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호남정맥 (終)

호남정맥 제1구간 - 모래재에서 슬재까지

by 범여(梵如) 2010. 9. 19.

 

산행일시 : 2010년 09월 18일~19(무박산행)

산행코스 : 모래재휴게소-조약봉분기점-곰티재-곰재-만덕산분기점

              마치-416.2봉-황산재-슬치(휴게소)

산행거리 : 도상거리 21km(모래재-조약봉분기점-슬치)

실측거리 27.5 km(모래재휴게소-슬치)

산행시간 : 9시간 45분소요(접속구간 포함) 

 

낙남정맥이 끝나고 낙동정맥도 부산구간만 끝내는 10월이면 마무리 되기에 지난해 백두대간을

마무리 하고 겪었던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오려고 한다.

 

 2주전 일욜에 시작한 금북정맥 1구간은 서울 근교라 짬짬히 하면 될것같고 해서 아무래도

서울에서 거리가 멀고 개인적으로 하기에는 경비가 너무 많이 나기에 고민하던 차에 낙동정맥을 

같이하는 산꾼 동료가 호남정맥을 시작한다고 하기에 9정맥 중에서도 가장 거리가 길고

남도의 맛과 멋과 사람사는 냄새를 맡고 싶어서 호남정맥길은 이렇게 시작됐다.

 

1700리 남도길의 시작은 서울에서 자정에 출발하여 갑자기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눈을 뜬다.

서울서 출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지나 호남고속도로에서 다시 익산~포항간 고속도로

장수I.C 근처에서 차도로  뛰어던  고라니를 피하기 위해 버스가 급정거 했다고 한다.

 

톨게이트를 지나 모래재에 도착하니 안개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식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산행장비를 점검하고 산에 오르는데 분기점인 조약봉은 들리지 않고 일행들 모두가 만덕산을 향해 가버린다.

나중에 알아보니 지난구간 금남.호남정맥 들렸다고 그냥 갔단다.참으로 개념없는 산꾼들...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고 1루 베이스를 안밟고 홈으로 들어 오는격이다.

37명중 나를 포함 3명만 조약봉 분기점에 도착하여 인증 삿을 하고 다시 모래재 위에도착하니

45분 정도가 소요되고 그 사이에 일행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구분이 안된다.더군더나

 

이 산악회는 오늘 동참하여 연락처도 알 수도 없고 하여 무조건 어둠속을 헤치며 웅치(熊峙)를 향한다.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림을 계속한다.

능선에 약간 쌀쌀할 정도로바람까지 불어주어 산행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날씨이다.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것만 같이 하늘은 맑다. 

임도를 지나고 키작은 산죽터널을 통과하여 560봉에 도착하니 이젠 마루금의 윤곽이 서서히 들어난다.

 

물한금을 마시고 급한 내림길에 재촉한다.

저 아래 차량소리가 들린다. 여명은 밝아오고 웅치전적비에 도착한다.

기념사진 한장 찍고부지런히 만덕산을 향한 된비알을 시작한다.

오두재를 지나니 산꾼들의 소리가 들린다.

무려 3시간여만에 동료산꾼들을 따라 잡는다.

 

산에서 45분이란 시간이 참으로 긴 시간이다.

만덕산 삼거리에 도착하여 마루금에서 약간 비켜나있는 만덕산에 들렸다가 다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한다.

 

이 산악회는 단체로 식사를 하는가보다 좀 낯이설다.

아침식사를 마치고능선에 서니 저 넘어 마이산도 보이고 전주시내가 뚜렷하게 보일만큼 전망도 괜찮다.

바로 나타나는 병풍바위의 전망은 참으로 끝내준다. 내리쬐는 퇴약볕은 한여름만큼이나따갑다.

거기다가 모기는 왜이리 달라드는지 이곳에 산꾼들이 별로오지 않으니까모기도 사람이 그리운가보다.

 

길은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벌목지대를 지나고 임도가 나타나니 얼굴이 익을건만 같다.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만 진다.농장과 콩밭과 고추밭이 마루금을 점령하여 산꾼들은 길이 아닌 곳으로 내몰린다.

