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10년 10월 16일 ~ 17일
산행구간: 구절재-사적골재-석탄사-489.5봉-553봉-복분자밭-굴재-고당산-개운치
망대봉-두들재-여시목-434봉-복룡재-520봉-추령봉(송곳바위)-추령
산행소재지: 전북 정읍시 칠보면.산내면.산외면. 순창군 쌍치면.복흥면
거리/시긴: 23.6km / 9시간 20분 소요
16일은 음력으로 9월9일로 길일이라 그런지 결혼식이 참으로 많다.
범여도 토, 일욜에 자그만치 6군데나 있었다. 넷째 형님 딸래미 결혼식에
시골에서 장형과 형수님도 오셨다. 나에게는 부모님 같으신 존재이다.
그래도 정맥길에 나서기에 산에 간다면 아마 호적에서 빼버릴것 같아서
사무실이 바쁘다는 핑계로 거짓으로 고하고 산으로 향하는 마음은 그리
편치만은 않다. 동생이 먹고 살겠다는데 큰 형님이 뭐라고는 하지는 않지만...
지난 주엔 행사가 많아서 사실 사무실엔 많이 빠졌다.
수욜에 지인 병문안과 상가집, 목욜에 라이온스 월례회와 은사스님
華甲 논문 헌정식 참석, 금욜에 골프 월례회 참석하다보니 사무실
업무가 밀린걸 토욜 새벽부터 나와 대충 정리하고 조카 결혼식 참석하여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고 늦게까지 뒷정리하고 술 한잔 했더니만
상당히 피곤하다. 그래도 요즘 든든한 것이 아들이란 버팀목이 있어 줘서
운전 신경 안쓰고 맘놓고 친척들과 술 한잔 할 수 있는게 얼마나 즐거운지.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진다.
오늘은 버스기사가 바뀌었는지 자주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자주 잠을
깨운다. 정읍I.C를 거쳐 구절제에 도착하니 날씨는 상당히 쌀쌀하다.
안개가 자욱낀 구절재는 구절초가 많이 심어져 있다. 구절초와 구절재는
무슨 관계인지 알 수는 없고.... 간단한 워밍업 후에 마루금으로 접어든다.
초반에는 상당히 편하게 산행을 시작한다. 미리재 지나 송전탑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이고 마루금을 따라 우측 칠보쪽의 불빛만이 산꾼과 계속
동행을 한다. 저 아래 개짖는 소리에 고단한 민초들의 잠을 깨울까 걱정이다.
사기점재 지나 석탄사를 들렸다 가는 바람에 부지런히 선두를 쫓아 가는 바람에
이마에 땀이 솓는다. 자윽한 안개속에 솟아 오르는 일출은 구경도 못하고
복분자 밭을 지나 굴재의 농로에서 아침상을 펼친다.
굴재에서 느긋하게 아침 만찬을 즐기고 고당산을 향하는데 잡풀숲을 헤치며
오르는데 운무속의 아침햇살은 제법이나 따갑다. 저 아래 오룡마을은 병인양요
의 그 사건은 아는지 모르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고당산에서 개운치 가는길은 편안하다. 대나무 숲을지나 도로에 도착하니
이곳도 이농현상이 심한지 비어있는 집들이 보인다. 망대봉 오름길은
벌목현장이 많고 망대봉은 통신 중계소로 인해 흉물스럽기만 하다.
콘크리트 임도를 S자로 내려와 두들재를 거쳐 여시목을 거쳐 복룡재에
도착 코가 닫을만큼 된비알에 오르니 숨이 턱까지 찬다.
오늘도 하나 배우고 간다. 어느 산이나 그냥 쉽게 통과 시켜주지를 않는다.
530봉 거쳐 추령봉 가는 길에 숨이 막힐만큼 앞을 가린다.
