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09,13
○ 산행날씨 :햇빛은 있으나 흐린 날씨. 한여름 못지않은 더운날씨
○ 참석인원 : 나홀로산행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18.1km + 어프로치 약3㎞ / G.P.S 약 26 km. 9시간 소요
○ 산행코스 : 바깥 창모루-295봉-큰고개-400봉-585봉-검단산-554봉-524봉-용마산-밤골 안부사거리-415봉-은고개
300.4봉-남한산(벌봉)-동장대(암문)-남한산성 북문(전승문)-서문-수어장대(청량산)-영춘정-남눔(지화문) 백련사-지하철 8호선(산성역)
○ 소 재 지 :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배알미동, 상산곡동, 상사창동 / 광주시 중부면, / 서울 송파구/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어제가 추석이라 사찰에서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나서 전날 초등하교 불알친구들과 관악산
등산가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신 술때문인지 몸의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이런저런 인사받기 싫어 핸드폰 끄버리고 세상모르게 자고 일어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마눌과 딸래미는 동서집에 가버린것 같고,
아들은 친구를 만나러 간 모양이다. 일어나 간식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원래는 금북 한구간을
하려고 천안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연휴 차표문제로 포기하고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맥하나 시작하려고 코스를 잡은 곳이 한남.검단지맥이다. 아침에 일어나도 아들만 자고있고
마눌과 딸래미는 오질않았다. 서로 간섭하고 간섭당하기 싫어 오히려 이것이 더 편한것 같다.
베낭을 챙기고 냉장고 문을 열어 불고기 조금에다 양파, 파, 고추를 썰어넣고 점심도시락에
바나나 우유 한개에 사과 2개에다 김치 조금을 챙기고 집을 나선다.
오늘을 이상하게 차 시간이 딱딱 들어맞아 기다리는 시간없이 검단산 입구에 도착하니
딱 1시간 20분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입구에서 김밥 한줄사서 아침 대신해서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지맥 시발점인 팔당대교쪽을 향한다. 저 건너 누님댁이 보인다.
올해 일흔일곱인 혼자사는 누님에겐 참으로 미안하다. 해마다 들리다가 올핸 이상하게
아무곳도 가고싶지 않고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러면서 코앞에 산에 오면서 들리지 않았으니...
다음주엔 한번 들려야지... 엄마같은 누님인데 살면 울매나 살겠노.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무거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올림픽대교에서 본 서울 한강변
아침 6시에 집에서 나와 강변역 앞에서 검단산가는 112번 버스를 타고 올림픽 대교를 건넌다.
서울의 도시는 별 특징없이 성냥갑처럼 콘크리트 숲에 둘러싸여 숨이 막힐것만 같다.
이젠 나이탓인가 자꾸만 서울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서울근교에 조그만 한옥하나 짓고
텃밭 가꾸고 글이나 쓰고싶은 생각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지 현실에선
그건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이런 꿈을 꾸는 사이에 나를 포함해 등산객 2명만 실은
버스는 길동을 지나 상일동 거쳐 검단산 앞에 내려주고는 쏜살같이 휭 가버린다
정녕 가을인가보다.
에니메이션 고교를 지나다. 김밥 한줄사서 아침을 대신하고 거기다가 모닝커피까지 마시고
막걸리 2통을 사서 베낭을 넣고 시발점인 외창모루 마을이 있는 팔당대교쪽으로 향한다
어느 한 시인이 “하늘이 열리던 날 백두를 맏형으로, 태백의 막내로 광주산맥 한 자락에
호젓하게 태어났다”고 칭송한 검단산이 뭇 산객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내려다만 보아도 시적 감흥이 절로 이는 두물머리 한강변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광 덕분일 것이다.
백두산과 태백산에서 검단산의 족보를 찾은 시인이라면 한반도의 등뼈가 다름 아닌 산경표에
나오는 백두대간임을 익히 알고 있음직 한데, 그의 시에 뚱딴지같이 “광주산맥”이 불쑥 튀어나와
당혹스러웠다. 백두대간의 족보는 지상의 산줄기를 체계화한 조선시대 영조 때의 여암 신경준선생이
펴낸 ‘산경표“이고, 광주산맥은 1903년 일본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제안한 지하의
지질구조선을 잇는 산맥체계에 따른 것이기에 이 둘은 전혀 다르다. 광주산맥은 태백산맥의
철령에서 분기하여 서쪽으로 내뻗다가 한강을 몇 번이고 넘나들며 지하로 산맥을 이어가는
데 반해, 대간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남검단지맥은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이기에
산줄기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한 번도 강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의 장군봉에 이르게 된다.
