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10년 10월 9일~10일(무박산행)
산행구간: 지경고개-계명봉-계명고개-장군평원-장군봉-미륵불마애상-고당봉-금샘
세심정-북문-원효봉-의상봉-제4망루(577봉)-동문-산성고개-너럭바위
야영장 삼거리-남문-만덕고개-쇠미산(368.5봉)-만남의 광장-611봉-불웅령
백양산-애진봉-유두봉-삼각봉-개림초교-L.G아파트-개금고개
거리및시간: 약30km / 10시간 30여분 소요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천상병 님의 바람에게도 길은 있다)
낮에 학교의 북한산 둘레길에서 행사를 마치고 부지런을 떨어 오후에 예식장
2곳에 들렸다가 사무실에 와서 밀린 업무와 월욜부터 들어갈 작업에 대한
준비를 직원들에게 지시하고 다시 저녁 모임에 들렸다. 그리고 일욜에
있는 결혼식 3곳은 지인들에게 봉투를 부탁하고...요즘 사는게 말이 아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인지 아님 껍데기로 사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참으로
많다.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와 평소의 실력대로 낙동길의 베낭을 꾸린다.
오랫만에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저녁식사를 육식으로 한탓인지 배가
영 불편하다. 아무래도 저녁에 육식은 내 몸에는 맞지 않은 것 같다.
24절기 중의 열 일곱 번째 절기인 한로(寒露)도 지난 8일에 지나고
또한 제비가 길을 떠나고 기러기가 찿아 든다는 날
육신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心)이 떠나지 않았다면 정(情)은 찿아 들겠지
탑승장소인 양재역에 나갔더니만 늘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이 이젠
산꾼 동료이상으로 살갑기만 하다. 이 분들 역시 나 못지않은 대간,
정맥길에 맛이 간(ㅋㅋㅋ) 진정한 등산 메니아들이다. (......)
이제 낙동정맥길도 서서히 마무리를 한다. 오늘은 부산 금정구 노포동과
경남 양산시 사송동의 경계인 부산 지경고개에서 시작하여 부산시내의
4개구(금정구, 동래구, 북구, 부산진구)를 거쳐서 개금고개까지 꽤 만만찮은
길을 걷는다. 자두농원을 지나 개명봉을 오르는 길은 시작부터.... 고도를
150에서 600을 직선주로로 높이니 초반부터 입에 단내가 난다.
45분에 거쳐 계명봉 안부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이 산꾼의 수고로움을 덜어준다.
釜山의 眞山인 금정산 구간을 걷는다. 금정산은 부산 사람들과 애환을 같이한
땔래야 뗄 수 없는 산이 아닌가? 그 옛날 부산이란 명칭을 쓰기 전인 東來라는
시절부터 말이다. 그 만큼 많은 굴곡의 역사와 삶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곳이기도하다.
마루금에서 꽤 벗어나 장군봉가는 장군평원은 이슬에 젖어 촉촉하다.
그러나 기분은 쿨하고... 장군봉을 찍고 다시 내려와 만난 옹달샘에서
마신 약수는 왜 이리도 꿀맛인가... 고당봉 가는 길은 참으로 편하다.
서서히 일출은 시작되고 마애입상에 들려 산꾼도반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금정산의 정상인 고당봉을 향한다. 고당봉 정상에서 저 아래 물금읍과
지난 3월 낙남정맥 시작점이었던 신어산은 운무에 휩싸여 아침 기지개를 켠다.
오늘 산행길의 주능선인 금정산은 불교와는 뗄래야 뗄 수없는
불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산이다.
자두농원에서 오름길에 처음 만나는 계명봉, 고당봉이 ㄷ자 형태로
싸여 그 안에 선종사찰을 표방하며 왜색불교에 불교를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면서
한국정통불교로 되돌려 놓은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범어사(梵漁寺),
그리고 원효봉과 의상봉 그리고 금정산의 품안에 있는 수많은 사찰과 암자들...
과연 부산이란 도시가 불교의 성지답다.
