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05. 22(일)
○ 산행날씨 : 비가 온 뒤라 날씨는 좋았음, 오전에 박무, 오후엔 정상
○ 참석인원 : 나홀로
○ 산행거리 : 도상거리: 21.0㎞ / G.P.S거리 23,6 km /8시간10 소요
○ 산행코스 : 질마재-칠보치-칠보산-송치재-모래재-보광산 갈림길-고리티재-보천고개-행치재
○ 소 재 지 : 충북 괴산군 청안면, 사리면, 소수면 / 음성군 원남면
지난 한주는 참으로 바빴다. 속상한 일에 친구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고 암튼
마시는 일에 바빴다고나 할까... 토요일에는 4째 형님의 딸이 시집을 갔다. 모처럼만에 가족들이
만나서 오붓한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어디 도시생활이 참으로 맘대로 안된다. 형님에겐 참으로
미안하다. 현장에 마감문제로 서둘러 사무실에 들어와 정리를 하고 현장에서 돌아오니 개포동에서
30여년을 같이 지내던 친누이는 아니지만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누이에게 전화가 왔다.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한다. 서둘러 가보니 부군의 古稀란다. 그냥 오라면 산에간다
핑계되고 오지 않을것 같아서 불렀단다. 지인들과 어울려 논산에서 가져왔다는 가야곡주를
몇순배 돌리고 서둘러 집으로 와서 베낭을 꾸리고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이것저것을 챙겨 동서울 터미널에서 06시 50분행 증평행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증평에 도착하니 질마재가는 버스는 5분전에 떠나버리고 하는 수 없이 거금 13,000원을
들여 택시를 타고 질마재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증평가는 버스표 증평 시외버스 터미널 증평군은 2003년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질마재(08:30) 택시를 타고 질마재에 도착하니 이곳은 벽면에 토사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작업차량이 한창 작업중이다. 기왕 할것이면 정맥길을 끊지말고 터널을 만들어 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높은 절개지를 만들어 맥길과 동물이동통로를 잘라 버렸다. 하긴 이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의 머리에서 정맥길의 개념과 환경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라는게 무리이지? 자기들만 다치지 않으면 되지... 다른것이야 안중에나 있겠는가.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한 도구인 길마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길마(질마)가 지명으로 사용하는 곳이 전국에 몇 개나 되는지 헤아려보지 않았지만 모르긴 해도 그 수는 무척 많으리라 추측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연유엔 소는 우리의 삶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는 경제적 재산적 가치는 물론 생명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런 소가 우리 지명으로 유래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많은 동식물이 지명으로 사용된 것처럼 말이다.
질마재라는 지명은 서울 청계산부터 충북 괴산과 영동, 청학동 위 삼신봉 가는 길에도 금.호남 부귀산 가는 길에도 미당 서정주가 오가던 전북 선운사까지 많기만 하다. 그중 유명세를 떨치는 곳은 미당 서정주와 얽힌 선운사 질마재인데 이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며 기행 산문집을 쓴 작가 김훈을 통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산행길에 접어드니 비가 온 뒤라 정말 공기가 상쾌하다. 땅바닥의 낙엽은 비에 살짝젖어 마치 양탄자에 걷는 느낌이고 각종 야생화가 피어 향이 기가 막히다. 들머리에 접어들자마자 검은 뻐꾹새(홀딱벗고 새)가 계속해서 따라오면 울어댄다. 빗물에 젖은 나무로 인해 금방 옷이 다 젖어 버린다. 20분만에 커다란 TV 안테나가 설치된 봉우리가 나타나고 지난구간의 좌구산은 안개가 휩싸여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TV 안테나봉을 지나 잠시후에 묘지 아래는 꽤나 큰 두릅밭이 나온다. 근데 어제쯤 누가 작업을 했는지 두릅은 없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고 주위에는 취나물도 꽤나 보인다. 견물생심이라 욕심은 나지만 오늘은 혼자이고 그것도 평소보다 3시간을 늦게 시작한 산행이라 모든걸 포기하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오늘 들머리 질마재에서 378.5봉까지 청안면과 사리면,
"괴산 35명산에 대한 산줄기 개념도"
바지에 붙은 벌레 산행 1시간도 되지 않아 바지와 등산화가 다 젖어 버리고 옷과 베낭에는 벌레들이 잔뜩 붇는다. 거기다가 길가운데 수없이 거미줄이 처져있는 걷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거기다가 松花가루가 바람에 날려 바지와 베낭이 엉망이다. 정맥꾼들의 흔적
칠보치 가기 직전에 조그만 웅덩이가 하나 나타나는데 웅덩이 안에 개구리 알이 가득하다. |
개구리 알의 모습
칠보치(405m : 09:30)
괴산군 청안과 부흥을 연결하는 고개인 칠보치는 현재는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소형 트럭 하나 지나갈 정도의 작은 고갯길인 칠보치는 다른 고갯길에선
느낄 수 없는 정겨움이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산줄기를 중심으로 군이나 면의 경계를 삼는데
질마재에서 596.5봉까지는 청안면 좌우를 가르며 정맥이 지나가다
또 이번구간 솔티재에서 보광산까지는 사리면을 좌우를 나눈다.
