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07.31
○ 산행날씨 : 흐리고 엄청나게 높은 습도, 오후에 비옴
○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7.5km (5.5km 차량이동, 어프로치 1km) /8시간 40분 소요
○ 산행코스 : 덕고개-돛고개-성요셉치매센터-차량이동-압실마을 입구-명산사 입구-군부대 철조망-350봉
국사봉갈림길-임도-국수봉-밤나무밭-차령고개(23번국도)-정안면 망배단- 봉수산-인제원고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터널-375봉-430봉-430봉-장고개-개치고개-480봉-헬기장-490봉
곡두고개-온양온천역
○ 소 재 지 : 충남 연기군 전의면 / 공주시 정안면 /천안시 광덕면
오늘부터 휴가인데 딱히 갈때도 없고 거기다가 8월1일부터 급하게 해야할 공사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이들어 일욜에 산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새벽4시에 일어나 베낭을 꾸리고
4시반에 집을 나선다.
중간에서 김밥 2줄을 사서베낭에 넣고 아침식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 경부고속 터미널에 있는
설렁탕 집에서 밥을 먹고는 천안가는 06시발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진다.
한국일보 기사 갭쳐
서울에 지난 7월 26,27일에 내린 폭우로 우면산이 무너져 내려 18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우면산은 돌이 많은 관악산과 달리 지반이 대부분 흙으로 이뤄져 폭우에 유실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
지난해 9월 태풍 곤파스로 아카시아, 현사시나무 3,000여 그루가 뿌리 채 뽑히고 산사태까지 발생,
지반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안정화 작업 없이 생태공원, 둘레길, 등산로 등 개발이
계속 진행된 게 기록적인 폭우와 겹치면서 대규모 산사태를 초래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것은 자연의 특성을 무시한 전형적인 人災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얼마나 미약한 존재임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서울에서 천안가는 06시발 고속버스표
천안고속버스 터미널(07:00)
깊은 잠에서 깨어보니 버스는 천안고속버스에 도착하였다.
터미널에서 나와 덕고개가는 버스(700번)를 기다리는데 앞에 서있는 701번
버스기사에게 덕고개 가느냐고 물으니 간다고 하여 지체없이 버스에 올라탄다.
차비가 얼마냐고 물으니 2,100원이란다. 왜이리 비싸냐고하니 덕고개는 연기군이라
비싸단다. 30분 거리에 2,100원이라니... 억울한 느낌이다. 버스도 기본요금이
1,200원이고 물가가 서울보다 훨씬 비싸다. 서울은 카드로 타면 900원에다 현금도
1,000원인데 말이다. 그것도 덜컹거리는 고물버스로 말이다. 서울에 그런 시내버스는
눈비비고봐도 없는데... 그래 집나가면 개고생이고 푸대접인걸 인정하자.
그 대신 선문대까진 2명이 타고 가다가 나머지는 나혼자 전세내서 가지 않느냐 ㅋㅋㅋ
덕고개 이정표
연기군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한의 54개국 중 충남에는 15개국이 있었는데, 연기군과 인접한 곳에는 월지국(月支國 혹은 目支國-직산),
신운신국(臣雲新國-천안), 불운국(不雲國-공주 서부)이 있었고, 이 중 연기군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이들에 흡수되어 행정력을 행사하는 영역에 속하였다.
백제시대 연기군은 백제의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475년을 전후하여 연씨(燕氏)와 백제말기 전씨(全氏)가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훗날 두잉지현이 연기현으로, 구지현이 금지현으로 변했다가 전의현으로
불리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연기는 연씨들 즉 웅진초기에 활약했던 연신(燕信)과 연돌(燕突)이『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근거지로 추측할 수 있다. 연신과 연돌은 벼슬이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이르러 오늘날 국방장관에 올랐다.
비암사에서 출토된 백제말기 유물인 석불비상(石佛碑像)에 전씨가 주동이 되어 제작되었음이 명기되었고,
이는 계유년(673)에 제작된 것으로 백제유민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과 그곳의 지명이 전의/전동이란
것으로 보아 전씨 근거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지금의 전의(全義)는 서원경(西原京)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대록군(大麓郡, 지금의 천안)의 영현(領縣)이었다.
