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07. 10
○ 산행날씨 : 장마철이라 비가오락가락. 안개로 인해 최악의 상항
○ 참석인원 : 나홀로
○ 산행거리 : G.P.S거리 : 21.6km / 8시간 40분 소요
○ 산행코스 : 배티고개-서운산-420봉-440봉-395.4봉-엽돈재-부소산-부소령-475봉-위례산성터-위례산
우물목고개-39번 철탑-북면 갈림길-천주교 성거산 순교묘지-성거산 공군방공부대
성거산 표시석-만일고개-걸마고개-상명대 삼거리-유왕골-각원사-천안 버스터미널
○ 소 재 지 :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서운면 / 충북 진천군 백곡면 / 천안시 입장면,북면,성거읍
정맥길 산행은 3주 연속 장마철로 인하여 비와 안개와 높은 습도와의 싸움(?)은 계속된다.
매주 내리는 비 때문에 내 자신이 자꾸만 지쳐가는 모습이다. 그래 어차피 내가 택한 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날씨야 하늘의 뜻, 미력한 중생이 그걸 어쩌랴
지난 한 주는 3번만에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여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감동도 있었지만
해병대 총기사고로 인해 무고한 젊은이 4명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生을 마감해야하는
안타까운 사고 소식도 있었다... 나 역시 몇년전에 아들을 군대보내 놓고 군부대 총기사고
소식만 접하면 가슴이 철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건만...
새벽 4시에 일어나 베낭을 꾸려 식구들이 깰까봐 도둑 고양이처럼 아파트를 나선다.
버스를 타고 경부고속터미널에 도착하여 설렁탕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안성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눈을 좀 부치려고 하는데 버스는 안성에 도착한다.
서울에 내리지 않던 비가 여기는 내리기 시작한다. 택시를 타고 이태재를 향하는데
이곳 이티재는 비를 몰고 오는 모양이다. 지난해 9월 첫주에 1구간을 끝내고 호남정맥
시작하느라 10개월만에 2구간을 시작하는데 그때 첫구간 후미에도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으니...
택시는 석남사 입구를 지나 중앙C.C 오르막은 마치 강원도 미시령 오름길 같이 급경사에
꼬부랑 길이다. 이티재에 도착하여 장비점검을 하고 우의를 입은 다음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조그만 땅덩어리를 가진 대한민국이란 나라 참으로 대단한 나라이다
‘88 서울 올림픽’, ‘2002 한일 월드컵’ 이어 ‘2018 평창 올림픽’까지 ‘트리플 크라운’의
위대한 30년 사이클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동계·하계 올림픽을 유치한 8번째 나라가 됐다.
FIFA월드컵과 세계육상선수권을 포함한 그랜드슬램 개최국으로는 6번째 쾌거다.
안성가는 고속버스표
06시 05분발 안성행 버스
안성고속버스 터미널(07:10)
안성 고속버스 터미널은 새로 생겼는지 아직도 편의시설도 별로없고
외곽에 위치한 탓인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서울에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택시를 타고 이태재로 향한다. 자꾸만 빗줄기는 굵어지고...
석남사 계곡을 지나 중앙C.C앞 이티재에 도착하니 빗줄기는 더 굵어진다.
이티재(梨峙:배티고개:07:40)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라는 지명의 유래는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이(梨)치 → 이티 → 배(梨)티] 즉
배나무고개라는 뜻이라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온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인근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으로 尹義炳(바오로)
신부의 박해 소설《은화》(隱花)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요즘에 산에 미쳐 있듯이 10여년전에 골프에 미쳐 있을 때 그린피 싼맛에 참으로 자주 들렸던 중앙C,C가 있는 곳이다.
그땐 정맥길이 뭣인지도 몰랐을 때였지...
생거진천(生居鎭川) 백곡면이라는 커다란 돌비석 뒤로 산행로가 열려있다.
여기서 생거진천이란 유래는 신라 말의 고승인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용인땅의
형세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며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이란 말이 생겨났는데 즉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서 산다는 말이다.
자귀나무 학명:Albizzia julibrissin.) 장미목 콩과에 속하는 낙엽교목. 높이 6∼9m.
잎은 2회깃꼴겹 잎이고 길이 20∼30㎝이며 잎자루가 있고 5∼12쌍의 깃조각이 마주난다.
작은잎은 길이 0.5∼1.5㎝이고 넓은 바소꼴이며, 각각 깃조각에 36∼58개가 달린다.
