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3. 27(일)
○ 산행날씨 : 약간의 흐린 날씨이기는 했지만 산행하기는 좋은 날씨임
마루금 안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꽤나 차가웠음
○ 참석인원 : 뫼솔산악회와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15.1km/G.P.S 거리 16.2 km / 5시간 15분 소요
○ 산행코스 : 갈목재-서원산(541.7봉)-화엄이재-450봉-545봉-531봉-말티재-580봉-새목이재-592봉-576봉-586봉-560봉
구룡치-554봉-수철령-535봉-600봉-백석리 마을-422봉-못골마을 안부-355봉-구치재
○ 소 재 지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속리산면,장안면
지난 한주일은 날씨가 봄이 옴 시샘하는 지 춥고 눈까지 뿌리더니만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다. 산행하기는 최적의 날씨이다.
또한 어제는 천안함 사건이 터진지 꼭 1주년이 되는 날이다.
부디 젊은이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주를 마무리하고 일욜 베낭을 매고 나가는 기분은 정말 쿨하다.
늘상하던대로 아침 5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베낭을 챙긴다.
무박산행에 비해 베낭의 무게는 절반밖에 되지않아 어깨의 부담을 덜 주는것
같아 참으로 편하다. 2년여동안 매주 무박산행을 하느라 베낭무게에 늘상
어깨가 키가 약 2cm나 줄어든 탓도 아마 무거운 베낭 때문만이 아니었나 싶다.
양재역에 도착하니 서울 강남의 모 교회의 차량 4~5대가 서초구청앞 주차장을
아예 점령해버려 산행하는 사람들이 차를 타기가 아주 불편하다.
요즘 대형교회들의 상업적인 냄새가 역겹기까지 하다.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
남들에게 불편하게 하는게 분명 예수님의 뜻은 아닐지언정... 늘 하심으로 대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라고 했거늘 신앙적 믿음만 있으면 차량제공을 하지 않아도
신도들이 당연히 교회로 찾아올 텐데 말이다. 제발이지 자기들 편의를 위해서
남에게 불편을 강요하지 말았으면 한다. 차에 올라 잠깐 눈을 붙이는 사이에
경부고속도로 옥산 휴게소에 도착한다. 여기서 1.3주에 무박으로 호남정맥을
같이하는 동료 산꾼들을 만난다. 무지하게 반갑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시 차에
올라 청원 상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속리산 방향으로 향한다 갈목재에 내려 단속요원을
피하려고 모두들 재빠르게 산으로 오른다. 오늘 구간은 숫자로 된 산이름은 없다.
지도상에 나타난 봉우리만 19개고 재(령)를 7개나 지나야 한다. 거기다가 조그만
봉우리가 그 얼마든가 흔히들 복싱에서 잔펀치에 KO되면 골병든다고 했거늘
오늘 산행이 그와같은 현상이 아닐까? 거기다가 이곳에는 그 흔한 이정표 하나가
없다. 보은군수 나리는 산의 효용가치를 잘 모르는 것일까. 나리님 대추만 자랑하지
마시고 당신네 군 안에 있는 천혜의 자원인 속리산과 구병산 등 충북 알프스와
연계하여 이 정맥길도 함 신경 써주시길... 산꾼들의 구매력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갈목재(09:45)
37번 국도와 505번 지방도가 만나는 갈목 삼거리를 지나 S자 형태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오르면 해발 380m라고 표시된 갈목재가 나타난다.
갈목재에서 차가 도착하여 내리니 선두는 벌써 산 위 저만큼 올라가고 있다.
이곳에서 화엄이재까지 단속구간이라 산악회에서 바짝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언제쯤 국공파들의 간섭을 받지않고 산행 좀 할 수 있으려나.
