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18구간 - 봇재에서 오도치까지

by 범여(梵如) 2011. 7. 3.

○ 산행일자 : 2011. 07.02~03(무박산행)
○ 산행날씨 : 흐림,짙은 안개와 엄청나게 높은 습도로 무척 덥고
 후반부에 가끔 비가 내림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의 33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16.2㎞/ G.P.S 거리 18.6km/ 6시간 40분소요

○ 산행코스 : 봇재-제일다원-411.2봉-산불감시초소-봉화산-416,8봉-307봉-그럭재-315봉-대룡산 갈림길

                  346봉-280봉-276봉-오도재

○ 소 재 지 : 전남 보성군 보성읍,회천면,득량면,겸백면, 미력면

 

일주일 내내 장마비로 인해 곳곳에 물난리와 인명피해가 생겨나고 습기가 많은 탓에상당히 불쾌지수가 높다.

우리가 공사를 하고있는 현장에도 비가 많이오는 바람에 방수공사가 진행되지 않아 작업이 자꾸만 딜레이되는

바람에 모든게 차질을 빗지만하늘이 하는 일을 어쩔 수 있으랴...

 

어제는 음력 6월 초하루라 사찰에 초하루 법회에참석하고 여러가지 행사땜에 한주내내 소득도 없는 모임이 많은 월말이었다.

지난주 화욜에 우리 라이온스클럽 회장 이.취임식에 참석하여 고량주(수정방, 오량해)와맥주+소주를 섞은 폭탄주에

맛이가는 바람에 술병이 나서 이틀동안 병원신세도 졌다.벌써 申卯年도 절반이 지나간다.

해놓은 것 없이 괜스레 맘만 바빠지는 느낌이다.토욜 오전에는 학교 정각원에서 열린 토요법회에 참석하고

월요일에 시작하는 공사 작업준비를 체크하고 무박 산행을 위한 휴식을 취하고 베낭을 꾸린다.

 

내일 남부지방에 비소식에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비가 온다고 산에 안 간적 없고

눈이 온다고 빠진적 없으니 으례 토욜 저녁에치르는 의식으로 생각하기에...

밤 10시에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 아빠가 아들은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듯 “아들과 딸은 조심해서 다녀오시라고 대문에 나와 인사를 한다

”마눌은 이젠 포기했는지 아무말도 않고 소가지붕위에 닭 쳐다보듯 아무말도 않고 TV 연속극만 본다.

그래 세상사 살면서무관심도 삶의 한 방편이겠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한나라당 당 대표 선거

한나라당 당 대표 선거에 당원으로 투표를 하라고 쪽지가 날라왔다.

웃기는 소리다.... 지난 10년 넘게 당비도 착실히 냈고 열심히 지지해줬건만

요즘 한나라당은 딴나라당 같은 느낌이다. 소신도 없고 비젼도 없어 보인다.

자기들의 이익에만 집착해 있고 民草들의 고통은  眼中에도 없는 듯 하다.

M.B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나같은 자영업자들은 정말 힘이든다. 대통령이 주장한

비지니스 마인드가 이런건지 대기업들이 골목상권까지 장악하여 코묻은 돈까지

다 끌어가는 바람에  소상인들은 정말 죽을 맛이다. 대기업이 할 일이 따로있고

소상공인들이 할일 따로 있지... 경제 대통령을 자임한 M.B 정권때 대기업의

횡포가 너무 심한것 같다. 내가 그렇게 미워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리울 정도이다.

그렇다고 민주당이나 다른 정당 지지하는 건 아니다... 거기도 그 나물에 그밥이다.

당신네들 요즘 이렇게 힘든 민초들의 고통을 아시기나 아요. 정말 정신들 차리시요.

투표하러 오라고 ? 웃기지 마소... 산에나 갈라요

전국적으로 200mm 이상의 폭우가 내리다는  기상청의 예보에 잔뜩 긴장했건만 남도지방은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호남고속도로 백양산 휴게소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버스는 안개가 자욱한 빛고을 광주를 지나 화순을 빠져나간다. 화순을 벗어나면서

보성으로 가는 길을 너무나 잘되어 있다.  마치   미국 LA의 하이웨이 같은 느낌이다.

