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04. 24(당일산행)
○ 산행날씨 : 맑은 날씨에 가끔 비가 내리고, 엄청나게 바람이 세다.
사람이 날아갈 정도, 바람영향으로 상당히 춥고, 운무가 심함
○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4.4㎞ /G.P.S 거리 26,6km /7시간 50분 소요
○ 산행코스 : 대안리고개-475봉-금적지맥 분기점-쌍암재-새터고개-팔봉지맥 분기점-602봉-살티재-국사봉
추정재-산정말고개- 선두산-안건이 고개-선도산-현암삼거리
○ 소 재 지 : 충북 보은군 내북면 / 청주시 회인면, 가덕면, 상당구 / 청원군 낭성면
토욜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을정도이다.
마감을 하는 하는 현장을 둘러보고는 집에와서 옷을 갈아입고 예식장 3곳을
갔다오니 저녁 7시가 넘었다. 베낭을 챙기고는 초저녁인 9시에 잠자리에 든다.
새벽 3시 알람에 맞쳐서 잠에 깨어 샤워를 하고는 차에 오른다.
3번을 산악회에 따라서 한남.금북을 시작하였는데 5.6월에 행사가 많아서
아무래도 산악회 스케줄을 따라 다니면 나중에 땜방을 하는게 싫어서 혼자서
일찍 출발하면 산악회 구간을 한번에 끊어면 나중에 복귀해도 코스가 같을 것
같아서 말이다. 중부고속도로 오창 휴게소에 도착하여 떡라면 하나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빵2개와 우유하나, 오렌지 쥬스를 사서 베낭에 넣고 현암삼거리에 도착하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었다. 수레너미재에 차를 두고 대안리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고 엊저녁 택시회사에 예약을 했건만 약속했던 택시회사에 전화를
하니 차가 없단다.(그러면 약속을 하지 말던가) 하는 수 없이 차를 대안리까지
가져가서 박킹을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약간 흐린 날씨에 바람이 세차게 분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봄은 봄이로데 봄이 아닌고 겨울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서 날씨가 꽤나 차갑다. 고어텍스 자켓을 입고 산행을 진행한다.
대안리고개~현암삼거리 산행도
대안리고개~현암삼거리 고도표
대안리(大安里) 마을 한가로운 아침
마을 뒷산에 산제당이 있고 앞에 있는 활인봉(活人峰:424m) 밑에 살면 마을이 편안하다
하여 대안이라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대안리(大安里)라 기록하였다
대안리의 아침은 조용하기만 하다. 혼자 진행하기에 준비물에 신경을 쓴다.
산악용네비게이션 작동상황을 확인하고, 지도와 고도표 챙기고 이상없음을
확인한 다음에 출발하였는데 1km쯤 지났는데 핸드폰이 가져오지 않은것이
확인된다. 아침에 택시회사에 전화를 하고는 차에 그냥두고 온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다시 간다는 것은 1시간 가량 차질이 생기기에 그냥 진행한다.
에공 준비성이 자꾸만 떨어지니 나도 이젠 나이가 들어가는갑다.
아침 일출(06:10)
산행을 시작한 지 10분만에 일출을 맞이한다. 매주보면 일출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은
다르다. 잠시 후 나타난 475봉 급경사에 치고 오르르니 힘이든다.
잠시 후 능선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차갑게만 느껴진다. 저 아래 아곡리 마을엔
아침 농사일을 준비하는지 트렉트 소리가 요란하고 건너편의 구룡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부 정상에 있는 진달래는 벌써 이별을 준비한다. 세상사와 마찬가지로
한번오면 한번 가는게 이치이거늘 너무 슬프하지 마시게나...
부드러운 산길을 편하게 걷는다. 조그만 봉우리를 서너개 오르내리고
만난곳이 금적지맥 분기점이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준,희님이 아크릴
표시판으로 이정표를 달아놨다. 꼭 이 분들을 함 뵙고 싶다.
정맥 산꾼들에게는 등대와도 같은 정말 고마운 분이다. 고맙심더.