산줄기 족보에 익숙지 못한 시인에 검단산을 칭송한 시를 “하늘이 열리던 날 백두를 맏형으로
속리를 막내로 검단지맥 산줄기에 호젓하게 태어났다.”고 고쳐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고 보면
산줄기와 산맥의 혼용에 따른
어지러움은 피하기 쉽지 않을 것다.
백두대간 속리산 천황봉에서 나뉜 한남정맥이 석성산과 할미성을 지나며 북진하다가
신갈 나들목을 향해 서쪽으로 꺾이는 향린동산 위에서 북쪽으로 검단지맥을 내보낸다.
이 지맥은 팔당호에서 한강 본류와 북한강이 만나는 경안천(길이 49.3km, 유역면적 575.32㎢)의 서쪽 벽을
이루며 법화산(383.2m), 불곡산(335m), 영장산(414.2m), 검단산(538.1m)과 남한산성을 따라 청량산(482.6m)을
지나고, 두리봉(570m)에서 북한강 서쪽 울타리가 되어 내려온 천마지맥 끝 마현을 마주보는 산줄기를 내보낸
다음 검단산(657m)을 거쳐 팔당댐에 이른다.
한남 검단지맥이란 칠장산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한 한남정맥이 내려오다가 석성산과 할미성을 거쳐 향린동산에서
두가락의 산줄기가 분기되는데 한남정맥은 남서진하여 아차지고개로 내려가고, 또 한줄기는 북서진하여
법화산(385m), 불곡산(313m), 영장산(414m), 검단산(535m), 청량산(480), 남한산(벌봉, 521m), 용마산(596m),
검단산(657m)을 거쳐 하남시 바깥창모루마을 한강변에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를 말한다.
(한남. 검단지맥의 개요)
창모루 마을(한남. 검단지맥 시발점 : 08:00)
올림픽 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직진을 하면 45분 국도가 연결되어 있는 붕어찜으로
유명한 광주시 남종면이 나오고 팔당댐을 관리하는 수자원공사가 있는 아래배알미
마을이 나오는 인터체인지를 돌면 팔당대교가 넘어가는 곳이며 식당가가 있는 마을이다.
미식가들에게 ‘해물 칼국수와 칼제비’ 로 꽤나 유명한 이 지역 마을 이름과 같은 ‘창모루’
식당 우측을 끼고 초반에 상당한 급경사로 마루금에 발을 내딛는다.
‘창모루’란 이곳 동이 창우동인데 예전에 이곳에 군량미 창고가 있은 탓에 부르게 된 모양이다.
초반부터 절개지로 급경사를 좌측에 팔당대교와 한강을 끼고 입에 단내가 날만큼
빡세게 치고 오른다. 이곳은 지맥 산꾼이외는 전혀 다니지 않는 코스로 초입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돼지풀을 비롯한 외래종 식물이 능선을 장악하여
있는 탓에 토종식물이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 10분정도 급한 오름을 오르니 송접탑이
나타나고 이후부터는 길이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한강 건너에 예빈산(예봉산)이
보이고 중앙선 철길에는 열차가 기적소릴 울리며 힘차게 지나간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길은 정말 편하게 되어있다. 조금 지나가니 우측으로 창우동 식당가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고 조금 힘들게 오르니 에니메이션 고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치는
295봉 정상이 나타난다. 이곳 쪽으로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호젓한 길이다.
언밸런스 소나무
이 나무는 꼭 우리 부부를 닮았나 보다. 30여년을 같이 살았으면 닮아갈 법도 한데
아직도 우리부부는 각각등보체이니... 하긴 서로 불간섭으로 살아가는 것도 편하긴 하지만
큰고개(08:30)
검단산정상 1.97km 이정표가 있다.가파른 나무게단을오르면 예봉산과 적갑산이
건너다보이고 바로 아래 팔당대교와 팔당댐 미사리조정경기장과 하남시
창우동 일대가 잘조망된다. 바로아래 배알미동과 팔당댐지나 도마동근처에서
팔당호속의 도미진의 흔적도 눈으로 가름할수있다. 이곳부터는 실제 검단산의
주 등로이다. 에니메이션고교에 거의 이곳으로 올라온다. 4년만에 온 이곳은
날설기만 하다. 바로 우측 아래 유길준 묘소가 있다.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조선의 문신이자 구한 말의 정치가·개화 사상가로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천민(天民)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었으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예전엔 이곳부터 전망바위까지는 상당히 급경사에 암릉으로 구성되어 상당히
힘이 들었는데 4년만에 와보니 전부 계단으로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는 편안하나
자연미는 전혀없다. 마치 한라산 정상까지 데크목을 깔아서 산을 버린것 처럼...
