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11구간 - 방아재에서 유둔재까지

by 범여(梵如) 2011. 3. 21.
○ 산행일자 : 2011. 03.19~20(무박 산행)
○ 산행날씨 : 남쪽지방에 봄비가 꽤 많이 내림. 안개도 무지 심하고
○ 참석인원 : 봄,여름, 가을,겨울 산악회 26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약 22㎞ /G.P.S 24.2km / 9시간 소요  
○ 산행코스 : 방아재-만덕산-신선바위-453.6-호남정맥 중간점-수양산 갈림길-
선돌마을-국수봉-468.3봉
                  산불감시초소-염소농장-전망바위-활공장-
노가리재-431봉-해남터 갈림길-최고봉-삿갓봉 갈림길
                  409봉-유둔봉-
새목이재-어산이재-유둔재
○ 소 재 지 : 전남 담양군 창평면, 남면 / 곡성군 오산면, 대덕면 / 화순군 북면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사마천(司馬遷)은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했다.

작년에 직원 땜에 속을 썩인 일을 생각하며 성실한 사람을 한명 구하고 싶은데

이젠 자꾸만 직원 채용에 자꾸만 자신이 없어진다. 목숨을 바쳐 충성할 사람을 말이다.

 

범여는 요즘 참으로 바쁘게 지낸다. 하루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현장을 다니지 않다가 현장에도 다녀야 하고 견적서도 제출해야 하고

작업장 인력도 관리해야 하니 정신도 없다. 거기다가 이번주에는 모임이

4번이나 있다. 그 와중에도 오랫만에 지인들과  필드에 나가서 라운딩도 한번 했으니 말이다.

 

지난번 일본 열도를 휩쓴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거기다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4호기의 원자로 폭발로 인하여 전세계가

핵의 공포에 휩싸인 채 불안에 떨고 있다. 그저께는 홋카이도 일본인 친구한테서

메일을 받았다. 거기는 다행히 내륙지역이라 피해는 없다고 한다.

불행중 다행이다. 일본이란 국가 때문에 이웃인 우리나라가 엄청난 고통을

받은 건 사실이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때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골치가 아팠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그리고 말기에는 한일합방으로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았고 한반도가 두동강이 난 것도 일본 때문이 아닌가.

일본이란 국가의 행위야 밉지마는 지금 엄청난 고통을 받는 일본 국민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한가지 부러운건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준 질서의식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주중에는 꽃샘 추위로 꽤난 추웠지만 그래도 주말에 날씨가 풀리는 바람에

여유로운 산행을 기대한다. 기상예보는 일욜에 비가 온다는 예보로 레인코트를

베낭에 챙겨넣고 밤 11시에 부지런히 탑승장소인 양재역으로 나가니 지난 해에

10개월간 같이 강원도 태백산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길에 희로애락을 같이한

온누리님이 나오셨다. 정말 반갑다. 산에 심취하면서 만난 분 중에 정말 박학다식한 분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 5개월만에 조우를 하고 차에 오르자마자 잠에 떨어진다.

오늘의 산행구간 지도

방아재04:00)

잠에서 깨어나니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휴게소에서 차가 정차한다.

참으로 빨리 온것 같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출발하여

잠시 후에 창평 I.C를 빠져나와 어두운 길을 따라 방아재로 향한다.

산꾼을 실은 愛馬는 03시45분에 3번 지방도가 지나는 방아재에 도착한다

봄비치고는 꽤나 많은 비가 내린다. 오늘 산행이 싶지 않음을 예감한다.

 방아재는 우측에 담양군 대덕면과 좌측에 곡성군 오산면을 끼고 있는 재이며

장비 점검을 마치고 어둠속에 부지런히 만덕산을 향한다.

만덕산 갈림길(05:00)

시작부터  오름길은 비에젖어 꽤나 미끄럽다. 부지런히 오르니 여기저기 묘지들이

꽤나 많다. 이른 새벽에 영원히 깊은 잠에 빠진 망자들이 잠에 깰까봐(?) 미안하다.

저 아래 담양요양병원이 불빛만이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주위에는 몇년전에 일어난

산불로 인해 나무들이 모두 다 화상을 입고 시커멓게 거을려 있다.

산에 오른지 15분만에 다시 수직 절벽에 가까울만큼 직사면을 내려간다.