황산재를 지나 임도와 산길을 오가며 도착한 박뫼이산 아래에는 외 이리도 호화묘가 많은지...

박뫼이산 오름길도 개간된 밭으로 인해 정맥길은 아예없다.

 

겨우겨우 정상을 밟고모텔촌 뒷길을 따라 슬치 휴게소에 도착하니 얼굴이 햇볕에 익어 버렸는지 따가운지.

따가워서 견딜수가 없다.휴게소 샤워장에서 샤워하고 휴게소에서 생선 매운탕에소맥(소주+맥주)을

연거푸 5잔을 마시고 나니 좀 살것만 같다. 대부분의 휴게소 음식점들의 음식은 부실한데 이곳은 참으로 맛이 있다.

전주-남원간 17번 국도를 탈 일이 있으면 슬치 휴게소 음식점 한번 잡수봐요 

역시 전라도 음식은 알아주는 이유를 알겠다. 

 

 

호남정맥
호남정맥은 산경표상, 모래재 북쪽 0.6km지점의 완주 주화산(이후로는 주화산을
 조약봉으로 부름)에서

남북으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나뉘어 금남정맥은 북쪽으로 뻗고 호남정맥의 산줄기는 남쪽으로 뻗는다.
호남정맥은 전북지역을 지나는 동안 웅치, 만덕산(763.3m), 슬티, 경각산(660m),
오봉산, 내장산(763m),백암산,

추월산(731m), 강천산(583.7m), 산성산 등을 일구고 전남지역을 지나면서는 무등산(1187m), 제암산(807m),

사자산, 일림산, 주월산, 조계산(884m), 백운산(1218m) 등을 일군다.

호남정맥은 그 이름처럼 호남땅의 16개 시군을 지나는 산줄기로 동서로 물을 가르고 문화와
풍습을 가른다.

섬진강(398.7km)을 중심으로 한 왼쪽은 판소리와 농악 등에서 특이한 문화권을 형성하며, 평야가 많은

만경강(50.9km), 동진강(40.6km), 영산강(168.5km), 탐진강(26,1km) 등은 평야지대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문화와 언어가 영산강과 동진강을 가르는 영산기맥에서 크게 나뉘는데,
만경강과 동진강의 유역에서는

충청도와 비슷한 말씨를 사용하나, 영산강 문화권에 들어서면 말씨가 거세어지고 격한 발음과 홍어를

삭여서 먹는 음식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또, 남북으로 향하는 산줄기(조약봉-사자산)는 호남좌도의 서편제, 호남좌도농악과, 호남우도쪽으로는

동편제 및 호남우도농악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호남우도는 섬진강 유역의 산악지역이고, 호남좌도는

동진강, 만경강, 영산강 일대이다. 동서로 향하는 산줄기(사자산-백운산)는 낙남정맥과 함께 우리나라의

남부해안 문화권을 구획하는 경계선이 되기도 한다.

산세는, 무등산군과 백운산군은 대표되는 산 하나로 뚜렷하나,
경각-내장-추월산군은 고만고만한

산들이 저마다 뽐내는 영역이다. 

무등산과 존제산 구간은 군부대가 있는 지역으로 마루금으로 통과하기 힘들다.

영월부락 국도에서 과치재(130m)에 이르는 16km는 비산비야(非山非野) 지역이며, 마지막에

솟구쳐 호남정맥을 끝내는 백운산(1218m)이 가장 높다. 

백운산에서 남쪽줄기를 따라 섬진강을 휘감으면서 망덕산(望德山 197m)으로 섬진강하구에서

숨을 죽이는 산줄기는 호남기맥이 된다.


호남정맥을 금남호남정맥까지 포함할 경우,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광양 백운산까지

약 700km를 지나는 동안 시작과 끝, 그리고 복판에서 1000m 넘게 크게 솟아, 전체적으로 '山' 자를 

연상하게 하는데 시작인 장안산(1237m)이 가장 높고, 끝인 백운산(1218m), 중간인 무등산(1187m) 순이다.

 

그 외에 마이산(686m), 내장산(763m), 제암산(807m), 조계산(884m) 등도 두드러진 산군을 이룬다.

