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06.04~05(무박 산행)
○ 산행날씨 : 안개가 심함, 낮에는 맑은 날씨이나 박무, 엄청나게 더웠음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28명의 회원들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16.2㎞ G.P.S 거리:19.5 km+어프로치 2km포함 / 8시간15소요
○ 산행코스 : 예재-온수산-시리산-봉화산-추동재-가위재-고비산-397.3봉(덕암산)-방화선-큰덕골재-군치산
뗏재-숫개봉-봉미산-곰치(熊峙)
○ 소 재 지 : 전남 화순군 이양면, 청풍면,/ 보성군 노동면 / 장흥군 장평면
호국의 달 6월이면 늘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는 힘들게 오직 조국만을 위해 살다가신
그 분들에게 늘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사는데 최근들어 국가의 시스템이 무너져
가는 느낌에 그 분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사죄해야 할 지...
작금에 일어난 저축은행 사태에서 본 공직자들의 윤리의식, 그리고 높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 과연 어떡게 해야 할것인가. 민초들은 시장바닥에서 한푼, 두푼
정말 어렵게 번 돈을 이자 몇 푼 더 받겠다고 저축은행에 예금한 돈을 社主라는 자들은
마치 자기 지갑 돈쓰듯 마구 써 버리고 , 그것을 감독해야 할 금감원은 뇌물 쳐받아먹고
비리를 무마해 주고... 그곳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 감사위원이란 자는 대통령 측근이란
걸 이용해 뇌물에다 물방울 다이아라는것 까지 받질 않나... 거기다가 돈 냄새 잘 맡는
국회의원이란 자들까지... 참으로 이 나라의 고위층이란 자들의 윤리의식 알만하다.
대통령님 어케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에 이렇게 썩은 인사들 말고는 쓸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고.소.영이라는 단어와 회전문 인사란 좀 안들으시고 사람 좀 쓸수 없나요.
대선때 도움을 줬다고 보은차원에서 인사를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나룻배는 강을 건널때 필요한 것이지 강을 건너고 산에 오를땐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읍참마속(泣斬馬謖) 으로 주위 인사를 다스렸으면 합니다
제발이지 국민을 무서워하고 국민을 섬기면 민초들의 고난을 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젠 사계절이 없어지는 모양이다. 얼마전에는 추워서 힘이들었는데 봄이 간다는 소식도 없이
가버리고 이젠 초여름 날씨이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는 해운대 해수욕장 개장을
한달이나 앞당기는 역할을 한다. 무더운 날씨에 토욜 하루종일 업무차 차를 타고 다녔니만
상당히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남도길을 오늘도 향한다. 차에 오르자마자 잠에 떨어지는데
3일간의 연휴라 고속도로가 심야에도 밀리는지 버스는 가다가 서다가를 반복하는 바람에
비몽사몽으로 피로도가 더하는 느낌이다. 2번째 휴게소인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휴게소에서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다. 버스는 광주 I.C를 벗어나 광주시내를 지난다.
藝鄕 광주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광주도심고속도로를 지나 너릿재를 넘어 화순으로
향한다. 예전에 화순에서 광주로 넘어올 때 참으로 힘이 들었는데 지금은 예전에 비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느낌이다. 10여전에 운주사 가는 길에 참으로 힘이 들었는데...
버스는 거침없이 달려 노동면 신기 삼거리에서 멈춘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전남 보성군 노동면 신기리 삼거리(04:15)
화순 읍내를 빠져나와 버스는 예재를 향한다. 이곳은 그 옛날에 장흥가는 길은
천하 오지였겄만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느낌이 들 정도로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어져 있다. 잠시후 이양면 소재지를 지나서 에재 터널을 지나
신기 삼거리에 세워준다. 버스에서 내리니 새벽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듯이 하늘은 깨끗하다. 맑은공기에 코가 뻥 뚫리는 이 상쾌한 기분!
잠시 후 도강재 대장님의 구령에 따라 인원을 파악하고 2km에 가까운
콘크리트 임도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지난구간에 예재에서 내려올 때는
트럭을 타고 내려와 몰랐는데 꽤나 먼 거리이다. 잠시 후 몸은 예열이 되건만
이상하게 오늘은 베낭의 무게를 느낄 정도로 피로도가 빨리온다.