대록군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다. 대록군의 영현으로는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순치현(馴雉縣)으로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을 경덕왕때 개명한 곳이며 지금의 천안지방에 해당한다.
또 하나의 영현은 금지현(金池縣)으로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을 경덕왕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전의(全義)에 해당한다.
연기(燕岐)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이었다.
연산군은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을 신라 경덕왕이 개명한 것이다.
연산군의 영현은 두 개 현인데, 하나는 연기현으로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을 경덕왕때 연기현으로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연기에 해당하며, 다른 하나는 매곡현(昧谷縣)을 경덕왕 때 개명한 것으로 지금의 회인(懷仁) 지방에 해당된다.
지금의 금남지역은 웅천주(熊川州)였는데, 757년(경덕왕 16) 웅주(熊州)로 개명하였다. 웅주는 오늘의 공주를 지칭하는 것이며,
금남은 그 일부이다.
연기군은 성종때 10도제가 실시되었을 때는 중원도(中原道), 지금의 충청북도에 속하였다. 5도양계(五道兩界)의 제도가 실시되면서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와 충청)에 속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청주(淸州)의 속현이었다.
연기현은 고려 현종(縣宗) 9년에 청주의 속현이 되었고 명종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뒤에는 목천(木川) 감무가 겸하였다.
전의현은 신라 경덕왕때 금지현(金池縣)으로 개명한 것을 고려 때 전의로 고친 것이다.
금남은 통일신라시대 웅주(熊州)였다가 고려시대
공주(公州)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공주의 동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연기군은 연기현과 전의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금남지역은 공주로 연기군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연기현(燕岐縣)은
태종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태종 14년(1414년) 전의에 합쳐져서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다시 태종 16년(1416년) 연기현으로
복설(復設)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전의현은 태조 4년에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에 현감을 두었으며 다음해에는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이 되었다가 태종 16년(1416년)에 연기현이 복설(復設)
되면서 전의현이 되어서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금남지역은 공주의 일부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공주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의 지방제도는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종래의 8도를 23부의
행정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의 개편은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한성부(漢城府) 이외의 지역을 13도로 개편하고
그 밑에 7부(府), 1목(牧), 231군(郡)을 두었다.
덕고개 정류소(07:30)
30분만에 덕고개에 도착한다. 일주일만에 해후이다. 그래도 오늘 아침날씨는 약간
흐리긴 하여도 산행하기엔 더운것 빼고는 할만할 것 같다. 높은 습도에 고생은
할것 같지만 말이다, 지난해 한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세종시가 이곳 연기군이다. 전임자가 추진해던 일을 새로운 자가 번복하고 그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어 국력낭비로 이어지는게 정말 안타깝다.
정말 정치하는 자들이여! 당신들의 사리사욕에 얶매이지 말고 정말 國益이
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이곳 연기군청 소재지인 조치원은 1931년
대전, 강경과 함께 읍으로 승격되어 해방전까지만 해도 경부철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주위의 모든 물산이 집결되는 상업의 중심지였으나
그 이후 주변 도시인 대전과 충주에 밀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장비 점검을 하고 07시 40분경 산행을 시작한다.
덕고개 정류장 맞은편 방음벽 옆으로 내려서면 경부선 철길로 접어든다
경부선 철로를 지난다. 끝어진 정맥길을 원칙을 고수하면서 걸으려니 부득히 철길을 건널 수밖에
없는 것을 철도청장은 이해를 하시겠지(?) 이곳은 열차가 굉장히 자주 다니니 조심하시길...
철길옆에 분전함 2개가 있는 것을 올라가면 고구마밭이 나오고 조금 더 지나면 콘테이너 박스가
설치되어 있는 농가가 나온다. 조금 더 지나면 굴다리가 나온다
1번국도 지하차도
이 자히차도를 지나서 우측으로 희미한 등로를 찾아 올라가면서 마루금에 진입한다.