비에 노면이 젖어 상당히 미끄럽다. 스틱에 온 몸을 의지한 채 5분정도 내려오니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에서 다시 내려온만큼 다시 급경사를 치고 올라간다. 오늘따라 선두대장인 도강재님이

무척이나 빠르다. 비가와서 맘이 급한 탓일까? 아님 지난해 연평도 사건으로 인해

발령된 진돗개 하나의 영향일까(?) 안개가 자욱하여 10m 앞도 내다보기 힘이드는데도

정신없이 앞으로 전진한다. 호남정맥 처음 시작할 때 처럼 初心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좀 살살가입시더 사이즈 적은 범여 가랭이 찢어지것소.

산행시작 1시간만에 만덕산 할미봉에 도착한다.  안개로 인해 전망은 제로상태.

거기다가 비 소식에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카메라가 비에 젖을까봐 세컨드 카메라로

가지고 온게 화근이다. 작동법을 잘 몰라 카메라가 전혀 작동이 되지 않는다. 

만덕산 할미봉(05:00)

갈림길에서 50m 벗어난 만덕산 할미봉에 도착한다.

담양군 대덕면과 창평면과, 곡성군 오산면의 경게로 하는 산으로

자욱한 안개로 인하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호남길에서 만난 2번째 만덕산이다.

호남정맥길 1구간인 전북 완주군 소양면과 상관면 사이에 있는 만덕산과

이번에 있는 만덕산... 그 유래도 비슷하다

 

만덕산은 일만만(萬), 큰덕(德)을 써서 만인에게 베푸는 산이란 뜻이다.

지역주민들에 의하면 임진왜란과 625를 비롯한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도 지역주민들이 전화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만덕산이 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 한다.

 

만덕산 서북쪽으로 15~20km쯤 뻗어 내려있는  봉산면 삼지리에는미암일기를 보관한 모현관이 있다.

조선 선조 때 학자인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친필일기인 

미암일기(眉岩日記 · 보물 제260호)는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양이 많고 사료 가치도 높다. 

 

지금 남아있는 일기는 1567년(선조1년) 10월 1일부터 1577년(선조10년) 5월 13일까지 대략 11년간에

걸쳐 쓴 일기로 임진왜란 당시 서노 25년 이전의 승정원(承政院) 일기가 다 타고 없어져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사료가 없어서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함께 선조실록첫 10년의 사료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본인의 일상생활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 상류층 학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신선바위 지나 두번째 만난 임도... 오늘은 임도없이 만난다.

호남정맥 중간지점(06:00)

만덕산 정상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길을 걷는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이 주마간산격으로

그냥 아무런 의미도 없이 길을 걷는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20분 후에 신선이 놀았다는 신선바위도 그냥 지나치고 입석리 가는 이정표를

만나면서 임도와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산행시작 2시간만에 호남정맥

중간지점에 도착한다. 빗방울은 더 굵어지고 여기서 가져온 막걸리로 지금까지

무탈하게 산행을 할수있게 도와준 산신에게 에를 올리고 후배산꾼이 가져온

닭발에다 막걸리로 음복을 한다.

 

중간지점을 출발 잠시후 임도를 만나고 다시 산길을 오르는데 비에젖은

낙엽땜에 상당히 미끄럽다. 정상에 오르니 수양산 갈림길이 나온다.

이젠 주위가 밝아오고 헤드렌턴을 베낭에 넣고 다시 길을 걷는다.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안개도 약간 옅어지는 느낌이다. 비에젖은

蘭들이 산꾼 범여를 반기는 듯... 더욱 더 파란빛을 띠고 있다.

선돌마을에 여명은 밝아오고

선돌마을로  내려서는데  좌측으로 폐교된 만덕초등학교 입석분교의 쓸쓸한 모습도 보이고..

선돌고개에 내려서니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고

한 쪽엔 범죄없는 마을 표지석도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355년이 됐다고 하고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2.2m라고 한다

선돌마을(立石里:06:30)

897번 지방도가 지나는 2차선 포장도로인 선돌고개

입석 마을은 조선조 중엽 광산 김씨와 전주 최씨 일가가 난을 피하여 은둔하며 살 땅을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 왔다가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다른 산촌과는 달리 바위가 곳곳에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이 많아 마을을 지켜주는 석신으로

 모시고 제를 지내 왔으며 마을 이름을 선돌이라고 불렀다가 지금은 입석이라 한다.

