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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12구간 - 유둔재에서 어림재까지

by 범여(梵如) 2011. 4. 4.

○ 산행일자 : 2011. 04.02~03(무박 산행)
○ 산행날씨 : 산행중 계속 비가 내림, 운무로 인해 최악의 산행
 무등산 구간에는 눈이 내림
○ 참석인원 : 봄,여름, 가을,겨울 산악회 40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G.P.S 20.6:㎞ / 약 9시간 소요   
○ 산행코스 : 유둔재-450봉(저삼봉)-백남정재-무동리 안부-북산-신선대 평전-임도-
규봉암-석불암길-지공너덜

                 장불재-입석대-서석대-장불재 대피소-kt송신소-백마능선-안양산-둔병재-편백나무 숲-팔각정-602봉

                 임도-622봉-어림재-차량이동(하늘아래 식당 식사)-환산정-귀가

○ 소 재 지 : 전남 담양군 남면 / 광주광역시 동구, 북구 / 전남 화순군 이서면, 동면

일주일 사이에 이젠 완연한 봄으로 접어든 느낌이다.

기온이 상당히 올라가고 울 아파트 단지에는 개나리가 노랗게

봉오리를 내밀고 있고 우리 텃밭에도 담주에 상추를 비롯한 야채를

심으려고 밭을 정리하였다. 10평이 채 안되는 텃밭이지만 우리 식구들이

먹을 야채는 가을까지 충분히 공급하고 이웃과 주위분들에게도 보시를

할 수 있는 고마운 텃밭이다. 벌써 4월 참으로 세월이 빠르기만 하다.

이틀후면 청명, 한식이건만  몇년째 산에 미쳐 돌아다니는 바람에 조상님들의

 묘소에 참배를 하지못해 마음 한구석이 무겁기만 하다. 내년 6월이면 9정맥

완주한 후에는 꼭 한번 찾아야지.(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이번구간은 호남의 상징인 무등산을 거쳐가는 코스이다보니 평소와는 달리

버스가 만차이다. 인원이 넘치는 바람에 대장님이 조수석에 앉아 갈 정도이다.

참으로 분위기는 좋다.  매번 30명이 채 안되게  가는 바람에 집행부에서 제공하는

맛있는 남도음식과 이스리 거기다가 사우나까지 시켜줄 때는 재정상태가 적자인 줄

뻔히 보이는데 상당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데 오늘은 그나마 소맥을 한잔 더 먹어도

덜 미안한 느낌이겠다. 산꾼님들 명산코스만 오시지 마시고 평소에도 이렇게 만차하여

외망포구 졸업식 때까징 쭈~~~욱 가입시더.

 

양재역에 도착하여 2주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조우를 하고 버스에 탑승한다.

더군더나 이번구간엔 작년에 10개월간 낙동정맥길을 같이 동거동락한 동료 산꾼들이

넘 많이 와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차에 올라 잠을 청하고 깨어난 곳이 호남고속도로

김제를 지나 이서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한다. 남쪽지방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올해들어 남도길에 벌써 2구간 연속 雨中山行이다. 정맥길 가는 산꾼이야 운명적으로

가야할 길이지만 무등산만 바라보고 오신 분들은 실망이 클것같다.

창평I.C를 지나 양산보의 혼이 담긴 지실마을의 소쇄원 앞길을 지나서 새벽 4시에 지난번

날머리인 유둔재에 도착하니 빗줄기는 더 굵어만 진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유둔재(04:20)

전남 담양군 남면 가사문화권과 화순온천을 잇는 유둔재 터널이 공사기간을 2008년 11월에 개통하여

지금은 이 지역 사람들이 상당히 편리한 삶을 영위한다.

광주호 주변 소쇄원, 식영정 등 정자들이 즐비한 가사문화권과 화순온천을 잇는 국도 887호는

무등산 자락의 유둔재 구간이 경사가 심하고 굴곡이 많아 조금만 눈이 내려도 교통이 두절되어

주민들이 불편을 겪어 왔다. 유둔재 터널 준공으로 광주시민들은 무등산 산장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광주호를 거쳐 유둔재를 터널을 통해  화순온천에 도착할 수 있어 눈이 내려도 안전하게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호남정맥길이 2주연속 우중산행이다. 산에 미쳐사는 사람도 우중산행은

정말로 싫다. 차에서 내리니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결국 레인코트를 입고 산길을

나선다. 더군더나 안경은 착용하는 범여로서는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미끄러운 산길을

대장을 중심으로 긴 행렬은 시작되고 처음부터 빡세게 치고 오르다가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으로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한 끝에 저삼봉이라고 어느 산꾼이 붙여준

450봉에 40분만에 도착한다.

