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4.16~17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 날씨는 참으로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맑은 날씨에 거기다가 동반자도 좋았고...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와 22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18.6㎞ / G.PS 거리 21.7km / 8시간 10분 소요
○ 산행코스 : 어림마을-별산-묘치삼거리-385.8봉-천왕산-서밧재- 광주 학생교육원-천운산 2봉(천자봉)-천운산-돗재
○ 소 재 지 : 전남 화순군 이서면, 동북면, 동면, 남면
이젠 완연한 봄이긴 해도 아직까진 날씨가 조석으로는 꽤나 차갑다. 환절기라 그런지 연세드신 분들이 세상을 많이 뜨신다. 지난 주에는 상가집을 3번이나 갔다와야 했다. 그리고 텃밭에 심은 야채들이 地力을 받았는지 꽤나 싱싱해 보인다. 10평 조금 못되는 텃밭이긴 하지만 키우는 재미는 꽤나 쏠쏠하다. 가을까지는 야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올핸 상치, 가지, 오이, 호박, 고추, 토마토, 당귀, 쑥갓, 곰치, 봄배추 등 조금씩 심은 것이 종류는 백화점과 같다. ㅋㅋㅋ 텃밭 옆의 복사꽃도 꽤나 흐드르지게...
일본 지진과 원전사태, 중동과 아프리카의 자스민 열풍이 매스컴에서 조용한 사이에 요즘은 재보선과 금융사 해킹사건 그리고 해외토픽감에나 나올 김제 마늘밭에 110억 사건... 우리나라 최고의 호텔이라는 곳에는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출입을 금지하고... 民草들은 단돈 100만원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1억도 아닌 110어억이라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거기다가 요즘 4.27 재보선 선거에 관심이다. 제발이지 정치하는 사람들 잘 좀 뽑읍시다. 국민을 하늘로 받드는 인물로 뽑읍시다.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는 이번 기회에 민초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표로서 심판합시다. 公約이 아닌 空約을 남발하는 자, 포플리즘으로 권력을 잡을려고 하는 자는 과감하게 퇴출시키고 정말 지역민에 下心으로 봉사하는 자를 뽑읍시다. 참으로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토욜의 늦은 야심한 밤에 남도길에 오르기 위해 꾸역꾸역 꾸린 베낭을 메고 탑승장소인 양재역으로 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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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행구간과 지도
범여네 텃밭
일기가 불순한 관계로 예년보다 한 열흘정도 늦게 야채를 심었다.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은 탓이지 삽질하기가 미안하다. 땅속에 지렁이가
너무 많아 몇마리나 희생이 되었는지... 풍성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웃들과
나눠 먹을 정도는 된다. 10평 조금 못되는 텃밭이지만 삶에 꽤나 활력을
주는 곳이다. 자연에게 배운다. 땅은 정직하다고... 뿌린대로 거두는 것을.
어림재(04:00)
어림고개는 ‘동면’이라고 표시된 교통표지판이 있으며 화순군 이서면 갈두리와
화순군 동면 마산리를 잇는 897번 지방도로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2주전에 비를 맞으며 도착했던 그 곳이 오늘은 참으로 새롭게 꽃단장 하고
새벽 산꾼을 반갑게 맞는다. 도로가에 흐드르지게 핀 벚꽃의 향이 진하게 말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낯선 산꾼에게 온 동네 개쉬끼들이 합장을 하듯 눈에 불을 켜고
짖어댄다. 힘든 농사일에 고단하게 잠에 빠진 시골 분들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버스에서 약간 위로 올라와 대보석물 맞은편 능선 마루금으로 올라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다
어림재에서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올라가면 묘지가 나오면서 노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수령이 200년이 되는 소나무도 있다. 초반부터 빡세게
가파른 오르막으로 한참 올라가면 무명봉에 이른다.
