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05.14~15(무박산행)
○ 산행날씨 :약간의 쌀쌀한 날씨이고 날씨는 무척좋음,오랫만에 조망이 끝내줌, 오후에는 무척더움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의 42명과 함께
○ 산행거리 :도상거리 : 22,2㎞ / 9시간 30분소요
○ 산행코스 :감나무재-682봉-제암산-곰재-간재-사자산-골치-삼비산-보성강발원지-일림산-413봉-아미봉
삼수마을-삼수고개-활성산-녹차밭-봇재
○ 소 재 지 :전남 장흥군 장동면, 장흥읍, 안량면 / 보성군 보성읍.웅치면 회천면
지난 주에 하도 비가 많이오고 올해 호남구간에 계속 비가오는 바람에 무척이나 걱정을 했는데다행히 날씨는 도와주는구나.
이번 한 주는 초파일에다 내가 활동하는 라이온스 클럽이 1년을마감하는 연차총회가 겹쳐있어 무척이나 바쁜 한 주였다.
그리고 스승의 날까지... 제주도에계시는 은사 선생님에게 안부도 전해야하고... 45년 전에 제 초등학교 담임을 맞으신
선생님이신데 내가 살아오는데 있어 좌표가 되어주신 분... 지난해 서울에서 뵙을때 많이 늙으셔서속이 많이 상했다.
어쩜 당신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함인가. 부디 건강하시기를...
오늘은 철쭉으로 유명한 구간을 가기위해 2구간을 먼저 건너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구간을 먼저 간단다.
명산구간이라 그런지 버스가 만차이다. 사실 정맥꾼들은 이런구간을 지독히싫어하는데 말이다.
내가 하는 직업은 토요일은 언제 유난히도 바쁘다. 라이온스 연차총회가열리는 방배동의 서울시
교육연수원에서 행사를 마치고 서둘러 사무실로 와서 마감을 끝내야 하는현장을 점검하고 부지런히
베낭을 꾸려 양재역에 가니 5분전이다. 다행히 버스가 10분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버스에 오른다.
그래도 머리는 가볍지는 않다. 객지에서 만난 30년지기의 딸 결혼식이 내일인데 산에가는범여의 맘은 편치가 않다.
매달 대엿번이나 만나는 친구한테 왕따나 당하지 않을런지...
에구 이놈의 1대간 9정맥 완주가 뭐길래... 암튼 범여는 완전히 산에 맛이갔어 ㅋㅋㅋ
오늘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초파일날 욕불식(浴佛式) - 애기 부처님 상에 향수 등을 뿌리는 일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 초파일날
애기 부처님을 모셔놓고 물을 붓는 의식을 욕불식, 관불식이라고도 한다.석가모니가 탄생하실 때
제석천 등이 하늘에서 내려와 애기 부처님을 향수로 목욕시켰다는 설에 따라 매년 4월 초파일
여러 가지로 꽃으로 장식한 법당 가운데 탄생불(애기 부처님) 상을 모셔놓고, 향수(香水),
감차(甘茶), 오색수(五色水) 등을 그 정수리에 뿌리는 법회를 관불회 또는 불생회 라고 부른다.
지난 해의 묵은 업장과 온갖 번뇌로 인해 탁해진 마음을 걷어내고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청정히 하는 욕불식을 통해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온갖 번뇌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행사다. 초파일날 범여는 관불식을
마치고 산에 오르지만 아직까지 찌든 때가 남아 있는지 머리는 무겁기만 하다
354-C지구 라이온스 연차총회
시목치(갑낭재:04:00)
도선국사의 관산 덕론기에 의하면 갑낭재(匣囊峙)는
보검출갑(寶劍出匣)의 형국(보검을 칼집에서 빼는 형국)
이라 하여 갑낭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도상에는 시목치라고 표기되어 있다. 머리 나쁜 넘은
헷갈리기만 하다. 예전에 감나무가 많아서 감나무재라고
갑낭재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변음(變音)되어 잘못
전해진 지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참고로 시목치(枾木峙)란 지명이 잘못 해석되어 전해진 유래를 살펴보면
▷ 어원은 匣囊재-匣囊谷재-갑낭골재-匣囊峙
- 지형이 匣囊之穴을 닮아서 匣囊골재가 됨
- 일설에는 전란 때 군인들의 갑옷, 칼 등이 실제 많이 흩어져 있었다 전함
▷ 잘못 전해져 쓰여진 과정
- 갑낭재>간낭재>갑낭골재>갑낭굴재>감낭골재>간낭굴재>감낭쟁이재>
감랑낭구재>감나무재>시목치(폐목치)
