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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19구간 - 오도재에서 석거리재까지

by 범여(梵如) 2011. 7. 18.

 

○ 산행일자 : 2011. 07.16~17(무박산행)
○ 산행날씨 : 아침엔 박무현상. 오후엔 30도가 넘는 엄청난 더위에 찌는듯한 무더위, 살이 다 익는듯 함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의 37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22.2㎞/ G.P.S 거리 24km/ 9시간 30분소요

○ 산행코스 : 오도재-335.5봉(국사봉)-파청재-방장산-이드리재-배거리재-주월산-무넘이재-초암산 삼거리

                  광대코봉-주월봉(삼각점)-고흥지맥 분기점-모암재(천지고개)-존제산-KT송신소-주릿재-485.5봉

                  민가-석거리재

○ 소 재 지 : 전남 보성군 겸백면,율어면,조성면,벌교읍/순천시 외서면

 

2주일 넘게 비가 와도와도 너무나 많이온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것처럼... 우리도 작업현장이 많이 스톱이 된다.

직업상 외부에서 하는 일도 많고 특히 방수공사 같은 것은

올스톱이다. 그래 피곤한 육신 좀 쉬라고 하는 天心인데

그 어이 거역하랴... 지난주에 허리가 삐끗하여 생긴 허리

 통증이 지난 일욜(10일) 금북정맥구간에 성거산 공군부대 우회로

내려오는 길에 엄청나게 내린 비로 인해 미끄러운 길에 또다시

한번 더 다친게 참으로 힘이들어 한의원에 가서 침맞고 부항뜨고

死血하고 나니 조금은 나은 것 같다. 조금 한가한 시간에 부가세

신고하고 5년전에 읽었던 소설 “태백산맥” 삼매경에 푹빠진다.

내가 요즘 타고있는 호남정맥 길이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벌교,

율어지역이다보니 더욱 더 이해가 잘되고 산을 조금 더 알고 싶기에...

 

전라도 말로 비가와도 정말 징하게도 온다. 그러나 그래도 토욜밤이면

또다시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서겠지... 그 넘의 역마살 땜에 ㅋㅋㅋ

지난 목욜 동아일보 인터뷰에 작가 최 인호님의 글이 참으로 가슴에 와닿았다.

꽤 오래된  세월에(정확한 시기는 모름) 청계산 등산로에서 한번 뵌적이 있었는데...

암 투병중에도 요번에 새로운 소설을 발표했던군요, 손톱이 빠지면서도...

 

에전에 그 분이 쓴 소설 “길 없는 길”의 주인공 경허선사의 禪詩가 가슴에 닿는다.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세상과 청산은 어느쪽이 옳은가. 봄볕있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없더다)

속세는 청산이다. 친구냐 적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네가 옳냐 내가 옳냐

시비를 따지고 들지만 봄볕만 잇으면 어다든 다 꽃이 핀다는 뜻이다.

 

그렇다 세상사 사는것 정말 별것 아닌데  나부터 왜 이리 아둥바둥 사는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토요일 비만 그치면 시작해야 할 현장을 점검하고

부지런을 떨면서 베낭을 챙겨 양재역을 나가는데 시간이 상당히 촉박하다

피곤이 몰려온다. 차에 올라 잠을 청하는데 왠인인지 잠을 청할수가 없다.

눈만 말똥말똥... 다행히 비는 그치고 버스는 새로 생긴 전주~순천간 고속도로

양전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순천시내를 지나 순천~벌교간 국도를 거친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순천에서 벌교 넘어가는 진트재를 지나 벌교시내를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중도 방죽길 앞으로 생긴 우회하여 벌교 삼성뱡원 옆과 염 상구가

일본 순사를 살해하고 소록도로 도망가면서 넘었던 뱀골재를 옆으로 조성으로 넘어간다.

조그만 면소재지 조성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잠시후 예당 저수지를 지나

2번 국도와 이별하고 겸백으로 들어가는 2차선 도로를 접어들어 오도재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구간 지도와 고도표 

오도재(04:10)

845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과 겸백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새벽 4시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하는데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습도로 인하여 상당히 몸은 무겁고 거기다가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몸은 엄청나게 무겁다. 오늘 산행이 힘듬을 예고한다

새로온 버스가 들머리에서 100m 지나서 내려주는 통에 다시 빽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오도재 이정목

국사봉(355.5m:04:35)

언제나 처음이 다 그렇듯이 25분간 빡세게 치고 오르다가 부드러운 산길로

접어드니 오르니 지도상에는 355.5봉 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에 국사봉이란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언제나 반갑게 산에서 맞이하는 준.희님 아크릴판이 나타난다.

습도가 얼마나 높고 더운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잠깐사이에 상의는 벌써 땀에

흠뻑 다 젖어 버린다.