칠보치는 청안면의 배나무골에서 객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비포장이긴 해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좋다.
칠보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괴산군 청암면 객골마을
괴산군 청안면은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475년) 랑성서원, 청원에 편입된 후에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청당현으로 신설돼 현종9년에 청주목에 속현되었다가 조선조 태종5년에 민소작지라하여 도안현과
청당현을 병합해 청안현으로 개칭됐다. 고종 32년(1895)에 청안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통합으로 읍내면과 동서면을 합병해 청당면으로 칭했다.
다시 3년후에 청안면으로 개칭, 법정리 11개리로 하였다가 1949년에 32개구로 개편하였다.
후에 36개구로 개편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괴산군 씨감자 종자 개량소
칠보산 오름길은 고도편차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참으로 올라가기가 편하다.
숲길은 소나무가 가득하다. 보통의 육산은 낙엽송과 잡목이 대부분인데 이곳 칠보산 일대는 소나무가 꽤나 많이 보인다.
거기다가 인공 조림된 리기다 소나무도 많다. 홀로가는 고독한 산행이기는 하지만 정말 산에 대한 맛의 진수를 느끼는 것 같다.
이래서 홀로 산행에 점차 중독되어 가는 느낌이다.
이 꽃은 순수가 뭣인가를 가르쳐 주는같다. 산에서만 느끼는 이 맛. 어케 표현하지?
쪽지봉(597m: 10:00)
칠보치에서 출발한 지 30분만에 도착한 쪽지봉 지도상에는 있지도 않은 이름이다.
아마 정맥 산꾼이 붙여놓은 이름인 것 같다. 이곳에서 30m 떨어진 칠보산으로 간다.
칠보산(585m) 정상은 소나무에 주변이 가려 조망은 없으나 정상석은 칠보산악회에서
세웠노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셀카로 인증샷을 남기고 조금전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로 되돌아온다
칠보산 (585m:10:01)
칠보산이라 붙여놓긴 했지만 이름하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 아닌가 싶다.
주위의 조망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명승지나 유명한 그 무엇하나도 없는데
왜 칠보라고 햇을까? 七寶란 불교 경전인 무량수경에서는 금,은,유리,파리,마노,거거,산호를
말하며 법화경에서는 금, 은, 마노, 유리, 거거, 진주, 매괴를 말한다. 금강경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와도 자주 비교하는 항목이다.
칠보산에 들렸다가 다시 돌아와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골짜기 하나를 완전히 철조망으로
가로막고 있는 염소목장이 나타나는데 염소는 한마리도 보이지않는다.
염소목장길
좌측의 증평읍이 보일듯 말듯 나무숲에 가려져 있고 별로 크지 않은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소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피톤치드 향이 너무도 좋다. 그런데 오늘은 갈길이 먼데
컨디션은 영 엉망이다. 오늘 아침부터 벌써 4번이나 볼 일을 봤는데 또 배가 아파온다.