오름길 주위에는 양봉업자들이 아카시아꿀을 채취하기 갖다논 벌통들이
잔뜩 있고 25분만에 예재 들머리에 도착하여 물한모금 마시며 숨을 내쉰다.
예재(04:40)
화순 이양면에서 보성 노동면으로 넘어가자면 구불구불 구절양장으로 휘감아 오르는 '예재'를 넘게 된다.
지금은 산 아래로 터널이 뚫려 고개는 차량통행이 끊기고 자연히 인적도 끊겨 마구 자란 수풀이
도로를 넘보는데, 간혹 정맥길을 걷는 산꾼이나 아까시꽃,밤꽃을 찾아 이동하는
양봉업자들만이 이 고개를 이용할 뿐이다.
예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왜군에게 대승한 곳이라 하여 '왜치'라 불렀는데,
나중에 그 음이 변하여 '예재'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왜치보다는 예재가 부르기 쉽고 어감도 좋긴 하지만,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화순의 의병들의 충정을 생각한다면
그 이름을 다시 왜치라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곳 화순은 내 고향 경남 의령처럼 충절의 고장과 의병의 고장을내세우는 점에 닮은 점이 많다.
의령에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있었다면이곳 화순에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의 명장인 崔慶會(최경회) 장군이 있다.
최 경회 장군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왜적들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10만대군으로 진주성을 공략하려는데 고작 4천명의 관군으로 9주간
주.야를 처절하게 저항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로 이곳 화순 능주 출신이다.
진주성이 함락된 후 촉석루에서 왜군장수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 안고
푸른 남강물에 몸을 내던진 논개가 바로 최경회장군의 소실이다.
예재(고치)는 화순과 보성을 잇는 중요한 고개였는데 지금은 터널이 생겨 차량이 다니지
않는 도로가 되었다. 옛적에 공원이었는지 고개 마루는 상당히 넓다.
예재 들머리
약 2km에 걸친 콘크리트 임도를 올라서 예재에 도착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고 물한모금 마시고
들머리에 접어든다. 초반부터 빡세게 오름길에 오르는데 산 아래와는 달리 짙은 안개와 거미줄이
산꾼을 괴롭힌다. 거기다가 관리되지 않은 잔나무와 풀들이 거추장 스럽기만 하다.
산행 15분만에 도착한 온수산... 아무런 표식도 없다. 동료 산꾼들은 다들 무심코 그냥 지나간다.
돌무덤이 조그맣게 솟아있는데 그것마져도 가시넝쿨들이 뒤덮혀 있어 분간조차 힘이든다.
하지가 가까운 탓이지 날은 완전히 밝아졌지만 짙은 안개와 숲 때문에 마루금은 아직 어둡기만 하다.
온수산(溫水山:04:55))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50000분의 1 지도에는 없지만 25,000의 1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는 온수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무심코 지나가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봉우리다. 예전에 이곳에서 따뜻한 물이 나왔다고 해서 온수산이라고
불렀다는데 지금은 그런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혹 이 근방에 있는 건 아닐까?
이 지역이 도리깨님 나와바리 구역이니 혹 함 물어봐야겠다.
요즘 할일도 없는데 이곳에서 온천이라도 발견하면 대박이 아닌감 ㅋㅋㅋ
시리산(465.3m:05:20)
시리산은 산의 형국이 시루같다하여 시루산으로 부르던 것이 후에
음이 변하여 시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자로는 '甑山(증산)'이라 기록한다.
烽火山(해발465.3m:05:30)
옛날에 이곳에 봉화대가 있어서 봉화산이라고 불렸다는데 지금은
봉화대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만 헬기장처럼 넓은 공터만 있어서
이곳이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구나 할 정도로 感만 잡을 뿐이다.
정상엔 잡목과 굵은 참나무가 서 있다. 스텐 강판으로 봉화산임을 표시해 두어서
봉화산인 줄 알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갈 곳이다.
이젠 서서히 박무(薄霧)로 바뀌고...
짙은 안개가 이젠 서서히 옅은 안개로 변하면서 주위 사물이 조금씩 식별이 가능하다.
사실이지 호남정맥구간 중 돗재에서 다음구간인 갑낭재까지는 별로 볼것도 없는 무의한 곳이다.