잎은 수면운동으로 인하여 밤에는 축 늘어진다.
6∼7월에 가지 끝에 십수 개의 두상(頭狀)꽃차례가 송이모양으로 달린다.
꽃은 1개의 두상꽃차례 위에 20개 정도가 핀다.
저녁 때 동시에 피며 분홍색의 긴 수술이 여러 개 우산모양으로 펼쳐진다.
5개의 꽃잎은 끝을 제외하고는 합쳐져 통모양이 된다.
열매는 9∼10월에 익으며 길이 15㎝ 가량의 편평한 꼬투리에 5∼6개의 납작한 종자가 들어 있다.
정원수 외에 농기구의 자루나 세공물(細工物)에도 사용된다.
자귀나무속(屬)은 세계에 약 150종이 있다.
한국을 비롯해서 중국.일본.히말라야.인도.이란에까지 분포한다.
원래는 열대성인데 자귀나무는 그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분포하는 종이다.
자귀나무 껍질은 맛이달고 성질은 평하다
혈액을 중화시키고 부서럼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다고한다.
무명 순교자 6인묘 가는 길
이티재에 출발하여 입구에 들어서니 억새와 잡풀이 팔을 할킨다.
초반부터 수난이다. 반팔을 입은게 후회스럽기만 하다. 흐드르지게 핀
자귀나무 꽃만이 산꾼을 반긴다. 조금 지나니 오르막에 안성시에서
설치한 로프에다 등로 관리를 참 잘 해놔서 편안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
비는 잠시 소강상태이다. 어찌나 더운지 레인코트를 벗어 베낭에 넣고
약하게 내리는 이슬비는 그냥 맞으면서 간다. 오히려 훨씬 시원하고 좋다.
안성맞춤 길
제 짝이 아니었던 것을 갖다 맞출 때 매우 잘 맞음의 비유나, 결혼을 할 때 생전에 보지
못한 사람끼리 부부로써 잘 어울린다고 할 때에도 "안성맞춤"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그 만큼 어떤 물건이나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릴 때 이런 말을 쓰는데 안성은 유기제품을
장인정신과 뛰어난 솜씨로 정성껏 만들어 품질이나 모양 등 기교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시켰기에 "안성맞춤"의 대명사가 되었다.
안성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후기 들어 상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안성의 시장도 발달하여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번성하였다.
안성에서는 시장의 발달과 더불어 각종 수공업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유기제품이었다.
시장에서 일반 서민들을 상대로 하여 파는 놋그릇을“장내기”라고 하였고, 한양의 양반들이 주문하여
특별히 그 모양과 품질을 잘 만든 놋제품을 “모춤”유기라 하였다. 안성모춤 유기는 그 품질이 믿을만하여
“안성모춤”이라는 말이 생겼고 그것이 오늘날 어원의 변화에 따라 “안성맞춤”이라는 일반명사로 쓰이게 된 것이다.
석남사 갈림길(08:20)
서운산 남쪽 기슭에는 청룡사가, 그 너머 동북쪽 기슭에 석남사가 있다.
안성시내에서 마둔저수지 너머 진천방향 313번 지방도로를 타고 호젓한 계곡길로
접어들어 10여 분 올라가면 세월의 무게와 역사의 기품을 간직한 천년고찰 석남사가
푸근하고도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수도승들이 유난히 많았던 석남사인지라 스님들의 손길이 곱게 묻어나는 것만 같다.
터를 다스린 석남사 경내는 서운산의 풍취에 푹 빠져들게하는 매력이 풍겨난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팔작지붕집이다.
날렵한 지붕끝이 숲속에 살포시 가려있어 단아한 운치를 더한다.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 초기와 중기 사이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경내에는 16나한이 모셔진 영산전을 비롯해 대웅전, 마애석불 등의
도지정문화재와 석탑, 부도 등 향토유적이 있다.
서운산 정상 삼각점(진천21, 1984재설)
서운산/瑞雲山(08:30)
안성시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는 547m이다.
경기도의 최남단인 안성시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을 경계로 차령산맥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성시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다.
아담하고 바위가 거의 없는 유순한 산세를 가졌다.
4월초가 되면 계곡과 능선에 진달래가 피고 5월이면 철쭉이 군락을 이룬다.
