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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山經表

산 이름이 무엇인가? 1 (박성태 원저)

by 범여(梵如) 2011. 12. 30.

 

우리의 국수적 해석이나

실수가 더 많다

 

일제가 바꾼 백두산 최고봉 ‘대정봉’을 제외하면 대부분 우리가 잘못 인식

 

국토지리정보원 홈페이지 지형지명서비스에서 찾아보면 남한의 산 이름은  9,000여 개가 있다. 이중에서 둘 이상의 행정구역에 속해 중복 표기된 것과 제주도의 오름을 제외하면 약 5,200여 개에 이른다. 모두 국토지리정보원이 발행하는 국가기본도에 표기하기 위해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건설교통부장관이 고시한 것이다.

 

 

지명은 1961년 4월22일에 일괄고시를 한 이후 수시로 변경이나 신설 고시하고 있으며 고시되지 않은 산이름도 많다.

 

 

산이름은 산세가 수려해 일찍부터 그에 걸맞는 이름을 얻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 기록을 남긴 것도 있고, 이름은 얻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사장되고  다른 이름으로 바뀐 경우도 있으며, 산자락에 붙어사는 사람들에 의해 구전으로만 전해오다가 뒤늦게 기록에 오른 것도 있다. 그리고 식자층이 사용하는 이름과 서민층이 사용하는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고, 산 양쪽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산이름이 옛 문헌에 기록된 것과 다른 경우가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우 옛 문헌의 이름을 되찾아주자고 주장한다. 특히 옛 문헌의 이름과 현재 이름이 다를 경우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작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일제가 과연 산이름을 조작했는지를 살펴보고 산 이름과 관련한 개선점을 짚어본다.

 

 

산이름을 한자로 바꾼 것은 조선시대

 

일제는 1914년부터 1918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1:50,000 지형도를 발행했다. 우리나라의 모습이 최초로 입체화된 현대지도로서 그 당시 까지 가장 많은 산이름들이 기재된 귀중한 자료다 . 이 지도는 우리 백성을 지배하고 자원을 수탈할 목적 등으로 만든 정보자료이지 우리 백성의 편익을 위한다거나 백성을 상대로 홍보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있는 자연지명은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히 기재한 것이지, 자기네 입맛에 맞게 조작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산이름을 한자로 바꾼 것은 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 조선시대의 산에 관한 기록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서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산이름을 지도나 문서 등의 기록에 올리자면 그 이름을  한자로 바꿔야했다. 이 과정에서 음에 맞은 한자를 골라서 쓰기도 하고, 뜻에 맞은 한자를 쓰기도 했다.

 

 

산경표 38쪽 나팔령은 喇(나팔 나)와 叭(입벌릴 팔)과 같이 뜻과 음이 맞는 한자를 골라 喇叭嶺이라고 썼고,  똑같은 지명을 증보문헌비고 권19 여지고 5에서는 나팔령이 순화된 나발령의 음에 맞는 한자를 골라 손 手 변에 羅(찢을 나) 撥(다스릴 발)로 썼다.

 

 

대동여지도와 산경표를 비교해 봐도 음이 같으면서도 한자가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백두대간의 대미산(黛眉山-大?山), 건의령(建儀嶺-巾衣嶺) 등이다. 이것은 구전되어온 지명을 각 기록의 조사자가 음이 같은 한자를 임의로 골라 만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호남정맥을 종주하던 중 담양군 금성면 봉황리 마을로 내려가 정자에서 마을 노인과 얘기를 나눴는데, 그 분께서 서암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은 산 속에 샘이 있어 시암산이라 하고, 그 오른쪽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봉황산이라고 한다” 는 얘기를 들었다. 다음날 서암산을 넘어 담양군 무정면 서흥리의 고개 근처를 지나면서 밭에서 일하는 분들께 “저 산이 시암산 맞나요?” 하고 물으니 “어디서 왔다요?” 한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하니 “서울 양반이 어떻게 시암산을 다 안다요?” 하며 반문한다.