그렇다고 정맥꾼은 산은 골라서만 가는 것도 아니고 가고싶을 때만 가는 것도 아니다.
생활처럼 일상처럼 습관처럼 그렇게 늘상 그곳을 지나가야하는 것이다.
번잡한 명산보다는 범여는 이런곳이 훨씬 더 좋은것 같다. 꾸미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
장흥군과 화순군은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이웃 郡이지만 산에 오르면 확연히
다르다. 장흥군은 산이며 峰이며 곳곳마다 이정표를 세워 산꾼에게 세심한
배려를 하지만 화순군의 산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어 마치 庶子 취급을 한다.
화순군은 군수들이 툭하면 뇌물 스캔들로 호텔(?)로 드나드는 바람에 정맥길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이번에 새로 군수나리로 임명되시느 분은 제발 산에 관심을 좀 가지시길...
정보가 없으시면 이웃에 있는 장흥군에 함 물어보시길... 장흥군이 산에 쏟는 정성으로
지역에 얻는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를...
추동재(楸洞峙:05:50)
'가래나무 楸'자를 써는데 옛날 이 고개에 가래나무가 많아 그런 이름을 얻었다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가래나무는 보이질 않고 참나무만 무성하다.
저 아래의 남쪽의 장평천, 임천천은 보성강 물줄기 따라
주암호에 한번 갇혔다가 곡성 오곡면의 압록 유원지에서 섬진강과 합류하여
광양만으로 빠져들고 북쪽의 청풍천은 지석천~영산강 물줄기따라 목포만으로 흘러든다고 한다.
가위재(06:30)
화순군 연화리와 장흥군 진산리를 잇는 고개이다. 4륜 찦차가 다닐 정도로 넓은 임도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도 교통의 발달로 인해 자꾸만 옛날 民草들이 걸었던 호젓한 정경들이
퇴색해 가는 느낌이다. 조금 오르니 가위재란 이정표가 있고 빡세게 치고 오르니 고비산이 나온다.
고비산(高飛山:해발422m:06:50)
산의 모양이 높고 날아가는 형상이라 붙은 이름이라는데 어째 이 산은 너무 밋밋한
것이 별로 어울리질 넓는 공간이지만 삼각점도 없고 잡목에 억새에 모르겠다.
이곳에서 인증 샷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뭣이 그리 급한지...
전생의 웬수?
고비산 내림길에 바위와 나무가 붙어있다. 전생의 웬수였나 아님 죽고 못사는 연인사이였나?
그래 그렇게 사는것도 인연인것을...
여태껏 잡목과 거미줄의 치열했던 전투가 끝난다. 넓은 방화선 구간이 나타난다.
방화선 임도가 나타나고 편안한 산행길이 시작된다. 주위에는 이름모를 야생화가
지천으로 깔려있고 고사리도 꽤나 많이 보인다. 여성 산꾼들은 고사리 채취에 여념이 없다.
397.4봉(07:10)
방화선 구간이 갑자기 없어졌다. 그리고 나타난 곳이 397.4봉에 지도상에도 없는
덕암산이란 표식이 붙어있다. 무명봉에 이름을 지어준 것은 좋다마는 그 의미도
설명해놨으면 좋으련만... 다시 고도를 낮추어 내려간다. 방화선이 갑자기 사라졌다.
방화선이 관리가 되지 않은 탓에 소나무와 잡목들이 점령해버려 방화선이 아닌
불쏘시개선으로 바뀌었고 거기다가 도저히 산행을 진행하기 힘이 들 정도로
잡목들이 꽉 차있다. 사실 이것은 직무유기가 아닌가... 컬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당시 개척자 정신으로 가듯이 산꾼들도 개척자 정신으로 힘들게 산행을 한다.
청미래덩굴
이명 : 망개나무, 명감나무, 명감, 좀청미래, 매발톱가시, 섬명감나무, 종가시나무, 좀명감나무, 청열매덤불, 팔청미래
학명 : Smilax china L.
영명 : Wild Smilax, China Root
분류 : 외떡잎식물 백합목 백합과의 낙엽 덩굴식물.
분포 ; 중부 이남의 산야 표고 1,600m이하의 양지에서 자생하고 일본과 중국에도 분포한다.
크기 : 길이가 3m정도까지 자란다.