파청재(坡靑峙 270m:05:05)

산행 1시간여 만에 파정재에 도착하여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며 10여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음력 유월 열이렛날의 새벽달은 아직도 하늘에 걸쳐있고 이젠

날이 밝아져 헤드렌턴을 꺼서 베낭속에 집어 넣는다.

보성군 겸백면과 득량면을 잇는 고개로서 파청(坡靑)마을에서 이름을 따온 듯하며 파청마을은 뒷산에 보살들이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절에 빈대가 하도 많아타 지역으로 옮기면서 마을이 페할것이라 하여 파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맥길에도 아침은 밝아오고...

음력 유월 열이렛날의 새벽달

파청재에서 방장산 정상까지는 방장산 정상에 KBS 순천 방송국 송신소가 있어서

정상까지 콘크리트 포장을 해놨는데 경사도가 만만찮아 오르는데 장난이 아니다.

차리리 흙이면 좋으련만... 무릎에 상당한 충격이 전달되는 느낌이다.

호동재(약수터 사거리:05:30)

물을 얻어야 한다는 소원으로 마을명을 호동(湖洞)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불러오고 있단다.

방장산(方丈山:535.9m:05:35)

보성군 겸백면과 조성면 그리고 득량면 등 3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KBS 순천방송국 송신탑과 삼각점. 옆에 넓은 공터 있다.

이 산이 방장산이라 부른 연유를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방장(方丈)이란  불교에서 주지 또는 스승의 존칭으로 쓰이는 용어로 원래는

사방이 1장(약 3m)이 되는 넓이 또는 그 넓이의 방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유마(維摩)거사가 거처하는 방이 일장사방(一丈四方)이었다는 중국의《유마경》의 고사에서

사방으로 1장이 되는 승려의 방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방장은 법력이나 도력이 뛰어난 승려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주지나 스승의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방장이 있는 사찰로는 

영축총림의 양산 통도사. 해인총림의 합천 해인사,조계총림의 순천 송광사,

덕숭총림의 예산 수덕사, 그리고 고불총림의 장성 백양사가 있다. 

 *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의 참선 수행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그리고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員)을 다 갖춘 사찰을

총림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는 5대총림이 있다.

파청재에서 방장산까지 30분간을 빡세게 오르니 정 KBS 순천 방송국 송신소가 덩그러니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박무로 인하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후미 그룹들이 무신 일이 있는지 자꾸만 뒤처지는 모양이다. 후미를 기다리며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정말 오랫만에 그것도 아주 오랫만에 아침 해를 맞이한다

이드리재 (410m:06:20)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와 조성면 덕산리를 잇는 고개로서 옛날 어느 무당이 이 고개가

 내(川)가 되어 흐를 것이다고 예언을 하여 '이냇고개'라 불렀는데 한자로 음차하여

이천치(?川峙)가 되었고 다시 세월이 흘러 '이드리재'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소곳이 피어 산꾼을 반기는 들꽃

이드리재를 조금 지나니 밀양 박씨 묘역이 나타나고 전망이 끝내 주는 곳이 나타난다.

박무로 인하여 잘 보이지는 않지만 득량만이 한 눈  들어온다. 안개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아련히 보이는 득량만과 그 넘어 고흥반도

저 넓은 들은 그 예전에는 전부 바다였는데 둑을 막아서 간척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지나가는 지명이 전부 물과 관련되어 있다. 이드리재, 배거리재,

주월산, 무넘이재 등등... 암 에전에는 이곳이 강이 아니면 바다였을까?

하긴 백두대간길에 구례의 고리봉은 배를 묶어논 곳이라 했고 낙남정맥길의 함안 여항산도

그와 같았으니...  고흥은 이 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사할 당시 노량대전에서 투입된 병사들이

고흥출신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해전 당시에도 고흥반도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고흥은 옛 지명이 흥양으로 사면이 거의 바다를 끼고 있어, 전라도좌수영 5관 5포 중에

 1관(고흥)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를 차지하고 있는 군사요충지였다.


▲ 고흥군에 있었던 1관 4포 옛 지형도
이순신 장군은 임진전란이 일어나기 1년(1591)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주로 고흥지역에 있는

 1관 4포를 순회하며, 군비확충 및 판옥선을 개조해서 거북선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1관 4포의 전력은 판옥선 11척과 발포진에 거북선 1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수군 병력은

1100∼1400여 명으로 임진전란이 발발하자 옥포해전,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왜선 330여 척을 격파햐였는데 그때에 아군 사상자 211명 중 131명이 고흥출신

 수군들로 알려지고 있다.

이드리재에서 배거리재 지나가는 정맥길에는 나무에 온통 거미줄 투성이다.