서원산(541.7봉:10:00)
도망자의 신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초반의 된비알를 치고
오르니 저 건너 서원리 계곡너머 충북 알프스의 시작이 되는 병풍이 둘러
친 것처럼 보인다는 구병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저 아래 서원리 안돌마을에
있는 정이품송의 정부인 소나무가 아련히 보인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지도상에
나타난 19봉우리중에 유일하게 비공적이나마 서원산이라는 명칭이 붙은 봉우리를
지난다. 산 정상에는 콘크리트 말뚝이 하나 서 있고 희미하게나마 속리산 국립공원
표시가 보인다. 오늘따라 선두들이 뭣에 쫒기는지 산악 마라톤하듯 도망을 친다.
속리산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의 정부인 소나무가 있는 서원리 안돌마을 전경
화엄이재(회너미-재/回越峙. 回踰峙 :10:10)
갈목리에서 외속리면 서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속리절 스님과 구병절 스님이
이 고개에서 만나게 되면 허행하고 되돌아 갔다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서원산을 지나 10여분 정도 내려오니 회엄이재(화엄이재)이다.
좌측은 장안골이고 우측은 법주사로 가는 갈목리이다.
고려시대부터 이곳 장안리와 갈목리에서 법주사로 불공을 드리기 위해
이 재를 넘었다고 해서 화엄이재라 부른 모양이다.
그 옛날엔 불공을 드리기 위해 가는 이 산길도 수행의 한 방편이었건만
지금은 자동차로 절 마당앞까지 차가 들어가니 아마도 부처님은
옛날 불자들을 더 좋아 하셨을것 같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화엄경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과 그로부터 화엄(華嚴)처럼 피어나는 과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내용은 석가모니의 성도(成道) 장면에서 시작되며, 온 세상을 구성하는
원자만큼 무수한 보살과 신적 존재들이 함께 그 성도를 찬탄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원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이며 418~420년 불타발타라
(佛陀跋陀羅 Buddhabhadra:覺賢이라고도 불림)에 의해 한역된 60권본과 695~699년
실차난타(實叉難陀 Siksananda)에 의해 한역된 80권본, 그리고 티베트어 번역본이 완본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산스크리트 원본은 산실(散失)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80권본은 39품, 티베트본은 45품, 60권본은 34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화엄종을 대성시킨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643~712)이 60권본을 바탕으로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라는 해설서를 쓴 이래 60권본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왔다.
〈화엄경〉의 마지막 품을 이루고 있는 입법계품은 선재동자(善財童子)라는 소년이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만나면서 도를 추구하는 이야기로서, 〈화엄경〉의 가르침을 평이하고도
재미있게 펼쳐내고 있는 것으로 매우 널리 알려져 있다.
화엄이재 오름길에서 만난 경주 이씨의 묘지
충북 알프스가 시작되는 구병산의 모습
충북 알프스는 충북 보은군이 구병산과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여러개의 산군(群)을
'충북알프스'로 지정, 특허청에 업무표장등록을 한 곳이다.
주요구간은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구병산~구병산 신선대~장고개~형제봉~속리산
천왕봉~비로봉~문장대~관음봉~묘봉~상학봉~활목고개 이다.
충북의 알프스, 구병산(九屛山)
구병산은 충북 보은군 마로면과 내속리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바위산이다.
아홉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이루어져 있다 하여 구병산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며,그리 높진 않지만예로부터 보은 지방에서는 속리산 천왕봉은 지아비 산, 구병산은 지어미 산,
금적산은 아들 산이라 하여 이들을 '삼산'이라 일컫는다.
속리산의 명성에 가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산 전체가
깨끗하고 조용하며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저 멀리 속리산의 연봉들과 백두대간의 줄기도 보이고...
전망대 바위(10:30)
서원산에서 545봉까지는 그리 크지 않은 고도를 따라 안부 능선을 걷는다.
우측은 부드러운 능선이나 좌측은 암벽으로 된 직벽안부이다. 이곳위에 있는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키가적고 못생겼다.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사는 느낌이다.
하긴 곧고 이쁜 나무이면 진작 사람의 손이 탔을테지 사는 방법을 아는 소나무가
우리 인간에게 제시하는 선문답은 뭣일까?