부산은 우리나라 도시중에 불교 신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흔히 불교에서
하는 얘기중에 경상도 몸빼부대(불자를 말함: 기도하거나 절을 할때 몸빼처럼
생긴 회색 기도복을 비유하며 몸빼부대라고 함)가 아니면 우리나라 사찰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경상도 지역의 불교세가 강한 지역이다.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2000여년 동안 이 땅의
뭇 중생들의 애환을 같이했고 이 땅에 위기가 있을때 마다 승군(僧軍)을 일으켜
앞장서서 이 땅을 지켰던 서산, 사명대사 그리고 일제에 몸을 던져 항거한 만해(한 용운),
용성선사의 기백이 가득한 이 땅 부산의 불교가 널리 융성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의 95%이상이 불교 유물인데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최근 100년밖에 안된 기독교세에 밀려서 맥도 못추는 불교가 불자의 한사람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심정 광장에서 아침상을 물리고 부지런히 먼길을 재촉한다.
원효봉, 의상봉, 동문을 거쳐 산성고개에 도착하니 하루 먼저 출발한
배슈맑 선배님이 시원한 캔맥주를 시켜놓고 기다리신다.
캔 하나를 마시고 너럭바위를 오른다. 이젠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동래와 저 멀리 해운대까지 조망이 된다.
남문을 찍고 마루금을 타는데 이상하다. 선두대장의 리번을 보고 갔다가
그 길을 한바퀴 다시도는 알바를 한다 슈맑님에 따르면 이곳 남문마을
가게들이 영업을 위해 리번을 상가쪽으로 돌려놓는다고 한다.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다는 산성막걸리와 동래파전을 맛보는
부수적인 수확도 올렸다. 만덕고개에 도착하여 다시 막걸리 한사발로 목을
축이고 서둘러 떠난다. 이곳은 완전히 유원지다. 때지어 다니는 행락객 땜에
전문산꾼(?)들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거기다가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쓰레기와
돗자리를 깔아놓고 취사도구로 요리해 먹으면서 음식냄새로 산을 버려 놓는다.
백양산 오름길은 정말 힘이든다. 산행시간 9시간 정도되니 서서히 체력이 소진
되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오늘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더위가 더 지치게 만든다.
백양산에 도착. 젠틀맨님과 방초님의 베낭에서 마지막 만찬을 남겨둔 막걸리로
정상주를 마시고 부지런히 하산하여 지인과의 약속 장소인 구포역으로 향한다.
알 수 없으나, 1402년(태종 2) 1월 28일'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며,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 '성종실록'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 이후 한동안 富山과 釜山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산천조에 보면,
"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그 산은 아마 좌천동의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로(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甑)와 가마(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의 산행구간 지도및 고도표
부산 지경고개(부산시 금정구 청룡동과 경남 양산시 동면의 경계 :03:50)
지경고개에서 간단하게 워밍업을 하고 곧바로 산행길을 나선다.
자두농원을 지나는데 쥔장이란 자가 출입금지란 팻말과 함께
꼭 지넘닮은 개새끼 여러마리가 새벽길의 산꾼들을 금방이라도 물어
뜯을듯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 태세다. 부산 노포동 양묘장을
지나 계명봉을 향한 길은 코가 땅에 닫을 정도로 된비알을 치고 오른다.
초장부터 입에 단내가 난다. 고도를 150에서 600가지 오르려니
참으로 힘이든다. 거기다가 이곳이 육산이다보니 게속해서 내린 비로
인해 지표가 젖어 상당히 미끄럽다. 자꾸만 스틱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보니 오른쪽 아픈 팔이 더 아파오기 시작한다.
40여분을 치고 오르니 옷이 벌써 다 젖어 버린다. 다행히 안부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은 불어주면서 갑자기 눈앞에 계명봉이 나타난다.
여기서 저 아래 범어사가 가장 잘 보이는데 칡흙같은 어둠을 헤치고
계명고개로 급한 내리막길을 향한다.