짙은 안개로 인해 우리의 안전을 책임진 김 승현 기사님이 엄청 힘이 들어하는  모습이다.

새벽 3시 15분에 깊은 잠에 빠진 봇재에 도착하여 장비를 점검을 하고 스트레칭을 한다.

산행대장의 인원점검이 끝나고 03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한다.

봇재(210m:03:30)

보성군 보성읍과 회천면의 경계로 18번 국도가 지나가는 꽤나 큰

고개이다. 이곳 주변은 온통 녹차밭의 천지이다. 이곳이 고향인 도강재 대장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이 봇재라고 부르는 연유는 잘모르겠지만 이 아래 영천저수지

라는 엄청나게 큰 저수지의 보가 있어 봇재라고 부르지 않았나 한다는 생각이다.

봇재의 고도가 210mm이니 상당히 높은곳에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된다.

 

오늘도 남도의 땅 보성길을 걷는다. 호남정맥구간 전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스쳐가는 땅 보성. 흔히들 보성하면 녹차의 고장, 판소리 서편제의 발상지.

작가 조 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된 곳 하지만 어디 그뿐이랴

훈훈한 남도 인심에 수많은 먹거리들, 그리고 잘 관리된 정맥길

 벌교 새꼬막에 범여에게 낯설기만한 여름철 보양식으로 불리는 짱뚱어탕 등등...

그런게 그리워 삼복더위에 남도의 산을 헤매고 다닌다.

아쉽다면 장마의 영향으로 10mm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와 높은 습도가 산꾼을 괴롭히지만...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 어느 철학자는 설파했지만 꼭 그것이

아니드라도 산만큼 졶은 앤이 어디 있으랴? 언제나 싫은 내색없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깊은 잠에 푹빠진 봇재 휴게소

제일다원 정문(03:50)

산행 시작은 콘크리트 임도를 따로가다 끝나니 제일다원 정문옆 우측길로 올라선다.

이곳은 길은 이곳 보성 지역 사람들의 心性만큼이나부드럽고 유순하다.

지난구간 장흥군이 정맥길을 정비를 잘해줘서 정말 칭찬을 많이 했는데

보성군은 더 잘 잘되어 있는 느낌이다. 거친 정맥길을 걷는게 아니라 보성 둘레길

걷는 기분이다. 산의 지형이 유순하여 도전하는 느낌이 없어 심심하긴 하지만...

짙은 안개로 인하여 10mm 앞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가 엄청나게 높은 습도로에다

바람 한 점 없는 탓에 산행 20분만에 벌써 팬티까지 땀에 젖어든다. 좌측에 엄청나게

큰 제일다원 철조망을 따라 길을 걷는다. 맑은 날씨이면 장관일 듯 싶다.

이곳이 우리나라 녹차 생산을 30%이상 차지하고 있는 이유를 알것 같다.

화죽 사거리(04:20)

지도상에도 없는 화죽 삼거리를 지나 부드러운 능선을 게속해서 오르니

어둠속에 녹차밭이 살짝 보이고 어둠속에 산불감시초소와 이동통신 중계탑이

나온다. 그나마도 짙은 안개로 인해 잘보이지 않는다. 정상 능선에 휴게용

의자가 설치되어 있는  411봉을 카메라에 담아보지만 안개에 의한 기포현상

땜에 모든 걸 포기한다.  산행시간  1시간 15분이 지날 즈음 서서히 주위의

어둠이 걷히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게 아쉬움이다.

어두컴컴한 숲속을 벗어나니 봉화산 봉수대가 나타난다.

봉화산(烽火山:476m:05:00)

봉화산은 보성읍과 득량면의 경계인 호남정맥의 줄기에 위치한 보성의 명산이다.

정상에는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고 보성군의 각종 행사시 성화를 채화하고 가뭄시

기우제를 올리는 신성스런 산이다. 봇재에서 기러기재까지 10km의 등산로는 천혜의

 절경을 자랑한 차밭과 득량만의 다도해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웰빙코스로 꼽힌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득량만은  천하일경에 비견될 정도인데 그 넘의 안개땜에 머릿속

그림만 그리고 있다.