 북쪽마을 입구와 마을 앞에 각각 두 개의 선돌이 있다.
마을 입구에 창촌 당시 심었다는 당산나무가 길게 서 있어 마을 북쪽에서 들어오는

 잡신을 막아 불행을 없애 준다고 믿어 석신과 함께 당산제를 지내는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한때는 울창했던 당산나무가 지금은 느티나무 2그루와 서어나무

 30여 그루가 노거수로 남아 있다.

선돌마을에서 길을 건너 곧바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국수봉으로 올라간다.

좌측의 논에는 전선줄이 쳐저있고 감전주의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아마 이곳도 멧돼지의 폐해가 엄청난가보다. 내 고향 宜寧에 계시는

범여의 장형은 멧돼지의 등살에 못이겨 벼농사를 포기한 지 오래이다

 

한가로운 일욜 아침을즐기는 듯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가끔씩 짇어대는 개쉬끼들만이 짇어댈 뿐... 마을을 지나면서

 우측 비닐농막안에 아침상을 차리면금상첨화련만...

선두는 멋이 그리도 급한지 죽기살기 국수봉으로 향한다.

빗물이 나뭇껍질로 흘러내려 거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국수봉 삼각점

국수봉 (557.6m :06:50)

국수봉 아래에 있는 인동장씨 가족묘

즐거운 아침만찬  

국수봉을 지나  다시 된비알을 내려오니 염소농장 옆에 선두가 아침밥상을 펴고 식사를 한다.

빗방울은 굵어지고 할 수없이 베낭에서 비닐을 꺼내 지붕을 만들고

삼겹살을 구어 시리얼컵에 소주를 가득채워 한잔 마시고 나니

추위가 좀 가시는것 같다. 그 사이 선두는 도망을 가버리고 몇명은

느긋하게 40분간의 아침만찬을 즐기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임도를 지나고 좌측에 엄청나게 큰 염소목장 철조망을 따라 조금가니

458.3봉이 나타나고 염소똥 냄새가 진동을 한다. 다시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조금후 산불감시초가 나타나고 저 아래 한국 현대사의 유명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창평면 소재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인데 오늘은

10m 앞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걸 포기한다. 전망바위도 패스하고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비를 맞으면 그냥 의미없이 길을 간다.

주위의 생강나무에서 노오란 봉우리를 보이면 봄을 알린다.

월봉산 갈림길에서(08:10)

임도를 지나고 좌측에 엄청나게 큰 염소목장 철조망을 따라 조금가니

458.3봉이 나타나고 염소똥 냄새가 진동을 한다. 다시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조금후 산불감시초가 나타나고 저 아래 한국 현대사의 유명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창평면 소재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인데 오늘은

10m 앞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걸 포기한다. 전망바위도 패스하고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비를 맞으면 그냥 의미없이 길을 간다.

주위의 생강나무에서 노오란 봉우리를 보이면 봄을 알린다.

봄을 알리는 생강나무가 봉오리가 비를 맞으며 피어나고...

산불감시초소

염소목장옆에 있는 상외동재의 모습(담양군 창평면 외동리 소재)

전망대 바위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인물을 상당히 많이 배출한 창평면은 전혀 보이질 않고...

대표적인 인물로 고하 송진우 선생을 꼽을 수가 있다.

 

송진우 선생

송진우 선생은 일제 강점기 시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분이시며 정치, 언론, 교육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분으로 실력양성운동의 선구자중의 한 분이다.

광복 후 민주 건국에 앞장스셨던 송진우 선생은 모스크바 3상 회의때 찬반문제를 놓고

신중론 입장을 펼치던 도중 찬탁론자로 몰려 암살당한다

 창평면 전경의 맑은 날의 모습

1914년 한일합병이 되기 이전에는 담양군이 아닌 창평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일합병이 되면서 담양군 안에 창평면으로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는데

담양 사람들은 고집스럽고 보수적인 반면 창평 사람들은 진취적이엇다고 한다.