추령봉을 국공단 직원들이 못가게 막아서 그냥 추령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개도착 샤워를 하고 폭탄주(맥주+소주)를 서너잔 마시고나서 서울오는
버스에 몸을 실고 깊은 잠에 빠진다. 오늘도 숙제는 끝내고...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井邑市:‘정주(井州)’의 옛 이름
전라북도의 남쪽 중앙에 있는 도시로 호남평야와 노령산맥을 끼고있어 농업및 농산물
제조업 따위가 발달하고 칠수력 발전소 따위의 동력원이 풍부하다
명승지로는 내장산, 민락정, 무성서원, 영은사, 초산성지 등이 있으며 1995년 1월
행정 구역개편때 정주시와 정읍군이 통합되면서 신설되었다
순창군
동쪽은 섬진강(蟾津江)을 경계로 남원시, 북쪽은 임실군, 서쪽은 노령산맥의 주능선을
경계로 정읍시와 접하고,남서쪽 및 남쪽은 전라남도 장성군·담양군·곡성군과 접하여
도계(道界)를 이룬다.
순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인 강천산을 비롯하여 역사적 애환이 담긴 희문산,
맑고 깨끗한 적성강이 있어 진안, 장수와 함께 전북지역 최오지이기도 한 곳이다.
그래서 장수(長壽)인구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淳昌은 청정지역의 환경인지는 몰라도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해낸 곳이기도 하다.
대간.정맥꾼들의 영원한 우상인 우리나라 산줄기를 집대성한“산경표”의 저자인
여암 신 경준 선생도 이곳 출신이고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중의 한사람인
기 강진 선생, 판소리 서편제를 창시한 박 유진 명창의 고향이기도 하다.
조선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비판하고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우고 정읍을 거쳐 순창에서 관군과
맞서기도 했던 의병장 최 익현의 고향 또한 순창이다.
태조 이 성계가 어린시절 스승인 무학대사가 순창 만일사에 기거하고 있을 때
이곳에 왔다가 어느 농가에 들러 고추장을 곁들여 점심을 먹었는데 그 맛을
임금이 된 후에도 잊지못해 진상하도록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순창고추장.
지금도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범여는 순창땅을 처음 밟아보는 산꾼이긴 하지만 청정환경이 참으로 맘에 든다.
구절재 (井邑 九節峙 : 03:40)
해발고도 230m의 고개로, 국도 30번이 지나간다.
구절재는 정읍시 산내면과 칠보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서 9번 굽어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호남정맥이라 산줄기의 맥이 이어지는 곳으로, 구절재(구절치)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왕자산~소리개재~성옥산~여우치~
묵방산이, 남쪽으로 사적골재~노적봉~굴재~고당산~개운치가 이어져 있다.
구절재 고갯길은 1676년(숙종 2)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태어난 모은 박잉걸(朴仍傑)이 처음
닦았다고 하는데 고갯마루에 박잉걸의 공덕을 기리는 치도불망비(治道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음력 9월9일에서 1주일동안 정읍에서는 구절초 축제가 열린다.
10월 16일(음력 9월9일) 중앙절이라고 하여 참으로 좋은 길일이라
그런지 참으로 결혼식이 많다. 이건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든게 인지 상정이라 내 자녀들을 좋은날에 혼인시키고
싶은게 부모의 맘이 아닐까. 범여도 토욜, 일욜 6건의 결혼식장이...
일욜 새벽 3시반 구절재에 도착하여 안개가 자욱하다. 2주사이에 호남길은
날씨가 꽤 많이 쌀쌀하다. 이슬은 촉촉하게 젖어있고 주위에는
하이얀 구절초가 새벽 산꾼들을 반겨준다. 간단하게 워밍업을 하고
뭐가 그리들 급한지 서둘러 마루금으로 들어선다
예로부터 ‘구월등고(九月登高)’라 하여 산에 오르는 철이라고 했습니다.
유두날엔 주로 여자들이 산과 계곡을 찾고,
중구날은 남정네들이 주로 산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중구날은 양수(陽數)가 겹쳐서 양기 센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쁜 철이라 멀리는 가지 못하고
잠시 틈을 내서 가까운 산으로 여럿이 단풍놀이를 다녀오는 정도였습니다.
남정네들은 더러 산꼭대기에 올라가 바람을 쐬고,
오랜 만에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거나 바짓가랭이를 내리고
사타구니를 바람 쐬게 하거나 햇볕을 쬐게 하였지요.
산은 뭇생명들의 집덩어리입니다.
산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야생동식물들입니다.
자연에 대한 겸허한 하심을 미덕으로 여겼던 옛 사람들은
산을 ‘오른다[登山]’하지 않고 ‘든다[入山]’라고 하였습니다.
