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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8-1 밀재에서 천치재까지

by 범여(梵如) 2011. 1. 16.

○ 산행일자 : 2011, 01, 15~16(무박산행)
○ 산행날씨 : 새벽에 눈발을 날림. 남부지방에 96년만의 한파 소식

                   엄청나게 추운날씨에다 무릎까지 파고드는 눈으로 인해 시간당 1.2km

                   밖에 걷지 못하고 최악의 기후조건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음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20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G.P.S거리) : 11.66㎞ / 8시간 20분 소요         
○ 산행코스 : 밀재-추월바위-추월산-736봉-하늘재-수리봉-715봉-무능기재-깃대봉

                   견양동 정상-심적산 삼거리- 가인 연수원-529 암봉-임도-산신산-천치재
○ 소 재 지 : 전북 순창군 복흥면, /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면

 

요즘은 三寒四溫도 없이 계속 추운날씨가 맹위를 떨친다. 추워도 너무 춥다.

낮에 고향선배와 지인의 결혼식 2군데를 참석하느라 시내를 차를 갖고 다녔는데도

추위 때문에 고생을 너무했다. 환경변화로 인한 재앙이 아닐까 이게 어쩌면 인간들의

탐욕과 오만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늘 욕심때문에 자꾸만 지구가 병이 들어가니 말이다...

저 멀리 호주와 브라질에는 홍수와 산사태로 난리이고 이태리와 남미는 화산 폭발로

그리고 유럽, 러시아 미국 그리고 한국은 맹추위 때문에 무지 고생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農心을 패닉상태로 몰고가는 구제역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고기를 더 얻겠다고

가축을 좁은데다 키우고 인공사료를 먹이니 그런 큰 병이 창궐하지 않느냐 말이다.

 

그 옛날 소를 건초 먹이면서 키우고 초원에 키울 때 구제역이란 소릴 들으받냐... 

다 인간들의 탐욕이 빚어낸 자연재앙이 아닐까? 하루빨리 조속히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도 복잡하지만 그래도 산에 가야하기에 밤 11시 20분에 베낭을 메고

탑승장소인 양재역가는 버스에 오른다. 그런데 얼마나 추운지 평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기온이 영하 16도인데 바람이 부니 체감온도는 영하 25도정도는 되는것 같다.

 

버스에 올라 잠을 청한다. 낮에 결혼식 참석하느라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잠에 빠져들어

추워서 일어나보니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이다. 간단하게 볼 일을 보고 다시 잠에 빠져든다.

산꾼을 실은 버스는 내장산I.C를 빠져나와 순창쪽으로 접어든다. 도로에는 눈이 많다.

그리고 눈발이 계속 날리고 있다. 이곳도 많이 추운지 차창이 얼음으로 주렁주렁하고...

범여를 실은 버스는 오르막길 밀재가는 길이 힘에 겨워하고 있고... 겨겨우 도착한 밀재에

내리니 가느다란 눈발이 휘날지만 그렇게 춥다는 느낌은 없다.

버스를 댈곳이 없어 밀재에서 300m 아래에서 세우고 다시 위로 올라와 雪 山行에 대한

산행대장의 훈시를 듣고 새벽 04시 20분에 추월산을 향한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밀재(352m)

滅峙 또는 빛재라는 어색한 명칭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밀재라는 명칭이 정겹다.

지난 구간에 지났던 구간을 추월산까지 다시한번 걷는다

원래는 보리암 아래 담양호 주차장에서 올라와야 하나 들머리 진입로가 급경사

에다 오르막에다 겨울에는 위험하여 산악회에서 다시 이 길을 택한 모양이다.

밀재 도착

밀재는 전북 순창군 복흥면과 전남 담양군 월산면을 잇는 호남정맥의 주 능선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897번 지방도로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밀재에서의 들머리는 우측 순창 방향으로 50m쯤 가면 우측으로 이어진다.

우측으로 올라서면 ‘밀재, 추월산 정상→’ 이정표가 서있고 완만한 능선길로 올라가다

언덕을 넘어 완만한 능선길로 진행하는데 산길로 접어들자 마루금 능선으로 몰린 눈이 깊은곳은

허리까지  차오른다. 선두에서 대장이 러셀을 하면서 가지만 워낙 눈이 많아서 도저히 속력이

나질 않는다. 안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얼마나 차가운지 모자에다 안면 보호대에다

자켓모자까지 이중으로 썼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고 거기다가 손가락은

시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다. 우측에 저 멀리 담양읍과 바로아래 월산면의 불빛만이

환히 비쳐지며 사람사는 곳임을 알려주는 듯 하다.

