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08. 14(무박산행)
○ 산행날씨 : 태풍의 영향으로 바람이 심하게 불고 산행하긴 최적의 날씨 산행이 끝난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35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17.8㎞ /G.P.S 거리 20.8km/ 7시간 55분소요
○ 산행코스 : 석거리재-백이산-빈계재-511.2봉-고동재-고동산-700.8봉-큰굴목재-작은 굴목재-배바위
조계산(장군봉)-장박골몬당-접재(두월육교)
○ 소 재 지 : 전남 보성군 벌교읍 / 순천시 외서면, 낙안면, 송광면, 주암면, 승주읍
일기에보에 의하면 태평양상에서 발달한 태풍 “무이파”에 의해 남부지방에
일요일에 또다시 150mm의 비가 온다고 예보를 한다. 비가 왔다면 시간당
30 mm이상의 비가 오기에 이젠 비에 대한 학습효과 탓인지 150mm 쯤은
겁도 나질 않는다. 그러나 7월에 호남정맥 2번, 금북정맥 3번의 산행중에
4번을 비를 너무 맞았고 생활상 너무 불편하여 기청제라도 지내고 싶다.
조선 전기의 문인이며 학자였던 서거정(徐居正)의 『사가집(四佳集)』
에 실린 우우(又雨)란 시에 보면
‘비가 그치면 비가 내리기를 바라며/ 하늘의 뜻이 어찌 세상의 물정과
합할 수 있겠는가/ 해마다 홍수가 가뭄을 근심하지 않는다면/ 평생 아침
저녁으로 죽을 먹어도 족하리’라는 시가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비가와도 걱정이고 비가 오지 않아도 걱정인 자연 앞에서 한낱 微物에
불과한 인간이 요즘 비 때문에 너무 고통을 받고 있다.
산꾼인 나 범여(梵如)도 요즘 매주 비를 맞으면 산행을 한다.
예전에 비가 오지 않으면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젠
거꾸로 비를 제발 그만 내리게 해달라고 기청제(祈晴祭)라도 지내야겠다.
토욜은 견우직녀가 만난다는 칠월 칠석이고 월요일은 가을이 시작된다는
立秋이다. 요즘 생활이 하도 덥고 비에 습도가 많다보니 짜증스런 일상을
지혜롭게 보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다. 지난 목요일 부주의로 인하여 핸폰을
물에 빠뜨려 먹통이 돼버렸다. 그래서 통신사 매장에 갔더니만 꽁짜폰이라는 것이
있어 물어봤더니 번호이동을 하라고 해서 다시 A/S 를 해서 쓰느라 이틀동안 전화없이
사니 참으로 편하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문명의 이기(利器)인 핸드폰에 너무
메여 사는 느낌이다. 3주만에 남도길에 나선다. 양재역에서 반가운 山友들과 오랫만의
해후를 하고 버스에 오른다. 하늘에는 칠석날의 달이 높게 떠있어 아무래도 예감이 좋다.
피곤했던 탓인지 차에 오르자마자 잠이 쏟아진다. 1차 휴게소인 여산 휴게소에서 잠이깬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또다시 차에서 잠에 떨어져 순천I.C에 버스가 들어서면서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 순천 시내를 거쳐 벌교를 향하는 2번국도로 산꾼을 실은 버스는
거침없이 달려 진트재의 고개위에 오르니 중도 들녁과 벌교읍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비좁은 벌교읍내를 지나 석거리재로 향하는 버스는 오르막길을 겨우 올라 휴게소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석거리재(03:35)
석거리재는 옛 승주군.. 지금의 순천시 외서면과 보성군 벌교읍의 경계를 짓는 곳으로,
벌교쪽에서 보면 엄청나게 재도 높고 꾸불꾸불하여 오르기가 힘이 들지만 반대편 외서
쪽에서 보면 밋밋한 평지 수준의 지형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벌교출신 양효석이 벌교지구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빨치산으로부터
벌교를 지키기 위해 진지를 구축했던 곳으로도 나오고 또 외서댁이 염상구 때문에 임신을 하게되고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이웃에 대한 창피함도 생각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알게 될까
염려한 나머지 회정리 3구 마을 뒤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가 구조되고 나서 남편 강동식을
피해 친정에 가는 것이 그려지는 곳이 이곳 석거리재이다. 그리고 태백산맥의 주인공 염 상진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곳이 이곳 석거리재이다.