1번국도
돛고개(07:50)
굴다리를 지나 우측으로 오르면 1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고 ‘전의조경수마을’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나타나고 숲이 무성한 희미한 임도길로 들어서면 반가운 시그널이 간간히 보이면서
이곳이 정맥길임을 증명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벌써 바지와 등산화는 이슬에 다 젖어
버리고이곳에는 유독 거미줄이 너무 많아 아침부터 거미줄과 벌레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얕은 능선에 오르니 우측 조경수를 심은 곳에 풀깍이 작업을 하는 통에 온 산이 시끄럽다.
조그만 능선에 올라 길이 잘 나있는 등로를 버리고 우측 조경수 심어놓은 곳을 따라 걷는다.
산 자락 주위에 군부대 통신을 할때 쓰는 일명 삐삐선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희미한 등로에서 늘 등대역할을 해주는 반가운 시그널들
등로에 올라 직진하면 길은 잘 나있으나 직진을 하면 알바하니 우측 45도를
꺽어서 이곳 조경수 심어놓은 능선을 타야함
임도(07:57)
여기서 직전을 하면 11탄약창부대가 나타난다. 그러나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서 좌측 임도로 내려 선다.
호남정맥길에 임실의 탄약창도 한북정맥길의 수원산 아래 탄약창길도 묵묵히 다 걸어서 왔건만 유난히
이곳은 절대불가란다. 하지 말라면 하지말아야 하지만 청와대 뒷산인 인왕산도 개방하는데...
이해는 되지만 개선책을 보완하여 정맥길을 돌려줬으면... 부대장님 잘 하번 생각해보이소
성요셉치매센터(08:00)
요셉마을 입구
60세이상 노인성 치매, 중풍 노인성을 질환을 진료하는 곳으로
카돌릭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691번 도로를 나오니 대전 카돌릭 대학교가 나온다.
저 안쪽에 보이는 것이 11탄약창 부대 정문이다. 마루금을 잇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연기군 전의면 택시(041-862-4007)를 부르니 5분도 되지않아 요셉마을 입구로 온다
택시들은 이곳에서 택시를 타는 산꾼들은 으례 압실마을로 가는 줄 아는모양이다.
묻지도 않고 그냥 달려 압실마을 입구에 내려준다. 미터기도 꺽지않고 9,000원을 달라고 한다.
압실마을 입구(08:20)
압실마을 입구에서 우측 콘크리트 농로로 오른다. 명산사라는 사찰 표시가 되어있고
조금 오르니 우측 논 한가운데 허름한 주택 한채가 명산사이다. 내가 보기에 정통
사찰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사주나 굿거리를 하는 곳같기도 하고... 부처님 법을
믿으려면 正法으로 믿으시길... 아님 자기 수행을 위해 있을 수도 있겠지 뭐
압실마을 입구에서 20분정도 오르니 논에는 벼농사가 꽤나 잘되어 있고 이곳에도 이번비에
무너진 농로가 꽤나 많다. 논에는 하얀 왜가리 서너마리가 홀로가는 산꾼에게 놀라 날아가버린다.
농로 옆에 나락논에 벼 잎사귀에 빨알간 알들이 잔뜩 붙어있다.
탄약창부대 경고판
드디어 마루금에 복귀를 한다. 이곳은 주변 관리는 잘되어 있다. 아침 고속 터미널에서
먹은 설렁탕을 조금 짜게 먹었는지 자꾸만 물 호스를 빨아댄다.
탄약창부대의 규모는 엄청나게 크다. 갑지기 풀섶에서 스르르 하는 소리에 놀란다.
자세히 보니 독사한마리가 놀라서 황급히 도망을 간다. 다행히 그 넘이 먼저
도망가는 바람에 내가 지난번 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342m봉(08:50)
철책안쪽에 군진지가 있고 좌측으로 내리막 등로가 있고 90도를 꺽어 내리막 진행한다.
이곳은 정통적인 육산(堉山)으로 참으로 걷기가 편안하다. 그리고 소나무가 생각보다 많다.
군부대 주변에다 특별한 산도 없기에 정맥타는 산꾼들 이외는 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등로구분이 쉽지 않고 꼬리표도 많지 않아 아리까리한 길이 많다.