산군은 중심이 되는 산 양쪽의 낮은 재를 경계로 해서 구분할 수 있는데 호남정맥중에서 가장 높은 재는 

밀목재(750m), 가장 낮은재는 과치재(130m)로 치는데 이는 무령고개(930m)나 한재(850m)는 산군의

경계로 보기보다는 산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호남정맥길의 산줄기와 물줄기

 

 

 

모래재에서 슬재까지 구글어스와 고도표

모래재(03:30)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서 진안으로 들어가는 약 10km 정도의 산길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개에 선정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국도26호선을 따라가다 완주군 소양 화심에서 구 국도26호선

(모래재 구간) 모래재 터널을 거쳐 진안으로 이어지는 10km가량의 도로이다. 모래재는 기존 도로의

선형개량으로 지금은 한적한 옛길이 되었지만 빼어난 경치만은 그대로 간직한 채 남아있다.

 

산속을 깎아지르듯이 굽이굽이 놓여있는 도로를 지나다보면 먼 산속 풍경을 볼 수 있어

시원한 풍취를 느낄 수 있으며, 오랜지색의 ‘무진장’ 시골버스가 푸른 나무사이로 다니는 모습

 또한 정겨운 도로이다. 코스가 나타나며, 거대한 메타세콰이어 모래재 휴게소를 지나 조금 더

메타세콰이어가 1㎞정도 어우러진 최상의 드라이브 가로수가 에워싼 이 구간에서는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국적인 정취를 맛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가 없고 장비 점검이 끝나고 난 뒤 서둘러 분기점인 조약봉으로 향한다

조약봉(565m) 3정맥 분기점에서(04:00)

호남금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산경표에는 주화산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산꾼들에게는 조약봉, 조약치라고들 부른다.

부산 건건 산악회에서 분기점 표지판을 스텐으로 만들어 놨는데 지각없는 산꾼들이

낙서를 많이해 놔서 보기 흉하다. 부산 건건산악회는 정맥의 분기점마다 이렇게 표시판을

해놨다. 부산 사람들의 산 사랑 열정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일행 37명중에 지난구간 금남,호남 끝나면서 들렸다고 다들 그냥 가버린다.

참으로 개념없는 산꾼들이다. 이곳을 3번을 밟아야 3정맥을 완주하는데 말이다.

나 역시 오늘 처음온 산악회라 아무말 않고 혼자라도 가서 분기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하니 2명이 동조하여 같이 길을 떠난다. 홈런타자가 1루베이스를 안밟고 홈에 들어오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곳 산악회 대장은 아직 정맥길에 대한 개념이 없는 친구같다. 

조약봉 정상의 시그널들

이 지역은 남도지역에서도 가장 낙후되어 있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 지역이다.

그 옛날에는 참으로 접근하기 힘든 곳인데 이젠 이곳도 교통이 많이 좋아졌다.

정맥 산꾼들에겐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다. 

업진흥공사의 삼각점(04:35)

10여분이 지나서 낮은 봉우리 아래로 내려서니 작은 안부가 나타난다.

된오름과 함께 이어지는 서너개의 작은 봉우리를 남으로 넘을 동안 오른쪽 깊은

계곡의 송정리 마을 불빛 가로등만이 동행한다. 산죽군락의 능선을 내려선 후 

적내재(죽천치) 고갯길을 넘어 서면서 신보광산 표지석을  확인한다

거리나 방향으로 봐서 신보 활석(滑石)광산으로 가는 길인데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이 광산은 활석을 채굴하여 전주에 있는 분쇄공장에서 가공 하였다 한다.

1948년도에 개발하여 80년대 초반에 폐광을 한 상태이지만 활석은 그 용도가 화장품,

보온용 내화재(耐火材)물론 전기 절연제, 도자기, 도료 등에도 널리 쓰였다 한다.

이어지는 오르막 등산로는 제법 숨을 몰아 쉬게 한다.

 

어둠 속에서도 우측 산 아래 송정리의 가로등 같은 불빛이 계속 따라온다.

능선 정상을 한 발짝 내려서니 어마 어마한 묘 1기가 자리하고 있다.