계명봉(鷄鳴峰 601.7m :04:30) |
지난날에는 이 봉우리가 독립된 산으로서 계명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이 봉우리는 금정산의 지맥이 장 군봉에서 동남쪽으로 급격히 쏟아지다가 범어사 부근에서 다시 불끈 치솟는 다소 독특한 형세를 하고 있어 범어사의 앞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鷄鳴이라는 명칭은 불교적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듯이 즉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으로 이것은 밤기도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에 정진을 하 던 납자(衲子)들이 새벽 2시쯤이면 일어나 예불을 드리던 그때 맑은 하늘 날씨에 총총한 별을 보고 가늠했지만 흐린날이 되면 하늘에서 닭울음소리가 시간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닭울음소리가 들려와 예불시간을 알려 주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하여 계명봉(鷄鳴峰)이라 했다고 한다. |
계명고개(04:45)
계명봉에서 인증 샷을 하고 다시 뚝 떨어진 내리막길을 만나다.
꼭 기분이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갑지기 불안해진다. 다시 얼마나 올라가야 하느냐는 생각에...
칡흙같은 어둠속이라 아무 예상도 할 수 없고 오직 지도와 네비게이션만
의지한체...이 고개는 좌측으로 내려가면 양산시 사송리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범어사 내려가는 길이다.
화랑 낭도들의 얼이 서린 장군봉(735.5m :05:25) |
금정산에서 가장 북쪽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장군봉이다. 해발 727m인 이 장군봉은 양산군 외송마을에서 은동굴을 거쳐 고당봉이나 범어사로 산행을 할 때 반드시 거쳐오는 봉우리이기도 하다. 장군봉은 고당봉 북쪽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부산시내에서 금정산을 찾는 사람들은 별로 찾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 장군봉은 주변 일대가 억새밭 천국으로 독특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한여름철의 파란 억새 물결, 그리고 가을의 억새꽃 군무가 기막히게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한다. 천여 년 유구한 세월동안 그 푸름을 자랑해 오고 있는 키가 작은 소나무를 '김유신 솔바위'라고 불러 왔다. 김유신은 통일을 기원하는 내용인 '적국이 자주 침범하여 죄없는 백성은 피를 흘리게 되오니 저는 소동이 오나 적을 소탕할 뜻을 품었사오니 천지신명이시어 굽어 살피시사 저에게 힘을 주소'라고 솔바위에서 기도 를 올렸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김유신 장군은 화랑단의 낭도들을 이끌고 낙동강을 굽 어보면서 청소년들의 호연지기와 무예를 연마하고 통일을 기원하는 등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았다. 이곳엔 장군의 얼이 서려있어 '장군봉'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마루금에서 꽤 벗어난 장군봉을 찍고 다시 되돌아 내림길에서 만나서
마신 한줄기 장군봉 옹달샘의 물맛은 참으로 기가 막힌다.
이곳은 부산시 금정구와 양산시의 경계 능선의 마루금을 타고 넘는다.
고당봉을 향한 길은 참으로 편안하다. 부산근교의 산이라 그런지
길은 참으로 잘되어 있는데 이정표는 관리는 엉망이다.
지나구간 양산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금정구청장 나리 좀 신경쓰소
차기를 생각해서라도 말이요. 민심은 천심이란 말도 모르오
고당봉 가는 길에서 일출을 맞이하고(06:30)
마애여래입상(06:20)
마루금에서 300m 벗어난 범어사 북쪽 화강암 절벽위에 있다.
경남 양산시 가산리에 마애여래입상을 들렸다 가기로 간다.
약간 내림길에 들어서니 귀에 익은 염불소리가 들린다.
입상의 높이가 12m, 폭이 2m나 되며 전체적인 조형기법으로 볼 땐
통일신라시대의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이 된다.
지금 시간대는 새벽예불은 아닐테고 기도복 몸빼바지를 입은 보살이
마당을 돌며 염불을 끝내고 마당을 쓴다. 이곳은 불교종단 소유는
아니고 개인소유란다. 약간의 사머니즘적인 요소가 보인다.
마애여래입상 오름길에서 만난 구절초와 쑥부쟁이
전설에 의하면 그 옛날 가난한 대장장이 딸 순이를 불쟁이의
딸이라는 뜻으로 쑥부쟁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상처를 입은
사냥꾼을 치료해 주었는데 박 정승의 아들 재룡이었다.
순이곁을 떠난 재룡이는 가을에 오겠다고 떠난 후 몇년이 지나도
오질 않다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났다. 결혼한 후였다.
