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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14구간 - 돗재에서 예재까지

by 범여(梵如) 2011. 5. 1.

 

○ 산행일자 : 2011. 04.30~05,01(무박 산행)
○ 산행날씨 : 안개가 심함, 낮에는 맑은 날씨이나 올해들어 가장 심한 황사와 태풍급 바람으로 목이 엄청 아픔.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33명의 회원들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23.5㎞ G.P.S 거리:27.5  km / 10시간소요 
○ 산행코스 : 돗재-태악산-노인봉-성재봉-말머리재-촛대봉-두봉산-488.6봉-개기재-
헬기장(철쭉 군락자)
                  계당산-학동재-예재
○ 소 재 지 : 전남 화순군 동면, 한천면, 이양면 / 보성군 미력면,복내면, 노동면
 

 

토요일은 꼭 한 여름에 스콜을 연상하듯 많은 비와 한낮에도 컴컴한 날씨가 밤에 호남길에

나서야 할 범여의 맘을 어둡게만 한다. 낮에 에식장 두군데를 들렸다가 내일 예식장은

지인에게 봉투만 부탁하고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와 잔무를 정리하고 베낭을 꾸린다.

5월부터 길이 먼 관계로 1시간 일찍 버스가 출발하니 왠지 맘이 바쁘다.

 

비가 좀 그쳐야 할텐데... 천둥, 번개가 치니 맘은 더 불안하다. 꼭 요즘 민심같다.

며칠전 치러진 4.27재보선 같은 느낌이다. 여당의 참패로 끝난 이번 선거로 민심은

천심이란 걸 제대로 읽었는지... 그렀다고 야당이 잘했다고 표를 준 것은 절대 아니니

민심을 호도하고 오만방자한 짓거리는 절대하지 마시길... 어차피 당신네들도 한것이

없으니 말이다. 꼭 한가지 있긴 하지만... 그것이 뭐냐고 에이 알면서 당신네들 세비

올리고 당신네 정치하는 자들이 이익에 관한 한 어찌 그리 만장일치로 단결이 잘되오.

요즘 부산저축은행 사건 함 보시요. 시장에서 손때묻은 돈 한푼 두푼 모은것을 것을

다 해처 먹고는 자기들 대주주는 은행정지 마감 시간에 돈 다 빼돌리고...

 

저런 자들은 광화문 네거리에 매달아서 주리를 틀든지 해야지 대통령님, 감독 기관장부터

시작해서 일벌백계로 다스려 정말 국민들이 잘 사는 정의 사회가 뭔지를 보여 주시죠.

이런 저런 생각에 먹구름이 가득찬 하늘을 바라보면 탑승지인 양재역으로 향하는 범여의

맘은 무겁기만 하다. 2주만 만나는 동료 산꾼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안성 휴게소를 지날 즈음 앞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비가 쏟아진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어찌 중생이 바꿀수 있으랴... 2번째 휴게소인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휴게소에 도착하니

다행히 비는 그치고 그 후로 1시간을 넘게 달린 후에 들머리인 돗재에 새벽 3시 반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돗재(03:40)

어미 돼지가 새끼에게 젓을 먹이는 형상이라는 돗재는 생각보다도 멀다.

고속도로 I.C를 빠져 나왔서도 1시간 이상을 더 가서야 도착한다.

버스는 숨이 막히는가보다 한천면을(전남 화순소재) 접어들면서 어두운 좁은 길을

헐떡거리면서 한천 휴양림을 지나 지난구간 날머리인 돗재에 도착한다.

돗재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산행준비를 한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바로 앞의 동료산꾼도 인식하지 못할만큼 짙게 깔려있다.

화순 한천면 돗재에서 산행을 준비하다.

동국여지승람에 표기된 화순을 말하기를 「풍속이 소박하고 간략하기에

종래부터 후했고, 산이 정기를 감췄으니 발설하기가 더디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은 흔히 광주의 상징으로 여기는 무등산의 줄기인데

서쪽으로는 화순읍에다 만연산을 일으키고 너릿재와 같은 광주와의 경계를

일으키면서 능주쪽으로 뻗어 내린다.