- 감나무재 : 뜻을 모른 채 음으로만 구전되다보니 계속 잘못 전달
- 감나무재>시목치 : 잘못 구전된 음을 다시 한역하는 과정에서 번역됨
(일제강점기 순우리말 치명을 한자로 개명하면서 시목치로 한역된 것으로 추정됨)
- 폐목치 : 시목치를 잘못 읽어 “폐목치”라 함
(肺/폐와 枾/시를 혼동 잘못 표기 - 한자음 착오 오기) (장흥군청 종합 민원실 제공)
도선국사는 “관산덕론기”에서 장흥의 61혈의 명당을 논하면서 “寶劍出匣”형의 명당을
「북쪽으로 20리에 寶劍을 칼집에서 빼는 형국이 있으니, 서북쪽에서 용이 오다가
남서간으로 기울면서 명혈이 지는데 청룡은 한가닥이고, 백호는 세가닥으로 명당을
감싸는구나, 물은 동에서 북을 경유하고 동남에 기라성 같은 봉우리가 첩첩이 세워
놓은 듯 하였으니, 정히 문신의 명예가 나실 것이고 武勇을 겸해서 陣開에 기를 세울
인물이 나올 것이다」하였다
이 명당에서 임진왜란때의 공신인 盤谷 丁景達 같은 인물이 나셨다 함
시목치(갑낭재)에 도착하니 새벽 03시 40분경이다. 오늘 버스가 바뀌면서 20분간
길을 헤매는 바람에 예정보다 조금늦게 시목치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는 하늘에
별을 촘촘하다. 바람이 꽤나 새차게 부는 바람에 날씨는 상당히 춥다. 베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입고 길을 나선다. 오늘 구간은 여태껏 걸어온 거칠고 투박한
남도길이 아닌 인위적으로 조성된 트레킹 코스나 마찬가지다. 완벽하게 조성된 이정표와
잘 관리된 도로를 보면 지난구간 화순군과 이번구간 장흥군은 처지차이다.
이번에 보궐선거로 새로 당선된 화순군수 나리님 장흥군수에게 좀 배우시길
산이란 어떻게 관리를 하시는지...
팔각정(04:15)
편안하게 조성된 길을 따라 약간의 된비알을 오른다. 바람이 불긴하나 이내
몸은 예열이 되어 더워진다. 새벽녘에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가 도시에서
일상에 찌들었던 산꾼들의 머리를 상쾌하고 하고 주위에는 철쭉들이 있긴하지만
피지 않았는지 꽃이 졌는지는 구분이 안간다. 좌측에 장동면 소재지에는 아직도
불빛이 환하다. 이곳은 동료산꾼 도리깨님의 고향이란다.
예전엔 이곳 장흥은 전남지역에서 오지중의 오지였는데 지금은 4차선 도로가 고속도로보다
더 잘되어 있는 느낌이다. 하여간 우리나라 도로 인프라 하나만큼은 참으로 잘되어 있다.
산행 15분만에 도착한 곳이 팔각정이 나타나고 로타리 클럽에서 의자를 설치하였다.
더워서 바람막이 벗고 다시 송전탑을 지나 계속해서 편안한 길을 걷는다.
망바위(04:45)
작은산(04:50)
이곳을 왜 작은산이라 부르는 연유가 궁금하다
산악시인 이 성부님이 작명을 하지는 않았겠지?
작은 산이 큰 산 가리는 것은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내 눈도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먼데서 보면 크높은 산줄기의 일렁임이
나를 부르는 은근한 손짓으로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봉우리 제 모습을 감춘다
거의 똑같은 위치에 큰산이란 또 뭔가. 장흥군은 이정표가 고맙긴 하지만 너무 많이
그것도 자세한 설명없이 설치하니 혼돈스럽다. 이런게 過猶不及이 아닐까.
보성만의 일출(05:20)
한가로운 농촌 - 보성군 웅치면의 모습
암릉구간을 타고 오르니 기분은 몽롱할 정도로 좋다.
암릉에 권 준웅님의 불망비가 보인다. 아마 이 구간에서
사고사를 당한 모양이다. 그래도 멋있다. 님에게 불망비를 세워줄 친구가 있기에...
시루봉(05:45)
장동면의 산그리메
제암산 아래
임금바위 아래가 보성군 웅치면 강산마을이다. 이곳 출신 소리꾼
박 유전은 서편제 소리에 동편제를 접목하여 또하나의 장르를 완성한다.
제(制)란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음악적 차이를 계보를 나눈 것이다.
섬진강을 기준으로 동편에 위치한 구례, 운봉(남원)지역의 굵고 우람한 소리를
동편제라고 하고 보성, 장흥지방의 가늘고 애절한 소리를 서편제라고 한다.
애(哀)가 끊어질 듯한 맺힌 소리인 서편제를 개척한 강산 박 유전은 당시
그 당시 실세인 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며 명성을 날렸으나 대원군이 실각하여
제암산 기슭의 강산(강산면 소재)으로 낙향하여 말년에 이곳 보성에서
또 하나의 소리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 강산제(江山制)이다.
