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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한남.금북정맥(終)

한남.금북정맥 제5구간 - 현암삼거리에서 질마재까지

by 범여(梵如) 2011. 5. 10.

 

○ 산행일자:2011.05.07(일) 당일산행 
○ 산행날씨:초반에 상당히 안개가 심함. 오후에는 20도가 넘는 더위에
바람 한점없는 무더위 지속 
○ 참석인원:나홀로
○ 산행거리:도상거리:23.5km/G.P.S거리:26.2km/9시간 40소요
○ 산행코스: 현암삼거리-목련공원-512번도로-것대산-봉수대-상동재-산성고개(출렁다리)
-산성남문-서문-상당산

                 동암문-고목나무(임도)-487봉-이티봉-이티재-구녀성-구녀산-분젓치-방고개-좌구산-새작골산-질마재            
○ 소 재 지: 충북 청원군 낭성면, 미원면,내수읍/청주시 상당구/증평군 증평읍/괴산군 청안면 

 

5월은 언제나  그랬듯이 참으로 바쁜달이다. 더군더나 이번주는 초파일 전야제 행사관계로

참으로 바쁘게 보냈다. 낮에 마감하는 현장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작업지시를 하고 서둘러

수성 법사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여 제대로 축하도 못하고 봉투만 내밀고 식사를 한 후에

서둘러 학교로 가서 제등행렬 준비에 참석한다. 이제 선배이다는 핑계를 대고 후배들에게 많이

미루는 요령까지 부리고 6시부터 시작하는 제등행렬에 동참하고 끝난 뒤 부처님 생신 전날에

곡차가 없어서 되겠다냐는 동료 도반의 꾀임에 넘어가 조계사 옆 식당에서 뒤풀이로 막거리를

꽤나 마시고 집에오니 12시가 다되어 간다. 베낭준비를 간단히 마치고 두어시간 눈을 부치고

새벽 3시반에 일어나 차에 오른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중부고속도로에는 차가 꽤나 많다.

음성 휴게소에 들려 점심으로 충무김밥하나 사고 아침식사를 한 다음에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50m 앞도 보이지 않을정도로 짙은 안개가 괴롭힌다. 오창 I.C를 빠져나와  현암삼거리에 있는

지난구간 맛있게 점심을 먹었던 묵밥집에 차를 세우고 아침 6시에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제등행렬에 참석하기 위해 오랫만에 학교에 갔다.

만해관에 있는 총학 사무실에 도착하니 도반들이 벌써 많이들 와있다.

광장에 들어서니 내팔인 불자들이 같이 사진 한장만 찍자고 소매를 땡긴다.

이 친구들이 모델료도 주질 않을거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그래 이것도 보시인데 뭐,

네팔하면 하면 히말라야 아래에 있는 세계 최빈국이라 생각하지만 만나보면 참으로 영혼까지

순수한 친구들이다.  부처님을 닮은 탓인지 물질적으론 못사는 나라인지 몰라도 삶의 만족도는

세계 최고란다. 많이 가진자들이 부족함을 더 느끼는 건 무슨이유일까?

제등행렬

동국대 운동장에서 출발하여 서울시 역사박물관(舊 서울 운동장)을 지나 종로를 거쳐 조계사까지

도착한다. 불교인들의 축제이기 전에 문화적 가치와 관광자원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데

현 정부의 기독교 편향적인 탓인지 올해는 많이 위축된 느낌이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제등행렬을

바라보는 느낌은 불자의 한사람으로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 몇년전 일본 아오모리에 갔을 때

조그만 도시에서 열리는 네부타 마쓰리라는 며칠간의 축제하나로 1년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국정을 책임지는 분들은 종교를 떠나 국익이 뭔지를 생각하는 전향적인 사고를 가졌으면...

현암리 버스 정류장

수레너미고개(현암삼거리:06:00)

청주시 월오동과 청원군 낭성면 경계인 현암삼거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다 선답자의 표식기가 매달린 곳으로 접어든 숲속, 흐릿한 등로를 따라

훠이적 거리며 오르자 한남금북정맥 구간가운데 유일하게 청주시를 관통하는 이 구간은

말 그대로 청주시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멀리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이

 눈아래 펼쳐지고 그너머에는 부모산과 옥산뜰이 아른거리는 것을 상상하고 가는데

현재의 안개낀 상태로 보면 아무래도 무리일것 같은 느낌이다 

 어제 저녁에 잠을 못잔 탓인지 초반부터 컨디션 난조로 오늘코스를 완주가 가능한 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삼거리에서 청주 512번 지방도로르 따라 약600m 정도 걷다가 우측

 콘크리트 옹벽을 타고 마루금에 접어든다. 아침이 이슬이 많은 탓인지 바지가랑이 젖기 시작한다.

