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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16구간 - 웅치(곰재)에서 시목치(갑낭재)까지

by 범여(梵如) 2011. 6. 19.

○ 산행일자 : 2011. 06.18~19(무박산행)
○ 산행날씨 : 날씨는 맑음, 박무현상, 엄청나게 더움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의 28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22,9㎞/ G.P.S 거리 29.2km/ 11시간 30분소요

○ 산행코스 : 웅치(곰재)-백토재-국사봉-깃대봉-바람재(땅끝기맥 분기점)-삼계봉-장고목재-가지산 갈림길

                 가지산(짝뚱)-장평우산 갈림길-427봉-피재-병무산-471봉-금장재-용두산-453봉-만년고개 임도

                 371봉(암릉)-224봉-350봉-시목치(갑낭재)
○ 소 재 지 : 전남 장흥군 장평면,유치면,부산면,장동면 / 화순군 청평면

요즘 대통령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든다. 어제도 공무원들을

질타하건만 요즘은 영이 서지 않는것 같다.

대한민국 공무원과 지도층들이 썩어도 이렇게까지 썩은 줄 몰랐다.

나라 전체가 악취로 진동하는 느낌이다. 18대 들어서 국회의원 나리들만 비리로

20여명이나 낙마를 하고 국토부 직원들이 자기들 연수회에 인.허가건을 미끼로

업자들을 불러다가 경비를 대납하게 하고 심지어 고작 6급과장이 자기 사무실에서

뇌물로 의심되는 2600여만과 산삼뿌리로 뇌물을 받지않나... 글고 그걸 감시해야

하고 처벌해야 하는 감사원과 검사들까지 한통속이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대통령나리도 답이 나오질 않는 모양이다. 광화문에다 매달아 놓고 처죽일 00들

거기다가 왠 놈의 비싼 떡은 처먹는지 몇천만원을 걸리면 떡값 받았다고 하니...

내가 사는 지역에 공某 의원이 골프장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러면서 문자가 왔다 “자숙의 시간을 같겠다고 난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

저런자들 뽑은 범여의 엄지 손가락을 자르고 싶은 심정이다. 민의를 대표하여

뽑아 줫더니만 자기 배만 불렸으니...

요즘 공무원들과 지도층 인사들은 자기 본분을 망각해도 한참을 망각하는 것 같다.뽑아진 국민에게 下心으로 봉사하고... 글고 자기들의 녹을 주는 자는 세금을 내는국민들인데 그걸 망각하고 직분을 이용해 군림하고 國益을 팽개치고 私益만 취하려고 하니...자꾸만 民草들의 허리는 휘어만 간다. 오늘따라 임제선사의 어록이 생각난다임제선사의 語錄 示衆편에 나오는데 如大器者 直要不受人惑 隨處作主 立處皆眞(여대기자 직요불수인혹 수처작주 입처개진)

직역하면 그릇이 큰사람은 사람의유혹을 받아들이지말고 곧을 필요가 있으며

처해진 상황에따라 주인이되면 선 그자리가 모두 참이다라는 말인데

국민들의 녹을 먹는 자들은 꼭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한다. 그리고 공무원을 채용할 때

성적순으로 하지말고 인성을 우선시 해서 뽑았으면 한다. 심성이 곱지 못한 사람은

어딜 갔다놔도 제대로 일을 처리못할 것이다. 오늘 남도길을 걷는 장흥땅옆 강진으로

유배를 간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시절에 있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잠기면서

호남정맥 17차 산행길의 버스에 몸을 싣는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곰치 휴게소(02:50)

서울 양재동에서 밤 11시에 출발하여 오늘 산행거리가 긴 관계로 휴게소도 한번만 들린다.

버스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 정읍휴게소까지 2시간 20분에 도착한다. 휴식을 취한 후

광주 시내를 빠져나와 어두운 시골길을 덜컹거리며 달린다.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된다.

좁은 도로 옆은 이제 모내기를 한 논이 보이고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자주 보인다.

잠시후 지난구간 날머리인 곰치 휴게소에 도착한다. 휴게소는 깊은 잠에 빠져있고 담벼락에

핀 영산홍만 산꾼을 반긴다. 장비 점검을 한 후 도로를 200m정도 걸어가 산행을 시작한다. 

