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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4구간 - 운암삼거리(초당골)에서 구절재까지

by 범여(梵如) 2010. 12. 5.

산행일시: 2010년 12월 4일~5일(무박산행)

산행구간: 운암삼거리-모악지맥분기점(350봉)-묵방산삼거리-묵방산-여우치마을

              283.4봉-가는정이-335봉-성옥산-소리개재-방성골마을-왕자산-397봉

              윗보리밭사거리-410봉-460봉-420봉-구절재

거리/시간: G.P.S 기록: 19.6km/8시간 45분 소요

 

3주만에 나서는 호남정맥 길이다. 이제부터는 시야가 확보되는 겨울산행은 정말

백미이다. 산은 뭐니뭐니해도 겨울산이 최고가 아닐까 싶다.

베낭을 챙겨 탑승장소인 양재역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인사를 마치고 차에 올라 잠을 청하는데 좀체 잠은 오질않고 자꾸만 정신이

더 또렸해진다. 무박 산행은 차에서 잠을 자둬야 힘이 들지 않는데 말이다.

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온다. 그것도 잠시 전주를 지나 덜커덩거리는

도로 땜에 잠이깨고 곧이어 운암 삼거리에 도착하여 하차하니 음력 10월 그믐날의

하늘에 별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 지 마음까지 쿨해진다.

어부네집 앞에서 서둘러 장비를 점검하고 산행채바를 갖춘다.

 

 

 

 

 

 

오늘산행구간의 지도와 이정표

초당골(운암삼거리) 버스 정류장(03:30)

이곳이 전북 완주군 구이면과 임실군 운암면의 郡 境界地域이며 순창가는 27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며, 또 초당골은 민가보다는 옥정호 때문에 민물 매운탕집들이

 있어서 미식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山經表 92項 8階段을 보면 雲南峙라고 적혀 있는데 現 초당골을 말하며, 지시문을 보면 일명 운암이라고 하며

태인에서 동쪽 50리 떨어져 있고 길이 두갈래로 나뉜다고 적혀 있다(一名 雲暗, 泰仁 東五十里, 分二 )
또 갈려 나가는 줄기는 백여치, 모악산, 귀신산, 탄현, 대평, 승가산,
도봉산으로 現 모악지맥 줄기이며 분기점의

위치는 별 差異는 없겠지만 新 山經表의 저자 박성태님은 분기점을 묵방산 못 미친 지점에서 보고 있고,

山經表는 초당골을 분기점으로 보고 있는데 관점의 차이인 것 같다.

어부집 앞에서 산행을 준비하다

어제 밤 차에 오르자 이상하리만큼 이러저런 생각에 잠이 오질않는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머리는 더 맑아지며 생각은 또렸하다.

산행을 편하게 하려면 차에서 충분히 잠을 자야 하는데 말이다.

전주에 거의 다 온 여산 휴게소 쯤에서 잠이든다. 그것도 잠시 전주를 거쳐서

초당골가는 새로생긴 27번 국도가 포장이 덜된 탓인지 쿵쿵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하는 수 없이 장비점검을 한다. 곧이어 어부집 앞에 도착한 버스에

내리니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만 같다. 새벽은 공기는 차갑기만 하고...  

전북 완주와 임실의 경계를 이루는 운암 삼거리

마루금 들머리 이정표(03:45)

어부집에서 좌측으로 임실쪽 옥정호 옆 도로를 따라 100여m를 가다가 우측 이정표를

따라 마루금 능선으로 오른다. 서리가 꽤 많이 내린 탓인지 길이 상당히 미끄럽다

조금 올라가니 산을 송두리채 개조를 하려는지 벌목을 하여 어지럽게 널리있는

나무들 때문에 길이 약간 헷갈린다. 거기다가 시그널도 없고 음력 10월 그믐날은

어둡기만 하다. 그래도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청명한 별빛이 知天命의 나이인

범여를 童心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곧바로 길을 찾아서 모악지맥 분기점으로 향한다.