베낭을 벗어놓고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마음이 급해진다. 원래 목요일부터 컨디션을
조절하여야 하는데 어제 칠순잔치집에서 어쩔 수 없이 마신 술하고 보쌈이 문제인 것 같다.
난 체질적으로 고기와 그리 맞지않아 거의 채식주의자이다시피 한데 주인공의 강권에 의해
먹은 보쌈이 자꾸만 나를 괴롭힌다. 난 보쌈하고는 체질상 맞질않아 보쌈은 잘 먹질 않는다.
염소목장을 지나니 이번엔 괴산, 증평축협에서 정맥길을 짤라먹고 철조망을 쳐놓고
내 땅이네 하고 정맥꾼을 다른곳으로 내몬다. 그럴려면 길이라도 좀 만들어 주던지?
철조망 사이에 우거진 숲이 자꾸만 안경을 때려 걷기가 무척이나 힘이든다.
송치재(11:10)
겨우 철조망을 벗어나 편안한 능선에 오르니 송치재(솔치티)가 나타난다. 이곳은 몇해전에
재선충의 피해가 많았는지 괴산군에서 소나무를 베어내어 훈증 처리한 곳이 곳곳에 보인다.
이 구간에는 옻나무들이 참으로 많다. 쳐다만 봐도 가려워지는 느낌이다.
지난해 낙남정맥 타면서 옻이올라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한 기억이 있기에...
花無十日紅
송치재를 지나 편안한 길을 내려오니 갑자기 커다란 음악소리가 들리고 차량소리도 들린다.
이동통신 중계탑이 나타나고 철쭉이 보이며 나타난 곳이 보광관광농원 후문에 접어든다.
이곳 괴산은 ‘진달래 꽃’을 쓴 김소월이 32년 만에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인생을 생각하는데
충북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사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보광산 수련원(11:40)
어제 비가 온 탓인지 이곳 수련원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다. 직원들은 음악만 틀어놓고
거미줄 제거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 설치한 테이블에서 김밥 한줄을 꺼내서 커피 한잔과
함께 점심을 겸한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갈길이 아직도 멀기에...
모래재(12:10)
모래재는 34번 국도상의 고개이며 증평과 괴산 중간 지점에 있고 증평과 괴산을 오가는 버스가
많이 있어 접근하기가 좋다. 보광산 관광농원이 있고 농원 입구에는 모래재 의병격전 전적비가
있다. 이곳도 바로 옆에 새로 새긴 고속도로급의 4차선 신설도로로 인해 자꾸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모래재의병격전 유적비
이 유적비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를 주축으로 모래재에서 일어난 항일구국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한봉수 선생은 1883년 4월 18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동년 8월(음)에 의병장 김규환(金奎煥)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일군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맹활약하였다.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를 조직하였으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오근장(梧根場) 부근에서 일본 헌병대위 도기선치(島崎善治)를 사살하고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일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의 국장에 즈음하여 홍명희 ․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주도하였고,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의병장 한봉수(1883~1972) 선생은 합참의장을 지내신 한민구 장군의 조부이시다.
보광산 수련원을 나와 모래재 2차선 도로를 건너 수암 낚시터길로 접어든다.
옆에 논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시골에 젊은사람이 없다보니 전부 70이 넘은
촌로들이 힘겹워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인다. 이게 우리네 농촌 현실인것을...
그래도 전부 기계로 하는 거이라 좀 나아보이기는 하나 그 예전 우리 어렸을 적에
새참내다 먹으면서 잔치 분위기로 하는 모내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수암 낚시터(12:20)
고추밭을 지나니 낚시터가 나오고 서너명의 강태공들이 낚시대를 걸어놓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는 왜 혼자서 산을 타느냐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럴땐 뭐라고 해야지... 니들이 산맛을 알어 ㅋㅋㅋ
낚시터 뒤의 34번 신국도 굴다리를 빠져나와 좌측으로 조금 지나니 보광산 가는 이정표가 있다.
이젠 햇빛이 꽤나 따갑다. 얼굴이 따끔 거리니다. 봉성군 구례손씨 묘소를 지나 산속으로 접어드니
금방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참으로 인간이란 동물은 간사하기 이를때 없는가 보다.
