:55)덕성산-(12:00)454.6봉-(12:15 점심식사)무티고개-(12:45)

                        사장골 정상-(13:05)무이산 갈림길-(13:30)-만디고개-(14:10)고라니봉-(14:30)옥정재-(15:00)

                        409.9봉-(16:00)송전철탑-(16:17)철판 헬기장-(16:30)중앙CC 후문-(18:00)배티고개

 

 거의 1년반만에 토욜 저녁 집에서 잠을 청한다. 이제 정맥길도 호남정맥을 빼놓고는 서울근교에

있는 정맥길은 거리가 가까워 무박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9월부터는 충청도를 가로 지르는 금강

이북에 형성되어 있는 금북정맥(錦北正脈) 산행을 시작했다.

 

금북정맥은 경기도 안성과 충북 진천의 경계에 있는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충남 태안반도의

안흥만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280여km(실제거리 약 400여km)를 14번에 마치는 코스이다.

참으로 사람의 습(習)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인가보다. 1년이상 매주 토욜 저녁에 베낭을 매고

집을 나서다가 처음으로 토욜에 집에서 잠을 자니 새벽 2시경에 잠을 깨어 뒤척이다가 아침 5시반에

베낭을 매고 집을 나선다. 그러다보니 머리는 무겁고 띵하고 아프기만 하다.

 

태풍이 오고 비가온다는 예보로 인해 식수의 양을 줄이고 베낭을 최소한 가볍게 집을 나섰다.

요즘 벌초시즌이라 그런지 고속도로는 말그대로 주차장이다. 남안성I.C를 빠져나와  칠장사에

도착하니 10시 반이 지났다. 칠장사 해우소에서 느긋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칠장사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오랫만에 고두 삼배의 예를 올리고 칠장산을 오른다.

칠장산 정상에서 무사산행 기원제를 올리고 산을 출발하는데 일기예보와는 달리 폭염을 방불케하는

퇴악볕이 산꾼을 괴롭힌다. 이 지역은 좌측에 충북 진천과 우측에 경기도 안성의 경계로 하는

마루금을 타고 고도 편차는 별로 없다. 숲이 우거져 있긴 하지만 땅에 올라오는 높은 습도와 지열은

장난이 아니다. 1시간에 걸쳐 덕성산에 도착하니 벌써 식수가 달랑달랑 거린다.

 

최대한 아끼면서 버텨보려고 하지만 자꾸만 몸의 온도는 오르고 거기다가 땀은 비오듯이 흐르고...

도저히 참을 수도 없고해서 454,6봉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션한 막걸리를 마시고나니 조금은 났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잠을 제대로 못잔 휴우증이 슬슬 나타난다. 다리가 너무 무거워 걸을수가 없다.

사장골 정상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분다. 염체불구하고 산꾼들이 너나없이 바지를 내리고 풍욕을 즐기면

땀으로 범벅이 된 젖은 옷을 말린다. 잠시나마 훨씬 낫다. 고라니봉을 지나 급경사의 내림길을 내리니

 저 아래 차량소리가 들린다. 옥정재이다. 선두에서 무전이 온다. 옥정재 공사장에 식수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후 3시 옥정재에 도착한 산꾼들 중에 더위를 먹어서 완주를 포기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아마 나도 식수를 못구했어면 중도 탈락이라는 가문의 불명예(?)를 남길뻔 했다.

 

아직도 8.3km나 남았기에... 식수를 보충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배티고개를 향하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컴컴해진다. 저 아래 천룡C.C는 주말 플레이어들이 라운딩을 즐기고...

4시가 지나면서 비가 쏟아지면서 빗방울이 굵어진다. 카메라를 비롯한 전자기기만 없다면 그냥

허벌나게 맞고 싶지만 어쩔수없이 우의를 입고 다시 출발한다.

 

헬기장을 지나고 장고개를 지나니 예전에 참으로 많이 다녔던 중앙C.C가 나타난다. 

골프장 관리인이 난리 부르스를 친다. 이보시게 담번엔 베낭이 아닌 골프빽을 메고옴세...