모악지맥 分岐點(350봉:04:10)
분기점에서 북쪽으로 국사봉과 밤재를 지나 모악산으로 달려가는 모악지맥이 갈라지는 곳이며 동쪽과 남쪽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섬진강으로, 북쪽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만경강으로, 서쪽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동진강으로 흘러드는 分水嶺이 되는 곳이며 三派水이기도하며, 행정구역은 북쪽은 완주군 구이면, 동쪽은 임실군 운암면, 서쪽은 정읍시 산외면 경계지역이다.

묵방산 가는 길

모악지맥 분기점에서 90도를 꺽어 좌틀을 한다. 여기에도 벌채를 하여 아무렇게나

방치해 둔 나무들 때문에 걷기가 상당히 힘이든다. 거기다가 벌채하기 위해 중장비

다니는 길을 만드느라 산이 너무나 많이 훼손되어 있다. 당국은 허가만 해줬지.

사후 감독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잠시 후 코가 닿을만큼 급경사에 낙엽 때문에

묵방산 오름길은 너무나도 힘이든다. 이마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고어텍스 자켓을 벗어 베낭 등받이 뒤에 끼어넣고 묵방산 갈림길로

향한다.  오늘 산행시간의 변수는 아무래도 낙엽이 될것 같다.

묵방산 갈림길(05:05)

약 20여분간의 된비알을 치고 오르니 숨이 너무도 많이 찬다.

베낭을 벗고 물을 한모금 마신 다음에 마루금에서 2~3분 거리에

벗어나 있는 묵방산을 향한다.

 

시그널만 잔뜩 걸려있는 평범한 봉우리다. 하지만 이곳에 떨어진 빗방울은 운명적으로 갈라진다.

동으로 간 빗물은 섬진강으로 들어 지리산고 물과 합수해 광양만, 남해로 흘러가고 서로간 빗물은

동진강(44 km)을 이루고 정읍시와 김제시, 부안군을 관통하면서 서해로 들어간다.

동진강의 발원지가 바로 묵방산인것이다.

 

동진강은 정읍시 산외면, 칠보면, 태인면과 신태인읍을 적시고 북서쪽으로 방향잡아 서해로 간다.

정읍천과 고부천, 원평천은 동진강의 주요지류다.

묵방산(538m:05:10)

전북 정읍시 산외면 마암리에 소재한 묵방산은 낙엽만 잔뜩 쌓여있고

조그만 돌물덤 하나만 있는 그냥 평범한 산이다. 스텐으로 제작된 표식판만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산이다. 우측으로 전주시내는 아직도 불빛이

밝기만 하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꽤나 차갑게만 느껴진다.

 

 330여년 전 자식이 없던 노부부가 옹기로 말을 만들어 이 산신께 제사를 지낸 후

아들을 얻어 문장 명필가가 되었다 하여 묵방산이라 칭하였다

산경표는 墨方山, 50 지형도는 墨防山 (묵방산), 25 지형도는 黑防山 (흑방산이라 표기 됨. 

여우치 마을(05:40)

묵방산에서 여우치 마을까지는 천당에서 지옥으로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도 편차가 심하다.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느낀다.

산에서 내려와 잘못하면 알바하기 딱 좋은 곳이다. 이 푸른색 지붕의 집을

끼고 밭과 묘지를 끼고 다시 여우치 당산을 지난 다음에 정맥길의 흐름이

시멘트 길을 따라 왼쪽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오르게 되니 임도를 거쳐

호화묘지를 지난 다음에 다시 마루금이 있는 산길로 접어든다.

정읍시 산외면 여우치 마을이며, 새로운 주소 여우치길 187을 끼고 가야 한다.

마을길로 접어들자 온 동네 개들이 합창이라도 하듯이 짖어대는 바람에 동네가

떠나갈 것같은 기분이다. 거기다가 새벽닭울음 소리까지. 곤히 잠든 민초들이

잠이 깰까 노심초사하며 마을길을 벗어난다.

여우치 마을을 지나 호화묘지를 거친 다음에 다시 283.5봉을 향해 오른다.

이곳 호남정맥 구간엔 유난히 호화묘소가 많이 보인다.

이곳 사람들의 조상에 대한 禮敬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가끔은 눈에 거슬리기는 하다.