450봉(05:00)

백남정재(배너미 고개:05:30)

450봉을 치고 오르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고개에 성황당 흔적인지 돌무덤이 하나 있고

많은 시그널과 함께 백남정재라는 코팅으로 된꼬리표 하나가 비에 젖어 희미하게 보인다.

 

이곳이 수구촌으로 떨어지는이 지역 사람들에게 배너미고개라고 불리는 백남정재에다.

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여 정자문화와 가사문학이활짝 핀 대나무의 고장

담양을 작별하고 화순군과 광주 광역시의 경계능선으로 접어든다.

돌무더기가 잇는 백남정재를 지나 북산을향한 된비알을 치고 오른다.

북산 가는길

백남정재에서 갑자기 고도를 350에서 약 800가까이로 높인다.

거기다가 낙엽에다 땅이젖어 미끄러지기를 서너차례 이런 길은 정말 싫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수도 없다. 입에 단내가 나고 안경에는 성애가 끼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벗어서 베낭에 넣고 치고 오른다. 경사도 75도 가까이를 거의 30여분간

사투를 벌인끝에 오르니 넓은 평지가 나타나고 주위에는 여명의 밝아오기 시작한다.

비가 조금 그치는것 같아 우의를 벗어서 베낭에 넣고 물한 모금에 찹살모찌 하나로

허기를 떼우고 다시 평지길 같은 편안한 길을 걷는다.

평지와 같은 억새 군락지를 지나고 다시 북산으로 오른다.

갑자기 산이 시끌벅적하다. 우리 일행 40명과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에서

온 산꾼들이 40여명 되는 모양이다. 갑자기 정체가 되는것도  짜증이 나는데

몇몇 산꾼들이 떠드는 소리에 상당히 스트레스가 받는다.

특히 여성 2명이 떠드는 소리가 상당히 귀에 거슬린다. 산에는 가급적이면

남에 배려와 양보가 미덕이건만 양보와 미덕은 전당포에 맡기고 온건지...

북산에 올라서도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속도조절과 분리수거로 인해(?)

그 팀과 헤어져 내려오니 멋진 암봉이 산꾼들을 반긴다.

북산 정상(782m)에서(07:00)

지난 한해 10개월동안 낙동정맥길에 동행했던 온누리님, 방초님과 함께 인증샷을 남긴다.

북산 정상에는 2개팀이 몰려들어 마치 돗때기 시장을 방불케 한다.

앞에 보여야 할 무등산은 20m 앞도 보이지 않고 마치 세계의

어지로운 모습과 비슷하다. 일본의 지진과 원전사고, 리비아를 비롯한 중동사태,

글고 우리나라도 동남권 신공항 등등 그것을 무등산의 운무가 대신 표현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리무중의 무등산 정상

울 산악회의 연세드신 고문님의 말씀 왈(曰) 미친년도 하루에 한두번씩은 치마를 들고

보여주는데 무등산도 오늘구간에 한,두번은 보여주지 않겠냐고 우스개 소리를 하시는데

아무래도 범여의 산행 경험상 보여줄 것 같지는 않다. 이걸 우야면 좋노?

북산에서 막걸리 한잔을 하고 약간의 휴식을 후에 내림길을 하니

멋지게 생긴 신선대 구간이 나온다. 너무나 멋있어서 탄성이 나올 정도이지만

안개로 인해 그 느낌은 반감이 된다. 암릉 가운데 묘지 한기가 자리잡고 있다.

일부 산꾼들이 거기를 밟고 사진을 찍는다. 망자도 인격이 있거늘 그것은 아닌 것 같다.

풍수상 크게 명당자리로는 보이지 않건만 묘지를 쓴 이유는 알 길이 없고...

멋진 신선대 구간 뒤로하고 약간의 산죽길을 지나니 넓은 신선대 억새평원이 나타난다.

비로 인해 산행이 좀 더디게 진행되는 바람에 이곳에서 아침상을 펼친다.

많은 산꾼들이 밥상을 펼치니 멋진 산상파티가 이루어진다.

오늘은 닭도리탕에다, 낙지까지 멋지게 그리고 느긋하게 아침만찬을 즐기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오늘도 범여는 또 후미가 되고 말았다.

신선대 억새평전(08:20)

무등산 신선대의 억새평전은 어머니의 품안처럼 포근하게만 보인다.