꼭히 등산이라는 말을 써야 할 때는 ‘등고(登高)’라는 말을 썼다.
등고란,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그 산의 높이를 오르는 것입니다.
또는 '유산(遊山)'이라고도 했습니다.
구절초는
넓은잎구절초·구일초(九日草)·선모초(仙母草)·들국화·고뽕[苦蓬]이라고도 한다.
산기슭 풀밭에서 자라며 높이 50cm 정도로 땅속줄기가 옆으로 길게 벋으면서 번식한다.
모양이 산구절초와 비슷하며 뿌리에 달린 잎과 밑부분의 잎은 1회깃꼴로 갈라진다.
잎은 달걀 모양으로 밑부분이 편평하거나 심장 모양이며 윗부분 가장자리는 날개처럼 갈라진다.
9∼11월에 줄기 끝에 지름이 4∼6cm의 연한 홍색 또는 흰색 두상화가 한 송이씩 피며
총포조각은 긴 타원형으로 갈색이다. 열매는 수과로 씨는 10월에 익고 꽃을 술에 담가
먹으며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재배하기도 한다.
생약 구절초는 줄기와 잎을 말린 것이며, 한방과 민간에서는 꽃이 달린 풀 전체를
치풍·부인병·위장병에 처방한다. 유사종인 산구절초·바위구절초 등도 약재로 쓴다.
한국·일본·중국·시베리아 등지에 분포한다.
구절초의 유래
구절초 이름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첫째는 음력 9월 9일날 꽃과 줄기를 함께 잘라 부인병 치료와 예방을 위한 한약재로
이용한데서 구절초(九折草)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둘째는 5월 단오에는 줄기가 다섯마디가 되고, 음력 9월 9일이 오면 아홉마디가 된다하여 구절초(九節草)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으며 셋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약으로서 줄기에 아홉 마디의 능(稜, 모서리)이 있으므로
구절초(九節草)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다.
산에오르고 조금 지나니 이곳은 묘지 천국이다.
온 천지가 묘지인 느낌이다. 이곳 사람들의 조상에
대한 禮敬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조상은 자신의 뿌리이니
예경을 해야 됨이 당연한듯... 근데 다른 지역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 묘비석이 대다수가 한글로 되어있다. 이것은 좀 문제가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 성의 本이 한문(뜻글자)으로 되어 있는데 나중에 자신의 본관은
어떻게 찾을 지... 정 어렵다면 한문을 병행해서 쓰야 되는 것이 않을까 싶다.
괜한 대한민국 민초들의 걱정을 다하면서 범여는 산길을 걷는다.
어둠속에 미리재를 지나 계곡으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철탑을 끼고
428봉으로 쭈~욱 오름길을 오른다. 우측에 칠보면의 어느 지역인지
모르지만 환한 불빛이 계속 산꾼과 함께 마루금을 같이한다.
개짖는 소리가 사람사는 곳임을 알게 하고 정겹게 느껴만 지는데
다만 염려스러운 건 농사일에 곤하게 잠든 쥔장의 곤한 잠을 깨울까 싶어...
428봉 삼각점
428봉 정상(04:50)
초반 시작할 땐 추워서 바람막이를 입고 출발을 하였는데
1시간이 지난 정도 되었을까. 428봉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물한모금
마시며 5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날씨탓인지 물은 먹히질 않는다.
아직까진 1시간 반은 더 가야만 날은 밝아질 것이고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사적골재(05:20)
428봉에서 사적골재 내림길은 참으로 편안하다. 이곳도 여기저기 호석으로
처리한 사각 박스형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어느 묘지에는 흰옷을 입힌
허수아비가 나타나 깜짝 놀랐다. 요즘 맷돼지의 폐해를 막기위한 고육지책인
모양이다. 갸륵한 효심이 보인다. 먹이사슬 체계가 무너진 멧돼지의 횡포를
언제까지 인내해야 할 지... 우측에 연화정사란 곳에 불빛이 보인다.
임도로 되어있는 사적골재는 방범 가로등만 켜져있고 고요하기만 하다.