가히 왕릉 같은 크기다. 비석에는 通仕郞 密陽 孫氏라 쓰여있다.

통사랑은 고려시대 문관의 품계로서 9품관에 속하는 높은 벼슬을 지낸 분으로서

어둠 속에서 보아도 전망이 아주 좋아 보이고 그 옆으로 능선 아래 안부까지 임도가

잘 조성되어있다.

560봉(05:10)

선두들은 3정맥 분기점을 가지않고 그냥가고 원칙대로 3정맥 분기점을 찍고 모래재 터널 위로

다시오니 정확히 45분이 소요된다. 산길 45분이면 얼마만한 차이인가 감히 상상해보시길...

아무리 빨리가도 선두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 능선에는 고마운 바람이 불어주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가 산행하기는 딱 좋다. 단 한가지 정맥길이 다 그렇듯이 이름난 명산이 아니다보니

산길이 관리가 안되어 있어 치고 나가기는 힘이든다. 억새를 비롯한 잡풀들이 상당히 방해가 된다.

어둠속에 아무감도 없이 무조건 걸었다. 560봉에 도착하여 물한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이젠 어렴풋이 마루금의 윤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저 아래 마을의 닭울음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작은 봉우리들을 산죽 길과 좌측 경사길을 번갈으며 서너번 다시 넘고서야 쓸쓸한 묘가 지키고

있는 정상을 지나며, 남으로 마주 보이며 동서를 가로지르는 능선 마루금이 마지막 힘겨움을 요구

하며 다가온다.  마주하는 514봉 좌측을 돌아 넘어 서면서 뒤따르던 불빛은 신촌마을 두목리로 바뀐다.

 

좌측으로 편하게 방향을 바꾼 능선은 작은 암릉을 오르는 된오름을 거쳐 563봉에서 90도 오른쪽

사면으로 꺽어 내린다. 이 쯤에서 좀 쉬어가고 싶은데 선두는 아직까지 따라잡지 못한다.

옛 곰티재(05:40)

여명이 밝아오는 만덕산의 모습(05:50)

웅치전적지(전라북도기념물 제25호,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천리)

 

이곳은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들이 왜적에 맞서 전투를 벌인 현장이다.

왜군은 해로를 통해 곡장지대인 전라도를 장악하여 했으나 이순신 활약으로 해로가 막히자

육로로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왜적은 무주, 금산, 진안 등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선조25년 7월 8, 9일에 웅치로 쳐들어 왔다.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왜적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곰티재(熊峙 안내판)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朝鮮)의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이

전라도(全羅道)로 진출하려던 왜군은 맞아장렬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던 격전지이다.

 

 그 해 7월 충남(忠南) 금산(錦山)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倭將) 안고구치(安國寺)

게이강(惠瓊)이 이끄는 왜군이 2진으로 나뉘어 전주를 공략하려 하자 권율(權慄) 장군은

이티(梨峙)에서 적의 1진을 맞아 격파하고 김제군수(金提郡守) 정담(鄭湛),

해남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 나주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南)이

이끄는 의병은 웅치에서 적의 2진을 맞아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일단 적을

격파하였다. 다음날 새벽 왜병은 전열을 가다듬어 재차 공격하여 왔다. 3일간에

 걸쳐 전개된 이 전투는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에 손꼽히는 대격전이었고

특히 조선군의 주장(主將)인 정담은 포위당한 백병전으로 적을 무찌르다

순국(殉國)하였다. 그리하여 웅치 수비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비록 무너졌지만

 왜군도 많은 희생자를 내고 큰 타격을 받아 전주성(全州城)을 직접 못하고 물러갔다.

 

웅치 싸움이 끝난 후 왜군은 조선군(朝鮮軍)의 충성심(忠誠心)과 용맹에 깊이

용전(勇戰)하다 순사한 조선군의 유해를 모아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吊朝鮮國)

충간의담(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 조선의 충신(忠臣)과 의사(義士)

영혼(靈魂)을 조상하기도 하였다. 1979년에 전라북도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웅치전적비를 세웠다." (펌)

곰티재,곰재,웅치(06:00)

전주∼무진장 간 버스가 처음 넘어다닌 고개 곰티, 한자로 웅치(熊峙)라 표기되는 곰치는

진안의 부귀면과 완주 소양면의 경계로 만덕산(762m)에 이웃한 고개이다.