우연곡절 끝에 배티고개에 도착하니 주위는 칡흙같고 비는 폭우로 바뀐다.

금북정맥 1구간 숙제는 요렇게 끝냈다. 숙제 끝  

1대간 9정맥의 개념도

칠장사에서 배티고개까지의 지도

七長寺 一柱門(10:20)

버스에 내려 산행을 준비한다. 어제 마신 곡차로 인해 아랫배가 살살 아파와서 우선

입구 해우소에서 느긋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칠장사 내부를 관람한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2교구인 수원 용주사의 말사인

칠장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절집이다. 멀리는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버림받은

궁예가 어린 시절에 활쏘기를 연마했다고 전해지며, 고려 때 혜소국사가 주변의 일곱 도적을 신통력과

감화로 도를 닦게 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곳이다.

본래는 아미산이었던 칠장사 뒷산을 칠현산으로 고쳐 부르고 절 이름도 칠장사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의적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가 머물던 곳이라는 소설의 내용도 칠장사를 품어 안고 있기도 하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청렴결백한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이곳에서 치성을 드린 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기도처로 인근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절집답게 칠장사는 볼거리도 많이 있다.
입구에 있는 철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 몇 남아 있지 않은 온전한 모습을 갖춘 철당간이며,
 천왕문 안에 있는 사천왕상은 진흙을 빚어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천왕상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빛바랜 단청이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대웅전 뒷편에 있는 꽃창살문도 빼놓지 않고 돌아보았다.

또한 나한전에는 혜소국사에 의해 현인이 되었다는 일곱 도적을 형상화한 나한들이 모셔져 있는데,

 나한들 앞에 놓인 과자와 사탕 봉지들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칠장사 천왕문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우거진 숲속의 아름다운 고찰로 국보 296호인

 오불회괘불탱과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 488호), 인목왕후어필(보물 1627호)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다.

 

경기도유형문화재에서 최근 보물로 승격된 인목왕후어필은 인목왕후(1584∼1632)가 영창대군을 잃고,

폐비의 위기에 몰려 용주사의 암자였던 칠장사로 피신해 있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오불회괘불탱은 조선시대 인조 6년(1628년) 법형이 그린 것으로 괘불(큰 법회나 의식 때 걸어놓는 대형 불교그림)함

 없이 종이에 싸서 대웅전에 보관하고 있다.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등은 17세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혜소 국사비는 안성에서 출생한 혜소

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고려 문종 14년(1060) 때 세운 비로,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이 기록돼 있다.

칠장사는 인목왕후가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절로 삼아 크게 번창했으나

이후 수많은 수난을 겪기도 했다.

 

세도가들이 이곳을 장지로 쓰기 위해 불태운 것을 초견 대사가 다시 세웠으나

 숙종 20년(1694년) 세도가들이 또다시 절을 불태웠다. 숙종 30년(1704년)에 대법당과 대청루를

고쳐 짓고 영조 원년(1725년)에 선지 대사가 원통전을 세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2동의 건물과 혜소국사탑과 탑비, 철제당간 등이 남아 있다.

안성에는 특히 미륵(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불이 많아 미륵의 고장으로도 불린다.

 

이는 미륵부처를 주불로 숭상하는 법상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현재 등록된 미륵만 18기에 이른다.

칠현산을 중심으로 곳곳에 산재해 있다. 경기도에서 가장 큰 죽산면 매산리 태평미륵과 국사봉에 자리한

삼죽면 기솔리 궁예미륵과 쌍미륵 등이 잘 알려졌다. 칠현산과 마주하고 있는 삼죽면 국사봉 궁예미륵은

국사암 석조여래입상이라고도 불리며 궁예가 좌우로 문관과 무관을 거느린 형상을 하고 있다.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는 13세까지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도 궁예가

 활 연습을 한 것으로 알려진 터가 남아 있다.

 

안성시 문화관광해설사 윤민용씨는 “미륵은 현실의 부처가 아니기에 땅에 발이나 허리까지 묻혀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며 “미륵부처의 중심지가 죽산 지역이어서 안성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미륵을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칠장사 원통전 앞에 피어있는 나리과(?) 인지 상사화인지(?) 아리까리...