염 상진과 염 상구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도 이념의 차이로 좌,우로 나눠 서로 총부리를 겨눈 것이
우리 역사의 현실... 왜 뭐 때문에... 정 하섭과 어린 무당 소화(昭花), 하대치와 들몰댁,
현부자댁, 벌교홍교, 소화다리, 중도들녁, 남도여관,좌,우 이념대립에서 민족주의를 표방하다
좌,우 양쪽에서 협공 당하는 김 범우, 기회주의자로 국회의원까지 하여 민초들의 고혈(膏血)을
빨아먹는 최 익승등... 이 석거리재에 서니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몰려온다.
저 아래 벌교읍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고 망념에 빠진 머릴 정리하고
산행 길에 들어선다.
지난번 구간인 석거리재 휴게소는 아직 깊은 밤중이다. 간간이 짖어대는 개소리만
적막을 깨트린다. 약간의 휴식과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다음에 석거리재 들머리로
접어든다. 태풍의 영향탓에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탓인지 이슬이 하나도
없는 탓에 산행하기에 그지없이 좋기만 하다. 초반부터 급경사의 된비알을 치고 오른다.
석거리재에서 굴목재까지는 해발 600~700m의 봉우리를 10개이상을 넘어야 하는 곳이다.
백이산 오름길 우측의 채석장 때문에 산 하나가 전체가 사라질 정도로 엄청나게 큰 채석장의
안전장치로는 가느다란 로프 몇가닥에 중간중간에 위험, 출입금지라는 표시만 있다.
어두운 밤길에 행여 산꾼들이 사고라도 당할까 걱정스럽 기만 하다. 파먹을만큼 파먹었고
그로 인해 富를 창출하였으면 거기에 걸맞게 사회적인 책임도 함께 이행했으면 한다.
백이산(伯夷山:582m:04:35)
벌교읍과 순천시 경계에 있는 명산으로 옛날에는 낙성일대가 바다로 이 산봉우리에 배를 맨 자국이 있어
배이산 또는 백이산이라 불렀다 하며 이곳 아랫마을의 당산에는 4백여년 된 고목이 있는데 잎이 일제히 피면
풍년을 예측하고 잎이 부재하면 흉년이 든다는 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이 산에서 고사리가 많이 나서 고대 중국 은(殷)나라의 마지막 충신인 백이 숙제의
고사에서 그 이름이 연유했다고도 한다.
백이와 숙제는 중국 은나라 고죽국의 왕자였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왕위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다. 그 당시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 주왕을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주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하여 주나라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로 연명을 했다고 하는데후에 백이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백이산은 강원도 정선과 전라도 임실과 경남 함안 등에서 그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산들이 대부분 고사리가 많이 자생하는 산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있다.
결국 우리 선조들은 고사리가 많이 나는 땅을 보면 자연히 지조의 상징인 백이, 숙제를 떠올리게
되고 그 땅에 백이산이란 이름을 지어 부름으로써 그 지조를 배우고자 했던 모양이다.
백이산 삼각점
여기서 부터는 지난 5월 첫주부터 3개월에 걸친 보성땅과 이별을 하고
順天 땅에 접어든다.호남정맥길의 전남지방의 5분의2가 보성땅을 밟고 지난다.
원래 ‘순천’이란 이름은 지세(地勢)가 억센 탓에 사람의 힘으로는 안되고
하늘의 힘으로 순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順天 이 지명을 사용한 지는 700년이 넘었다고 한다.