곰치 (03:10)

산행대장의 지시에 따라  인원을 점검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 시작은 언제나 마찬가지만 빡세게 치고 올라가다보니 몸이 예열되지 않은 상태에서

참으로 힘이든다.하늘엔 약간의 박무가 있긴하지만 음력 오월 열여드렛날의 달이 계속해서

산꾼을 쫒아온다. 오늘 산행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장흥에서(장평면) 시작하여 유치면과 부산면의

북동쪽 경계능선을 넘어 장흥(장동면)에서 끝이난다. 그런데 지난구간인 화순군은 산길을 마치 庶子

취급을 하듯이 무관심한 정맥길 관리로 엄청나게 힘이 들었는데 이곳은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등로관리를 잘 해놨고 거기다가 미안할 정도로 이정표를 많이 세워 산꾼을 배려한다.

옥에 티라면 이정표 거리표기가 誤記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랴

장흥군민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까지 편안한 등로에 너무나 고맙기만 하다.

화천처사 여흥민공 부부합장묘

15분정도 빡세게 친 후에 편안한 등로를 걷다가 다시 부드러운 내림길을 걷는다.

주위에는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잠을 자다 새벽 산꾼에 놀란 모습이다.

잠시 후 불빛이 숲에서 반짝거린다. 자세히 보니 반딧불이다. 참으로 오랫만에

본다. 하긴 이곳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운곡마을과 병곡마을 있는 곳이니

그만큼 청정지역이라 보일수도 있겠지...7,8월에나 볼 수 있는걸 봤으니 그것도 행운 아닌가

백토재(04:30)

옛날 이곳에서 사기그릇을 만들 때 쓰는 백토가 많이 나와서 얻은 이름이란다.

지금은 그냥 밋밋한 임도에 불과하다. 주위에는 가끔씩 하얀 돌들이 보이긴 하다.

 낙남정맥길에 하동구간 백토재와 지명이 똑같다.

거기에도 고령토가 많이 생산된다고 하였고 거기는 실제 타일과 양변기같은

도기를 만드는 동서산업이란 커다란 공장이 있었는데...

국사봉(499m:04:40)

국사봉에 오르니 검은 이정석에 “정남진 장흥 국사봉”이 나타나고 준.희님이 붙여논

아크릴 이정표가 반갑게 산꾼을 맞이한다. 숲이라 좀 어둡긴 하지만 주위에서 날이

밝아오고 이젠 헤드렌턴을 벗어 버린다. 바람한점 없는 날씨라 헤어밴드에는

벌써 땀이 뚝뚝 떨어진다.

깃대봉(448m:04:50)

 대간길이나 정맥길에서 만나는 깃대봉은 백운산이나 국사봉만큼  참 흔한 이름중

하나이다.  대부분 일제시대 이후 측량을 하면서 기준점으로 깃대를 꽂아 생긴

이름들이라고 한다. 이곳 깃대봉도 고도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군더더기 없이

뾰족하게 솟아 있어 기준으로 삼기에 적당한 산인것 같다.

서울 광화문에서 북쪽으로 중강진, 동쪽으로 정동진이 있다면 남쪽으로

정남진이 있다. 그 정남진이 오늘 걷고 있는 이곳 장흥이라고 한다.

그 좌표점은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에 표시되어 있다.

장흥은 예로부터 그리 알려지진 않았고 산의 면적이 군 전체의 68%에 달할

정도로 오지안 걸 보면 아마 내고향 경남 의령만큼이나 오지인 것 같다.

 

그러나 한때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고려초만 해도 장흥은 일개 현에

지나지 않았거나 이웃의 보성이나 영암에 병합되어 있었으나  고려 17대

왕인 인종(1129년) 때 와서 인종비가 장흥군 관산면 출신이었는데

인종비는 무신정권 밑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했던 의종, 명종, 신종을 비롯하여

왕자 5명과 공주 3명을 낳았다. 그 공으로 일개 현(縣)에 불과하던 장흥이

장흥부로 승격하였다. 그 후 조선 고종때(1895년) 장흥군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르는데 현재 3개읍 7개면의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장흥군 홈페이지 인용)  

땅끝기맥 분기점

땅끝기맥은 호남정맥의 바람재에서 시작해 계천산,차일봉,국사봉,활성산,월출산,도갑산,

월각산,별뫼산,서기산,첨봉,두륜산,대둔산,달마산,도솔봉을 거쳐 육지 內 최남단 해남의

 땅끝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18,7 km의 산줄기이다.

바람재(05:00)

땅끝지맥으로 분기하는 지점으로 화순군 청풍면과 장흥군 유치면과 장평면등

2개군 3개면이 접하는 지점이다. 바람재는 북쪽으로 200m 내려간 안부에 있는 유치면과

청풍면을 잇는 고개로 북쪽이 막힘이 없어 바람이 세다고 하여 바람재라고 한다.