조선시대의 태조 이성계가 무정하다하여 무등산이 무정산으로 불리게 된 이유를조금은 알것 같은 기분이다.

안개로 인해 온 천지가 오리무중이다.안개로 인해 20m 앞도 보이지 않는다.

길도 잘 보이지 않고 꼬리표도 보이지 않아서잠시 멈추고 지도를 살핀다.

방향을 정하고 좌측으로 들어서니 신선대 임도가 보인다.

미그룹들의 축제

신선대 입구(08:30)

신선대 임도에서 장불재까지는 편안한 임도길을 걷는다.

원래 정맥길은 신선대에서 북봉으로 올라 지왕봉과 무등산의 정상인

천왕봉, 인왕봉을 거쳐서 입석대로 하여 장불재로 내려가는 구간이

정통 코스이건만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무등산 정상에는 군부대가 차지하고

그 대신에 산꾼들은 무등산 정상은 쳐다도 못보고 옆구리를 가로질러 장불재로

향한다. 정통 산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 무등산에서 나타난다.

이곳 코스는 부드러운 육산이 있는가 하면 너덜지대이기는 하지만 걷는데 아주

편안한 곳이다. 오랫만에 만난 낙동정맥길의 동료 산꾼인 온누리님과 방초님과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규봉암이 나타난다

장불재 가는 이정표

규봉암(09:00)

규봉암에 들어서면서 저두삼배(低頭三拜)의 예를 올리고 경내에 들어선다.

사찰 양식이 좀 특이하다. 대체적으로 일주문이 있고 범종각이 따로 있는데

이곳은 일주문 형태에다 2층 누각에 범종각이 있다. 또 특이한 것은 범종각에

사물(법고, 범종, 운판, 목어)이 같이 있는데 이곳은 범종만이 보인다. 

 

규봉(圭峯) 높은 절에 종소리 끊어지고
밤 예불 마디마디 달은 점점 밝아오네
삼존석( 三尊石) 십대(十臺) 를 돌아
밤새도록 헤멜거나
<노산 이은상. 규봉암(圭峯庵) 에서>

규봉암 전경

뒷편에 주상절리의 광석대가 보인다.

규봉암 뒷편의 주상절리 광석대는 입석대,서석대와 더불어 무등산 3대 석경(石景)으로 꼽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보질 못하고 봉사 문고리 잡는식으로 보고 규봉암을 나선다. 

규봉암(圭峯庵) 관음전 앞에서

사찰 경내를 구경하고   우의에다 옷이 너무 더러워 관음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관음전 부처님께 예를 표하니 부처님께서 알았다는듯이 빙그레 웃으신다

창건연대가 확실하게 전하는 문헌이 없고 다만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순응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해지며 혹은 고려초 도선국사, 보조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천년을 이어온 고찰로서, 호남제일의 관음기도 도량이라고 하는데. 호남땅은 기독교가

번성한 탓에 유명세에 비해 사찰은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이 절에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이 쓴 규봉암의 현판이 전해 오다가 절취당했다고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말에 왜적들과 전투를 벌였던 격전의 현장이기도 한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 나가 왜적과 싸우다가, 규봉암으로 도망친 왜군 폐잔병

12명을 생포했다는 기록도 있다. 1739년 3월 20일에 쓴 규봉암 상량문이 발견되어

당시에 규봉암을 재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지도서(1759)에 의하면 폐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로보면 규봉암이 그리 크게 증축되지 않았거나 다시

폐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에 6. 25 동란으로 사찰이 불에 타 10여년간 폐허가 되었다.

1957년 관음전과 요사채를 지어 복구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원래 규봉이란 절 입구에 우뚝 솟은 세개의 돌기둥이 마치 임금앞에 나갈때 신하가 들고있는 홀같이 생겨서 규봉이라 한 것이다.

이 바위를 또 삼존석이라 부르는데 여래존석, 관음존석, 미륵존석으로 불리우며 도선국사가 명명했다고 전한다.
또 규봉십대가 있는데 광석대, 송하대, 풍혈대, 장추대, 청학대, 송광대,
능엄대, 법화대, 설법대, 은신대 등이 그것이다.

화순군 홈페이지 인용

요사채에 기웃거려 보지만 인기척도 없다. 이곳은 서울 상도동 약사암 주지 스님의

상좌이셨던 정인스님께서 주지로 계시는 곳이라 혹시 계시나  보았지만 전혀 인기척이 없다.

절간에 와서 스님을 뵙고 차 한잔 얻어 마시면서 산방한담(山房閑談)을 하면서

짧은 법문도 귀동냥 하면 좋으련만... 하긴 미친넘 뭐 하듯이  아님 간첩 안내조처럼

정신없이 다니는 정맥꾼들에겐 호사스런 일일지도 모르지...