팔당대교와 미사리조정경기장
팔당(八堂)의 유래는
두미협곡(검단산과 예봉산 사이의 한강)이 물살이 휘돌고
유속이 빨라 배가 전복하는 사고가 많았다 한다.
이 때문에 안전한 통행을 기원하고자 강변에 당집을 세웠는데,
그 당집의 수가 무려 8집이나 되어서 팔당(八堂)이라 이름지어졌다 한다.
또다른 설은 풍수지리적으로 8개의 명당이 있다는 설에서 유래하기도 한다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예봉산 (683m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있는 산으로 예빈산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의 정부관서중 손님을 맡아보던 관아의 예빈시에
나무벌채권이 있었기 때문에 예빈산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예봉산은 적갑산과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산이며
능선길로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예봉산(禮峯山)의 유래는 산 밑에 미인촌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에서는 절세미인이 나는데 이상하게도
15~16세만 되면 죽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미인과 짝을 맺을 준걸한 남자가 없어 하늘이 이들 여인들을
데려갔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승람, 대동산수경>
458봉(08:50)
예봉산 아래에 있는 미인촌은 지금의 팔당마을을 뜻하고 수많은 배와 상인들이 팔당에서 쉬어 갔는데,
그 때문에 팔당 나루터에 술집과 예쁜 작부들이 모여 들어 미인촌이라 불렀고 그 뒤에 있는 산을
예빈산 또는 예봉산이라 했다 한다
전망바위 가는 길
569봉(전망바위:09:00)
안개낀 양수리(두물머리)
물과 물이 만나서 하나의 읨가된 두물머리 漢字로는 兩水里라 부르는 곳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
그러기에 평범한 보통의 한강 흐름과는 존재의 의미부터 다른 곳이다.
저 멀리 화야산과 유명산이 보이고 바로 앞 조안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는 데크목으로 전망대를 멋지게 만들어 놨는데
박무로 인해 다볼 수 없는게 아쉽기만 하다. 전망대옆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유독 눈에 쏙 들어온다.
하남시와 서울 강동구의 모습
그 넘 참 희안하게 생겼네. 변강쇠의 거시기도 울고가게 생겼네그려 ㅋㅋㅋ
중부고속도로 동서울 톨게이트 모습
중부고속도로 건설당시에 야당 국회의원과 일부단체들이 경제성이 없다고
엄청나게 반대를 하였는데 지금은 제2중부고속도로까지 생겼다.
1960년대 중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당시 극심한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 정희대통령이 밀어부쳐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당시 그분의 선견지명이
요즘 정치인들에겐 왜 없는것일까?
검단산(黔丹山:09:30)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에 걸쳐 있는 높이 657m의 산이다.
또한 산세가 특이한 것이 특징이며 가파른 경사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사방의 전경이
시원하게 열리고, 서서히 정상에 오르는 길이 매우 다채롭다.
또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이며 한남정맥의 지맥으로서 탄천이 중앙부를 북류하고
그 좌우에 지류가 발원하는 산지가 형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凹형을 띠고 있다.
백제 한성시대 하남 위례성의 숭산(崇山), 진산(鎭山)으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라 전해진다. 또한 백제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세종대왕의 능을 이곳에 쓰려다 여주로 옮겨가게 되어 닦아 놓은 능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의 묘가 있다.
검단산의 유래에 대해서 대략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제시대 검단선사(黔丹禪師)가 그 산에 은거하였어서 선사의 이름을
따서 검단산(黔丹山)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검단선사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북 고창의 유명한 사찰
선운사(禪雲寺)의 창건 설화 중 신라진흥왕이 세웠다는 것과 백제 위덕왕
(525년 ~ 598년) 24년인 577년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세웠다는 것이다.
만일 동일인이라면 검단선사가 검단산에 있었던 것은 6세기 중반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검(黔)'은 한자 뜻이 '검다'인데 고조선 때 단군왕검같이 제사와 정치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를 '왕검(王儉)' → '임검(壬儉)' → '임금'이라
불렀듯이 '검(黔)'은 '금'이 되어 즉, '크다, 신성하다'는 뜻이라 해석하고 단(丹)'은
현재의 한자 뜻인 '붉다'와는 다른 '제단'이란 뜻으로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해석했다. 한때는 검단산의 검(黔)을 '금'으로 읽어 '금단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실제로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에 왕이 검단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남정맥의 지맥 끄트머리에 솟아 한강을 사이에 두고 운길산, 예봉산과 이웃해
있는 검단산은 서울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산 높이는 관악산과
비슷하지만 동국여지승람에서 이 산을 '광주목의 진산'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산세가 특이하다. 처음에는 가파르게 고도를 높히다가 마루금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전경이 펼쳐진다
팔당댐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과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잇는 댐으로 1966년에 착공하여
1974년에 완공하였으며 전력생산과 서울과 수도권에 수도물을 공급하는 취수원 역할을
물론 한강의 홍수조절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중요한 댐이다.