임도를 따라 석탄사 가는 길을 계속하다 넓은 묘소에서 후미를 기다린다.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함께 다른 일행과 떨어져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나
석탄사에 들린다. 입구에 있는 부도탑이 새벽에 이방인을 반갑게 맞이한다.
석탄사 부도
석탄사(石灘寺) 대웅전
석탄사는 탄사복설(灘寺伏雪)의 고사가 있다.
조선후기 헌종 때 석탄사 아래 원촌마을에 이안복(李安福)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남의 집 머슴을 살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주인집 소를 끌고 가다가
사서삼경을 팔러 다니는 책장사를 만났다.
책장사는 사서삼경을 흔들어대면서「이 속에 정승판서가 다있다.」고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머슴 이안복은 정승판서가 다 있다는데 소 한마리가 대수인가 하고
주인집에 와서는 소 값에 해당하는 만큼 몇 년 더 머슴을 살겠다고 자청했음은 물론이다.
이안복은 그렇게 해서 구한 책들을 아들 3형제에게 주면서 공부를 시켰다.
바로 석탄사에서 공부를 하도록 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아들들은 철딱서니가 없었다. 한번은 이안복이 아들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가를
볼 겸 해서 석탄사에 올라가보니 3형제는 퉁소와 장구를 두들기며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목격한 이안복은 아무소리 하지않고 아들들이 놀고 있는 방문앞에 밤새도록 엎드려 있었다.
아들 중의 하나가 화장실에 가려고 새벽에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등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인 채로 마당에 엎드려 있었다. 이를 보고 아들들은 눈물을 흘리고 반성하였다.
이후로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무성서원 집강을 지낸 바 있고 석탄사 법당의 상량 글씨를 쓰기도 했던
이교면(李敎冕)선생이 전하는 이야기다.
용태봉(龍台峰)인 석탄(石灘)의 동봉(東峰) 암벽(岩壁)에 있으니 창건년대는 잘 알 수
없으나 오래된 절로 보인다. 신라 27대 선덕여왕(新羅 27代 善德女王)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선조(宣祖)때 임진(壬辰)과 정유(丁酉) 난(亂)때 병화로 타 버렸는데 영조(英祖: 1750年경)때
모은 박잉걸(慕隱 朴仍傑: 七寶面 白岩里 출신)이 다시 지었고, 1894년(高宗 31年) 갑오동학혁명에
소실된 것을 가산 김수곤(迦山 金水坤: 泰仁人 1873~1950)이 중건했었는데
1950년 6.25사변에 다시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 되었다..
대웅전 문은 굳게 잠겨있어 밖에 서 계시는 관세음보살 입상에 3배의
예를 올리고 대웅전 뒷길 산죽을 헤치고 20분여분을 오른 끝에 마루금에
다다른다. 오래된 고찰이긴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있고 새로 지은듯한
요사채와 공양간인듯 한 건물이 대웅전과 석탑과의 언밸런스로 인해 가람배치가
눈에 상당히 거슬린다.
553봉 정상(07:00)
굴재가는 복분자 밭에서
굴재(07:35)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종암리와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여러 골을 이어주었을 굴재.
굴재에서 정맥은 제법넓은 복분자 밭을 가로 질러야 한다
왼쪽 오룡동 마을은 병인양요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숨어 살던 성지로 안내되어 있다.
지금은 잘 포장된 도로가 순창까지 큰 길에 연결되어 승어실 마을과 함께 국사봉 철쭉제의
종점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안개가 자욱낀 가운데 떠있는 아침 해
굴재는 농로로 된 임도이다. 이곳에서 오늘 아침상을 펼친다.
날씨가 차가워 이젠 막걸리 먹긴 애매하여 보온병에다 따끗하게 데운
사케(정종)에다 오뎅을 끓여 단백하게 아침을 즐기려 했는데 아 글쎄
버너,코펠 다 챙기고 원재료를 냉장고에 두고 왔으니 내 원참 장가가는
놈이 뭐(?) 빼놓고 간다는 것과 똑 같은 꼴 돼버렸으니 말이다.
할수없이 동료 산꾼들에게 빌붙어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닝커피까지
한 후에 느긋하게 고당산을 오른다.