정감이 가는 칠장사 대웅전 편액 

칠장사에 이야기로 혜소국사가 주위의 일곱 도적을 감화시켜서 도를 이루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의적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가 머물던 곳이 이곳 칠장사라고 한다.

그래서 갖바치가 죽은 후에 병해대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임꺽정과 갖바치에 관한 이야기도 벽화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후에 후고구려를 세우게 되는 궁예와의 관련성도 있는

절집이 칠장사라고 한다. 그래서 명부전 외벽에는 임꺽정과 병해대사(갖바치), 해소국사와

일곱도적, 궁예에 관한 그림이 삼면에 가득 그려져 있다

 

칠장사 대웅전 본존불인 석가모니불

대웅전 내의 석가모니불과 좌우협시보살, 탱화들을 사진에 담고자 오랫동안 주변을 맴돌고

서성였으나 사시예불하시는 스님의 독경과 기도가 너무 오래 계속되는 바람에 문 밖에서

겨우 석가모니불만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칠장사에 들어서는데 지금이 巳時禮佛 시각이라 그런지 스님의 낭랑한 목소리의

오분향례와 천수경 독경 소리가 너무나 반갑게 내 귓전을 때린다.

일주문에서 삼배의 예를 올리고 천왕문과 명부전 원통전을 들린 후에 대웅전에 들려

고두 삼배의 예를 올리고 나오니 동료 산꾼들이 다들 없어져 버렸다.

부지런히 칠장산을 향한다.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있는게 기원제를 올리기에 선두를

따라 잡을 수 있기에... 혜소국사비를 지나 들머리에 들어서니 키 작은 산죽들이 금북정맥

시작을 축하 하는듯 보인다. 퇴악볕이 내리쬐고 20분만에 도착하니 옷은 벌써 다 젖어버려

오늘 산행이 싶지 않음을 예감한다.

혜소국사비

  안성시 이죽면의 칠장사는 636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이지만 고려 때 절을 크게 일으킨 혜소국사의

 자취가 더 짙은 절이다. 대웅전의 뒤편에 서 있는 혜소국사비는 보물 제48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데

대각선으로 잘려진 흔적이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오 기오마사가 이 절을 습격하였을 때

당시 노승이 크게 꾸짖자 가토오가 칼을 빼 들고 노승을 쳤는데 노승은 사라지고 대신 이 비가

칼을 맞고 피를 흘려 가토오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쳤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비신과 귀부와 이수가 분리된 혜소국사비 역시 칠장사에서 빼놓을 수없는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금북정맥 시작을 알리는 기원제

태안반도 안흥만까지 무사산행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올리고 산행을 시작한다.

칠장산(492.4m 11:00)

칠장산(七長山)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금광면·삼죽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가 492m이다.

산기슭에 있는 칠장사와 칠장사 주변의 울창한 숲으로 유명하다.

덕성산(519m)·칠현산(516.2m)과 능선으로 이어진다.

 

금북정맥(錦北正脈)은 이 산에서 시작하여 천안 흑성산(519m), 아산 광덕산, 청양 일월산(560m),

예산 수덕산(495m)과 가야산(678m), 홍성·보령의 오서산을 거친 뒤 다시 서해를 바라보며 북상해

서산 팔봉산(362m)과 백화산을 거쳐 태안반도의 지령산(205.9m)을 지나 안흥진에서 끝을 맺는다.

 

금북정맥은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산경표(山經表)’라는 산맥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고서에 나온 명칭으로 태안반도(泰安半島)의 안흥진(安興鎭)까지 금강의 서북쪽을 지나는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길이는 약 240km이며, 한반도 13정맥의 하나이다.

한남정맥(漢南正脈)도 이곳 칠장산에서 시작하지만 도덕산(道德山, 661m)과 함박산으로 이어지는

역시 한반도 13정맥의 하나이다.

 

칠장산에서 서쪽은 안성시 삼죽면(三竹面)·금광면(金光面), 북쪽은 일죽면(一竹面)·용인시 백암면(白岩面)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쪽은 충북 음성군 삼성면(三成面), 남쪽은 진천군 만승면(萬升面)을 바라 볼 수 있다.