봉화산은 꽤나 넓은 공터가 있어 단체로 휴식을 취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단체사진도 찍고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20분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을 한다.

봉화대 복원 기념비

보성사 사거리(05:30)

봉화산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보성사 사거리 안부를 끼고 편안한 걸음을 한다.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고도차이다 보니 걸음의 속도가 빨라진다.

짙은 안개속에 조금은 으시시한 느낌이고 마치 납량물인 ‘귀곡산장 ’ 을 연상케 한다

저 아래 펼쳐지는 득량만의 시원스런 바다를 볼 수 없는게 너무나도 아쉽기만 하다.  

고도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금 치고 오르니 조그만 산이 하나 나타난다.          

416.8봉 삼각점(△복내 11 09재설)

416.8봉(배각산:05:50)

지도산에는 산 이름은 없고 416.8봉으로만 되어 있는 곳은 “서레아 박건석”님이

배각산으로 코팅하여 붙여놨는데 무심코 지나가면 놓치기 쉬운 곳이다.

삼각점도 등로에서 2m정도 벗어난 지점 숲속에 가려있고 이정표 코팅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안개는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고 습도가 엄청나게 높은 탓인지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땀으로 사우나를 한 기분이다. 옷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지난구간에 식수땜에 너무 고생한 탓에 식수를 4L와 이온 음료 2개 캔맥주

700ML 2개, 양파즙 3개를 가져온 탓에 자꾸만 베낭의 무게를 느낀다.

잠시 후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대장이 설명을 한다.

원래 산행 계획은 무남이재까지 가기로 되어 있는데 무남이재에는 어프로치

구간이 40분이 소요되기에 1톤 트럭을 부탁하여 예약을 한 상태인데 요즘

한참 농사철이라 캔슬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 부득히 오도재에서 마감을 할

모양이다. 그리고 대장의 입장에서 지난구간 너무 고생을 한 탓에 이런 결정을

한 모양이다. 아쉽지만 이해는 된다. 그리고 소득도 없는 어프로치는 나 역시 너무 싫다.

그러는 바람에 그럭재에서 하기로 한 아침식사를 이곳 풍치재에서 하기로 한다.

풍치재(06:20)

풍치마을과 장전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튼실하게 생긴

남근석 하나가 턱 버티고 있다. 에이~~ 그 물건하나 튼실하여

여인들한테 사랑받겠네 ㅋㅋㅋ

느긋하게 막걸리를 겸한 아침만찬은 갑자기 산행거리를 줄인 탓에 여유롭기만 하다.

거기다가 동료 산꾼 낡은모자님이 늘 외치는 주종불문, 청탁불문, 도수불문을 외치면서

마시는 분이 5일째 금주(禁酒) 중이시란다. 거기다가 정 문교님도 안마시고 그러는 바람에

아침 반주로 막걸리 한통을 독차지 하다시피한 횡재(?)를 했다.

사실 나도 지난주 술병이 나서 고생을 했것만 그러나 일욜날 교외(郊外)에서 주(酒)님을 모신다는 건

산꾼으로서 당연한 의무가 아닌감... ㅋㅋㅋ  오랫만에 느긋하게 30분간의 아침만찬을 즐기고

좌측 임도길을 따라 다시 길을 떠난다.  잠시후 이동통신 중계기가 나타나고 지도상에 반섬산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이곳 현장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 모두들 그냥 지나친다. 정맥 산꾼들을 배려하기

위해 설치한 건지는 모르지만 멋지게 만든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산꾼을 반긴다.

그럭재를 향한 내리막길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다. 주위에는 잘 관리된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향은 정말 머리가 뻥 뚫릴정도 기분이 상쾌하다. 갑자기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럭재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럭재(기러기재:07:20)

2번 국도가 지나가는 보성군 미력면과 득량면을 잇는 4차선 도로로 

고개의 형상이 기러기를 닮아 기러기재로 불리다 지금의 이름인 그럭재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럭재굴 아래에는 경남과 전남을 잇는 경전선이

지나가고 있다.