 

또 다른 한줄기는  동쪽에 있는 동복면 쪽으로 해서 모후산을 만들고 남쪽으로

구릉지를 형성했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이곳으로 피난와서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게 피난살이를

했다고 해서 모후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 화순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한다. 산이 많아서인지 전남의 여느 지역과는 달리

무연탄과 석회석, 규석과 같은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화순의 산속에는 모란과 작약같은 뛰어난 약초가 많았고 흔히 복삼이라고 일컬어지는
이곳 인삼은 화순 삼복으로 고려인삼중에 으뜸으로 쳤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조선총부 전매국에서 펴낸 ‘인삼사’에 따르면 화순은 인삼의 원산지였다고 한다.

실제로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동복면을 중심으로 인삼재배가 성행했다고 한다.

화순 삼복에는 복삼 말고도 복천어와 복청이 있다. 

복천어는 섬진강 은어중에서도 상류인 동복천 맑은물에서 자란걸 말하며 복청은

만변통치약으로불리는 토종꿀 중에서도 갖가지 꽃과 나무가 어울지는 이곳 깊은 산속에서체취 한 것을 말한다. 

태악산(太岳山:04:40)

돗재에서 출발한 지 꼭 1시간만에 태악산 정상에 도착한다.

시작부터 크게 험하지는 않으나 등로가 정리되지 않는 탓에

잡목들이 산행에 상당히 방해가 된다. 산에는 고사리가 지천으로

깔려있다. 초반부터 산꾼들은 고사리를 꺽느라고 정신이 없다. 안개가 자욱한

태악산에 힘들게 오르니 작은 바위들이 수북하다.

 

그럴듯한 멋진 이름에 상당히 기대를 했는데 호남의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무명봉에 가깝다. 산의 모양이 신선이 장구를 치며

노는 형태처럼 보인다고 해서 크게 즐긴다고 뜻으로  太樂山이라고

하였는데 변음이 되어 태악산으로 불리게 되었고 나중에 한자까지

변음이 되어 太岳山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나라 지명의 80%이상이

뜻글자라 한자의 중요성이 필요하고 앞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점점

늘어나는데 한자교육이 점점 위축되어 생긴 결과물이 아닐까? 

태악산 정상에는 1기의  묘지가 있고 주위에는 정맥꾼들의 시그널이 어지럽게 달려있다.

물 한모금을 마시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다행히 우려했던 비는 오질않고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춥지도 덥지도 않아 안개만 없다면 산행하기엔 금상첨화이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안개 때문에 10m앞도 분간하지 못할만큼 짙다. 잠시 후에 돌탑이

나타나긴 하지만 어디가 어딘지 구분조차 되질 않는다.

대엿섯개의  봉우리를 感도 없이 초반부터 오르내리니 힘이든다.

암릉구간의 안부를 계속해서 걷는다. 이 구간에 있는 전망바위에는

전망은 고사하고 칠흙같은 어둠속에 안개까지 가세해 길을 찾는것 조차  힘이든다.

갑자기 급경사를 힘들게 치고 오르니 부산 낙동 산악회에서 표시한 노인봉이 나타난다.

노인봉(老人峰:05:30)

 산꼭대기에 노인바위가 있어서 노인봉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어느것이 노인바위인지

구분이 되질않고 부산 낙동산악회의 아크릴 표식만이 노인봉임을 알려준다.

이곳 남도길에도 경상도 산꾼들이 표식을 독차지 한다. 정말 경상도 산꾼들의 산사랑을

대단하다. 이곳 지자체들도 좀 신경을 써줬으면 한다.

노인봉 삼각점

이게 노인바위인가?

노인봉을 지나면서 낮이 밝아온다. 이제는 헤드랜턴을 벗고 길을 걷는다.

아마 화순탄광에서 설치한 듯한 콘크리트 표식판이 보이지만 이 구간은

별 특징이 없다. 호남정맥구간 중에서 오늘에 걷는 이 구간 돗재에서 감나무재까지

2~3구간이 가장 멋이없고 정맥길이 아니라면 걸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무의미한 길같다.

그러나 정맥길을 이어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코스 또한 이길이다.

 

 

 개기재를 넘어 철쭉밭으로 유명한 계당산까지 포함한다면 돗재에서 예재에 이르는

호남길의 산들은 이름을 가진 산만 태악산,노인봉,성재봉,촛대봉,두봉산,계당산 등 6개에 이른다.