충청북도와의 경계를 이루는 차령산맥에는 서운산(瑞雲山, 547m)을 최고봉으로 500m 안팎의 산지가 솟아 있고,

이 산맥 중의 덕성산(德成山, 519m)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칠현산(七賢山, 516m)·칠장산(七長山, 492m)·도덕산(道德山, 366m) 등이 솟아 있으며, 이들 산지가 형성하는 능선을 따라 안성시는 동서 2개의 지형구로 나누어진다.

 

정리하자면 칠현산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의 끝나는 지점이지만 칠장산은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태조산(太祖山)격인 충북 속리산으로 뻗어나 있다.

서남쪽으로 뻗어 청룡산(靑龍山:400m)·성거산(聖居山:579m)·차령(車嶺)·광덕산(廣德山:699m)·차유령(車踰嶺)·

국사봉(國師峰, 충남) 등 충남을 가로질러 청양의 백월산(白月山:395m)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서북으로 뻗어

 오서산·보개산(寶蓋山:274m, 충남)·월산(月山:395m)·수덕산(修德山:495m)·가야산(678m, 충남)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뻗어 팔봉산(362m, 충남)·백화산·지령산(知靈山:218m)·안흥진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금북정맥이다.

 

또한 북서쪽으로 오르면서 도덕산·국사봉(안성)·상봉·달기봉·무너미고개·함박산(函朴山:349.3m, 용인)·학고개·

부아산(負兒山)·메주고개·석성산·할미성·인성산(仁聖山:122.4m, 용인)·형제봉·광교산(光敎山:582m)·

백운산(白雲山:560m, 경기)·수리산(修理山)·국사봉(國思峯:538m, 경기)·청계산(淸溪山:618m, 경기)·

응봉(鷹峰:348m, 경기)·관악산(冠岳山:629m, 서울)·소래산(蘇來山)·성주산(聖住山)·철마산·계양산(桂陽山)·

가현봉(歌弦峰)·필봉산(筆峰山)·학운산(鶴雲山)·것고개·문수산 등으로 이어주고 있다. 바로 한남정맥의 산줄기이다.

한국의 산이름이 비슷하여 헤갈스러울 때가 많다. 같은 도내에 같은 이름이면 더욱 혼란스럽다.

그래서 산과 마을마다 전설과 얽혀있는 이야기가 혼합되어 전해오는 것이다.

산과 산간에 명확한 구분이 없어 혼동되는 경우에는 칠장산과 칠현산처럼 산맥의 시작과 끝이 더욱 혼란스럽다.

칠장산의 3정맥 분기점...(11:10)

우리나라 산줄기의 중요한 기점이 되는 곳으로 물줄기는 물론이고 지방과 문화를 구분짓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위쪽의 한강문화권과 오른쪽 아래의 금강문화권 그리고 왼쪽에는

안성천의 경기남부문화권이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백두대간상의 속리산 천왕봉에서 분기하여 충북내륙을 관통하여 여기까지 약160km의 맥을 이어온 

한남금북정맥은 다시 북서쪽으로 뻗어 김포의 문수산까지 약180km의 한남정맥으로, 또 한맥은 남서쪽으로

내려가면서 칠현산(516m),서운산(547m),성거산(579m), 광덕산(600m),을 거쳐 백월산에서 산줄기는 북서진 하면서

덕숭산(495m),가야산(678m),일락산(521m)등을 솟구치게 한 후 은봉산(283m)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뻗어

성황산(252m),백화산(284m)등을 거쳐 태안반도의 끝인 안흥진에서 그 맥을 다하고 서해바다로 내려앉는

280여키로의 금북정맥의 분기점이다.

칠순비 부부탑(11:20)

 “김성기 임경순 2002년 11월 24일 광혜원 중고개”라고 적혀 있다.

칠순까지 사시면서 금슬이 얼마나 좋았으면 저렇게 돌탑까지 쌓아 놓으시고...

참으로 부럽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30여년을 산 범여도 요즘 많이 삐거득거린다. 남남이 만나 같이 산다는게 싶지 않은가보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하는데 그게 참 잘 안된다.