특이한 점은 상석과 비석을 세운 다음에 꼭 산소 맨위 우측 상단에 土地之神이라는 조그만 비석이

꼭 하나가 더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한번 공부를 해봐야 할것 같다.

여우치 마을에서 출발하여 10분만에 만난 283.5봉(05:50)

산에는 소나무가 많아서 걷기는 상당히 편하다. 가끔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장애물로 변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283.5봉에서 조금 오르다

우측 3시방향으로 가면 다시 산소가 나오고 가로등 불빛이 보인다.

도로에 내려오니 가는정이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가는정이(細井) 버스 정류장(06:10)

정읍시 산외면과 임실군 운암면을 잇는 749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가는정이다.

그 옛날에 이곳에 조그만 우물이 있었는데 가는(가늘 細), 정(우물 井)이곳을 지나가던 벙어리가

이 우물물을 먹고 말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우물이 유명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한문을 풀어쓰면 가늘정이인데

이것이 음운동화현상으로 부르기 좋게 가는정이라고 부른 모양이다

실제 이곳 버스 정류소도 가는정이라고 붙어있다.


행정구역은 왼쪽은 임실군 운암면 마암리 오른쪽은 산외면 종산리이며 여기서

정맥길은 옥정호산장 쪽으로 곧장 이어져야 되지만 산장 때문에 잘려져 있고 산장앞으로 해서 우회하여야 하는데......

분명 이런 곳이 물줄기를 바꾸는 지역이다. 과거에 옥정호로(섬진강)흘러가는 물줄기가 개발로 인해 地形의

변동이 생기면서 섬진강의 물줄기가 동진강으로 흘러가는 현상이 되고 말았으니 山自分水嶺의 원리를 깨트리는 지역이다.

하운암 산장 표시석

후미가 너무 처지는 모양이다. 한 30분정도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날씨가 차갑기만 하다. 그래서 묵방산에 벗었던 고어텍스 자켓을 입으려고 하는데

베낭뒤에 꽂아 두었던 자켓이 없다.이걸 어쩐다 꽤 비싸게 준건데 말이다.

아이고 아까워라...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서서히 옥정호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는정이에서 상두 마을까지 옥정호를 끼고 마루금능선을 걷는다.

 

옥정호의 여명(黎明)

상류에 댐을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을

하게끔 하고 있는 호수로1962년도에 섬진강 댐이 완공되면서 생긴

 인공호수로 전북 정읍의 산내면과 임실군 운암면, 강진면에 걸쳐있는

이 호수는 총 저수량이 4억 3천만톤에 달한다.

이 저수지가 완공되면서 담수하는 바람에 운암면의 절반 가까이가

수몰되었고 수몰지역 주민들은 계화도 간척지로 이주 되었는데

옥정호의 물이 6.2km의 수로를 통해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섬진강

 발전소로 유입되어 터빈을 돌린 후 다시 67km의 수로를 통해 계화도

간척지의 청호저수지까지 흘러 들어간다.

전라도 내륙지역의 젖줄역할을 하며 옥정호 둘레길은 한국의

100대 아름다운 길중에 하나이다

가는정이 마을에서 다시 마루금을 오른다. 우측으로 벌목으로 벌거벗은

산들이 보이고 좌측은 옥정호이다. 마루금 능선은 낙엽이 수북하다.

낙엽소리가 산꾼의 걷는 발길에 닿으니 그 소리가 꽤나 시끄럽다.

이곳은 낙엽 밑으로 야생란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옥정호 너머로 일출은 시작되고...(07:30)

雲海로 덮힌 호남정맥의 연봉들

310봉에서 아침만찬(07:50)

이제 서서히 허기가 온다. 평소보다는 식사시간이 늦었다.

무박산행에서 배꼽시계는 정말 기가 막히게 정확하다.