잠시 후에 콘크리트로 된 포장임도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진행하니 NO 122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별 특징없는 지도상에 표시된 383봉, 374봉 등 몇개의 봉우리가 나타난 후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난
국사봉이 나타난다
혼자가는 산행길에 이런 횡재를...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제법큰 영지 한넘이 쬐끄만 새끼와 함께 산꾼을 반긴다.
이~~잉 이런 횡재를... 얼른 베낭에서 비닐봉지를 꺼내서 집어넣는다.
오늘은 혼자 걸으면서 크고 작은 영지 8개를 수확했다. 대단한 수확이다
국사봉(402.7m:09:35)
우리나라 산 중에서 같은 이름이 가장 많은 곳은 백운산이요. 봉은 국사봉일 것이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국사봉이 존재한다. 봉우리에 들리니 아무런 특색도 없고 늘 홀로가는
산꾼에게 희망을 주는 준,희님의 이정표가 산꾼을 반긴다. 이곳에서 인증샷을 남기려 했지만
오늘은 삼각대를 가자고 오지않아 카메라 수평이 맞질않아 포기하고 그냥 길을 떠난다.
연기군 전의면과 천안시 광덕면을 이어오던 경계는능선은 국사봉부터는
백제의 고도 공주땅으로 접어든다.
417봉, 421봉,427봉 등 잔잔한 봉우리가 수도없이 나타난다. 한방에 K.O가 되는게 아니라
수많은 잔봉에 지치면 후반에 고전할것 예감이 든다. 다시 임도에 들어서니 뜨거운 햇살이
더욱 더 산행을 힘들게 한다. 아무래도 짜게 먹은 설렁탕 때문에 물이 부족할 것 같다.
임도를 한참동안 오르다 좌측 2시방향으로 숲으로 꺽어져서 내림길을 향한다
국수봉(10:20)
국수봉에서 차령고개까지는 약 1시간의 거리이다. 국수봉에서 급경사의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 내림길을 내려오니 송림 삼거리가 있는 303봉이 나타나고
장대한 밤나무 밭이 펼쳐진다. 280봉의 송전철탑(NO:118)이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오르니 임도가 나타나고 호화로운 가족묘지가 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
다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몇개를 지나니 정맥길에 밤나무 단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최고 유명한 밤 생산지인 공주시 정안면 지역이다.
이곳 정맥길 가운데에 밤나무 단지가 들어서 있다. 지난해 낙남정맥길을 걸어면서
진주, 사천 지역에 많이 보던거와 거의 흡사한 현상이다.
현재 공주지방에서 나는 특산물로 가장 친숙한 것은 정안면 일대에서 생산되는 공주 정안 밤이다.
공주는 전체면적의 70%이상이 임야로 일찍부터 임야를 이용한 농가소득에 관심을 가져왔다.
전국 밤생산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밤의 주산지이다. 공주 밤은 밤알이 다소 작지만 단단하고
고소하며 단맛이 많은 꿀밤이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은 차령산맥 안에 있다.
제법 400~600미터에 이르는 봉우리들이 정안면을 둘러싸고 있다.
분지에 가깝다. 서북부는 산이 높고 남쪽으로는 산지가 낮은데, 이 비탈의 산자락에 밤나무가 자란다.
땅은 모래가 많아 물 빠짐이 좋다.
사질토라도 메말라 있지는 않다. 밤나무 낙엽이 수북이 쌓여 시커멓게 거름기가 돈다.
과실 농사하기에 딱 좋은 땅이다.
공주는 예로부터 토질이 밤과 잘 맞아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밤 산지입니다.
우리나라 주요 밤 산지로는 공주, 산청, 하동, 함양, 광양 등이 알려져있지만,
그중에서도 공주의 정안밤을 최고로 치는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공주 정안 밤은 알이 굵어 과육이 많고 단단하여 저장성도 뛰어나고, 당도가 특히 높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밤은 예로부터 위장을 튼하게 해주는 성분이 들어 생으로, 또는 찌거나 조리해서 먹게되면 위장의
기능이 활발해져 소화력이 왕성해진다고 합니다. 또한 근육과 뼈를 보하고 튼튼하게 하는 성분이
많아 꾸준히 먹기만 해도 근 골격이 강해지고 하체가 튼튼해 진다고 한다.