추월산의 새벽(06:00)

이처럼 아름다운 전남의 5명산의 하나인 추월산에도 역사의 질곡이 참으로 많은것 같다.

추월산과 호남정맥 다음구간에 지나가야 할 금성산성과 함께 임진왜란때 치열했던

격전지였으며 전 본준이 이끄는 동학혁명군이 마지막으로 항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난구간에 밀재에서 추월산까지 45분에 왔는데 오늘은 딱 곱인 1시간 40분만에 추월산에

도착한다. 정상에 부는 칼바람은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게 한다. 누구가 먼저랄 것 없이

서둘러 길을 떠난다.  능선에 부는 바람은 자꾸만 드세어지고 좌측 정맥길로 접어드니

아찔한 내리막길에 눈이 엄청나다. 거기다가 우리가 러셀을 하면서 가야하니 더욱 힘이든다.

추월산 갈림길

추월산 정상에는 정상표지판과 이정표(←밀재, 보리암정상→)가 설치되어 있고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면 30m쯤 내려가면 분기점 이정표(←월계리(4등산로),

 ↗보리암 정상, ↓추월산 정상)가 설치된 곳이 나오는데 우측은 보리암 정상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 월계리 방향으로 정맥길이 이어진다.

담양읍에서 13Km 정도 떨어진 추월산 (729m)은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

 경계를 이루는 호남정맥 상에  자리하고 있다. 

담양 용면 월계리 하산길

담양은 장성과 함께 전라남도의 북부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호남정맥을 경계로

전라북도 순창군과 맞닿아 있고, 곡성·장성·화순·광주에 감싸여 있다. 담양은 우리나라 대밭 면적의

1/4을 차지할 정도로 대(竹)의 고장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죽세공업이 발달하였다.

담양은 호남정맥이 지나는 북쪽과 동쪽 지역에는 산지를 이루고, 여기에서 흘러나온 물길들이

모여 기름진 들판을 형성하였다. 넓은 들판이 가꾸어준 경제력을 기반으로 담양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이 만든 것이 담양 일대의 정자와 원림이다.

소쇄원과 식영정·명옥헌·독수정·송강정·면앙정 같은 정자와 원림이 담양의 정자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담양의 정자들은 중앙정가로 나갔던 담양의 선비들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땅에 돌아와 자연을

벗 삼아 지냈던 흔적이다. 여름을 붉게 물들이는 배롱나무와 함께 어울린 정자들의 풍경은

담양에서만 볼 수 있는 격조 넘치는 모습이다.   

수리바위

추월산에서 수리봉까지는 계속해서 만나는 암릉의 연속이다.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고 우측에 천길 낭떠러지이다. 발한번 까닥 잘못하면 그냥 황천길이다.

그러나 어둠이라서 산꾼들이 잘 인지를 못할 뿐이다. 암릉의 구간 연속이지만

워낙 눈의 양이 많아서 그것을 전혀 느낄수가 없고 아이젠은 이런곳엔 무용지물이다.

저 아래 담양호 주변도로의 가로등만이 졸고있고 바로 아래 보리암에서는 새벽예불이

끝난 시간이라 그런지 적막강산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수리봉(07:20)

대한민국 산이름 중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라면 백운산을 것이고 가장 흔한 봉우리라면

아마 수리봉일 것이다. 왠만한 산에는 수리봉이 다 있다고 보면 될것 같다.

수리봉에 도착하니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듯 하다. 상당히 힘들게 올라온 탓인지

모두 다 지쳐있다. 설(雪) 산행의 힘듬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하다. 2개월만에 동참한

대장님이 먼저 치고 나가는데 직진을 한다.조금 가다보니 이상하여 독도를 하니 약간의

알바를 하였다. 다시 빽하여 수리봉에서 90도로 우측으로 꺽어서 내려간다,

대장님이 선두에 서서 러셀하느라 너무 힘이든 모양이다.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추월산에서 고만고만한 높이로 730, 726, 710 봉우리가 연속이 된다.
눈길이어서  길이 거칠기는 하지만 우회하기도 하고 그대로 넘기도 하는데 큰

오르내림없어 좋기는 하지만 눈이 너무 많다. 우측으로는 복리암, 견양동 방향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내려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소나무

아침 일출(07:35)

오늘도 어김없이 동쪽에서 해는 뜬다. 햇빛이 나기전에 가장 춥다고 하질 않았던가

카메라를 잡은 손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다. 카메라 베터리를 얼지 않게 하기위해

최대한 카메라에 보온을 유지한다. 