여기서 우측 능선으로 내려가다 올라가 다시 무명봉을 지나 내려면 임도를
지나고 다시 좌측편으로 임도가 지나는 곳을 통과하여 올라가면 또다시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와 만나는데 여기서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가 임도와
다시 만나는데 좌측 임도는 별산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올라가면 억새밭이 나오면서 높은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는 곳 억새밭에서 임도로 오르다 암릉길을 올라가 별산 정상에 닿는다
별산(鱉山687m:04:50)
어림재에 출발한 지 50분만에 별산에 도착한다. 안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참으로 상쾌하다. 암봉사이 커다란 갈참나무에 준.희님이
붙여놓은 아크릴 표시만이 이곳이 별산임을 알려줄 뿐.
별산은 두 개의 암봉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 이름이 별산인 것을
오산으로 부르다가 2004년부터 다시 별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지명은 '이서면과 동면 경계에 있는 산벼랑에 있어 별산이라고 한다'는데
오산으로 불린 것은 아마, 한문을 잘못 해석하여 자라 별(鱉)을 자라 오(鰲)로
잘못 인용하여 별산을 오산으로 불리지 않았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어둠속으로 서둘러 길을 떠난다. ...
594.6봉 삼각점(05:35)
별산에서 출발하여 정리 안된 마루금과 억새밭, 그리고 폐헬리포트장과 임도를
지나면서 부드러운 능선길을 걷는다. 좌측의 동북호와 기가 막히다는 화순적벽은
어둠속에 묻힌채 보이질 않고 머릿속에 그리며 혹시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유명한 난고(蘭皐)
선생이 이 길을 걸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를 부르면서 도착한 곳이 594.6봉이다. 해가 많이 길어졌는지 서서히 여명은 밝아오고...
동복호와 화순적벽쪽을 바라보면 1시간만 늦게 왔으면 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산꾼의 모습
화순적벽
신재 최산두(崔山斗) 선생이 기묘사화로 동복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이곳을 찾았다가
중국에 있는 적벽과 같다며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석천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이
적벽동천(赤壁洞天) 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적벽시를
읊음으로써 드디어 만국의 명승지가 되었다고 한다. 한말에는 방랑시인 김삿갓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이 곳을 유람했을 정도로, 적벽의 풍광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병자호란에 거사했던 적송 정지준(丁之寯)이 당시 강 언덕에 지었다는 망미정(望美亭)이다.
노루목(獐項·장항)을 비롯하여 물염·보산·창랑적벽 7km, 389,017㎡가 1982년 전남기념물 제 60호로 지정됐다.
정암수(1534∼1594)가 지은 창랑정(滄浪亭)과 송정순이 건립한 물염정(勿染亭)을 비롯하여 정지준이
세운 망미정(望美亭)과 강선대, 박재만의 만성정, 이언휴의 독락당, 송석정, 적벽정, 환학정, 백학정,
고소대, 탁영정도 있었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면서 남도길의 산줄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山竹길을 헤치고 급한 내리길을 간다. 주위에는 수줍은 진달래가 흐드르지게
피어서 외로운 산꾼들을 반기는 듯하다. 좌측의 동복호는 보일듯 말듯 하며
범여(梵如)의 애간장을 태운다. 묘치재 가기전 넓은 묘지에서 오랫만에
전체가 모여서 간식을 먹으면서 화기애애하게 꿀맛같은 휴식을 즐긴다.
아침을 맞이하는 동복호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광주방면으로 광주호를 만들고
화순 방면으로는 동복호를 만든다.
광주호가 영산강 수계이고 동복호가 섬진강 수계이니,
무등산은 동서로 남도의 2대 강인
영산강과 섬진강을 이루는 산이라 할 수 있다.
산으로 빙 둘러진 동복호는 주변에 오염원을 가지고 있지 않아
전국에서 수질 좋기로 이름이 나있다. 1970년대 광주시는 인구 50만이 넘어서자 동복수원지를 마련했다.
영산강 유역의 도시가 섬진강에서 헌혈 받은 셈이다.