마루금 진입로

36번 송전탑(06:15)

삼거리에서 출발한 지 15분만에 몇기의 묘지를 거친뒤에 36번 송전탑이 나타난다.

여기서 직진 코스는 등로가 뚜렷하게 잘 나있는데 정맥길을 잘 보이질 않는다.

자세히 보면 철탑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90도가 꺽어진 곳에 희미한 등로를 따라

시그널이 어지럽게 걸려있다. 5분만에 다시 512번 도로를 내려와 길을 건너서

오르면  은행장을 지냈다는 성주이씨 묘지가 나타난다.(이곳에 알바조심)

영조대왕 태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이 태실(胎室)이 청주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청주목

산내일동면 무쌍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가 바로 현재의 낭성면 무성리이다.

이 태실은 1695년(숙종 21)에 조성되었던 영조(1694∼1776)의 태실을 1729년(영조 5)에

 다시 왕의 태실 규모와 구조에 맞도록 고쳐 만든 것이다. 태실의 형태는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중앙에 2단으로 된 정사각형의 대석을 놓고 그 위에 계란모양의

 태실석(胎室石)과 팔각의 갓처맛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주위에 8개의 장대석을 8각으로

 놓고, 8각의 모서리에는 우주석(隅柱石)을 세웠다. 8면의 중앙에는 사각의 동자석을 세운

 뒤 육각의 장대석을 가로얹은 돌난간을 둘렀다.

 

태실 앞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 상단에 조각한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

. 비신의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옹정7년 10월 14일(雍正七年十月四日建)〉이라 쓰여 있다.

이 영조태실은 한말까지는 나라에서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1928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항아리만 꺼내어

 서울 창경궁으로 옮기면서 크게 파손되었다. 그후 태실 자리에는 민간의 묘가 들어섰고,

 태실비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다. 1982년 청원군에서 갓처맛돌이 없는 상태로

태실을 복원하였다. 청원군에서 소장한 《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필사본)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별도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은행장 묘지(06:220

은행장 성주이씨 묘비 뒷면에 새겨놓은 도연명의 유명한 의만가사(擬輓歌辭)를 적어놨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으니 일찍 죽는다고 명 짧은 건 아니로다.

어제 저녁 다 같이 사람이다가  오늘 아침에 귀록의 명단에 올라있네.

혼은 흩어져 어디로 가버리고 메마른 신체 빈 나무관에 부치고 있

아이들은 아비찾아 부르짖고 친구들은 나를 잡고서 곡하누나.

이해득실을 다시는 알지 못하고 시시비비인들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천년 만년 지난 후에는 그 누가 명예와 치욕을 알리오 다만 한스러운 건

살아 생전에 술 흡족하게 마시지 못했음이라. 

 

도 연명의 ‘죽은이를 위한 노래’중에서

목련공원(06:30)

은행장 묘지를 지나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에 오르니 주위에는 운무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고개르 내려오니 좌측에 그리 크지않은 목련공원이라는 조그만 천년주택 단지가 나타난다.

이곳의 특징은 봉분이 없다. 주위에는 흐드르게 피어있는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둥굴레꽃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512번 지방도(06:40)

목련공원 지나면서도 수없이 묘지를 만난다. 이곳이 명당터인가.

편안한 길을 걷다보면 두번째 만나는 512지방도로가 나타난다.

도로를 건너면서 다시 급경사를 치고 오르니 통신기지탑이 웅웅거리면서

앞을 가로막는다. 조금 오르니 것대산 활공장이 나타나는데 안개로 인해 시계제로상태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죽어 못사는 사이인가 괴로워 죽을 지경인 사이인가?

것대산(484.0m:06:55)

옛 문헌에 ‘거차대산(居次大山)’ 또는 ‘거질대산(居叱大山)’ 등으로 차자되어 나온다.

즉, ‘居次大’나 ‘居叱大’는 모두 ‘것대’로 재구성되어 불린 것이다.