그리고, 비타민'B1'이 다른 식품에 비해 4배이상 함유되어 있어 피부를 윤기 있게 가꿔주고
노화를 예방하고, 머리카락까지 검어지며 머릿결이 부드러워 진다고 하니 남성뿐 아니라
여성분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식품 이다.
특히 신장이 약해지기 쉬운 환경에서 생활하는 도시인들에게는 희소식이 될 듯합니다만
이뇨작용에 효과적이어서 신장을 강화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며 설사가 심할 때는 구운 알밤을
먹으면 속이 따뜻해 지면서 속을 편안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한반도에 밤나무는 자생한다. 산과 들에 흔한 것이 밤나무였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선사시대 때부터 밤을 먹었다.
그 먼 옛날부터 조선시대까지 밤은 기호식품이라기보다는 구황식품에 가까웠다.
가을이면 산야에서 밤과 도토리를 거두어 식량으로 썼다. 토종 밤은 중간 정도의 크기에 단맛이 강하다.
1950년대 이 토종 밤에 큰 시련이 닥쳤다. 밤나무혹벌이라는 해충이 크게 번져 수많은 토종 밤나무들이 말라 죽었다.
거의 멸종하다시피 했다. 1960년대 후반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정부에서 밤나무 식재에 적극 나섰다.
일본에서 가져온 품종이 주로 심어졌으며, 토종 밤나무를 개량하여 선발한 품종도 있었다.
일본에서 도입한 품종이 주로 심어지면서 밤 주산지의 변화가 생겼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경기도 양주, 용인, 가평, 수원 등이 밤 주산지였는데, 1960년대 이후
경남 하동과 진주, 전남 광양과 순천 등 일본의 자연환경과 비슷한 남부지역이 주산지로 떠올랐다.
이 같은 밤 주산지의 변화에 정안은 거의 북단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마에도 꿋꿋하게 피어있는 들꽃은 참으로 보기가 좋다.
잡목사이를 계속해서 헤치고 길을 가는데 자꾸만 벌레들이 모자위로 떨어져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거기다가 거미줄까지 가세를 한다.이곳은 공주와 천안의 경계능선으로
왼쪽은 밤 생산지로 유명한 공주시 정안면이고 오른쪽 천안 호도과자로 유명한
호두나무가 많은 광덕산이 자리잡고 있는 천안시 광덕면이다.
능선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도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곳이다.
오른쪽 능선으로 떨어자는 빗물은 천안의 풍세천을 거쳐 아산만을 거쳐
서해로 흘러들고 왼쪽 능선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공주 정안천을 따라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물을 많이 먹은 탓인지 머리가 어지럽고 배가 고파온다. 조금후에 앞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숲이 무성한 NO 166 송전탑 아래서 김밥 한줄과 바나나 한개를 먹은 후에 길을 간다.
산 아래에는 차령터널에 지나가는 차량소리로 시끄럽기만 하다 잠시 후에 뚝 떨어지는
절개지가 나타나니 이곳이 차령산맥이다.
밥을 먹는데 고추 잠자리 한마리가...
차령(車嶺) 고개(323m:11:20)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와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도 이름이 등재되어 있는 족보있는 고개로,
한양에서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도)로 가는 삼남대로상의 관문이다.
대동여지도에 '공주와 천안의 일직선상에 있는 고개가 차령이요,
예산으로는 차유령(차동고개), 온양으로는 각흘고개를 넘게되어 있다.
삼남대로라 함은, 한양에서 수원 천안 공주 광주를 거쳐 해남까지
연결되는 970리 길을 말하며, 영남대로는 상주 대구 밀양으로 해서
동래까지, 대관령을 넘어 삼척 울진 평해까지 이어가는 관동대로,
압록강변 의주까지 연결되는 의주대로 등 10개 대로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10조에서 '차현이남(車峴以南 공주강외(公州江外),
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차현은 차령고개를 말함이고 공주강은 금강을 말함이니 차령고개 이남 사람들은
나라에 등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왕건이 백제일대의 공주 사람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드러낸 이유는 그 당시 천아지역을 거점으로 한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를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는데 공주와 청주의 지방 호족들은 고려 개국이후 까지도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고 왕건의 군사들을 괴롭혔던 사실에 기인한다.