꽃 : 꽃은 이가화로서 5월에 피며 황록색이고 산형화서는 엽액에 달리며 화경은 길이 15-30mm, 소화경은
길이 1cm정도이다. 화피열편은 6개로서 긴 타원형이고 뒤로 말리며 6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있고 자방은
긴 타원형으로서 3실이며 끝이 3개로 갈라진다.
용도 : 열매는 식용하며 어린 순은 나물로 먹는다. 뿌리를 이뇨 ·해독 ·거풍 등의 효능이 있어
관절염 요통 ·종기 등에 사용한다.
방화선이 이렇게 변해 버렸다. 참으로 힘들게 산행을 한다.
아침만찬(07:30~08:00)
오늘은 인원이 적은 탓에 오랫만에 단체로 아침식사를 한다. 정맥산행길에 이렇게
같이 밥을 먹을 기회가 없기에... 각자 싸온 음식을 풀어놓으니 산상부페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인기짱은 역시 막걸리다. 가장 많이 팔리는 것도 막걸리다.
너무 힘든탓에 아침밥은 별로 생각이 없고 막걸리 5잔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떠난다. 이젠 햇빛은 따갑기 시작한다.
방화선 임도를 따라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苦行은 시작되고...
저 너머 지난번에 미리갔던 제암산도 아련히 보이고...
큰덕골재
화순군 이양면 초방리와 장흥군 장평면 복흥리를 이어주는 843번 지방도가 연결되는 곳이다.
큰덕골마을의 뜻은 큰바위 즉 커다란 돌이 있으므로 큰독굴이라 한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큰덕굴, 대덕(大德)으로 표기한 것이다
옛날에 장흥사람들이 광주로 나들이 갔다가 도림역에서 내려 넘던 고개라고 한다.
죽산안씨 묘지 입구라 새긴 비석이 서있다. 오른쪽으로 대덕마을 내려가는 넓은
임도가 형성되어 있다. 방화선이 끝나면서 만나는 임도가 큰덕골재이다.
다시 우측 산길로 접어든다. 이젠 이곳은 그래도 걸을 정도로 등로는 뚜렸하다.
베낭 챙기면서 후미로 처진 탓에 여기서 다시 치고 나간다. 그 이후로 약 2시간
가까이를 혼자서 호젓하게 걷는다. 여러사람들과 다니면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한북정맥 그리고 한남.금북정맥을 나홀로 진행한 학습효과 때문인지 혼자 다닐때가
훨씬 편한 느낌이다. 산속이라도 바람 한 점 없는 엄청나게 덥다.
산죽길이 나타난다. 난 참으로 이런 호젓한 길이 너무도 좋다.
지난주 한남.금북에서 물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여 자꾸만 수통을 점검한다.
아직까지 괜찮은 것 같다. 부드러운 육산에 걷기는 참으로 좋다.
이 지역의 숲은 참으로 건강하다. 그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는 것이겠지?
요즘 매스컴에 한번 방송이 되고나면 그 지역은 1년안에 생태계가 망가진다고 한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리산 둘레길이다.
인간들의 의식변화가 필요한 싯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의좋은 삼형제(범여의 생각 中에서)
이곳은 취나물이 참으로 많이 보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시기를 놓쳐서 먹기는 늦은것 같다.
군치산(群峙山, 414m)
群雁上天의 형상을 한 산이라 기러기떼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르는 모양이라
산봉우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처럼 보인다고 하여 군치산이란다.
이곳은 아마도 화순군과 장흥군의 경계지점의 봉우리이다. 멋진 이름에 비해
정상은 잡목에 가려 시야확보는 전혀 되지 않는 상태이다.
郡峙山은 群雁上天형이라 얻은 이름이라는데 지도에는 '무리 群'이 아니라
'고을 郡'자로 적혀 있다. 기록하신 분이 힘이들어 잠시 착각을 하신 모양이다.
늦둥이 아니면 게으름뱅이?
땟재(09:22)
군치산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고도를 완만하게 낮추니 땟재라고 나타난다
장평면 복흥리 가는 길은 뚜렷하나 청풍면 신석리 가는 길은 잡목이 우거져 희미하기만 하다.