그는 서편제의 애절한 소리를 젊잖은 가풍(歌風)으로 조성하여 강산제를
완성하였는데 혈육이 없었던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다만 눈오는 겨울에 출타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얼어 죽은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그의 혼백이 3일동안 밤마다 마을 뒷산에서 ‘내 소리 받아가라’
라고 외쳤다고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소리에 있어 정통 유파 동편제는 송홍록, 박록주, 강도근으로 이어지는
판소리의 원형으로 구례, 운봉, 순창 등 전라좌도에서 흥했고 반면
정통창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기술을 구사하는 서편제는 박유전,
이날치.박동순,한애순 등의 계보를 따라 전라우도에서 발생했다.
기교적이고 수식적인 기술적인 면에서 향상된 서편제는 광주, 나주,
보성의 판소리인 것이다. 이는 호남정맥길로 확연히 나눠진다.
제암산의 멋진 모습
참으로 힘들게 사는 모습이 어찌 이 범여와 똑 같구나.
그러나 어찌하리 그게 너와 나의 운명인 것을...
제암산/帝巖山(779m:05:50)
전남 장흥군 장흥흡, 안양면, 장동면, 보성군 웅치면에 있는 산인
제암산(帝岩山) 정상은 임금 제(帝)자 모양의 3층 형태로 높이
30m 정도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수십명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이 정상의 바위를 향하여 주변의 여러 바위와 주변의
봉우리들이 임금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이어 임금바위
(帝巖)이라고 부르며 이산을 제암산이라 한다고 전해진다.
제암산 정상석 뒷면 내용
정상에 서면 호남의 5대명산중 하나인 천관산, '호남의 금강' 으로 불리우는 월출산,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과 팔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암산은 남도 끝자락에 위치한데다 철쭉군락지가 해발 630 미터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5월 초순 남해의 훈풍을 받아 화려하게 피어 올라 만개한다.
제암산에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은 제암산과 사자산 사이. 제암산 정상에서 30여분 거리인
곰재에서 곰재산 오르는 능선과 곰재산 위의 산불감시초소와 여기서 사자산으로 오르는 능선 안부의
간재까지가 최대 철쭉군락지이다. 이 능선은 수만평의 너른 땅이 온통 철쭉으로 뒤덮혀 있다.
철쭉 군락지에 잡목을 제거하여 키가 작은 철쭉만 남아 있는 곰재에서 오르는 능선은 도로처럼 훤하다.
제암산 정상에서
정상에서 인증삿을 하고 내려가는 모습
제암산 삼각점
또 하나의 표지석
하나 꼴볼견은 정상에는 정상석이 두개이고
바로 밑의 전망대에 또하나의 정상석이 또하나 있다.
장흥군과 보성군이 접경지대에서 철쭉축제와 산이름을 갖고 쌈박질이나 하고 郡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산꾼을 호도하는 꼴갑떠는 것이 과연 지자체들이 할 수있는 짓거리인가...
그러고 보면 요즘 대통령이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 든다. 물론 선거때 표를 얻기위해 공약으로
제시하여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동남권 신공항, 공공기관 지방이전으로 각 지역마다
자기지역의 극에 달한 이기주의 만연, 참으로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소인배적인 이기주의
참으로 한심스럽다.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동서남북으로 갈기갈기 찌어진 민심 과연
어떡게 수습할 것인가?. 아마 부처님이 와도 안될듯 싶다. 대승적 차원에서 남을 배려하고
나를 낮추면서 상생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조그만 산에서 조차 이 짓이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정말 나에게 남을 맞추라고 하지말고 내가 남에게 맞추어 살아볼 의향은 없으신지?
제암산 헬기장에서 비박하는 산꾼들...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제암산 능선에서 바라본 장흥읍
서울 광화문에서 북쪽으로 중강진, 동쪽으로 정동진이 있다면 남쪽으로
정남진이 있다. 그 정남진이 오늘 걷고 있는 이곳 장흥이라고 한다
정확한 좌표는 경위(126°59′04″)
장흥은 예로부터 그리 알려지진 않았고 산의 면적이 군 전체의 68%에 달할
정도로 오지안 걸 보면 아마 내고향 의령만큼이나 오지인 것 같다.