청룡사, 석남사 등의 산사와 청룡사 대웅전(보물 제824호), 청룡사 삼층석탑, 명부전, 관음전 및
조선 현종 때 주조한 무게 약 5톤의 동종 등의 문화재가 있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년)에 명본국사가 대장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로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건하면서 청룡이 서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하여 산 이름은 서운산,
절 이름은 청룡사로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에 홍계남이 수축하여 방어전을 전개하였던 산성이
있는데,반면식 토축산성으로서 서쪽 능선에서 남방향으로 해발 535m에서 460m 지점까지 펼쳐져 있다.
서운산성 안내판
안성의 진산이며 역사적 유래가 깊은 서운산 정상에 오르니 마치 남대문 시장 돗대기판을
연상케 할 정도로어지럽기만 하다. 전망대 공사를 하다만 것인지는 몰라도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고 막걸리 장사를 하는 사람은 비가와서 장사를 안 나와서
그 자리 역시 어지럽긴 마찬가지이다. 여기 저기 많이 만들어 논 나무의자를 봐서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찾아오는 곳인 모양이다. 이티재에서 이곳까지 3.2km를 50분만에 만에 왔다.
참으로 빠르게 왔다. 내리는 비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아 그냥 맞고 걸어간다.
청룡사 가는 길(08:40)
서운산은 청룡사와 남사당패, 바우덕이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이 아래 마을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베낭도 메지 않고
우산 하나만 달랑 갇고 산행하는 걸 보니 범여가 마치 아침 운동으로
대모산가는 형색과 같아 보인다
청룡사(靑龍寺)
1265년(고려 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법당 안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에
만든 5톤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무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건너편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
청룡사의 입구엔 사천왕이 없다.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원래 관음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조선 경종 2년(1722)에 만들어진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느낌을 주는 보살상으로서
양감도 비교적 풍부하고 고려시대의 조각을 계승하고 있으나 신체는
다소 장대해진 느낌이 든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길상좌를 한 이 보살은 적당히 살아있는 얼굴에 사실적
이목구비,이 세상에 비추는 광명을 나타내는 미간의 토톰한 백호(白豪), 둥글둥글한
머리카락을 높게 묶은 후 양 어깨 위로 다섯 가닥씩 흘러내리게 한 표현,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목의 삼도(三道) 등에서 단정하면서도 위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손 모양은 계율을 지키고 열심히 수행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극락세계를 의미
하는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옷은 두 어깨에서 한 번 접혀진 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고, 배 부분에 보살의
목이나 가슴 등에 늘어뜨리는 장신구의 하나인 영락이 표현되어 있다.
청동으로 주조된 점, 화려한 영락, 보발 표현방식, 얼굴과 신체의 사실성및 단아한
분위기 등에서 고려 후기 보살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단순화된 구슬 장식 등에서 조선 초기인 1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패
음악이나 예능능 팔아먹고 사는 집단 중에서 제도권 밖의 무리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런 집단으로 사당패, 굿중패, 솟대패, 풍각쟁이, 각설이패 같은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온갖 가난과 천대속에서도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해 온 잡초중에서도
가장 짓밟힌 잡초였다. 그런 가운데 들꽃같은 예술을 가꾸어냈으니 그들의 예술에는
야성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들은 가난하고 굶주린 프로였다.
사당(寺黨)이란 절에서 나온 무리로 조선시대 바깥의 연예집단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관대가 기본적으로 무속에 뿌리를 둔 것이라면 사당패는 불교에 뿌리를 둔 예능집단이다.
사당패는 사찰을 배경으로 하되 민간에 유랑하면서 소리를 팔던 남녀혼성 집단이다.
여자는 사당 남자는 거사라고 하였는데 엄밀히 말하면 불교가 사당패를 길러낸 것이 아니라
사당패가 절에 빌붙어 살았던 것이다. 사당패는 천한 광대보다 더 천한 집단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당패가 이곳 청룡사에 근거지를 안성 바우덕이이다.
안성 남사당과 바우덕이
청룡사 안쪽의 불당골은 100여년 전 나라안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안성 남사당패의 본거지.서민 사회에서 발생한 예인(藝人) 집단인 남사당은 성립 배경이나
연원은 확실치 않으나 일정한 거처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졌다.
남사당이 펼쳐온 놀이는 풍물, 대접돌리기, 땅재주, 줄타기, 탈춤, 꼭두각시놀음 이렇게 여섯 가지로,
밥 먹여주고 잠 재워 주면 다른 보수 없이도 밤새워 놀곤 했다.