그럭재의 4차선 도로가 정맥길을 짤라먹고 있어 부득히 무단횡단을 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차량은 그리 많지 않다. 보성경찰서에서

아침에 단속을 나왔으면 꽤나 수입이 짭짭했을 텐데 ㅎㅎㅎ 산꾼들이

이런 위험길 한, 두번 무단 횡단을 했겠는가 범여도 이런데는 이제 도사급이다.

그 예전에 이 길을 꽤나 다닌 길이다. 보림사, 대한다원, 율포 해수사우나를

다니면서 말이다. 하긴 그때 정맥이란 어떤 것이지도 모를때 였으니까 말이다.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다시 마루금으로 접어든다.

좌측의 농가에는 쥐 죽은듯이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짜투리밭에는

옥수수, 참깨들이 심어져 있고 조금 오르니 이젠 심은듯한 고구마와

상당히 잘된 고추밭이 나온다. 산속으로 접어드니 이곳이 군부대가

있는지 아님 군사적인 요충지인지는 몰라도 타이어로 만든 진지가 나오고

지금은 관리를 하지 않은 탓이지 잡초들이 무성하다.

그럭재에서 등로에 접어들어 20분간은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급경사이다.

그래 아무리 편안한 산이라도 한번은 혼날줄 알았다. 그래도 명색이 정맥길인데...

조금전에 먹은 밥알이 입에서 다시 튀어나올 정도로 힘이든다.

땀은 물 흐르듯이 흐르고... 연신 수통 호스를 빨아댄다. 다행히 생수에다

매실 엑기스를 좀 섞었더니만 그래도 조금은 나은 것 같다. 그래 시간이

흐르면 편안길이 나오겠지... 능선에 오르니 경운기가 지나갈 만큼 넓은 임도가

 나타나고 좌측에는 감나무 농장이었던 곳인지는 몰라도 관리가 안된 밭에

감나무와 주위에 밤나무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오랫만에 동료 산꾼들과 이런

저런 세상사를 얘기하면서 편안한 정맥길을 걷는다.

그리고 곳곳에 산딸기들이 많이 달려있긴 하지만 비를 맞아서 그런지

따서 먹어보니 싱거워서 맛은 별로다. 그래도 견물생심이라 튼실한 놈만

골라서 연신 입으로 집어 넣는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나뭇잎 하나 옷에

닿지 않을 정도로 보성군에서 관리를 참 잘 해놓았다. 그렇다고 자연을 홰손

전혀 하지도 않았고... 그 많은 산을 헤매고 다녔지만 이곳만큼  잘한곳은

그리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눈에 거슬리는 인공물 하나없이...

산악회 회장님! 보성군수에게 감사패 하나 만들어 줍시다.

315봉 삼각점(07:40)

소룡 삼거리(07:50)

315봉에서 다시 완만하게  편안한 내림길을 걷다보니 임도가 나타나고

무엇을 하려는지 황토길을 마구 파헤치다  휴식을 취하는지 일욜이라

쉬고 있는지 포크레인 한대가 서 있다.  제발 자연은 자연 그대로 뒀으면 한다.

소룡 삼거리를 지나니 오름길이 나타나고 이곳은 그리 험하진 않지만

꽤나 멋있는 바위들이 많이 보인다. 지난해 태풍으로 인해서 넘어진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멋있어 보인다. 유순한 길을 걷다보니 탁트인 조망대도 있긴 하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모두들 볼 생각도 없이 그저 묵묵히 길을 걷는다.

약 20분간 치고 오르니 아무런 표식도 없는 대룡산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도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대룡산을 향한다.

정맥길에서  10분 조금넘게  걸으니 대룡산 정상이 나타난다. 특이한 것은 이 지역에

아직도 고사리가 엄청나게 많다. 산행 경험상 5월이 넘으면 고사리 채취가 불가능한데

이곳은 아직도 고사리 천지이다. 범여도 꽤나 많은 수확을 하였다.

수줍은 채 다소곳이 숨어서 피어있는 산나리

들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꾸미지 않은 순수함 때문이 아닐까요?

대룡산 정상 시비

대룡산(大龍山:440m : 08:20)

보성군 겸백면과 미력면 경게에 소재한 산으로서 호남정맥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보성군 미력면 용호 산악회에서 정상석을 세워놓고

大龍山 詩碑도 멋지게 있다. 그리고 주위 관리도 참으로 잘해놨다.