거질대산’은 ‘거질대(居叱大)’의 ‘질(叱)’이 차자표기에서 ‘ㅅ’의 표기인 줄을

모르고 음으로 읽은 지명이다

것대산 활공장

활공장은 짙은 안개로 인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안개는 그칠줄 모르고 계속해서 따라 다닌다. 아름다고 조용한 도시 청주를

구경하기에는 아무래도 덕이 모자람 탓인지 틀린것 같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것대산 봉수지 안내도

것대산 봉수지(07:00)

이 봉수대는 긴급한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축조된 봉수대로써 고려시대때 만들어 졌다고 한다 

통신하는 방법은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불빛을 올리되 평시는 1회, 적이 나타나면 2회,

경계에 접근하면 3회, 경계를 침범하면 4회, 접전중이면 5회를 올려 긴급 통신을 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봉수지의 하나로 경남 남해에서 출발하여 서울 남산으로 이어지는

국내 2번째의 것대산 봉수리라고 한다. 1894년 봉수제도가 페지된 후 방치되었다가 1993년

 1차발굴에서 봉수터 흔적을 발견했고, 97년에 일부발굴을 통해 도지정문화재까지 지정됐다고 한다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수가 없어 서둘러 길을 떠난다.

오늘 계획된 거리가 만만치가 않고 어무래도 잠을 못잔 탓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초반에 거리를 줄이는게 유리할 것 같다. 조금 내려오는 충북 산림 연구소에서

조성 계획 조림지에 층층나무를 비롯해 여러종류의 나무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고

산 아래로는 새로 개통된 것대산 터널이 지나가고 있다.

상봉재(07:10)

것대산 봉수대에서 조림지를 거쳐 편안길을 10분 정도 내려오니 상봉재가 나온다.

청원군 낭성면 현암리와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을 잇는 호젓한 고개이다.

친구를 위한 碑

상봉재에 오르니 친구를 위한 비석이 있다. 뇌출혈로 뇌사판정을 받은

박 주만 청년이  12명에게 장기기증을 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고 적혀있고

비석 뒤에는 12명의 친구들이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노라고 적혀있다.

 

평생을 살면서 나의 이름을 기억해 줄 3명의 친구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데

12명 친구라... 젊은 나이에 대단해 성공한 친구다. 저 세상에서도 멋지게 살 친구같다.

명복을 빈다. 이곳은 청주시내 근교라 그런지 뚜렷한 등로가 사통팔달로 잘되어 있어

잘못하면 알바하기 쉬운 곳이다. 꼬리표도 정맥길 아닌곳도 상당산성 150리길 등

유사한 꼬리표가 많다. 정맥길 꼬리표를 확인하시길... 이곳에서 우측 3시 방향으로

꺽어져 돌아서니 정맥 시그널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이 좋으니 서서히 잠이 쏟아진다. 잠자기 참으로 좋은 길이다.

우측으로 잘 조성된 여러기의 묘지와 이제 농사를 시작하려는지 논, 밭이

정리되어 있고 저수지도 하나 보인다. 한 5분정도 졸면서 걷는데 갑자기

안녕하셔요 하는 소리에 눈을 떠니 중년 여인 2명이 산보를 하는 중이다.

피곤하신가봐요. 걸으면서 조네요 하면서 신기한 듯 쳐다보고 지나간다.

출렁다리(07:25)

청주시내에서 설치한 출렁다리가 나타나고 그 아래로는 512번 지방도로가

지나간다. 오늘 3번째 이 도로와 조우를 한다. 이제 상당산성으로 올라간다.

이제부터 청주시내에 접어든다.

청주는 옛부터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지세가 무심천위에 뜬 배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청주는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으로 백제 시대에 이르러 상당현(낭비성 또는 낭자곡)이라 칭하고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5소경중의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격,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청주로 지명을 개칭.
조선시대에 들어 수운이 발달한 충주가 교통의 요지로 부상함에 따라 청주는 상대적으로 발전이

 정체되었으나 1905년 경부선철도 개통과 함께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되었으며, 1908년에는

 관찰사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었다. 1920년 충북선개통은 지역발전을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1946년에 청주부와 청원군이 분리되었고 1949년에 청주시로 승격되었다.

그후 행정동 분동, 청원군 편입 등에 거쳐 1989년 7월에 2개의 출장소(동부·서부)가 설치되었고

1995년 1월에 출장소가 구(동부 -상당, 서부-흥덕)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高麗史” 지리지에는 “淸州牧은 본래 백제의 上黨縣이다 신라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西原小京이 설치되고

 경덕왕때 西原京으로 승격하였고, 고려 태조 23년에 淸州로 고쳤다”라고 청주의 연역을 설명하고 있듯이

 지금도 백제의 지명이 상당산성에 남아있고 고려이래의 청주가 남아있는 역사와 전통의 고장이다.