적갑산,예봉산, 율리봉도 보이고...
검단산 정상에서 주위조망은 박무(薄霧)로 인하여 생각보다는 그리 좋지 못하다.
10분정도 머무르다 산곡초교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곳도 예전에 없었던 데크목
으로 설치를 해놨고 좌.우측에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잠시후에 좌측으로
가면 팔당댐을 관리하는 수자원 공사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에니메이션 고교로
가는 길이다. 검단산 등산객 80% 정도가 이용하는 길이다. 지맥꾼들은 직진하여
계속 걷는다. 이곳부터는 등산객들이 뜸한 편이다. 잠시 후 송전탑이 나온다.
송전탑을 지나고나니 그리 험하지는 않으나 몇개의 오르내림이 시작된다.
산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코스이고 체력소모가 가장 많이되는 곳이다.
흔히들 빨래판 구간이라 부르는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젊은 남녀가 길을 묻는다.
‘성남을 가려면 어떻게 가냐’고 한다. 여긴 성남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곳인데
하고 이야길 하니까. 자기들이 검단지맥을 타는데 선두가 먼저 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니 불곡산까지 간다고 한다. 불곡산이라... 여기서
30km정도 되는데 지금이 10시가 넘었는데... 그래서 설명을 해줬다 . 지도는 보았냐고.
그런데 지도도 없고 무작정 가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베낭을 보니 완전초보 산꾼이다.
혹시 사고라도 생길까봐 여유분 지도를 한장 줬더니 겁을 먹었는지 따라오질 않고
중간에 탈출을 해버린다... ㅉㅉㅉ. 산은 아무나 타는줄 알어... 준비도 없이.
고추봉과 용마산이 보이고...
고추봉(10:10)
지도상에는 555봉으로 표시되어 있는 봉우리에 왠 고추봉이람...
정상에는 일등 삼각점 (1975)이 설치되어 있다. 앞으로 계속 직진한다.
이 지역 산은 제선충이 극심한 모양이다. 곳곳에 벌겋게 말라죽은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큰고개(10:30)
오늘 산행구간에 큰재가 2개나 있다. 이곳은 하남시 상산곡동과 광주시 이석리를 연결하는
재이다. 용마산가기 전에 있다.
때죽나무 [Styrax japonica]
아마 내가 본 때죽나무중에 가장 큰것같다. 이곳은 크고 작은 때죽나무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검단지맥 선답자들은 이 나무가 너무 다정스럽게 보인다고 해서 사랑나무라 부른다
때죽나무과(―科 Styracaceae)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서
키가 10m까지 자라지만 줄기 밑동에서 많은 가지가 나와 무리 지어 자람으로써 4~5m 정도
되는 관목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지에는 별 모양의 털이 많이 나 있으나 자라면서 없어진다.
잎은 어긋나고 잎뒤와 맥에도 별 모양의 털이 많다. 잎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거나 없다.
꽃은 초롱처럼 생겼으며 흰색이고 5~6월에 잎겨드랑이에서 총상(總狀)꽃차례를 이루어 핀다.
꽃부리는 5갈래로 깊게 갈라지며 수술은 10개이고 수술대의 아래쪽에는 흰색 털이 있다.
열매는 9월에 녹백색의 삭과(蒴果)로 익는다. 그늘이나 반그늘진 곳에서 자라며 추위에도
잘 견디나, 한국에서는 중부 이남에서만 흔히 볼 수 있다. 목재는 기구재·가공재 등으로 쓰인다.
다람쥐의 옹달샘인가?
큰고개에서 용마산 오름길은 예전에 성곽인 듯한 곳이 여러곳에 보인다.
좌측에는 아직도 두물머리(양수리)가 보이고 퇴적물으로 만들어진 소내섬이
멋지게 보인다. 우측에 보이는 산이 앵자지맥 마지막 마루금인 정암산이다.
용마산(龍馬山:595.4m:10:50)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리와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 경계에 이쓴 산이다.