대룡산 정상기념 산상주막에서 파티를 열고... 

이젠 조금만 가면 오도재가 나오기에 베낭에 열고 이것 저것 꺼내다

보니 즉석에서 山上酒幕이 펼쳐지고 멋진 파티가 열린다.

그러면서 산꾼들의 友愛는 깊어진다. 이젠 정확히 3개월 후면 이 분들과

작별이다. 또 다른 정맥길을 찾아가야 하기에... 아쉽지만 서서히

이별 연습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션한 맥주 두잔 마시고

일행보다 조금 먼저 내려오니 우측 아래에 友石府君 追慕碑가 있고

이 분은 꽤나 높은 벼슬을 한 듯 싶은데 후손들이 관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묘지 전체가 고사리밭 천국이다. 그 덕분에 고사리 수확은 꽤나 했다.

대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지난온 구간 315봉

정맥길에서 500m 정도 벗어난 지점에 있는 대룡산에 들려서 산상파티를 여는 바람에 40분이상

소요가 되었다.  다시 돌아오니 도 대장님을 비롯하여 젠틀맨님, 칠갑산님 등이 기다리신다.

거기서 다시 젠틀맨님이 솔방울 술을 권한다. 거기서 다시 파티가 벌어지고 그 사이에

오늘 새로오신 두 분은 피곤한 탓인지 길바닥에서 베낭을 베고 깊은 잠에 빠진다.

346봉 삼각점

오도재 내림길에는 사람키보다도 훨씬 큰 산죽터널도 지나고,,,

마지막 구간에는 크고 작은 봉우리를 꽤나 많이 오르내리지만 지난구간

비교하면 식은 죽 먹기다. 지난구간 힘들었던 학습효과 때문에 오늘은

공짜 산행(?)을 하는 느낌이다. 마지막 봉우리에 오를즈음 빗방울이

굵어진다. 에이~~~ 비를 맞고 가자 땀에 젖어나 비에 젖어나 젖긴 마찬가지인데...

베낭에 레인커버만 쒸우고 다시 길을 걸으니 금방 또 비가 그친다.

잠시 후 길 건너엔 채석장인듯한 벌거숭이 산이 나타나고 차량소리가 들린다.

福도 많으셔?

오도치 내려오는 길에 安東 金公 묘지에는 산소 전체가 쑥대밭이 아니라

고사리로 산소가 뒤덮혀 버렸다. 그런데 묘비에는 부인이 두분이나 모셔져 있다.

본처와 후처간에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다

오도치에서 방장산 가는 길에 석산 개발을 한답시고 산 전체를 깡끄리 깔아뭉게 버렸다

물론 사유지라 내것 가지고 내가 하는데 니들이 뭔데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산은 사유지라 할 지언정 자연은 사유지가 아닐터언정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을 개발이란 미명아래 저렇게 망가트릴 수가 있을까?

오도치(五道峙:160m:10:40) 

 보성군 겸백면과 득량면 경계로  845번 지방도가  이어지는 고개이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오도치보다는 겸백고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오도치란 이름은 방장산에서 흘러 내리는 산세가 다섯마리 돼지가 내려오는 것

같다 하여 오돗재로 불리다 한자로 음차되어 현재의 오도치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 산행이 너무 일찍 끝난 탓에 버스 기사의 수면시간 이전에 

내려오는 바람에 오도치에서 휴식을 취한다.

계곡에서 알탕을 하기위해  논두렁을 건너 저 산아래 계곡을 향한다.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물은 참으로 맑다. 계곡에서  홀라당 벗고 시원한 알탕...

어렸을 적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하지만 범여는 찜찜하여 하지 않고

갈아입을 옷도 차에 있어서 식당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하고 말았다.

보성군내버스

이곳은 지방도라 차량은 그리많지 않다. 이곳에서 조금가면 빨치산

해방구로 유명한 보성군 율어면와  외서면이 나오고 그 고개를 넘어면

호남의 젓줄 역할을 톡톡히 하는 주암댐이 나타나고 좌측으로 가면

광주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서 다시 좌측으로 가면

승보종찰 송광사가 나오는 길이고 우측으로 가면 벌교가는 길이다.