‘모래드리’ ‘사평’이라고 불리워오다가 삽평,무평, 승평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1310년 고려 충선왕때 비로소 순천부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였고,
순천(順天)이라는 단어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하늘의 순리를 따른 이 고을
후백제의 박 영규, 김총의 공적의 기리는 의미로 순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고장 사람들은 순박하고 온화하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는 충렬의 꽃을
피운 역사의 고장이다.
이 지역도 지나온 장흥, 보성땅과 함께 이정표와 등로관리는 참으로 잘되어 있는데
이정표의 표시관리는 좀 신경을 써야겠다. 석거리재에서 백이산까지 분명히 3.5km라고
해놓고는 반대 방향은 3km라고 했놨다 웬~~ 어느것이 맞는지 했갈린다.
백이산 정상은 바람이 참으로 드세다. 후미그룹이 늦은탓에 20분간의 느긋한 휴식을 취한다.
새벽 4시 40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어둠이 걷힐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夏至))가 지난지가 2달도 되지 않았는데 해가 무척이나 짧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저 아래 벌교읍과 낙안읍성은 아직도 깊은 밤중이고 어렴풋이 여자만(汝自灣)과 지나온
존제산의 군부대 불빛도 뚜렷하게 보인다. 눈 앞에는 낙안읍성의 뒷산인 금전산과 그 옆의
오봉산도 보인다. 백이산 정상의 바람은 자꾸만 드세지고 이젠 추위를 느낄정도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빈계재로 향한다. 내리막길은 이 지역 사람들의 심성만큼이나 편하다.
이곳은 억새 군락지인지 억새들이 어둠이 짙은 새벽임에도 장관을 이루는 것이 뚜렷히 보인다.
빈계재(05:15)
순천시의 외서면과 낙안면의 경계 지방도 85호 2차선 도로이다.
빈기재/분계재(奔界峙-1760년 여지도)/(奔溪峙,分鷄峙)로 표기의 흔적이 보인다.
빈계재(牝溪峙)로 쓰인 기록은 조선조 말 金南波의 시집 風月集에 보인다.
한편, 백이산 아래에서 태어나 흙으로 낙안성을 쌓은 김빈길 장군의 이름을 따서
'빈길재'로 부르던 것이 오랜 세월 동안에 빈계재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빈계재의 '닭'과 오금재(낙안/승주;蜈蚣峙)의 '지네'를 대비시키는 설도 있다.
빈계재를 지나 오름길에 통신사 송신탑이 나타나고 조금 지나니 좌측으로 꽤나 긴 철조망이
산꾼을 막아선다. 아마도 사유림이라 영역표시를 한 모양이다. 우측에는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바람의 영향 탓인지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숲에서 나오는 향이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마치 내가 느끼기에는 편백나무 향이 침향(沈香)의 느낌이다. 이제 서서히 어둠이 가시기 시작한다.
외로운 소나무
여명이 시작되는 순천시 외서면
좌측의 뾰족한 산이 조금전에 지나온 백이산이고 저 멀리는 존재산이 보인다.
아침이 시작되는 순천시 낙안면의 여유로운 모습
아침해가 보이는 걸 보면 오늘 산행중 비는 맞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고...
반대편에 백이산과 존재산 위를 지나가는 먹구름을 보면 조금은 불길한 느낌이 들고...
511봉 정상(06:30)
현재까지의 산행은 정말 편한하게 한다. 강하게 부는 바람이 몸의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주고 거기다가 등로까지 편안하고...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거기다가 오랫만에 동행한 방초님과 온누리님, 젠틀맨님 등 이런저런 세상사를 논하면서
걷는다는 자체가 즐겁다. 이런 날씨는 1년에 한번 있기 힘들정도로 정맥 산꾼들에게는
最上이다. 조금가니 앞서가던 동료 산꾼들이 휴식을 취한다. 김 준길님께서 집에서
농사 지은거라면서 강냉이를 내놓고 먹으란다. 지난구간에도 토마토를 잔뜩 가져와서
내 놓더니만... 맨날 얻어 묵기만 하고... 보시공덕 아마 복 많이 받을겁니다.