한남금북정맥이 통과하는 괴산군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의 잉근내현, 상모현,
도서현이 되었고, 다시 신라에 속해 괴양현과 도서현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995년(고려 성종 14) 충주, 청주 등 13주 45현으로 구성된
중원도에 속했다가, 1018년(현종 9) 괴주지역이 괴주군, 장연현,
장풍현, 청천현, 청당현, 청안현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부터
괴산군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현재는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북과 경계를 이루면서 솟아오른 백두대간이 동남쪽으로
가로막고 있어 충북에서도 가장 오지인 괴산
괴산읍의 동쪽으로 흐르는 달천을 괴강이라고 부르며 괴산읍
대덕리에는 괴탄(槐灘)이라는 느티여울도 있다. 이 지역 지명에
유난히 홰나무 괴(槐)字가 많이 들어가 있다. 신라 진평왕 28년(606년)
가잠성을 지키던 신라장수 찬덕은 백제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석달 열흘을
버티다가 끝내 항복을 거부하고 느티나무에 머리를 받아 자결을 하였다.
후에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은 찬덕을 기리기 위해 이 지역 고을이름에
“槐”字를 넣었다고 전해진다.
충북의 지형이 그믐달 모양이다. 그 그믐달의 오목한곳 가운데가 괴산군이다.
한남정맥길은 괴산군을 빙돌아 지나가지만 괴산군 명산 35개나 있는
백두대간에 비할바는 아니다.
시동마을 삼거리(12:30)
잠시 후 삼거리가 나오고 곧 이어 보광사가는 임도가 나타난다. 이곳은 차도와 임도길이
별도로 있고 아마 산나물 채취꾼 차인듯한 차가 서너대가 주차되어 있다.
편안한 임도를 타고 10분 정도에 걸쳐 500m 정도 걸으니 보광사 1분이라고 쓴 이정표가 나온다.
보광사 대웅전(12:40)
보광산 중턱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고려 28대 충혜왕 1년에 창건됐다 조선 현종때 폐사된 옛 봉학사
터 아래에 건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청북도지에 의하면 1925년 폐사지에 권봉주 스님이 초막을
세우고 김봉삼 스님이 1936년부터 폐사지에 있던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을 아래쪽에 새로 지은 대웅전에
봉안해 주존볼로 모시면서 보광사로 건립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1967년 사찰 위쪽에 있는 봉학사지를
발굴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봉학사지 5층 석탑 2층 옥개석 사리공에서 조선 세조때 탑을 보수한 기록문이
나왔다고 하며 폐사지에서 수습한 암막새에 음각된 당초문이 고려 중기 이후인 것으로 밝혀져 봉학사의
창건과 중수연대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보광사는 크게 대웅전, 삼성각, 요사건물로 이뤄진 작은 가람으로
이 곳에는 구례 손씨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대웅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은 본래 봉학사의 법당에 있었는데,
조선 현종때 충청도 관찰사였던 김소의 자손들이 이 절터가 풍수지리설에서 금계포란형의 명장자리로 소문났기
때문에 김소의 묘를 법당자리에 쓰면서 불상을 근처에 파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 스님이 찾아와 명당을 더 복되게 하려면 계곡아래 물을 막아 복이 새나가는 것을 막으라고 일러주었고,
자손들이 그 말대로 하자 집안이 망했다. 금계포란형은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인데, 물이 흐르지 못하여 알이 썩는
바람에 집안이 망했다는 것이다.
그 뒤 19세기 중엽 보광산 아래 하도마을에 사는 손씨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서 옛날에 파묻은 불상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이제 때가 됐으니 보광사 남쪽 언덕에 있는 땅속에서 불상을 파내어 봉안하라’고 했다.
이에 손 씨는 마을사람들과 산에 올라가 불상을 파내고 봉안했는데 그후로 손씨 집안은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보광사에 들어서니 일주문도 없고 달랑 새로 단청을 한듯 대웅전만 깔끔하다.