용마산은 검단산 남쪽에 솟아있는 산으로 검단산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능선은 광주읍을 돌아 백마봉, 태화산으로 연결된다. 육산인 용마산은
경안천을 향하여 깊이 파고든 팔당호수로 하여 호수 주변의 조망이 좋다.
용마산은 전체적으로 보아 육산이며 숲이 울창한 편이다. 높이는 600m에
조금 못미치지만 주위에 높은 산이라고는 검단산밖에 없어 상당히 높아보인다.
산으로 가는 길은 광주군 광주읍에서 팔당호로 빠지는 45번도로를 따라 퇴촌면
갈림길에서 팔당쪽으로 조금가면 나오는 남종면 과학동에서 오르는 길과
하남시에서 광주읍으로 가는 43번도로변이자 하남시 남쪽인 산곡초등학교에서
검단산에 올랐다가 정상에서 고추봉을 거쳐 용마산으로 오는 길이 있다.
검단산에 올라 용마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바라보면 꽤 꾸불꾸불 하며
멀리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마리 가는길
오늘 산행후 처음으로 휴식을 취한다.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하는 날씨에 옷이
다젖어 땀이 줄줄 흘러내려 능선안으로 들어가 웃통을 벗어서 나무에 걸어놓고
커피 한잔과 사과 하나로 원기를 보충한 다음에 20분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길을 나선다. 급경사로 떨어지는 내리막길에 띄엄띠엄 올라오는 등산객을 만난다.
고도를 상당히 낮추면서 편안한 안부 사거리를 걷는다.
사람들이 별로없어 조용히 걷는다. 415봉을 지나서 남한산성 방향으로
하여 굴다리 낚시터 쪽으로 향한다.
굴다리 낚시터(11:30)
추석 연휴라 그런지 낚시터에는 낚시꾼들이 거의없다시피 한다.
중부고속도로의 모습
마루금을 중부고속도로(1,2)가 짤라먹는 바람에 부득히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곳 고속도로 주변에도 돼지풀과 개망초를 비롯한 외래식물들이 점령해 버렸다.
태원사 절 앞으로 나오니 은고개가 나타난다. 여기서 끊을까 남한산성까지
오를까 고민을 하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데 아무래도 식수가 부족할 것 같아
고민스럽지만 남한산성까지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은고개(12:10)
은고개부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능선길이며 하남시와 광주시의 경계지점이다.
43번 국도를 건너서 교차로 신문사와 쌈밥집 골목길을 들어서다 오르니 마루금이
나온다. 이곳 은고개는 내가 처음 서울에 와서 천호동에 살면서 가을에 밤을 줏으러
왔던 기억이 새롭다. 이곳은 3공시절 나는새도 떨어뜨렸다는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분이 이 은고개에 기거하다 몇년전에 말년을 불우하게 마치신 분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교차로 신문사 건물과 황토가마 오리구이집 사이의 시멘트 계단을 타고 오르니
잘 관리된 안동김씨 문중묘가 나오고 급경사로 5분정도 치고 오르니 평평한 안부가 나온다.
광주(廣州)
지금부터는 경기도 광주땅으로 접어든다.
땅이 넓다고 해서 漢字로 ‘넓을 廣자’를 써서 광주라고 했던 광주시는 조선조 중기까지
23개나 되는 읍,면을 거느린 경기도 안에서는 가장 큰 고을로 꼽혔다.
그러던 광주군이 서울(현재의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강동구가 경기도 광주였음)과
성남시, 하남시에 내주고 지금은 4읍(경안, 곤지암, 오포, 초월)과 4면(도척, 퇴촌, 남종, 중부)
만 남았다. 광주군은 옛 백제의 도읍이었고 나라의 중요한 방어선이었던 까닭에
전쟁이 터질때마다 전쟁터의 중심에 있었던 까닭에 그런 역사적 사실을 두고
이중환이 저술한 “澤里志” 에서는 ‘광주 언저리는 사람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했다.
모진 전쟁에 시달린 탓인지 광주 사람들의 기질이나 인심은 좀 억척스럽다고 한다.
‘산성 사람(광주)들의 장사 솜씬는 개성사람들보다 낫고 산성 사람들 돈 떼어먹고는
못배긴다’고 하였단다.
우승지를 지낸 安東金公 묘소를 지나고...
右承旨란 고려 시대에, 밀직사에 속하여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
충렬왕2년(1276)에 우승선을 고친것이다.
조선시대에, 중추원이나 승정원에 속하여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
태종원년(1401)에 우대언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이것으로 고쳤다.