이 곳 금북정맥 1구간 산행을 하면서 참 돌탑을 많이본다. 산 정상과 안부에는 어김없이

돌탑이 있다. 무티고개와 만디고개에도 부부돌탑이 있고 이곳 사람들은 금슬들이 좋은가보다.

칠현산(516.2m:11:30))

칠장산에서 기원제를 마치고 3정맥 분기점을 지나 고도편차가 별로없는 좌측은 충북 진천군

우측은 경기도 안성시의 경계인 마루금 능선을 따라 걷는다.  어제 저녁에 잠을 설친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은 무겁고 그늘진 능선이긴 하지만 태양은 뜨겁고 지난번에 온 비로 인하여 땅에선 지열이

사람을 잡는다. 거기다가 지난주 태풍 콘파스로 인해 나무들이 많이 쓰러지고 뿌러져 있어 걷는데

지장을 준다. 칠장산 출발 1시간만에 도착한 칠현산 그 명성에 비해서 주위 조망도 여름이라 그런지

전혀 없다  그리고 돌탑과 정상석, 삼각점이 삼위일체를 이룬다. 참으로 깔끔한 느낌을 준다.

낙동정맥을 종주하면서 경상도 남부지역의 산 정상에 정상석이 몇개씩이나 있어 눈살을 찌뿌리는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이런 면에서 참으로 칭찬할만 하다. 

 

경기도 안성시 칠현산(七賢山)은 해발 516.2m로 산세를 이루면서 서울 근교에 있어서

그런지 산행을 하는 산꾼들이 꽤 많이 보인다.

칠현산은 한반도 대간의 13정맥 중에 하나인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끝나는 산이다.

종착지의 칠현산에서는 2km쯤 내려가 칠장산 (경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文殊山)까지의

한남정맥(漢南正脈)으로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태안반도(泰安半島)에 있는

안흥(安興)까지의 금북정맥(錦北正脈)으로 이어진다.

 

칠현산과 칠장산은 같은 산으로 보기 때문에 정맥 구분에도 혼동이 많다.

이 산줄기의 산들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천황봉에서 갈라져 말태재·구치(九峙)·시루산·구봉산(九峰山)·

국사봉(國師峰)·선두산(先頭山)·선도산(先到山)·상봉재·상당산성(上黨山城)·좌구산(坐龜山)·

칠보산·보광산(普光山)·행태고개·보현산(普賢山)·소속리산·마이산·차현(車峴)·황색골산·걸미고개 등에서

이곳 칠현산 등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장수하늘소·소쩍새 등 천연기념물과 대팻집나무 등 이름 낯선 희귀한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곰림정상(11:45)

조그만 바위에 거의 보이지 않은 정도로 희미하게 곰림정상이라고 써있다

덕성산 가는 갈림길(11:55)

생거진천이 무슨 뜻인가..   아마도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
즉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말에서 유래된 듯 한데...

 

언제부터인가 진천지방에는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하나는 옛날에 진천과 용인에 추천석이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살고 있었다.

진천의 추천석은 양순하고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이었던 반면 용인의 추천석은 부자로 살면서 심술이 많아

동네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염라대왕이 용인의 추천석을 괘씸하게 여겨 사자(使者)로 하여금 잡아오도록 하였으나 사자가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와 다시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장사를 지낸 후인지라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체에 진천 추천석의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옛날 한 여자가 용인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 낳고 단란히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진천으로 개가하여 아들을 낳고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용인 아들이 성장하여 진천의 어머니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진천의 아들이 극구 반대하여 결국 관가에 소장(訴狀)을 내었다.

 

관가에서 판결하기를 "너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안에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서 모시고

제사도 모시도록 하라"고 하여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으로 간다는 전설인데,

위 두가지 이야기가 모두 근거가 없는 전설일 뿐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진천 지방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고, 한해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롭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기에 生居鎭川이라 하였고,

용인은 산세가 순후하여 사대부가 (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死去龍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으로부터 약 80년전에(1932) 만든 진천군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 常山誌 土産편에는

조선시대 진천에서 년간 6만여석의 쌀을 생산하였다는데, 당시 전국통계가 단보당 평균 수확량이

9말3되에 비해 진천은 11말5되나 수확되어 곡향(穀鄕)으로 유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의

古蹟條에는 동호(東胡)가 조선 중종조 이전부터 관개용 저수지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덕성산에서 무이산으로 향하는 왼쪽 골짜기의 광혜원면 구암리에는 무술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진천 태생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낭도들과

무예 등 화랑도 정신을 연마하던 터가 남아 있다.