금적지맥(金積枝脈) 분기점(06:50)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시작된 한남금북정맥은 수많은 산줄기를 거쳐 삼정맥 분기점인 칠장산으로
이어가는데 그중 보은군내 구룡산 정상 못미친 450봉에서 또하나의 맥을 잇는 산줄기는
노성산(516m), 거망산(495m), 덕대산(575m), 금적산(652m), 국사봉(475m)을 거쳐 금강과
만나는 50여km의 산줄기를 금적지맥이라 한다.
아울러 이 산줄기의 동쪽에는 불로천과 항건천, 거현천, 오덕천, 보청천 등이 금강으로 흐르고 있고,
이 산줄기의 서남쪽에는 대청호가 있다. 충청권의 젖줄인 금강은 산이 많은 지역인 전북의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
지역과 금영옥(금산, 영동, 옥천)을 지나오면서 곡천협곡(굽어있는 천은 강폭이 좁다.)을 형성하다가 대청댐을
지나 미호천과 만나면서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서해로 흘러든다.
금적지맥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90도로 꺽어져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검은 천막을 쳐놓고 철조망으로 막아놓은 곳에 마치 히말라야라도 온 것처럼
시그널이 아마도 100개 가까이는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많이 매달아놨다.
잠시 후 밭으로 내려오니 배꽃이 필 준비를 하고 밭 끝머리에 도착하니
쌍암재가 나타난다.
쌍암재(07:00)
보은군 회인면 쌍암리와 내북면 법주리를 이어주는 571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창리에서
회인으로 넘어다니는 곳으로 주위에는 인삼재배 시설이 많이 보인다.
동저울 고개라 부르기도 한고 법주리 고개라고도 한다.
이곳 법주리는 본래 회인현(懷仁縣) 동면(東面) 지역으로 버드나무가 많아
버드리(柳洞)라고 부르고 구룡산(九龍山) 밑의 큰 골짜기가 되므로 법줄
또는 법주(法主)라 하였다.
쌍암재에서 우측으로 오르니 잘 표시되지 않은 길이 나타나고 가시넝쿨과 잡숲이 많아서
여름에 이 코스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고생깨나 하겠다.
잠시 후 밀양 박씨의 묘지가 나타나고 과수원을 끼고 걸으니 잠시 후 호화묘지가 나타난다.
울 님의 마음씨 맘큼이나 깨끗한 순박하게 피어있는 조팝나무 꽃이
홀로가는 산꾼을 유혹한다.
밀양 박씨와 경주 김씨의 합장묘를 호화롭게 조성한 가족묘인 모양이다.
자리가 참으로 명당터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금계포란형의 묘지터라
아늑하게 보인다. 저 앞에 보이는게 금적지맥 마루금이다.
후손들이 애쓴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다시 임도길이 나타나고 잠시 후 새터재가 나온다
새 생명은 시작되고...
새터재(07:20)
이곳 새터재에는 새로 지은 깨끗한 주택들이 서너채가 보인다.
다시 마루금에 오르니 산새들의 합창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이 놈들이 짝짓기 계절인 모양이다. 그리 험하지 않은 부드러운
육산(525봉)을 오르니 잠시 후에 레져토피아 산악회에서 설치한 단군지맥(백두대간)
이란 검은 표지석이 나타나고 뒷면엔 천부경 81자를 각인해 놨다
천부경(天符經)은 한임천제「桓因天帝」가 세운 한나라「桓國」시대에 구전(口傳)되었던 경전이다.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에 이르기를, 한 옛적 한임 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천부경은 배달나라 한웅에 이어지고 또 단군에 이어지는 상고사회를 주도해 온 우리 한겨레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곧 그때 사회의 확고한 지도 원리, 생활 원리였던 것이다. 상고시대의 우리 한겨레는 천부경을 중심으로 강력한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고, 후대의 경제적, 사회 문화적 기초가 된 것이다. 곧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였으므로
종교 행사나 제천 행사에 문화의 기틀이 되었다.
대종교의 기본 경전 환웅이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려고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와서 교화할 때, 이치를 풀이한 81자로 참결이다.