조선시대에는 忠淸兵使가 있던 병영이 이곳 청주였다.

상당산성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 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산 정상 바로 아래 서문을 통과하면서 부터 그동안 상당산성 주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시그널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고도차가 별로없는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르다가 등산로라고 씌여진 표지판을 보고 

오른쪽 아래로 임도를 따라 내려서자마자 삼거리 좌측길로 이티재 산행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길을 제대로 찾으면 이티재까지는 어려운 곳은 없다.

이곳 갈림길에서 임도를 따라 계속 내려서면 낭성면 삼산리 골짜기인 막거리가 나온다.

막거리는 옛날 막장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당산성 남문(07:40)

출렁다리를 출발하여 편안한 걸음으로 15분만에 남문에 도착하여 산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청주시민들의 안식처인지 아침 운동하는 하는 시민들이

꽤나 많아 보인다. 좌측 서문으로 가는데 청주 시내의 조망은 불구하고 바로 코 앞이

성벽도 보이질 않는다. 성벽 보수를 하며서 위로 덕지덕지 칠한 시멘트가 상당히

이 범여의 눈에 거슬린다  이곳 근방에 김 시습 詩碑가 있다는데 찾을 수가 없어 그냥 지나간다.

 

상당산성 남문 김 시습(金時習) 詩碑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 시습은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불살라버리고 전국을 유랑하며 때로는 세상을

조롱하며 미치광이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 상당산성 남문에서 시를 남겼으나 그 중에 김 시습의 시

유산성(遊山城)이 가장 유명하다.

 

꽃다운 풀이 헤진 짚신에 파고드는데

날 개이니 풍경이 청량하여라

들꽃에는 벌이와서 꽃잎에 입맞추고

살찐 고사리에 비내려 향기를 더하네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아라.

사양말고 저녁내 바라보시게.

내일이면 바로 남방으로 떠나갈 것일세

 상당산성 서문(미호문:彌虎門:08:00)

 청주시내는 요즘 정국만큼이나 잔뜩낀 안개로 인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쁘게 꽃단장하고 어느 님을 기다리시나

상당산(上黨山, 419m; 08:15)

삼국시대에  청주가 백제의 상당현 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서쪽과 남쪽은 골짜기에 흐르는 물은 무심천(無心川) 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들어가고 동쪽 골짜기의 물은 미원천을 거쳐 남한강에 합수한다 한다 

 

이곳은 조금만 방심하면 놓치기 쉬운 곳이다. 산 정상에 오르니 모자지간에 쉬면서 간식을 즐긴다.

커다란 베낭을 메고 산에 오르는걸 어디서 왔다냐고 하면서묻는다.

속리산에 출발하여 안성까지 가는 중이라고 하니 자기 청주에 산 지가  50년이지났는데

상당산 정상이 있는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고 한다. 

동암문(08:20)

상당산 정상에서 인증 샷을 남기고 5분정도 내려오니 산성 통로아래 폭 들어가

있어 놓치기 쉬운 곳이다. 자세히 보면 시그널이 몇개 달려있고 성문 밖을 빠져나와

성벽을 끼고 500m 정도 가다가 숲속의 둥지라고 하는 표지판과 같이 계속해서 

같이 간다. 이곳은 대도시 주변인데도 불구하고 나무들이 참으로 건강하다.

소나무, 갈참나무와 수많은 야생화가 지천이다. 잠시 후에 노루 2마리가 황급히 도망을 간다.

갈림길 이정표(09:00)

30여분을 지난후 우측 임도를 타고 계속해서 걷는다. 자그마많게 쌓아놓은 돌탑을 지나니 허기가 진다.

휴식을 취할 겸 휴게소에서 산 충무김밥을 꺼내서 먹고 커피에다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나니

졸음이 쏟아진다. 베낭을 배고 조금 잘까 생각을 하다가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아 그냥 길을 나선다

475봉 정상(09:35)

길은 참으로 편하다. 고도편차가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 오르내림을 계속한다.

475봉에 올라서니 약간의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준다.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이젠 숲속이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예 눈을 감고 가는 기분이다.

좌측에 총소리가 계속 들린다. 이 아래 부대가 있나하고 생각을 하면서 걷는다.