 

  북쪽 골짜기 비들목도 화랑들이 전서구(傳書鳩)를 길들이던 마을이며 동쪽으로 내려오면 화랑의

연무대와 병기고 자리에 병무관 마을이 있다. 지금의 구암저수지 부근이다. 

덕성산(519m :12:00)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요순산(堯舜山)·무위산(無爲山)·무수산(無愁山)·국사봉(國寺峰)으로도 불린다.

이 산은 안성시 서운면의 서운산(瑞雲山:547m)·무제봉(武帝峰:574m)·옥녀봉(玉女峰:457m)·

백석봉(白石峰:468m)·장군산(將軍山:436m)·만뢰산(萬賴山: 612m)과 함께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연봉을 이루고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속리산 천황봉(天皇峰:1,058m)에서 충청북도 북부 내륙을 동서로 가르며

안성 칠장산(七長山:492m)에 와서 멈춘다. 이 산은 북동쪽 칠현산(七賢山:516m), 칠장산보다 약간 높지만

능선이 서남으로 이어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생대 말의 습곡산맥으로 화강 편마암이 깔린 구릉산지이다.

덕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희미하게 보이는 광혜원(廣惠院)

조선 9대 임금 성종(1469~1494) 때부터 충청도 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충지로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였고 충청도 신.구

관찰사 인수인계장소로 광혜원을 설치한 이후 지역의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은 남쪽은 이월면 동쪽은 음성군 북쪽과 서쪽은 경기도

안성시와 경계를 이룬다. 서부는 금북정맥으로 이어진 고도 200~400m 이어진

구릉성 산지이고 동부는 이월면과 연결된 진천평야의 일부로 미호천의 지류인

회죽천 상류에 구암 저수지가 있으며 진천~이천간의 지방도가 통과한다.

무티고개 (12:45)

무수마을에서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를 넘는 고개로

무치(武峙)또는 무위치(無爲峙)라고도 하며 또다른 무티라고도 한다.

무수동(無愁洞)에 대하여 상산지(常山誌)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

산 이름은 요순산이며 재 이름은 무위치(無爲峙)이며 동네이름은 무수동이라

하였단다. 없을 ‘無’와 근심 ‘隨’자를 쓴 걸 보면 근심이 없는 동네란 뜻이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아무 근심없이 피난하여 지냈다고 한다.

또다른 설은 호반 무(武)와 재주 술(術)자를 써서 무술이라고 하여

옛날 이곳에서 무예를 연마하는 곳이라는 설도 있다

사장골 정상(400m 13:05)

저 아래 진천군 광헤원면 사장골 마을의 위 고개라고 해서 사장골에 올라서니 바람의 기운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다. 오늘은 얼마나 덥고 햇살이 따가운지 그늘이 진 편안한 능선 안부를

걷는데도 불구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온몸이 땀으로 목욕을 하는 기분이다.

고개에서 부른 바람에 염치불구하고 바지를 내리고 웃통을 벗은채 거풍을 즐긴다.

정말 가슴속 까지 시원한 이 풍욕은 산의 진수를 아는 자 많이 알리라... ㅋㅋㅋ

사장골에서 만디고개 가는 좌측에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난 무이산은 그냥 통과한다.

다리가 너무 무겁고 더워서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만디고개(14:10)

안성-음성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금광 3터널 위에 잇는 만디고개. 만디라는 말은 경상도말로

꼭대기라는 뜻인데 이곳은 좌측으로는 충북 진천이요. 우측은 경기도 안성의 경계인 마루금을

쭉 지난 곳인데 만디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아마 다른 뜻이 있겟지. 낼 진천군에 문의라도 함 해봐야겠다.