운해로 가득한 오룡동골
골재에서 고당산 오름길은 관리가 안되어 있어 억새를 비롯한 잡풀들이
상당히 괴롭힌다. 안개속의 가을햇빛은 꽤 따사롭기만 하다. 날씨가 더워
반팔을 갈아 입으려고 시도해 보지만 숲이 너무 우거져 포기하고 그냥 걷는다.
고당산 오름길은 꽤나 가파르다. 먹었으면 버려야 하는 법. 숲속으로 살짝 빠져
비우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고당산에 오르니 기분이 쿨하다.
고당산(641m: 08:45)
전북 정읍시 부전동과 칠보면,순창군 쌍치면과 경계에 있어며 동진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되며
동쪽으로는 추령천을 통하여 섬진강에 합수되어 남해로 흘러들고 서쪽으로는 수청 저수지를
통하여 동진강으로 합수되어 서해로 흘러든다.
서쪽은 내장 저수지와 내장산의 연봉들이 줄지어 다가오고 건너편 저너머 추월산과, 개운치
망대봉으로 연결되는 산이다.
고당산 정상 삼각점
오늘 구간에서 처음으로 표지판을 본다. 그만큼 이곳은 산에 대한 관리가
안되어 있다. 거기다가 어느 금융권에서 설치해 논 정상 표지강판도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당국에 관심이 필요한 지역이다. 고당산 정상에는 묘지 한기가
자리를 잡고있다. 어느 후손인지 몰라도 산을 좋아하지 않으면 성묘하기가
힘이 들겠꾸나. 아마 이 분은 전생에 정맥 산꾼이었겠지...
고당산에서 개운치까지는 상당히 급경사로 된 내리막길이다.
그렇다고 그리 험한 길도 아니다. 산죽길을 벗어나니 이곳도 서서히
가을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나무들이 서서히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참으로 이쁘게 피어있다.
개운치 가는 마지막 관문 대밭숲을 지나니 차소리가 들려오고 비어있는 듯한
가옥들이 두어채가 보이면서 개운치로 떨어진다.
개운치 가기 직전에는 호젓한 대밭길도 걸어보고...
개운치에서 강천산 군립공원 가는 길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의 경우 그 유명세로 인해 잘 알려져 있지만 군립공원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중에서도 순창군 강천산은 1981년 1월 7일 전국에서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산이다.
순창에서 정읍 쪽으로 약 8㎞쯤 가게 되면 이 곳 강천산 입구에 이른다. 진입로 좌측에는
넓고 아름다운 맑은 강천호가 있다.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이 비단결같이 잔잔한 호수 위로
비춰질 때면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 그리고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절경 등의 볼거리를
갖춘 풍부한 관광자원이 있어 자연공원으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산세가 웅장하거나 높은 편은
아니지만 계곡이 깊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광덕산은 몰라도
강천산은 잘 알고 있는데, 강천산이라는 이름은 원래 강천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강천산은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6번지 일대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해발 583.7m의 산으로,
해발 565m의 광덕산을 비롯하여 해발 603m의 산성산과 연대봉, 선녀봉, 장군봉, 왕자봉, 형제봉,
신선봉, 옥호봉, 수령봉, 깃대봉, 천지봉으로 이루어진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랑스런 산이다.
개운치(09:15)
개운치는 고당산과 망대봉 중간지점이며,정읍시 부전동과 순창군 쌍치면 방산리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21번 29번 국도가 지나며 정맥 마루금이 흐르는 지역이다.
도로변으로 몇채의 가옥중 절반은 빈집인 듯 하다. 이곳도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이 도회로 떠나버려 이농(離農)현상이 심했던 모양이다
21번 국도는 전북 전주시에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에 이르고
29번 국도는 전남 보성군 미력면에서 충남 서산시 대산읍까지 이어가는데
순창군 금평리 쌍갈마재에서 만나 함께 개운치를 넘어 한동안 동행한다.
무슨 열매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이쁘다.
심마니 아우한테 뭣에 쓰는 열매인 함 알아봐야겠다
이곳에 무슨 부대가 있는 지 산꾼들에게 또 다시 겁박을 하네
망대봉 정상 KT 통신시설(09:40)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이라 백천번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정맥 마루금을 짤라 정상에 흉물스럽게 설치해놓은 건 아무래도
눈에 거슬린다. 그랬으면 주위 길이라도 좀 정비해서 정맥 산꾼들에게
배려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철조망에다 가파른 길을 어쩌란 말인가.