화순 동북면 연월리와 이서면 서리 사이 협곡에 댐이 축조됐다.
동복호는 지난 71년 첫 댐을 만든 뒤 85년 댐의 높이를 19.7m에서 44.7m로 높여 저수량을 크게 확보한 뒤
광주시민이 사용하는 수돗물의 56%를 공급하고 있다.
물염정(勿染亭)
사화와 당쟁의 시대를 살다간 선비가 당시의 정치현실을 개탄하면서 조용히 속됨없이
은거하려고,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티끌 하나 없이 살고 싶어 세운 정자가 있다.
이서면 창랑리에 있는 물염정(勿染亭)이 바로 그 곳이다.
화순적벽의 한 축을 이루는 ‘창랑적벽’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물염정은
방랑시인 김삿갓 ‘난고 김병연’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 자주 찾아 시를 읆었다고 하여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물염정이 있기에 창랑적벽은 물염적벽이라고도 불린다.
사실 ‘적벽’은 어느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복호를 둘러싼 곳곳이 적벽이다.
동복호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달리다보면 곳곳에서 붉은 빛을 띤 절벽을 만날 수 있다.
잘 모르는 이들은 ‘저 곳이 화순적벽인가보다’며 반가운 마음에 차를 세우기 마련이다.
그렇게 굽이굽이 길을 달리다보면 동복호 상류에 물염정이 나온다.
물염정은 중종 명종대에 구례 풍기군수를 역임한 홍주송씨 물염(勿染) 송정순(宋庭筍)이
16세기 중엽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세운 정자다.
물염정에는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려진 난고 김병연이 이곳의 경관에 반해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가 머물다가 생을 마감한 동복면 구암마을에서 가기에도 물염정이 위치한 창랑적벽보다는
화순적벽이 더 가깝지만 그는 물염정을 더 자주 찾았다고 전해진다.
아니 화순적벽을 더 자주 찾았지만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염정은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도 화순 현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와 화순에
머물면서 자주 찾아 시를 읊었다고 한다. 김인후나 권필, 이택당, 민단암, 김농암, 김창흡,
이식 등 당대의 풍류(風流) 시인묵객들도 그 아름다움에 반해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고 한다.
물염정에는 이들이 직접 지은 시문 28수가 지금도 걸려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은 떠오르고...
묘치재 (06:10)
묘치는 전남 화순군 동면과 이서면 경계를 이루는 15번 국도이며 ‘묘치재 해발 200m 화순군’ 이라고
적힌 표지석과 ‘적벽가는길’ 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묘치고개 삼거리에서 도로를 건너 절개지로 올라가면 여러개의 묘 들을 지나면 좌측으로 굴뚝이 보인다.
잡목을 헤치며 오르막 능선을 올라 봉우리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 후 출발, 정맥 길은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잡목지대의 내리막 능선으로 이어진다.
묘치(猫峙:200m)고개
전라남도 동복면 경치리에 있는 고개로 22번 국도가 지나간다.
살쾡이 모양을 한 형국이라 하여 괭이재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고개는
화순적벽과 동복면소재지를 가는 삼거리에 있다.
동복적벽길 가는 길
조선중종 때 신재 최산두선생께서 동복에 유배되어 내려 오셨을 때 중국의 적벽에
버금 간다고 지었던 적벽(赤壁)이 이름의 효시가 되었다.
물염적벽,보산적벽, 순창적벽 등 동복호 내에는 5군데의 적벽이 있다
난고 김 병연(김 삿갓)과 어사 박 문수 등 이름난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천왕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별산 주위의 연봉들
묘치에서 다시 빡세게 치고 오른다. 이곳은 간벌을 하고는 정리가 안된 나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그야말로 길을 걷는 자체가 고행이다. 이리저리 피해가면서
걸어보지만 상당히 힘이든다. 이 지역에 지금 군수나리가 없는 탓인가.