그외에 이름없는 봉우리들 까지 포함하면 이 구간의 산들은 50여개를 상회한다.

그만큼 오늘 산행이 지루하고 힘든 산행길이다.

성재봉(514m: 05:55)

노인봉을 출발하여 계속해서 오르내림을 반복한 끝에 성재봉에 도착한다

꽤나 높은 성재봉은 산이 성을 둘러 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성재봉라고 부른다고 한

 성재봉 정상에는 별 이렇다할 특징이 없다. 사진만 한장 찍고 정상에서 급하게 꺽어져 내려가서

다시 만나는 420봉과 429봉을 연이어 만난다.

날이 밝으면서 산나물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고사리는 지천으로 깔려있고 잠시 후

급한 내림길 옆에 엄나무가 꽤나 많이 보인다. 근데 선두로 가시는 분들이 그냥 놓친

모양이다. 온누리님과 함께 엄나물을 꽤나 많이 수확을 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2주전에 남도길에 비해서 녹음(綠陰)이 꽤나 많이 짙어졌다.

고암촌(화순군 이양면 소재)의 능성퇴비공장

예전에는 이 근방이 탄광지대였는데 이젠 탄광은 쇠락하고

이젠 전형적인 농촌모습으로 바뀌었다.

말머리재(06:40)

화순군 한천면 샛점마을과 이양면 고암촌 마을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전남지방의 젓줄인 주암호가 어렴풋이 보이지만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말머리재를 치고 오르니 463봉이 나타나고 다시 능선의 길을 걷는다.

잠시 후에 선두가 아침상을 펼친다. 넓은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는지

등로를 중심으로 쭉 늘어서서 각자 아침식사를 한다. 오랫만에 만난 산꾼들과

술 한잔 기울이면 식사를 20분만에 끝내고 다시 먼 길을 떠나기 위헤 베낭을 짊어진다.

촛대봉(08:00)

산의 모양이 촛대처럼 생겨다 하여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침을 먹은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산을 오르기가 힘이든다.

거기다가 비에 젖은 낙엽이 상당히 미끄럽다.  안부 능선을 지나고

다시 오르내림을 계속한다. 오늘구간은 경제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잡목지대를 계속 지나고 흔히 남도길의 산을 타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없는 넓은 들도 볼수가 없다. 잠시 후 산등성이 나무에 스텐강판에

촛대봉이라고 표시한 촛대봉에 오른다.

촛대봉 근방에서 바라본 두봉산의 모습

촛대봉에서 두봉산 가는 길은 산죽 군락지가 살갑게 산꾼들을 반겨준다.급한 오름길에

힘이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험한 길은 아니다.아마 이 지역 사람들은 심성만큼이나 고운 그런곳이다.

 

화순군 지역을 지나다 보면 독특하게 생긴 이정석이 많이 보인다.

이것이 모두 화순 고인돌 유적이라고 한다. 화순은 강화, 고창과 함께 고인돌이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많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는 유라시아 대륙을 감싸고 있는 대양의 인접지역에주로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거석문화 중심지가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의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대부분 무덤으로 사용했는데 그 중에는 권력의대상물이나

신앙의 대상물로 축조된 것도 있다.

 

이러한 고인돌 중에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고인돌은 길이가 7.3m, 폭이 5m, 두께가4m로

한국 최대규모이며 이 바위를 핑매바위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양한 무덤방과 부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농경시대의 유물들이다.

이처럼 고인돌의 이름과 전설이 많이 남아 있는것도 화순 고인돌의 매력이다.

두봉산(斗峰山:08:45)

옛날 이 산에서 파수를 보았다하여 망방산이라고 부르다가 말봉산으로

바뀌었고 이게 다시 말 “斗” 字로 바뀌면서 斗峰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정상에 두봉산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산불감시초소의 감시 카메라가

산꾼을 감시한다. 오늘 산행길에 최고봉이나 조망은 옅은 황사로 인해 별로이다.

거기다가 중국에서 불어오는 올해들어 최악이라는 황사가 오는지 온 산들이

황사로 뒤덮였고 바람도 자꾸만 거세진다. 서둘러 길을 떠난다.

두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장재봉(660m: 화순군 한천면 소재)의 모습

忍苦의 세월을 딛고...