나중에 알고보니 총소리가 아니고 도로공사를 하면서 발파하는 소리였다.

둔병이 마을

 둔병이는 옛날에 군대가 주둔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낭성면 삼산리의 산으로 둘러 쌓인 산촌이다.

임도(10:30)

청원군 북일면 비상리와 미원면 대신리를 잇는 3640m의 임도가 있고

엄청나게 큰 축산농가도 보인다. 엄청나게 오래된 속이 텅빈 노거수 한그루가 고개를 지킨다.

속이 텅빈 노거수

임도에서 이티봉을 향해 올라가는데 우측에 안정나씨 승지공파 영조당이

엄청나게 크게 들어서 있다. 오늘 날씨는 꽤나 덥고 햇볕은 따갑기만 한다.

10여분만에 능선에 올라서 길을 걷는데 오늘 처음으로 힘든 구간을 맞이한다.

오늘 처음으로 빡세게 산에 오르니 다시 부드러운 능선이 나타나고 폐벙커가 나온다.

좌측으로는 초정약수로 유명한 초정리가 보이고 이곳에 통일교 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탄신음료공장인 초정음료 공장과 충북소주 공장 크게 보인다.

487봉(이티봉) 삼각점(10:50)

아무래도 눈을 좀 부쳐야 될란가 싶다. 자꾸만 눈커풀이 무거워서 미치겠다.

이티봉의 부드러운 능선길에 졸면서 내려가다가 길가에 넘어져 있는 소나무에

걸려서 보기좋게 꼬꾸라진다. 다행히 상당산성에서 여기까지 요면서 사람 구경을

못하고 왔기에 덜 창피하긴 했지만 무릎이 다 까지고 베낭이 엉망이다.

그 바람에 봄날 종족 번식을 위해 일을 치르던(?) 꿩 부부가 푸드덕하고 도망을 간다.

미안하다. 한참 엔조이를 즐기는 시간에 방해를 해서...

쩔뚝거리며 부드러운 임도를 타고 내려오니 우측에 논에는 농사준비가 한참이고

차소리가 들리면서 이티재에 도착한다. 

이티재(11:10)

청원군 북일면 초정리와 미원면  대신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이티재라는 말이 재미있다. 엉뚱한 사람은 이곳이 공상영화에 나오는 외계인 이티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을 때  이틀에  걸쳐서  넘는다고 해

 이틀재라고 불렀고, 다시 이티로 변음된 것이라고 한다.

이티재에 도착하여 베낭을 정리하고 연고를 꺼내 무릎에 바르고 밴드를 붙이니 지혈이 된다.

다시 길을 걷기위해 빵하나와 쥬스한개를 허기를 때우고 10여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눈 앞의 간판이 희안하다. 다유정이란 간판이 난 음식점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이티봉 다유정사란 사찰이다. 맨 위엔 금강좌을 형상화한 법륜마크로 海東이란 표시를

보니 해동불교 종단인 모양인데 ‘귀를 보면 건강과 사주가 보인다’고 해놨다.

부처님께선 정법으로 중생을 제도하라고 했거늘 이게 무슨 망발인지... 제발이지

정법으로 행하라 했거늘 사주 관상으로 중생들을 혹세무민하지 말고 부처님 팔아

자기 잇속을 차리지 말았으면 한다.

 

이티재는 딸을 시집보낸 할머니가 고개 마루에 올라 딸을 기다리다가 죽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고 주유소 마당에 구녀성이라는 커다란 돌비석이 하나 있다.

 고개 마루에 주유소와 휴게소 옆 능선을 끼고 구녀성으로 향한다. 부드러운 능선에

중간 중간 운동시설기구들이 설치되어 있고 길을 마치 고속도로 처럼 넓다.

 이티봉에서 구녀산까지는 단조로운 오르막길 능선길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

 소나무숲길이 갓 뚫어놓은 신작로처럼 맨살을 드러내고 있어 아쉽지만 울창한

 숲은 한여름의 뙤약 볕도 가려줄만 하다.

구녀산성 가는 길에서 바라본 건너편의 이븐데일 C.C

구녀성(九女城:11:50)

본래 이름이 구라산성으로, 미원방향인 동남쪽의 계곡을 품고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이다. 정확한 축성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축성방법이 

은의 삼년산성이나 단양의 적성과 유사하여, 신라가 세운 성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상당산성에 대응하여 고구려가 쌓은 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구녀성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얽혀있다. 옛날 이곳에 홀어미가 딸 아홉과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남매간에 불화과 잦더니 마침내 생사를 건 내기를 하게 되었다.