547봉 삼거리(10:35)
이곳에 오니 이정표가 하나 있는 봉이 나타난다. 생김새로 봐서 보은군에서 설치한 건
아닌것 같고 말티재 자연 휴양림을 운영하는 숲속의 집이라는 업체에서
설치한 느낌이다. 그래도 산꾼을 배려한 답시고 벤치도 하나 설치하여 놨다.
고마워요
545봉 가는 길에서 만난 멋진 암산
보은읍내의 모습
산간분지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보은군은 예로부터 산지의 특성을 살려
산성을 삶의 근거지로 삼았다. 험한 산지는 적을 막기 쉬운 곳으로 다른 세력과
다툼이 많았던 옛날에는 산성이 몸을 피하는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이곳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은 청원의 상당산성, 단양의 온달산성과 함께 충청북도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꼽힌다.
신라시대에는 이 산성 덕분에 이곳이 삼년산군으로 불리웠다. 고려시대에는
보령이었다가 경상북도 상주로 편입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태종때 충청도로
다시 편입되어 고종때 보은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이곳 보은은 대추가 하도 많이나서 이곳의보은 처녀들은 대추를 많이 먹어서
입이 대추씨같이 뾰족하다는 설이 있다.
보은군은 남쪽으로 맞닿은 영동군과 옥천군과 함께 대추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대추 풍년이 들어야 시집을 간다고들 하였다.
숲속의 집(속리산 말티재 자연휴양림)과 정상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설치돼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90도가량 꺽어 오르니 조그만 암릉에 올라서면 구병산 자락 끝
지점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고 정상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
완만하게 오르내리면 무인 산불감시초소에 도착한다. 능선뒤로 속리산의 주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천황봉에서부터 문장대로, 또다시 관음봉·묘봉, 상학봉으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가 한눈에 잡힌다. 이런 맛에 범여는 자꾸만 산에 미치는 보다.
뭇 산꾼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는 속리산의 주능선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몇 분 더 가면 또 다른 이정표가 세워져있는 삼거리 봉에 도착하니
먼저 온 동료 산꾼들이 허기를 때우기 위해 막걸리를 꺼내서 마실려고 한다.
그러면서 한잔을 권한다. 허기가 오던참에 정말 맛있게 먹었다. 고맙심더
담에 제가 꼭 한잔 대접하겠심더. 아직까지 사람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먼저 길을 떠난다. 내려가는 길은 음지라 잔설이 남아 있는 탓에 상당히 미끄럽다.
삼거리에서 말티재 방향인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완만하게 내려가면
김해 김씨 묘가 있고, 완만하게 다시 내려가면 송신탑을 철거한 콘크리트 잔해가
흄물스럽게만 보인다. 저 아래 차량 소리가 들리면서 잠시 후에 말티재가 나타난다.
국립공원 출입금지 표지판
언제쯤이면 저 표시판을 보지 않을까?
말티재(해발 430m)는 보은군 외속리면과 내속리면을 잇는 고개로써
보은읍-속리산면간 37번 국도가 한남금북정맥 주능선을
가로지르고 있는 곳이다. 돌로 만든 장승과 말티재의 내력을 새겨
놓은 기념비가 말티고개임을 알린다. 그 뒤쪽으로 팔각 정자도 있다.
말티재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말티재(10:50)
보은군 장안면과 속리산면을 잇는 37번 국도가 지나가는 이 고개는
보은을 지나 속리산으로 오면 해발 400m의 꼬불꼬불 열두굽이나 되는 가파른 고갯길을 말티재라고 부른다.
속리산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고개는 처음 고려 태조 대왕께서 속리산에 올 때 닦은 길이라 하며
또 조선 세조 대왕께서 올 때 얇은 돌을 깔았다고 하는데 1966년 도로포장공사를 할 때 옛날의 흔적이 보였다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으로는 박석(薄石)재라고도 부른다.
