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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8-2구간 - 천치재에서 오정자재까지

by 범여(梵如) 2011. 1. 30.

 

○ 산행일자 : 2011, 01, 29~30(무박산행)
○ 산행날씨 : 상당히 추움, 정읍부터 눈이내려 차가 가지못해 아침부터

                   산행시작. 날씨는 맑고 산행하기는 좋은 날씨임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26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10.7km(G.P.S거리: 11.8km)  / 5시간 40분 소요         
○ 산행코스 : 천치재-490봉-귀암사거리(임도)-532.7봉(헬기장)-520봉-치재산(591봉)

                  정광사 이정표-피치 삼거리-양금재 사거리-용추봉-닭사리(임도)

                   508.4봉(암릉)-밤나무농장- 170송전탑-염소농장(고압전선)-오정자재
○ 소 재 지 : 전북 순창군 복흥면, 쌍치면, 구림면 / 전남 담양군  용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에다 월말까지 겹쳐 괜히 하는일 없이 바쁘기만하다.

거기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 현장의 작업속도는 늦어져 아무리 독려를 해도 능률은 오르지 않고

사무실에 들려 서둘러 마무리를 하고나니 저녁 8시 반이 지난 시간이다. 조금의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이 베낭을 꾸리고 나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뉴스를 보니 지난번 소말리아 해적들에 납치될 당시 

기지를 발휘하여 국민적 영웅이 된 삼호 주얼리호의 석해균 선장님의 건강이 경각을 다투는

모양이다. 오만에서 긴급히 후송하여 한국으로 오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정말 이런 분들이 잘살아야 하는데...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 그리고 추운 날씨에 구제역이

확산되어 전국의 축산농가들이 초토화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자꾸만 가슴이 아려 산행을 하는데

미안한 감정이 든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코스는 통제구간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 역시 시골출신이라 그 분들의 가슴 찢어지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으리라....

밤 11시 20분 마지막 버스를 타려고 정류소에서 5분 정도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추운지 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양재역에 도착하여 조금 일찍온 버스를 타자마자 잠에 떨어진다.

일어나니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정안 휴게소이다. 창가에 타고 있는터라 상당히 추워서 일어나서

잠이 깨 다시 잠을 자려니 동료 산꾼이 얼마나 크게 코를 고는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아마 저 분도 나만큼이나 피곤한 모양이다. 사람들은 피곤하고 힘이들면 누구나 코를 골게 마련이니...

두번째로 정읍 휴게소에 도착한다. 이곳은 눈이 꽤나 많이 내린 모양이다. 휴게소가 온통 은빛세상이다.

흔히들 산꾼들은 기상청을 구라청이라 하며 일기예보를 잘 믿지 않는데 요즘은 너무 잘 맞는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정읍I.C를 빠져나와 순창군 쌍치면으로 향하는 길은 고개가 높아 

걱정이 된다. 조금 후 예상은 적중되어 정읍시 금봉동에서 부전제 저수지 올라가는 길이 빙판이

되어 버스기사가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대장이 정읍시청 상황실에다 전화를 하여 제설작업에

대한 문의를 하니 아침 8시에 출근한 후에야 알 수있단다. 산행보다는 안전이 우선이지...

그리고 오늘 산행은 지난구간 폭설과 추위때문에 짤린 구간이라 거리는 상당히 짧기에 좀 기다려

보기로 하고 차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때 시간이 새벽 3시 30여분이다.

 

뒷 좌석에 동료 산꾼의 기차화통같은 코골음은 계속되고... 아침 7시 30분이 지나고 날이 밝은

후에야 차를 움직이는데 그 때 제설차가 지나간다. 산행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이곳은 꼭 강원도 구룡령 넘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높은데다 구비구비 고개이다.

조금 있으니 제설차 뒤로 승용차 한대가 내려온다. 그러자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고개가 지난구간 구절재에서 추령가는 코스에 개운치를 넘어가는 고개이다.