대림대학 학교림(300.4봉:12:30)
은고개에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급하게 30여분을 치고오르니
대림학원 학습림이란 팻말과 함께 삼각점이 있건만 너무 마모되어
그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다. 아침에 김밥 한줄과 커피한잔을 마신터라
너무 허기가 져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점심시간
도시락에다 싸가지고 온 불고기를 후리이판에 굽어 점심식사를
준비한다. 우선 막걸리 한잔부터 해야겠다. 너무 땀을 많이 흘려서
옷을 나무에 걸어놓고 말리려는데 오늘은 바람한점이 없다.
그래도 막걸리 한잔을 하고나니 조금은 낫다. 밥을먹고 20분정도
누웠다가 간다. 식사를 겸한 40분의 휴식탓인지 몸이 훨씬 가볍다.
지나온 검단산과 용마산
송접탑(NO:20)도 지나고...
마치 허들경기를 하는 느낌으로 산행을 하고...
아무도 없는 호젓한 편안한 안부를 혼자 걷는다.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은
졸리지 말라고 하는듯 하고 진주 강씨 가족묘지를 지나 조금 치고 오르니
갑자기 무너진 성곽이 나타난다. 남한산성에 진입한 것이다.
남한산성 진입을 진입하니 무너진 성곽이 산꾼을 반기고 이제부터 여기저기
사람들 소리에 산성이 왁자지껄하다. 이곳은 성곽관리가 전혀 안된탓에
보기가 후손으로서 민망할 정도이다. 이곳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잠재적 세계문화
유산이란 것인가. 참으로 창피하다.
외동장대터 가기전 이정표(14:05)
산성에 진입하여 검단지맥에서 약 0.4km정도 떨어진 벌봉으로 향한다.
이곳도 무너진 성곽 곳곳의 그늘진 곳에는 가족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바람한점 불지않아 옷이 땀으로 흠뻑젖은 산꾼을 모두다 이상하게
쳐다본다.
외동장대 안내석
남한산성은 조선조 때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 남쪽을 지키던 방어용 산성이다.
또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둘째부인인 소서노의 둘째아들 온조가 하남의 위례성에서
자리잡고 백제를 세운곳이 남한산성이라는 설도있다.
조선시대 인조반정이후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산성을 완성하여 개축과 보수를 걸쳐
총 길이가 11,76km나 되었다고 한다. 산성안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었으며
유시시에 사용할 숯을 묻어두었던 매탄처, 병사들의 숙소인 군포, 왕의 숙소인 행궁이
설치되었으며 광주시의 읍치를 산성안으로 옮겨 각종 관아와 창고를 설치하기도 했고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으 박해지로 유명하였고, 근대에는 육군교도소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벌봉 안내석
벌봉(남한산 521m:14:30)
벌봉은 그 고스락의 바위가 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바위봉이라고도 부른다.
여기까지 성(봉암성)이 둘러쳐져 있지만 여기의 석성은 병자호란 때는 없었다.
뒤에(조선 숙종조) 광주유수 윤지선(尹趾善)의 주장으로 축조된 것이다.
벌봉은 한쪽에서 보면 크나큰 두 쪽의 바위로 보이는 우뚝 솟은 암봉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과 그 군사들이
이 벌봉에서 남한산성 안에 있는 우리편 군사들의 상황을 살폈다 한다.
벌봉이 당시의 산성에서 가장 높은 수어장대보다 높기 때문에 산성 안을
넘겨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이 벌봉의 정기를 깨트리기 위해서 폭파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청군들이 이 벌봉에 머무를 때 새처럼 큰 벌들이 청군들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벌봉은 남한산성에서 흔하지 않은 암봉으로,
바위틈에 굴도 있어서 기도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벌봉 정상에 오르니 우거진 숲으로 인하여 조망은 그리좋지 못하다.
아침에 출발한 시발점이 팔당대교가 보이고 그 뒤에 예봉산, 적갑산, 철문봉도
박무에 가리긴 했지만 아련하게 보인다. 목은 타오르건만 이젠 식수가 한모금
밖에 남지않아 타는 목을 억지로 참으면서 아껴둔다. 다시 외동장대터로 돌아와
우측 마루금으로 복귀하여 봉암성으로 향한다.
한봉 갈림길(14:40)
봉암성 안내석(14:50)
봉암성
병자호란때 벌봉을 청군에 뺏겨 곤란을 겪어 숙종때 다시쌓은 외성으로 신성,혹은 동성이라한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인조 병자년 12월초(1636년)에 청나라 태종이 직접 군사 12만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가 있다.