장재봉 갈림길(590m : 09:00)

장재봉 갈림길인 590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지고 행정구역은 이제 화순군에서

보성군으로 접어든다. 이 구간은 개기재까지 거의 능선으로 이어지고 갈림길이 별로

없어 편안한 길을 걷는다

장재 저수지의 모습

증통정대부 죽산 안씨와 나주 라씨 합장묘 앞(09:20)

贈通政大夫란 조선시대에 둔 정삼품 문관의 품계 고종 2년(1865년)부터는 종친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나라에서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들에게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주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선두에 가던 산꾼들이 넓은 산소 주위에 휴식을 겸한 즉석 야외주막을 펼친다.

고관절 수술로 오랫만에 동참하신 잰틀맨님의 인천 소성막걸리가 입에

착 감긴다. 연거푸 2잔을 받아 마신다. 작년에 낙동정맥에 동행한 인연이라

그런지 술맛이 더 땡기는걸까... 산소 주위에는 고사리가 천지이다.

보너스로 이제 새순이 막 올라오는 도라지 2뿌리도 전리품으로 챙기고 개기재로 향한다. 

468.3봉 삼각점(09:50)

관절염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엉컹퀴도 지천으로 깔려있다.

개기재(10:05)

화순군 이양면에서 보성군 복내면으러 넘어가는 고개로 2차선 포장도로이다.

내려가는 길의 밭에는 갓에서 핀 노란꽃이 참으로 이쁘다.

밭두득을 지나 도로에 도착하여 잠시 내려가다 좌측 농장으로 올라가다 의령

남씨 묘소를 따라 좌측으로오르니 황토길이 질척 거리고 철쭉꽃이 수줍게 피어있다.

개기재를 뒤로하고 편한 오름길을 오르니 주위에는 우산나물과 취나물 그리고

둥굴래와 고사리가 지천이다. 오늘은 무의미한 산행을 나물들이 보상을 하는 느낌이다.

범여도 견물생심이라고 고사리를 꽤나 많이 수확을 하였다

 

宜寧南氏 七世 設壇碑

의령남씨 묘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족보를 정리하듯 스텐 강판에

가계도가 그려져 있다. 다른 곳에서 볼 수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아마 이곳에

의령 남씨 씨족마을이 있는가보다. 내 고향 의령군 유곡면에도 의령 집성촌에

상당히 많이 살고있고 우리 중학교 동창들도 의령 남씨들이 많았는데...

우리 의령군 향우님 중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중국집 하림각을 운영하시는

남 상해씨도 의령 남씨이다.

개기재에서 계당산 가는 길은 부드러운 육산이지만 산행시작 8시간이 다가오니

자꾸만 체력이 떨어진다. 자꾸만 선두와 차이가 나고 거기다가 고사리가 산행길을

더디게 한다. 중생의 욕심은 한이 없는 모양이다. 어느새 커다란 비닐봉지에 가득차

베낭에 넣고 또다른 봉지로 고사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 사이 황사바람이 심하게

 불어와 이제는 목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바람은 거의 태풍수준이다. 저기가 계당산

이겠지 하고 오르면 아니고 또 오르면 아니고 하면서 오른 곳이 계당산 철쭉 군락지가

나타난다.  저 아래 복내면소재지도 황사속에 아련히 보이고 지나온 두봉산은 아예

황사도 도배를 한 느낌이다.

울님의 순수한 맘만큼이나 깨끗한 梨花

계당산 올라가는 길에 커다란 돌배나무에 흐드르지게 피어있는 배꽃

양지바른 곳에 수줍은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철쭉도 이제 피기 시작하고...

2주전에는 요염한 자태로 뭇남성을 유혹하며 가슴 설레게 하던 얼레지도

이젠 세월앞에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그 사이에 주끄렁 밤탱이가 되어 버렸다.

계당산 철쭉 군락지에서 오늘 내가 지나온 능선들...

계당산 헬기장(10:20)

개기재에서 계당산 헬기장까지 1시간 20분은 정말 힘든 구간이다.

마침 벤치까지 설치한 배려를 무시만 할 수 없어 철쭉 군락지 옆 벤치에서

마지막 곡차를 한병 꺼내 나눠 마신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7km 정도나 남았다.