부질없는 생각을 접고 동꾼 산꾼들이 다 도망가고 없는 장불재로 정신없이 내달린다.

 규봉 문바위기암괴석이 절벽을 이룬 규봉은 신라말기 풍수지리의 대가인 옥룡자 도선국사가 

 이 암자를 창건하고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규봉암에 머무르면서 나중에 순천

송광사의 자리에 수선사를 창건하고 수행정진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도 규봉암 옆에 돌로 만든 석실이 있는데 이 석실을 보조석굴이라고 하며

규봉 주위에는 십대석이 있다고 하니 송하대 광석대, 장추대, 풍혈대, 청학대

송광대, 법화대, 설법대, 은신대, 계성대를 일컫는다.

 

이 중에서 풍혈대는  바위를 올라 돌틈으로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 바위틈을 끼어 나가면 총각은 빨리 장가를 가고 지옥길을 면한다고 하며

세번 끼어 나가면 삼재가 든 사람은 액운을 면한다고 하여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곳에는 김덕령장군이 문바위에서 화순 동면 청궁마을 살바위까지 화살을 쏘고

백마가 먼저 도착하는지를 시험하였다가 화살을 찾지 못하고 백마가 늦었다하여

백마의 목을 치니 그제서야 화살이 날아와 바위에 꽂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무등의 단풍은 규봉의 것을 제일로 친다."

규봉암 옆에 있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괴석 광석대는 입석대,서석대와

 더불어 무등산 3대 석경(石景)으로 꼽힌다.

지공너덜

불재에서 규봉까지 사이에 무수히 깔려있는 너럭바위들이 지공너덜이다. 

 무등산에는 산의 서 사면에 덕산너덜과 동.남 사면에 지공너덜 두 개의 너덜이 있다.

 지공너덜은 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3km 남짓 되게 깔려 넓은 돌 바다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을 지공너덜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인도의 승려 지공대사에게 설법을 듣던 나옹선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명명한 것으로 지공대사가 여기에 석실을 만들고 좌선 수도하면서

그 법력으로 억 만개의 돌을 깔았다고 전해온다.  지공너덜에는 크고 넓은 바위사이로

보조(普照)석실이 있는데 이곳은 한국불교에 큰 빛을 남긴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창건하기

전에 좌선한 곳이라 하여 보조석굴이라고 부른다

피안교(彼岸橋)라?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이르라는 해탈의 다리도 지나고...

장불재(900m:09:40) 

장불재는 광주시와 화순군이 경계가 되고있는 능선고개로 규봉과 입석대,

서석대로 가는 유일한 등산로이다.  정상을 향해 왼편에 서석대, 오른편이

 입석대이고 이서면쪽으로 능선을 따라 가면 지공너덜과 규봉으로 이어진다..

 

장불재에 도착하니 무등산의 절경인 입석대와 서석대 안개가 끼여 올라가는 걸 포기하고

장불재 대피소에서 이스리 축제를 벌이는 산꾼들에게 이스리 한잔 얻어 마시고

베낭을 맡겨두고 서석대와 입석대를 향한다. 왕복 1.8km를 갖다와야 하는데

이곳은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낮은 곳에서는 비가 왔지만 이곳에는 눈이 꽤나왔다.

미끄러운 청석길을 스틱만 가지고 올라간다. 

장불재 이정표

무등산을 얘기할 때 우스개 소리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광주 무등산설과 화순 무등산설이다.

실제 면적만 보고 따진다면 화순이 훨씬 많다. 그러나 99%는 광주 무등산이라고

하지 화순 무등산이라고 하는 사람은 화순 사람 빼놓고는 아마 없을 것 같다.


무등산이 원래는 화순 무등산이었다.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흉년이 들어 화순 현감이 배가고파 참다 못해 광주 고을 원님에게 동지팥죽

 한동이를 받아 먹고 팔아 넘겨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실로 어찌된 일인지 동국여지승람을 읽어 보면 규봉암이 광주편에서 전혀

기록이 없고 화순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저 웃고만 넘기기에는

 너무 허전하다. 이조에는 이서(二西) 면이 동복현(同福縣) 에 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화순현(和順縣) 에 기록되어 있다.