전주와 진안을 잇는 고개 하면 보룡고개, 모래재, 곰치, 조두치, 마치, 북치 등 수두룩하지만

곰치는 대동여지도에 ‘웅치(熊峙)’라 당당히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고개이다.

그만큼 곰치는 전주와 진안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길. 곰치로는 일제시대부터 목탄차 등이

넘던 찻길이 열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주에서 무진장을 오가는 버스길이 처음 열린 곳도 이 곰치이다.

바로 26번 국도가 그것. 그러나 곰치는 1975년경 무진장 백성들의 나들이길로서 생명을 마감한다.

 

곰치는 양반이, 조두치는 서민이 주로 다닌 길로서 실제로는 오두재가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새로 개통된 모래재로 국도가 옮겨가면서인데 그후 20년 뒤 전주 나들이길은 오룡고개 길이 새로

개통되면서 또한번 이동해가니 곰치는 영영 더 이상 갈 일 없는 옛길로 남게 되었다.

돌무덤

지도상으로 여인네 자궁혈같은 남쪽의 관촌마을을 지나는 슬재를 통해서 전주성으로 침공하기엔

너무나 위험부담이 컸던 탓일까..진주성을 지난 왜병들은 육십령을 넘어 전주성으로 향하는

 허리재인 이곳 곰티재를  택하여 그 힘든 전투를 벌인 모양이다. 결국 그들의 힘을 지치게 할 만큼

사력을 다한 이 곳 능선곳곳에 산재된 채 돌무덤으로 합장된 병사들의 원혼들만 이 밤에도 조국의

안녕을 빌고 있을 뿐이다.

피어나는 새벽의 안개 속에서 잊혀져 가는 역사의 교훈들이 다시 살아 오른다.

만덕산 오르름길에서 만난 일출(06:10)

아침 햇살이 비치는 오두재(06:20)

시야가 환하게 밝아 지는가 하더니 키 만큼 자란 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쑥뿐만 아니라 온갖 잡초의 群象들이 길이 없을정도로 자라있다. 

인삼 밭을 하였는지 검은 비닐이 길 위에 흩어져 있고 안부는 매우 넓다.

형상이 새 머리를 닮았다고 조두치(鳥頭峙) 어떤 기록에는 까마귀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오두치(烏頭峙)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제사 선두그룹을 따라 잡는다. 거의 3시간만이다 산행길 45분차이가

얼마나 먼지 상상도 못한다. 더군더나 전문 산꾼들끼리는...

원불교 훈련원 가는길

우측으로 내려가다 다시 두 봉을 넘어서면 안부삼거리 이정표(정상1.7km,

원불교훈련원0.7km,헬기장1.6km)가 있다.「원불교 만덕산훈련원」은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에 소재하며 원불교를 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80여년전 12명의 제자에게

처음으로 선(禪)훈련을 했던 初禪 터 아래 세워진 도량이다.

이곳은 원불교 初禪聖地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이런 구호가 많이 보인다.

범여의 가슴에 와닿는 것이 참으로 많다

익산-포항간 고속도로도 보이고

만덕산 삼거리(07:30)

萬德山..그 이름 만큼이나 넉넉한 지세를 보이며 진안 고원의 끝 자락에 서서 全州 完州

고을의 완벽함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일까..만덕사 절터는 사라졌지만 그 부처산의 영예로움을

간직한 채, 임진년의 아픔과 해방 이후 빨치산의 뼈아픈 소용돌이를 견뎌 낸 곰치재를 지켜보며

오늘도 묵묵하구나..멀리 발 아래 서쪽 계곡 정수사 마을에서 아침 안개가 사라지면서

무넘이마을(水越里) 아래 상관 저수지가 반짝인다.   

만덕산(萬德山:763.3m 07:40)

정상에는 달랑 이정표 하나만 있다.