세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오실 때 외속리면 장재리에서 고갯길을 연으로 넘을 수 없어 말로 바꾸어 타고
고개를 넘고 나서 내속리면 갈목리 고개 밑 부락에서부터 다시 연으로 바꾸어 탔다고 하여 말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말'은 '높다'의 고어로 '말티고개'는 '높은고개'를 뜻한다.
옛날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義湘)조사가 절을 건립하기에 마땅한 장소를 찾아 전국을 답사하던 때의 이야기다.
충청도 중심부에서 무턱대고 동쪽으로 걸어가니 보은땅이 나왔는데, 스님은 계속 동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약 10km쯤을 가니 눈앞에 병풍처럼 들려싼 일련(一連)의 산맥에 부딪혔다.
의상은 용기백배하여 결국 산허리를 넘어갔으나, 넘고나서는 오히려 실망하는 빛이 얼굴에 역력하였다.
의상은 그 산맥이 육지의 끝에 가로 놓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 너머에는 동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의상은 다시 용기를 내어 그 산 밑에까지 이르러서 여기야말로 속세를 떠난 산이라 하고
속리산(俗離山)이라 이름을 붙여 부르는 동시에 그 기슭에다 절을 지어 법주사(法主寺)라 불렀다.
처음 그가 땅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어오른 고개가 지금의 '말티재'라고 한다.
이 전설이 얼마나 확실성을 지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티재의 수려하고 단정한 모양은 모두가 아는 바다.
일부로 규격을 맞추어 만들어 놓은 것같은 그 모습에서 당시의 정교함을 충분히가늠케 한다.
해방 직후에 만들어졌던 '마음의 고향'이라는 명화(名畵)에서도 최종장면으로 이 고개를 배경으로
한 것이 있는데, 이 말티재의 수려함을 잘 이해하고도 남겠다.
말티재의 특색도 대관령이나 진부령처럼 한쪽만이 급경사이다.
즉 서쪽인 보은쪽만이 급경사여서 많은 커브를 이루고있지만, 일단 마루턱을 넘기만하면
동쪽은 평지에 가깝고, 그 시야 끝에 병풍처럼 서있는 속리산이 나타나 왠만큼은 답답증을 풀어준다.
<속리산 도로 개통 기념비>
고개 이름은 말재요, 처음 넘은 이는 누구였던지.
다만, 여기 생각나는 사람 신라 때 의신대사가 인도에서 돌아와
흰 노새 등에 불경을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법주사를 세울 적에 헐떡이며
이 재를 넘어가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다시 그 뒤에 고려 태조가 여기 이 길에 엷은 돌들을 깔았다하니
길의 형국은 아마 그것이 처음 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이 험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언제나 모두들 긴 탄식을 거듭하더니
천년이 지난 뒤 1923년에 이르러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새 길을 열었고,
1935년엔 자동차 길을 닦았으나 그 마저도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략) … 우리 군과 미군의 장비 지원을 얻어
여기 폭 넓고 평탄한 큰 길을 닦아내니
이로부터는 수많은 사람과 수레들이 웃으며 넘어가고 웃으며 넘어오리라.
아! 고마워라. 쉽게 넘는 새 길이여!
아! 미더워라. 편히 가는 큰 길이여!
- 1966년 11월 1일 노산 이은상 글 -
말티재에서 선두가 도망가는 바람에 말태재를 주마간산식으로 둘러보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다시 된비알을 치고 오르니 힘이든다. 거기다가 장재리 저수지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기만 하다. 베낭에서 자켓을 꺼내입고 암릉길을 치고 오르니
잠시 후에 위장막을 쳐놓은 어마어마하게 큰 산양삼 재배단지가 나타난다.