 

진행방향 헬기장의 왼쪽 모서리는 호남정맥길이며 오른쪽 모서리 방향은 땅끝지맥이다.

호남정맥길의 방향 이정표에는 현위치 "바람재 삼거리"

그리고 곰치휴게소 5.3km/국사봉 1.9km/제암산 26.6km/가지산 4.2km

삼계봉 1.4km/화악산 4.5km/바람재0.2km 라는 이정표에 깃발이 걸려져 있다
땅끝지맥 방향에는 대리석에 "노적봉 430m 호남정맥과 땅끝기맥분기점 이곳에서

 해남 땅끝까지 도상 117km 시발점 2002,12,8" 이라는 글까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땅끝지맥은 이곳 헬기장 노적봉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이어지는

 117km의 산줄기로 호남정맥과 함께 탐진강을 둘러싸는데, 탐진강은 길이

 55.07km이며  전남 3대강(섬진 영산 탐진)의 하나로 장흥군 유치면과

영암군 금정면의 경계에 있는 인근 국사봉(613m)에서 발원, 유치면

부산면 장흥읍 등을 지나면서 유치천 부산천과 합류한뒤 강진군 군동면

강진읍을 지나 강진만으로 흘러드는데, 주변은 평야로 넓은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산행 시작 2시간째 바람한점 없는 날씨에 땀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벌써 지치기 시작한다.

오늘은 인원이 그리많지 않아서 조금은 단촐한 느낌이다. 바람재 정상에서 30여분간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휴식을 취한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운곡마을 가는 길

안개로 자욱한 운곡마을

장흥에서도 오지중에 오지이다. 오지이다보니 이곳은 해방이후 6.25때까지

이곳은 빨치산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여.순반란사건과 6.25동란 때 국군에게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빨치산이 다다음 구간에 지나가는 조 정래의 태백산맥의

문학소재 근거지가 되었던 보성군 율어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산에는 아직도 그때의 참호들이 가끔씩 보인다. 좌.우 이념대립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희생된 民草들의 아련함이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느낌이다

삼계1봉(05:30)

삼계봉 삼각점이 봉우리에 삼각점이 있고 '삼계봉'이란 이름표도 달고 있네?

 오늘 구간은 이정목만 엉터리가 아니라 정상석도 엉터리로 세워져 있구나!

장흥군에서 세운 삼계봉은 진짜 삼계봉이 아니다 

산꾼‘서래야 박건석’님이삼계3봉이라고 해놨다.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듯...

삼계봉(05:40)

10분만에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고 또다른 봉우리 하나를 오르니  이곳에도 '삼계봉'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이정목이 서 있다.

두번째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가 삼계봉이 맞다. 장흥군이 봉우리와 산마다

이정목과 이정석은 세운 건 고맙지만 틀리게 된 것은 다시 정리하여 정맥

산꾼들에게 혼돈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三界峰은 산봉우리에 내린 비가 하나는 영산강으로, 하나는 탐진강으로,

또 하나는 보성강으로 흘러서 얻은 이름인데 실제로 삼계봉에서

3개의 강이 발원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곳엔 세워진 이정목은  엉터리 투성이다. 제대로 된것이 하나도 없다.

무조건 돈만 들이고 관리, 감독이 제대로 되지않은 탁상행정의 전시장 같은

느낌이다. 정확한 고증과 사후 감독을 했으면 좋으련만... 

삼계1봉(450.0m:05:50)

삼계1봉이란 곳을 지나니 급격하게 고도를 낮춘다.

가뭄탓인지 길은 상당히 미끄럽다. 다행히 장흥군에서 설치한

로프를 이용하여 조심조심 내려오니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스럽다.

들꽃이 장미보다 아름다운 이유?

아무렀게나 피어있는 싸리꽃이 참으로 이쁘게만 하다.

들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때문이 아닐까?

장고목재(06:05)

장평면 월곡마을으로 통하는 임도임인데 꽤나 넓은 도로이다. 

장고의 목처럼 잘록하게 생겼다고 해서 이 지역 사람들은 장고목재라고 부른단다

 

삼계봉에서 내려와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른 아침인데도 꽤나 더워서 그런지

서서히 지치는 느낌이다. 물한모금을 마신다.  물만 먹어서는 안될것 같아

식염 한 알을 입에넣고 물을 마신다.  초반에 페이스 조절을 하지 않으면

후반에 상당히 괴롭기에 적당한 휴식을 자주 취한다음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떠난다.