310봉에 올라서니 선두는 이미 식사를 시작했다. 서둘러

우리도 상을 편다. 라면에다 오뎅사리를 비롯한 여러가지 넣고

끓인다. 소위 말하는 꿀꿀이죽 비슷하게... 그래도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따뜻한게 들어가니 속이 한결 풀린다. 거기다가 지난 목요일 여주에

라운딩 갔다오면서 이천의 어느 쌀밥집에서 사온 맑은 동동주를 몇순배

하니 기분은 기가 막히게 쿨하다.오랫만에 일반산행하는 팀들처럼 느긋하게

30분간이나 만찬을 즐기다보니 다른 산꾼들은 다들 가버리고 아무도 없고

후미를 기다리는 산행대장님과 동료 산꾼 젊은 아저씨 뿐이다.

장비와 쓰레기를 챙기고 뒷정리를 날끔히 한 다음에 성옥산으로 향한다.

마루금 능선에서 바라본 정읍시 산외면 목욕리 마을의 아침

소리개재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외목(外沐, 밧 멱수),내목이라는 동리가 있다.

이곳은 물이 워낙 맑고 깨끗해서 옛날에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던 곳 이라 한다.

그 우물이 외목마을 가운데 있었는데 지금은 시멘트로 막아 놓았다 한다.

산외면 사무소를 지나 북쪽 동곡리에는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김개남(동곡리 지금실)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동곡리 상두산 중턱에 김개남 장군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또 오공리 공동마을의 김동수 고가(중요민속자료 제26)는 정조시대 1784년에 지어진

한옥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호남 상류층 가옥의 구조로 인하여 지금 까지도 88

전부가 전북 지방의 빼 놓을 수 없는 명승지 이자 명당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성옥산(聖玉山:08:45)

아침만찬을 즐기는 바람에 졸지에 맨 후미 그룹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지난 10개월간 낙동점맥을 타면서 동고동락을 같이한 동료 산꾼과

같이 산행을 한 것이 즐겁다. 낙동정맥을 타면서 한번 제대로 산행을 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오늘 좀 갚아보려고(?)... 느긋하게 같이 걷는다.

성옥산을 지나 벌목구간인데도 앞서간 산꾼들이 얼마나 멀리 가버렸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은 여유롭게 가리라 마음 먹는다.

다시 옥정호의 끝자락이 보이고 야산과 고추밭과 밭고랑을 지나 마을로

뚝 떨어진다. 

왕자산의 아버지 뻘 되는 산으로서, 이미 임금이 된 상태라는 의미라고 한다.

지역 주민들은 성옥산이라 물으면 잘 모르고 성자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성옥산 하산길에서 만난 망부석

상두마을

이곳이 정읍시 산내면 상두마을이다. 이번 산행지역인 정읍시는 우리나라에서 논으로 이루어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배들평야"가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에 자리하던 "만석보"는 한국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곳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압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전봉준의 주도로 1894 년 1월 10일 밤 배들평야로 몰려가 만석보를 때려 부숴 버린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소리개재 내려가는 길에서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층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에 봉기한 이후, 보국 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며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로

합의하였다 특히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을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톈진 조약을 빙자하여 우리 나라에

 파견된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19세기 조선은 열강들의 침탈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백성들의 피폐는 매우 심각한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고부 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에게 온갖 죄명을 씌워 돈을 갈취하고

 지나친 세금을 거두는등 갖은 탐욕을 부렸다. 이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동학 접주 전봉준을

 필두로 두 차례에 걸쳐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894년 2월 결국 봉기를 하였다.

이들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크게 무찌르며 정읍, 고창, 영광, 함평 등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마침내

 전주에 입성하였다.이에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자 조정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동학

 농민군은 12개의 폐정 개혁을 또한 집강소를 설치한 동학 농민군은 지역의 자치를 담당하고

 내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지역에서 그들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크게 패퇴를

하고 기세가 꺾였으며, 나머지 동학 농민군은 논산, 태인, 순창 등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 후 재기를 꾀하던 전봉준 및 여러 지도자들이 붙잡혀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당함으로써

 결국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동학 농민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전봉준은 키가 작아서 녹두 장군이라 불렸지만 지혜가 뛰어나고 지도력이 강한 장군이었다.