天 符 經 [천 부 경] - 직역
一 始 無 始 一
하나(one, many)가 비롯됨은 무(emptiness, fullness)에서 비롯된 하나이며,
析 三 極 無 盡 本
셋으로 나뉜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으니,
天 一 一 地 一 二 人 一 三
하늘의 하나는 하나요, 땅의 하나는 둘이요, 사람의 하나는 셋이니라.
一 積 十 鉅 無 櫃 化 三
하나부터 쌓고, 열을 크게 펼치면, 무를 둘러싼 셋의 조화가 나오느니,
天 二 三 地 二 三 人 二 三
하늘도 둘과 셋의 조화요, 땅도 둘과 셋의 조화요, 사람도 둘과 셋의 조화로서,
大 三 合 六 生 七 八 九
큰 셋(천지인)이 합치면 여섯이 되고, 일곱, 여덟, 아홉(만물)이 나오며,
運 三 四 成 環 五 七 一 妙 衍
셋(천지인)을 운영하여 넷(음양,사계절)이 완성되면 다섯(오행)으로 고리를 이루어
(돌아와) 일곱(칠요)과 모두 하나(only one의 한)가 되는 묘한 흐름을 보이니,
萬 往 萬 來 用 變 不 動 本
수만 번을 오고 가며 쓰임이 변한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本 心 本 太 陽 昻 明
근본 마음은 근본 태양(진리)을 우러러 향한 밝음이고,
人 中 天 地 一
사람의 중앙에는 하늘(우주마음, 허공, 하나님)과 땅(자연, 만물)의 이치가
있어 크게 하나(great one의 한)이며,
一 終 無 終 一
하나(maximum의 한)의 끝남은 무로 끝나는 하나(minimum의 한)이니라.
팔봉지맥(525봉) 분기점(07:50)
팔봉지맥은 박성태님의 신산경표에서 처음 사용된 이름이고, 윗지도 한남금북정맥 525봉에서
피반령-봉화봉-용덕산-팔봉산-은적산으로 낮고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단군지맥은 누가 처음에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팔봉지맥에 있는 은적산에
단군신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 같고 윗 지도의 525봉에 오석을 세운 것 같다.
단군지맥은 팔봉지맥을 다른 말로 부르는 이름인것 같다 (단군지맥=팔봉지맥).
593봉(08:20)
525봉에서 많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니 허기가 진다. 자꾸만 바람은 거세지고...
추위가 엄습해오고 안부 능선의 바람은 그칠 줄을 모른다.
다시 한번 빡세게 산길을 오른다. 배가 고프니 걸음은 자꾸만 드디는데
추우니 베낭을 벗기 싫어서 계속해서 걸어서 올라온 곳이 593봉이다
정상에는 직사각형같은 군 참호같는 군사시설이 보이고
산꾼들이 쉬어간 흔적도 보인다. 이 곳은 평소에도 추운지
저 아래는 생강나무꽃가 진달래는 벌써 이별을 준비하는데 이곳은 필 생각도 안한다.
602봉 정상(08:30)
오늘 산행구간중에 가장 높은 곳이다. 산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고
어느 산악회에서 코팅지로 602봉임을 알려준다. 수많은 정맥꾼들이
걸어논 시그널이 정감이 있어 보인다
실티재(09:05)
살티재는 가덕면 금거리와 보은 염둔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를 넘는데
삼일이 걸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움푹 들어간 고개에는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성황당이 있고, 고개 양쪽으로 길이 또렷하게 나있어 지친 산객을
유혹한다.
여기에 있는 큰 돌탑하나가 인상적이다. 실티재는 큰사티, 삼일재라고도
불리는데 옛날에 교통이좋지 않았던 시절에 이곳 살티재를 거쳐서 선도산
아래에 있는 매태재와 말구리재를 지나 청주 등지를 다니는 길이었는데
옛날에 한 노인이 3일동안 이 고개를 지나다가 죽었다고 하여 삼일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위틈에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나무가 참으로 안쓰럽게만 보인다.