땟재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이곳이 호남길인데도 이곳 지자체의 무관심 탓이지
경상도 산꾼들의 열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私的인 표시는 경상도 산악회 아니면 개인이 표시한
곳이 많다. 화순군은 자존심도 없고 쪽팔리지도 않은 모양인지...
우산나물
잎이 새로 나올 때 우산처럼 퍼지면서 나오므로 우산나물이라고 한다
이명: 섬우산나물, 대청우산나물, 삿갓나물이라고도 한다
학명: Syneilesis palmata (Thunb.) Maxim.
분류: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분포: 일본, 중국에 분포한다. 전국의 야산에서부터 표고 1.000m씩 되는 고산지대까지 수림밑의
반그늘진 습한 곳에 군락을 이루며 자생한다.
크기: 높이 70~120m 꽃 : 꽃은 6-9월에 피며 지름 8-10mm로서 원추화서를 이루며 화경은 길
이 3-10mm로서 털이 있으며 포는 길이 1.5-3mm로서 피침형이다.
총포는 원통형이고 길이 9-10(때로는7)mm이며 포편은 5개, 소화는 7-13개이며 화관은
길이 9-10mm로서 끝이 5개로 갈라진다 용도: 어린순을 나물로 먹으며 관상초로 심는다.
저 넘어 무등산과 안양산이 아련히 보이고...
땟재를 지나 다시 오름길을 나서지만 바람한 점없다. 아침에 양재기로 막걸리 5잔과 물을
그렇게도 많이 먹었는데 오줌 한방울 나오지 않는다. 얼굴에는 염분이 땀과 함께 뚝뚝 떨어진다.
혼자가는데 그 뒤에 칠갑산님이 걸어온다. 참 배울게 많은 분이다. 잠시 후에 나타난 암봉 전망대
오늘 처음으로 시야가 확보된다.
아쉽다면 박무로 인해 조망권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저 넘어 무등산과 안양산이 어렴풋이 보인다.
참으로 멀게민 느껴지는 저 길... 이 조그만 발로 저 길을 걸어왔다니...
쥔장 잘못 만난 내 발(足)한테 미안하기만 하다.
437봉(09:50)
무참히 망가져 가는 정맥길
437봉을 지나 부드러운 마루금을 편안하게 걷는다. 잠시 후 이 산속에 개들의 합창소리가 들린다.
정맥길 가운데 트랙터로 갈아엎고 밭을 일구고 있다. 사람은 없고 커다란 개 너댓마리가 산꾼을 위협한다.
스틱으로 겨누니 개집으로 숨으면서도 끝까지 짖어댄다. 햇빛이 너무도 따가워 서둘러 산속으로 들어간다.
이젠 서서히 힘이든다. 어제의 피로도가 이제사 나타나는 느낌이다. 힘들게 능선에 올라 우측으로
기수를 돌리니 편안한 안부길을 걷다가 다시 빡세게 치고 오르니 숫개봉에 이정표가 3개나 있다.
숫개봉(496m:10:45) 참나무 숲에 가려 조망이 없다.
표지판만 나무에 매달려 있다 숫개봉은 산이 숫개처럼 생겼다는데
그럼 암캐처럼 생긴 것은 어떤 모양이지?
젊잖치 못하게 신성한 산을 숫개봉이라니...그럼 암캐봉은 어디란 말이야
봉미산 정상 삼각점
오늘 산행중 유일하게 만난 삼각점이다
숫개봉에 도착하니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허기도 지고 도저히 더 이상 걷지를 못하겠다.
우유 하나에 찹쌀모찌 한개로 허기를 떼운다.
아침 해장에 다 마신 막걸리가 그렇게도 그립다.
옆에 계신 칠갑산님이 시원한 맥주를 권한다.
어찌도 그렇게 맛있고 시원한 지...10분정도의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편안한 안부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하고 가다가 나타난 폐임도와 폐헬기장을 지나고 다시 산길을 접어든다.
이것이 마루금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이다.
오늘 산행중 가장 힘이든다.
입에서 단내가 팍팍난다.조그만 산이라고 우습게 보지말라는 경고를 주는것 같다.
거기다가 바람의 협조도 전혀 없으니...옷에서 땀이 줄줄 베어나오는다.
속된말로 곡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30분정도의 빡세게 치고 오르니편안한 안부가 나타난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나타날것 같은 봉미산은 보이질 않는다.