안계(眼界) 에 이서적벽부터 시작하여 광양 백운산(白雲山), 모후산(母后山),

지리산(智異山), 조계산(曹溪山) 과 영암 월출산까지 고개를 숙여 조공하듯 들어오고

 뒤에 있는 돌들은 석가세존에게 오백라한(五百羅漢) 이 청법(聽法) 이라도 하는 듯

 서립(序立) 되어 있는 모습은 다만 신기하고 감탄 그 자체이다.

무등산 주상절리대(천연기념물 제465호)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을 때 생기는 절리 중에 단면의 형태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인 것을 말한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약 7천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서석대,

 입석대, 규봉이 대표적이다.  입석대, 규봉은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기둥모양이지만

서석대는 풍화가 덜 진행되어 병풍모양을 하고 있다. 정상을 중심으로 산비탈에 있는

 너덜겅은 이러한 돌기중이 무너져 무너져 쌓인 것이다. 서있는 바위나, 너덜겅들은

 암석의 생성과 풍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희귀한 자연유적이므로 서석대와

입석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입석대  (1,017m:10:05)
무등산 입석대는 백악기 후기(약 1억만년~6천만년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솟구쳐

오른 용암이 지표로 흘러나와 냉각되면서 생긴 주상절리대이다.

 높이가 10~16m에 이르고 5~8모로 된 돌기둥이 우람하게 둘러서 있어 그 형상이

 신비로워 서석대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석축으로 된 단으로 오르면 5~6각형 또는 7~8각형으로 된 돌기둥이 반달같이 둘러 서 있는데

이를 입석대라 부른다. 무등산 이외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세월의 풍상을 겪어온 입석대는 석수쟁이가 먹줄을 팅겨서 자른듯 하늘에 닿을새라

조심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 우람하기만 하다. 그 옛날 이곳에는 입석암이란 암자가 있었고

주변에는 불사의사, 염불암 등의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입석대에 암각된 문자들

가방끈 짧은 범여로서 알 길이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갈길 바쁜 산꾼이

신경쓸 겨를도 없고 지난해 낙남구간에 같이한 박식한 달무리님이 담주에

이 구간을 타니 미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이나 해볼까?

오리무중에서 바라본 입석대

3대가 發福을 해야만 입석대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랴

범여의 복이 이것밖에 안되는걸...

승천암(10:10)

옛날 이 부근의 암자에 무엇엔가 쫏기던 산양을 스님이 숨겨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너라도 잡아 먹겠다고 하였는데 얼마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들렸고 이무기는 곶장 스님을 풀어주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라고 한다.  (승천암 안내문 인용)  

서석대(瑞石臺:10:20)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 있다. 저녁노을에 햇살에 반사되어

수정처럼 빛나기 때문에 수정병풍이라고도 한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부른것은

 이 서석대의 경치에서 연유한 것이다. 서석대의 병풍바위는 맑은 날 광주

시가지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젊은시절 다산 정 약용이 광주 금소당에 거쳐할 때 동복의 적벽을 구경하고

서석대에 올라  적벽의 뛰어난 경치는 여자가 화장을 한 것과 같아서

붉고 푸르게 분을 바르것 같아서 비록 눈을 즐겁게는 할 수 있으나

가슴속의 회포를 열고 기지를 펴게 해주지는 못하네

그대는 서석대를 보지 못했는가.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과 위사가

말하지도 웃지도 아니하고 조정에 앉아 있어 비록 움직이는 흔적을

볼 수 없되 그의 공화는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 같네.

그대는 그 산을 가보지 않으려나 하고 노래하면서 서석대를 그찬하였다고 한다.

무등산은 육산이지만 그 특색은 오히려 암석의 아름다움에 있는데 

그 대표적인 암석이 서석대, 입석대, 규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 서쪽 양지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100m씩이나 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석이라 하였다고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주시내

범여도 사실은 이번구간은 너무나 기대를 많이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자욱한 안개속에 20m 앞도 보이지 않은 것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저 아래 예향(藝鄕)의 도시 광주는 말그대로 오리무중이다.

 

광주가 어디냐 하면 무등산 아래에 있고 무등산이 어디에 있냐고 하면 광주에

있다고 한다. 1980년대 5공시절에 5.18 광주사태로 인해 현대사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도 한다. 그리고 藝鄕의 고장이기도 하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에 미친다라는 말이 있듯이 무등산 줄기가

광주시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광주는 백제시대에는 무진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주로 불렸던 광주가 지금의 지명을

갖게 된 것은 940년 고려 태조 때 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나주에 밀려

남도지방을 대표하지 못한것은 나주가 영산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기도 하였지만 고려 태조의 처가가 있었던 곳이며 고려를 개국할 때

이 지역 토호세력을 도움을 많이 받은데 비해 광주는 한때 후백제의 견훤의 도읍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광주 광역시로 서울, 부산, 대구, 인천에 이어 우리나라 5대도시

중의 하나이며 호남을 대표하는 최대 도시이다. 