마루금 안부에서 바라본 장재 저수지(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 소재)
580봉 올라가는 암릉길
580봉(11:10)
말티재에서 급경사를 힘들게 오르니 580봉이 나타난다. 속리산 산삼 작목반이 산삼을
재배하면서 철조망에 검은 위장막을 쳐놓은 곳이 얼마나 크냐하면 자그만치 철조망을
따라 40분이 넘게 약 2.5km의 길을 걸어선 다음에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징역 7년이하에 벌금 5,000만원이라 이보시게 무서워서 산에 다니겠나.
작목반 책임자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정맥 산꾼들은 그런 사람없소이다.
이 범여가 보장하겠소. 사진 한컷만 찍어도 일행을 놓치는데 산삼 캘 시간이
어디 있으며 산삼이 어케 생긴줄도 모르며 설령 안다해도 프로 산꾼들은 절대
그런 짓거리 안하니 걱정들 꽉 붙들어 메시고 열심히 농사나 잘지어시게나.
통행에 불편을 주어 미안하다고...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으시네. 정맥길을 너무 훼손을
하신 걸 말이요. 그래 세상은 남을 배려하면서 살아야 하오.
592봉에서 새목이재 가는 내리막길은 음지에다 낙엽밑에 쌓인 눈이 얼어있어
내려가는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거기다가 낙엽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검은 위장막을 씌운 철조망은 산 전체를 하나 감싸고 있다. 건축 계통에 종사하는
범여가 보기엔 대략 전체의 길이가 약 10여km에 이르는 것 같다
새목이재(11:50)
보은군 속리산면 중판리와 보은읍 성족리를 이어주던 조그만 고개였는데
지금은 산 아래로 속리터널이 개통되어 이 고개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거기다가
산삼재배단지에 철조망이 막혀버려 조금만 세심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며칠후면 4월인데 아직도 철없는 겨우사리가 나무에 매달려 있고...
서서히 허기가 진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도 없고 앞에가는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헉헉대면서 576봉에 오르니 앞에 가던 산꾼들이 점심상을 펼친다.
동료 산꾼들과 같이 유부초밥에다 녹차 한잔으로 점심을 때우고 과일로 후식으로
마감하고 동료산꾼에게 소맥 한잔을 얻어 마신 후에 서둘러 길을 떠난다.
생강나무에도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고...
오늘 산행은 몇군데를 빼고 고도차가 별로 없는 부드러운 산행이며 전문 산꾼(?)들에게는
심심한 산행이다. 그러나 지도상에 나타난 봉우리만 19개이며 재(령)를 7개나 거쳐야 하는
그렇게 만만하게 볼 코스는 절대 아니다. 흔히들 복싱에서 큰 펀치 한방에 KO가 되면
후유중이 별로 없지만 잔펀치에 계속 맞다가 KO가 되면 휴유증이 엄청 심한것과 같은 코스이다.
산이 교훈을 준다. 아무리 적은 산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말이다.
구룡치(九龍峙:12:50)
구룡치는 종곡리와 하판리를 이어주는 옛고개인데,구불구불 아홉구비의 용을 닮은 고개이다.
따라서 일반 고개처럼 산과 산사이의 잘록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 용의 몸통처럼 길게 능선을 형성하여 있다.
아홉굽이가 졌다고도 하며 아홉 용이 나타날 지형이라 하여 구룡치라고 하는데 아무런 표식하나도 없고 하다 못해
산악회의 꼬리표 하나도 없는 곳이다. 그냥치지 않으려고 지도를 보고 또 보고서야 구룡치로 알 수 있었다.
보은군의 무성의가 극치를 이루는 곳이다
보은군보다도 훨씬 못한 지자체도 산의 관리를 얼마나 잘하는데 말이다.
해마다 대추 아가씨 뽑기다뭐다 하면서 축제만 벌이지 말고 제발 산에 대한
애정과 당신네 지역을 찾는 산꾼들의 배려도 좀 해줬으면..
성곽 흔적인지 뭔지?
이곳 보은지역은 삼국시대의 국가간의 부침이 심한 곳이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와의 영토전쟁에서 민초들의 고난이 심한 곳이었다.