고라니봉 정상(14:30)

고라니는 구경도 하지 못했는데 고라니봉이라고 부른 이유가 궁금하네.

아마 더위를 먹었는가보다. 아직 갈길은 먼데 식수는 달랑달랑하고 옥정재 내림길은

정말 급경사이다. 조금 내려가니 마루금을 통제한다. 또 여기도 언넘이 개발인지 뭔지

하면서 아예 脈길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저 아래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겨우겨우 우회를 해서 옥정재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전원주택 짓다말고 있다.

허가를 해준 진천군청이나 허가를 받아 집을 짓는 넘이나 역사나 지리에 대한 소명의식을

기대하는 자체가 아마 무리이겠지.

옥정재(玉井峙:390m) 15:00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세운 이정표가 길가에 있다. 진천과 안성을 이어주는 옥정재는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러 가거나 안성장을 갈 때 이용했던 곳으로 지금은 587번 지방도가 지난다.

 차량의 행렬이 수시로 이어지는 것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음이다.

마루금을 우회해서 옥정재에 도착하니올곧고 바르게 개척해 나가자』는 의미의

충북 마스코트 고드미와 바르미가 반긴다

 9월 더운 날씨와 얼마나 햇빛이 따가운지 올 여름 매주 무박을 했지만 이렇게 힘들게

산행을 하지는 않았다. 아마 더위를 먹은 모양이다. 다리는 무겁게 식수는 다 떨어져 가야할

길이 8.3km나 더 남았는데 막막했다. 근데 하늘이 무녀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곳에 마루금을 짤라서 전원주택을 짓는 업자가 지하수를 개발해 놓아서 거기서 물 보충을 하고

등목을 하고나니 이제 조금은 살것만 같다. 서울은 비가 무지 많이온다고 조심하라고 지인들한테

전화가 오건만 여긴 아직까지 퇴악볕에 얼굴이 금방이라도 익을건만 같다.

그래도 아무래도 이곳도 비가 내릴 모양이다. 마른 하늘에 천둥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몸을 추스리고 서둘러 옥정재를 떠난다.

409.9봉 정상(16:00)

옥정재를 출발하여 배티고개 가는 길은 임도옆 숲길을 따라 제법 센 바람이 불어 상당히 시원하다.

일기예보만 믿고 식수를 2리터밖에 준비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긴 했지만 옥정재에서 물을 2리터

보충하여 걷는데 이렇게 시원하니 식수는 그대로 남을 것 같다. 주위에는 갑자기 컴컴해진다.

409봉을 넘으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얼른 우의를 입고 베낭에 레인카바를 쒸우고 길을 떠난다.

비를 맞으니 훨씬 시원하고 걸음이 가벼워진다. 미끄러워 속력이 좀 늦긴 하지만 카메라, G.P.S같은

전자기기만 없으면 흠뻑 비를 맞고 싶은 심정이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고...  

저 아래 천룡C.C에 안부인 장고개에 도착한다. 비를 맞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대한민국에서 산에서 가장 화려한 헬기장(16:30)

470.8봉 정상에 화려한 헬기장이 하나 나타난다. 어느 산을 가더라도 헬기장들이

보도블럭에 잡풀들이 가득 차 있는게 대다수인데 여긴 착륙장에 아주 고급 강판으로

깔끔하게 처리해 놓고 관리도 잘되어 있다.

북쪽 저 멀리로 안성시의 모습도 신비한 안개에 싸여 아침을 깨우고 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농사와 아울러 상업 활동이 두드러진 곳이어서 안성장은

대구와 전주에서 열리는 오일장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장으로 손꼽혔다.

 

안성장은 서울과 경기 지방으로 올라오는 삼남의 물건들이 몰려들었던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능선의 오른쪽 구암리에 남아 있다는 김유신 장군의 흔적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진천군 전체에 걸쳐 곳곳에 남아 있는데 김유신과 진천은 어떤 관계에 있던 것일까.

 

  김유신은 이곳 태수로 있던 김서현과 만명 부인 사이에서 595년에 태어났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본디 신라에 합병된 가락국의 왕족이다.