이 지역엔 이번에도 재보궐 선거판이 벌어진다. 이번엔 좀 잘뽑으시요.
이 지역은 형제군수, 부부군수가 탄생할 때마다 비리로 호텔(?) 가는 바람에 맥길이
엉망인가?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지자제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군수는 그 지역일만 잘 보면되지. 왠놈의 중앙 정부의 눈치보랴. 지역구 국회의원 비위
맞추랴 하다보니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맘에 있으니 자꾸만 비리가 발생하지...
화순군민들 이번엔 제발 좀 잘 뽑으시요.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쪽팔리지 않게 말이요
그리고 같은 값이면 산을 잘알고 정맥길 정리 잘하는 군수로 말이요 ㅋ.ㅋ.ㅋ.
낙엽속에서도 정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붓꽃이 산꾼들을 유혹한다.
들꽃이 아름다운 이유를 충분히 알것같다.
주릿재(07:20)
화순군 동북면과 동면을 잇는 15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주로 이 고개를
주(周)로 많이 이용하는 고개(路)라고 해서 주릿재라고 불렀단다.
이곳은 벌써 진달래의 낙화가 시작된다. 그래 花無十日紅이라... 열흘 붉은 꽃이 어디 있드냐.
우리네 인생사도 마찬가지이거늘. 항시 잘나가란 법은 없다. 늘 下心하고 살면 그렇게 편한걸
貪.嗔.痴 그것만 버리면 이 세상이 극락인 걸... 뭘 그리 욕심내면 살려고 아둥바둥거리는가
세상사 모든게 諸行無常이요 諸法無我인걸.
開花를 앞두고 있는 蘭
이 지역 마루금에는 발에 걸리는게 난이다.
지천으로 깔린 둥글래
둥글래 차로 유명한 둥글래가 천왕산 가는 길엔 지천으로 널려있다.
주릿재 가기전에 산소 주위에는 고사리가 천지이다. 동료 산꾼들은
고사리를 채취하느라 여념이 없다.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올라서니 선두에
가신 분들이 아침상을 펼친다. 장소가 조금 협소하여 우린 조금 밑에서
아침상을 펼치고 해장술로 막걸리를 연신 3잔을 마시니 밥 생각이 별로없다.
그리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잠시후 천왕산에 도착한다.
천왕산 삼각점
천왕산(天王山:424.2m:08:20)
천왕산 정상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나뭇가지에 ‘호남정맥 천왕산 424.2m'라 표시한
표지판과 여러개의 정상 표지기가 붙어있다.
여기를 왜 천왕산이라 한 이유를모를 정도로 초라하기만 하다.
천왕산은 여의주를 놓고 싸우던 용의 전설이 있었는데 여의주 쟁탈전에서 패한 네마리의
용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하며 우러를 앙( 仰)자를 써서 천앙산(天仰山)이라고 불렀는데
변음이 되어 천왕산(天王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면 급경사 내리막이 시작되고 새로이 단장한 듯한 묘지를 지나 이어지는
급경사의 내리막 능선을 내려서서 묘2기가 있는 곳을 지나면 바로 안부사거리를 통과한다.
직진하여 오르막 능선을 올라 봉우리를 지나고 넓은 등산로를 따라 진행하면 콘크리트 포장도로와
만나고 도로를 따라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다
전방에 보이는 높은 kt통신탑 2기가 있는 방향으로 들어서면 밤나무 단지를 지나 통신탑 앞을
지나는데 좌측에 구봉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좌측 아래로 복암리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천왕산 아래 다소곳이 자리잡은 장전리 마을
볼품없는 천왕산 급경사를 내려와 야생화 몇 카트 찍는 사이 동료산꾼들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다시 베낭을 조여매고 임도길 같은 길을 내달린다.
잠시후에 콘크리트 임도의 밤나무 단지 사이에 K.T 통신기지가 올라서니 앞서가는
산꾼이 시야에 들어오고 구봉산이 보인다. 구봉산은 백운산만큼이나 흔한 산이다.