그 위에는 망대봉 통신기지도 보이고 우열곡절 끝에 천치재에 도착하여 라면을 끓여 아침 식사를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날씨는 참으로 맑고 좋다.      

 

오늘산행 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칠보 발전소 가는 부전제 삼거리에서 도로가 빙판이라 개운치 고개를 넘을련지 걱정이다

새벽 6시 40분 음력 섣달 스무이렛날의 그믐달이 서서히 지기 시작한다.

동학혁명지 최 경선 묘지 가는길

천치재(347m :08:50)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과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의 경계이며

29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이곳 주민들에게는 답동고개나

치재로 더 알려진 곳이다. 우리말로 하면 하늘재로라고도 불린다.

도착하니 아침 8시가 조금 늦은 시간이다. 2주전에 왔던 풍경가 똑 같다.

주위의 포도밭은 눈속에 파묻혀 깊은잠에 빠지고 우린 차에서 내려 버너에

라면을 끓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행을 시작한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던 길을 러셀을 하면서 가야하니 오늘 산행 그리 녹록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산행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고 능선과 임도를 왔다갔다를 반복 한다.

좌측에서 특용작물을 심었다고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다 그 아래에는

가마골 야영장이 보인다. 평법해 보이는 저 곳이 참으로 슬픈 역사가

존재해 있다.

 

가마골에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옛날 담양 고을에 풍류를 좋아하는 부사가 부임하여 가마골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하여 이곳 경치를 구경하고자 관속들에게 예고령을 내리고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에 백발선인이 나타나 내일은 내가 승천하는 날이니
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사라졌는데 부사는 신령의 말을 무시하고
이튿날 예정대로 가마골로 행차, 인근 못에 이르러 비경에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소용돌이 치고 주위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황룡이 하늘로 솟아오르다 그만 부근 계곡으로 떨어져
피를 토하며 죽자 이를 본 부사도 기절한 후 회생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용이 솟은 못을 "용소"라고 하고 용이 피를 토하고 죽은 계곡을
"피잿골", 부근 계곡을 그릇 굽는 가마터가 많다고 하여 "가마곡"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마곡"이 "가마골"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소설 '남부군'의 현장 가마골로도 유명하다.
6.25 격전지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처참했던 곳 중 하나로 1950년 가을
후퇴하던 전남,북 주둔 남부군 유격대 패잔병들이 이곳에 집결, 은거하면서
약 5년 동안 유격전을 펼쳤던 곳으로, 당시 유격대는 이곳 가마골에
노령지구사령부(사령관 김병억. 당시30세)를 설치하고 3개 병단이
주둔하면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활동하였다. 전투가 장기화되자
병기시설인 탄약제조창과 군사학교, 인민학교, 정치보위학교 및 정미소까지
설치해 놓고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다가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1955년 3월 완전히 섬멸되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그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가끔 탄피, 수류탄, 무기 제조에 쓰인 야철, 화덕 등이 발견되어 그 날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온통 은빛세상으로 뒤덮혀 한가롭기만 하다. 

532봉(09:50)

고도차가 그리나지 않은 능선을 몇개를 지나고 나니 나타난 532봉이다.

어느 산꾼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산 정상에 오르는데 나무에다 양은 주전자 하나를

걸어 두었다. 참으로 유머스럽게 말이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온통 눈속에 파묻혀 있고

정상 어딘가 있는 삼각점은 찾을 길이 없다.

발목까지 묻히는 532봉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지나간다.

60여년전 빨치산이 지나던 그 길을 말이다.

가마골 야영지 가는 임도(10:15)

헬기장에서 살짝 고도를 낮쳐서 내려오니 가마골 야영지 가는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는 차가 지나갈만큼 넓다. 여기서 선 채로 5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오늘 새로오신 듯한 산꾼들이 장난을 치면서 눈밭에 뒹굴면서 사진을 찍는다.