이들의 은거지로는 경기도 안성·진위, 충청남도 당진·회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안성 서운산 불당골의 팔사당마을을 은거지로 삼았던
안성 남사당패였고, 그 인기의 한가운데엔 드물게도 ‘바우덕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바우덕이에 대한 일화 한 토막. 1865년 대원군 시절, 경복궁을 중건할 때 노역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남사당패 중 안성 남사당패가 인기가 있었는데, 특히 바우덕이의 노래·춤·줄타기는 일품이어서
넋을 빼앗긴 일꾼들이 빈 지게만 지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원군은 바우덕이의 가무를 칭찬하고 옥관자(정3품에 해당)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 지방에 전하는 속요엔 바우덕이의 명성이 잘 드러나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이런 대중적인 사랑에 힘을 얻은 까닭인지 1910년경 안성 남사당패는 꼭두쇠 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를 앉히는 대혁신을 한다. 그 후 그녀는 10여년간 남사당패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기예를 펼치다
결국 병을 얻어 스물세살의 처녀로 죽은 뒤 가마니로 둘둘 말린 채 눈속에 묻혔다.
다만 “청룡리 개울가 어딘가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더라”하는 입소문만 간간이 전해질 따름이었다.
바우덕이(1848∼1870 )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득(金岩德)으로, 그 이름이 바우덕이로 불리어진 내력을 생각하여 볼 때에
이름자에 나오는 岩이 바우임으로 <바우 + 德이 = 바우덕이>로 불리어진 듯하다.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이다.
조선시대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했으며, 5세 때 안성 청룡사 안성남사당에 입단했다.
15세 때 안성남사당 꼭두쇠로 추대되어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었다.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단체로서 전문 공연 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40∼5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간 대표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계획을 수립하여 기량을 연마하였고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줄타기, 탈놀이,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를 공연하였다.
440봉(08:55)
정맥길을 다니면서 개인소유의 농장이나 군부대 근처에는 의도적인 시그널이
달 지 않을 수는 있으나 이곳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꼬리표가 잘
보이질 않는다. 안성시에서 의도적으로 제거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사실 꼬리표는 대간이나 정맥 산꾼들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이 없는데 말이다.
길은 참으로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오죽하면 산꾼들이 나뭇판에다 메직으로 해놨을까?
매산리 석불 입상 (태평미륵)
안성군 이죽면 매산리 소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안성은 또한 미륵의 고장으로도 유명한데, 놀랍게도 곳곳에 많은 미륵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민중들이 힘든 현세를 벗어난 이상세계를 고대하며 세웠을 것이고
이에 미륵은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그들을 잠시나마 위로 했을 것이다.
'안성(安城)'이란 글자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편안한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드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해 농산물이 풍부하고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장이 서니,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옛날 신분제 사회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그 풍요로움이란
한갓 귀족이나 양반님네들의 것이었을 뿐이다. 유기장이의 끝없는 방자 두들기는 소리와
갖바치의 쉴새없는 손놀림, 장터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져주는 남사당패의 아슬아슬한
몸짓이 결코 그들에게 생활의 여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그러하니 이곳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안성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彌勒)'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땅이 되었고, 전국의 장사치들에게는 잘만 하면 크게 이문을 남길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며, 도적의 무리들에게는 한탕할 수 있는 탐나는 땅이 되었으리라.
그리하여 '안성'하면 조선시대 최고의 도적이었던 '임꺽정'(벽초 홍명희의 소설)의
주무대가 되었고, '장길산'(황석영의 소설)이 광대패거리로 떠돌다가 미륵의 세상을
꿈꾼 것도 이곳이었으며, '허생'(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이 매점매석으로 전국의
유통질서를 마비시키고 엄청난 돈을 벌었던 곳이 바로 안성땅이었다.
그러한 곳이기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미륵불'들은 바로 가난한 백성들의
구구절절한 염원을 최소한 700년 이상을 많게는 1천년 이상을 들으며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해온 것들이다. 절들 또한 이러한 백성들의 소원과 무관한 곳이 아니었다.
이쁘게 핀 나리꽃
드디어 엽돈재에 도착했다. 6.8km를 빗길에 2시간 10분만에 도착했다.
길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러나 무덥지는 않았으나 높은 습도와 짙은 운무로
인하여 주위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에 더 빨리 왔는지도 모른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하여 하는 수 없이 다시 레인코트를 입는다.
엽돈재(10:00)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등 삼도(三道)가 만나는 지점이다.