이 포식자들이 거미줄을 쳐놓고 느긋하게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배거리재(06:30)

배거리재는 배가 걸렸다는 뜻인 듯 한데 자료를 찾아보니 옛 전설에 이 고개

밑까지 바닷물이 밀려와 이 곳에 배를 대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이곳 등로에는 군데군데 체육시설을 설치해놨다.

이곳 지자체에는 주민들을 상당히 배려를 한 느낌이 든다.

주월산 정상의 모습

이곳은 온 천지가 사방으로 트여있어 전망이 정말 멋진 곳인데 아마도

범여의 德이 모자란 탓인지 오늘도 안개의 비협조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게

그져 안타까울 뿐이다.

주월산 정상 활공장에서 휴식을 취한다. 잠을 못잔 관계로 자꾸만 몸이 무겁고

힘이든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계속 추월을 당한다. 이러다가 오늘 완주를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동료산꾼 김 준길님이 커다란 토마토 하나씩을 나눠준다.

저 무거운 것을 그리도 많이 가져와서... 저 분은 참으로버리는 즐거움을 아시는 분 같다.

그리고 낙안읍성에서 동동주, 파전,꼬막, 두부무침을 몽땅 스폰서를 하시고...

암튼 잘 먹었습니다... 山友님들을 즐겁게 한 보시공덕

먹었으면 쓰레기는 되가져가야지

주월산 쉼터옆에 먹고나서 버린 쓰레기가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주월산(舟越山:558m:06:40)

보성군 겸백면과 조성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배 舟, 넘을 越자를 써는데

옛날 큰 물이 들어 이 산으로 배가 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산의 형상이 배의 밑바닥처럼 둥글넙적해서 얻은 이름인 듯 하다.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배 舟 자를 착각해서 붉을 丹 자로 적어 단월산이라 적어 두었다.

한자를 잘못 해석한 것 같다. 주월산 바로 아래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요시이라는

자가 1927년부터 10년간 1700ha의 개펄을 막아 간척지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주월산에서 무남이재 가는 길은 참으로 편하다. 보성군에서 등로관리도

잘되어 있고 거의 내리막 수준의 길이라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범여의 다리는 자꾸만 무거워져만 가고 동료 산꾼들은 자꾸만

야속하리만큼 자꾸만 멀어져만 간다. 하긴 정맥 산꾼들이야 자기가 걷고

자기가 쉬고 하는 철저한 개인주의 성향이라... 약간의 오르내림을 거듭한 끝에

50여분만에 무남이재에 도착한다.  재에서 약간 아래에 떨어진 사유림 입구에서

아침밥상을 펼치는데 아무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일단 옆에 있는 게울물에서

세수를 하고 나니 조금은 나은 느낌이다. 버너에다 라면 하나를 끊여서 밥을 말아먹고

막걸리 서너잔을 하고나니 조금은 정신이 온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햇볕은 따갑기만 하다.

비 온뒤라 그런지 아기 영지들이 꽤나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나온 주월산의 모습

무남이재(340m:07:30)

보성군 겸백면과 조성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옛날 득량바다에 해일이 일어 이 고개까지 바닷물이 넘쳐 '물넘은재'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부르기 쉽게 물애미재 또는 무남이재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주월산은 전후로 모두 물과 배와 관련된 전설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부터 보성군 겸백면과 작별을 하고 우측에 조성면과 좌측에 율어면을

경계에 두고 계속하여 정맥길을 걷는다.

무남이재 아래에 있는 사유림

무남이재에 도착하여 좌측으로 약간 내려오니 윤제림이란 사유림입구에

아침밥상을 펼친다. 너무도 힘이들어 아침밥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밥을 먹지 않으면 안되기에 일단 베낭을 벗고 옆에있는 게울물에

상의를 빨아 나무에 걸어놓고 세수를 한 다음에 아침상을 펼친다.

버너를 피워 라면하나를 끓여서 밥을 말아 먹는다. 잠을 못잔 탓인지

오늘은 초반부터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 겨우 3분의 1밖에 오지 않았는데...

자꾸만 머릿속에 중간 탈출을 꿈꾼다. 아침식사후 평소보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하고 다시 베낭을 맨다. 이 길은 누가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이기에...

동료산꾼 원일님의 밥상

무남이재에서 조금 늦게 도착한 원일님이 밥상을 펼치는데 우리는 기가 죽는다.

커다란 알미늄 밥상에다 의정부 부대찌게는 찌게도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문산에서 공수해 왔다는  부대찌게에다 막걸이에 각종 안주 등등... 좀 특이한

산꾼이시다. 그리고 대단한 분 같다. 거기다가 어린아이 머리만한 DSLR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동료 산꾼을 다 찍어주시고 정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재미로

사시는 분 같다. 일반 산꾼들은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밥대신 조그만 떡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신 분들도 많으신데...  대단해요. 그리고 커다란 보시공덕

복 받으실 겁니다. 길고 찌게에다 막걸리  잘 먹었습니다.