참으로 천진난만한 모습이 보기가 좋다. 그래서 산은 인간들을 순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흔히들 산에 다니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눈 속에 파묻힌 신죽. 고고한 자태가 곧은 선비를 연상케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유명한 추월산이고 저 아래 계곡이 60년이 넘는 아픈 역사의

현장을 간직한 가마골이다. 오늘은 U자 형태의 산행을 하면서 추월산 능선을 계속해서

바라보면 걷는 형국이다.

치재산 (591m 10:35)

치재산(591m) 정상에 오르니 마치 부안의 변산반도를 옮겨놓은 듯한 산속의 산들과,

가마골 계곡의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고, 장막같은 추월산 동쪽 구릉들은 물론

 추월산과 마주하는 강천산 일원이 조망되기도 한다.


서북쪽 저 멀리론 내장산의 침봉들이 서래봉을 중심으로 호남정맥의 구릉들과 어깨를

맞대고, 끝없이 하늘금을 이어가고 있는 장관이 들어온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지나온

내장산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오랫만에 눈 때문에 선두를이 도망가지 못한 탓에(?)

선두와 후미그룹이 없다. 정상에 모두들 인증샷을 남기고 우측으로 꺽었는데 조금가다

보니 신선대 가는 길로 잘못 들어선 것 같아 지도를 보니 45도를 꺽어서 가야 하는 것

같아 임도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간다.

추월산에서 잠시 우측으로 접어들다 다시 좌측길로 접어들어 내려오는 길은 

눈이 엄청나게 많이 쌓였다. 저 앞에는 용추봉  손에 잡힐듯이 눈앞에 와잇다.

치재산 정상에서 바라본 내장산의 연봉들

정광사 내려가는 길에 어느누가 돌탑을 세워놨다.

오늘 가야할 능선과 용추봉의 모습

치재산에서 피치 삼거리 임도 가는 길은 고로쇠 나무를 새로 식재하느라

벌목을 해놔서 산이 민둥산이 되버렸다.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이나 그리 험하지는

않지만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무릎까지 차오른다.

정광사와 신선봉 가는 길(10:50)

피치 삼거리(11:00)

치재산에서 25분만에 내려와 또다시 휴식을 취한다. 탱크님이 2L짜리 팻트병에 담아온

매실주와 소주 그리고 백두대간 팀들이 가져온 막걸리에다가 과매기까지 마치 주막집을

옮겨온 듯하다. 시끌벅적하게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벌린다. 산꾼들이 주종(酒種) 불문하고

모두들 냉수 마시듯 마셔댄다. 그만큼 산이 맘을 넉넉하게 하고 여유롭게 하는탓에 술이

 취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기사 산은 늘 어머님 품만큼이나 넉넉하지 않았던가.

착한 사람이나 시정잡배처럼 잡놈이나 지친 사람이나 괴로운 사람이나 어느 누구 가리지

 않고 품안에 안아주는 늘 부처님만큼이나 여유로운 맘으로... 

저 멀리 산꾼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며 자태를 뽐냈던 늠름한 추월산 능선들이

늠름하한 모습으로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우리나라의 이념전쟁의 산물이었던

6.25 전후에 아픈 역사의 현장인 가마골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와 빨치산 활동을 하다 죽은 영령들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구천에 헤매는 저 영혼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지금은 야영터로 변해버린 슬픈 현장

영령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요. 이젠 집착을 버리시고 저승으로 가시길...  

용추봉 가는 길에서 바라본 오늘 산행코스중에 가장 높은 치재산 정상 

비운의 아픈 추억을 너무도 많이 갖고 있는 회문산과 그 앞의 세자봉

528봉에서 바라본 용추봉의 늠름한 모습

다음구간인 강천산이 빨리오라고 부르는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용추봉 정상에서(560m : 12:10)

용추봉 정상에 올라여유로운 휴식을 취한다. 조망이 일품이다. 서쪽으로는 추월산,

 남쪽으로는 강천산, 무등산이 앞에 보이고, 동쪽으로는 회문산, 세자봉이 바라보인다.