수철령(水鐵嶺 :13:20)
하도 이정표가 없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온 곳이 수철령이다.
나무에 달려있는 시그널을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보은군 종남리에서 내속리면 북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나무가 없다 하여 무수목 이라고도 부른다 하나 본말은 ‘무쇠목’이 변한 것이다 한다
나무가 없어 '無樹木'이라 불리던 것이 '무쇠목'으로 변질되고 이를 한자로 바꿔
수철령으로 불렀다니 철생산지였나 생각했던 것이 어이 없어 집니다.
종곡리 안부능선 오른쪽에 있는 종곡리에는 학군의 집단 매장지가 있는 곳이다.
지금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은 서학과 외세를 배척하자는 뜻으로 1860년최 재우가 일으킨 종교이다.
유교,불교,도교를 한데 모으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깨달음을 담고 있었던 동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 눈깜짝 할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조정에서는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홀린다고 하여 최재우를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그들의 종교를 마음대로 믿고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 재우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 1893년 보은
땅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보은 집회는 조정에서는 특사를 보내 달램으로서 스스로 흩어졌지만
이듬해 전라도 고부에서 터진 동학 농민운동으로 동학 북접에 속한 보은의 동학교도들은 보은읍 성족리
북실마을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거의 다 전멸하였다.
동학군을 학살한 일본군과 상주 소모영 유격대는 2600여명의 시신을 묻어 버렸다.
당시 목숨을 끊어지지 않은 부상자들도 생매장 하였다고한다.
때문에 토벌군의 모습이 죄수들의 목을 베는 망나니 같았다 하여 이곳의골짜기를 망나니골이라고 한다
여인네의 엉덩이처럼 생긴 나무 뭇 남성 산꾼들을 홀리려는지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600봉정상(13:50)
오늘의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봉우리 정상에는 한 기의 묘지가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꺾어져 내려 백석리로 향한다. 이곳에는 땅이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고 조심해서 기다시피해서 내려오니 백석리 마을 안부에 도달한다.
천수답인 계단식 논에는 개구리알이 잔뜩있고 봄을 알리는 버들강아지도 피어있다.
잠시 콘크리트 임도를 타고 내려오니 정맥길에 소를 키우는 축사가 가로막고 있어서
마을로 들어섰다가 다시 밭을 타고 422봉으로 오른다
백석리 마을(14:10)
외면 지역으로서 흰 돌이 많이 있으므로 흰돌이라 하던 것을 흔들 또는 백석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갑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석리라 하였다.
백석리를 지나가는 2차선 도로를 건너 422봉 오르는 보리밭에는 보리가 파릇파릇하고
봄나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리고 양지바른 곳에는 새로 조성된 묘지들이 여러기가 있다
이 지역의 바위들이 대부분 하얀색을 뛰고 있는 규암으로 형성되어 있어
마을 이름이 白石里(흰돌마을)인가 보다.
오늘 내가 지나온 구간의 연봉들
422봉에서 구치재로 가는 길은 갑자기 뚝떨어지다가 못골마을 안부를 끼고
고도를 낮추면서 밭과 과수원을 지난다. 갑자기 확성기에서 귀에익은 유행가가
들려온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밭에서 농사일을 하는 부부가 틀어놓은 것이다.
참으로 멋있게 사는 농군부부인가 보다
마지막 355봉은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벌목을 하여 온 산이 벗거숭이로 변해있다.
다음구간을 시작하는 탁주봉이 보이고 조금 지나니 K.B.S 청주 방송국 송신소가 나타나면서
구티재에 다니는 차량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오늘 산행의 마지막 구간이 나타나고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보이면서 오늘 한구간의 숙제를 마무리 한다.
구티재(龜峙,九峙:15:00)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이 거북이와 같다고 해서 구티(龜峙)라 하였으며,
또한 구티고개가 아홉구비(九峙)라고 해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구티(龜峙)고개 유래]비의 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