수리봉 바로 아래에 있는 이정표 

눈덮인 깃대봉(심적산)의 모습

무능기재(08:40)

전남 담양군 용면 월계리와 전북 순창군 복흥면 주평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이며 깃대봉 오르기 직전에 쉼터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저 너머 눈덮인 강천산의 모습이 아련히 보이고...

견양동정상(09:20)

왜 여기를 견양동 정상이란 이정표가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저 아래 마을이 견양동이라서 그렇게 부르나 그러면 이정표가 거기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 처음 온 사람에게 헷갈리게 만든다

천치재를 큰부래기재라고 하며 견양동고개를 작은 부래기재라 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아무리 빨리 가려고 애를써도 갈 수가 없다. 몸이 말을 안듣고 발이 나가질 않으니

말이다. 자꾸만 산꾼들의 발은 무거워만 지는데 추위는 더욱 더 기세를 부린다.

심적산(心寂山)삼거리(09:40)

700고지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몇개 넘자 지도상에도 잘 나타나지 않은 심적산 삼거리가

나타난다. 심적산이라기 보다는 깃대봉으로 알려져 있는 듯하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능선으로 계속 내려오니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신 가인(佳人)  김 병로 선생의 호를

따서 만든 사법 연수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저기서 아침식사를 해결해야 할 것 같다.

평소 같으면 아침식사 시간이 2시간이 지났지만 추위를 피할 공간이 없어 아직까지 민생고 해결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온 곳에는 아이젠과 스틱은 무용지물이다. 아예 히프와 베낭을 이용해서

내려오는게 최상의 방법인 듯 하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50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을 보면

동심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마루금 능선에서 바라본 가인 연수원

1946년 오늘(8월5일) 대한민국 국회가 가인(街人) 김병로를 초대 대법원장에

 

인준했습니다.

지금 많은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친일파의 역사’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헌 국회의장 및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은 해방공간에서 좌, 우 모두로부터 추대를 받은 인물이었고 초대 국회의장 해공(海公) 신익희는 해방 때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한 분입니다.

가인은 거리의 사람, 즉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8세 때 사서삼경을 뗐고 서양학문까지 익힌 천재였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때 공부와 담을 쌓기도 했지만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 등과 교류하면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조선인 변호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10여 년 동안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무료변론을 자청했지요.

그는 보성전문학교가 재정난에 빠지자 친구 인촌(仁村) 김성수에게 인수를 알선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폐교 직전의 학교가 고려대학교로 되살아나게 된 것이죠. 가인은 신간회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변론의 제한을 받자 경기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13년 동안 그야말로 범부로 지냈습니다.

가인은 해방 후 인공과 미 군정청의 사법부장을 거쳐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 민주주의의 법 전통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57년 66세로 정년퇴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이임사를 남깁니다.

“그동안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은 전국의 법원 직원들에게 지나치도록 무리한 요구를 한 일이다. 인권옹호를 위해 사건처리의 신속을 강조했던 점과 또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보수를 갖고 법만을 위해 살라고 했던 점이다. 나는 전(全) 사법종사자들이 정의를 위하다가 굶어죽으면 그것을 곧 영광으로 알라고 했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수 만 배 명예롭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때, 참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법 개혁을 얘기하고, 더 많은 사람이 사법부를 불신합니다. 며칠 전 부장판사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기도 했지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법의 여신’은 디케, 아스트라이아, 유스티치아 등으로 불립니다.
한 손에는 저울, 한 손에는 칼을 들었지요. 언제부터인가 천으로 눈을 가린 모습이 됐는데
사적 감정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앉아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있는데, 누군가 “우리 현실 상 눈가리개 뿐 아니라 귀마개가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비난한 것이 기억납니다.