지난 낙동정맥 구간 천성산 공군 방공포 부대에서도 겪었지만
이젠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나리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지.
지난해 용문산도 이젠 정상을 개방했는데 여긴 원상복구할 의향이 없으신지...
민주주의란 용어는 국민이 주인이란 뜻인데. 아직까지 책상머리의 아둔한 한
자들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단 말인가...갑과 을의 관계를..
갑은 세금내는 국민이요 을을 그 녹을 먹고 사는 당신네들이 국민위에 군림
하려고 하니... 참으로 적반하장도 유분지 국민들에게 下心으로 봉사하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 망대봉 정상도 하루빨리 돌리주이소.
흉물스런 정상의 아픔을 안고 S자 형태의 임도를 따라 두들재를 향한다.
갑자기 콘크리트 임도를 걸으니 무릎에 무리가 오는듯 하다.
주위에 얼음나무에 열매들이 꽤 많이 달려있다. 몇개 따먹으니 참으로 달콤하다
임도에서 바라본 망대봉 정상
나뭇잎이 하나 둘씩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하고....
망대봉에서 임도를 따라 두드림재 가는 길에서 만난 얼음나무
얼음 열매
얼음열매는 바나나 맛 비슷하게 난다. 씨를 씹어서 삼켰더니만 씁쓰럼하다.
열매만 먹는 줄 알았는데 줄기를 짤라서 다려 마시면 귀울림병(耳鳴)
에 특효란다. 오늘 또 한가지 배우고 간다.
두들재(10:10)
순창 쌍치면 방산마을과 정읍 부전동 백석마을을 이어주는 고개
아래쪽 경사진 도로가 호남정맥에 살짝 벗어날 쯤에 두들재란 곳이 나타난다.
무얼 두드리는지는 알수없는 고개이다. 지금은 이곳도 교통이 좋아 이 재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수십년전까지는 순창군 쌍치면과 복흥면 사람들이
정읍 장날에 맞추어 농산물을 가지고 이 재를 넘었다고 한다.
임도를 내려오니 다리가 자꾸만 아프다. 두들재 내려오니 이 지역 사람인듯한
분들이 덕덕구이에 집에서 담근 하수오주를 가지고와서 마시고 있다. 오지랍 넓게
술한잔만 주이소 하니 얼른 커다란 종이컵에 한잔을 따라 준다. 기분좋게 마시니 옆에
있는 아줌씨가 덕덕구이를 입에 넣어준다. 근데 이 분왈 한잔 주면 정없다고 하면서
한잔을 더 준다. 2잔을 마시고나니 얼얼하다. 산 인심이 이렇게도 좋다.
벌목해논 산판 오름길은 2잔 마신 하수오주가 설설오르는지 힘이 조금든다.
헉헉되면 올라오는데 동료산꾼 젠틀맨님이 막걸리상 펴놓고 기다린다.
다시 2잔을 마시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여시목(여우고개)으로 향한다.
여시목(여우고개 10:50)
잠시 완만한 길이 이어지다가 가파른 내리막 후 좌측에 철망이 시작되는
안부에 내려서고, 철망을 따라 오른다.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내장산국립공원「출입금지」표지판이 있고
여기서부터「내장산국립공원」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입간판 뒤로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467봉을 완만하게 내려서 갈림길에서
좌측 내리막을 내려서면 대나무밭에 커다란 벚나무가 있는 넓은 안부의
여시목에 도착한다. 약간의 허기를 느껴 베낭에서 과일과 우유 하나로
원기를 보충하고 다시 베낭을 짊어진다.
여시목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순창 쌍치면 사기점 마을이고
우측은 내장동 복룡마을인 모양이다. 벌목된 나무 옆으로 커다란
편백나무 아래 마을에는 앰프소리와 개짖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호남길은 산이 마을을 내려다 온갖 인간군상들의 대.소사를
다 보고 있는듯. 산과 인간이 공존하며 사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인다.
오늘 산행하는 이 코스는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 병갑 폭정에 항거하여
동학농민운동의 근거지가 된 녹두장군 전 봉준의 민초를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고 실패한 개혁의 서글픔도 아련하고 해방전후에 국군에 쫓겨
지리산으로 가는 남부군의 루트이기도 했던 곳이다.