더 이상 무등산 정상으론 갈 수가 없다.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독립산맥의 하나로 광주시와 담양군, 화순군에 걸쳐있다.

그러나 역시 그 품에 광주를 안고 키운 산으로 광주의 자랑과 광주의 아픔을 함께

해 온 산이다. 
옛날 백제(百濟) 때의 이름은 무진악(武珍岳) 이었고 서석산(瑞石山), 서악(瑞岳) 은

고려때 이름이다. 언제부터 무등산이라 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불가(佛家) 에서

 나온 산명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에 이 무등이란 귀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께서는 절대평등의 깨달음, 즉 무등등(無等等) 을 설파한 바가 있다.

높고 낮은 계급이 없다는 뜻으로 절대 평등이라는 뜻으로 무등이란 표현을 이 산은

육산(흙산)으로 생김새가 두리뭉실해 보이면 멀리서 보면 삿갓을 엎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불교가 성왕하여 주교로 삼았던 고려때에 이 무등산에는 36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무등산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절터의 기왓장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사람에 따라 무등산의 유래는 이렇게도 말해진다.
옛부터 무등산의 산신은 아주 덕이 높아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정성껏 기도를

 드리면 소원 성취한다 하여 먼곳에서까지 이 산을 찾는 발길이 끊임없었다.
옛부터 기도는 무당들이 주재했기 때문에 무당들은 불교에 기생하여 절에 주로

 머물렀으므로 무당들이 사는 산이라 하여 무당산이 무등산이 되었다고 한다.
혹 어떤 사람은 무덤처럼 생겼다고 하여 무덤산이라 하였다고 하나 상상적인

 비약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전설로서는 이태조께서 혁명을 일으켜 이조를 창업하시고

 전국 명산을 찾아 다니며 백세천년 왕업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억울하게 죽은

고려명신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팔도명산을 모두 찾아가 정성껏 삼일씩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자 전국 명산의 산신령이 나타나 모두 환희의 얼굴로 맞아주었는데 그중 가장

따뜻하게 맞아주신 산신령이 현재 경남의 남해 금산이었다는 것이다.
이태조께서 현몽을 받고 고마움을 못잊어 그 산을 비단으로 싸주도록 명하여

 그뒤부터 남해 보리암이 있는 산을 금산(錦山) 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무등산에서 정성껏 삼일 기도를 드렸으나 산신이 나타나 거절하여 이태조께서

 노하고 <이 산은 등급 이 없는 무등(無等) 산이다.> 하여 이조시대부터 무등산이라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무등산에 있는 바위들은 모두 입석으로 되어 있는 총석(叢石)

으로써 그야말로 전국 어느 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절경이다. 그중 층석이 모여 절경에

 절경을 이루고 있는 규봉암은 별유천지 선경이 아닐 수 없다. 옛 선인들의 기록에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전라도를 찾아온 명인달사들의 자취가 여기 저기 돌에 새겨져 있다.

“빛의 고을”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 23년(940년) 처음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이지만

 연유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다만 고려말 대석학으로 3隱의 한분인 牧隱 李穡이

 「石犀亭記」에서 “光之州”라고 하여 “빛의 고을”로 해석하고 있다. 대학자인 牧隱이

상식적인 한자의 자의해석 외에 그렇게 해석할 만한 연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 연유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빛은 곧 광명이다. 광명이념은 우리민족의 고유 신앙이요, 원래의 정신이며 기본 철학이다.

 

이와 같은 광명이념이 광주고을에 살아있다 해서 「光之州」라 한 것이다.

또한 광주는 백제 때는 武珍州, 통일신라 때는 武州라고도 하여 이는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을 武岳으로 불린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는 瑞石이라 부르기도 했다. 서석이란 우리 말의 「선돌」로 천연적으로 되어있는

 무등산의 입석대, 서석대, 금강산의 백탑ㆍ수미탑은 다 「선돌」로서 고래로부터

신성시되어 왔었다. 光州ㆍ武珍州ㆍ瑞石 등의 지명은 모두 태양을 의미하는

光明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광주는 태양의 도시이며 광명의 도시요, 빛의 고을이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광명을 향하여 오늘까지 살아 온 것이다.

 

언제나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같은 무등산의 한자락에 망월동에 5.18묘지가 있다.