 

가지산 북봉(509.9m:06:30)

안개에 휩싸인 가지산?

장고목재에서 그리 험하지 않은 부드러운 육산이긴 하지만 다시 고도를 높인다.

저 아래 마을에서 마이크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장흥읍내에서  오늘 ‘정남진 장흥

마라톤 대회가 열리니 모두 참석하여 응원해달라는 내용이다.

요즘 각 지역마다 무슨 축제, 무슨축제하면서 축제를 많이 연다.

그런데 그것이 주먹구구식이 많아서 지역민들에게 이익이 아닌 민폐도 많은 모양이다.

이 지역 정남진 장흥 마라톤 행사는 꼭 성공하고 지역민에게 이익이 되는 축제였으면 한다

맛있는 산딸기

힘들게 등로를 오르니 커다란 송전탑이 서 있고 그 옆에는 산딸기가 엄청나게

많이 익어가고 있다. 동료 산꾼들과 함께 비타민을 보충하기 위해서 닥치는대로

따서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참으로 달콤하고 맛이 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지루하긴 해도 그리 힘은 들지 않는다.

잠시 암릉구간을 지난다. 우측 아래가 보림사이건만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九山禪門의 하나인 寶林寺는 오리무중이다.

서너번 와본 사찰이지만 올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가지산 갈림길(06:50)

암릉구간을 지나니 숲이 너무많아 상당히 어둡다.

가지산 갈림길이 나오고 가지산이 0.2km라고 되어있다.

베낭을 벗어놓고 가지산을 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50m밖에

되질 않는다.  장흥군 관계자는 이정표를 세워준데는 너무도 고맙다.

근데 숫자 개념은 전혀 없으신 모양이다. 거리 표시는 전혀 맞질않다.

후답자들께서는 km는 전혀 무시하시길... 

안개로 인해 뭣진 조망을 볼 수 없어 아쉬워하는 산꾼 

가지산이라고부르는 곳에서 보림사쪽을 바라본다.

보림사를 향한 범여의 그리움이 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긴 꼭 부처님을 친견해야만 믿음인가. 이곳에도 부처님이 있을 터인즉

처처불상(處處佛像)이요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 했거늘

가지산(伽智山:06:55)

 유치면 봉덕리에 위치 하면서 장평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지금

이 봉우리는 진짜 가지산이 아니다. 가지산 정상은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정상석이 있는 곳인데  산이 511m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부 일대가 우뚝 솟은

다섯 개의 바위봉우리로 되어 있다.

오늘은 짙은

안개땜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가지산은 인도의 신비로운 기운이자리 잡았다고 알려졌으며 인도와 중국

소주(蘇州)의 가지산과 닮았다고 하여가지산으로 부르게 되었단다.

흔히들 가지산하면 낙동정맥 길에 있는 영남 알프스의

가지산을 떠올리지만 이곳 가지산이 원조 가지산이다. 511m의 낮은 산이지만

구산선문 중 남원 실상사에 이어 2번째로 개창된 가지산문 보림사가 있어서

유명해진 가지산은 정상부에 5개의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로 되어있고 보림사쪽으로

노송과 어우러진 암릉은 참으로 멋이있는 곳이다.

또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도 알려진 곳으로 빨지산이 은거하기도 했었다.
험한 산세와 정상에 오르면 무등산,조계산,제암산,천관산,억불산,수인산,월출산등

남도의 산들이 시원하게 조망되며 정상 바로아래로는 4만여평의 가지평전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탐진강을 바라보며 하산하는 길은 험한 바위사이로 길이 잘 나있다

특히 산은낮고아담하지만 호남정맥길의 맥을 잇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보림사 일주문 편액

 보림사(寶林寺)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보림사가 세워진 것은 원표대덕이 당나라와 인도를 두루 순례한 후 신라로

 돌아와 759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당나라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선종의 법통을 전수받은 도의선사가

821년에 귀국하여 염거(廉居)선사에게 법을 전하고,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수받은 보조선사 체징(804-880)이 헌안왕 4년(860)에 가지산문을 열어 큰 절이 되었다.

 

보림사는 중국 남종선의 초조인 육조 혜능이 살았던 소주 조계산 보림사와

같은 이름이다. 이는 우리나라 선종의 본산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 중국의 보림사와 더불어 삼보림이라 일컬어진다고 한다.