고동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동재(07:00)
고동산 정상에서 유래를 읽어 보면 한자로는 고등치(高等峙) 고동치(高動峙)라고도 했단다.
고등산 오름길에 ‘순결한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패랭이꽃도 산꾼을 반기고...
고동재에서 고동산 올라가는 길은 방화선처럼 넓은길이 참으로 편안하다.
좌측에 주암댐과 우측에 낙안면의 금전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람불어 좋고 시야가 넓게보여 좋고 거기다가 햋볕까지 없으니
그야말로 산행하기에 錦上添花가 아닌가 싶다. 룰루랄라 하면서 고동산에 도착한다.
전남과 광주의 상수원으로서 남도사람들의 젖줄 역할을 하는 주암호 뒷쪽으로
멀리 모후산과 무등산이 아련히 보인다.
우측에는 우리나라에서 홍매화가 가장 먼저 핀다는 금전산이 낙안읍성을 감싸고 있고
그 옆에 오봉산도 아련히 보인다. 마치 낙안팔경이 한 눈에 보이는 듯하다.
[ 금강모종(金剛暮鍾) ]
뜬 뗏목 같은 성 북녁은 금강이 눌러 놓고
바위 사이에 자리한 절이 세상의 거칠음을 깬다네.
부처님 계시는 곳에서 울려오는 종소리 방밖에 떨어지니
원님이나 백성이나 저녁밥 짓 기에 모두 다 바빠지네.
[ 백이청풍(伯夷淸風) ]
고사리 고비 우거진 수양산에서 이는 맑은 바람은
만세 토록 빛날 백이 숙제의 충성스러움을 전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냄이로다.
우뚝 솟은 날카로운 봉우리는 아랫 세상을 펼쳐 내고
더우나 추우나 아랑곳 없이 불어오니
봄여름 가을 겨울 한결같아라.
[ 오봉명월(五峯明月) ]
낙안읍성 동녘에 우뚝 솟은 오봉산
꼭대기에 달 밝아 외로이 구르는 바퀴 같구나.
성벽 따라 솟은 장대(長臺)에 정월 대보름날 올라
봉오리 높 낮이 따져 한해 농사 점쳐 보세나
[ 보람조하(寶嵐朝霞) ]
아침에 일어나 남산을 바라보니 산자락 길게 여린 자주빛 안개 끼였구나
선녀가 북 눌려 짠 비단 인양 꽃들도 나와 있고
봄 밭이랑 다스리랴 농사꾼들이 나와 있고
소나무 가지에 이슬 맺힐 무렵이면 햇살도 비스듬이 쪼여 오네.
[ 옥산총죽(玉山叢竹) ]
옥(玉)으로 산의 이름을 삼았으니 화살대 기르기 좋을 시고
총총 빽빽하게 들어섰으니 이웃집들 바람막이되어
속은 비었 어도 마디마디 튼튼하니 화살 만들기 그 아니 좋을 손가
해마다 나랏님께 바칠 때에는 깃털을 화살촉에 달아 꾸몄 다네.
[ 용추수석(龍湫水石) ]
물과 돌이 어우러져 성벽 네 귀를 삥 둘러 큰못을 이루니
티끌조차 없어 어디고 자리가 마련되네 그려.
물 맑고 돌 깔끔하니 먼 나라 나그네 스님도 합장이라.
돌로 만든 물문에서 용이 날아오름은
특히 나 물빛이 푸른 탓이라네.
[ 안동화류(雁洞花柳) ]
청계라는 아호 가진 처사님 무척이나 화류(花柳)를 사랑하더니
돌아가신지 삼 년이 되었지만 마치 사람이 하듯 산소를 지키네.
슬픔에 잠겨 축 늘어진 모습이 산소를 지키는 상제같구나
손님왔다고 <뚜룩 뚜룩> 소리치던 문 앞에 이제 오는 이 적어
돌을 깐 오솔길엔 이끼 끼어 거칠어지고 사립문 닫 힌지 오래이네.