우리가 걷고 있는 장동면과 장흥읍, 안량면그러나 한때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고려초만 해도 장흥은 일개 현에 지나지 않았거나 이웃의 보성이나 영암에 병합되어 있었으나
고려 17대 왕인 인종(1129년) 때 와서 인종비가 장흥군 관산면 출신이었는데
인종비는 무신정권 밑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했던 의종, 명종, 신종을 비롯하여
왕자 5명과 공주 3명을 낳았다. 그 공으로 일개 현(縣)에 불과하던 장흥이
장흥부로 승격하였다. 그 후 조선 고종때(1895년) 장흥군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르는데 현재 3개읍 7개면의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장흥(長興)지역의 인물로는 국문학사에 기행가사(紀行歌辭)의 효시를 남긴 가사문학의 효시자
돌탑에 돌하나를 얹어놓으며 나의 소원을 빌어보고...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철쭉 군락지에 철쭉은 지난 겨울 강추위로 인해 철쭉이
아름답지가 못하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제암산 형제바위(06:10)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형제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단란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해 아버지가
앓아눕게 되었고, 흉년까지 겹쳤다. 형제는 제암산으로 산나물을 캐러 갔다가 동생이 험한
산길에 미끌어졌는데 형이 아우를 구하려고 손을 내밀다가 함께 떨어져 죽었다.
동네사람들이 시신을 발견하고 양지녘에 묻어주었는데 며칠 후 형제가 죽은 장소에 새로운 바위가
솟아났다.그 모양이 죽은 형제의 다정한 모습과 너무 닮아 ‘형제바위’라고 불렀으며,
그 이후 제암산에 나물을 캐러 다니다 사람들이 다친일이 없다고 한다.
곰재(熊峙:06:40)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와 장흥군 장흥읍 금산리를 잇는 고개이다.
동학혁명 막판에 관군에게 쫒기던 동학군이 이곳에서 무수한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천지개벽을 원했던 東學軍이 전주성에서 패하고 관군에 쫓겨
넘었다던 곰재의 철죽은 봉오리가 피려다 사그러진 동학군의 섧은 피울음이던가?,,,,,,
이곳 곰재(熊峙)에서 부터 614봉(곰재산)을 넘어 사자산으로 뻗어나가는
철쭉 군락지인 철쭉평원. 그 넓이는 참으로 엄청나고 광대하다.
특히 이 모든 철쭉들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자생종이라고 한다.
제암산에서 고도를 많이 낮췄다.
왼쪽이 보성군 웅치면(熊峙面)인데, 웅치가 곧 곰재다.
등산안내도에 장흥쪽만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마 장흥군에서
설치하여 그런 것 같은데 국경표시도 아니고 지자체들끼리
공동으로 개발하면 더 좋을텐데.. 씁쓸하다. 참으로 소인배적인 생각이다.
곰재에서 철쭉 평원가는 길은 이처럼 철쭉 터널을 지나간다.
이제 서서히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평소에 자기 산악회 이외에는
만나지 못하는 정맥길에 다른 산꾼들을 만나니 어색해진다.
조금 오르니 탱크님과 고문님들이 계시고 이내 동반하여 부드러운 육산을 걷는다.
도 강재 대장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 철쭉은 실망 그 자체다.
그러나 어차피 가야할 정맥길... 그래 가자
철쭉평원(06:50)
장흥군에서 철쭉축제를 하기위해 많은 돈을 들여 제단을 만들고 터도 닦아놨는데
정맥산꾼들 보기는 별로 좋지 않다. 산은 있는 그대로가 가장 멋진 모습이 아닐까
간재(07:10)
보성군 웅치면과 장흥군 안량면을 잇는 고개이다
간재에서 바라본 사자산 간재봉
이곳 장흥지방에는 위씨가 참으로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많았으면 “장흥에서 사람 셋이 모이면 그중에 한 사람이 魏氏”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실학자였던 관산읍 방촌리 출신인
위백규 선생을 꼽을 수 있다.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벼슬도 하지 않았던 한낱
시골 농사꾼에 불과한 그가 어느 실학자 못지 않았다고 한다.
흔히 실학이라고 하면 다산 정약용을 꼽는데 그야 높은 벼슬을 하다 해남으로
귀양을 와서 그렇지만 위백규 선생은 시골에서 대단한 안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몽고족의 침입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인 고려후기
사회의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다 간 원감국사 충지선사도
속성은 위씨이며 속명은 원개이다. 그밖에도 요즘 미국에서 골프 천재라고
불리는 미셜 위도 이곳 장흥 출신이다.
내가 지나온 능선
이제 제암산도 자꾸만 멀어져 간다.
오늘 산행은 우측으로 장동면과 장흥읍, 안량면을 끼고 좌측에 웅치면을
축으로 하여 원형으로 돌아가는 구조이다. 하루종일 웅치면을 보면서 걷는 구조이다
웅치면의 전경
바로 아래 대산 저수지가 보이고 저 너머 보성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자산(獅子山:660m:07:35)
장흥땅을 바라보는 사자산은 제암산, 억불산과 함께 장흥 3산으로 유명하다. 사자두봉(560m)에서
정상을 거쳐 남쪽으로 뻗는 주능선의 형상이 사자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과 같다하여
사자앙천형(獅子仰天型)의 산으로 표기한다.