딸들은 산꼭대기에 성을 쌓고,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기로 해서 승부를 내기로 한것이다.

 날이 지나 딸들은 성을 거의 완성시켜 가는데, 서울 간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홀어미는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 딸들에게 먹이며 딸들을 쉬게 했다.

그런데, 딸들이 팥죽을 식혀 가며 먹고 있는 동안 아들이 퉁퉁 부은 다리를 끌며 돌아왔다.

 내기에서 진 아홉 명의 딸은 성벽위에 올라가 몸을 던졌고,동생은 그길로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홀어미도 남편의 무덤 앞에 아홉 딸의 무덤을 만들고

숨을 거두었다.그뒤로 아홉 명의 딸들이 쌓은 성을 구녀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아선호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구녀성 안에는 양지 바른 곳에 여러개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인근지역 사람들 사이에는 아홉딸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구녀산에는 곳곳에 다양한 휴식시설과 생활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등산로 곳곳에

안내판이 있어 찾는 이들에게 불편이 없도록 해주고 있다

구녀산성 유래 안내판

구녀산(484m: 11:55)

청원군 내수읍과 미원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가벼운 하이킹 정도로 산행을 마칠 수 있으며,

등산로 입구에는 약수목욕탕이 있어 약수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구녀산은 남한강의 발원지인 좌구산(座龜山, 675m)에서 남서쪽으로 북일면 우산리 및 미원면 대신리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구녀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민간신앙의 집산지로 출생과 무병을 기원하는 서낭지가 여러곳에 산재하고 있으며,

오랜기간 신성시 되던 곳으로 노송과 원시림이 천연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산의 내부는 성터로써 우물과 수원지의 흔적이 남아 놀이와 휴식에 적합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북쪽 미호평야와 청주의 상당산성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다.

초정약수 가는 길

청원군 북일면 초정리에 있는 초정약수는 이티재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청주 청원지역

 주민들은 물론 세계3대 광천수로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명소가 된 곳이다.

초정리 광천수는 세계 광천학회에서 미국의 샤스터, 영국의 나포리나스와 함께 세계 3

광천수(鑛泉水)로 꼽고 있다. 또 초정리 광천수는 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광천수(F.D.A. 인정)로 조선 세종대왕 26(서기 1444) 32일에는 왕이 친히 이곳에

행차해 60일간 머물면서 안질을 치료하였고, 세조대왕께서도 이곳에서 질병을 치료하였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 청주목 산천에서는 淸州에서 쪽으로 39에 매운맛이 나는 물(椒水)이 있는데,

이 물에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낫는다고 하였고, 이수광의 지봉유설(芝蜂類設)에는 우리나라에 많은

초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기도 광주와 청주의 초수가 가장 유명하다고 기록돼 있다.

예로부터 7~8월 한여름에는 초수의 약효가 제일 좋다고 해 복날과 백중날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목욕을 하며 더위를 식혔다

이 곳에서 또하나의 명물은 광천으로 목욕을 하는 것이다. 인근에 약수원탕이라는 이름의 목욕탕이 여러곳 있다.

 이 목욕탕의 특징은 탕속에 들어가면 물에 녹아있는 탄산 때문에 아랫도리가 따끔따끔하다는 것이다.

 외지인들은 이런 느낌을 놀라와 하면서도 대체로 즐겁다는 표정이다. 정맥을 탐사하거나 인근 지역을 산행을

한 뒤 이곳에서 피로를 풀면 그만이다. 그래서 청주사람들이 외지사람들을 초청해 주로 안내하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초정에는 또 충북의 대표적 향토기업인 충북소주도 자리잡고 있다.

술맛을 가름하는 것이 물맛인 만큼 주류회사에 이 곳에 터를 잡은 것도 초정약수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청원

구녀산부터는 청원땅인 이곳이 백제이었던 시절에는 이곳을 상당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을 신라가 점령하면서 ‘서원소경’이라 불렀으나 통일 신라의 경덕왕

시절에는 작다는 뜻의 ‘소(小)’가 떼어져서 ‘서원경’으로 정해졌다.