[ 원포귀범(遠逋歸帆) ]
봄바람에 물결 출렁이니
바람 안은 돛도 날래 들어오고
가득 실은 저 싱싱한 물고기 사
입맛 돋구는 반찬거리 아닐 손가
다리 아래 지나는
배에서는 뱃사람들의 한 자락 흥겨운 노래
저래도 옛날에는 월 나라 오 나라로 멀리도 나가
한바탕 크게 사고 팔고 했다네
고동산 오르는 길은 마치 목장의 草地같은 느낌이다.
흡사 백두대간 길에 대관령 목장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고동산(高東山:07:20)
낙안면과 송광면에 걸쳐있는 고동산은 잘 알려진 산은 아니다.
높이는 709m로 되어 있지만 이미 이 지역이 상당히 높은 고도이기 때문에 도보로는 조금만 오르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벌교에서 낙안읍성을 찾아가 선암사 쪽으로 계속 가면 오른쪽에 금전산이 있고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
고개 넘어 왼편으로 낙안면 수정리 동네로 가는 길이 있다.
비좁은 자동차 도로지만 계속 가다보면 산 너머 송광면으로 이어진다.
수정리 동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쳐다보면 오른쪽으로 송신탑이 보이는 산이 고동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남쪽 멀리 백이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선명하고 북쪽으로 조계산 장군봉이 뾰족하게 서 있다.
다시 둘러보면 동남쪽에 금전산, 그 밑에 제석산, 그리고 남서쪽에는 백이산이 뾰족한 삼각형 봉우리를 자랑하고 있다.
고동산 유래에 대해 읽어 보니 임진왜란 발발 전에 산고동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날씨가 흐리면 산고동이 울었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산고동이
울면 비나 눈이 오겠구나 했단다.
고동산에서 오랫만에 많은 산꾼이 함께 모여서 아침식사를 한다.
통신탑 중계탑은 강풍이 부는 바람에 윙윙하는 소리가 상당히 귀에 거슬린다.
여기저기서 주는 곡차에 아침부터 술에 쩐다. 해장술에 맛이가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고 했는데 ㅋㅋㅋ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조계산으로 향한다.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이
금방일도 터질것만 같은데... 그래도 믿음은 저버리지 않는다.
아마 오늘 산행중에는 비가 오질 않을것이라고...
조계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고동산의 모습
KT 송신탑에서 장군봉 가는 길은 편안하긴 하나 관리가 덜 된 탓인지
곳곳에 길게 자란 풀들이 반 팔을 범여의 팔뚝을 마구 할킨다.
잠시 후에 나타나는 소나무 숲은 맘을 편하게 해준다.
화려하나 독성이 강한 망태 버섯도 만나고...
700.8봉(08:55)
산불감시초소(09:00)
고동산에서 출발한 지 1시간이 조금 지난 후 산불감시초소에서 휴식을
취한다. 오늘은 동료 산꾼들이 이상하리만치 서두르지 않는 느낌이다.
아침 밥을 먹은지 1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또 과일을 비롯한 디저트에다
막걸리가 나온다. 여기저기서 또 한잔씩을 받아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장안치(09:15)
여기서부터 조계산 도립공원에 접어든다.
조계산은 1979년에 전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장군봉은 전남 순천시 승주읍, 송광면, 낙안면,주암면 등
4개 읍면에 걸쳐있는 육산으로서 장군봉을 중심으로 봉우리들을 군락을 이룬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호남의 명산이며 불국토이다.
내장산에서 뻗어내려 광주 무등산과 사자산, 보성 벌교의 금화산·계족산으로
힘차게 이어오다 광양 백운산에서 불끈 솟아 그 자락을 남해에 드리운
호남정맥(湖南正脈)에 자리하고 있다.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을 끼고 있는 조계산은 주봉인 장군봉(해발 884m)을 중심으로
해발 700~800m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어머니 품처럼 넉넉하게 펼쳐져 있다.