만덕산은 전북 완주군 소양면과 상관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이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역사적 전적지요, 6.25동란때 공비의 출몰이

심했던 곳으로 곰티재를 지키고 있는 수문장과 같은 산이다. 만덕산의 유래는

한자로 일만만(萬), 큰덕(德)을 써서, 만인에게 덕을 베푸는 산이란 뜻이다.

 

 지역주민들에 의하면, 임진왜란과 6.25를 비롯한 수만은 전란을 겪으면서도

지역주민들이 전화를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만덕산이 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또한 고구려 때 보덕화상이 이 산자락에다 만덕사를 개창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부처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만 가지에 달하는 德을

가진 이는 부처뿐이라는 것이며, 또는 삼신사상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울 어머니 가슴만큼이나 따뜻해보이는 남도의 마루금들

오늘 내가 가야할 호남정맥 마루금

바위 능선길을 오르내리다가 우뚝 솟은 병풍바위를 만난다.   

오늘은 오랫만에 일욜에 맑은 날씨덕에 이 길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우측의 정수사 방향으로 아득히 보이는 절벽과 좌측의 상달길 부근에 있는

원불교 훈련원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좌측은 한적한 시골 동내 모습이고 우측은 깊은 산골의 정취가 베어난다

병풍바위에서 바라본 원불교 훈련원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에 소재하며 원불교를 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80여년전

12명의 제자에게 처음으로 선(禪) 훈련을 했던 初禪 터 아래 세워진 도량이다.

전북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퍼지기 시작한 원불교는 소의경전을 금강경으로 하고

도량에 佛象 대신에 일원상(一圓相)을 상징하는 커다란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다.

 

이 땅에 들어온 지 100년 조금넘은 기독교가 교육, 의료, 매스컴으로 교세를 폭발적으로

확장했듯이 원불교도 다른 토속종교와는 달리 교육(원광대학교 등,) 의료(원광대학병원 등)와

그리고 매스컴(원음방송)으로 해서 교세를 상당히 확장하였다. 이곳 만덕산 오름길에도

그 원불교 흔적들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여러 토속종교들의 시샘을 뒤로하고 비교적 순탄하게 뿌리내린 원불교의 정신이 부디 이 땅의

중생들에게도 혹세무민치 말고, 一圓相의 진리를 일깨우고 불교의 현대화를 일깨우는

法身佛로 깨어나기를..處處佛像,事事佛供으로 四恩에 보답하고 四要를 실천한다면

 어느 누가 종교를 일컬어 인간이 만든 가장 완벽한 허구라 말하리요..

 

아귀싸움 같은 헐뜯음에서 벗어나 그 진정한 참됨을 추구하며 병든 인류의 근본을 치유하는

종교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서기를.. 헌금과 시주를 앞세우는 잿밥에서 벗어나기를.. 

낮은 언덕에 제5쉼터표시라는 표시와 함께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있다.

우리가 제2쉼터를 지났는데, 그 사이 불쑥 제5쉼터가 나타났다.

이렇게 붙여진 번호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마루금 능선에서 바라본  마치저수지(전북 진안군 마령면 소재)

마치(痲峙)고개

마치(痲峙)고개, 말티고개라는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말/마 는 모두 산,산정이라는

의미의 마루, 마리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산에 있는 고개, 산정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진행방향의 등산로는 싸리나무,딸기나무,칡 넝쿨이 뒤썩여 불편하기 짝이 없다.

동료 산꾼이 막걸리 한잔 하자고 채근된다. 나무그늘아래 너럭바위에서 곡차한잔으로

더위를 식힌다. 날씨가 한 여름날씨만큼이나 덥다.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린다.

산꾼 한명이 얼마나 지치는지 이정표에 기대어 맛있는 잠을 즐긴다 

이름모를 버섯들이 참으로 많이보인다. 심마니친구한테 함 물어봐야겠다

566봉 이정표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지 않아 떨어져 있다.

설치만 해놓고 나몰라라 하는 행정, 이게 우리 지자체의 한계인가?