1980년  광주항쟁의 슬픈 역사를 무등산은 가슴에 품고있다.

망월동(望月洞)이란 이름은 옥토끼가 달을 쳐다보는 형국이라 망월동이라

했다는데 동네이름이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아직도 아물지 않는 파헤쳐진 상처가 언제쯤이면 치유될란가? 

현대사의 아픔도 고스란히 무등산은 감내한다. 30년이 넘은 가슴아픈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껴안고 망자들의 보듬고 있는 무등산! 군사정권에 희생양이 된

망자들이여! 이젠 고이 잠드시길 기원하며 바쁜 갈길을 옮긴다.

오늘 아침에 낮은 지역에는 비가 왔지만 이곳 장불재에서 서석대 가는 길에는

눈이 꽤나 많이 쌇여있다. 그렇다고 그리 미끄럽지는 않다. 입석대, 서석대를

거쳐서 역산행을 하여 장불재 옆에 구상나무가 늠름하게 무등산을 지킨다.

장불재 대피소에 도착하니 동료 산꾼들은 다들 도망가 버리고 베낭을 지켜주신

배슈맑 선배님만 계신다. 서둘러 베낭을 둘러메고 대피소 뒤쪽으로 돌아서  kt

송신소를 지나 편안한 임도를 따르다가 백마능선 초입으로 들어선다

백마능선

장불재에서 암봉<936m>, 안양산<853m>에 이르는 능선을 백마능선이라고 한다.

 가을철에 이 능선 위에 피어난 억새꽃이 바람결에 하늘거리면 마치 백마의

 말갈기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등산구간은 범여가 보기엔 추월산, 강천산과 함께 호남정맥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무등산(1186.8m)이 출입금지구역이라 비록 꼬막재 갈림길에서 장불재까지는 마루금을

 벗어나 왼쪽으로 크게 우회하지만, 입석대, 서석대에 서면 무등산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고, 장불재에서

안양산으로 이어지는 백마능선의 암릉과 억새밭에서 보는 조망이 가히 일품이다.단 오늘은 예외이지만 말이다.

왜 이구간에 산꾼들이 만차가 되는 이유를 알것 같다.

명산이기 때문인가? 무등산은 한 번에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기를 거부한다.

백마능선길은 암능과 편한 길이 골고루 갖혀져 산 타는 재미가 솔솔하다.

멋진 암릉이 안개가 휘감겨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 멋진 암릉구간을

대부분 산꾼들이 우회를 하여 그냥 밋밋하게 간다. 동료 산꾼 정 문교님을

꼬셔서 암릉구간으로 오른다. 바위가 비에 젖어 미끄럽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렇다고 편안 길 가는 사람  꼬셔서  안갈수도 없고 용기있게 선두를 나서는데

갑자기 쭉 미끄러진다. 다행히 스틱으로 중심을 잡는 바람에 떨어지는 않았지만

10년 감수했다. 염라대왕이 아직 데려갈 나이는 아닌가보다.

백마능선 안부 사거리(11:15)

위험한 암봉을 지나니 다시 편안한 길이다. 저 장복동  어느 사찰에서 귀에 익은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사시예불을 마무리하는 내림목탁인가 보다. 잠시 후에 안양산에 도착한다.

이곳에 모든 지명들이 모두 불교와 연관되어 있는 느낌이다. 잠시후 안양산에 도착한다.

안양산 (安養山 853m:11:40) 

 화순군 이서면 안심리에 소재하며 사람의 키보다 더 큰 고산철쭉은 꽃이 크고 화려하다.

 꽃이 만개할 시기에 맞추어 매년 5월초 “안양산 키높이 철쭉제”가 열리고 있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안양(安養)이란 뜻은 불교의 용어로 모든일이

 원만구족하여 괴로움이 없는 안락한 이상향을 말하며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난곳에 있다는 서방극락정토를 말한다.

비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로 봄소식을 전하는 야생화들

안양산에서 둔병재까지는 계속해서 미끄러운 내리막길이다.

길은 참으로 편안하다. 그런데 여기서 악연과 부딪힌다.

아침에 만났던 시끄러운 산꾼들과  또다시 조우를 한다.

떠드는 그 모습은 똑같고... 또 안부딪힐 궁리를 하다가 옆길로 나선다.

이 친구들은 안양산 휴양림쪽으로 가는 바람에 조금은 조용하게 산을 탄다. 

둔병재 길가에 피어있는 개나리

둔병재(屯兵峙: 12:10)

전남 화순군 이서면 갈두리와 동면 수만리를 잇는 지방도이다.