정맥 능선에서 바라본 율어면

무남이재에서 휴식을 겸한 아침식사를 평소보다 조금길게 30분정도에 마치고

광대코재 오름길은 조금전에 먹은 밥알이 입에서 나올정도로 힘이든다.

길이 그리 힘들지 않고 등로 관리도 참으로 잘되어 있으나 아무래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직까지 정상능선은 보이지도 않고... 몇번이고 주저 앉고 싶은 생각이다.

천신만고 끝에 능선에 오르니 옷이 벌써 땀범벅이고 체내에 염분이 부족한지 현기증이 난다.

35분에 도착한 초암산 갈림길. 거기서 우측으로 기수를 돌린다.

여기서 부터는 보성군답지 않게 등로관리가 되어 있지 않다. 마치 데리고 온 후처의 자식처럼.

광대코봉(613m:08:35)

35분 동안의 사투(?)끝에 지도상에 광대코재로 표시된 613봉에 오른다.

좌측에 있는 초암산의 영향인지 철쭉나무들이 즐비하다.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고 박 건석이 광대코봉이라고 붙여논 정상 표지판이 있다.

여기가 광대코재가 아닌 광대코봉이 맞은 것 같다. 재가 아닌 봉이니까

이곳을 왜 광대코라고 불리우는 이유를 알것 같다. 주월산에서 천당에서 지옥까지

뚝 떨어지는 느낌으로 무나미재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이곳까지 오르는데 너무나

힘들게 고도를 높이니까. 광대의 코가 튀어 나올 정도로  힘이들기 때문일까.

(범여의 생각中에서)

정맥 능선에서 바라본 보성군 조성면

광대코재에서 잡목을 헤치면서 능선길을 걷는다. 우측에 조성면 대곡리쪽이 보이고

보성C.C와 대곡제가 보이는데  저수지 모양이 마치 야구장의 그라운드처럼 보이는게

이색적이다. 전망은 끝내주는 곳이지만 저너머 고흥 앞바다는 끝내 박무의 방해로

인해 볼 수 없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조금가니 앞서가던 산꾼들이 휴식을 취한다.

나도 베낭을 벋는다.  안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지없이 좋다. 여성 산꾼만

없다면 바지를 내리고 거풍을 즐기기엔 더 없이 좋으련만. 눈치없는(?) 총무님은

갈 생각도 안하고 계속 같이 있는 바람에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걷는다.

빨치산 활동이 심했던 안개에 휩싸인 존제산과 율어면의 연봉들

 

「보성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율어는 당시 보성군 내에서 좌익세가 강했던 지역으로 꼽힌다.

그것은 빨치산들의 주둔지가 되었던 존제산을 끼고 있고 조계산에 잇닿아 있는 지형 탓으로

반란사건 이전에도 빨치산들의 활동이 활발했었던 때문이다.

 

율어는 소작인이 많아 계급적 갈등이 심했을 뿐 아니라 6·25때 전남의용군 부사령관을 지낸 김○○과

같은 열성적인 좌익들의 고향이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했기에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 때에도

2천에 가까운 농민들이 경찰관 1명과 우익인사 1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더구나

 

율어를 비롯한 산간지역은 당시 기관의 추적을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산으로 둘러싸인 율어의 상도지역은 자연히 많은 좌익들의 활동지가 되었다. 그들은 반란사건

전부터 칼과 같은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면소재지를 제외한 마을단위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상태여서 경찰관들도 자기 보신 이외에 아무런 치안활동도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율어는 이처럼 좌익세가 강했던 만큼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40여 일 간이나 그들의 지배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12월이 되어서야 경찰 38명과 군병력 50여명으로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밤에는 소위 밤손님으로 불리는

좌익들이 밥과 가축, 젊은 청년들을 잡아가고 낮에는 토벌대가 좌익에 협조한 자를 통비분자로 잡아가 이 지역의

희생은 컸다.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존을 위해 죽이고 죽는 살상극이 연속되었던 것이다.

고흥지맥 분기점(09:15)

고흥지맥 (高興枝脈)고흥지맥은 호남정맥의 존재산(x712m) 남쪽 2km에 있는 적지봉(赤地峰. 571m)에서  

분기하여 남동진하며, 태봉(△325.2m), 가마봉(x258m), 장군봉(△412.7m), 삼봉(△107.3m), 혼백산(x183m),

천봉산(x193.1m), 소대방산(165m), 운암산(△484.2m),반월산(△291.0m), 수덕산(x301m), 오무산(△356.3m),

벼락산(x431m), 천등산(△553.5m), 우마장산(x342.8m), 유주산(△416.6m) 등을 일구고,지죽대교 앞 고흥반도

남단 남해바다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90.9km 되는  산줄기로 말한다.고흥반도를 남북으로 온전하게

종단하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산이름이 아닌 지역이름을 따 고흥지맥이라 칭한다.