담양에는 재산이 많은 지주들이 많았고 창평에는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전남지방에서는 삼성, 삼평 사람들이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삼성이란 장성, 보성, 곡성을 뜻하고 삼평은 함평군과 나주시 남평면, 담양군 창평면을

칭한다. 삼성, 삼평이란 말은 임진왜란 때 부터 의병들의 저항이 무척이나 심했던 곳이고

이곳에는 일본인들의 상점들이 발도 붙이지 못했던 곳이라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을 학문교류가 왕성했던 곳으로 창평에 살았던 송강 정철이 광주에 살던

고봉 기대승과 함께 장성 출신 유학자인 하서 김인후에게 학문을 사사했으며

그 후에는 면앙정 송순이자 담양의 큰 인물이었던  언론인 송진우가 기 정진의

후손인 기삼연에게 학문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창평은 학문적인 큰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전망바위에서 활공장가는 길은 정말 부드러운 육산이다.

거기다가 고도차가 별로없어 걷기는 참으로 편하다.

여기에서 산행의 가속도를 붙인다.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서 이런곳에서

따라가지 못하면 끝날때까지 따라 잡기 못하기에 말이다.

조금 오르니 귀한 연리지 나무 한그루가 보인다. 뭣이 그리도 좋아 한 몸일까?

자욱한 안개로 인하여 10m 정도의 시야도 확보되지 않는다.

맑은 날씨이면 무등산구간과 빨치산의 슬픈 역사를 지닌 백아산도 보일텐데 말이다. 

활공장(09:30)

잠시후 활공장에 도착한다. 그런데 여긴 아마 폐허가 되었는지 점프하는

곳에는 나무들이 어지럽게 다시 돋아났다. 5분정도 지나니 새로운 활공장이

나타난다. 이곳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곳이다. 잠시후에 저 아래 도로에서

차소리가 난다. 콘크리트 도로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입석리가는 노가리재이다.

노가리재(09:40)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와 외동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다

1차선도로로 입석리 넘어가는 길로 차량은 뜸한 편이다.

요즘 새로 공사중인지 콘크리트를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저

주위가 엉망이다. 거기다가 비까지 내려서 더 심해보인다.

이 재의 연유는 그 옛날 나무꾼들과 주민들이 장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쉬면서 쓸데없이 잡담을 늘여놓거나 허튼소리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ㅋㅋㅋ)

노가리재에서 다시 431봉을 오른다. 길은 그리 험하지 않으나 미끄럽고 산행시작

6시간이 지나니 서서히 피로도가 몰려온다. 거기다고 눈,비가 올경우는 피로도

배가되는 느낌이다. 오름길에 배에서 이상신호를 보낸다. 비가오니 버리는 즐거움도

고통이다. 서둘러 버리기를 끝내고 능선 서너개를 오르고 내리니 저 앞에 산꾼들의

소리가 들린다. 느긋하게 아침을 즐긴 대가로 겨우 후미의 꼬리를 잡은 셈이다.

 

정상에는 어깨높이의 나무에 새집이 하나 있다. 참으로 게으른 새인가...

아님 머리나쁜 새인가. 이렇게 낮은 곳에 집을 지으면 사람들 손에 타기도

하거니와 천적들의 좋은 먹잇감인데 말이다.

 

가사문학관(歌辭文學館) 가는 길(10:30)

담양은 전라남도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유산을 전승 계승해 온 유서깊은 고장이다. 조선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 문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청산별곡 등 18편의 가사문학이전승되고 있는 이곳

담양이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한다.

 

가사(歌辭)는 시조와 더불어 한국 고시가의 대표적 장르이다. 그 행식은 1행 4음보라는

기본 율격을 지닌 유장한 운문체인데 가사의 발생 시기는 대체로 고려말이나 조선초일거라는

추측된다. 특히 나옹화상이 지었다는 서왕가(西往歌)와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은 가사의

초기 작품으로 추측된다. 그러다 조선 중기이후부터 가사는 사대부층에 의해 폭넓게

향유되면서 시가(詩歌)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의 자연속에서 몸에 밴

물아일체적(物我一體的) 삶을 비롯하여 명승지의 유람과 유교적 이념구현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송순과 정철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면앙정가와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통해 사대부 가사의 절정을 이룬 작가들이다.

 

가사문학관은 2000년에 담양에 문을 열었다. 주변에는 양산보의 소쇄원, 송순의 면앙정,

정철의 송강정, 성산벽곡의 터전인 식영정 등 정자를 자리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가사문학의 터전이 되었다 한다.

해남터 갈림길에서 최고봉 가는 길에는 하서 김인후 선생의

石逕攀危라는유명한 가사가 적힌 표식판이 잇다. 참으로 이 지역 사람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조선 중종 5년(1510)에 태어나 명종 15년(1560)에 죽었다.