입구에 등나무의 보라색꽃이 산꾼을 반긴다. 입구에서 대웅전을 향해 저두 삼배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대웅전과 옆에 건물의 문을 여니 다 문이 굳게 잠겨있다.
이 건물은 명부전인지 나한전인지 편액이 없어 알길이 없다. 바로 옆 요사채 건물로
가서 누구 없냐고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스님이 출타중인가.
그래도 일욜만이라도 여법하게 사시예불을 올리고 부처님을 예경하는 맘이
있으면 좋으련만? 씁쓸한 뒷만을 남기고 맛좋은 감로수 한잔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봉학사지 5층석탑(12:55)
보광사 200m 위쪽에 위치한 봉학사지 5층석탑은 충북유형문화재 29호다.
기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채 평평한 돌로 5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2개의 돌로 이뤄졌고 나머지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1층 몸돌은 큰편이고 2층 몸돌에서 급격히 낮아지다가 5층까지는 비슷한 크기를 유지한다.
각 층 지붕돌은 두꺼운 편이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좋지 않고 지
붕돌이 두꺼워진 점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산에서 사람을 봤다. 참으로 반갑기보다는 무섭다.
봉학사지 오층석탑 주위에는 머구(머우의 경상도식 발음)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부부가 같이 왔는데 엄청나게 수확을 많이했다. 청주에서 왔다고 한다. 서울서
왓다고 하니까 혼자서 겁도없이 다닌다고 하면서 조심해서 가라고 인사를 한다.
충청도 관찰사 김손의 묘소?
한 눈에 봐도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을것만 같다. 참으로 멋진 묘소이긴 하지만
후손들의 탐욕으로 인해 가문이 멸문되었으니... 이걸 어쩌랴. 바로 아래 석탑만이
그 비밀을 알까. 석탑주위를 사찰로 복원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석탑도 충북도에서 보물로만 지정했지 관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다.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나쁜것인가를 기억하며 올라가니
보광사 갈림길이 나온다. 정맥길에서 5분거리 정도 비켜나 있는 보광산 정상으로 향한다.
보광산(寶光山: 539m: 13:00: 괴산군 시리면)
원래 이름은 봉학산이었다가, 조선 중기부터 보광산이라고 부른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봉학사 터가 있다.
사찰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괴산봉학사지오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29)이 전해진다.
고려 때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 때 무너졌던 것을 1967년 복원하였다.
산 아래에는 봉학사의 후신인 보광사가 자리잡고 있다. 보광사 대웅전에는
봉학사지석조여래상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대웅전 오른쪽의 바위 아래에서는 석간수가 솟아난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열매 이름 아시는 분?
안부 삼거리(13:10)
보광산을 들렸다가 다시 되돌아와 길을 떠난다. 참 길은 편하다. 완전 둘레길 걷는
기분이다. 산이라기 보다는 숲의 터널을 지난다. 홀딱벗고 새는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계속 따라오면서 울어된다. 그러니 전생에 좀 살지 그랬어요
홀딱벗고새의 전설
새의 울음소리가 궁금하시죠. 이름에서 눈치 챘듯이 그 울음소리가 조금은 요상합니다.
바로 '홀·딱·벗·고~''홀·딱·벗·고~'하며 웁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소리가 '카·카·카·코~' 혹은 '호·호·호·히~'라고도 들린다고 합니다.
음계상으로 봤을 때 '미·미·미·도'로 표현되는 4음절의 독특한 리듬 때문에 그렇게 들린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리게 된 데에는 밑도 끝도 없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더 큰 작용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사찰의 한 스님에게 일어난 애틋한 사연입니다.
수행 정진하는 어느 날 그 스님에게 운명처럼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은 불귀의 객이 된 남편의 백일기도를 위해 탑돌이를 하러 절을 찾았습니다.
그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 스님은 그만 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세상과 등진 스님으로선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래서 그 번뇌을 떨쳐버리기 위해 쉼 없이 주문을 외웠습니다.