고흥지맥 분기점 하신길에 바라본 모암재(帽岩峙: 천치고개:430m:09:35)

보성군 율어면 선암리와 벌교읍 옥전리를 잇는 도로이다

앞산에 신부바위가 있고 뒷산에 신랑바위가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하여 모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곳도 철쭉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잠시후 임도와 송전탑이 나타나고 좌측 숲길에 접어들어 조금 지나니

절개지가 나타나며 모암재가 보인다.

고흥지맥 개념도

모암재 공사 현장(09:35)

이렇게 깊이 파야 할 공사라면 터널공법이 어떨지... 옆에 잇는 도리깨님이 이렇게

하는 게 공사비가 절감된다고 한는데 환경을 비용으로 계산할 방법이 있는가.

그건 개발지상주의자들의 얘기지... 이렇게 팔거라면 확실히 터널공법이 나을턴데

요즘 이상기후는 환경파괴에 오는 걸 모르는지?  그게 다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도 모르고...

길이 없어 산꾼들이 겨우 절개지로 올라선다. 그 옆에 흐르는 물에 상의를 적시고

머리에 물을 뒤집어 쓰고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운다.

 

산행대장이 주는 식염사탕을 한알 먹고나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온다.

다시 입에 단내가 나도록 존제산을 향해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른다. 

그런데 자꾸만 힘은 들고 동료산꾼들에게 처지기 시작한다. 오름길 주위에

먼저간 산꾼들이 더덕은 캐가고 줄기만 길가에 보인다. 이건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ㅋㅋㅋ

가끔 가다가 잔대도 꽤나 보인다. 그런데 너무 힘이드니 모든게 귀찮기만 하다.

2번의 휴식끝에 능선 입구에 도착하니 철조망이 처져있고 지뢰 경고판이 나타난다.

존제산 오름길에서 바라본  고흥지맥 마루금

언제쯤 저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존제산 8부 능선에 오르니 예전에 있었던 공군 8352부대가 있었던 자리에

지금 철수하고 지뢰 매설 경고판과 함께 철조망 막사등 폐시설물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벌교의 진산인 존제산 정상이 흉물스럽기만 하다.

국가가 안보를 위해하는 대업에 시비를 걸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철수할 때는 깨끗히 마무리하여 명산을 의미를 찾게 했으면 하는 마음이

산꾼의 자그만 바람이다.

지뢰 경고판과 함께 막아 놓은 철조망을 뚫고 고집스럽게 정맥길을 찾아간다.

존제산은 뛰어난 산세와 많은 설화가 깃들어 있는 호남 명산이지만,

정상에 군사시설물과 주 능선상에 한국통신 중계소가 들어서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때문에 벌교읍과 율어면을 잇는 818번 지방도로상의

 고개인 주릿재에서 정상까지 약 6㎞ 구간이 비포장도로가 뚫려 있기는 하지만,

2㎞ 지점에 위치한 백림농장까지 밖에 오를 수 없다. 결국 백림농장에서 동쪽으로

벌교읍내와 남해바다를 내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산이다.

 존제산 정상에 있는 공군부대 폐 막사

보성군내에 있는‘帝’자 이름을 가진 세 개의 산 가운데 하나로서 해발 704m이며,

보성군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벌교쪽에서는 징광산, 보성쪽에서는 존제산이라고 불린다.

 이 존제산을 중심으로 한 보성의 중동부(中東部) 산간지는 300m 이상의 고지가 무려 65㎢나

되어 가장 넓은 산지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주릿재를 보듬은 존제산에는 우리들의 슬픈 역사가 있어 가슴 저림을 더 하게 한다.

 사방이 산으로 싸이고,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마저 원활하지 못했던 이유 하나 때문에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되었던 탓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겪은 아픔의 생채기는 깊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아픔이 존제산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할 것이다.

산은 고단함에 찌든 현대인들의 삶을 위안 받을 수 있는 그런 고마운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호젓한 산행을 즐겨한다. 어느 산길이건 상념에 젖지

않게 하리오만 존제산은 우리들에게 아예 그런 산행을 허락하지 않고 있기에 이 산에 배인

 생채기를 어루만지기는 고사하고 보통의 상념에조차도 젖어볼 수가 없다.