해발 고도 323m 로서 34번 국도가 여기를 지나며, 금북정맥(차령산맥)에
걸친 고개로 동쪽은 충북 진천시 이월면 , 서쪽은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
남쪽은 충남 천안시 북구 입장면이다.엽돈재를 다른 이름으로 엽전재(葉錢峙),
엽둔재(葉屯峙), 엽둔티, 율둔티 등으로도 불렀다.
고개이름 유래가 확실한 것이 없지만,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옛날 장을 보려고
이 재를 넘나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숲이 워낙 깊어 장꾼을 노리는 도둑이 많았던 관계로
엽전을 가지고 가던 사람은 모두 빼았겼다고 한다.
능선에서 바라본 五里霧中인 서수(西水)마을
서수마을을 서수원이라 하는데 엽돈재 밑에 있는 진천쪽 동네를 말한다.
백곡면 갈월리로 험준하고 깊숙하여 조선시대에는 도적떼들의 소굴이 있었다 한다.
그런고로 이 곳을 왕래하는 상인이나 나그네들은 이곳을 지나는 것이
큰 골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임걱정이 한때 이 곳에서 관원(官員)을 괴롭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국경을 이루고 있던 곳이기에 병정들이 진을치고 주둔했던
곳이 서수마을이다. 당시는 이 곳을 서술원(西戌院)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서수원(西水院)이라
부르며, 아직도 그 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또한 역마가 있던 자리여서 교통의 편의와 통신의 주역(主役)을 맡기도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안성사람인 홍계남(洪季男)이 의병 수천을 모군(募軍)하여 여기에 주둔하면서
왜군과 한바탕 싸워 이긴 곳이다. 그 후 이 곳 사람들은 왜군의 침략을 받은 일이 없이
편안하게 지냈으며, 조정에서 이 소문을 듣고 홍계남공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명했다.
엽돈재에는 홍계남이 왜군과 싸울 당시 쌓아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왠 금강 발원지?
엽돈재부터는 빗줄기가 상당히 굵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부터 경기도와 충북을 지나 충남지역에 들어선다.
그리고 짙은 안개로 인하여 10m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우의가 자꾸만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지고 우의속의 G.P.S 확인도
자꾸만 귀찮아진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이곳 근처가 만뢰지맥
분기점이라고 표시한 아크릴 표식판도 놓쳐 버리고 갑자기 나타난
금강샘 원천 발원지인 ‘깊은샘 400m’라는 나무표시판이 나타난다
이~잉 이게 무슨 소리야 금강 발원지는 분명히 전라북도 장수군 신무산에
있는 뜬봉샘이 맞을 터인데 여기가 금강 발원지라니 이 무슨 괘변인가?
하긴 한남,금북구간 보은의 보현산 오름길에도 금강 원천수라고 써 놓긴
했지만 지역 이기주의로표시하지 말고 정확한 고증을 했줬으면 한다.
새벽 5시 30분에 아침을 먹은 탓인지 배가 꽤나 고파온다.
빗줄기는 자꾸만 더 세어지고... 숲이 우거진 곳에서 찹쌀모찌 2개에다
바나나 한개를 먹고나니 조금은 살 것같다. 물을 마시는데 빗물을
먹는지 생수를 먹는지도 모를정도이다. 10분간의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고
바로 눈 앞에 나타난 459.1봉(부소산)이 나타난다.
부소산(扶蘇山:459.1m/10:40)
백제사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으로 부터 북동 100리땅을 봉토 받아
백제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을 세운 곳으로 전해진다.
부소모이 고개는 부소산과 위례산성을 이어주며 부소령, 부소치, 부소문치 등 으로
규장각 고지도에 전하며 일면 부수문이고개라 불린다.
비류와 온조가 첫 도읍지를 정하는데 부소는 솔(松)의 뜻이며 백제어로 부소모 이었다
부소산 정상에서
부소산에서 인증 샷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나서는데 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오늘 계획했던 산행이 유량리까지 계획을 했는데 아무래도 그곳까지는
무리일 것 같아 유왕골(각원사 삼거리)까지 가야 할 것 같다.
자꾸만 날씨는 덥고 높은 습도로 인해 지쳐만 가는데 비는 오락가락하기만 한다.
우의를 벗으면 비가 쏟아지고 우의를 입으면 비는 약해지며 우의로 인해 엄청나게 덥고...
20분만에 부소령으로 내려오니 전주 최공과 청주 곽씨의 합장묘가 나타나고
도로가 나타 나는데 갑작스레 왁작지껄하여 보니 가족들인지 친구들인지는
몰라도 무쏘 차량에 6명이 내려서 1회용 우의를 입고 산행을 준비한다.