하지만 재룡이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듬해 순이의 무덤에서 보라빛 들꽃이 피었는데
동네사람들은 이 꽃을 순이의 별명을 부쳐 쑥부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당봉 가는 길의 암릉에서 저 건너 신어산 운해를 배경으로...
고당봉 오름길 아래서
고당봉 오름길의 철계단
참으로 실망스럽다. 산으로 보호하기 위해 오름길에 데크목으로
시공한 것은 이해를 한다지만 스텐레스 원형계단은 아름다운
고당봉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망쳐 버렸다. 디자인이란 조화를
이뤄야하는데 이건 아니다. 언바런스다. 민초들의 녹을 먹는 나리들
제발이지 현장에서 확인 좀 합시다. 당신 개인소유면 이런식으로 하겠소.
고당봉 정상에서 바라본 金井山群
고당봉(姑堂峰, 801.5m : 06:40)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의 주봉으로 부산시가와 부산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당봉은 우리나라 10대사찰 중 하나인 범어사에서
산길을 따라 2.5㎞를 걸어 올라가면 1시간이 걸리며 금정산성
북문에서 0.9㎞의 거리에 있어 바로 올려다 보인다.
금정산의 최고봉이면서 금샘〔金井〕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의상 대사의 뜻에 따라 고당봉(高幢峰)으로 명명되었다고 하는
고당봉이란 범어사를 창건하게 되었음을 알게하는
'고당(高幢) 주령은 一山의 靈을 진하여 諸佛의 도량을 스스로 지었으며····'
라는 기록을 근거로 들기도 하였다. 또 다른 근거로는
≪범어 사 창건사적≫에 의상대사가 대왕과 함께 금샘이 있는 곳을
찾아가 7日 7夜를 독경한 곳이 바로 금정산 고당봉이며,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사부대중을 위해 일승법문을 하였다고 한다.
금정산 10봉중 최고봉으로 하늘에서 천신인 고모(姑母)할머니가
내려와 산신(山神)이 되었다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는 바,
정상 바로 아래에는 고모당(姑母堂)이라는 기도처가 있다고 한다.
아무 무속신앙인들의 주장이 아닌가싶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밀양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하면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면서 불사로 사부대중 들끼리 칭송이 대단 했다고 한다.
어느날 이 보살은 큰스님께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高堂祭)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돕고 지어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큰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1년에 두 차례(정월보름날과
단옷날)에 제사를 지내니 범어사가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되었다."
고모당(故母堂)이 영험한 곳
고당봉에 자리한 고모당은 그 존재가 아주 절묘하다. 무당과 보살들이 밤낮없이 들끓는가 하면,
스님들이 정성껏 당제(堂祭)를 모시기도 한다. 일년 내내 무당들이 점령하고 있다시피 하지만,
이 건물은 범어사에서 세웠으니 주인도 물론 범어사이다.
이처럼 불교와 무속신앙이 혼재하고 있는 것도 고당봉에 어린 양기의 영험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 하기가 어렵다.
고모당은 육중한 돌담을 두르고 튼튼하게 지어져 있지만, 당집의 규모가 워낙 작은 데다 그 내부도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다만 좁다란 두개의 나무 판자에 각각 '고모영신(故母靈神)' '산왕대신(山王大神)'이라 적어 놓은 것만 벽에 기대어 놓았을 뿐이다. 이 작은 건물이 고모당과 산신각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샘(金井 : 07:00)
'금정산은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는데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가 3장(丈) 가량이다 그 위에 샘이 있는데
둘레가 10여척이고 깊이가 7촌(寸) 가량으로 물이 늘 차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색이 황금과 같다. 금어(金魚)가
5색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으므로
산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그 산 아래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라 이름했다' 한다
고모당을 지나 데크계단을 내리자 마자 금샘 가는길이 나타난다.
조금만 방심하면 금샘 가는길은 놓치기 십상이다.
방초님과 대헌님, 새로 오신분과 함께 들린다. 마루금에서 400m
벗어났다고 하는데 느낌에는 꽤 멀기만 하다.
도착하니 이 신성한 곳에 음식쓰레기, 과일껍질등을 아무데나
버려져 있고 들고양이들이 우굴거린다. 명색이 부산 진산이라는
금정산을 상징하는 금샘의 관리는 F학점이다.