내장산 국립공원이란 간판이 보이기 시작한 부분부터 우측으로 엄청나게
넓은 면적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철조망이 쳐저있다. 그런데 그 철조망이
나무에다 애자를 박아 놓거나 못을 박아 있는 모습이 흉칙스럽기 그지없다.
이곳이 내장산 국립공원 지역이라 공원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면 이를 시행한
공무원을 당장 구속시켜야 할 것이고 사유지라 산주인이 그랬더라도 자연보호
위반죄로 즉시 체포 구속해야 할 것이다. 인간들은 손톱밑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아프다고 난리인데 나무에게 저 몹쓸짓을 한 자들... 에이 나쁜 놈들.
터널을 뚫는답시고 정맥길을 난도질을 하고 있다. 지역발전을 위한
인프라구축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곳은 차라리 자연을 그대로 두고
친환경을 무기로 지역 발전을 하는게 범여가 보기에는 더 나을 듯 싶다.
복룡재(11:20)
이따금 「국립공원」이란 표지석들이 보이며 오르내림을 따라가면
우측으로 어깨 높이의 철망이 계속 이어진다. 무슨 용도인지 알 수가 철망은
상당히 오랫동안 이어지고 안부에 내려서니
철망이 훼손되어 안쪽으로 들어가 철망을 좌측에 두고
오르다가 다시 내려서니 철망문이 있고 이를 지나면 안부에 복룡재이다.
복룡재를 지나면 좌측 아래로 도로가 보이고 건너편으로 「복흥터널」과
도로 공사장이 보인다. 재를 지나 다시 철조망을 따라 오르내리니 좌측으로
공사장에서 설치한 굵은 밧줄에「위험/접근금지」란 표지를 걸어두고
경고판도 세워져 있다. 어느 산이든지 공짜는 없는 모양이다.
복룡재에서 530봉 오름길은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된비알이다.
신발에 문제가 있는지 엄지 발가락에 물집이 생겨서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급경사의 가파른 오르막을 힘들게 오르면 비봉 갈림길인 530봉에 이른다
530봉 정상(11:50)
숨을 턱밑까지 차고 다리는 무거운데 저 앞에 보이는 추령봉은
범여의 숨을 막히게 한다. 동료 산꾼이 힘들어 보이는게 안쓰러워
보였는지 소주 한잔을 권한다. 너무 힘들어 사양하고 송곳바위로 향한다.
키보다 큰 산죽밭이 힘이든다. 다행히 정상을 통제하고 산허리를 끼고
우회하여 송곳바위 아래 삼거리에 도착한다.
추령봉(송곳바위봉:12:25)
우측으로 90도 꺾어 내려가면 철망도 마루금을 따라간다. 산죽밭이
끝나는 곳에 표시없는 삼각점이 있고 다시 안부에 내려서게 되는데,
국립공원표지석과 함께 삼각점을 자주 보게 된다. 안부를 지나 계속되는
급경사의 오르막에 오르면 추령봉(송곳바위봉) 밑에 도착을 하게 된다.
추령봉으로 오르는 등로에는「출입금지」플래카드가 있어 좌측 사면길로
우회하고 능선길에서 내려오는 능선길에도「출입금지」경고판이 설치되어 있다.
국립공원을 표시하는 도근점 표식은 엄청많은데 명색이 국립공원
관리 상태는 엉망이다. 지난해 백두대간 길에 속리산구간에 혹평을
했는데 거긴 여기에 비해선 양반이다.
추령봉 올름길에 입장불가라고 해놨다.
산이란 오르라고 있는데 오르지 못하게 해놨으니
그래 안간다. 치사해서라도...
추령고개 굽이길.
전봉준은 키가 작아서 녹두 장군이라 불렸지만 지혜가 뛰어나고
지도력이 강한 장군이었다. 조총을 막기위해 닭장에 짚을 넣어 총을
막았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복을 하여 관군을 기습하는 지략을 발휘한 것이다.