그것은 존제산이 군사 시설보호구역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율어에 있던 염상진등이 이 존제산을 넘어 조성지서를 기습하는 장면과

신속하게 벌교에서 구원 출동한 심재모의 계엄군에의해 산으로 퇴각하는 것들이 그려지고 있고,

염상진이 벌교를 습격하는 틈을 타 심재모가 빨치산에는 없었던 통신장비를 이용해 보성경찰서장에게

 텅 빈 율어의 빨치산 해방구를 기습하도록 명령함으로써 피아간에 일승씩을 나눠 가지던 장면이,

하대치가 고흥에서 암약할 밀명을 띠고 벌교의 칠동으로 내려가는 것 등등이 각각 묘사하는 것처럼

이 존제산은 벌교와 조성 그리고 율어는 물론 멀리 화순의 모후산과 백아산, 순천의 조계산으로까지

직접 이어지고 있기에 빨치산들이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그 시절에 오래도록

지역 양민들을 괴롭혔던 것 같다.

 

존제산(尊帝山:10:15)

존제산은 성벽처럼 웅장하게 솟구쳐 있는 벌교의 진산이다.

 해발 704m로 군내에서 웅치면 제암산에 이어 두번째 높은 산으로서

해발 300m 이상의 고지가 무려 65㎢나 되어 가장 넓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남·북의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비극의 현장으로 유명한 산이며,

소설 태백산맥의 중심무대로 외지에 더 알려진 존제산 자락을 작가 조정래는

그의 소설<태백산맥>을 통해 그만 그만한 높이의 산들이 줄기를 뻗고 그 줄기들이

겹쳐지고 이어지면서 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건 산들이 손에 손을 맞잡은 강강술래

춤이거나 어떤 성스러운 것들을 받들어 올리고자 하는 산들의 어깨 동무였다.」 고

존제산의 산세를 역사적인 사실과 연관지어 풀이하고 있다. 

존제산은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산은 불교와 연관된 지명이 많은 산이다.

 존제산 북쪽 유신리의 갓바위 윗등에 염주를 목에 건 불상모양의 바위,

 부처님이 하느님과 만나던 곳이라는 천치(天峙), 죽으면 한 줌의 흙이 된다는 뜻의 진토재,

승려들이 모여 문장을 자랑하던 곳이라는 석거리재 등은 모두 동쪽 기슭에 있었던

신라 고찰인 징광사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벌교읍, 조성면, 율어면에 둘러싸인 존제산의

 능선은 거의 밋밋하게 높이가 계속되고 정상에 오르면 멀리 무등산, 모후산, 백운산

그리고 여자만과 고흥반도가 한눈에 들어 온다고 하는데 오늘은 볼수가 없네그려

KT 존제산 중계소(10:30)

태양이 이글거리는 임도를 1시간 가까이를 걷는다.

이곳은 정상을 군부대 KT에게 빼앗기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임도를 내려오는데

반팔을 입은 탓에 팔뚝이 햇볕에 익는 느낌이 들 정도로 따갑고 발바닥은

자갈길에 불이 붇는정도 불이난다. 자꾸만 체력저하로 인해 뒤처지는데

내리막길임에도 불구하고 앞 사람을 따라가질 못한다. 중간에 산길로 접어 들었다가

다시 임도를 내려오니 주릿재가 나온다. 존재산에서 출발한 지 1시간만에...

주릿재 정상에 도착하니 작은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안내판과 돌에 글을 새겨

태백산맥 문학비가 있고 팔각정에는 먼저 온 동료 산꾼들이 꿀맛같은 휴식을 즐기고 있다.

우선 발바닥을 좀 식히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막걸리 한잔을 얻어 마신다.

아무래도 여기 계시는 분들은 여기서 산행을 마칠 기미가 보인다.

많은 고민을 한다. 피로도를 생각하니 여기서 줄여야 할 것 같고 대의명분을 생각하니

가야할 것 같기에... 그래 가자 누가 대신 걸어주는 것도 아니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시 천근만근 같은 육신을 이끌고 석거리재로 향한다.

이글거리는 햇볕은 더욱 더 따갑게만 다가오고...

주릿재에서 바라본 율어

율어라고 하는 지명은 먼 옛날 밤어면이 율어면으로 한자화 된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기록에는 백제시대 때부터 율어면으로 불렀다고 한다. 율어면에 밤나무가 많다거나 밤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율어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은 아니다. 아마 산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밤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게 된 이름인 듯 하다.

 

왜냐하면 율어에는 한자로 율변(栗邊)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지방사람들이

 평소에‘밤갓’이라 불러왔던 곳이다. 이는‘밤의 가장자리’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율어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도 좌익세가 강했음은 산이 많고 교통이 불편했던 점이 지리적인

 이유가 되겠지만, 율어면에는 금광(金鑛)이 있었기에 외부인의 유입이 많았으며 이들 외지인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히 늘게 되었던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회 환경적 여건이라 하겠다.