관리주체 하는 기관이나 이곳 사람들의 산에 대한 의식수준은 알만하다.
세심정(洗心井:07:20)
마음을 씻는 샘이라... 참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아침 만찬은 이곳 넓은 공터에서 이뤄진다. 각자 싸온 도시락으로
펼치니 아침에 부페상이다. 오늘은 부산이라는 도시를 자나다보니
산꾼들이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인다. 오랫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30여분간에 걸친 식사를 끝내고 원효봉을 향한다.
금정산성 북문(07:50)
금정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미륵암
미륵암은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다.
이 곳에는 한가운데 위치한 염화전 뒤편의 거대한 바위가 스님이 좌선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선바위'라 불리우고 있다. 이 바위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모자이크한 듯이
어울려 있는데, 해가 지고 난 뒤 바위와 바위 사이의 금이 보이지 않게 될 때
보면 그 형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좌선바위 뒤편에는 미륵불과 닮은 미륵불을 향해 좌선을 하고 있는 형상의 절묘한 터에
원효는 기도도량을 세운 것이다. 미륵암이라는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운해로 가득한 양산 물금읍과 저 낙동강 너머 신어산의 모습
범어사(梵漁寺)는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로 불린다.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678년)시절에 의상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중의 하나로 설립하였다.
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고 서로 돕고 이해하며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실현하고자 설립된 사찰이다.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사찰인 범어사는 역사적으로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도인들을 배출한 사찰로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원효대사, 표훈대덕, 낭백선사, 명학스님과 그리고 근대에 경허선사,
용선선사,만해선사(한 용운) 동산선사 등 고승등이 수행 정진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지금은 정여스님이 주지로 주석하고 계신다. 선찰 대본산으로서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으로 참선을 통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잡념과 망상을 쉬게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의 참다운 불성(佛性)을 깨닫게 하도록 마음을 수행하는
근본도량이라는 뜻이다.
"범어 범(梵)"이라고 쓰는 梵 자는 흔히 불경 범(梵)이라고도 한다. 즉 불경을 뜻하는 말도 된다.
이 글자는 佛家에서는 많이 쓰는 글자이나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한자가 아니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불교학을 전공한 사람이나 '고대 인도語(梵語)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사용을 잘 안하는글자이다.
고대 인도의 옛글자 산스크리트語를 音譯한 "소리글자"이기 때문이다.
原語는 "Brahman"이고 漢文으로 音譯한것이 "梵"입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단순 音譯한것이 "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범"의 뜻을 알려면 "Brahman"의 뜻을 알아야하고... "梵"의 뜻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Brahman"은 산스크리트語에서 "우주(宇宙) 만유의 근본(根本)"을 의미하며,
불교에서는 音譯한 "梵"에 순수 한자인 하늘"天"까지 합쳐 "부처가 사는 하늘 나라(梵天)"를 의미합니다.
"梵魚寺"는 금정산에 있는 "금샘 金井"에 "梵天에서 내려온 물고기"가 노닌다고 "하늘나라 물고기"라는
의미로 의상대사가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제 닉인 범여(梵如)도 같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2009년 음력 초사흘날에 범어사 입구에서
화엄십찰(華嚴十刹) : 신라 때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널리 펴던 열 곳의 사찰
![]() 신라의 의상(義湘)이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사찰이다.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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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봉 (687m : 08:00) |
금정산의 의상봉은 제4망루에서 100m쯤 남쪽으로 가는 원효봉(687m)과의
중간에 있는 봉 우리로서 동해의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대의
역할을 할 수있는 상징적인 의 미의 봉우리이다. 원효와 의상은 A.D 650년
입당구도하러 요동땅에 이르러 한밤중 산속에 서 노숙을 하다가 원효가
문득 심한 갈증에 시달리다 옆에 있던 바가지의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간밤에 먹었던 물은 해골에 고인 송장썩은 물임을
알고 구역질을 해된다. 그때 원효는 순간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는 입당을 포기하나 의상은 구도를
위해 입당하게 된다. 이러한 연유에서 인지는 모르지 만 해골바가지 형상을
한 바위가 붙은 봉우리가 원효봉이며, 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의상봉이라 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의상봉에는
신라시대 때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하기 전에 시찰을 하던중 명당으로
표시한 곳이라는 의상대가 있다. 원효봉에는 원효암이 있으며, 여기에는
동·서 3층석탑이 있어 원효봉과의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원효봉은 금정산 동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가장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 놓는다.