지나온 숫개봉을 바라본다. 이곳에서 보니 왜 숫개봉이라고 칭하는지 알것만 같다.
멀리서 보니 마치 숫개 거시기(?)처럼 생겼다. ㅋㅋㅋ
봉미산(鳳尾山505.8m)
오늘 산행중에 가장 높은 산이다. 그
래서 그런지 오름길이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폐헬기장에 삼각점이 있고, 주위에 녹음이 우거져서 전망은 그리 좋지 못하다
鳳尾山은 봉황의 꼬리를 닮은 산인데 그럼 머리는 어디란 말인가?
알길이 없다.준.희님의 표시기가 반갑기만 하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고 서둘러 하산한다
하산지점에서 바라본 봉미산
봉미산에서 도착하니 오늘 힘든 산행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린다.
그래도 경계를 풀지 않는다. 산행이나 인생길이나 언제든지 내려올 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급경사를 10분정도 내려오니 멧돼지의 목욕탕같은 조그만 웅덩이가
나타나고 편안한 길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나타난 벌목현장에 온 몸이 노출되니
햇볕은 너무나 따가워 금방이라도 살이 익을것만 같다.
지나온 봉미산이 잘가란 인사를 한다.
장흥군 장평면을 가는 곰치도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웅치(熊峙:12:10)
화순군 청풍면과 장흥군 장평면의 경계 839번 2차선 지방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생각보다 차량통행이 많다. 다음 구간 들머리를 확인하고 우리의 애마가 있는 곰재 휴게소로 향한다.
다음구간 들머리를 확인하고...슬로시티 설명서
슬로시티는 민간들이 주도하는 범지구적인 운동으로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공시 명칭은 치타슬로(Cittaslow)이며 2009년 현재 16개국 111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5군데나 슬로시티를 배출한
국가이다. 전남 신안군, 장흥군, 담양군, 완도군과 경남의 하동군이다.
슬로시티는 국제연명이 신청지역을 직접 실사하여 선정한다고 하는데 선정 조건이
꽤나 까다롭다고 한다. 인구가 5만명 이하의 지역이어야 하고 자연 생태계가 철저히
보호되어야 하며, 지역 주민이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유기농법에 의한 지역 특산물도 있어야 하고 대형마트나 패스트푸드점도 없어야 한다.
슬로시티는 대표마을이 따로 있어야 하는데 이곳 장흥군의 대표마을은 유치면
반월마을이다. 반월마을의 대표 특산물은 표고버섯인데 표고버섯을 기를때 쓰는
지목을 이용해 장수 풍뎅이를 키운다. 그래서 반월마을의 다른 이름이 장수 풍뎅이
마을이라고 한다.
도로옹벽에서 핀 끈질긴 생명력
잠시 후 곰재 휴게소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휴게소 주유소, 노래방도 있고 모텔도 있다.
이곳도 얼마후면 옛 영화를 잊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구간 들머리인 예재처럼 밑으로 터널공사를 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곰치 휴게소(12:30)
선두에 오신 분들이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서둘러 베낭을 벗고 옷가방을
가지고 나와서 휴게소 마당에 설치된 수도에 팬티만 입고 알탕을 즐긴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나니 살 것만 같다. 샤워를 마치고 휴게소에서 소주+맥주
서너잔을 영거푸 마시고 남도식 음식의 맛을 본다. 이 지역은 음식이 참으로
맛있게 하는데 오늘 음식은 조금은 짜다는 느낌이다.
어제 내려올 때 도 강재 대장이 산행을 일찍 마치고 운주사를 들린다고 하여
상당히 들떠 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니 14시 30분 아무래도 무리일것 같다.
그리고 모두들 곡차들이 과할 정도로 취해 있는 분들이 있어서 (나도 마찬가지)
부처님 도량에 참배하는 건 예의가 아닐것 같다. 도 강재 대장에게 건의를
하여 서울로 향한다. 그러나 마음 한켠엔 운주사 부처님이 눈에 아른 거린다.