조그만 정맥 능선길 하나도 역사적인 중요한 판가름이 되기도 한다.
훈요십조(訓要十條) 중 여덟번째로 차령이 나온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차현(車峴) 이남 공주(公州)강 바깥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 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그 아래 있는 주군 사람들이 국사를 참여하거나 왕후, 국척들과 혼인을 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것이요 혹은 백제를 통합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로서 일찍이 관가의 노비나 진(津), 역의
잡척(雜尺)에 속하였던 자들이 혹 세력가들에 투탁하여 자기 신분을 고치거나 혹은 왕후 궁중에
아부하여 간교한 말로써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리함으로써 재변을 초래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민(良民)일지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옛 영화를 잊어버린 차령고개 23번 국도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라는 이 말이 이곳에 어울리는 말같다.
차령고개 정상에는 휴게소 시설이 엄청나게 크게 짓다가 이 길 아래로
차령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중단되는 바람에 흉물처럼 페허가 되어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이 투입되었을텐데... 안타까움이 앞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천안군편에는 차령고개 고을 남쪽 40리에 쌍령고개가 있고고을 남쪽 45리에 차현고개가 있다 하였다.
같은 책 공주목 편에서는 차현은 북쪽 57리 쌍령 봉수는 북쪽 50리라고 적혀 있다.
한양을 떠난전라도 길이 차령을 넘으면 바로 광정역(廣程驛)에 닿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주에서 관할하던
큰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정창이 잇었던 곳은현재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를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광정이 자주 등장하는데특히 이괄(李适)의 난(1624년)을 피해 공주로 몽진하던
인조를 전라도 관찰사 이명(李溟)이 군사 2천을 거느리고 공주까지 호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 차령. 국도임에도 생각보다 한가한 2차선 포장도로다.
옛 영화를 저 아래 지나가는 차령터널에 빼앗기고 쓸쓸하게 뒤안길로 내려 앉았다.
차령이라는 울타리와 금강이라는 또 다른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합이 벌어졌던가.
견훤에게는 한이 맺혔을 고개였을 것이고, 왕건에게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떨리는
고개였으리라. 얼마나 많은 피맺힌 한이 서려 있기에 훈효십조에 차령 이남의 인재는 등용하지
말라는 교시를 내렸을까? 왕건의 쫓김도 견훤 군의 의기양양함도 오늘은 북풍에 을씨년스러울 뿐이다.
흥망성쇠는 단지 부족이나 왕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인문 지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슬픈 역사의 현장을 보고나서 다시 폐허가 된 휴게소 우측 계단을 끼고 마루금으로 올라서니
충청지역에선 귀한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대나무의 서식지의 북방한계선이 바로 이곳 차령인데, 이제는 기후가 자꾸만
아열대성으로 변하여 서울지역에서도 대나무를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정안면 새해 해돋이 망배단(11:50)
337봉 삼각점
해돋이 망배단을 지나서 오름길에는 멋진 암릉도 보이고 호젓함도 맛본다.
5분정도 지나니 쌍령산 봉수대가 나타난다.
쌍령산(雙領山)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와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 무학리에 걸처있는 산.
산 높이는 360m 되는 산인데 높은 고개가 쌍으로 되어 있고 조선시대 때 공주 이남에 있는
여러 고을의 조세와 진상물품이 모두 이 고개를 통하여 서울과 아산의 貢稅浦로 운반되었다.
조선시대 때 烽燧臺가 있어서 남쪽으로는 공주시 고등산 봉수와 북쪽으로는 천안시 대학산 봉수에 응하였던 곳이다.
봉수산(366m:12:00) 안내판에는 쌍령산 봉수대라고 하고... 지도상에는 봉수산이라고 하는 건 뭐야
조선시대 문종 때 의적 안수가 이 곳을 지나는 조세와 봉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며
백성들의 호응을 크게 받았으나 끝내는 유의신에게 잡혀 죽으며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 한마디 남긴 말은
"벼슬아치가 딱한게 아니라 벼슬아치에 따르는 그 벼슬아치가 딱하다."라는 苦言은 그를 의적이라고
호칭하게 하는 좋은 苦言이다.