예로부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동녘, 서녘, 밝음, 광명 즉 신선한 아침 풍정의
산봉우리 의 명칭을 '으뜸의 새벽' 원효봉이라 불렀다. 원효는 불교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면서 금정산에서 높은 교화력과 깊은 감화력인 신술로 5만 왜구를
호리병으로 물리친 호국의 주인공이었다. 원효의 본체, 발심, 일미, 부정과 초월,
절대 등 현재적 의미 등을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것으로 원효의 위대한 사상을
밝히려는 상징의 이름으로 불리어진 것이리라.
과의 중간에 있는 봉 우리로서 동해의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대의 역할을 할 수있는 상징적인 의 미의 봉우리이다.
금정산성 |
금정산성은 태백이 뻗어내려 동래군의 남단에 이르러 끝맺은 말미에 해당하는 금정산맥의 주봉인 금정산에 있다. 부산과 물금일대에 걸쳐 솟아오른 거봉인 해발 801.5m의 고당봉을 위시하여,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솟았다. 봉우리마다 기암이 솟았고 천장의 절벽이 까마득하여 도처에 절경이며 의상대 등의 명소도 허다하다. 단봉이 많고 암굴 이 산재하며 준급(峻急)한 하곡(河谷)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줄지어 있어 풍경이 대단히 아름답다. 이렇게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산성을 쌓았다. 산형은 만장년기형(晩壯年期形)을 띠고 대체로 준급하여 산사태가 일어나기 쉬운 지대이다. 산복과 산록에는 소나무의 식생 이 많고 암석이 산재해 있으며 단층애는 침식으로 파괴되어 있다. 고당봉 약물 등에서 발원하는 내(川)와 남문 계곡으로 흐르는 내는 서문 밖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에 이르고 있다. 금정산록에는 부산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인 범어사가 있다. 남기고 있다. 산성은 동으로 는 금정구, 남으로는 동래구·부산진구·연제구, 서쪽으로는 북구, 북쪽으로는 양산시와 접해 있다. |
의상봉 (601m 08:10)
4망루 전방에 솟아있는 암봉으로 범어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와 관련이
의상봉 아래 마주보이는 무명봉은 나비바위,
부채바위등과 함께 암벽 애호가들이 즐겨찾는 곳이기도하다.
금정산 공룡능선
제4망루(577봉)
의상봉 조금 지나면서 있다.
산성고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산성마을
금정산성 동문 (08:55)
동래부사 정덕현이 금정산성 동문과 서문을 축조하기 위해 사제지간인
두 석공에게 경쟁심을 유발시켜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
공사를 맡겼다고 한다. 원래 야심많은 스승은 동문을 웅장하게만
지어려고 하였으나 서문공사를 맡은 제자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살려
먼저 공사를 끝냈다고 한다.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 하였으나 나중 의기투합하여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산성고개 (390m : 09:20)
동래쪽 금강공원 식물은 입구와 북구 화명동 대천리를 잇는 도로이며
동래 지하철역앞에서 203번 마을버스가 산성고개를 너머 금성동까지
운행하며 덕천동에서 출발하는 산성버스는 화명동,금정산성 서문을
경유 공해마을이 종점이다.
산성고개 위 너럭바위에서 본 부산 동래구의 모습
남문(09:55)
야영장 삼거리(09:40)
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탓인가보다.
이젠 범여도 슬슬 꽃이 아름다워 보이니 말이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는거 봤나.
정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남문 마을에 들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다는 동래산성 막걸리와 파전으로 걸쭉하게 한잔을 한다.
얼마나 맛있었길래 박 정희 대통령께서 생전에 부산만 오면
이곳 막걸리를 마셨다고 하니 말이다. 이곳에는 염소고기도 아주
맛있다고 하는데 갈길 먼 산꾼이 입맛만 다시고 다시 길을 떠난다.