버스는 다시돌아 순천 목포간의 2번 국도까지 나와 예당 저수지에서

좌회전하여 벌교로 향한다. 조성면을 지나면서 우측에 고흥지맥의 줄기인

봉두산이 보인다. 저 아래 범여의 장인의 묘소가 모셔져 있는 산이 보인다.

생각 같아선 들려서 잔 한잔이라도 올리고 싶지만 그게 맘대로 되질 않는다.

장모님한테 전화를 올리니 할마시가 들에 나가셨는지 전활 받지 않는다.

전엔 자주 왔는데 장인 어른 돌아가시고 나서는 자주 오질 않는 편이다.

10분후에 벌교에 꼬막식당에 도착한다.

소화(昭和)다리

홍교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다리는 1931년(昭和 6년에 건립되었다

이 다리는 해방후 여.순반란 사건 당시 양측에서 반대급부 인사에 대한 총살이

이루어져 근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담고있는 다리이기도 하다.

좌익이 우익을, 우익이 좌익을 사형 집행하던 장소, 당시 아픔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장소. 원래는 부용교라 했으나 일제가 쇼와(昭和:일본명 히로 히토 연호)

년간에 만들어졌다해서 소화다리라 격하시켰다.

 

다리란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60년전의 슬픈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설 “태백산맥”의 대사속에 ‘소화다리 갯물이고 갯바닥이고 시체가 질펀하게

널렸는디 아이구 이제 징해서 못보겠구만이라’는 표현은 그 시대의 이념대립에

대한 묘사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소화다리 앞에 있는 외서댁 꼬막나라 집에서 식사를 예약한 모양이다.

오늘은 고흥 출신인 탱크님께서 거액을 희사하셔서 산꾼들에게 꼬막 정식을

대접한다. 1인분에 12,000원×34명= ? 아이쿠 출혈이 크실텐데

아무튼 복 받으실겁니다. 버리는 즐거움을 아시는 탱크님은...

 

홍교는 벌교를 묘사한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자주 등장하는 다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에 지어진 소화다리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데 홍교가 민족의

혼을 상징하는 다리라면 소화다리(부용교)는 일본 천왕의 연호를 따 일제 강점기에

탐욕을 상징하는 다리라고 생각했었다. 소설속에서는 그 시대 상황만큼이나 정치

사회적인 표출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오늘 꼬막 정식을 먹을 외서댁 꼬막나라태백산맥을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태백산맥에도 외서댁이 나온다.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님은

작중(作中)의 염상구가 외서댁을 겁탈하는 장면을 꼬막맛에 비유했다.

 

 염상구가 외서댁을 찾아가 덮친 후 하는 말.

 

 " 외서댁을 딱 보자말자 가심이 찌르르 하드란 말이여.

고 생각이 영축 들어맞아 뿌럿는디,

쫄깃쫄깃한 것이 꼭 겨울꼬막 맛이시 ... "

외서댁 꼬막나라 꼬막정식

꼬막은 돌조개과에 딸린 바다에서 사는 조개다. 부채꼴의 몸체는 세로 5 cm, 가로 3.5 cm쯤으로

 부챗살 모양의 골이 18개 정도라는 것이 백과사전의 설명이니 꽤 자세히 관찰한 것이다.

9~10월에 산란하며 모래, 진흙 속에 사는데 아시아 연안의 개흙 바닥에 많다고 한다. 

살은 부드러워 혀에 미끄러지고 피처럼 즙이 흐르면서 짭쪼롬한 갯내음이 입맛을 돋운다.

통조림도 있고 또 말려서 먹기도 한단다.

한국에서는 꼬막을 삶아서 양념에 무쳐먹는데, 쫄깃한 맛이 특징으로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의 특산물로 유명하다 

 

꼬막을 채취하는 넓은뻘을 ‘여자만’이라고 하는데  찬바람이 부는 11월부터 이듬해2월까지 잡은 겨울꼬막이 제일 맛있다고 한다.

벌교 꼬막을 제일로 알아주는이유는 벌교에는 해수욕장이 없으니 모래사장이 없고 모두 바닷가가 뻘이라점질이 높은

뻘에서 나는 꼬막은 쫄깃쫄깃하고 영양소도 풍부하다고 한다.