고려시대에 청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고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

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청원에서 떨어져 나와

청주부로 승격되었다.  충북도청이 있는 청주를 한바퀴 둘러싸고 있는

청원군의 면적이 괴산군 다음으로 넓고 충북에서 가장 넓은 미호평야는

미호천을 끼고 청주분지라 불리며 남북으로 구릉을 이루며 충북지역의

쌀 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구녀산 오름길 부터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등산객보다는 나물과

약초를 채취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범여도 고사리를 꽤나 많이 꺽었다.

운좋게 더덕도 한뿌리를 캤다. 구녀산에서 처음으로 정맥산꾼을 만났다.

정자에서 코펠에다 점심식사를 한 모양이다. 남녀 2명인데 인천에서 와서

어제 청주에서 1박하고 산성고개에서 05시 40분에 산행을 시작했는데

동암문을 못찾고 안갯속을 헤매면서 2시간을 알바를 한 모양이다.

방고개까지 동행하다 내가 먼저 치고가는 바람에 헤어진다.

스마일 이정표에서 율리가는 쪽이 정맥길이다.

분젓치(12:35)

분젓치에는 증평군에서 새로 단장한 좌구정을 비롯해 꽃도 심고 데크 계단을 만들어

외지인을 모으기 위해 한 것 같은데 깔끔해서 좋다.

 

옛날 장꾼들이 증평장과 미원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흔적만 아스라한 이 고갯길은 구절양장,

산모퉁이 굽이돌아 넘는 고갯길이다. 장꾼들이 고개를 넘나들며 막걸리로 목을 축이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장도 봤겠다, 가벼워진 등짐을 주막에 내려놓고 "저 고개만 넘으면 고단한 하루가 지나려니.

." 막걸리 한 사발에 국밥 한 그릇 말아 먹으면 고갯길은 나그네의 풍류일수도 있었겠다.

주로 증평장과 미원장을 오가던 마을 주민과 장꾼들이 넘나들었다는 분젓치는

이제 증평읍과 미원면을 잇는 2차선 도로가 나있어 걸음걸이로 넘나들던 분젓치의 아기자기한

사연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

 

좌구정에서 바라본 삼기저수지와 멀리 증평읍

분젓치에서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멋진 조망과 쉼터역할을 하는 좌구정 

좌구정에서 자료를 기록하는 사이 아까 구녀산 정자에서 만났던 남,녀산꾼을 만난다.

이곳에서 방고개까지 같이 동행한다. 분젓치에서 우측으로 돌아 마루금으로 들어서니

제법 급경사가 나타나고 계속해서 오르내림을 계속한다.

 

이곳에는 약초꾼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개구리복에다 장화를 신고 G.P.S까지

착용한 신식 약초꾼이다. 536봉을 급하게 치고 오르니  저 아래 방고개에

건설중인 천문대가 보이고 전 건너 마지막 관문인 좌구산을 우리를 기다린다.

지나가던 약초꾼이 여성 산꾼에게 여자들에게 좋은거라면서 잔대 한뿌리를 건넨다.

536봉을 지나니 멋진 의자가 나타나고 곧이어 방고개가 나온다.

방고개(栗峙:13:40)

 증평읍 율리의 부점촌과 청원군 미원면 화원리의 삼흥을 잇는 고개(해발 360m)로 또 다른

고갯길인 분젓치(해발 340m)와 함께 증평에서 미원으로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분젓치와는 상대적으로 길이 외지며 높이로는 분젓치 보다 약 20m 가량 높은

방고개는 지금은 비포장 길이지만 임도가 잘 닦여 있어서 승용차로 오르내리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이다.

 

원래는 율치라고 부르는 밤고개였는데 어떻게 방고개라고 부르는 연유를 모르겠다.

증평군의 지명에 대한 사료에 따르면 이곳 밤고개 밑에는 밤티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인조반정 때의 공신인 김치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이룬 마을이라고 한다.

방고개 입구에 좌구산 천문대 공사가 한창이다

올해말까지사업비 50억원을 들여 조성된다고  천문대는
증평읍 율리 산 61-1 4천290㎡ 터에 건립되며 건축규모는 연면적 820㎡, 높이 17.7m 이며
별자리관측 등 주관측실과 보조관측실, 홀, 시청각실, 전시실, 투영실, 사무실 등으로 꾸며진다고 한다.

방고개 주위에는 해변가 방갈로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의자들이 꽤나 많다.

여기가 사람들이 별로 많이 오는지는 모르겠으나 혹 노파심에서 그런데

천문대 직원들의 휴식을 위해서 설치한 건 아니겠지?