청나라 대군을 맞아 결사항전을 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져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결사항전을 하지만 끝내 항복하여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글이다. 소설 남한산성에는 슬픈
인조의 고뇌를 있다.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항복하자는
실리를 이야기한 주화파, 그 결단의 기로에 서있는 인조의 고뇌,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고뇌의 결단을 하게된다. 항복을 하는 것이다.
범여는 이 길을 걸으면서 인조의 고뇌가 자꾸만 가슴깊이 아려온다.
국가가 힘이 없으면 민초들이 고단하다는 것을...
요즘도 마찬가지 아니인가? 이웃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중국도 이어도를 자꾸만 넘보는데 우리 정치인들은 맨날 자기 밥그릇
싸움만 이 작자들은 “남한산성”을 한번이라도 읽어보고 인조의 치욕을
반면교사로 삼아보시길...
북문가는 길에서 바라본 하남시(河南市)
하남은 삼국시대초 백제 시조 온조왕 13년에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를 도읍으로 정하고
‘하남 위례성’이라 부른 이래, 백제 근초고왕 25년까지 백제의 도읍지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한주를 광주라 고쳐서 불렀으며, 이때부터 광주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하였다. 조선 선조
10년에 광주군 동부면이 되었으며, 1980년 12월 1일 동부읍으로 승격하였고,
1989년 1월 1일 광주군 동부읍·서부면과 중부면 일부가 합쳐져 하남시로 승격되어
오늘의 하남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동부읍보다는 ‘신장’으로 더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으며 시 면적의 98%가 개발제한구역(그린밸트)로
묶여 있어 제조업보다는 창고 등,과 서울의 베드타운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이다.
북문 가는 길
전승문(북문: 15:00)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를 하게 된
‘법화골 전투’가 이 성문을 나서서 있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군사
300명이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여 말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진 것이
인조가 항복하여 치욕의 역사적 사건을 가게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북장대터
산성에서 바라본 송파구 삼전동의 모습
삼전도의 비극은 인조반정때부터 시작된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세력들은 광해군이 표방했던
중립 외교노선을 반청(反淸)노선으로 바꾸어 청나라 태종의 분노를
사게되고 청의 침략을 받는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며 이때에는
최명길이 강화회담에 나서 청과 형제관계를 맺기를 약조하고
청군을 철수한다. 그 후 1636년 청나라는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군신관계를 요구하면서 공물과 군사 3만명의 지원을 요구하자
조선조정은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청과의 화(和)를
끊는다는 선전교서를 내기에 이른다.
인조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봉림대군을 강화도로 보내고 1만 3천이
군사로 남한산성에서 진을 치는데 양곡 1만4300석, 장 220 항아리로
겨우 50여일 겨뎌낼 수 있는 식량밖에 없었다. 40영일이 지나자
성안의 살림살이 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죽음으로 청을 막아내자는 척화파가 맞섰으나
산성에 들어온 지 45일만에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삼전도에
내려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한다.
삼전도(三田渡)는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이며 조선시대에 한강 상류
나루터이다. 여기서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청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굴욕의 항복 협정을 맺는다.
이때 청태종이 승전을 기념하여 세운비가 아직도 삼전동에 있다.
이때 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이때 척화파의 대표적인 문인인
김 상헌이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읊은 충정의 시조 초등학교 때 배운 詩가 생각난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서문(우익문:15:30)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우익문이라 한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 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했던 문이다. 문의 폭은 1.46m이고 높이는 2.1m이다.
이제 물통은 완전히 비워졌다. 근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그렇게도 많았던 막걸리 장수와
이이스케키 장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신성한 산성안에 노점상이 없어진 것은 정말
잘한 것이다. 근데 불편한 것도 있네그려 ㅋㅋㅋ 서문에서 100m 정도 내려가 국청사
요사체에 들려 스님에게 甘露水 한병만 얻겠노라 하니 비구니 스님께서 수통을 가득
채워 주신다. 그중에 그 자리에서 거의 반병을 마셨다. 여태껏 못마신 것을 한번에 해결한다.
스님에게 고맙다는 禮를 표하고 다시 서문으로 올라와 좌측의 수어장대로 향한다.
국청사(國淸寺:15:35)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 서문 바로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1624년(인조 2년)에 벽암(碧巖)각성(覺性) 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각성선사는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총절제중군주장(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되었는데 팔도의 승병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쌓으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비밀리에 무기와 화약, 군량미 등을 구축해 두기위해 국청사와 천주사
개원사,남단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 등 7개 사찰을 세웠다.