오늘 구간만도 조금후에 만날 반곡리의 구봉산도 있다. 지난주에 한남.금북에서도
만났는데... 임도에 오르니 화순탄광을 복원하는지 산 전체를 포장해놓고 있다.
잠시 후 밤나무 단지를 지나면서 능선으로 올라 90도 우측으로 꺾으 후에 서밧재가는
편한 길을 만난다.
구봉산(九峰山)
화순군 동면과 남면의 경계 능선에 있으며 봉우리가 아홉개가
있다고 해서 구봉산이라고 부른다. 이 산 북쪽에 있는 복암리는
마루금 능선과 22번 국도가 평행선을 달린다. 복림마을의 복자와
구암마을의 암자를 따와 복암리라 하는데 이곳이 전남지역의 유일한
석탄광산이 있는 곳이다. 화순탄광은강원도의 태백, 삼척, 사북, 고한 등에
있는 탄광과는 달리 이곳은 이곳 탄광은 메탄가스가 발생되지 않는다고 하며
전남지역에 유일한 무연탄 탄광이라고 한다. 이곳 화순은 땅만 파면 석탄이
나온다고 하였다. 화순탄광이 번창하던 시절 여자들이 광부들과 결혼하지
못하면 평생 한이 된다고 할 만큼 호경기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구봉산 갈림길에서 짧게 급경사를 내려온 후에는 임도를 따라 편안한 걸음으로
내려온다. 작은 소나무들이 참으로 많고 이곳이 명당터인지 화려한 묘지들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호남사람들의 조상에 대한 예경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물론 그래야지 뿌리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조상없는 후손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리고 잡목들을 베어내고 새로 조림지를 만드는 곳도 있다.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온다. 등로를 이탈하여 시원하게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나니 동료 산꾼들은
벌써 서밧재를 넘어가고 있고, 최고의 정맥 산꾼인 칠갑산님과 세봉님만 보인다.
해주 최씨와 김해 김씨 합장묘를 지나 우측으로 내려오니 굉장히 큰 규모의
문성석재 공장이 나타나고 고속도로 수준급인 서밧재가 나타난다.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을 시도해 보려 했지만 차들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지하통로 아래로 서밧재를 건넌다.
서밧재(09:10)
15번 국도가 지나가는 전남 화순군 동면 천덕리와 남면 벽송리를 잇는
경계로 이곳 서밧재가 호남정맥 총구간의 중간점이다. 3정맥 분기점인
조약봉(주즐산)에서 외망포구까지 도상거리 432km중 218km에 해당한다.
예전에 이 고개를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누에를 키우는
섶처럼 생겼다고 해서 섶밭이라 불렀는데 섶밭이 변음되어
서밧재로 되었다고 한다. 옛부터 이곳 서밧재 근처 남면 벽송마을은
절벽위에 푸른 소나무가 있어서 벽송(碧松)이라 불렀는데 이곳에는 조선시대에는
주물공장이 있었고 마을입구 저자거리에는 솥가마를 판매 하기도 하였다고
하였으니 옛부터 서밧재가 형성되었고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밧재에서 다시 내려온 것 만큼 산길을 올라간다. 산행한 지 5시간이 지나고
어젯밤에 버스에서 잠을 제대로 못잔 탓에 서서히 피로도 몰려온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 탓인지 비교적 시야확보도 되는 편이다. 바로 아래에는
벽송 저수지가 보이고 사평터널 그리고 저너머 봉황산도 뚜렷하게 보인다.
상당한 된비알을 오르니 암릉구간에 로프를 설치해 놓고 잠시후 넓은 임도에
다다르니 동료 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 역시 산상 주막이 벌어지고
그 덕에 막걸리 두 사발을 마시고나니 기력이 회복된다. 차에는 휘발유가 필요하듯
정맥 산꾼들은 막걸리를 마셔야 기력이 회복되는 것 같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광주 학생교육원(09:50)
임도에서 휴식을 취한후에 좌측으로 내려오니 갑자기 커다란 신축건물이 정맥길을
가로막고 있다. 광주시 학생 교육원 수련원이 신축공사를 하고 있다.