조선시대 때는 한양에 오르는 큰 길이었고 敬天의 상여가 지날 때 양반의 교자도 멈추고 상여에게
예를 올려야 했던 고개가 쌍령고개다.
광덕의 호도나무의 地質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중들이 이곳에서만 호랑이를 두려워 했다 하는데
이곳엔 중만 해치는 호랑이가 있었다 한다. 가파른 쌍 고개가 있다 해서 쌍령산이라 부른다.
정산에는 봉수대 흔적인듯한 돌무더기가 보이고 쌍령산 봉수대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공주시와 천안시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24m 봉화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봉수대이다.
이 봉수대는 비교적 높은곳에 자리잡고 있어멀리 월성산 봉수대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봉수대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쌍령산 봉수대는 남쪽으로는 고등산 봉수대에 응하고.
북쪽으로는천안의 대학산 봉수대에 이어진다....” 이곳에서 알바를 조심해야 할곳이다.
봉수산 표지뒤 길이 뚜렷하게 나있어 무심코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리갈 수 있는데 다시
돌아와 봉수대 표시판 아래 묘지 옆으로 돌아야 한다.
인제원 도로에는 비가 온후 도로가 계곡처럼 파여논 것이 마치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이번에 수해가 난 서울 강남지역에 좋은 본보기가 되는 느낌이다.
자연은 그대로 두면 되는데 아스팔트로 포장해 버리면 인위적이기에
땅속으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기에 생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봉수산 이정표 뒷쪽으로 길이 참으로 잘 나있다.
좌측에 No114 송전탑이 조망되고 좌측아래로는 공주개발에서 운영하는
골프장이 있고 저 멀리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아련히 보인다.
골프장과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인제원(仁濟院) 고개 260m: 12:15)
천안 - 논산간 터널위쪽에 있는 인제원에 도착한다.고산자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도 표기되어 있는
인제원(仁濟院)은 조선시대의 숙박시설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옛날에는쌍령고개라 불리웠다고 한다.
양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어 쌍령이라 한다.
공주에서 천안으로 가는 고개로 차령은 관로(官路)였고
쌍령은 민로(民路)였다는데 인제원고개가 쌍령인듯..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이곳을 지나가는 조세를 털어 빈민을구제했다는
의적 안수(安壽)의 이야기도 남아 있는 곳이다.
차령고개가 천안시 원덕리에서 공주시로 넘어서면서 만나는
인풍리는 인제원과 풍정 마을의 이름을 딴 지명이라고 한다.
인풍리의 '시나무니'는 신암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인제원을
경영하던 신암사가 있던 곳이고, 그 아래쪽의 팔풍정 마을은
춘향전에도 나올 정도로 인풍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급경사의 절개지를 오르니 편안한 안부 능선이 나타나는데 고만고만 봉우리는 계속 나타난다.
식수도 달랑달랑하고 목은 자꾸만 타들어 간다. 이온음료로서 겨우 목을 달랜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우의를 입으면 너무 더울것 같아서 베낭에 레인커버만 씌우고
그냥 길을 걷는다. 주위는 컴컴해지고 후반에 자꾸만 체력이 떨어진다.
오늘 오르고 내리는 조그만 봉우리는 어림잡아 적어도 50여개는 되는가 보다.
잠시 후 편안한 임도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다시 꽤나 높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자꾸만 다리가 무거워지고 시간당 걷는 거리는 자꾸만 짧아진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여기에는 중간에 탈출로가 없어서 그냥 걸을 수 밖에없다.
유일하게 430봉에서 인증샷을 하나 남기고...
배려...
산꾼들이 다니기 힘들어 할까봐 적당하게 휘어져 있다.
개치고개(14:15)
개치고개 좌측아래에는 텃밭과 민가처럼 보이는 집이 있고 골재를 파먹은
흔적때문에 산을 흉물스럽게 보이고 있고 위험하기 그지없다.