이젠 물도 거의 떨어지고 가진것이라곤 찹쌀모찌 2개와 우유하나, 쥬스하나가

전 재산이다. 다행인 건 계당산에서는 크게 힘든 곳이 없는 구역이라 별 염려는 안한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보성군 복내면소재지

계당산(桂堂山: 580.2m : 10:45)

2개군 3개면(화순의 이양, 보성의 노동, 복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조선시대의

기록이나 지도에는 중조산(中條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계당산으로

부르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옛날에 이 산에서 불이나면 반드시 비가

왔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이 산에서 기우재를 많이 전했다고 한다.

이 산 아래에는 유명한 쌍봉사와 쌍산의소가 있다.

 

쌍산의소/雙山義所(사적 제485호.)

한말 의병활동이 한창일 때 전라남도 화순군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남 의병활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계당산 일대는 쌍산, 쌍봉 또는 쌍치라 불리었는데,

이것에서 유래하여 ‘쌍산의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07년 양회일, 임노복, 임상영, 안찬재들이 주축이 되어 쌍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다음

능주, 동복, 화순 일대로 퍼져 의병활동을 벌였다. 이백래가 주축이 되어 호남창의소에서 펼친

의병활동과 안규홍 부대가 봉기하여 펼친 의병활동 또한 쌍산의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의병활동의 일환이다.

 

쌍산의소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기 제작소에는 축대 위에 철을 녹이는 용광로의 벽체와 쇠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 약 4㎞ 정도 떨어진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화정동에 있는 철광산의 철광석을

운반하여 무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며 의병성은 높이 약 80㎝ 정도의 돌들이 돌담 모양으로

길게 쌓여 있으며, 그 내부에는 원형 또는 사각의 낮은 돌담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선 막사터가 모여 있다.

의병성과 막사터로 보아 이곳이 쌍산의병의 진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계당산 삼각점

쌍봉사 가는 길

정맥길에 미치지만 안했어면 아마 범여는 무조건 쌍봉사로 향했을 것이다.

그만큼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언제가는 꼭 가야 할 곳이기에...

담구간은 거리가 짧아 운주사로 들리겠노라고 한 도강재 대장님의 말씀에

위안을 삼으면서 학동재로 향한다.

 화순 쌍봉사(雙峰寺)

호남정맥 길의 계당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쌍봉사는 철감 도윤선사(道允禪師)께서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창건하였는데 도윤선사의 법호가 쌍봉이었으므로 쌍봉사라 하였다.

도윤선사는 이곳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창건 후 여러차례 중창을 거듭하다가 1597년 정유재란 대 왜군들의 방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6.25전쟁 당시에도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극락전과 대웅전만 극적으로 보전되었다.

 

대웅전으로 불리는 삼층목탑은 삼국시대 목탑 양식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건물이다.

신라 황룡사 구층 목탑을 상상 복원할 때 그 기준이 되었고 이본 최고의 목탑인 호류지(法隆寺:교토 소재) 

오중탑(五重塔)의 우너조격이 되는 목탑이었으나 1984년 신도들의 부주의로 불에 타는 비운을 맞아

보물로 지정된 것을 반납하는 비운을 겪었으나 다행히 조사해놓은 실측 설계도면등을 참조해

1986년에 복원을 하였다. 

 

쌍봉사 대웅전 목탑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쌍벽을 이루었다.

건립 연대도 조선시대에 건립된 팔상전보다 훨씬 앞서있다. 팔상전보다

보다 규모가 적다는 적다는 점과 법주사보다 사찰규모가 적다는 점 때문에덜 알려진 것 같다.

 ▲ 쌍봉사 극락전  ▲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 호성전

화순 쌍봉사 지장전 지장보살상 일괄

쌍봉사 지장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시왕 및 그 권속 등 모두 21구이다

. 지장보살은 대좌에 앉은 모습이고 시왕은 의자에 앉아 있으며 나머지

상(像)들은 모두 서 있다. 이 상들은 166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에 의하여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귀중한 자료이다.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은 쌍봉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앉은

 모습의 아미타여래상이다.     원래는 양 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협시불과

함께 삼존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1989년 8월경     양 협시불을 도난당하여 이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이 불상은 숙종 20년(1694)에 만들어진 것으로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불상과 조각형식이 매우 흡사하다.