'사랑도 홀딱벗고, 번뇌도 홀딱벗고, 미련도 홀딱벗고…'
이렇게 열심히 주문을 외웠지만 한번 일어난 마음의 갈등은 차마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스님은 미련만 남긴 채 화풍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
홀·딱·벗·고~'는 그 모습을 지켜본 검은등뻐꾸기가 그 주문을 따라 부르다 보니
입에 익어 그렇게 나왔다고도 하고, 또 스님의 넋이 홀딱벗고새로 변해 그
런 울음을 울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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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4봉(13:25)
고리티고개(13:27)
충북 괴산군 사리면 소암리와 소매리를 잇는 고개로 이 높은 곳까지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있다. 도로를 건너니 고리티 고개라고 써있는 하얀 합판이 걸려있고
정맥꾼들의 흔적이 보인다. 원래는 이곳이 고리티 고개가 아니고 약 5분정도
더 가면 성황당 흔적이 있는(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 돌무덤
이 고리티 고개라고 한다.
백마산 갈림길
여기서부터 음성군에 들어섰는데 잠시 괴산군의 경계와 함께간다.
백마산(465m)은 산세가 이름다워 소금강이라 부른다.
백마산 중턱에는 백마굴이 있고 산의 서쪽 5㎞ 정도 떨어진 곳에
백마령이 있는데 백마령은 예로부터 교통로의 몫을 해왔으며
현재는 충북선 철도와 청주∼충주 간 국도가 지난다.
이곳 갈림길에서 왕복 1시간 가까이 걸린다고 한다. 아쉽지만 이번엔
포기하고 우측으로 기수를 돌려서 빠른 속도로 걷는다. 백마산은 숲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는다. 자꾸만 고개를 돌려보지만 백마산은 범여에게
눈길도 한번 안 준다. 편안한 길을 걷고 또 걷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다. 잠깐 쉬면서 물한금 마시고 길을 걷는데 자꾸만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북진하던 정맥은 375봉을 지나면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벌목지에 접어드니
백마산이 잠깐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은 소나무들이 참으로 건강하다. 솔잎이
많이 쌓여있다. 가을에는 송이도 있을 법한 곳이다. 이젠 백마산을 깃점으로
음성군과 괴산군 경계를 타던 정맥은 괴산군과 작별을 한다.
437 삼각점(14:20)
내동고개를 지나고 다시 편안한 걸음으로 빠른 속력을 낸다. 오늘 산행 속도가 평균 3km
이상이니 이 정도면 인민무력부 공작 안내조 수준이다. 정말 미쳤어 ㅋㅋㅋ
얼마전에 설치한 듯한 437 삼각점이 정맥길 정중간에 있어 산꾼들의 발길에 훼손이
되는 모습이 안타깝다. 참으로 멍청한 짓거리... 하는 꼴이라고는?
백마산(465m)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주봉리에 걸쳐 있는 산.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주봉리와 괴산군
사리면과 군계를 이루고 있는 명산이다. 고문헌에는 음성군 남쪽 20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계절
경치가 아름다워 소금강이라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마산의 산 중턱에는 백마굴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백마굴에서 백마가 나왔다고 해서 붙어진 산의 이름이다.
산 정상 부근에는 암석군이 있는데 모양에 따라 상촉암·관모암·장수암·군반암·상좌바위·범바위·매바위
·쌍동바위 등으로 불린다. 백마산 서쪽 5㎞ 지점에 백마령(240m)이 있으며, 청주~충주 간 국도 36호선과
충북선이 통과하고 있다. 백마령은 충청북도를 북부와 남부로 양분하는 경계선이 되기도 한다.
백마산의 경우 근방의 여러 산들이 모두 백마산을 보고 엎드려 절하는 형상으로서 백마산이
주변 산들의 조종(祖宗)이 되는 셈이다. 가뭄이 심할 때 산에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듯이
비가 온다는 명산으로 정상은 물론 기이한 봉우리 모두가 명당으로서 그 곳에 묘를 쓰면 자손들이
영화를 누린다고 한다. 그러나 산중에 암장을 하면 가뭄이 든다고 하여 밀장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보천고개(230m:14:50)
음성군 원남면과 괴산군 소수면을 잇는 515번 지방도가 지나는 보천고개는
토골고개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곳은 수령이 450년이나 되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보천고개 노거수
음성읍내 모습
가섭산에 둘려쌓여 있는 음성은 전형적인 농촌도시이다.