너무 비관하거나 서러워 하지마소 세상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사봉(國師峰 해발586m:10:00)
청원군 낭성면 추정리와 보은군 내 북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 낭추골 눈썰매장의 뒷편에 있는 산이다.
한강과 금강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낭추골 눈썰매장의 뒷편에 있는 산이다. 한강과 금강의 경계를
이루는 한남금북정맥은 낭성 머구미 고개에서 내려 앉았다가 국사봉으로 올라서고,32번국도를 따라
이어 달리다 살티재를 넘어 내암리 뒷편에서 보은의 법주리로 건너간다.
국사봉 정상에서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국사봉이란 지명은 백운산, 구봉산 만큼이나 흔하다.
사람으로 치면 영자, 숙자, 미자처럼 말이다.
하긴 우리나라 임금이 얼마이던가. 조그만 국가를 빼고라도 고구려 28대왕, 백제31대왕
신라 56대왕, 고려 34대왕, 조선 27대왕의 국사만 해도 176명이니 이해는 된다.
시멘트 임도(10:40)
국사봉 정상에서 허기를 떼우기 위해 빵 1개와 우유하나, 후식으로 커피에다 오렌지 한개를
먹고나니 좀 살것만 같다. 국사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급한 내리막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그리 험한 길은 아니다. 부드러운 산길이 이 지역 사람들의 심성만큼이나 고운것 같다.
30분 이상을 내려오니 시멘트로 된 임도가 나타나고 곧 추정재가 보인다.
이곳부터는 보은군을 완전히 벗어나고 충북 청원군으로 접어든다.
추정재(10:50)
32번 지방도가 지나는 길로 작은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곳으로 고갯길 같은 분위기가 들지 않은 고갯길로 머구미고개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머구미는 옛날 우물 물이 검다 하여 '먹우물','묵정' 이라
한 것이 변하여 머구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부터 보은군을 이별하고
청원군으로 완전히 접어든다.
이곳은 무심천의 발원지 3곳중 한곳으로 도로 확장공사로 발원지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이곳은 한강과 금강의 분수령이다
용창공예 앞에 전시해 둔 인간 군상들의 목각이 세상사를 대변하는 듯 하다.
추정리 가래울마을
추정재의 32번 국도를 무단으로 힝단을 한다. 미원석물이라는 석물 공장이 있고
그 아래 가래울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 안쪽에는 심곡사라는 절이 있다.
추정리에는 예로부터 노나무가 많아 노나무골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秋:노나무 추) 가래울은 구한말 한봉수의병 부대의전적지이다.
한봉수부대는 게릴라식 무장 투쟁을 주로 벌였는데, 가래울 골짜기에 은거하였고 있을 때
은거지가 일본군에게알려져 포위공격을 받았다. 한봉수부대는 곧바로 전열을 정비하고,
산간지형을 이용하여 반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어르신 복 받으실깁니다
석물공장을 뒤로 돌아 구 도로를 따라 걷는데 마늘 농사를 지으시는 촌로 세 분이
막걸리 말통을 사다놓고 마시고 계신다. 어느 한 분이 한 눈에 봐도 힘들어 보이는지
이보시요. 막걸리 한잔 하고 가소 하면서 커다란 대접에 가득채워 주신다.
너무나도 고맙다.안 그래도 오늘은 곡차를 안 가져와서 베낭에 술 한병 없는데 말이다.
한 대접을 마시니 금방 배가 불룩해지는 느낌이다. 고맙기만 하다.
남한테 보시 인연 공덕은 세세생생 복 받을깁니다.
어르신들 한테 막걸리 한 대접 얻어 마시고 100m 올라와서 새로 지은 집들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마루금으로 접어 드는데 집주인듯한 자가 말뚝을 박고 그물망으로
길을 막아놨다. 그렇다고 정맥꾼이 안 갈소냐. 악착같이 그물을 치우고 마루금으로 접어든다.
마을을 벗어나 편안한 능선길 정상에 다다르니 아무래도 날씨가 이상하다.