예전에는 동쪽의 장군봉을 청량산, 서쪽 봉우리를 송광산이라 불렀으나
고려 때부터 조계산으로 통칭됐다 한다.
조계산에서 발원한 계류는 동쪽은 상사호, 서쪽은 주암호(보성강)로 흘러들어
광주와 전남 주민의 식수원 역할은 물론 농경지를 적셔주는 젖줄 기능도 하고 있다.
귀중한 문화재를 많이 품고 있는 데다 곳곳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해 1986년 전체
면적의 85%가량인 22.22㎢에 대해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큰굴목재(09:30)
우리나라 3대 고개길 중 하나인 굴목이재, 선암사에서 출발하여 송광사까지 이어지는약 8km의 고갯길이다.
선암굴목재(큰굴목재) 동쪽의 선암사와 서쪽의 송광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넉넉한 조계산 산자락인 이곳
태고총림 선암사부터 조계총림 송광사까지 두 절을 동서로
이어주는 전남 순천 굴목재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
생채기 빨치산 주요 활동 무대 중 하나였다던 숲길인 이 굴목이재
산문을 깨치려고 수시로 왕래하던 스님들이 욕망 번뇌도 버리고 삶과
죽음 화두 잡고서 관념에 빠지는 망상 경계하며 걷던 佛心 길이기도 하다.
송광사 일주문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어 창건 당시에는 길상사(吉祥寺)라로서
그리 큰절은 아니라고 한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정헤결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삼보종찰로서 한국 불교에 중심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귀하고 값진 세가지 보배 佛, 法, 僧을 三寶라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삼보를 상징하는 삼보사찰(三寶寺刹)이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이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佛寶寺刹)이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법보사찰(法寶寺刹)이며
송광사는 한국 불교의 승맥을 잇고 있어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송광사 대웅보전 앞에서(2010.04.25)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불일암 마당과 요사채 그리고 좌측 대밭속 건물은 해우소이다(2010.04.25)
법정스님이 직접 만드시고 앉아서 책을 읽어셨다는 불일암의 빠삐용 의자
법정스님이 열반하신지도 어언 1년반이 지나간다.
참으로 멋진 禪僧이었는데...
無所有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不必要 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選擇한 맑은 가난은
富보다 훨씬 값지고 高貴한 것이다. <법정스님의 "山에는 꽃이 피네"中에서>
큰굴목재에서 작은굴목재 가는길은 마치 동네 마실길 걷는 기분이다.
양쪽에 山竹이라는 조릿대가 가득하고 잘 관리된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이곳이 佛國土이고 極樂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편안한 길이다.
작은굴목재(10:00)
편안한 마음으로 동료 산꾼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작은굴목재에 도착한다. 여기서 산죽길과 이별을 하고 오랫만에 바위길로
고도를 높인다. 밑에서 보니 멋진 배바위가 보이면서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빨리 보고픈 마음에 자꾸만 가슴이 설레인다.
멋진 조계산의 능선들
전라남도 순천의 조계산은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두 사찰을 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쪽 기슭에는 태고총림 선암사, 서편 기슭에는 조계종 삼보사찰로 이름난 송광사다.
이들 사찰은 모두 통일신라 때 창건된 천년고찰들로 수많은 관람객들이 사시사철
찾아든다. 조계산은 그 이름도 국내 불교문화의 요람이란 뜻에서 조계(曹溪)라 얻었다.
우리나라에는 6개의 총림이 있다. 조계종 종단에 5개의 총림이 있고( 불보종찰인
영축총림(통도사), 법보종찰인 해인총림(해인사), 승보종찰인 조계총림(송광사)
덕숭총림(예산 수덕사), 고불총림(장성 백양사)가 있고 태고종 종단에 소속된
태고총림 선암사가 바로 이곳 조계산 자락에 있다. 이곳 조계산 자락에 2개의
총림이 있는 그야말로 佛國土이다.