슬치재(10:40)

부산 낙동 산악회가 나무에 걸어놓은 슬치재 표시기가 있고 지도상의 좌표로 표시한

슬치(봉우리)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한다.아무래도 그 이름은 잘못된 것 같지만

산행지도의 표기 지점이라 서로 참고 할만한 사항으로 남겨두어야겠다

참으로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나무 - 뭐가 저리도 좋을까

416,2봉 삼각점(11:10)

슬치재 지나 만나는 길은 벌목 지대인듯 나무는 없고 임도가 이 능선 저 골짜기로

무질서 하게 만들어져 있다. 임도가 끝나는 평지에는 포장도로가 잘 나 있고 산

중턱으로도 길이 보인다. 지도로 봐서 임실군 관촌면 회봉리이고 이 회봉리도

위치에 따라 상회, 중회, 하회로 나눠져 있다. 산촌은 거주민이 작아서 각각 하나의

이름을 갖기에는 부족하듯, 대부분 상.중.하를 붙여서 이름 짓는 경우가 많다.

산위에서 내려다 보니 소꼽장난이라도 하듯이 한 손안에 들어온다.

완만한 능선을 이고 있는 전라도 산촌의 풍경이 정겹게 보인다.

산골서 자란 내 눈에는 이것 마져도 정겹기 짝이 없는 익숙한 모습이다. 

정맥길을 끊어놓은 폐농장(11:55)

 정맥길을 막고 농장까지 만들어 놓고는 제대로 관리가 안돼있다.

넓은 임도 주변으로 개간 작업을 하다가 말았는지 폐자재가 지저분하게

널려있고 인적도 없는 컨테이너 박스 주변에는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능선위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개간지에서 설치한 펜스 옆으로 손바닥 만하게

 난 좁은 길을 따라 힘들게 이어 나간다.좁은 등산로와 잡목으로 뒤 썩인 길을 지나

작은 안부에서 심은지 몇 년 안되는 밤나무 단지를 마주 한다.

폐농장을 벗어나 산길에 접어드니 잡초와 가시덩쿨로 인해 길이없다

계속해서 힘든 산행을 이어간다. 얼마후에 콘크리트로 포장된 임도를 만난다.

제대로 관리가 되지않은 묘지와...

호화 묘소 참 죽어서도 저런 차별을 받아야만 한단 말인가.

후손을 잘못둔 차이인가... 생전에 덕을 덜 쌓은 때문인가

 이곳도 낙남정맥길처럼 마을이 산까지 올라와 있다.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오늘은 호남의 산과 들,묘지 문화를 눈으로 공부하고 여유있는 걸음으로 길을 걷는다.

어느 학자가 이야기 하였다.

산행은 독서와 같아서 구석 구석을 음미하고 그 숨은 묘미를 터득하여야 좋은 산행이다

좋은 산이란 이름난 산이 아니다.내 마음속에 좋은 산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좋은 산이다

생꽃이 참으로 이쁘게 피어있다. 주로 물가에만 피는 꽃이 오늘 정맥길에 자주 보인다.

황산재 오름길(12:20)

밤나무 단지를 만들어 놓은 황산재는 정맥길이라기 보다는 정글에 가깝다.

미로처럼 엉켜있는 길을 찾느라 얼쿨이 망개넝쿨에 다 할키고 손에는 가시가 박힌다.

겨우 겨우 시그널에 의지해 빠져 나오니 고추밭과 팥과 콩밭이 보인다.

 

   이산 저 능선에 잠들어 있는 크고 작은 무덤들은 저마다 흘러간 세월의 이불을 덮고 있다.

    비석이나 상석(床石)이 놓여진 무덤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어느 산자락을 오를 때 나를 크게 웃게 하는  산꾼 두 사람의 대화.

    " 무덤의 비석에는 왜 모두 《學生》이라고 썼노...? "

    서슴없이 말을 받는 산꾼의 우스개 대답.

    " 공동묘지에 "入學"했다고 그랬겠지..." ......

 

    관혼상제(冠婚喪祭)의식 중에서 상례와 제례때 자주 접하게 되는 《學生》이라는 말 -

    그 말의 뜻을 알아본다. 《學生》이라는 말은 《유학생(幼學生)이란 말의 줄임말이다.

    그 말은『幼學이었던 사람』이란 말로 보면 무방할 것이다.