운주사 연혁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건립은 신라 말 고승인 도선(道詵, 827~898)국사에 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능성현 조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데 좌우에 석불과 탑이 각 1천개씩 있으며,
석실에는 두 개의 불상이 등을 마주 대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현존 석불 석탑의 유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보다 뒤인 현종(1660~1674)대에 유형원에 의해 편찬된'동국여지지'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의 북쪽에 있는데 사찰은 오래전에 폐찰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의'능주읍지'에도 "운주사가 오래전에 폐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위 기록으로는
운주사의 건립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사찰 경내의 석불 및 석탑의 조각 수법이 고려시대의
지방적인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어 고려 중기인 12세기 무렵에 건립되었으며, 도선국사
설화처럼 하루아침이 아닌 몇 차례에 걸쳐 오랜 기간을 두고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 파격은 운주사의 마력
운주사의 가장 큰 특징은 천불과 천탑이다. 절 안에는 형태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는
이형탑들이 즐비하다. 크기도 모두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法衣) 자락도 특이하다. 산 정상부에는 대형의
부부 와불이 있고, 칠성 바위로 불리는 원형의 석재가 북두칠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운주사의 성격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신사나 사당의 형태에 가까운 대웅전의
배치 구조나, 머리를 역 방향으로 하고 누워 북극성을 바라보는 와불의 형태나 칠성 바위의
모습은 오히려 토속 신앙적이고 도교적이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탈 불교적이고 파격에 가까운 이 같은 분위기는 창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더해 주고 있지만, 관련 전공자들도 현재까지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소설가 황석영은 그의 작품 '장길산'에서 장길산과 같은 반체제 민중 세력의 본부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이는 추정일 뿐 구체적 근거를 가진 견해는 아니다.
민중들은 와불이 일어나는 날 민중들의 세상이 올 것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
운주사가 간직한 설화의 백미는 와불에 있다. 천불산 왼쪽 기슭에는 높이 12m, 폭 10m에 이르는 와불이 있다.
이 와불은 혼자가 아니다. 좌상과 입상을 한 돌부처 2기가 나란히 누워 있다.
와불은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다.
이것도 산등성이를 뒤덮을 만큼 커다란 크기의 와불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독특한 와불에 소설가 황석영은 문학적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황석영은 조선 숙종 때의 의적 장길산의 활약을 다룬 대하소설 [장길산]에서 와불을 용화세상으로
이끌 메시아로 등장시킨다.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 이 소설에 묘사된 내용이다.
그러나 와불은 도선국사가 신통력을 부려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에 싫증을
느낀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아 울었다고 고해 미처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늘로 올라간 석공
기록은 없고 천불과 천탑이 남아 파격적인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미스터리의 운주사는 그래서
전설이 되고, 설화가 되어 기록 대신 남게 되었다. 도선과 관련된 창건 설화는 다음과 같다.
"도선은 한반도의 형세가 행주형국(行舟形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배의 모양)으로 동해안인
관동·영남지방은 태백산맥으로 산이 높아 무거운데 반해, 호서ㆍ호남지방은 평야가 많아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기울어져 나라가 편안치 못하고 항상 변란이 많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산세를 관찰한
도선 국사는 여기에 높은 탑을 많이 세워 돗대로 삼고 부처로써 짐을 많이 실어 놓으면 배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천불은 사공이 되어 바다를 향해 저어가면 풍파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이 같은 생각에서 도선은 이곳에 절을 세워 나라를 편안케 하기 위해 사동(使童) 하나를 데리고 와
터를 다듬고, 도력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그 날 닭이 울기 전까지 흙과 돌을 뭉쳐 천불천탑을
만든 다음, 닭이 울면 천상으로 가도록 부탁하였다. 석공들은 와불의 마지막 손질을 위해서 바삐
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때 꾀 많은 사동은 일에 지치자 그만 닭 우는 소리를 내 지르고 말았다.
석공들은 와불을 다 세우고 절에서 6㎞ 떨어진 하수락 일대의 돌들을 끌어 모아 놓고 일을 마칠 계획
이었는데 닭소리가 나자 일손을 멈추고 창고바위에 도구를 모두 넣은 다음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석공들이 모두 천상으로 가버린 뒤에 살펴보니 탑과 부처가 각각 천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한다.
불교에서 천이라는 숫자는 무한히 많음을 뜻합니다. 천개의 부처는 인간사의 모든 번뇌로부터 모
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천불을 만드는 것은 간절한 바램이나 희망을 이루려는 의
지의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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