 정상 아래에는 섬진강 발원지 용소가 아련히 보인다. 모 신용금고에서 세운 알루미늄

 표지판의 이정표는 532봉이 3.4km,  오정자재는 4.4km를 표시해 놨다

 담양호를 빙돌아서 다시 남서쪽으로 기수를 돌린다. 그런데 지나온 가마골의 깊은

계곡 때문인지 담양호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가마골은 이곳 용추봉 아래 가마골

용소(龍沼)에서 섬진강의 발원지로서남도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적시며

담양, 광주, 나주, 여암을 거치는 115km의 강줄기로 영산강 하구언을 거쳐 서해바다로

흐른다.  용소가 자리한 이곳 용추봉 아래 가마골은 6.25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6.25가 일어났던 1950년 가을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전라도

지역의 빨치산들이 이곳에 집결하여 노령지구 사령부를 세우고 장장 5년간의 유격전을

벌이다가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1955년 3월에 섬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사령관 계곡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우익,좌익이며  민주주의며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이념전쟁에 희생양이 된

민초들의 영혼들이 자꾸만 산꾼 범여를 붙잡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리다.

60년이 지난는데도 아직도 잊지 못하는가 부디 저승에서라도 맘 편히 사시길...

용추봉 정상에서 바라본 가마골터와 용소

가마골은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삼림이 우거져 사람의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나

 6.25 격전지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에 거의 모든 삼림이 그 때 불 타 버렸다고 한다.

1950년 가을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전남,북 주둔 북한의 유격대 패잔병들이 이곳으로

숨어들면서 길고 긴 5년간의 전투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당시 유격대들은 이 곳 가마골에

노령지구사령부를 세우고 3개 병단이 주둔하면서 유격전을 벌리다 1955년 3월에야 육군 8사단

 및 11사단과 경찰합동작전에 의해 완전 섬멸되었다고 한다.

영산강 발원지 용소(龍沼)

'한국(남한)의 4대강이 어디인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순으로

대답한다. 국가에서 정한 4대강 개념도 그렇다. 그러나 유역면적과 수량, 강의 길이 등을 다

따져서 말한다면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순서가 맞다. 영산강이 섬진강을 제치고

4대강으로 분류되는 것은 강의 길이나 수량 때문이 아니라 영산강 유역에 사는 인구가

 많아서이다. 인구가 많은 강은 그만큼 상수원으로서 중요하며, 4대강은 곧 그 유역

사람들의 식수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주 이남의 영산강은 상수원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영산강 유역에서 가장 큰 도시 광주는 대부분 영산강 물이 아니라 섬진강 수계인 동복호와

 주암호에서 물을 끌어와 먹고 있다. 상수원 측면으로 보더라도 영산강은 4대강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담양 용소골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담양호를 지나 2004년 하천 습지 가운데 최초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담양습지로 흘러든다.

담양습지를 지난 영산강은 광주에서 장성과 무등산에서 내려온 황룡강, 극락강을 만나

제법 물줄기가 도도해진다.

 

여기서부터 영산강은 호남평야와 나주평야 등의 드넓은 들판을 구석구석 적시며 목포를

향해 구불구불 흘러간다. 호남평야를 육자배기 진양조 가락처럼 느릿느릿 빗겨 흐르는

350리 영산강은 호남의 혈맥이다. 영산강이란 강 이름은 나주 '영산포'에서 유래한 것이고,

 전라도라는 말도 '전주'와 '나주'에서 온 것이다.

그만큼 영산강은 이 일대 문화의 핵심이다.

 

한편 이곳 가마골은 6.25당시 빨치산이 최후까지 저항하던 항거지로도 알려져 있는데,

사령관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암벽아래에 당시 빨치산 노령병단소속 사령관인 김병억

이 은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가마골은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인근의 용소, 출렁다리, 사령관동굴, 용연폭포,

용추사 등을 잇는 산책로겸 가벼운 산행코스가 마련되어 있어 한두시간 정도의 멋진 산책을

즐길 수 있기도 하며, 주변이 수려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생태공원내에는 야영장과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기도 한다. 