남서쪽으로 향하던 호남정맥길은 사자산에서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향한다. 봄이면 파릇한 생명의 신비함을 느끼게 하고
여름이면 산등성이가 짙은 녹음으로 우거지며 강렬한 인상을 주고 가을이면
산능선에 억새가 날리며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사자와 같은 느낌을 주는
산이라고 한다.
장흥읍을 지키는 스핑크스와도 같은 모습의 사자산은 일제 때 장흥에 살던
일본인들은 일본의 후지 산(富士山)과 닮았다 하여 ‘장흥 후지산’이라 부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장흥읍에서 우뚝 솟구쳐 올라 한라산 산록의 초원지대를 연상케 하는 사자산은
봄이면 파릇한 기운이 스며들면서 진홍빛 철쭉과 함께 아름다운 생명의 신비함을
느끼게 하고, 여름이면 산등성이가 짙푸른 푸른 초원으로 덮이면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가, 가을이면 산등성이에 억새밭으로 이어지면서 억세꽃이 날리면서
오히려 더욱 찬란한 빛을 띤다. 그리고 겨울철 흰 눈이 등성이에 쌓이면
황야를 쓸쓸하게 걸어가는 한 마리 사자 같은 인상을 주는 등 철따라
다양하고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산이다.
즐거운 아침식사(07:40 ~ 08:15)
힘들게 올라온 사자산 간재봉에서 아침상을 펼친다.
오늘은 낙지찌게와 고등어 조림까지 가져오신 낡은 모자님과 여기저기
베낭에서 나온 음식들이 진수성찬이다. 거기다가 아침부터 주종불문에
마셔대는 산꾼들은 아침식사가 자장 즐거운 시간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소주에다 막걸리 종류만 해도 4가지다 즐거운 아침만찬에 포만감을
즐기고 다시 길을 나서니 날씨가 무척이나 덥다 하는 수 없이 반팔로 갈아입고 길을 나선다.
사자산 정상능선에서
장흥읍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사자산 두봉(頭峰)의 모습
561.7봉(은신봉:08:40)
561.7봉에서 여유로운 아침만찬으로 포만감을 느끼고 길을 떠나니 참으로 힘이든다.
암릉구간에서 바라보는 장흥땅의 산그리메와 보성만의 아침은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이다. 정맥산행에서 이런 장면을 보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잠시후 급경사에 데크목으로 설치한 계단으로 내려오니 땀이 쏟아진다.
중간에서 상의를 얇은 티로 갈아입고 길을 나선다. 잠시 후 휴양림 삼거리를 지나
다시 임도로 들어서다. 숨이 차면서 치고 오르니 561봉을 ‘서래야 박건석’님 은신봉
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코팅지로 걸어놨다.
골치재(09:05)
순 우리말로 머릿재라고 한다.
이곳은 보성군 웅치면의 기름진 쌀과 장흥군 안량면 해안에서 잡은
수산물이 서로 만나 오고가던 고개가 이곳 골치라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웅치에서 생산된 쌀을 대동아 전쟁터로 보내기 위해
수문포로 보내기 위해 이곳을 넘었다고 한다.
골치산 (614m:09:30)
골치재에서 조금 힘들게 올라오니 골치산 정상(작은봉)이란 푯말이 있다.
여기서 부터 일림산이 가까워지니 제암산 휴양림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꽤나
보이기 시작한다. 날씨는 완전 초여름 날씨이다. 반팔을 입은 자국에 빨갛게
살갗이 타기 시작한다.
큰봉우리(09:40)
일림산 바로 아래에 큰봉우리라는 팻말이 있고 나무계단을 타고 일림산을 오르는데
사람들이 인산인해이다. 아마 오늘 철쭉나들이를 나온 모양인데 일반 등산객들은
오늘 철쭉을 보고 상당히 실망했으리라 생각이 들겠다. 잠시 후 정상에 도착한다.
일림산 정상 가는 길
일림산(667m:09:50)
일림산 & 삼비산은 전남 보성군 웅치면 용반리, 대산리, 회천면 봉강리와 장흥군 안양면
학송리와 경계에 위치한 호남정맥 중 가장 남녘에서 기운차게 우뚝 솟아 백두기운을 다시
북으로 돌리는 산으로 보성군에서는 일림산, 장흥군에서는 삼비산이라 부른다.
삼비산(三妃山)은 옥황상제의 세 황비가 모여 물마시고 놀았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에서 세 황비가 내려왔다고 해서 천비산(天妃山),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고
해서 샘비산(또는 泉妃山), 안개가 늘 자욱하게 낀다고 해서 현무산(玄霧山) 등으로도 불렸다.
이 산은 지도와 관광 안내 책자 등에 일림산으로 나와 있으나 보성군과 장흥군의 주장은 서로 다르다.