철감선사 부도탑(국보57호)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승탑의 백미로 기단에서 지붕돌까지 그 단단한 화강석을 마치 밀가루

반죽을 다룬 듯한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준다. 아래 기단엔 뭉게구름 위에 올라앉은

 여덟 마리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이 탑을 수호하고, 겹꽃 연꽃받침에 상다리 모양의

손잡이가 돌려진 윗기단에는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이 탑을 찬양하는 극락조들이 새겨졌다.

몸돌 앞뒤로는 자물쇠가 잠긴 문짝이 있어 여기에 사리가 모셔졌음을 암시하고 네 분의 사천왕과

 한 쌍의 비천이 이를 지키고 있다. 모든 조각이 아주 높은 돋을새김이어서 돌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거기에 암수 골기와 지붕의 겹처마 서까래와 연꽃무늬 수막새를 진짜

 기와지붕처럼 조각해 올려놓았다. 그 엄청난 세공이 놀랍기만 하여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교한

작품이 있었던가 감탄이 절로 일어난다.


곁에 있는 탑비의 돌거북 또한 당대의 명작으로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거북의 네 발 중

 한 발은 발바닥을 살짝 들어올려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조각적 센스까지 나타나 있다.

이런 훌륭한 조각은 석공 한 사람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9세기 후반 50년간,

팔각당 승탑의 명작들이 쌍봉사 이외에도 보림사·연곡사·태안사·실상사·고달사·선림원·봉암사

등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하듯 세웠다. 이 아름다운 승탑들은 곧 하대 신라 선종의 활기와

이를 지원한 지방 호족의 문화능력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철감선사(澈鑑禪師)

신라 현덕왕 7년(815년)에 18세의 나이로 당시 화엄십찰의 하나였던 김제 모악산의

귀신사(歸信寺)로 출가하여 10년동안 화엄학을 전공하였고, 28세에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서 혜능선사의 법증손(法曾孫)인 남천보원(南泉普願)

으로 부터 법을 전수받아 신라로 와서 문성왕 17년(855)에 쌍봉사로 와 10년간 종풍을

펼치다가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하였다. 철감선사가 쌍봉사에 머무는 기간에 사세가

번창하였고 제자들이 많이 나왔으며 이 절에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기초를

마련 하였고, 그의 종풍을 이어받은 징효(澄曉)선사가 영월의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에서 사자산문을 개창하였다. 그이 덕망이 커지자 문성왕은 스승으로 모셨고 입적하자

철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동료 산꾼들과 계당산 정상에서

569봉 정상(11:20)

계당산에서 편한 내림길을 계속한다. 약 30분만에 도착한 569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 안부를 계속 걷는다. 지도상에는 이곳을 떡갈나무

군락지라고 표시를 해놨다. 그만큼 주위에는 온통 떡갈나무 군락지이다.

이제 막피기 시작하는 쇠물뿌레나무의 꽃

내림길을 계속하니  뒤따라 오는 아리송 아우가 계속 보챈다.

소주 한잔 하면서 쉬어 가자고 한다. 근데 황사바람은 자꾸만

거세지고 능선 안부에 마땅한 장소가 없다. 한 1km를 더 간 다음에

휴식을 취한다. 근데 정작 소주를 갖고 있는 동료 산꾼 세봉님은 고사리를

채취하느라 나타나지도 않고 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남은 찹쌀모찌 2개를

꺼내서 나눠 먹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거 참 희안하네... 저기 고인물은 누가 먹지?

학동재(13:20)

보성군 미력면과 화순군 이양면을 있는 학동재는 그 옛날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는 꽤나 많이 넘나들던 고개이련만 이제 그 명맥조차도

잊지못할 정도로 초라하다. 신경쓰지 않으면 고개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다. 좌측에 꽤나 큰 학동 저수지가 보이고

학동마을도 어렴풋이 보인다. 이 마을이 얼마전 국세청장이 뇌물로

주고 받았다는 유명한 그림 학동마을의 소재지는 아니겠지...

학동재를 지나니 꽤나 큰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이제 오늘의 날머리인

예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부드러운  육산을 걸으면서 편백나무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향은 정말 머리를 맑게 해주고 피로를 싹 가시게 한다.

동행한 온누리님께서 아름드리 편백나무를 껴안는다. 웃음이 나온다.