오늘 가인을 떠올리며 법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法’이라는 한자 모양 그대로라면 법은 물 흐르듯,
그렇게 가야 정상이지만 그것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펌글)

가인 연수원(10:00)

심적산 삼거리에서 눈길에 미끄러지다시피 하면서 도착한  가인 연수원 허기가 너무져서

연수원 안에 추위를 피해서 아침 식사를 좀 하겠노라고 담당자에게 사정을 하니 담당자는

책임자에게 연락을 한다. 그리고는돌아온  대답이 一言之下에 NO라고 한다.

참으로 야속하다. 지나가는 거지에게도 이 추운 날씨에는 동정을 베풀거늘...명색이 배웠다는

자들이 이렇게 인색해서야... 사회의 존경을 받겠는가. 가인선생이 생존하셨드라면

과연 이랬겠는가?. 그러니까 요즘 당신네들 법조인들이 사회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거 아니요

그래 에이 더러워서도 안 들어 간다. 결국 태양열 집열판 아래에서 겨우 바람을 피해 늦은 시간에

밥상을 폈지만 손가락이 펴지질 않고 너무 추워 사지가 떨려서 밥이 입에 들어가질 않는다.

밥을 먹는등 마는둥 하고 소주 서너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니 조금은 나은 것 같다.

한기에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 서둘러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연수원 등산로 표지판

가인(佳人) 연수원

순창군 복흥면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가인(佳人) 김 병로(金炳魯)의

생가가 있다. 조선시대 고종때 사간원 간관으로 있었던 가인은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하여 법정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일제의 탄압과 6.25의

어려움을 겪어면서 가인의 가문이 이처럼 지조를 갖춘 인물을 배출하게 된 자랑스런 곳이다.

담양호

담양호가 있는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을 끼고 전라북도 순창군의 복흥면과 쌍치면,

산행길의 한 복판에서 시종 주목을 받고 있는 담양호는, 추월산의 동쪽 사면과 용추봉이

있는 이번 산길의 남쪽 골짝물들이 모여든 호수로, 6,670만톤의 저수량이 담양평야와

장성군의 비아면, 남면의 농토를 적셔주고 영산강의 상류를 이룬다.  

담양호는 추월산에서 용추봉·강천산·산성산에 이르는 U자형의 산줄기 가운데에 형성된 골짜기를

막은 댐으로, 1976년에 완공되었다. 담양호는 광주호·장성호·나주호와 함께 영산강 상류에 설치된

인공호수다. 담양호에 담수된 물은 주로 농업용수로 사용되며 담양읍의 상수원 역할도 한다.

담양호는 추월산·가마골야영장·금성산성 같은 명승지가 주변을 이루고 있을 뿐더러

호반풍경이 아름다워 드라이브 코스로 더없이 좋다 

가인 사법연수원에서 바라본 심적산

인색한 쥔장의 횡포를 대신 산꾼들에게 미안해 하는 연수원의 백구

그래 요즘 배웠다는 자들이 (?)보다도 못하니 ㅉㅉㅉ...민초들의 녹을 먹고 살면서

자꾸만 아집과 오만으로 자기들의 이익단체가 되어가니 가인선생의 이름에

제발 먹칠을 하지 마시길... 그리고 약자들에게도 아량을 베푸시길...

연수원 옆 밭에 만들어진 눈사람

연수원 앞 눈밭에서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

이젠 지금부터는 고도가 좀 낮아서 그런지 눈이 조금은 적은것 같다(느낌에)

오늘은 누가 먼저 갈 수도 없고 가지도 않는다. 이렇게 모여서 도란도란 520봉으로 향한다.

520봉(10:50)

그 유명한 U자 도로

전남 담양군 용면 용치리에 있는 U자도로다 담양호에서 순창군 복흥면 넘어가는

도로로서 상당히 정겹고 운치가 있어 보인다.

가막골 들어가는 입구도 보인다.

송전탑(390.6봉:12:00)

순창 백방산(660m)의 모습

순창 복흥면 답동리 일대

산에서 내려다 본 모습은 마을 전체가 눈으로 파뭍혀서 마치 호수처럼 보인다. 