 

 예로부터 보성지방에는 금광이 여럿 있었고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도처에서 금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율어면의 칠음리에는 당시의 금굴이 지금도 남아있고 면소재지인 문양리의 여시개미란 곳에서도

질좋은 금이 나왔으며, 문덕면 봉정리 오얏등은 사금이 많이 나기로 이름난 곳으로 금방앗간이 있었고

복내면의 구 소재지도 사금을 채취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니 보성(寶城)이란 지명도 따지고 보면

 그냥 붙여진 허명(虛名)이 아니다 할 것이다

주릿재(11:30)

 율어면과 벌교읍 사이를 이어주는 818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개인데 고갯길이 마치

줄을 꼬아 놓은 것처럼 구부러져 있어 주렛재, 혹은 주릿재로 불리웠다고 한다.

벌교읍, 존제산, 율어면, 주릿재 등이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이다

  

주릿재는 벌교읍 추동리 대판이 마을 서쪽에서 존제산을 넘어 율어면 유신리에

이어지는 고개로서, 긴 밧줄을 풀어놓은 것처럼 꾸불꾸불 한 형국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조금 의심스럽다.

한자로는 주로치(周老峙)로 표기하기도 한다.

석거리재 가는 길에서 본 주릿재와  우측의 유신리

유신리 마애여래좌상이 석불은 율어면(栗於面) 존제산(尊帝山:해발 704m)으로 올라가는 입구
산기슭에 있다 유신리 마을에서 약 1km 떨어진 지점인데 가로 4.3m 높이
5m의 암벽에 浮彫로 양각한 마애불이다. 옛부터 이곳을 「미륵등」
이라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인근에서 고와편(古瓦片) 등이 발견되고 있다.


불상의 양식을 보면 높직한 육(肉)계와 소발(素髮)의 머리를 갖추고 얼굴은 원만상이나,
콧등에

손상을 입어 정확한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마와 눈썹의 선이 뚜렷한 것이 인상적이며

입가엔 가벼운 미소가 감돌고 있다. 귀는 길게 늘어뜨려 어깨위까지 내려 왔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여실하다.

 

법의는 통견(通肩) 으로 양어깨에서 다른 한겹의 어깨걸이개를 걸치고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우리나라에서

퍽 희귀한 예라 하겠다. 가슴밑으로 내려온 의문(衣紋)은 다른 불상에서 보는 예와 비슷하고 수인(手印)은

두 손을 앞가슴에 대고 왼손의 엄지와 인지를 잡고 오른손도 역시 같은 형식을 한 전법륜인(轉法輪印)

즉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다.


무릎으로 내려와서는 결가부좌를 했는데 길상좌(吉祥座)이며 그 밑으로 연화대 (蓮花臺)를 안치
하였는바

앙연(仰蓮)과 복연(伏蓮) 모각하고 밑으로는 하대석인 중석을 배치하였다. 중석은 양편에 우주(隅柱)와

중앙에 탱주를 조출 하였으며 맨 하단에는 형식화된 연화문을 엷게 각(刻)하였다.


광배(光背)는 주형광배(舟形光背)로서 중앙에 연화문(蓮株紋)의 내외로 이조(二條) 의 횡대(橫帶)를 돌렸다.

그 밖으로 화염문이 조식(彫飾)되었는바 이 화염문은 고식을 띠는 반면 월출산 용암사지마애불(국보 114호)의

예와 유사한 점을 나타내고 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 그 예가 거의 없는 양어깨의 어깨걸이라는 특이한 의문을 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북위나 북조시대 금동불에서 유행을 보았던 양식으로, 이곳 전남지방에서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의 불상의문 연구에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성년대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철계단 고개(11:55)

보성군 벌교읍 추동리와 순천시 외서면 반용리를 잇는 조그만 도로 내림길에

거푸집으로 만든 철계단이 나타나고 저 능선위에 앞서건 온누리님과 투투님이

가는데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자꾸만 더 처지는 느낌이다.

급경사에 오르는데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편백나무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향이 향 중에서 가장 고급인 침향(沈香) 냄새가 진동을 하는 느낌이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고 능선에 도착하니 온누리님이 기다리신다.

잠시 후 편백나무 숲에서 웃통을 벗어 던지고 자리를 편다. 투투님이 시원한 맥주 한잔을

권한다. 왜이리 꿀맛인가  몇번의 휴식 끝인지 원기를 조금 회복한다.

침향(沈香) 냄새(?)가  가득한 편백나무 숲

이 지역에는 편백나무 숲이 엄청나게 많다.

2번의 휴식이 효과가 나타난다. 몇번의 오르내림 끝에 농장이 나타나고 농장 컨테이너를 끼고

우측으로 돌아서니 느티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는 농장이 나타나고 개쉬끼가  짖어댄다.