벌교 꼬막은 양식이 100% 자연산이기 때문에 물때를 맞쳐 한달에 사나흘,보름날과 그믐날을 중심으로

앞,뒤날만 채집할 수 있다고 한다.

 

벌교 갯사람들의 갯벌, 여자만. 남해안에서 가장 기름진 개펄을 자랑하는 “여자만”에서 나오는 참꼬막은 명성이 자자하다.

살이 찢어지는 듯 겨울 바닷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에도 갯가의 아낙들은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 뻘

밭으로 들어간다. ...한번 빠지면 못나올 정도로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는 질퍽한 개펄.

그래서 산타클로스 썰매처럼 생긴 뻘배를 타고 뻘일에 나선다.

뻘배는 널빤지를 사각으로 오린 다음 한쪽 무릎을 올리고, 다른 한쪽은 노처럼 개펄을 차고 나가는 원리를 이용한 것.

왠만한 배보다 빠른데 보통 작업은 4~5시간 정도 걸린다.

소화다리에서 바라본 벌교읍

벌교는 한마디로 일본인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개발된 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소설의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벌교는 그 자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던 벌교가 ‘벌교 가서는 주먹 자랑도 돈 자랑도 하지 말라’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보성과 순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고흥반도 사람들이 벌교 땅을 밟지 않고는 외지로 드나들 수 없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다름 아닌 '뗏목다리'로서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이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이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 구체성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벌교가 보성군에 속해 있지만 보성군청이 있는 보성읍보다 인구는 2배이상이나 많다고 한다.

벌교홍교 [筏橋虹橋]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돌다리로

보물 제304호. 길이 27.6m, 너비 4.5m. 마을에 있는 교비(橋碑)에 의하면

원래 뗏목을 엮어 다리(벌교)를 놓으면서 마을 이름이 벌교가 되었다고 한다.

 홍교(虹橋)란 돌로 무지개(虹)와 같은 반원형으로 쌓은 다리(橋)를 뜻한다.

이런 다리는 홍교, 홍예교, 무지개 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홍교(길이 약 27m, 높이 3m, 폭 4m)로서 300여년동안 벌교천에 서서 다리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이 하천(벌교천)을 건너기 위해 사람들이 현재의

홍교 자리에 뗏목(筏)을 이은 다리(橋)를 놓으면서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 벌교에서 이 홍교가 위치한 곳은 지역의 지명을 부여할 만큼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다리가 세워진 연유는 다음과 같다. 1728년 대홍수로 이 곳의 벌교가 무너지자

 1729년 선안사의 초안()과 습성(習性)이라는 두 스님이 다리를 놓아 1734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무려 5년의 세월동안 작업을 한 것이다.

 이와같은 국가적인 큰 일은 조정이나 지방 관아에서 해야 할 일이다.

 

  불교에서는 건너지 못하는 하천에 다리를 놓아 사람을 이롭게 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을

 큰 보시로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정성껏 다리를 놓았고 그 다리가 300년이란

세월동안 변함없이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아직도 잘 이용되고 있다.

  지금은 하천이 넓어져 이 다리에 덧붙여 연장된 다리가 놓여있다.

 화강암을 정교하게 깎아 빈틈없이 짜 맞추어 쌓아 올린 모습은 놀랄만한 솜씨이다.

절에서 참선을 하고 독경을 하던 스님들의 솜씨라기 보다 숙련된 석공의 작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밑의 천장 한 가운데 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과 용의 관계에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용의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리가 놓여진 벌교천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썰물 때에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

홍교의 유래 안내판

선암사 승선교 근처에 있는 승선교 조성내용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홍교비에 의하면

이 홍교는 원래 숙종(肅宗) 44년(1718)에 당시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에 의해 현지에 떼다리

(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놓은 다리)를

 놓았는데 영조 4년(1728년) 에 전남도 지방에 내린 대홍수로

이 다리가 유실되자 그 이듬해 선암사 주지 호암화상 (護岩和尙(약휴:若休))이

 제자인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로, 습성대사(習性大師) 를 공사감독으로

천거하여 착공, 6년후인 영조10년(1734)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국가보물 304호 지정  벌교 홍교 안내석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벌교의 상징인 홍교위에서...