신라의 왕족은 부모가 모두 왕족인 성골과 어느 한 쪽만 왕족인 진골로 나뉘는데 이들 성골과 진골이

다른 신분과 혼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김서현은 신라의 장군이기는 했으나

 엄연히 다른 신분에 속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왕족인 만명과 사랑을 하게 되고 이 사실을 안

 만명의 아버지는 이들의 사이를 떼어 놓기 위하여 김서현을 고구려와 맞닥뜨려 싸움이 그칠 새 없는

 이곳의 태수로 보내 버렸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이들을 떼어놓지 못하고 만명이 당시

 만노군이라 불리던 이곳 진천까지 도망을 쳐 사랑의 결실로 김유신을 낳은 것이다.

장고개(17:00)

산이 높아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뒤에서 오는 사람이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인다고 해서 개미둑재라고 했는데 요즘은 갬덕지 고개라고 부른단다.

 

비가 오다가 그쳤다하여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하니 상당히 번거롭기 그지없다.

이제 마지막 구간에 젓먹는 힘까지 다 내어본다

범여가 요즘에 산에 미쳤듯이 10여년전에 한참 골프에 미쳐서 다닐때 이곳 골프장에도 참 많이 왔었다.

이곳이 다른곳에 비해 그린피는 좀 싸긴 했지만 페어웨이가 참 많이 좁았고 거리가 짧아 파4에 드라이버로

치고 나면 그 다음에 남은 거리가 짧아 클럽 잡기가 애매햇던 기억이 난다. 그 뒷산이 정맥길이란 걸 

몰랐다. 클럽하우스를 지나는데 저녁 6시가 다되가는데 관리인이 골프장을 지나간다고 난리다.

여보시요.. 담에 베낭메고 오는게 아니고 골프채 메고 올테니 좀 봐쥬소 하니까 그방 조용해진다.  

중앙C.C 도로에 로드킬 당한 청솔무 골프장 진입로는 시속 30km인데 얼마나 달렸길래 아까운 목숨이...

배티고개(이치재:341m :18:00)

313번 도로가 지나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과 안성시를 넘는 고개로

이 지역에 배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치(梨峙)재라고 했고 그것을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재라 불렀다는 설과 조선시대 영조때 이 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의 이 순곤이라는 노인이 이끄는 주민들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 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했다고 해서 패치라고

불리다가 변했다는 설도 있다.

 

배티이티에서 ‘티’는 고개를 뜻한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티 대신 재나 고개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고,

 그에 따라 티의 뜻이 불분명해지자 유의어 고개를 중복하여 배티고개로 부른 것이다.

 

배티배티고개그 뜻은 같지만, 현재 배티는 마을 이름으로, 배티고개는 고개 이름으로

나누어 사용되고 있고,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명에 ‘영(嶺)’·‘현(峴)’계 지명이 여럿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개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에 있는 배티마을은 원래 아랫말·중간말·꼭대기말로 이루어졌으나

현재 중간말은 없어졌으며, 배티마을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20~1830년대 무렵이다.

 

1857년 무렵에는 배티와 절골 주변의 양백리 삼박골, 용덕리 용진골·정삼이골, 백곡면

명암리 발래기·명심이, 백곡면 사송리 지구머리, 이월면 신계리 새울, 진천읍 지암리 지장골,

문백면 구곡리 굴티 등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도 30여 명이 관군에게

학살당한 곳으로 지금은 성역화하여 순례지가 되었다.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진천군지 1994 인용)

 

산행시간 6시간 30분만에 배티고개에 도착하니 폭우가 다시 억수같이 쏟아지며

갑자기 칠흙같이 하늘이 컴컴해진다. 버스가 세워져 있는 도로옆에 더덕냄새가

진동을 한다. 시간만 있으면 주위를 살피면 금방 더덕을 캘 수있을텐데. 아깝다.

젖은 옷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짐을 챙겨 버스에 올라 500m 떨어진

식당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금북정맥 1구간을 무사히 마침을 자축하는

건배를 두부전골에다 맥주+이스리의 폭탄주를 후래 삼배라 하여 연거푸 3잔을

쭈~~욱 들이키니 좀 살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