남한산성 내에는 7개 사찰이외 신라때 창건된 망월사와 옥정사도 있었다.국청사는
구한말에 의병들의 무기창고로 이용되기 도 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밀이 누설되어 일제에 의해 폭파되어 오랫동안 절터로만 남아 있다가
1968년 보운(普運)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절안에 國淸寺井이란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우물에서 금닭이 홰를 치며 울엇다고 하며 이 약수로
아버지의 종기를 고쳤다는 효자의 이야기도 전한다고 한다.
수어장대 가는길
이제 남문까지는 2km도 남지 않았고 허기도 지고하여 마지막 베낭털기를 한다.
비상식량으로 남겨둔 사과 한개와 바나나 우유하나, 막걸리 1통을 혼자서 게눈
감추듯이 먹고나니 세상사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산성(南漢山城:사적 57)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위치하며 1963.01.21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청량산(수어장대 480m : 16:00)
서장대는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장대로 서쪽 주봉인 청량산 지상에 세워져 있는
이 건물은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사당인 청량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어장대 뒤편에는 우물이 나란히 2개가 있어 장대에 근무하는 장졸에게 음료수를 공급하였다.
이 건물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으나 성이 준공되자 수어청을 따로 열어 전담하게 하였다.
수어청에는 전/후/좌/우/중의 5영이 소속되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배치되어 소속된 군인을 지휘하였다.
인조 14년(1636) 1월 18일에는 산성에 들어온 인조가 성을 순찰하다가 서장대에 이르러
장사들을 격려하고 행궁으로 돌아 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南漢誌』에는 광주유수 이기진이 쓴 다음과 같은 「수어장대기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서쪽으로는 평야가 연결되어 바로 한강으로 닿으니 오랑캐가 일찍이 진을 치고
대장기를 세웠던 곳이다.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당일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동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있어 可汗이라고 이름한다.......
슬프다. 터와 묘가 슬픔을 일으키고 종묘가 공경을 일으킴은 천리의 양심이라 그
환경을 따라 말없이 느끼며 유연히 생기나니 진실로 그 서연(黎然)과 유연(油然)의
발단을 인하여 확대한다면 인과 예의 실을 못다 쓸 것이다.
이 대에 오르고도 그 감개하고 탄식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누구나 이것을 말미암아 더욱 충성의 의를 힘쓴다면 이 장대에서 웃는 것이
어찌 홀로 부하나 사열하고 형세나 찾고 말리오.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 일 것이다. 후인에게 경계하며 또 고하노라.
수어장대는 하층 정면5칸, 측면3칸, 상층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양식 2층 누각이다 .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3칸, 측면2칸만을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이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무망루라 하는데 1836년 유수 박기룡이 증축한 것이다. 2층은 정면3칸,
측면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양식은 연등천정을 하였다.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의 소나무는 참으로 힘이있어 보인다.
정녕 가을이 오는가보다.
영춘정(06:10)
영춘정은 일명 팔각정이라고 하며 원래는 남문 아래에 있던것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서울, 경기일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이제 마지막을 향해 묵묵히 걷는다. 이 고행도 수행의 한 부분이기에...
성남시의 모습
1960년대에 청계천의 철거민들이 이주한 곳으로 광주대단지라 부르던 곳이
이제는 인구 100만이 넘는 거대도시가 되어 버렸다.
다음구간에 가야할 남한산성 검단산의 모습
정상은 공군 방공포 부대와 KT 송신소에게 빼앗기고 그 아래
헬기장에 이정석이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 남문(至和門 : 16:30)
성의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산성수축(인조 2년│1624)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고 지화문이라 하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되며, 홍예문은 높이 4.75m 너비 3.35m 길이 8.6m로
원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건축 양식이 잘 갖추어져 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조선시대 정조때 개축하면서 지화문(至和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늘은 여기에서 산행을 종료하고 지하철을 타기위해 성남시내로 향한다.
초여름을 방불케하는 더운 날씨에 얼굴이 익은 느낌이 들 정도로 후끈거린다.
통일 기원탑
백련사 쪽으로 내려오니 통일을 기원하는 수많은 돌탑들이 있다.
급한 내리막길이 산성역가지 어프로치 구간이 거의 3km 정도가 된다.
거기다가 전부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무릎이 얼얼할 정도로 아파온다.
입구에 도착하기 직전에 화장실에 들러 머리를 감고 수건을 적셔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조견 선생의 詩碑
청계산 이수봉에서 망경대를 향해 고려의 왕에게 충절을 표하며 지조를 지킨 조견선생의
시비가 가슴에 와닿는다. 션한 생맥주 한잔 생각이 나서 성남에 사는 바람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골프 연습장에서 연습중이란다.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생맥주 500CC 두잔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귀경한다.
'탄천(검단)지맥(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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