갑자기 바람이 드세진다. 저 아래 골드나인C.C에서는 굿 샷을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5월부터는 연습장을 좀 다녀야겠다. 그래도 전에는 남한테 민폐는 끼치지 않고
골프를 좀 쳤는데 요즘은 나기기만 하면 내 지갑 먼저 보는자가 임자이니...
그래도 산이 좋은걸 어쩌랴. 어~랴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꽤나 많은 비가...
얼른 우의를 꺼내입고 다시 길을 걷는다. 먹구름도 몰려오고...
골프장 저 넘어 신채호 선생의 사당이 모셔진 귀래리 마을이 어렴풋이 보인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 마을 출신으로 현대 역사의의 중시조로 불린다.
단재의 역사학은 종래의 사대주의 사관과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을거부하고 현대적
의미의 민중 중심사관과 민족주의 사관을 기본으로 한다.
그의 대표적인 역저인 조선 상고사는 우리 고대사 연구에 획기적인전환을 가져왔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 입장에서 그 무대를 한반도를벗어나지 못함을 지적하며 우리 역사무대를
만주는 물론 중국 동북지역과요서지역까지 확대하였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근대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선각자의 한 분이다.
그는 한말 민족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시기에 태어나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교육 언론 역사연구 활동에 종사하였고,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긴 일제하에서는 해외로
망명하여 민족사 연구와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결국에는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 분이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였고 그의 총명함이 들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당시 국립대학인 성균관에서 좋은 스승을 모시고 벗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 뒤 한때 시골에 내려가서 교사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곧 서을로 올라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해서 애국계몽운동과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때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을 써서 백성들의 애국혼을 불러 일으키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이 때 그는 우리 나라 역사와 관련된 많은 논설과 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백성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하는 데에 힘썼다.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망하자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와
북경 상해 등지와 한때는 연해주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망명 초기에는 만주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옛 유적지를 돌아보고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찬탄하면서 역사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또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상해임시정부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무정부주의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가 남긴 역사연구는 구시대 지배자 중심의 왕조중심 사관(史觀)과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함께 부정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웅혼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건설하였다.
그 때문에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은 신채호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방략에서 타협적이고 온건한 자치론이나 외교론을 배격하고
비타협적이고 무력에 의한 절대독립론을 주장하고 이를 몸소 실천한 불굴의 독립투사로서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나는 분이다.
이젠 비는 그쳤지만 바람의 강도는 더해 간다. 하도 추워서 아예 우의를 입고
산행을 진행한다. 호젓한 이런 산길이 난 너무도 좋다. 오늘 길은 너무도 편안한
육산이다. 고도 편차가 그리 크지 않은데다 대여섯 군데를 빼고는 참으로 무난하다.
어치피 인생사는 혼자가 아닌가. 올때도 혼자서 왔고 갈때도 혼자가야 할 길이기에
미리 연습을 해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범여의 생각 中에서)
이곳 청원땅은 참으로 복받은 땅이 아닌가 싶다. 기름진 땅에다가 풍,수해가
전혀 없는 지역이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
487봉에 올랐다가 좌측으로 꺽어서 내리막길을 걸으니 관리가 제대로 안 된
묘지가 나타난다. 그 산소에는 꼬부랑 할미꽃이 군락지를 이루듯이 봉분 위아래
할 것없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이 할미꽃도 세월앞엔 어쩔 수가 없나보다.
이런 나쁜 쉬끼들
장뇌산삼과 야생두릅 작목회란 곳에서 철조망을 쳐놓고 무단침입을 하면
형사고발을 한다고 겁박을 한다. 근데 이 자들이 하는 짓거리라곤 철조망을
치면서 말뚝을 박지않고 나무에다 못을 박아서 철조망을 쳐놓았다.
이런 나쁜 자식들! 돈을 벌려면 투자를 해야지. 털도 안뽑고 그냥 먹으려 들다니...
동물을 학대하면 동물학대법으로 처벌을 받는데 식물을 학대법 처벌 규정은 없는지...