만덕고개(萬德峙:11:00)
만덕고개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금정산
기슭인 이곳에 1만여의 피난민이 피난와서 모두 화를 면했었는데,
이에 따라 1만여명이 덕을 입었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이 만덕동이 되었다고 한다.
만덕고개의 옛 이름은 기비현(其比峴) = 사비현(射比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낙동강연안에서 동래로 통하는 이 고개는 동래지역과 서부경남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로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나 길이 워낙 높고 험하고
숲도 많이 우거진 곳이었다. 이에 따라 이곳은 장꾼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동래부 관내에서 도둑이 심하기로는
만덕고개가 으뜸이고, 다음은 모너머고개(송상현공 동상이 있는 고개)였다고
하며 당시의 사람들은 혼자 만덕고개를 넘는 것을 겁내었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말로는 만 사람이 떼를 지어 고개를 넘어가야 온전하기 때문에
''만등고개''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만등에서 만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만덕사는 만덕동에 지금 남아 있는 寺地를 그 만덕사
텃자리로 본다. 그 만덕사로 인해 만덕고개란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만덕 1,2 터널이 개통돼 경부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를 연결하여
복잡한 부산시내를 거치지 않고 경남지역으로 가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만덕고개에서 쇠미산 오름길은 데크목으로 시공하여 오름길은
참으로 편하기만 하다. 이곳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산이라기 보다는
유원지라 해야 마땅할 것 같다. 전문 산꾼들은 이런 곳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지도상에는 백양산이 2시간이상이나 남았는데 이곳 이정표는
만덕고개에서 백양산을 0.3km라고 표시해논 바람에 동료 산꾼인 방초님께서
혼돈스러워 하신다. 조속히 수정해 주었으면 한다.
쇠미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산시내의 모습
저 멀리 해운대는 짙은 안개로 인하여 희미하게만 보인다.
쇠미산 정상에서 (11:20)
만덕고개에서 이곳 막걸리인 부산생탁을 연거푸 2잔을 들이켰더니만
배가 남산만하다. 한달에 산을 120km이상을 산을 타는데도 불구하도 저러니
문제가 있다. 방초님 사진 찍을때는 쬐끔 신경좀 써주셔요.
그래도 누우면 배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남의 광장(11:30)
부산시 동래구와 북구의 경계능선을 타고 백양산으로 향한다.
정맥길은 완전히 유원지화가 되어있다. 이곳 만남의 광장이라는
소나무 숲은 행락객으로 인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돗자리를 깔고 버너를 피어놓고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여기저기 버려져 있는 쓰레기더미가 눈에 상당히 거슬린다.
만남의 숲에서 먹고 즐겼으면 쓰레기는 되가져가야지 에이 나쁜 인간들...
611봉 오름길에서 바라본 부산시 북구 만덕동의 모습
611봉 정상(12:35)
불태령이라고 써놓은 만남의 광장에서 611봉 정상까지의
방화선 임도는 부산시내라서 그런지 상당히 관리가 잘되어 있다.
그러나 오름길은 상당히 힘이든다. 산행 시간이 9시간이 지난 시점이라
그런지 피로도 엄청 심하게 오는데다 이곳 날씨가 한 여름만큼이나 덥다.
얼굴이 익었는지 따갑다. 초컬릿 한개와 쥬스로 허기를 면하고 정상에
도착하니 지난구간 천성산 2봉에서도 그랬더니만 이곳도 정상석을
깨트려놔 보기가 아주 흉하다. 이넘의 쉬끼 꼬라지 나면 집구석에
쓰레기통이나 깰것이지. 정상석은 왜 부쉬나. 산에 올 자격도 없는 넘의 쉬끼
611봉 정상에서 바라본 부산구포와 구포다리, 김해시내
저 아래 구포다리가 2개나 보인다. 40여년 전 내가 부산을 다닐때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데 교통망이 참으로 잘돼있어 보인다.
그 옛날 김해평야에 농사로 경남사람 다 먹인다고 할만큼 들이 넓었는데
지금보니 공장이 더 많아 보인다. 지난 3월 낙남정맥의 시발점인 김해
대동면 매리와 신어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왠지 반갑게만 느껴진다.