부소령(274m11:00))
부소문이 고개라고도 하는데 57번 지방도가 천안 입장면 양대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는데서 연유하는데, '부소'는 '솔(松)'이라는 뜻으로
소나무산 고개라고도 한다.
부소령 표시석에 표시한 부소령 설명석이 있는 부소이문 고개(扶蘇門峙)
충남 천안시의 동남구 북면 운용리와 입장면 양대리 경계에 위치한 고개이다.
『팔도군현지도』(목천)와 『조선지도』(목천)에서 직산, 안성과의 경계부에 부소치(扶蘇峙)가 나타난다.
『조선지형도』에 북면 운용리와 입장면 양대리 경계에 부소령(扶蘇岺)이 있다.
백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한 위례성에 대하여는 광주위례성설과 직산위례성설이 있다.
이곳은 직산 위례성설의 그 위례성과 가까운 곳으로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으므로 부소문이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부수문이문 고개에서 위레산성까지는 완전히 뒷동네 마실가는
기분으로 1시간 가량을 편안한 길을 오른다. 중간중간 나무 벤치를
천안시에서 많이 해 놓은 것을 봐서 이곳으로 산행을 많이하는 기분이다.
빗줄기가 다소 가늘어지기에 다시 우의를 벗는다. 우의를 입으면 마치
사우나 하는 기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덥기에...
멋진 소나무와 벤치는 이 구간에 여러곳이나 있다.
위례산성과 입장가는 길의 갈림길
45분정도 걸으니 우측으로 거봉포도로 유명한 천안시 입장읍으로 가는 길이 나타나고
사람소리가 들린다. 좌측 90도를 꺽어서 300m 정도 오르니 위례산성이 나타나고
커다란 돌탑 2개가 나타난다. 이젠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버려 사타구니가 쓰라리다.
부소산 위례성의 혼불체화 플랑카드
524봉(11:50)
524봉에 오르니 커다란 돌탑 2개가 비맞은 새앙쥐꼴의 산꾼을 반갑게 맞는다
돌탑 옆에는 삼각점(△447재설, 78.10 건설부) 이 있고 주위에는 잡풀이 많이
돗아있고 세계대백제전 혼불체화및 온조대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보인다.
거기서 200m 정도 내려오니 위례산성 안내판과 위례산 정상석이 나타난다.
524봉삼각점(△447재설, 78.10 건설부)
위례산성(慰醴山城:12:00)
백제사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으로 부터 북동 100리 땅을 봉토 받아
백제 첫 도읍지 <하남 위례 해발 525.9m인 위례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태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950m 정도이다. 성벽은 토.석혼축 공법과 석축공법의 2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은 부분을 자연암반을 평탄하게 고른후
1.5m너비로 2열로 돌을 평행으로 쌓고 그 위에 흙과 잡석 및 기와조각을 섞어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5m이고 돌로 쌓은 성벽은 경사가 급한 40m 구간에만
남아 있는데 주로 자연함석으로 쌓았는데, 현재 높이는 4m정도이다.
이성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백제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으로 보기도하나 조사결과
도읍성이라기 보다는 방어를 위하 산성으로 보인다.
위례산(523m)
위례산은 직산위례성, 검은산, 신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산줄기가 연봉을 이루고 있고 북쪽 비탈면이 급경사를 이루어
천연 성벽 역할을 한다. 산 정상의 위례성터에는 둘레 550m,
높이 약 3m의 흙으로 쌓은 산성을 비롯하여 식수로 사용한 듯한
우물 '용샘'과 문받침돌로 여겨지는 큰돌 반쪽이 남아 있다.
안성의 서운산성은 남향으로 축조되어 이 성과 마주하는데
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직산위례성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이곳은 그동안의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백제의 첫 도읍지가
아니라고 부정되었다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고 한다.
위례산 정상에는 얼마전에 행사를 진행한 모양이다. 그런데 주변 정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꼭 똥간에 가서 볼일보고 똥구멍 안딱은 것처럼 여기저기
풍선을 비롯한 쓰레기들이 널려있어 보기가 영 좋질않다. 어느 단체에서 주관을
한 지는 몰라도 적어도 산에서 하는 행사는 이렇게 하면 안되지... 산에서
행사를 하지 말던지... 우측 저 아래에 짙은 안개속에 입장읍이 아련히 보인다.
위례산 정상에서 우물목 고개까지 2.4km 구간은 너무나 편한 길이다.