보성군에서는 일림산, 장흥군에서는 삼비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삼비산이 맞는 이름이라는 것이
인근 주민들과 전문 산악인들의 견해다. 그나마 지도에 표기된 위치도 잘못되었다.
지도상의 정상(627m)에서 서남쪽으로 1.3㎞ 남짓 떨어진 곳이 실제 정상(667.5m)이다.
애초에는 산정에 삼비산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으나 보성군에서 산을 개발하며 삼비산 정상석을
쓰러뜨려버리고 새로 일림산 표지석을 세우며 두 지자체간 다툼이 있었으나
현재 산정에는 일림산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2000년부터 개발된 철쭉은 100ha 이상으로 전국최대의 철쭉군락지를 자랑하며, 제암산과
사자산으로 연결되는 철쭉군락지의 길이는 12.4㎞에 달한다.
철쭉의 특징은 어른 키만큼 크고, 매서운 해풍을 맞고 자라 철쭉꽃이 붉고 선명하다.
북으로 사자산(미봉), 제암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능선들 모두 철쭉군락지로 산행은
제암산 또는 그 반대인 한치에서 일림산/삼비산을 올라 사자산, 제암산에 이르는 코스가
철쭉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코스이고, 철쭉의 만개시기는 5월 5-10일 전후이나 해마다
이른 봄 한파의 영향으로 약간씩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일림산 정상석 앞에는 묘지하나가 덩그러니 있는데 참으로 안쓰럽기만 하다.
자리로 봤으는 명당자리가 틀림없으련만... 지금은 산 자들의 시끄러움에 번잡하여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을 지경이다.
봉수대 삼거리에서 바라본 일림산 정상
봉수대 삼거리(10:00)
일림산을 조망하고 우측으로 보성만을 바라보고 내려오니 봉수대 삼거리가 나오고
먼저 도착한 낡은모자님과 정문교님이 갈비살을 구워놓고 산상주막을 벌이고 있다.
참새가 그낭 지나지 않는 법 베낭에서 막걸리 2병을 꺼내 즉석에서 찬조를 한다.
맛잇게 먹고 일어나니 동료산꾼들은 다들 도망가 버리고 졸지에 후미가 되어 버렸다.
일림산 아래
유순한 산의 지세만큼이나 문화적으로 풍요한 곳이 일림산 기슭의 마을이다.
저 아래에 보이는 도강마을과 영천마을이 서편제의 본향(本鄕)으로 명창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서편제는 남성적인 판소리인 동편제와는 달리 한맺인
여성적인 소리로 평가된다. 소리꾼들은 득음을 위해 피를 토하면서 훈련하는
곳으로 알려진 흑운계곡, 득음폭포가 있는 영천은 보성소리를 대표하는
명창 정 응민의 고향이다. 그는 이곳 태생으로 국창자리까지 오른 매스컴을
통해 많이 알려졌던 조 상현씨를 비롯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일림산을 바라보며 도착한 곳이 봉강 삼거리다.
아이스케키 장사가 소리를 지르며 아이스케키를 판다. 한개에 1500원
땅값 비싼 서울의 산에도 1000원인데 1500원이라니 안 먹는다.
여기서 좌측으로 200m 지점에 보성강 발원지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이정표에는 200m라고 써 있는데 500m는 족히 내려오니
후미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무조건 내려갔다. 보성강 발원지가 나타난다.
보성강 발원지
봉강 사거리에서 500m 떨어진 일림산 중턱 해발 540m에 위치한 보성강 발원지를 들린다.
보성군 웅치면 용반리에 위치한 발원지는 용추폭포의 기암괴석을 타고 내려와
웅치면의 들녘과 장흥군 장평면을 돌고 돌아 보성군 노동면, 보성면, 미력면을 거쳐서
보성강댐에 도착한다. 이후에는 보성군의 중심지를 가로질러 겸백면, 율어면, 복내면
문덕면을 지나 주암댐으로 흘러들어 곡성군의 압록에서 300여리의 긴 여정을 거쳐
섬진강의 본류와 합류하여 경남 하동을 거쳐 남해로 흘러든다.
보성강이 흘러드는 주암댐은 광주. 전남의 식수와 생활용수, 농업,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생명의 젖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논란의 장소 626.8봉(10:50)
국립지리원 발행 1:25,000 지형도에는 일림산(664.2)으로, 1:50,000의 지형도에는
삼비산(664.2) 그리고 북동쪽에 솟은 이곳 626.8m 봉이 일림산으로 표기되어
있어 혼선을 빗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성군이 일림산 해발 664.2m에 거대한
정상석 664.2정상에 올려놓음(현재 정상석엔 667.5m로 되어 있음)으로써 양쪽군민의
논란이 되었다. 보성군과 장흥군 사이에 다툼이 있어 2006년 7월18일
국토지리정보원은 일림산으로 산 지명을 확정 지었는데 지금도 장흥군에서는
일림산을 삼비산이라 소개하고 있어 등산객에게 혼선을 주고 있다.