빨치산의 아지트였던 용추봉 정상에서 회문산(回文山:830m)을 배경으로

 

우리나라에서 빨치산은 흔히 6·25를 전후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당

유격대를 일컫는다. 빨치산의 어원은 파르티잔(partisan)으로 스페인어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빨치산’의 효시는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46년 10월 대구사건으로 남조선노동당이 탄압을 받고 불법화되면서

산으로 들어간 좌파인사들이 효시다. 이후 1948년 8월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시점을 전후로 이념적 지향을 달리하던 남한의 남노당원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의 지리산과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서 조선인민유격대가 만들어지면서

빨치산의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6·25의 발발과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된 북한 인민군이 유격대와 결합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면서 빨치산의

활동이 최고조에 달한다.

 

금기시 되던 빨치산에 대한 실상은 소설‘태백산맥’과‘남부군’을

통해 본격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중 남부군은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라북도당이 회문산으로 들어가면서부터의 생활상을 그린 실화 소설이다.

전라북도의 경우 회문산과 운장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으며

전라남도의 경우 지역별로 6개의 지구를 나누어 활동했다. 빨치산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전라남도는 백아산의 본부를 중심으로 6개 지구 즉, 전라북도와

남도의 경계인 용추봉 가막골을 중심으로 한 노령지구, 무등산을 중심으로 한

 광주지구, 국사봉과 화학산을 중심으로 한 유치지구, 조계산과 모후산을 중심으로

한 모후지구, 백운산을 중심으로 한 백운산지구, 불갑산을 중심으로 한 불갑산지구로

나뉘었으며 6개 지구 중 서쪽의 불갑산지구를 제외한 5개 지구가 호남정맥과

연관되어 있다. 전라북도 지역의 회문산도 호남정맥상의 용추봉과 연결되어

있으며 운장산은 호남정맥에서 분기한 금남정맥상에 위치한 산이다. 

 

회문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전라북도 지역의 빨치산은

 국군의 빨치산에 대한 토벌작전이 거세지면서 회문산을 버리고 탈출하게 된다.

 소설 남부군에서 간간이 나오는 산과 골짜기, 마을 이름을 통해 빨치산들이

호남정맥 산줄기를 따라 백두대간, 지리산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범여가 서 있는 저 넘어 세자봉과 회문산이 보인다. 호남지역에 빨치산의

최대 본거지 중에 하나엮던 회문산이 뚜렸이 보인다.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너무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산이다.

임실과 순창의 경계를 이루며 옥정호의 남쪽 울타리 역할을

하는 회문산은 용추봉에서 갈라진 지맥에서 섬진강으로 연결되는 능선이다.

 

1948년 10월 여.순 반란사건 때 패퇴한 빨치산 병력 일부가 회문산으로 잠입

하면서 비극은 잉태되었다.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잃은 인민군과 좌익세력들은 회문산으로 은밀히 숨어 들었다.

그리고 10여리쯤 떨어진 가마골에 자리잡고 있던 빨치산 전북도당이 지형이 더

유리한 회문산으로 이동해 합세하여 10여개의 병단과 군 단위 유격대들을 구성해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이때 국군은 1950년 10월 14일 남원에 빨치산 토벌 사령부를

설치하고 1951년 3월에 이 지역에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인다.

 

700여명쯤 되는 빨치산들은 400여명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고 300여명은 변산반도

쪽으로 옮겼으나 변산반도쪽은 곧 괘멸되었고 지리산쪽 전쟁이 끝난 후 몇년간

저항을 계속하다가 소탕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회문산 자락에는 사령터라는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자리왔와 교육장소였던 노령학원터가 있다고 한다.  