 

가지산문(迦智山門): 도의(道義)의 법손인 체징(804-880)이 보림사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쳐 가지산파를 이루었다.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며,

북한부 사람으로 그 법호는 처음 명적(明寂)이었으나 나중에 원적(元寂)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라 37대 선덕왕 5년(784)에 당으로 건너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 에게서 법을 얻고 도의라 호를 고쳤다고 합니다.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魔說)이라 비방하며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雪岳山)

진전사(陳田寺)에 칩거하여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염거는 그 법을 다시 체징(體澄)에게 전하였다.
체징은 당으로 건너가 떠돌아다니며 고승을 찾았으나, 그의 조사(祖師)인

도의(道義)가 물려 준 것 이외에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문성왕 2년(840)에

 돌아왔습니다. 돌아 온 체징은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보림사는 중심 불전으로 대적광전과 대웅보전 두 곳을 두었다.

대웅보전은 원래 조선 초기 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84년에 제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근래에 조성한 삼세불좌상과 4대 협시보살 입상을 모셨으며,

가운데 석가모니부처님, 바로 우측에 보현보살, 그 옆에 미륵불, 지장보살,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측에 문수보살, 그 옆에 연등불, 관세음보살이 있다.

후벽에는 3폭으로 구성된 영산회상탱을 봉안하였다.

불상은 화려하게 조각한 불단 위에 모셨고 머리 위에는 아자형 닫집을 걸었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중층 불전이다.

내부는 상하가 트인 통층인데 천장은 상층부에 우물반자를 가설한 우물천장으로 장엄하였다.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117호)

대적광전 안에 있는 이 불상은 가지산문 종찰 보림사의 주불이다.

 한국전쟁 때 대적광전이 불탔으나 이 불상만은 무사했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새로 지은 건물이지만 원래의 자리인 것 같다.

대좌와 광배는 없어지고 불신만 남아 있다.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어서 9C 이래 지방 선종 사찰에서 조성한 비로자나불상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기준작품이며, 신라 하대에 많이 만들어진 철조불상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높이는 273.5cm이다. 

 九山禪門과 五敎 九山
신라불교는 열반종(무열왕때 보덕), 율종(선덕왕때 자장), 법성종(경덕왕때 진표율사),

화엄종(원효와 의상), 법상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각기 그 교리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를 5교라고 합니다.
구산은 신라말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종이 들어왔는데 고려초기까지 대표적인 9개의

선문이 개창되었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합니다.
9산선문은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 지리산 실상사. 곡성군 죽곡동 동리산 태안사.

 보령군 미산면의 성주사. 강릉군 구정면의 사굴산 사굴사. 영월군 수주면의

사자산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문경군 가은면의 희양산 봉암사. 창원군 상남면

 봉림산 봉림사. 해주군 금산면 수미산 광조사 이다.

 

신라땅이 곧 불국토라고 믿고 있던 통일신라 초기 신라인들은 “모든 현상은

 하나의 이치로 돌아와야 한다(萬法歸一)”는 화엄사상을 받아들여,

통일왕국의 주도 이념으로 삼아 화엄불국토 건설을 실현하고자 한다.

화엄불국사의 조영은 이 꿈의 실현을 표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8C 후반 제35대 景德王(742~765 재위) 대를 정점으로 통일왕조는

왕실의 내분과 지배층의 부패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계속되는 왕족간의

 왕위 다툼으로 지방에서는 독자적 경제기반을 가진 호족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로 말미암아 절대화되어 있던 진골왕족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그들의 이념적 바탕인 화엄사상도 더 이상 주도 이념의 구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새 사회를 이룰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不立文字 直指人心’이라는 종지를 내건 달마 선종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중국 선종의 초조 菩提達磨(?~528)는 520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 숭산 소림사에 머물면서 선종을 전했다. 달마의 법맥은 5조 弘忍(601~674)까지는

 한 갈래로 이어오다가, 6조 慧能(638~713)에 이르러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갈라진다.

神樹대사(606~706)를 초조로 하는 북종선은 漸修를 주장하며 皇室의 비호를 받으며

북방지역으로 전파되었다. 頓悟를 주장하는 남종선은 남종선의 초조이자 6조로 인가받은

 혜능이 주석하던 廣東省 韶州 曹溪山 보림사를 중심으로 남중국 전역으로 퍼진다.

신라 사회는 여전히 골품제도를 바탕으로 한 신분사회였다. 아무리 뛰어나도 육두품 이하

하층귀족층 출신들은 최고 집권층이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신분상의 제약을 받던 육두품

이하의 하층 귀족계급 출신 승려들이 대거 당나라로 건너가서 신사상을 체득하고 돌아온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혁신적인 남종선을 배워 당나라의 선문 조사의 印可를 받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인가를 받은 선사는 一門을 개설하여 조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9C 전반부터 개설되기 시작한 구산선문은 이렇게 우리나라 선사들이 당나라에 건너가서

당나라의 선문 조사들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와 설립한 것이다.