조계산은 원래의 이름은 청량산이었으나 대각국사 의천이
바꾸었다 한다. 曹溪란 원래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스님의 별호로서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이 산을 돈오점수(旽悟漸修)“ 곧 문득 깨달은 후 점차 세속의
습을 제거해 나간다는” 수행법을 따르는 수선사를 열면서 산 이름이 처음엔
송광산에서 조계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조계종은 16국사를 배출하면서 크게
흥성 불교계의 중심적인종파가 되었으며 그 중심점 역할을 한 사찰이 바로 송광사이다.
그래서 서쪽의 송광사를 일러 승보사찰이라 한단다.
동쪽의 선암사는 불교계의 다른 한 맥을 이끄는 태고종의 중심사찰이다.
배바위 정상에서 동료 산꾼들과
배바위(10:10)
“배바위란 아주 먼 옛날에 온통 물에 잠기는 어마어마한 홍수가 발생하여 사람들은
이 바위에 밧줄을 묶고 기다렸다가 홍수가 끝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단다. 흡사 노아의 방주와 비슷하다. 1900년대까지도 조개껍질이
붙어 있었다고도 한다. 배바위를 신선이 이 바위에서 바둑을 두었다 하여
“신선바위” 즉 선암(仙巖)이라 부르게 된 데서 선암사가 유래 했다고도 하고
다른 전설은 “장군봉” 장군의 도장이라 하는 “인장”바위이라고도 부른단다.
조선조 정조는 후사가 없었는데 이곳 배바위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에 후사(순조)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저 아래 선암사가 아련히 보인다.
“태백산맥”의 저자 조 정래님의 부친이 선암사의 승려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임 권택이 촬영하고 강 수연이 주연을 맡아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받아 일약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한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의
마지막 장면인 법당에서 간절히 참회하는
모습도 저곳 선암사에서 촬영을 하였다.
배바위 정상에는 사람이 서 있기가 힘든만큼 바람이 드세다.
그러나 이렇게 전망이 좋은 날은 그리만치 않음을 알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로프를 타고 오른다. 저 아래 고즈늑하게 古刹 선암사와 선암사 주차장과
그 너머에 상사호와 저 너머 광양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선암사 안내판
선암사 일주문(2009.08.05)
선암사는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소재한 조계산에 위치한 한국불교 태고종의 의 본찰이다
백제성왕 5년인(527)년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阿度和尙)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의천대각국사께서 대각암에 주석하시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대각국사께서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셨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송광사가 화려한 번성을 누린다면 선암사는 고졸하면서도 운치있는 기품을 보이며
한적한 숲속에 그윽하게 자리잡고 있어 깊은 인상을 준다.
삼층석탑은 보물 제 395호로 대웅전앞 좌우에 서 있다.
신라때의 석탑이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화강암 석탑이다. 선암사 아래쪽 계류를 건너는
곳에 선암사 승선교가 있다. 조선조때의 이례적인 아치교 다리로 보물 400호로 지정되어있다.
삼층석탑을 수리할 때 나온 유물들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계종과 태고종의 오랜 분규 과정에서 선암사의 소속을 놓고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사찰 재산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불상 바꿔치기에 이은 폭력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재산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불상 바꿔치기에 이은 폭력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돌담으로 둘러있는 단청이 없는 당우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선암사가 고찰임을 바로 느끼게한다.
성보박물관에는 보물 4점과 전라남도도 지정 유형 문화재 5점, 불교회화,
조각, 공예품 등 약 1천 8백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암사는 꽃나무들이 많아 한마디로 꽃 절이다. 매화, 철쭉, 왕벗나무목련 들 모두가
수백년 묵은 고목들이다. 봄이면, 피어나는 꽃들이 고풍의 절집과 돌담이 함께 어울려,
조계산을 등에업고 연출하는 풍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못하게한다.