산신산(12:20)

송전탑을 지나 임도로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조그만 고개에 오르니

지도상에도 나타나지 않은 산신산이란 이정표가 붙어있다

천치재 도착(12:40)

원래 오늘 산행구간이 오정자재까지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리일것 같아 여기서 산행을

종료하기로 한다. 산꾼들의 안전을 위해 참 잘한 결정인 것 같다.  얼마나 힘이 들었냐 하면

밀재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G.P.S 거리로 11.66km에 8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그것도 소위 전문 산꾼이란 자들이... 앞으로 가야할 거리가 10km정도이다. 그러면 지쳐있는

상태에서 도저히 불가능 그 자체다. 참으로 雪, 추위와의 싸움은 정말 힘이든다.

 

2009년 12월 첫주에 백두대간 구간 구룡령에서 조침령구간 체감온도 영하 35도에서 걸을때보다

더 힘들게 산행을 했다. 아쉽지만 여기서 접는다. 우리가 타고온 애마가 기다리고 있다.

산은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친다. 下心, 버림과 비움을... 산만큼  위대한 스승은 없다고 본다.

늘 겸손을 가르치고 포용을 가리킨다.  심신이 지친 사람들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받아주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움 엄니같은 포근한 마음으로 말이다. 

순창군 복흥면쪽의 천치재

고추장으로 대변되는 청정, 대한민국 제일 장수마을 순창이 지닌 매력에 이끌리면서

이 지역이 호남에서 가장 전원적이며 향토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노령산맥과 차령산맥이 둘러싸고 섬진강이 굽이쳐 흘러

전국 9대명당중 5곳이 이곳에 있다는 옛 문헌이 새삼스럽지 않을뿐더러 순창자체가

하나의 명당이라 태풍도 피해가는 인심좋고 살기좋은 그래서 잠시만 머물러도

장수하는 기운을 받게됨을 알게 됩니다.

천치재(347m)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과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의 경계이며

29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이곳 주민들에게는 답동고개나

치재로 더 알려진 곳이다. 우리말로 하면 하늘재로라고도 불린다.

담양군 용면쪽에서는 꽤 오르막이지만 순창군 복흥면 쪽에서 보면

 평지나 다름없는 고개이다.

 

천치재 근교의 순창방면 지역에서는 석기시대 유물인 선돌과 청동기 시대 

유물이 고인돌이 종종 보인다. 또한 이 지역에서 조선말엽에 경기도 포천 출신인

의병장 최 익현이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정읍과 이곳 순창에서 관군과 맞섯다.

최 익현은 유학자로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였고 고종에게 일본세력의 침입을

반대하는 인물익도 했지만 관군과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을 해산했다고 한다.

이곳 순창에는 최 익현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천치재에 있는 복분자밭에도 눈으로 가득하고....

정읍 오대양 사우나

천치재에서 장비를 정리하고 차에 오르니 대장님이 다음 산행을 설명한다.

그것을 듣는둥 마든둥 하면서 잠에 빠져든다. 일어나니 우리가 자주 들리는

사우나이다. 산악회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목욕에다 맛있는 식사까지 제공한다.

오늘같은 날은 상당히 적자가 많을텐데 미안한 감정이 앞선다.

혹 호남정맥 산행할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다음까페 들어오셔서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가입하시어 산행을 한번 하입시다. 나 역시 어디 메이는 것 지독히 싫어하는

스타일이지만 이 산악회 정말 분위기 좋고 괜찮습니다. 그리고 하산후 목욕시켜주니

너무 좋습니다. 졸업할때 쯤 대장님 아파트 한채 안팔고 될라나 모르겠넹 ㅋㅋㅋ 

사우나를 마치고 나오니 정읍시내는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정읍여고 맞은편 먹자골목에 있는 본가라는 식당에서 돼지고기에다 콩나물을

뜸뿍 넣은 두루치기가 입맛을 돋군다. 동료산꾼 마카루님, 참이슬님, 아리송님과 함께

우리 전매특허인 맥주 그라스에 소맥이(소주+맥주)를 연거푸 3잔을 들이키고 나니

몸도 좀 풀리고 살것만 같다. 하긴 이 맛에 산에 오는거 아이가...ㅋㅋㅋ

돼지고기+콩나물 두루치기

항시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곳 남도 음식은 정말 맛이 일품이다.

오늘도 난 이 음식은 처음 먹어본다. 그렇지만 너무나 입에 착 감긴다.

감칠맛에 소맥이 우째 이리 천생연분인지... 쥔 아주머니 잘 먹었습니다.

올핸 우째든지 대박 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