 

그중 가장 먼저 남종선의 心印을 받고 돌아온 사람은 도의선사였다. 도의선사는 설악산

진전사에서 40년 동안 선정을 닦으며 염거화상(?~844)에게 법을 전한다. 염거화상은

설악산 億聖寺(선림원)에 주석하면서 보조선사 체징(804~880)에게 법을 전해 주었고

 체징은 장흥 가지산으로 가서 가지산문을 연다. 이어 8개의 산문이 열린다.

 이를 9산선문이라 한다. 이들은 9C 초반부터 10C 초반에 걸쳐 그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으며 모두 개산했다.

 

9산선문은 가지산문(장흥 보림사-도의), 실상산문(남원 실상사-홍척),

사굴산문(강릉 굴산사-범일), 동리산문(곡성 태안사-혜철), 성주산문(보령 성주사-무염),

사자산문(영월 흥녕사-철감), 희양산문(문경 봉암사-도헌), 봉림산문(창원 봉림사-현욱),

수미산문(해주 광조사-이엄) 등이다.

이 가운데 굴산사, 성주사, 봉림사, 광조사는 폐사되어 절터만 남아있다.

요즘은 산에도 피자 배달을 해주시는가 보다.

장평우산 갈림길(08:00)

가지산 갈림길에서 조금 지나 등로에서 아침상을 펼친다.

모두들 힘이 드는지 맥이없다. 산악회 원로이신 원일님께서

피자 한판을 꺼내서 아침을 대신한다.  나는 비빔면을 끓여 오이 냉채와

토마토를 갈아 아침을 때운다. 사실 밥보다는 막걸리가 더 팔린다.

아침상에 4명이 막걸리 4병에 캔맥주 4개를 다마시고 나니 선두는 뭣이

그리도 급한지 도망을 가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오늘도 후미 그룹이 된다.

오르락 내리락 지루한 산행은 계속 되는데  갑자기 밀어내기 신호를 보낸다.

에라 모르겠다 늦은면 늦는대로 느긋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일어서는데 이게 뭐야 조그만 영지버섯이 2개나 있네 얼른 전리품으로 챙기고

베낭을 메고 불알 요령소리 나도록 뛰어가니 후미그룹들이 보인다.

아침 햇살이 따갑기만 하다.  다시 능선을 하나 치고 오른 다음에 427봉을 만난다.

여기서 다시 급격하게 고도를  낮춘다. 이곳 산들은 청정지역답게 나무들이 참으로

건강하다. 산나리를 비롯한 야생화도 많고... 다시 임도가 나타나고 공사 차량소리가

분주하다. 그러면서 청주 한씨 종중묘가 나타나고 편백나무 숲에 버섯 재배단지를

지나니 피재가 나타난다.

피재가는 길의 묘지에서 만난 솜다리

청주한씨 종중묘

피재의 버섯재배단지

피재는 지금 공사중?

피재는 공사를 하느라 난장판이다. 11월말까지 교통도 통제를 한단다.

저 밑에 탐진댐 수몰지역 공사를 하느라 그런단다. 그래도 그렇지 정맥길을

아예 깡그리 뭉개버렸다. 길 자체가 없다 . 참으로 개념없는 인간들...

하긴 요즘 공무원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역사의식이나 소명의식을

바라는 자체가 무리이겠지...

피재(08:50)

장흥군 장평면봉림리와 유치면 용문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피재라 불리게 된 연유는  신라의 승려 원표대덕선사가 인도에 있는 보림사를

거쳐 중국 보림사에서 참선하던 중 한반도에 瑞氣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두루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仙娥(선녀)가 나타나 자기가

 살고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든다고 호소해왔다.

그래서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는데, 오직 백룡만

 끈질기게 버티었다. 원표대덕선사가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웠더니 마침내 백룡도

견디지 못하고 연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 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용 꼬리에 맞아 패인 자리가 용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 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또하나의 설은

 보조선사가 절을 지으려고 나라 안 곳곳을 살피던 중 가지산에 와 보니

 절터로는 좋은데, 큰 못이 있고 뱀, 이무기, 용이 많이 살고 있었다.

보조선사는 도력으로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후 가지산 아래 못에

흙과 숱을 가져다 넣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흙짐과 숱짐을 짊어진 안질 환자가 줄을 잇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못은 메워졌다.