집을 지을때 풍수지리를 보듯이 공공건물을 신축할 때 적어도 맥길만은 훼손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수련원을 빠져나와 편안한 숲길도 들어선다. 천운산 가는 길은 편안하다.
넓은 등로를 따라 편안길을 가다보니 잠이 쏟아진다. 간간히 벤치도 있긴 하지만
후미그룹으로 쳐지는 바람에 쉬지도 못하고 천운산 2봉으로 올라가는데 자꾸만 발길이
무거워진다. 2년만을 한 주도 쉬지않고 매주 산행을 하다쉬피 하다보니 주인 잘못만난
내 무릎이 슬슬 과부하가 걸리는 모양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랴 내년 7월까지만
참아다오... 1대간 9정맥이 끝난 다음에 충분한 휴식을 주마.
잘못된 이정표
천운산 정상 36km, 3시간 소요라고 잘못된 이정표에다 어느 산꾼이 36km 사이에 . 하나를
찍어 넣었다. 그리고 1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구간을 3시간이라고 적어놨다.
한전에서 해 준 모양인데 이런 오류 투성이라니... 거기다가 여러 기관에서 이정표를
많이 달아놨지만 제각각이다. 정확한 표기를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제1 쉼터(10:30)
천운산 제2봉(천자봉:10:50)
화순군 동복면의 마루금에서 바라보니 온 천지가 산봉우리다.
이곳 화순의 많은 봉우리들의 지명을 보면 전쟁과 관련된
이름이 참으로 많다. 임금을 칭하는 천자봉도 그렇고 군대가
집결해 있었다는 정군재, 군사들이 취사를 하는 곳으로 보이는
시리재, 산새들이 많아서 군사들의 먹걸리가 되었다는 새등,
전쟁의 승전고를 울렸다는 북바위 등이 아마 이 지역이 정유재란
때 마을의 생성되었던과 무관치는 않아 보인다.
천운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능주의 모후산
능주지방은 화순군과 합치기 전까지는 화순이 이 곳에 속했을 만큼 세력을
떨쳤던 곳이다. 조선조 16대 임금이었던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가 이곳
출신이라 하여 1632년에 능주목까지 승격되어 나주, 광주에 버금가는 큰 고을
이었다고 한다. 능주면 남정리에는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 추모비가 있다.
조선 중종때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폈던 조 광조가
기묘사화 때 보수세력에 밀려 이곳으로 귀양을 왔다가 사약을 받은 곳이다.
조 광조의 존영
조선시대에는 4대 사화가 있었다사화(士禍)란 사림(士林)의 화의 준말이다.
조선 중기 신진 사류들을 사림이라 칭하였는데 쉽게 비유하자면쉽게 비유하자면 젊고 소신이 강한 개혁파 선비들을 말한다.
이에 대칭되는 파벌이 훈구파[勳舊派]라 할 수 있는데 기득권을 가지고보수적인 성향을 띤 공신들을 말한다.
사화는 사림들이 개혁을주창하다 훈구. 척신세력들에게 정치적 탄압을 받아 많이 사람들이죽거나 귀양을 가는 등
큰 화를 입은 사건들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4번의 큰 사화가 있었다.