손톱에 조그만 가시 하나만 박혀도 아픈데 저렇게 대못을 박았는데 얼마나 아플까?
고통을 견디지 못해 말라 죽어가는 나무도 보인다.
장뇌삼 단지를 지나니 인공조림지인 편백나무 단지가 엄청나게 크다. 그리고 거기에는 뿜어져나오는
맑은 공기는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피로를 확 가시게 한다. 그런데 또다시 빗방울을 뿌린다.
그러나 어차피 혼자인 걸 하면서 편안한 길을 여유롭게 고독을 즐기면서 걷는다.
고령 신씨 납골묘
편안한 임도길을 내려오니 호화로운 고령 신씨 가족 납골묘지가 나타나고 이곳은
차동차가 들어올 정도 넓은 길이 뚫어져 있다. 잠시후에 신정말 고개가 나타난다.
신정말 고개(12:00)
청원군 가덕면과 신정말과 낭성면 웃전마을을 연결하는 임도이다.
바람둥이 꽃이 민들레도 산꾼을 유혹하고...
뭣이 저리도 좋아서 붙어서 사시나 마루금 능선에서 바라본 백족산(白足山:431m)
백족(白足)은 ‘하얀 발’ 이니 산이름으로는 독특한데 사연이 있는 이름이다.
조선시대 세조대왕이 속리산 복천암에 행차하는 길에 이산 아래를 지나다가
발을 씻었는데, 발이 하았게 변했다고 한다. 그후 백족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백족산 허리춤에 공무원교육원과 운수연수원이 자리잡은 이후로 산이 극기훈련코스로
이용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산세가 빼어나거나 절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볍게 오르기에는 손색이 없는 곳이다.
백족사는 본래 심진암이라는 암자였다가 산이름을 따라 백족사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절의 창건과 관련한 내력은 알수 없고, 지금의 대웅전은 1930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절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대웅전과 요사 한 채가 전부인 자그마한 규모이다.
마당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한쪽에는 보리수와
은행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준다.
임도(13:00)
청원군 가덕면 한시울 마을과 낭성면 지산리를 잇는 임도는 꽤나크다.
바로 아래에 북영농장이 있고 주위에는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다. 산나물 채취하는 40대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두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서 혼자서 무슨 재미로
산을 다니냐고 묻는다. 이럴땐 어케 대답을 해야할까.
다시 빡세게 산을 치고 20분간을 오른다. 낙엽이 많아서 그런지 상당히 미끄럽다.
그리고 또 다시 허기가 진다. 그래도 능선에 올라가서 간식을 먹을 요량으로
힘들게 올라 능선에 오르니 세찬 바람에 서 있기가 힘이들 정도이다.
능선 안부쪽 바람을 피해서 마지막 남은 빵 하나와 오렌지 쥬스로 원기를
보충하고 10분간 휴식을 취하고 일어서려는데 주위에 두릅이 꽤나 많이 보인다.
견물생심이라고, 베낭에서 비닐 봉지를 꺼내 두릅을 따니 꽤나 많다.
내일 막걸리 마실때 안주 정도는 되겠다. 곧 바로 오른 곳이 선두산이다.
선두산 정상에서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선두산(先頭山, 해발526m:13:20)
낭성면 이목리와 지산리, 가덕면 한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한계저수지를 품고 있다. 한계리 저수지를 품고 있는 산이다.
한계리는 보은에서 청주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았고,
곳곳에 주막과 미방집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에는 보은에서 청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살티재를 넘어 한계리로 들어섰고, 한계리에서 미테재를 이용하여 청주 월오동으로 넘어갔다
한계리 안쪽에 자리잡은 한시울은 한자말을 그대로 풀면 "한가한 사람이 개울가에서 노는 형국"이
라고 하였는데, 한계저수지가 생기고 유료낚시터로 인기를 끌고 있으니 이름대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
한시울은 지형이 조리를 닮았다고 해서 조리터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한계저수지는 1977년 준공된 저수지로 가덕면과 남일면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한계리 골짜기는 무심천의 발원지중의 하나이다.