장성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시를 잘 지었고 10세 때에

김 인국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1531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이황 등과 학문을 닦았으며, 중종 35년(1540)에 과거에

급제하여  그 후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는 등 벼슬길을 걷기도

하였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 대고 고향으로 돌아와

성리학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냈다. 학문에 있어서는 특히 성(誠)과

경(敬)을 중히 여겼고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후학중에는 송강 정철도 있었다.

 

그는 정조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세워지는 문묘에 공자및 그의 제자들과 함께 모셔지는 신라,

고려 조선조에 걸친 18명의 현인 가운데 그는 유일하게 전라도 출신

학자로서 그의 고향 장성사람들에게 긍지를 갖게 하는 인물이다.

 

* 문묘에 배향된 18인 *

설총, 최치원, 안유(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최고봉(493m:10:40)

왜 최고봉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오늘 산행중에 국수봉을 제외하고 16개의 봉중에는 최고 높이여서 그런지 모르겠다.

해남터 갈림에서 바람대장님 일행이 막걸리를마시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랴...

걸쭉하게 막걸리 한사발로 목을 축이고먼저 최고봉으로 오른다.

바람대장님이 다시 선두를 치고 나선다.

지난구간에 같이 같은 인연으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었으나

사진 몇 커트 찍는 사이 안개속으로 사라진 남자가 되어 버렸다.

최고봉 옆에있는 이끼에 달린 물방울이 마치 우담바라를 꼭 보는 느낌이다.

참으로 신기하다. 오늘은 왠지 좋은일만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하긴 모든 건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 했잖은가

새봄이 오건만 고엽(藁葉) 뭇이 그리도 아쉬워 떠나지 못하는고?

삿갓봉 갈림길(10:50)

안개속에 봄을 알리는 생강나무와 야생화

409봉 삼각점

 국수봉을 지나고 부터는 400고지 정도를 4개를 넘었고, 노가리재 부터 유둔재까지 12개를 넘는다.

거기다가 비를 계속 맞으면서 걸으니 더 피로가 심하다. 고도편차가 심하지 않은데도 자꾸만 등산화가 무거워만 진다. 

지도속에도 없는 왠 유둔봉?(12:10)

아직까지 유둔재까지는 어림잡아 2km정도나 남은 것 같은데 지도상에도 없는

유둔봉이라고 어느 산꾼들이 표시한 봉우리가 나타난다.

참으로 혼란스럽다. 산행시간 8시간이 지나면서 피로도가 엄청나게 몰려온다.

오랫만에 꽁지 머리를 한 동료산꾼과 인간사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같이 걸으니 한결놨다.  참으로 열심히 사시는 분 같다.

새로 설치된 산불감시초소

아마 이곳은 여름에만 산불감시를 할 모양이다.

불은 겨울에 훨씬 많이 날터인데 말이다. 머리로 생각하고 일을 했으면...

담양 대나무

대나무는 흔히 절개의 상징이며 선비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는 그 자체이다.

대숲은 시골출신인 범여에겐 늘 우리곁에 있었다. 범여의 본가도 대나무숲에

폭 쌓여 있어으니 말이다. 대의 고장 담양은 우리나라 대밭을 4분의 1을

차지하는 고장이다. 그 넓은 대밭 덕분에 옛날부터 죽세공이 상당히 발달한

담양은 장성과 더불어 전남 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전북 순창,

동으로는 곡성군 서쪽으론 광주와 장성 그리고 남으로는 화순과 경계를 이루며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이었으며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 성종 14년(995년)까지

담주로 불리다가 그 후 담양으로 개칭되었다.

담양 서북쪽의 노령산맥의 갈래로 추월산을 비롯해 산지를 이루고 동남쪽의

무등산까지 이어지는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 그 산들의 골짜기마다 흘러나오는

물길들이 담양읍을 감돌고 수북, 대전, 봉산, 창평, 고서 등을 적시며 기름진

들판들을 만들고는 영산강을 이루어 남서쪽으로 빠진다.