    유학이란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儒生)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출사(出仕)하여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지식의 깊이나 세상을 보는 경륜만은,

     재주가 아까운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하직한 사내들에게 남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아깝게 여겨 붙여준 추서(追敍)이다. 아름다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男子들에게 붙여준 추서가 학생이었다면 여자들의 경우에는 《유인(孺人)》이라 한다.

     글자의 뜻풀이로만 보아서는 "젖을 먹여 키워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

   천만의 말씀이다.

 

 "孺人 !" 그것은 조선시대의 외명부(外命婦)의 벼슬 이름이다.

九品의 벼슬을 한 문무관(文武官)의 아내들을 유인이라 한다.     

한 平生을 고난과 애환으로 꾸려나간 女人네들의 삶의 궤적에 대한 보답이다경우를 두고 보면 .

봉건사회가 꼭 남존여비(南尊女卑)행태로만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것을 엿볼 수 있다.

                                  --유병부 님의 글에서 -

2012년 여수 엑스포 기간을 맞추기 위해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전주~여수간 고속도로

박뫼이산 가는 길은 꼭 내고향길 처럼 정겹기만 하다

정맥길은 산만 가는게 아니다. 마을을 지나고 밭을 지나고 임도를 지나도 정맥

분수령은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박이뫼산(316m:13:00)

황산재를 지나고 밤나무 단지의 오르막과 숲을 지나 가족묘지가 있는 포장도로 능선길에 올라선다.

이곳이 명당자리인가 316m 높이의 산주위에는 온통 호화묘지 개간된 밭밖에 없다

그래서 산이름도 박이뫼산(박씨,이씨 묘터)라고 하는구나 아예 정맥길 자체도 녹두밭과

콩밭이 차지하고 있고 산 정상에도 농업용수를 저장하는 물탱크가 차지하고 있다.  

이 후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번갈으며 온통 묘지로 뒤바뀌어 가는 山亭마을을 지나면서

아픈 발걸음을 걷고 걷는다. 시멘트로 잘 포장된 능선 농로를 따라 농약과 상여가 쉽게 올라와

얼마나 많은 소출과 영혼들의 편한 잠자리를 일구어 낼까마는

꼭 이렇게 무분별한 개간을 허락해야 되는 것일까..

전기 철책선이 설치되어 있는 옥수수밭

원래 인심 좋기로 소문난 이곳 남도지방에 이렇게 야박하게 옥수수밭이

전기 철책선으로 처져있다. 오죽하면 옥수수밭 쥔장이 설치했겠냐마는

해도 너무햇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같은 퇴약볕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찾아오는가 보다.

고추 잠자리가 너무나도 많고 쑥부쟁이와 구절초도 남도길을 시작하는 산꾼을 반긴다.

 

슬치 휴게소 모텔단지(12:55)

남쪽 진행방향으로 자리잡은 박이뫼산(박씨이씨묘터)을 좌로하고 오른쪽 언덕을 넘어서니

묘지를 지나 슬치 언덕아래 모텔 뒷문으로 내려선다. 瑟峙를 넘나들던 道人의 비파소리는 들리지 않고

17번 6차선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에 실린 허망한 바람소리와 모텔 장막에 가려진 너머에서

이해 못할 영혼들의 신음소리만 난무한다. 

이렇게 호남정맥의 첫 구간을 마무리하며 다음에 넘어갈 갈미봉을 쳐다본다.

슬치(瑟峙 13:20)

차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전형적인 농촌 집들이 하나 둘씩 보인다.

전북 완주군 상관면과 임실군 관촌면을 지르는 전주-남원간 17번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17번 국도는 경기도 양지에서 시작하여 충청도 진천,청주,대전을 지나고

전라도 전주,임실,남원을 거쳐 순천,여수 돌산도 까지 가는 중요한 길이다.

이 길에 위치한 슬치에 도착한다.

우리가 서 있는 이 길로 춘향이를 그리워하는 이도령도 지나 갔을 것이다

 

안슬치, 밧슬치(바깥슬치), 슬치는 350여 년 전 평산 신씨가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저

옛날 도인이 비파를 뜯으며 고개를 넘어왔다 하여 비파瑟 고개峙 슬치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지금은 신씨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