보조선사는 안 나가려고 버티는 청룡과 백룡을 지팡이로 때려서 내쫓고 절을 지었다.

쫓겨난 두 용이 하늘에 오르려고 서로 다투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패여 용소가 생겼다. 결국 백룡은 승천했지만 청룡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죽었다. 지금 보림사 남쪽에 있는 피재가 바로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진 곳이고, 장평면 청룡리는 청룡이 죽은 곳이라 한다.

 피재 뒤편에는 용두산이 있고, 보림사 아랫마을 용문리에는 용소가 있고,

용문리 옆에는 늑룡리가 있는 등 부근에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피재 공사장을 요리조리 피해 건너편 정맥길에 겨우 오른다.

좌측 편백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조금 살것만 같다.

묘지옆에서 젠틀매님이 또다시 산상주막을 펼친다.  막걸리 2통에

캔맥주 2개를 게눈 감추듯이 마신다. 이제 15km정도 왔으니 절반정도

온 느낌이다. 능선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성 산꾼이 없는 틈을 타 바지를 내리고 거풍을 즐긴다. 속옷이 땀에

젖어 사타구니가 쓰라리는 것을 막기위한 방편으로... 오르막을

내리막이 수도 없이 걷는다. 현재까지 생수 1.8L, 막걸리 2통, 캔맥주 2개

이온음료 1병을 마셨는데도 오줌 한방울 나오지 않는다.

병무산 정상 헬기장

병무산에서 용두산까지 약 2km의 거리에 관리되지 않은 헬기장이 4개나

집중되어 있다. 참으로 말도 되지 않는다.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도

아닌데 헬기장을 4개나 건설한 이유를 모르겠다.  참으로 한심하다.

병무산(해발513.7m:10:45)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장흥군 장평면과 유치면 그리고 부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삼각점(청풍24-1990재설)이  설치되어 있다.

햇볕은 따갑다못해 드러낸 팔뚝이 금방이라도 익는 느낌이다.

병무산 정상에서 바라본 탐진강에 설치된 탐진댐

길이는 55.07km,  유역면적은  508.53㎢에 달한다. 전남 3대강(섬진, 영산, 탐진)의 하나인 

탐진강은 장흥군 유치면과 영암군 금정면의 경계에 있는 국사봉(613m)에서 발원하여 유치면

부산면 장흥읍 등을 지나면서 유치천 부산천과 합류한뒤 강진군 군동면 강진읍을 지나 강진만으로 흘러든다.

 

심한 곡류와 급경사 지역이 많으며 많은 토사를 하류로 운반하기 때문에 유역에는 부산평야 장흥평야

강진평야 등 충적평야가 발달되었다. 하구에는 간척사업으로 하도(河道)가 정리되고 넓은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신라 문무왕때 탐라국 고후(高厚)형제가 내조할 때 상륙하였다고 하여 탐라와 강진의 한글자씩 따 탐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고, 원래 예양강으로 불렀는데 탐라도 사람이 육지에 처음으로 배를 대어 올랐다하여

탐진강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곳 출신(장흥)의 소설가 한 승원이 지은 “다산”에서 강진땅으로 유배당한

다산 정 약용을 찾아온 지기 김 이용을 탐진강변에서 배웅하는 장면에...

“나주쪽의 넘어 재아래서 걷고 또 걸으며 속절없이 또 울었다. 탐진강의

물너울을 앞에 둔 채  고향 두물머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물너울과

소매마을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다시 울었다”  중략...

 

유배의 서러움에 북받혀 울고 또 울었던 탐진강변에 다산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정자(亭子)문화... 이곳 장흥 탐진강변에도 정자의 고장이라는 화순 못지않은

정자들이 많다.  1828년 최 규문이라는 자가 부친이 탐진강 건너에 있는 조부 묘소에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 있는 용호정,

조선조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 관직을 은퇴하고 은거하였다는 장동면 만동리

 장항마을 강가에 지은 동백정, 김린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내던지고 낙향하여 군동면에 사인정을 짓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하늘기둥님 고맙습니다

병무산 정상에서 또 한차례 후미그룹들이 막걸리에 맥주파티를 펼치는데

원일님 베낭에는 뭣이 나와도 나와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장재

직전에 또다시 술판을 벌인다. 오늘따라 회장님 컨디션이 무척이나 좋아 보이질 않아

보인다. 새로오신 연세드신 분은 대장님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고...