용추봉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용소로 통하는 N자형 도로

저 멀리 담양읍과 추월산 그리고 담양호가 보이고...

이 추운 겨울에도 꿋꿋한 자태를 보이고 있는 부처손

360봉이 보인다.밤나무 농장도 보이고 오정자재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우리가 지나온 능선들

산행을 하면서 가장 즐거움과 희열을 느끼는 것은 내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는 순간이다. 참으로 이 조그만 발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足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담양호에서 순창군 구림면 넘어가는 792번 지방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360봉 능선에서 마지막 베낭을 풀어 사과와 캔디하나로 원기를 보충한다.

동료 산꾼인 북악산님께서 따끈한 원두커피 한잔을 건낸다. 추운 날씨에

너무나 고맙기만 하다. 다시 길을 걸으면서 마지막으로 능선을 치고 오르니

170번 송전탑이 나타나면서 암릉구간이고 좌측으로는 밤나무와 단지와

약초 그리고 염소를 키우는 농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전기위험 감전이라고

빨간 경고판을 부치고 철조망을 쳐놨는데 하나같이 나무에 파고 들겠끔

해놨다. 몹쓸 인간들 지네들은 손톱밑에 가시하나만 박혀도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아무리 말못하는 나무라고 저렇게 해놓다니... 그러고도 농장이 잘되길

바라나. 자연의 혜택을 받고 살면서 자연을 훼손하는 아이러니 어케 설명해야 하나. 

아예 견디다 못해 죽은 나무도 있다. 저 나무가 무슨죄가 있다고 말이다.

거기다가 한술 더뜨서 밤을 줏어가면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경고문까지 붙어있다.

염소를 키우는지 진한 똥냄새가 심하게 난다. 이보시게 쥔장나리 정맥길 타는것도

바쁘서 오줌누고 거시기 볼 시간도 없는데 밤 몇개 줏을려고 시간 낭비하겠나 어리석은 중생아

정맥꾼들을 절도범으로 보는 시각은 고치시게... 산꾼만큼 심성 고운 사람은 없네그려

그리고 당신네 철조망 당장 걷으시게 안 그러면 산림청에 고발할 것이네.

자연속에서 살면서 모든 사물을 부정적으로(절도범) 보는 시각부터 버리시게나 

저 아래 오정자재가 보이고 우리를 태우고 온 애마도 보인다.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김 승현 기사님은 좀 쉬었는지 걱정이 된다.

늘 착한 심성으로 봉사하는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늘 健安하시길...

이 지역은 마루금은 여인네들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옥녀, 추월이, 오정자까지 ㅋㅋㅋ

오정자재(14:35)

담양호 호반도로였던 2차선의 792번 지방도가 순창군의 21번 국도로 연결되는

오정자재를 향한 내리막길엔, 과수원 보호용 철사줄에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다고

경고문을 써 붙였지만, 만져봤자 감전 될 일도 없다. 

 오늘의 산행 조착지인 순창군 북흥면 오정자재 고개마루턱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은 여기서 베낭을 내려놔야 할 것 같다.

 고개 명칭이 "오정자" 란 여인의 이름과 같아서 농담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이 고개 아래에 순창군 구림면에 오정이란 마을이 있어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 같다.

 조선시대 선조(14대 임금)때 文化 柳氏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할 때

마을앞에 다섯그루의 정자나무가 있었으며 이곳이 富村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해서 오정자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정자재

담양군 용면과 순창군 구림면을 잇는 79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다음구간 들머리인 안내판 앞에서 인증샷

5시간 40분에 걸친 산행을 마치고 아이젠과 스패치를 벗는다. 베낭을 정리한 다음에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정읍에 평소에 들리는 사우나에 도착한다.

시간이 없어 15분만에 사우나를 끝내고 근처 식당에서 소맥이(소주+맥주)를 연거푸

서너잔을 마시고 나니 기분은 쿨하다. 아마 이 맛에 산행 중독이 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