벌교는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조그만한 소읍이다. 그러나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로 좌,우 이념의 희생물이며 여.순 반란사건의 피해지역이기도 한

이곳은 아픈 역사의 현장이 참으로 많은 곳이다. 오늘 산행도 일찍 끝나고 하여

이런 곳을 좀 들려서 공부도 하고 올라가면 좋은련만... 도리깨님을 꼬셔서

홍교를 구경하고 있는데 빨리가자고 재촉을 하는 바람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 순천을 거쳐서 새로생긴 순천~익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귀경한다.

벌교 홍교의 유래 안내판

벌교하면 작가 조 정래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이다.

작가 조 정래는 1943년 8월 17일 대처승의 아들로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났다. 대처승이란 처자식을 둔 승려를 말한다.

한국인의 관습상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일본의 승려는 100% 대처승이고

한구에도 태고종을 비롯한 일부종단은 대처승 제도를 택한다.

조 정래의 부친 조 정현은 1927년「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시조시인이자

‘철운’이란 법명을 가진 승려였다. 그런 그가 대처승의 승려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내선일체를 부르짖었던 일제 강점기 황국신민화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부친 조 종현은 승려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일제의 강압아래 시범적인 대처승이 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선암사에서 보냈던 그는 해방이 된 후에 선암사를 떠나게 된다.

이유는 진보적인 주장을 폈던 부친이 사찰과의 마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해방이 되자 ‘절은 소작인을 거느려서는 안된다.’ ‘절은 대중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라는 플랑카드를 내걸었고 1947년 선암사 부주지라는

직위를 내세워 소작인에게 사답(寺畓)을 분배하여 주지와의 마찰을 일으켜

선암사를 떠나게 된다. 순천에 정착한 가족은 그 후 가난이란 멍에를 끼고

살았으며 순천에 정착한 지 1년만에 “여.순 사건”을 맞이한다.

여순 사건을 목격한 계기로 “태백산맥” 작품의 모태가 된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한국 문학의 큰 산이 되었고,

 장편소설 <인간연습>과 <오 하느님>은 대가의 필력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작품들이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성옥문화상, 동국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단재문학상,

노산문학상, 광주문화예술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홍교 맞은편에 있는 조정래 문학 기념관

우리나라 베스트 셀러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내용은 1948년 10월 14연대 반란사건을

 

시작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의 좌.우익의 사상과 이념을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재해석 했다는 의미가 있다.

당시에 시대적 분위기로는 소설의 내용이라 하지만 1994년 우익단체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작가를  검찰에  고발한 후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 고무 등에 연루되어

무혐의 결정이 내려질 때 까지 작가 조 정래는 11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이적성 시비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일본의 조선 지배가 남겨 놓은 흔적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설의 시점(始點)이 되는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제주 4·3항쟁 진압 명령을

거부한 병사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으며, 4·3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거

 저지를 목표로 내걸었었다. 이승만에 의한 단정수립 기도가 일본의 패망 이후 38선 이남과

 이북에 각기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현상고착 방침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결국

 동족상잔과 분단 고착화로 이어지는 여순사건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여순 반란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 되는데, 반란군에 의해 여수와 순천이 점령당하고,

 뒤이어 보성군 벌교읍이 좌익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좌. 우익이 나뉘어져 죽고 죽이는

 살인극이 벌어진다. 끝닿을 곳 없이 치닫는 살인의 만행은 분명 악의 화신이 저지른

망나니의 춤이 아닐까? 그렇게도 쉽게 악한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

끝임 없는 물음표에 대답은 없다.

일제 암흑기를 겪으면서 잡초처럼 살아온 우리 민족은 또 다른 강대국들의

이념 싸움에 희생 됐다. 목적도 명분도 분명치 않은 채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현장은

이성을 가진 인간의 짓이 아니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이렇게 까지 악해 질 수 있을까!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다.

 좌익 게릴라의 광란의 질주와 그들을 진압하러온 토벌군의 한 술 더 뜬 살인 만행......,

 누구를 위한 토벌인가? 소설 태백산맥은 묻는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수확한 늦둥이 고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