좌측에는 다음구간이 조계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외서면

외서면은 순천의 최서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읍면지역에서는 인구면에서나

 면적면에서 제일 규모가 작은지역이다

북쪽은 송광면, 동쪽은 낙안면, 서쪽은 보성군 문덕면, 남쪽은 보성군 벌교읍과

 율어면에 접경한다. 산세가 좋은 편이며 망일봉(652.3m), 국기봉 (528.4m),

백이산 (548.3m)이 면의 주위에 둘러져 있다. 면의 중앙으로 주암호의 상류가

되는 송광천과 외서천이 관통하여 2.18㎢의 밭과 4.42㎢의 논을 형성하고

 있으며 국도 15호선이 면의 중심을 지나고 있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은 편이다.

면의 전체가 비교적 높은 지형 (해발 250-300m)으로 토질이 비교적 척박하며

 일교차가 심하고 고랭지성 기후를 보이고 있다.

 

 

우측으로는 보성읍이 한 눈에 들어오고 새벽에 지나왔던 벌교 우회도로와

중도 그리고 여자만(汝子灣)이 시원스럽게 보이나 나무숲에 카메라 앵글에

잡을 수가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석거리재(13:40)

 순천시 외서면과 보성군 벌교읍의 경계를 짓는 곳으로 국도 15호선이 통과하는 곳이다

30여간을 이 곳을 지나다녔지만 이곳이 석거리재인 줄은 이번에 알았다.

이 고개에 섶나무가 많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로는‘新巨峙’로 잘못표기하기도

 하는데 ‘薪巨峙’가 보다 적절한 표기라고 한다.

벌교와 고흥, 낙안등 벌교읍을 생활권으로 하거나 벌교읍을 거쳐야만 광주나 화순으로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직접 경험하거나 수없이 보고 들었을 터인데, 옛날 목탄버스나 구식 낡은 완행버스가

브레이크 파열 등 고장으로 석거리재에서 굴러 크고 작은 부상은 물론 사망자가 나오는 등 인명 피해가

 많았으며 그런 사고가 잦았던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석거리재 휴게소

천신만고 끝에 오늘 산행을 마무리한다.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휴게소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휴게소에서 키운 토종닭으로 닭백숙과 닭도리탕으로 소주+맥주를

연거푸 3잔을 마시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흔히들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말고 순천에서 인물자랑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자랑하지 말고 전라도에서 음식솜씨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난 평소에는 휴게소나 역전, 버스 터미널 근처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는

경우 빼고는 식사를 잘 안하는 편인데 이번에 호남정맥을 타면서 그 편견이

깨져 버렸다. 적어도 호남에는 그것이 기우이다. 이곳 음식도 참 맛있었다.

이번에는 북악산님께서 그 많은 식대를 스폰서 하신단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낙안읍성에 들렸다가 가기로 하고 낙안읍성을 향한다

낙안읍성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3면이(금전산, 백이산, 오봉산)

둘러쌓여 있고 남쪽으로만 열려있다. 금전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낙안읍성의 해자를 이루고 들판을 흘러들어 가고 있다.

낙안읍성은 외부에서 보면 배가 떠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는 조형적으로 형상화되는데

서쪽에 있는 빽빽한 대나무 숲은 뱃머리를 상징하며

읍성 중앙의 장터에 있는 은행나무는 돛을 상징했다고 한다.

지형적으로 배의 모양을 하고 있다보니 배에 물이차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우물 파는것을 금기시 되었으며 대신 얕은

샘의 물을 퍼냄으로써 배에고인 물을 퍼낸다는 의미로 상징화 했다고 한다.

낙안읍성 동문 - 樂豊樓

낙안성은 관에 의해 계획된 한국읍성 마을의 전형적인 예로 성곽과 권위건축, 민가, 마을구조

 등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외곽은 막돌로 쌓은 성곽으로 경계를 이루었고 동쪽과 남쪽 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마을은 임경업 장군이 1626년 군수 재직시 기본골격이 갖추어 졌다고 전하며 장군에

 관계되는 유적이 많다. 성곽은 조선 태조 6년(1397)에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흙으로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마을의 도로 체계는 T형으로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도로가 주도로가 되며, 남문에서 중앙의 객사로 통하는 도로는 의식과 상징적인

도로가 된다. 중심이 되는 객사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객사의 전형적 형태를 하고 있고,

관아 부분이 있다. 이 마을엔 현재 150여호의 가옥이 있는데 18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건축된 것들이다.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옛 고을의 기능과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현재85세대 229명이 살고 있음)에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전통문화로서,

낙안읍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3년만에 와본 느낌은 자꾸만 상업화되고 현대화 되면서 옛모습을 잃어가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이곳 주민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긴 하지만...

낙안읍성에서의 망중한(忙中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