안건이 고개(13:40)
선도산으로 향하다 조망이 좋은 곳에서 멀리 이목리를 바라보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가덕면 한계리와 낭성면 지산리를 잇는 안건이 고개가 나타난다. 옛길의 흔적과 성황당 터의
돌무더기가 그대로여서 옛날에는 이곳이 주요 교통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제비꽃도 고독한 산꾼에게 인사를 나누고...
선도산 갈림길(13:50)
선두산에서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간다. 선도산 가는 길이다.
마주보고 있는 선두산과 선도산은 산꾼들에게는 헷갈리기만 한다.
선도산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접어드니 정맥 산꾼을 만난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그 산꾼도 나와 마찬가지로 손에는 지도를
쥐고 있다. 질마재에서 추정재까지 가는 중이란다. 아직까지 꽤 가야
하는데 서로 통성명 할 시간도 없이 각자 헤어진다. 잠시 후 선도산에 도착하고.
선도산(仙到山, 547.2m:14:00)
청주시 월오동과 낭성면 지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신선이
이곳에 와서 놀았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선이 놀던 장소에 중계탑이
설치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시그널들이 줄줄이 매달려있다.
그러나 선도산의 ‘선도’는 ‘우뚝 서 있는 큰 바위’를 뜻하는 ‘선돌’일 가능성이 높다.
이산 중턱에 선도할아버지바위와 선도할머니바위가 우뚝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지역의 예를 보아도 ‘선돌이’, ‘선돌거리’, ‘선돌골’, ‘선돌바위’, ‘
선돌숲’, ‘선돌재’ 등에서 처럼 지명의 선행요소로 아주 적극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실제 봉우리에 선돌이 있는 산을 선돌산이라고 하는 지역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이
선도산을 선돌산의 ‘ㄹ’탈락 어형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동네분들의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선도산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 바위에
매년 정월보름에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상에서 현암리로 이어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발걸음도 가볍다.
요즘 조림사업을 마친 야산으로 하산하면 청주상당산성, 목련공원, 낭성면소재지로
갈라지는 삼거리인 낭성면 현암리다. 현암리에는 수령이 220년이 넘는
높이 10m, 둘레 5m의 느티나무 한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수레너미재 보호수집이 몇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 느티나무 한그루 때문에 고풍스럽다.
자주 지나친 곳이지만 이렇게 직접 느티나무 앞에 서보는 것은 처음이다.
수레너미 고개(현암삼거리:14:50)
현암삼거리에서 512번 지방도를 따라 청주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수레너미란 수레가 다니던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디 이곳만이 수레가 다녔겠냐
만은 지금은 512번 2차선 지방도가 마을앞으로 굴곡진 곳 없이 시원하게 뻗어있는 모습이다.
현암리 묵밥집
대충 베낭을 정리하고 화장실에서 씻은 다음에 묵밥 하나를 시켜서 점심을 해결한다.
그래도 씻고나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묵밥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핸트폰을 차에 두고온 관계로 젊은 쥔장에게 부탁하여
택시를 불러서 대안리로 간다. 옷만 깨끗하면 지나가는 차들에게 히치를 시도해
보련만 옷이 너무 더러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택시를 타고 간다. 택시기사가
젊은 분인데 이 지역 설명도 잘해주고 친절하다. 그래서 다음구간에 아예 택시를
예약하고 명암을 주고 받는 사이에 대안리에 도착한다.
얌전하게 쥔장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愛馬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한남.금북정맥(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남.금북정맥 제6구간 - 질마재에서 행치재까지 (0) | 2011.05.23 |
---|---|
한남.금북정맥 제5구간 - 현암삼거리에서 질마재까지 (0) | 2011.05.10 |
한남.금북정맥 제3구간 - 구티재에서 대안리(19번 국도)까지 (0) | 2011.04.10 |
한남.금북정맥 제2구간 - 갈목재에서 구티재까지 (0) | 2011.03.27 |
한남.금북정맥 첫구간 - 갈목재에서 천왕봉까지(역산행) (0) | 2011.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