첫번째가 무오사화(1498년:연산군 4년)이고, 두번째가 갑자사화(1504년:연산군 10년), 세번째가
기묘사화(1549년:중종 14년) 네번째가 을사사화(1545년:명종 1년)이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연산군때의 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학자들은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졌는데,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惡政)을 개혁함과 동시에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대의명분과 오륜(五倫)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때 뛰어난 것이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가장 연구가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한국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계승한 사람으로 1515년(중종 10년)에 성균관 유생 2백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그를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안당(安塘)도 그를 추천하였으므로 곧장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전후 5년간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삼대(三代)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너무 지나치게 중요시한 나머지 고려 이래 몇 백 년간 장려하여 온 사장(詞章)의
학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詞章派)와 서로 대립되었으며, 또한 현실을 돌보지 않고
주자학에 따라 종전의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치려 하였고, 풍속·습관까지 바꾸려 했기 때문에 정광필(鄭光弼) 등
보수파의 훈구재상과 서로 대립되었다.
당시의 훈구재상으로서 조광조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세력을 잃고 불평을 품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靖國功臣)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이에 놀란 훈신(勳臣)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략·중상에 나섰으니, 이것이 조광조 일파의
젊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의 하나였다.
지나온 마루금 , 새벽에 지나온 별산이 왜이리 높게 보이는지.
천자봉에서 천운산 가는 길은 참으로 고도편차 없이 편안한 걸음이다.
이렇게 편하게 걸어본 산행이 얼마만이던가. 하긴 오늘 산행이 몇군데를
제외하곤 이 지역 주민들의 품성만큼이나 편안하고 무난한 산행이다.
별산 아래에서 어둠속에 보고 난 이후에 얼레지꽃을 구경을 하지 못한다.
얼레지가 너무나 보고 싶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窮卽通) 잠시후에
범여의 소원을 한방에 풀어준다. 잠시 앞서가던 칠갑산님이 환호성을 울린다.
얼레지가 천지라고... 완전히 얼레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뭇 남성을 유혹하는 얼레지꽃
슬픔이란 꽃말을 가진 얼레지가 천운산 가는 구간에 두 군데나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얼마나 범여의 맘을 설레게 했던가. 샤워를 마치고 촉촉한 물길을 머금은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생기 넘치는 꽃
성숙한 여인의 탄력있는 가슴을 한껏 뒤로 져끼어 활처럼 뒤집어서는 본능적 생동감으로
온종일 춤을 추고 있는 바람기 많은 꽃.
땅만 보고 있는 척 하면서도 지나는 이의 눈을 곁눈질로 맞추어 붙들어 놓고는 온 마음을
송두리째 빨아가는 악랄한 꽃. 살랑거리는 봄바람의 리듬에 맞쳐 온몸을 풀어 헤쳐 혼란한
유혹의 춤을 추는 꽃. 그 장단에 안 넘어가는 사내가 있을까
방금 감은 듯한 촉촉한 머릿결을 뒤로 넘기면서 눈웃음을 치는 듯한 당신의 분홍빛 유혹에
과연 몇명의 사내들이 살아 돌아 올 수 있단 말인가.(펌글)
현호색
현호색은 현호색과(玄胡索科)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우리나라 전역의 산과 들에서 자란다.
키는 20cm 정도로 땅속에 지름이 1cm 정도인 덩이줄기를 형성하고 여기에서 여린
줄기가 나와 곧게 서며 자란다. 기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하나의 큰 인편(鱗片)이 있고,
여기에서 가지가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는데 1~2회 갈라지고 뒷면은 흰색을 띠며 잎자루가 길다.
4~5월에 연한 홍자색의 꽃이 총상(總狀)꽃차례를 이루며 피고 꽃부리[花冠]의 길이는
약 25㎜이다. 꽃잎은 입술꽃잎[脣瓣]으로 기부에 거(距)가 있다. 암술은 1개, 수술은 6개이다.
열매는 길이 2cm, 너비 3cm 정도로서 선형의 삭과로 익으며 양끝이 좁고 뾰족하다. 씨는 둥글고 광택이 있다.
현호색속에 속하는 식물은 매우 다양하여 전 세계에 걸쳐 300여 종(種)이 있고,
한국에는 현호색, 빗살현호색, 댓잎현호색 등의 덩이줄기를 갖는 종들과 산괴불주머니,
염주괴불주머니 등의 곧은 뿌리를 갖는 종(種)들을 포함해 21종 1변종 5품종이 자생한다.