 

그 덕에 담양에는 큰 지주들이 많았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봉건시대의 

식자층들이 꽤나 뚜껍게 형성되었고 중앙 정계로 나아갔던 그들이 벼슬에

물러났거나 16세기 조선을 흔들었던 사화의 와중에 권력에서 밀려나 고향에

돌아와서 각자의 연고에 따라 이곳저곳에 정자와 원림(園林)을 꾸리고

자연에 묻혀 한 세월을 보냈다. 담양군의 고서면과 봉산면 그리고 남면 일대에

흩어져 있는 면앙정, 송강정, 며옥헌, 식영정,소쇄원, 독수정,취가정,환벽당,

풍암정 등 그들이 이룩해 놓은 정자와 원림, 별서(別墅)들은 담양이 정자의

고장이며 가사의 고장인지를 짐작가게 만든다.

유둔재(13:00)

청주 한씨묘지 등  이곳에는 가족묘를 비롯하여 묘지를 꽤나 많이 지나면서

부드러운 임도길을 걷는다. 조금 지나니 대나무밭을 지나니 길이 완전히 진흙탕이다.

약간 우회하여 내려오니 887번 지방도가 지나는 호남정맥 분수령인 유둔재가 나타나고

우리를 태우고 온 젊고 멋진 김 승현 기사님과 애마가 우리를 반긴다.

 

이 고개에 떨어진 빗줄이  동쪽으로 떨어지면 방랑시인 김 삿갓이 말년을 보낸

동북호로 흘러들고 서쪽으로 떨어지면 영산강의 지류인 담양 증암천으로 흘러드는

이 곳은 조선시대의 가사문학을 화려하게 꽃피운 곳이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면서 정맥길에 기대고 있는 독수정 원림,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송강정, 명목원 원림, 면앙정 등 정자와 정원등의 즐비하다.

담양이 왜 정자의 고장이고 가사문화의 산실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둔재에는 광주 21km. 담양 26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고, 그 옆으로 유둔재 등산로

안내도가 설치되어있다. 다음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버스에 오른다.

담양 남면 사무소를 지나고 가사문학관을 지나 비 내리는 소쇄원 주차장에 도착한다.

오늘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목욕탕에 들려 목욕을 안 한단다.

 이걸 어쩌나 낙동정맥을 같이한 온누리님에게 목욕도 시켜준다고 모셨는데 졸지에

사기를 친 꼴이 되었으니 범여 체면이 말이 아니다.

유둔재를 출발하여 소쇄원 주차장 다리 아래에서 간단하게 알탕을 한다.

갑자기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니 말그대로 ?알은 어디 갔는지 달라 붙어 버린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머리만 감아 땀냄새만 제거하고 이곳에서 유명한 창평 국밥집으로 향한다.

그 유명한 창평은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골 면사무소에 불과하다.

소쇄원(瀟灑園).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림이다.
1981년 국가 사적 304호로 지정된 한국민간 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이다.

 


전체적인 면적은 1400여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물, 조경물은 상징적

 체계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졀묘하게 이뤄내며, 그 안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이

 있으며,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하여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한다. 소쇄원의 주요한 조경수목은 대나무와 매화, 동백, 오동, 배롱,

산사나무, 측백, 치자, 살구, 산수유, 황매화 등이 있으며, 초본류는 석창포와 창포, 맥문동,

 꽃무릇, 국화 등이 있다. 조경물로는 너럭바위, 우물, 탑암과 두 개의 연못이 있으며,

 계곡을 이용한 석축과 담장이 조화로운 곳이다.

 

이러한 공간의 조성은 조선중종 때의 선비인 소쇄공 양산보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 정확한 조영시기는 1520년대 후반과 153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정유재란의로 건물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다시 복원 중수하고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 할 수 있다.

 

선비의 기상과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담양 소쇄원" 을 찾았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대표적인 민간 별서 정원이다.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1519년)로 능주로 유배되고 사사(賜死)되자 세속의 뜻을 버리고
고향인 창암촌에 소쇄원을 조성하였다. 
 
소쇄원은 조성연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양산보가 낙향한 1519년 이후부터 조성되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송손, 김인후 등의 도움을 받고 그의 아들 자징(子澄)과 손자인 천운(天運) 등 3대에 걸쳐 완성되면서 후손들의
노력에 의해 오늘에 이르렀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 호남 사림문학를 이끈 인물의 교류처 역활을 하였다.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활을 하였다.

 

 

제월당(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 이라는 뜻의 주인집)

 

송강 정철이 쓴  면앙정가 액자

창평 장날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