조총을 막기위해 닭장에 짚을 넣어 총을 막았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복을 하여 관군을 기습하는 지략을 발휘한 것이다. 녹두 장군에 대한 노래도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이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에는 전봉준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소리개재

성옥산에서 편안한 걸음으로 하산을 한다.

정맥길에 봉분이 큰 1기의 파평윤씨 묘지를 지나 다시 7∼8기의 밀양박씨 묘지로 이어지더니

다소 넓은 정맥길이 나타나며 정면으로 정읍시 산내면 두월리 상두마을과 옥정호가 눈앞이다.

여기서 정맥길은 오른쪽으로 내려서며 정읍시 산내면과 산외면을 잇는 715번 지방도로이며 소리개재이다.

소리개재에서 다시 좌측 마루금으로 올라선다.

고창과 순창에만 복분자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도 복분자밭이 꽤나 많이 보인다.

편안한 능선을 타고 오르는데억새들과 가시넝쿨들이 태클을 건다.

조금 고개에 오르면서 올라가다 다시 밭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 밭고랑과 소나무 숲을 지나

콘크리트 임도로 나오니 방성골 마을 당산나무가 나타난다.

 

아직도 주인을 찾지못한 체 까치밥으로 달려있는 감나무

방성골마을 당산나무

오늘은 마을에 들릴때마다 당산을 만난다. 여우치 마을에서도...

 

마을의 조상신(祖上神)이나 수호신에게 지내는 제사.

이것은 마을의 평안과 풍요 등을 기원하기 위해서 행해졌다. 산제(山祭)·동제(洞祭)·

 당산굿·대동치성(大同致誠)·당제(堂祭)라고도 한다. 대개 음력 정월대보름과 정초에 지내나

10월 보름에 치르기도 한다. 제단 주변을 깨끗하게 한 뒤 부정을 막기 위해 황토를 펴고

 금(禁)줄을 친다. 제주(祭主)는 마을의 연장자 가운데 건강한 사람이 맡으며, 1주일 전에

 목욕재계한 후 육류를 먹지 않고 상가(喪家)·산가(産家) 출입 등을 금하며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한다. 제물은 제주 집에서 제사 전날에 준비하고 비용은 제답(祭畓)의 수입 및 각 가정에서

추렴하여 마련한다. 제사는 보통 자정 전후에 시작하여 새벽에 끝낸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굿을

 하고 제사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는다. 당산제는 제사와 굿의 이중성격을 갖고 있는 점이

특이하며 축제 분위기로 부락민의 유대강화에 큰 역할을 한다.(브래태니커 백과사전 인용)

방성골 마을의 모습(09:25)

오늘은 유난히도 마을을 많이 만난다. 이른 새벽부터 여우치, 가는정이, 등등...

오늘구간은 고도가 200~500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데도 힘이드는 것은 마루금에서

땅바닥까지 완전히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하는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무척이나 힘이 들 수 밖에 없다. 산이 인간사의 무엇이 궁금한 지 자꾸만 마을로

내려와 물끄러미 구경을 하는 느낌이다.

인간사에 궁금한 거 하나도 없소이다. 인간사에 살아가는 거는 苦가 아닐까요.

울님 입술만큼이나 빠알간 망개열매

방성골마을 밭을 지나 이 마을 식수저장 탱크로리를 끼고 다시 산을 오른다.

다시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경사도가 깨나 있고 낙엽이 많아 무척이나 힘이든다.

저 위쪽에서 산꾼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거의 한시간만에 만난다.

왕자산까지 오름길은 상당히 힘이든다. 중간중간에 그룹들이 간식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나가는 길에 과일도 얻어먹고 쐬주도 한잔 얻어먹고 하면서...

왕자산 정상 삼각점

왕자산 오름길에 발목이 빠질정도로 수북히 쌓인 낙엽때문에 상당히 미끄럽다.

잘못하면 사고나기 딱 좋을곳 같다. 조심 또 조심하면서 걷는다. 그러다보니

스틱에 힘이들어가고... 아픈팔에 자꾸만 통증이 심하다. 공동묘지에 가서 싱싱한

것으로 바꿔와야 될란가보다.