근대화가 되기 이전에는 곡성과 화순 광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들의 주둔지였으며 지금도 옛 성곽과 참호 등이 남아있으며

병기를 만들었던 곳(쇠메기골)에서는 지금도 쇠찌꺼기(SLAG)가나오고 있으며

물을 넘겨오던 물목재, 장군대, 쇠메기골 등 그 당시의옛 지명 등이 아직도 통용이 되고 있다고 한다.

울님의 포근한 맘만큼이나 노란 생강나무꽃

둔병재 안양산 휴양림의 편백나무 숲

둔병재에 내려오니 우리의 愛馬가 기다린다. 일부 동료들은 베낭을 차에 내리고 스틱만

가지고 산길을 걷는다. 아직도 어림재까진 약 1시간 반을 가야만 한다.

우리 일행은 고집스럽게 베낭을 메고 그냥 길을 걷는다. 조금 오르니 멋진 편백나무 숲이

우리를 반긴다. 편백나무 숲 임도에서 즉석 산상주막이 펼쳐진다. 낙동의 동지들인

온누리님, 방초님, 정문교님, 마카루님, 그리고 홍일점인 개스터 가을님까징...

베낭에서 막걸리 2통에다 커피까지 마시고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602봉을 부드럽게 치고 오른다.

잠시후 엉성한 팔각정이 나타나고 산죽길을 따라 안부길을 걷는다.

 

이 길에서 날씨가 맑으면 6.25와 빨치산 전남도당 기지가 있었던 백아산도 볼 수 있으련만

날씨가 전혀 도와주질 않는구나. 얼마 안가서 선두로 가시던 도강재 대장님을 만난다.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622봉

해주 최씨와 창녕조씨의 합장묘를 지나고...

저 아래 어림고개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애마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림고개 내려가기 전에 만난 대나무숲

정맥길은 산만 지나는게 아니고 대나무숲도 지나고 마을도 지나간다.

어림고개(13:20)

전남 화순군 동면 청궁리 어림마을과 이서면 갈두리의 경계인 897번 지방도인 어림고개

어림(漁林)마을

전남 화순군 동면 청궁리(靑弓里) 어림마을로 897번 지방도(2차선 포장도)가 지난다.

원래 갈머리(刀頭, 칼두) 마을이라 하였는데 산 능선을 경계로 물이 나뉘는(갈리는) 곳이라 갈물이라

 부르던 것을 갈물<갈몰<갈머리<갈두로 와전된 것이다. 갈두는 발음을 강하게 하여 칼두라고도 한다.

 1951년 石江 朴羽鉉과 瑞南 金在洙가 무등산을 마주보는 산세가 아름답다하여 마을이름을 칼두에서

어림(漁林)으로 바꾸었다고 하고, 물고기가 사는 숲처럼 생겼음을 의미한다.

즐거운 점심만찬

어림고개에서 간단하게 씻고 날머리에서 10분정도 버스로 이동한 후에 하늘아래라는 식당에서

즐거운 점심을 즐긴다. 호남지역에선 먹거리에 관한한 굿이다. 어느지역 어느곳에 가더라도

먹걸리는 정말 맛있고 멋있다. 오늘 이 좋은 음식을 어느 동료 산꾼 산조아님이 스폰서를 한다.

이 산악회는 부자만 있는 곳인지 아님 맘이 넉넉한 분이신지... 40명의 식대를 보시를 하신다.

이 분은 버리는 즐거움을 아시는 분인가 보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보시공덕으로

세세생생 복락을 누릴 것이입니다.

식사를 끝내고 식당 주인의 안내로  근처에 있는 백천(百泉) 류함(柳涵) 선생이 공부했다던

환산정에서 휴식겸 산보를 즐긴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망중한을 즐기는 범여

5학년 후반에 들어선 범여의 맘을 설레게 하는 홍매화

귀가길의 落照( 동군산 I,C 근처에서)

환산정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평소보다도 늦은 오후 4시반이 넘어서야 서울로 출발한다.

동광주 I.C를 출발하여 호남고속도로 이서 휴게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

꽤나 많이 마신 술 때문에 휴게소에서 요강을 비우고 다시 차에 올라 서울로 출발하는데

이틀후면 청명, 한식이라 그런지 성묘하러 갔다오는 차량때문에 전주에 도착하니

고속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한다. 버스가 익산으로 빠져서 이리저리 거쳐서 다시 고속도로를

들어왔다 다시 국도를 나갔다가 고속도로를 들어오기를 반복한 다음에 늦은 밤인

10시 반이 넘어서야 서울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