오늘 같이 동행하며 참으로 많은 걸 배운다. 이 분은 아마 내가 만난 분중에

산에 관한한 최고 이론가이며 정말 박학다식한 분이다. 참으로 배울것이 많아서...

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 봉우리 아래로 예재터널이 뚫려있고

경전선이 지나가는 곳이다.

 

경전선(慶全線)은 경부선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역호남선광주광역시

광주송정역을 잇는 한국철도공사간선 철도 노선이다.삼랑진∼마산 사이를 잇는

마산선, 마산∼진주 사이를 잇는 진주선, 광주송정∼광주 사이를 잇는 광주선 및 진주∼순천을 잇는

경전선 등이 통합된 철도로, 경상도전라도를 연결한 철도라는 뜻에서

 두 도의 첫 글자를 따서 경전선이라고 하였다.

 

영남지역과 호남 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철도 노선이지만 경사가 심하고

 곡선 구간이 많으며 개통 이후 개량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그동안 대폭

 확충되었던 고속도로에 비해 수요가 적다. 

예재(13:40)

예재(고치)는 화순군 이양면과 보성군 노동면을 잇는 29번 국도가

지나가는 중요한 고개였는데 지금은 터널이 생겨 차량이 다니지

않는 도로가 되었다. 올라오는 길머리를 찾지못해 우리를 타고온 버스가

올라오지 못해 먼저 도착한 산꾼들이 지친 모습으로 넓은 공터에 앉은

모습이 지친 패잔병의 모습 같다.ㅋ.ㅋ.ㅋ. 우린 고사리 꺽느라고 늦게 도착했다.

잠시 후 지나가는 1톤 트럭을 픽업하여 신기 삼거리까지 내려와서 버스에 오른다.

옛 영화를 잊어버린 예재

고개아래에 뚫린 터널에게 모든걸 다 뺏겨버리고 쓸쓸한 예재길 도로

신기 삼거리의 모습

1톤 트럭이 예재를 왕복을 하여 마지막 산꾼을 태운 다음에야

오리탕을 예약한 이양면소재지 넝쿨가든을 향하다가 커다란 개울가에

하차하여 알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나니 한결 개운하다.

조그만 면소재지의 식당이긴 하지만 호남땅 어디서나 음식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다. 거기다가 귀한 두릅이 꽤나 많이 나온다.

거기다가 쥔장 여인네의 손님 다루는 솜씨또한 보통은 아닌듯하다.

맥주에다 소주를 말아서 5잔을 마시니 속이 얼얼하다.

이 맛에 산에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ㅋ.ㅋ.ㅋ 

이양면은

전남 화순군 남쪽에 위치한 면.동쪽은 보성군 복내면(福內面), 서쪽은 청풍면(淸豊面),

 남쪽은 장흥군 장평면(長平面)과 보성군 노동면(蘆洞面), 북쪽은 한천면(寒泉面)과 인접한다.

면의 동계(東界)에 계당산(桂棠山:580m), 북계(北界)에 촛대봉(522m), 남계(南界)에 봉화산(烽火山:464m) 등이

솟아 있고, 각각 영산강과 보성강 지류의 분수령(分水嶺)을 이룬다.

 

면의 서계(西界)에 지석천(砥石川)의 지류인 충신천(忠臣川)이 북류하고 유역에 좁고 긴 평야가 있다.

경지면적은 논이 밭보다 많으며, 주요농산물은 쌀·보리·콩·서류(薯類) 등이다. 무연탄과 고령토가 생산된다.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는 경전선(慶全線) 철도의 이양역과 송정역이 있으며, 보성군 복내면과

장흥군 장동면(長東面)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있다. 

 

문화재로는 쌍봉사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국보 57), 쌍봉사 철감선사탑비(보물 170), 쌍봉사 대웅전(보물 163),

쌍봉사 극락전(문화재자료 66), 쌍봉사(雙峰寺), 송석정(松石亭), 김인갑·김시엽 충신각(金仁甲金時燁忠臣閣), 쌍

봉사 창건비문(創建碑文), 쌍봉리 지석묘군, 양씨제각(梁氏祭閣), 양학포 신도비(梁學圃神道碑), 송정리·매정리

지석묘군 등이 있다

오늘 산행길의 전리품

고사리와 엄나물 그리고 우산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