녹두 장군에 대한 노래도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이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에는 전봉준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는지도 알게 되었다
19세기 조선은 열강들의 침탈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백성들의
피폐는 매우 심각한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고부 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에게 온갖 죄명을 씌워
돈을 갈취하고 지나친 세금을 거두는 등 갖은 탐욕을 부렸다.
이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동학 접주 전봉준을 필두로
두 차례에 걸쳐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894년 2월 결국
봉기를 하였다. 이들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크게 무찌르며 정읍, 고창, 영광,
함평 등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마침내 전주에 입성하였다. 이에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자 조정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동학 농민군은 12개의 폐정 개혁을
약속한 정부 측과 강화를 맺고 해산하였다. 또한 집강소를 설치한 동학 농민군은
지역의 자치를 담당하고 내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청ㆍ일 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성하자 동학군은
1894년 10월 또다시 일어나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 때 전주에서 궐기한 동학군의 수가 10만 명이 넘었으며 광주 지역에서도
관군 및 일본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지역에서 그들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크게 패퇴를 하고
기세가 꺾였으며, 나머지 동학 농민군은 논산, 태인, 순창 등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 후 재기를 꾀하던 전봉준 및 여러 지도자들이 붙잡혀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당함으로써 결국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동학 농민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국립공원임을 알리는 내무부란 표지석도 보이고...
하산길에서 바라본 추령봉 정상(송곳바위)
개운치에서 추령까지의 마루금은 정읍시와 순창군의 경계능선을 걷는다.
정읍이라고 하면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 병갑에 항거하여 녹두장군 전 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곳이자 내장산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백제시대 행상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애닮은 여인의 아련한 가슴으로 노래한
한글로 표기된 백제시대의 유일한 정읍사(井邑詞)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井邑詞는 한글로 된 백제 유일의 가요이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악학궤범
(樂學軌範)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읍사는 고려 및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나례(儺禮) 뒤에 무고(舞鼓)와
더불어 연주하였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머리곰 비취오시라 멀리멀리 비춰 주소서.
져재 녀러신고요 정맥길에 가 계신가요?
즌데랄 드되욜세라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데다 노코시라 어느 곳에나 (배낭을) 놓으십시오.
내 가논데 졈그랄셰라 우리 가는 길 저물어 어두울까봐
이 노래는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의 한을 대변한 노래가 아닐까
내장산 연봉들이 안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광산김공오현선덕비」옆을 내려서면 49번 지방도인 추령에 이르게 되고
도로를 건너서면 바로 주차장이다
추령 [秋嶺 갈재:13:00]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과 순창군 북흥면의 경계를 이루는 내장산 동남쪽의 고갯길로, 길이 약 4km, 해발고도 336m이다.
추령에는 1920년 도로가 개설되었다. 지금은 정읍-순창간 49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며 내장산의 내장사와 백양산의
백양사를 잇는 관광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추령(秋嶺)’은 ‘가을재’ 또는 ‘갈재’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의 가을 단풍이
절경을 이루어 생긴 이름일 것으로 여겨진다.
추령에서 내장산까지는 가까운가 보다
국공단 직원들은 모든게 부정적이인가 보다.
뭣이든지 하지마라, 가지마라, 과태료부과한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면 인격 구성에도 문제가 될터인데 말이다. 긍정의 힘을 모르는지... 원
모든게 자기들에게 행정편의주의 발상 언제쯤이면 변할것인가.
국민들을 유치원생 정도로만 아는 저 오만함. 저 버르장머리는
누가 고칠것이며 국민을 섬기는 자세는 언제쯤 나올까.
하긴 오만과 아집으로 가득찬 머리에서 그걸 바라는 자체가 무리가 아닐런지...
추령 장승촌의 모습
추령 주차장에서 동료산꾼들과의 뒷풀이 忙中閑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 > 호남정맥 (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정맥 제4구간 - 운암삼거리(초당골)에서 구절재까지 (0) | 2010.12.05 |
---|---|
호남정맥 제3차 - 불재에서 운암삼거리까지 (0) | 2010.11.15 |
호남정맥 제6차 - 감상굴재에서 추령까지(역산행) (0) | 2010.11.08 |
호남정맥 제2차 - 슬치재에서 불재까지 (0) | 2010.10.03 |
호남정맥 제1구간 - 모래재에서 슬재까지 (0) | 2010.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