더불어 돌담과어울린 고매의 자태는 모든 사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선암사 측간(뒤깐, 해우소 ,화장실, 변소) 문화재 자료 제214호'
이곳은 일주문과 범종루를 지나 대각암 가는 길에 있는 해천당 옆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 옆으로 분리되어 있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20년 이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선암사 뒤깐'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님의 詩 中에서>
삼인당
선암사 일주문 가기전 우측에 있으며 긴 알모양의 연못안에 점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신라 경문왕2년(862)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으로 삼인이란 諸行無常印 諸法無我印
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말하며 모든것이 변하여 머무르는 것이 없고 나(我)라고 할만한
것이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는 불교사상을 말함
승선교(昇仙橋)
선암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로 알려진 '승선교(昇仙橋)'가 있다.
승선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로 보물 제 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벌교의 홍교를 건설한 초안선사(楚安禪師)와 습성(習性) 스님이 만들었다고 한다.
배바위의 모습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884m: 10:20)
장군봉 정상에서 또다시 산상주막이 또한번 펼쳐지고...
장박골 가는 길에서 바라본 조게산 정상 장군봉의 모습
장군봉에서 장박골을 거쳐 접치 내려가는 길은 속된말로 누워서 식은 죽먹기다.
그저 편안한 트레킹 코스라고나 할까 이렇게 편하게, 시원하게 산행해보기는
정말 오랫만이다.
장박골 몬당(10:50)
몬당이라는 단어는 ‘몰랑’ ‘몰랑이’(영남지방에서는 먼뎅이 또는 만딩이라고 부름)라고
부르는 마루 또는 산의 높은 곳을 뜻하는 이곳 남도지방의 사투리이며 봉우리처럼
생겼으나 제 이름을 갖지못한 높은 곳을 통틀어 ‘몬당’이라고 부른단다.
접치 가는 길
장군봉에서 접치까지는 고도를 880에서 250으로 낮추다보니 정말 편한 걸음이다.
조게산이 대한민국 100대 명산중에 하나이다보니 접치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등산객을 심심찮게 마주친다. 도착 1km 전방에서 약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래 여기서 비가 와봐야 얼마나 비를 맞겠나 불국토의 길에 이만큼 비를 맞지않게
해준것만도 부처님의 가피력 덕분이 아닌가... 즐겁게 길을 내려오니 건너편의
오성산이 나를 반기는 듯 하다. 셋째주가 기대가 된다.
접치(11:30)
전남 순천시 승주읍과 주암면을 연결하는 22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며 조그 내려오면
두월육교 아래에는 광주 ~ 순천간을 잇는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오늘 산행은 여기서 마무리를 한다
두월육교 아래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고 저 너머 보이는 순천제1 터널위에는
베롱나무 꽃이 너무나 빨갛게 피어있다.
두월육교(전남 순천시 승주읍 소재)
승주읍 두월리 효동마을에서 바라본 접치의 모습
두월 육교에 내려오니 갑자기 비가 너무 많이 쏟아진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있는데 승합차 한대가 온다. 평소 나홀로
산행 하던 때의 실력(?)으로 히치를 시도하는데 단박에 낚시에
걸린다. 식사장소인 진일기사식당까지 좀 태워 달라고 하니
바로 아래 마을까지 밖에 가지 않는단다. 그래도 무작정 타고
내려와서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일부는 피하고 나는 뒤에 있는
마을 정자에 가서 느긋하게 베낭을 정리하는데 동료 산꾼들은
지나가는 마을 버스를 타고 가버린다. 할 수 없어 도로앞 개울가에
가서 알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개운해 날아갈 것만 같다.
잠시 후 버스가 와서 선암사 앞에 있는 진일기사식당에 가서
김치찌게에다가 폭탄주 5잔을 마신다. 이상하게 자리를 앉다보니
동갑내기가 4명이나 되는데 원일님도 동갑이라니... 에이 농담도...
첨엔 띠동갑이줄 알았는데 그 바람에 에궂은 이스리만 작살나고...
오늘은 가장 연배이신 고문님이 한 턱 쏘시는 바람에... 잘 먹었습니다.
서울 오려고 하는데 비는 엄청나게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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