가는 빗줄기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주위에는 나무들이 빽빽하여 상당히
어두운 느낌이고... 중간중간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하얀 들꽃은 너무나도
아름답게만 보인다. 잠시 후 임도가 나타나고 곧 우물목 고개가 보인다.
우물목 고개(12:40)
40분간의 편안한 내림길을 내려오니 볼록한 고개가 나타나고
이곳에 코팅한 우물목 고개란 표시가 보인다. 그리고 돌탑과
나무에 여러가지 색의 천을 나무에 휘감은 것을 보니 이곳은
매년 祭를 올리는 성황당인 듯 싶다. 다시 미끄러운 고개를 오르니
39번 송전탑이 보이고 저 산 넘어 시커먼 먹장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한바탕 큰비가 쏟아질 듯 싶다. 자꾸만 맘이 급해진다.
NO39번 송전탑
성거산 갈림길(12:50)
39번 철탑이 있는 곳에서는 사리목 마을과 사리목고개 뒤쪽의
성거산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폭우성의 큰비가 쏟이지기 시작한다.
이왕지사 다 젖은옷 그냥 비를 맞고 간다. 숲속을 헤쳐나오니 철봉과 평형봉 등
체육 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우물목고개 삼거리에 도착한다.
삼거리 왼쪽 시멘 포장도로는 사리목고개로 향하는 길이라 아스팔트로 포장된
천주교 대전구교 성거산성지 방향으로 오른다. 아스팔트 포장도로에는 물이 너무
많이 내려와 금방 등산화가 다 젖어 버린다. 이곳은 정상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야 하는데 그나마 다행인게 퇴악볕에 안 걷는것만도 감지덕지이다.
성거산 천주교 순교성지(12:25)
우물목고개에서 성거산 군부대길로 오르는 중간에
천주교 성거산 성지를 만난다. 제1줄무덤 표석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제2줄무덤이 표석이 나온다.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 부터 병인박해(1866년) 끝날
때까지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살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특히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성거산 교우촌 출신 순교자 23명중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소학골 출신 5분의 순교자들과 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 안내 표시석에서 인용
오늘 출발한 배티재 바로 아래 배티성지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당시 산속에 은거하며 포교활동을 하던 교도 30여 명이
관군에게 모두 학살을 당한 곳으로 무명의 묘소들이 즐비한데
대간이나 다른 정맥들과는 달리 천주교가 금북정맥 끝 안흥진을
경유하여 유입되었기 때문에 인근에 순교지가 많은 것 같다.
성거산 천주교 성지 안내 표시석
천주교 순교 성지 앞에서 바라본 천안시 성거읍과 천흥 저수지
성거산 정상까지 가는 길의 아스팔트 도로는 왜 이리도 멀어 보이는지?
걸어도 걸어도 안개속에 끝이 보이질 않는다. 빗방울은 자꾸만 더 굵어지고...
이젠 거의 폭우성에다가 천둥 벼락까지 쳐댄다. 산꾼들은 산길을 잘 걸어나
아스팔트길은 참으로 힘이든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힘이들고...이젠 비를
너무 맞은탓에 추위까지 엄습해온다. 하는 수 없이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추장스런 레인코트를 다시 입어야만 했다.
성거산 정상에 자리잡은 공군 방공포 부대(13:50)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곳은 공군 방공포 부대인 8352부대가 정상을
차지하는 바람에 부대 정문에서 좌측으로 우회를 해야 한다.
산이 높은 탓인지 세찬 비바람이 꽤나 심하게 불어 자꾸만 추위를 더 느낀다.
국가 안보를 어쩔 수 없단 치더라도 주위에 정리가 안되어서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국가 안보를 위해 성거산을 차지한 것은 백번 천번 이해하나
대민봉사 차원에서 우회로를 만든 정맥길에 풀이라도 좀 제거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군부대 정문에서 좌측으로 돌아 철조망을 끼고 걷는데 잡초와
억새풀 노란 나리꽃이 범여의 키보다도 더 높다. 한달전에 금왕에서 헬기부대옆
숲에서 독사를 밟아 놀란 기억땜에 조심해서 길을 걷는데 반팔을 입은 탓에
팔뚝은 상처투성이다. 정글을 헤치다시피 약 20분간을 걸으니 마루금은 왼쪽으로 떨어진다.
움푹 꺼진 안부를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지나 성거산(聖居山 579.1m) 정상석이 나타난다.