금장재(11:30)
장평면 용강리 여의동과 관한마을 잇는 재인데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모양인지

희미한 등로에 인적이 없는곳에 장흥군은 친절하게도 이정표를 설치해놨다.

용두산(551m:11:50)

이곳 장흥사람들은 욕심이 많은건지 아님 부산을 좋아하는건지...

부산의 용두산도 이곳에 갖다놨고... 저 아래 면소지도 부산면이라 ㅋㅋㅋ

지난해 낙남정맥을 타면서 김해 사람들의 산 욕심도 알만하더니만

김해에 가면 도봉산도 있고 백두산도 있더니만 이곳도 김해못지 않구먼

용두산 정상에서 동료 산꾼들과 

용두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니 저 넘어 아련히 무등산과 안양산이 보인다.

복싱경기를 할 때 한방에 K.O가 되면 대미지가 적어 회복이 빠르지만

잔펀치를 많이맞고 판정패를 하면 상당한 대미지가 누적이 되어 엄청나게

힘이 드는것과 같이 오늘은 큰 산도 없고 힘든구간도 없지만 오르내림이

수십번도 더 하니 정말 힘이든다. 현재 20km가 넘은 지점이다

정말 힘이들고 포기하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중간에 포기하고 탈출을 시도한

동료 산꾼들이 부럽기만 하다. 산행을 시작한 지 9시간이 지난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따가운 햇살에 근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느낌이다

이곳은 그늘이 없어 퇴악볕에 그대로 노출이 된다. 저 아래 상방이 마을은

 한가롭게만 보인다. 산판을 다니는 트럭만이 산꾼을 응원한다.

만년재(12:45)

장평면 상방이 마을과 장동면 만년리를 잇는 고개이다.

동료산꾼 도리깨님이 장평중학교를 다닐때 넘었던 고개라고 한다

저 멀리 지난번 걸었던 제암산 임금바위가 쭈빗하게 튀어나와 있고

그 아래 하산리와 만년리의 들판은 여유로워 보인다

지도상에는 만년재 임도에서 371봉만 넘으면 시목치가 금방

나올줄 알았는데 가도가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다리는 천근만근...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다. 오늘구간이 남도길 산행중 가장 힘이든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만년재에서 봉우리를 4개를 넘었건만

하산지점이 보이질 않는다. 저 넘어 제암산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막걸리와 맥주를 꺼내 마신다. 얼마나 더운지 아무리 마셔도 오줌 한방울

나오지 않고 사타구니가 헐었는지 자꾸만 쓰라리다.

탐진강과 함께 장흥을 대표하는 억불산이 저넘어 보인다.

억불산은 높이가 518m로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능선이 길고 부드러워 마치 고

운 여인이 치맛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걷는 것과 같은 형상처럼 보인다.

재미있는 전설이 담긴 며느리 바위는 어린애를 업은 여자의 형상, 아니면 스님이 합장을 하고

 기도하는 부처의 모습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가까이 가보면 그 웅장함이 하늘을

찌를듯하고 20만평의 편백나무 숲과 대나무 숲은 삼림욕장과  산책로가 있다고 한다.

요염한 자태로 피어있는 저 나리는 산꾼들을 유혹하고...

224.9봉(14:00)

224봉을 지나도 날머리는 보이지가 않는다. 퇴악볕에 더위를 먹었는지

머리가 멍멍하다.  산행을 시작한 지 11시간 정도 되었다.

겨우 겨우해서 350봉 아래에 오니 편백나무 숲에 나말고도 패잔병처럼

동료산꾼들이 멍하니 앉아있다. 이젠 식수도 떨어지고 마지막 남은 이온음료

한병을 꺼내 한모금씩 마시고 빵 한조각을 나눠먹고 마지막 350봉으로 향한다.

350봉 정상에서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오르니 먼저 도착한 대장님과 동료 산꾼들이

걱정이 되었는지 생수만 시원한 맥주를 가지고 350봉 정상까지 왔다.

패잔병들이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생수와 맥주를 숨도 안쉬고 마신다.

가장 고맙고 동료애를 느낀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드디어 날머리인 시목치(갑낭재)에 도착하다.

정말이지 더위와 긴 산행구간에서 낙오하지 않고 오기로 산행을

마치고 동료산꾼 도리깨님이 자기 고향이라고 옻나무에 오리백숙을

스폰서 한다. 잠시후 고향친구가 막걸리 한말을 가지고 와서 참으로 잘먹었다.

도리깨님 오늘 지은 공덕 정말 복 받을겁니다.

시목치(갑낭재:14:50)

도선국사가 명당자리라고 점찍었던 갑낭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