안전장치로 로프라도 설치해야 마땅하거늘... 돈만 벌줄 알았나
저러다가 정맥꾼들이 다치면 어쩌려고... 하긴 이 구간에는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없는데 그것을 바라는 자체가 무리가 아닐런지...
420.9봉(14:35)
이젠 체력이 완전히 바닥이 난 기분이다. 거기다가 이젠 물도 완전히 떨어지고
이온음료 2통도 다 떨어지고... 먹을거라곤 모나카 2개와 바나나 1개밖에 없다
아직 곡두고개도 멀었는데 내가 목표로한 각흘고개까진 어림도 없을것 같다.
첨부터 목표를 길게 잡은 느낌에다가 짜게 먹은 설렁탕 때문에 물이 일찍 바닥이
나버렸다. 속된말로 하면 자동차가 기름이 떨어진 느낌이다.
곡두고개로 내려가면 어프로치 구간도 구간이지만 이곳은 대중교통이 없어
좀 난감하긴 하겠지만 물보충을 할 곳이 없어 불가피한 선택일 수 밖에 없다.
안간힘을 다해서 산불이 난 지역인 480봉을 올라가는데 우측에 도라지가 꽃이 피어있다.
스틱으로 뿌리를 캐니 뿌리가 꽤나 튼실하고 알이 굵다. 바위틈에 끼어있어 뿌리까지는
파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어진다. 에공 아까버라 하얀 액이 꽤나 많이 나온다.
오래된 산도라지는 산삼못지 않은 효과가 있다고 하였는데...
도라지 2뿌리를 수확하고...
480봉을 오른 후에 일정하게 안부를 걷다가 또다시 뚝 떨어진다.
그리고 또다시 올라가는데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그래 고통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설마 쓰러지기야 하겠어...
헬기장도 지나고...
드디어 곡두고개가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다시 비는 쏟아지고...
곡두고개(曲頭峙:16:20)
이 재 아래로는 천안시와 공주시를 잇는 629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곡두터널이 있다.
안심터에서 공주군 정안면 산성리로 넘어가는 고개.주막거리 북쪽에 있는 높은 고개로
늦은목 고개 위쪽 꼭대기가 되는데 주막거리에서 천원군 광덕면 안심터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가 높은 곳에 있다 해서 꼭두재 또는 곡두티라 부른다.
고개길이 구부러져서 곡두재라고 불렀다 는 유래도 있다.
차량통행이 자주 있기는 하지만 대중교통은 없다.
곡두고개에서 탈출을 결심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내려오는 길에 옆 개울에서
젖은 옷을 홀라당 벗고 느긋하게 알탕(?)을 즐기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에
내려오니 봉고차에 문이 열려있어 길을 물으려고 다가서니 에공 망측도 해라
이 더운 날씨에 40대로 보이는 남녀가 홀라당 옷을 벗고 누워있는게 아닌가
대낮에 뭐하는 짓거리여... 민망하여 눈을 돌리니 본인들도 놀란 모양이다.
천안을 가려고 하는데 차량을 물으니 여기는 차가 없고 터널지나 30분 정도 가야만
한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터널을 지나오다 히치를 시도하는데 10분동안 태워주는
차가 없다. 그래도 계속 손을 들고 있으니 지나가는 카니발 한대가 서면서 타라고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천안가는 버스타는데 세워달라고 하니 어디를 가냐고 묻는다.
서울 간다고 하니 천안으로 가지말고 자기들이 온양을 가니까 온양온천역에서 전철을
타면 차비도 싸다고 하면서 온양온천역에 내려 주겠다고 한다.
어찌나 고마운 지...
곡두터널(16:50)
천안시 광덕면과 공주시 정안면의 경계로 62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지도상에는 호계터널로 되어 있다. 차량통행은 엄청 많은데 대중교통이 없어
불편하기 그지없다.
충남 82나 5957 카니발 승합차
곡두터널에서 온양온천역까지 50분동안에 걸쳐서 차량을 태워주고
고맙다고 인사도 하기전에 가버린 40대부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안하시고 복 받으시길 바랍니다
온양온천역(17:37)
온양온천에서 전철을 타고 금정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사당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선릉역에 하차하여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게에다
막걸리 한병 마시고 집에 도착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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