가야할 마루금 능선
보성강 발원지에서 거리 좀 줄여볼 요량으로 잔머리를 굴린다.
맨 마지막이라 동료 산꾼들을 따라 잡기 위해선 샛길밖에 없다.
그래서 중간에 샛길로 들어서는데 길은 없고 억새와 찰쭉, 가시넝쿨을
헤치며 100m 정도를 헤치는데 15분이상이 소요된다. 다시 포기하고
되돌아 오니 시간만 20분 이상 허비한다. 내리막을 내려오는데 일반
등산객이 미어터지게 올라온다. 한치재에서 일림산 철쭉을 보러가는
산꾼들 땜에 산행 속도를 낼수가 없고 괜히 맘만 급해진다.
아미봉(413m:11:40)
올라오는 등산객들은 가족단위도 있고, 경상도, 전라도 인천등지에서
단체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많다. 자꾸만 시간이 지체가 된다.
물도 한모금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죽을뚱 살뚱 하며 도착한 아미봉.
여기에 아리송 아우가 보인다. 여기서 물한모금 마시고 5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우측 한치재 주차장에서 등산객은 계속해서 올라온다. 이젠 우린 정맥길이
좌측으로 90도 꺽어져 호젓한 길로 접어든다( 이곳 알바조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직진 코스는 정맥길이 아니고 한치재 가는길임
아미봉에서 삼수마을 가는 길은 급경사에 길이 없다. 그리고 그 흔한 꼬리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에 내려오니 대밭이 나타나고 우측에 인공조림된 편백나무 숲이 나타나고 임도를 거쳐
삼수마을 앞 지방도에 도착한다.
삼수마을 (12:00)
섬진강의 원천지인 비래천(飛來川)과 상진천(上眞川)과 하진천(下眞川)을
합쳐 삼수라고 한다. 895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이곳은 호남정맥이 꺽이는
이 지점에 정맥을 울타리 삼아 들어 앉아있는 동네이름이 삼수(三水)마을이다.
보성강과 작은 두개의 개울을 가르는 지역이다.
삼수마을 전경
삼수마을 정자(12:10)
지방도에서 아스팔트 길을 따라 삼수마을 정자에 도착하니 이곳에서
포기하고 쉬는 산꾼들이 있다. 물한모금 마시고 베낭을 버스에 두고
물만 가지고 다시 삼수고개로 나선다. 아스팔트에서 나오는 열기로 얼굴이 화끈 거린다.
삼수고개(12:20)
다시 임도에 접어든다. 자꾸 다리가 풀리고 새벽 버스 손잡이에 부딪힌 갈비뼈가
아프면서 통증이 심해진다. 다행인게 임도길이라 편안하긴 하지만...
임도에는 오랫동안 인적이 드문 탓인지 야생화가 즐비하고 엉컹키가 많이 보인다.
우측의 편백나무 숲에서 뿜어나오는 피톤치드향은 피곤함을 줄여주는 느낌이다.
임도를 끝나 다시 마루금에 접어드는데 피곤함이 몰려와 휴식을 취한다.
잠시 후에 한치재로 잘못가서 알바를 한 동료산꾼 3명이 씩씩거리며 온다.
그래 알바도 산행의 일부이며 수행이라 하지 않았던가 너무 섭해하지 마시게나...
체력이 서서히 바닥을 보인다. 활성산 오름길은 너무도 힘이든다.
그래 어차피 피하지 못하거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오르자.
활성산(465.2m :13:00)
학성산(鶴成山)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古山子 선생이 쓴 대동여지도에는
몽중산(夢中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활성산에 오르자 그 아래 녹차밭이 보이고 저 너머에는 득량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낡은모자님이 또 산상주막을 편다. 새벽에 부딪힌 옆구리의 통증은 자꾸만 심해지고...
저 아래는 동료 산꾼들이 무리지어 지나간다. 서둘러 따라 붙인다.
후미 산꾼들에게 배신자 소릴 들어면서 말이다.
차(茶)의 고장 보성(寶成)
보성군 차의 재배 역사는 서기 369년(근초고왕)에 복흘군(보성군)이 마한에서
백제에 통합되면서 차를 이용되었다는 기록들이 보성군사(寶成郡史) 등에
전해진 것으로 보아 보성군의 차의 역사는 1600여년 전으로 보인다.
보성이 차의 재배에 최적지로 알려짐에 따라 1930년 후반부터 농.특사업의
일환으로 차가 확대재배 되어 지금은 전국의 차 재배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차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신라 선덕여왕 시절이고
널리 퍼지기 시작한 시기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 사신으로
갓던 김 대렴이 차 씨를 가지고 와서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은 후부터라고 한다.