방고개 정자에서 남,여 산꾼과 막걸리 한병에 캔맥주로 허기를 달래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역시 자동차엔 기름이 필요하듯 산꾼에게 알콜이 들어가야 힘이 난다.

좌구산 오름길엔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꽤나 많이 치고 오른다.

이곳은 낙동정맥 봉화, 울진, 영양, 청송에서나 볼 수 있었던 소나무에 송진 채취이

선명한 게 안쓰럽기만 하다. 일제시대에 화약을 만들기 위해 채취한 자국이다.

내가 오늘 지나온 산그리메

이제사 안개가 걷혀 산의 형태가 제대로 보인다.

좌구산(座龜山:658m : 14:40)

증평군의 최고봉인 좌구산은 산의 마치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앉을 좌(坐)

거북 구(龜)자를 써서 좌구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개 구(狗)자를 써서

좌구산(座狗山)이라고도 한다.  이것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이 전해오는

일화는 조선조 광해군때 정3품인 병조참지를 지냈던 진주목사 김 시민의 양아들인

김치(金緻)는 점술과 천문에 능했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질 즈음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관상을 보니 이듬해인 인조반정의 해에 죽을 운명인지라 관직을

사직하고 이곳 좌구산 밑의 율리 마을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이때 김치는  한양의 심기원,

최명길 등과 내통하여 인조반정을 모의했다고 하는데 어느날 심기원이 김치에게 찾아와

능양군의 사주와 반정을 일으킬 일자를 점쳐 달라고 하였다.

 

이에 김치는 반정일자를 정해주고 깊은 잠에 빠졌는데 한밤중에 동쪽의 좌구산에서

개가 하도 짖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 즉시 피하는 바람에 무사했다고 했는데 그 후에

개가 짖음으로서 사람을 구하고 나라의 큰 일을 할 수 있게 해준 명산이니 개‘狗’字를

써서 座狗山이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유래가 전해져 내려온다.

질마재 가는 길에서 바라본 좌구산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수년전에 산불로 인해

관리가 엉망이다. 증평을 대표한 곳으로 좌구산을 꼽아 저 아래에는

좌구정, 좌구 제1문등을 화려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주인공은 푸대접이다.

저 넘어 내가 4번에 걸쳐 넘어온 속리능선이 아련하게 보이고...

612봉의 멋진 소나무

좌구산에서 질마재가는 길은 화재로 인해 나무는 많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억새와 잡풀들이 자리를 잡았다. 간간이 능선에 자리잡은 소나무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 이제 서서히 마무리를 한다.

새작골산(15:25)

괴산군과 증평군 그리고 청원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이 중에 증평군은  인구가 3만여명에 불과한 미니 자치단체다.

한 개의 읍(증평읍) 과 한 개의 면(도안면)에 불과하면 2003년도에

증평 출장소에서 증평군으로 승격이 되었다.

새작골산을 지나면서 메모를 했던 택시기사에게 콜을 한다.

내려오는 길에 편백나무 숲은 정말 머리를 맑게 해준다.

30분안에 도착하겠노라고 한다.  15분만에 질마재에 도착하여 물한모금

마시고 나니 택시가 도착하여 수레너미재로 향한다. 근데 어랴 오면서부터

미터기를 꺽었는지 미터기에 25,400원 찍혀있다. 어찌하는지 가만히 보고

타고간다. 현암묵밥집 주차장에 도착하니 55,000원이 나왔다.

얼마냐고 물으니 얼마 받아야 하느냐고 되레 묻는다. 아저씨 우리 여기 타고

오면 25,000원이면 온다고 하니 멋적은듯 그것만 달라고 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영업을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말이다. 묵밥집에서 밥한그릇 먹고

서울로 향하는데 징검다리 연휴라 그런지 3시간 40분에 거쳐서 집에

도착하니 그의 녹초가 되는 느낌이다.

질마재(15:40)

질마재는 괴산군 청안면과 청천면을 연결하는 592번 지방도

지나가는 고개가 질마재이다. 이곳 사람들은 질마재보다 청안고개로

 잘아려져 있다.  새로 공사를 한듯 아직까지 주변 정리가 안되어

있다. 이곳 올라가는 가는 길은 꼬불꼬불하여 꼭 강원도 고개넘는 기분이다. 

 질마는 수레를 끌때 말이나 소 등을 끌때 안장같이 얻는 제구로

그 모양이 질마와 같은 형국으로 된 고개와 같다고 해서 질마재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