왕자산(王子山 442m:10:20)

미끄러운 낙엽을 딛고 겨우 능선에 올라 조금 지나니 별로 특징도 없이

스텐 강판에 빨갛게 왕자산이란 표식이 있다. 백마탄 왕자님을 기대했는데

실망이다. 정상 바로아래 산소에서 베낭을 풀고 사과 한조각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호남 8대 명당이 있다고 여겨지는 산으로서 왕이 태어날 것을 예견한 산이라 하여

불리던 이름이며 지금도 외지인 들이 이곳 까지 와서 묘를 많이 쓴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왕자산 주위에 묘지들이 수도없이 많다.

 

현 대상그룹의 모체인 미원그룹을 창시한 임대홍(林大洪) 전 회장은

정읍시 산내면 예덕3리(홍문리)에 군신봉조(君臣奉朝) 혈을 써서 갑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임 회장의 5대조 되는 임창진의 묘를 왕자산(王字山)에 쓰고나서 잘 풀려 갑부가되었다고 한다.

임 회장이 이곳 정읍 출신이다

측백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진 마루금 터널

윗보리밭 임도 사거리(11:00)

왕자산에서 내려와 나무 터널을 지나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저 건너에 보이는 460봉이 올라가기 싶지 않음을 예고한다.

우측 시실리에는 농장인듯한 축사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요즘 구제역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할듯 싶다. 부디 이곳에는

 구제역이 오질 안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임도 사거리에서 경운기가 들어갈 정도로 넓은 도로를 지나니 광산 김씨 묘지가

나오고 그 아래 밭에는 탐스런 감들이 인력이 없어서인지 주렁 주렁 그대로 달려있고 

은행나무 아래는 은행들이 수북히 그대로 떨어져 있는데 어느 누구 하나 눈길도 주지

않는 모양이다. 이것이 우리네 농촌의 현실인 모양이다.  

460봉 정상(11:30)

광산 김씨 묘소에서 460봉 오름길은 오늘 산행의 백미다.

70도 정도의 급경사에 낙엽이 참으로 많아 미끄럽기가 그지없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이다. 나무를 잡고 스틱에 의지한 체 겨우 정상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반겨준다. 저 너머 정읍시내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구절재 고개가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460봉 아래의 한가로운 농촌 풍경

460봉에서 다시 뚝 떨어지는 길도 장난이 아니다. 낙엽땜에 얼마나

미끄러운지 아예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내려오는게 더 편할 정도이다

거기다가 먼지가 많이 나는 바람에 목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여유로운 정읍시내의 풍경

오늘의 마지막 힘든 구간인 420봉의 모습 

8시간 45분의 긴 여정끝에 산행을 마친 구절재의 마지막 모습

아홉번 구비구비 돌아서 올라간다는 구절재

정말 오랫만에 여유로운 산행길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말이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니 먼저 오신 산꾼들이 맥주에다 소주을 말아서(?)

마시고 있다. 거기서 연거푸 2잔을 원삿하고 창에서 옷을 갈아 입고

차에 두고 간 핸드폰을 확인하니 초등학교 여자동창 시모님이 별세했다는

문자가 와 있다.  그렇다고 지금 갈 수가 없어서 총무에게 대신 부의금을

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차에 오른다. 정읍에 와서 사우나를 마치고 김치찌게에

폭탄주 서너잔을 깔끔하게 마시고 잠에 떨어진다.

산악회에서 사우나 시켜주고 맛있는 식사에다 이스리까지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

정읍 구절재 [井邑九節峙] 

해발고도 230m의 고개로, 국도 30번이 지나가며.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산내면 능교리 사이에 있다. 호남정맥이라 불리는 산줄기의 맥이 이어지는 곳으로,

구절재(구절치)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왕자산~소리개재~성옥산~여우치~묵방산이,

남쪽으로 사적골재~노적봉~굴재~고당산~개운치가 이어져 있다.

구절재 고갯길은 1676년(숙종 2)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태어난 모은

 박잉걸()이 처음 닦았다고 하는데 고갯마루에 박잉걸의 공덕을 기리는

치도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구절재 아래에는 섬진강수력발전소

(칠보수력발전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