백양산 가는길의 방화선 임도
방화선 끝지점이 불웅령이고 두번째 보이는 곳이 백양산이다.
억새와 야생화들이 정겹게만 느껴진다.
이곳도 나무밑 곳곳에 먹자판이다. 쓰레기도 아무데나
버려져 있다. 부산사람들은 산에 대한 문화적인 수준은
좀 높혀야겠다. 서울 근교 산들과는 비교가 안된다.
저 아래 부산 어린이 대공원과 성지곡 수원지도 보이고
사직구장도 보인다. 이곳이 연고지인 프로야구 올해도 롯데가 또 깨져서
거의 광적에 가까운 부산 갈매기들이 상심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백양산(해발 642m 12:50)
부산의 등줄산맥인 금정산맥의 주 능선에 솟은 산.
백양산은 버드나무의 일종인 흰 사시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으로는 금정산과 이어지며 부산진구와 사상구의 경계를 이룬다.
부산 도심의 주요 하천이자 우리나라 상수도의 시초가 된 성지곡 수원지가 있다.
성지곡 일대는 어린이 대공원으로 개발되어 울창한 숲 덕에 삼림욕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부산 사람 치고 어린이 대공원에 관한 추억 하나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가장 부산의 모습이
잘 남아있는 산이 백양산이 아닐까 싶다. 남쪽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지는 선암사가 있다.
애진봉(愛鎭峰 13:10)
봉우리는 아닌 것 같으며 인공적으로 만든 동산으로 보인다.
헬기장이 보이며 옆에는 부산진구청에서 세운듯한 애진봉이란 커다란
표석이 서 있으며 표석을 중심으로 동산을 꾸며 놓았다.
애진봉에서 바라본 부산시내의 모습
유두봉(乳頭峰 :13:20)
벌리서 보면 여인의 젖꼭지처럼 생겼다해서 유두봉이라고 한다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다.
내 사랑하는 여인의 젖꼭지처럼 생겨 보이지는 않는데 무슨 연유로 유두봉이라 했을까?
낙동강 하구언
김해공항도 보이고 철새도래지인 을숙도도 보인다.
신어산과 고암나루터도 보이고...
삼각봉 (454m 13:30)
암봉에 사상산악회서 세운 정상석이 서 있으며 삼각봉과 백양산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우측 골짜기로 급하게 떨어지면 신라대다.
개금고개 내림길
백양산에서 애진봉을 지나면서 계속해서 암릉구간이 나타난다.
15시까지 구포역까지 약속땜에 빨리가야 하는데 암릉길이라
힘이든다. 삼각봉 지나고 좀 편한길로 내려온다.
계림초교를 지나 L.G 아파트 216동을 끼고 나오니 육교아래에 버스가 보인다.
갓봉에서
하산길에서 바라본 백양산 정상과 애진봉
개림초교 정문(14:05)
오늘의 하산지점인 개금(開琴) 고개(14:20)
모양이 꼭 거문고와 길게 늘어져 있는 형상이라 하여 개금이라 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토착지를 등지고 하염없이 피난길을 헤매던
어느날 푸른 산림이 우거지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아늑한 계곡이 뻗어 있는
이곳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가야금 소리를 듣고, 바로 이곳이 장차
평화의 뿌리가 뻗어날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되어 전란의 시름을 달래면서 처음으로
마음놓고 거문고로 한 곡조를 타고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문고로 말미암아 이곳에 살게 되었으므로 개금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오랫동안 거주했던 성씨는 최씨, 배씨, 송씨 등이며, 가장 오래된
경주 최씨도 18∼19대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백양산에서 개금고개까지 하산길은 생각보다 힘이든다.
거기다가 15시에 지인과의 구포역에서의 약속 땜에 괜히
마음만 급해진다. 산에서 내려와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개금초교까지 500m라고 해놨는데 2배이상이나 먼 느낌이다.
서둘러 베낭을 챙겨 택시를 잡는데 30분이상 걸려서 구포역에
도착하였다.
구포역이란델 처음으로 이용해봤다.
21시 13분발 서울행KTX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아들이 차를 가지고
나와 편안하게 집에까지 왔다. 오늘처럼 아들이 든든해
보인적이 없다. 아들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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