정상석 뒷면에는 성거산의 유래를 기록하여 놓았다.
공군부대에 정상을 빼앗기고 엉뚱한 곳에 있는 성거산 정상석(14:10)
성거산 정상 아래에는 이 빗속에 후라이를 쳐놓고 비를 피하면서 라면을 꿇여먹는 산꾼 4명이 보인다.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침만 꼴깍 삼키고 그냥 지나간다. 잠시 아주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벌목을 하여 이리저리 어지렵혀 있고 우측에 임도 같은 길이 나타나며 잠시 후
아주 편한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만일고개(14:30)
만일고개라는 이름은 아마도 만일사가 있는 갈림길이라서 그렇게 부르는듯하고
아니면 그 아래 마을이 만일리라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곳부터 산길은 완만하며 순해진다. 만일고개를 지난 뒤 10여분 후에 또 다른
검정색 사각계단을 내려서니 양쪽에 민초들의 기원을 담은 돌탑이 나타난다.
이정표에는 ←취암산 9.2km 태조산 3.4km ↓ 송전리 1.3km ↑만일사 1.1km
→ 성거산 0.7km라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잠시 후 영인지맥 분기점이 나타난다
영인지맥
영인지맥은 칠장산에서 태안의 안흥진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성거산과 걸마고개 사이의 분기점
(충남 천안시 안서동과 목천읍 송전동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봉우리임)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쳐
천안시 북부시가지를 지나서 노태산(141m),천안 제3,4공단을 지난다.
아산땅으로 들어선 후 용와산(238.3m),연암산(292.7m),둔덕산(225m),국사봉(222.5m), 금산을 넘어 영인산(363.9m)을
일군후 입암산(207.4m)에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44.8km의 산줄기로,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공세리에서 그 맥을 아산만에 넘기고 있다. 아울러 이 산줄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안성천으로 흘러 들고, 이 산줄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곡교천으로 흘러들며, 두 물줄기는
모두 서해로 흘러간다
걸마고개(14:40)
예전에 칡이 많이 나서 '갈(칡葛)뫼'가 갈마고개가 되고 다시 걸마고개로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등산로가 반질반질하여 칡은 구경도 할 수없다.
걸마고개에는 이정표가 두개나 있는데 역사의 고장 천안답게 하나는 만일사와 삼뱅이(메일골)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계성군의 묘'와 '숙의하씨 묘'를 가르키고 있다.
숙의 하씨 묘?
'숙의하'씨는 영의정 '하연'의 딸로 부인을 열둘이나 두었다는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후궁중 하나이고,
'계성군'은 '숙의하'씨 소생이라고 한다. 조선 성종(9대) 시대의 모자(母子)로 성거산 방향에는
계성군의 묘와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을좌에 있었는데 1971년 서울시의 도시 확장 계획으로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신대동 메일골 신좌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상명대 삼거리(14:55)
유왕골 삼거리(15:00)
천안시 목천읍 덕진리 자연부락으로 이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유왕골이 나오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오늘 산행 날머리인
각원사가 나온다. 유왕골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천하를 살피고 머무른
마을이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입구에는 유왕골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은 대부분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다.
유왕골도 왕건(王)이 머물렀던(留) 골짜기란 뜻이다.
유왕골 고개엔 정자가 있어 지역 등산객들이 많이 쉬고 있다.
이정표엔 "좌측 약수터/우측 좌불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각원사 버스 정류소(15:20)
또다시 빗줄기가 굵어진다. 청동 좌불상이 있는 각원사는 온 몸이
젖어있어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정류장으로 향한다.
각원사는 내가 조계종 포교사로 품수를 받은 후 처음으로 사찰 연수를
받은 곳이라 기억에 세롭다. 벌써 11년 전이니 말이다.
2주 후에 다음 구간 들머리 때에 들려서 참배를 하고 산행을 시작할 참이다.
천안 버스 터미널
각원사에서 24번 시내버스를 타고 20분만에 도착한 천안 시외버스 터미널
이곳은 시외버스, 고속버스, 백화점, 할인점, 극장 등 복합건물이라
번잡하기가 이를때가 없다. 일단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돌솥 비빔밥과
막걸리 한병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천안에서버스에 몸을 싣고 잠을 청하려 하였으나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장마철에 차량들이 적게 나온 탓인지 고속도로 전용차선은 거의 밀리지가
않아서 서울 남부터미널까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서 도착을 한다.
천안에서 서울까지 범여를 태우고 온 시외버스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금북정맥 (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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