덩이줄기에는 코리 달린, 푸마린 등이 함유되어 있어 정혈제, 진통제, 진경제로 사용한다.(李相泰 글)
꽃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건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가?.
봄바람 살랑살랑 부는 천운산 2봉의 진달래 뒤로 보이는 별산의 모습
천운산 2봉에서 바라본 화순읍내
화순은 예로부터 산과 물이 아름다워 사람들의 발길이 잣았던 곳이다.
호남정맥을 따라 죽 이어진 산들이 지석천과 어우러져 넉넉한 들판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 곳 사람들의 마음씨 또한 넉넉해서 날아가는 새도 쉬다 가고,
지나가는 나그네도 발길을 멈춘다고 화순땅.
천운산(天雲山:601m:11:20)
구름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천운산은 전남 화순군 동면 운농리,
한천면 평리, 남면 벽송리에 걸쳐 있으며 화순광업소 뒤편에
위치한 천운산은 화순군 동복호와 주암호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자락에는 한천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천운산 하산길에서 본 돗재골
돗재에서 한천면 사무소 방향으로 가면 화순탄광이 개발되면서
생긴 마을이 돗재골이다. 이곳은 주산물도 무연탄이고 특산물도
무연탄이며 주산물도 무연탄이었다고 한다.
한때는 호남탄좌의 사택이 들어서서 200여가구가 상주하였으나
1992년 석탄 합리화로 폐광이 되면서 지금은 몇가구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마지막 관문인 512봉(11:45)
천운산 정상에서 오랫만에 동행한 젠틀맨님의 베낭에서 마지막 막걸리
한병을 비우고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주위에는 온 천지가 꽃밭이다.
쭈~욱 내려오다 한천 휴양림 가는 길 삼거리에서 다시 한번 치고 오르니
512봉에 도착한다. 우측 한천 휴양림쪽의 길은 마치 뱀처럼 꾸불꾸불하다.
1977년 박 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개통했다는 돗재골은 전남지역에
유일한 무연탄 탄광이 있는 곳이다.
512봉에서 돗재가는 길은 암릉구간으로 전망은 참으로 좋다.
오늘 2번째 만나는 구봉산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듯이 시야에 들어온다.
돗재(12:10)
돗재는 천운산의 산세가 어미돼지가 새끼돼지 일곱마리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형상처럼 보이는 형태라서 돗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돗재 부근에는 전남지역에 유일하게 무연탄이 생산되는 화순탄광이 있다.
돗재 개통 기념비(1977.09.30)
"박정희 대통령각하께서는 하사금을 내려주시고 도지사님과 군수님께서는
수차에 걸쳐 직접 현지를 찾아 격려 지도하여 개통했다는 돗재 개통 기념비
가 서 있다. 40년이 넘은 도로이다. 그 분이 독재자로 남긴 하였지만 요즘
정치하는 자들 보다는 그래도 100배는 낫다. 물론 그 분 때문에 고통 받으신
분들이 이 글을 보면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분은 오직 국가와 민족의
가난에 벗어나고자 불철주야 노력했지만 요즘 정치인들 형태 좀 보소
하는 일이라곤 맨날 쌈박질 이외는 하는 일이 뭐있소. 자기들 사리사욕 외는...
하나 있긴 있지만 자기들 세비 올리는데는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더군요.
암릉길을 지나니 멋지게 지어진 팔각정이 나타난다.
동료 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안부에서 불어온다.
돗재까진 400m라고 표시되어 있고 10분정도 내려오니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우릴 반갑게 맞아준다. 잠시후 차로 10분정도 떨어진 한천면
소재지에 있는 부용가든에 도착하여 수돗가에 알탕을 하고 산악회에서
제공한 오리 주물럭에 맥주에다 소주를 말아 맛있게 먹고 서울가는 차에서
깊은 잠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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