이때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영남의 하동과 호남의 광양, 보성 등이
차 재배지가 되면서 차가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 문화는 그 당시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주로 선승(禪僧)들에 의해
다도(茶道)가 발달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왕실이나 귀족들 사이에 차 마시는
습관이 널리 퍼졌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해 생활이 생활이
검소해짐에 다도가 쇠퇴하여 선승들에 의해 명맥만 유지되었다.
조선 말기에 해남 대흥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리웠던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 그리고 다산 정 약용과 추사 김 정희 같은 분들이
한국 차 문화에 일조를 한 분들이다.
차의 이름도 다양해 찻잎이 참새 혓바닥같이 생겼다고 하여 ‘작설차’ 대밭에 이슬을
먹고 자랐다고 해서 ‘죽로차’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끓이면 푸른 색이 돈다고 해서
‘록차’라고 부르는 차는 이곳 보성지방에 대량생산이 되는데 ‘설록차’를 이 지역명을
따서 보성녹차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차 생산지에는 일본자본이 상당히
많이 투자되어 있다고 한다.
녹차 재배단지
일림산은 보성일원이 우리나라 최대의 녹차단지이다. 맥반석 지질에 해양성 기후와
내륙성 기후가 만나 늘 습한 기운이 유지되어 차가 자라는데 최적이 조건을 유지한다.
이 일대에서 생산되는 녹차는 전국 생산량의 40%를 차지한다고 한다.
녹차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항산화물질 폴리페놀은 항암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유방암과 폐암 등 몇가지 질병의 진행을 방지해 주는 효과가 있고 파킨슨 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 곳에 가장 큰 대한다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녹차밭이다.
일제시대에 조성된 가장 큰 녹차밭이다. 정맥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이번에
가보지는 못햇으나 몇년전에 보림사와 송광사 성지순례길에 들렸을 땐
별것도 아닌데 가는 곳곳마다 입장료를 비롯한 돈,돈, 돈하는 상업적인 마케팅에
조금은 기분은 안좋더이다.
雪花雲 爭芳烈하고 雙井日注喧江浙이라
建陽丹山碧水鄕에 品製特尊雲澗月이로다
설화차 운유차 짙은 향기 다투고
쌍정차 일주차는 강절에서 이름 높다
건양 단산 물푸른 고을에서
만들어진 운간차 월감차 질도 좋아라
오늘의 날머리인 봇재다원(13:40)
녹차밭을 지마 부드러운 육산을 걷는다. 우리 산행대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측에 있는 당신의 닉인 도강재가 바로 아래란다. 그래 함가보자고 하니
별로 볼것도 없다면서 손사래를 친다. 잠시 임도가 나타나고 녹차밭이 정맥길을
잘라버려 할 수 없이 임도로 우회하여 내려온다. 차밭에는 지난 겨울 강추위로
인해 녹차나무가 많이 얼어죽어 볼품 사납게 되었으나 그래도 차 수확하는
아낙네들의 손길은 바삐 움직인다. 지금 따는 차는 맨 처음 따는 차라고 하여
세작이라 하며 가격도 가장 비싸게 받는다(대체로 양력 5월2일에서 9일사이 따는 차)
차밭을 끼고 내려오니 갑자기 길이 없고 백구 2마리가 계속 짖어댄다.
봇재가든 마당을 거쳐서 내려오니 우리의 애마가 기다린다.
공동 화장실에 들어가서 홀라당 벗고 사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쿨하다.
잠시후 도강재 대장이 이곳 자기 나와바리구역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한턱 쏜다고
버스를 타고 보성군 미력면 파출소옆 “미력양탕”집으로 안내한다.
봇재
보성읍 봉산리와 보성군 회천면 군농리의 경계재 18, 77번 국도 4차선 포장도로로 순천과 목포를 잇는 도로이다.
미력양탕집
미력면 파출소 옆에 있는 양탕 전문점에 갔다. 처음에 양탕이라해서
양고기인 줄 알았는데 검은 염소고기란다. 남도 특유의 깔끔한 밑반찬에
탕이 나오는데 참으로 먹을 만하다. 한가지 흠이라면 양이 너무 많다.
음식은 모자랄 정도로 먹어야 맛이 있는데 말이다. 이곳이 양고기
전문점이 많다. 코딱지만한 동네에 여기저기가 여기저기가 양탕집이다.
도대장님! 허리가 좀 휘청하겠소... 쏠때는 말이요 인원이 적을때 쏘야지
42명이나 올때 쏘면 살림이 좀 휘청할 텐디... 암튼 잘 먹었소이다. 복 받을겨
양탕의 효능에 대한 설명
정말 맛있게 먹은 양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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