378.5봉(15:10)
원남산단단지 조성공사
가정재 내려오는 길 우측에 커다란 산 하나를 깍아 뭉개서 원남산업단지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개발론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산이 하나 없어진다.
이 나라에 언제까지 개발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을지? 기존공단을 잘 활용해야지
맨날 불도저만 갖다 댄다고 잘사는 건 아닐터인적... M.B 정권이 들어서고는 수출이
많이 신장되고 대기업들은 살기 좋은지는 모르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자꾸만 힘이든다.
대기업들이 구멍가계들이 운영하는 골목상권까지 장악하지 않나, MRO론가 뭔가를
하면서 볼펜까지 자기들이 다 하니 민초들은 뭘 먹고 살아야 할 지...
범여가 하는 인테리업도 마찬가지다. 갈수록 이익은 줄어들고 인건비는 비싸고 고민이 많다.
그렇게 미워했던 故노 무현 대통령이 차라리 그립다. 벌써 그 분 가신지가 2주기라니...
가정재 삼거리(15:30)
가정재 삼거리에서 산능선을 올라타니 최근에 새로 조성된 호화묘지 여러기가
정맥길을 깔아뭉개 버렸다. 이꼴저꼴 보기 싫어 정맥꾼들이 임도를 타고 가는 모양인데
고집스럽게 정맥길을 타고 가니 또다시 고추밭이 정맥길을 짤라 먹고 있다.
좌측의 가정재 고개 넘어의 주봉리 마을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저 넘어 충북선 철로가 보이고 다시 우측으로 기수를 돌려 펴안한 능선을 탄다.
이곳에 오늘 두번째로 산나물 채취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이곳은 잔대와 둥굴레를 캐느라고 산을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어 놨다.
윗행치마을(반 기문 UN 사무총장 생가 전경)
이제 행치재를 가기위한 마지막 능선을 넘는다. 다시 안부를 타고 내리니
UN 사무총장을 배출한 윗행치 마을이 보이고 그 앞에 달성석재라는 커다란
석재공장이 정맥길을 갈기갈기 찌져 버렸다. 할 수 없이 우회하여 36번 舊
국도를 내려서 지하차도를 빠져 나오니 광주 반씨 집성촌이 나타난다.
날머리 행치고개 행치마을은 반씨 집성촌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고향으로 안내 표지판부터 비석이며
초가집으로 생가가 꾸며져 있다. 유엔(the United Nations). 연못과 생가, 기념관을 둘러보고 정자에서
옷을 정리한다.
반 기문 UN 사무총장 생가(16:10)
시간을 줄일려고 식사도 못한채 계속해서 걸어 왔더니만 도저히 허기가 져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원래는 돌고개가지 가야만 마지막 구간에 편안하게 갈 수 있는데
아무래도 올라가는 차시간 땜에 오늘은 여기서 줄여야겠다. 오뎅 파는 아줌마한테
양해를 구하고 베낭을 풀어 식사를 하는데 우선 막걸리부터 사이다를 타서 한잔
하고나니 살 것만 같다. 아줌마가 지친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오뎅 한꼬지에 국물까지
준다. 그리고는 수도물에 씻어라고 하고 등목까지 해준다. 얼마나 고마운지
나이도 나하고 동갑이란다. 베낭르 정리하고 씻기까지 하니 참으로 개운하다.
휴게소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음성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와서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진다.
행치재 휴게소(16:40)
음성 원남의 한 고개를 두고 한금령, 백마령, 행치재 등 3가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한금령은 그 고개에서 한강과 금강물이 갈라진다는 뜻에서, 백마령은 인근에 백마 조형물이
세워진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의 공식 지명은 '행치재'다.
반석평 후손들은 과거부터 내려온 지명에서 이름을 따 자신들을 '장절공 행치파'라고 불러왔다.
장절공은 반석평의 시호로, 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그의 직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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