 

 

러니 서암산은 시암산으로 구전되어온 것이 틀림없고, 일제가 지형도를 만들 때 서암산이란 한자이름이 이미 있었거나 아니면 기록에 올리기 위해 조사하는 사람에게 마을 유지나 선비는 음이 비슷하면서 좋은 뜻을 가진 한자를 골라 ‘상서로운 바위가 있는 산’이라는 뜻을 갖는 瑞(상서 서) 巖(바위 암)이라고 써줬다고 짐작된다. 일제가 한자로 바꿨다면 이런 좋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 바꿨겠는가.

 

 

일제는 지형도에 산이름을 한자로 크게 기재하고 일본문자를 작게 나란히 적고 있다.  일제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한자명을 찾아서 기록하고 찾지 못한 것은  일본문자로만 크게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백두대간의 고루포기산은 한자이름이 기재되지 않고 일본문자로만 쓰여 있는데, 읽으면 '고루포기산'이 된다.

 

 

지형도의 한자이름은 글로 표현하는 경우의 산이름이며, 일본문자로 기록된 것은 그 한자의 일본식 발음이 아니고 실제 우리말로 표현되는 산이름이다. 예를 들면 지리산의 고리봉은 한자로 '環峰(環=고리 환)'이라고 기재했지만, 같이 쓰여 있는 일본문자를 읽으면 '고리봉'이다. 이 지도를 가지고 현지에서 環峰을 찾으려면 일본문자로 쓴 대로 읽으면 현지사람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는 지형도에 일반 서민들이 두루 사용하는 지명을 표기했다. 예를 들면  '숭례문'은 나라에서 지은 이름을 이마에 붙이고 있지만, 일반 서민들은 성곽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구분하기 쉽게 '남대문'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숭례문’이라는 공식적인 이름보다는 대중 사이에 일반적으로 통하는 ‘남대문'을 지도에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관이나 지식인들이 만든 문헌이나 지도에 나타나지 않고 그 지역 주민들에 의해 구전되고 그 지방 관서나 선비들에 의해 한자화된 지명들이 이때 비로소 다른 유명 산과 대등하게 지도에 등재된 것이다.

 

 

지도는 정보이고, 정보는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제가 임의로 한자 이름을 만들어서 지도에 기재하였다면 그것이 무슨 정보가치가 있겠는가. 일제강점기의 지도를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내용을 확인해보고 그 지도의 용도와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속리산 천황봉은 일제가 바꾼 것이 아니다

 

속리산 천황봉은 대동여지도에 天王峰(천왕봉)으로 표기되어 있고, 현 지형도에는 天皇峰(천황봉)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부 사람들은 이를 일제가 자기네 왕의 호칭인 천황으로 바꿨다고 주장한다. 먼저 국토지리정보원의 자료에서 천황산과 천황봉을 찾아서 일제의 지형도와 비교해 보자.<표1 참조>

 

 

일제가 명칭을 바꾼 것이라면, 일제 지형도에 9개의 ‘천황’이 있는데, 모두 자기네 천황의 명칭을 갖다 붙인 것이라면, 속리산 천황봉이야 그럴싸하지만, 천황을 통영의 욕지도와 사천의 조그만 섬으로 귀양보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속리산 천황봉만 기왕의 천왕봉을 바꾼 것이고 나머지는 본래부터 있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면, 천황이라는 명칭의 권위를 위해서 보잘 것 없는 산들에 붙어있는 천황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거나 없애는 것이 상식이 아니겠는가. 해방 후 반세기도 더 지난 1998년에 계룡산의 주봉을 천황봉으로 고시했는데, 여기에 관여한 모두를 친일파로 몰아세울 것인가.

 

 

천황의 명칭을 가진 산이나 봉은 모두 충청. 전라. 경상도 등 남부지방에만 있고 산의 높이가 다양하다. 이것은 그 산꼭대기에 천신이 하강했다는 민간신앙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명칭은 일반 서민들의 입을 통해 구전될 뿐이어서 옛 문헌이나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정보자료로서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는 이름들을 모두 모은 일제 지형도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고전에는 윤휴(尹?.1617-1680)의 백호전서(白湖全書) 제24권의 세심당기(洗心堂記)에 ‘…起步於庭 相與指點 文壯天皇 雲煙面目…(일어나 뜨락을 거닐며 서로 함께 문장대와 천황봉의 운연어린 면모를 가리켜 보이곤 하였는데)’에 천황이란 글자가 보인다.

 

‘仁旺山’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

 

仁旺山(인왕산)은 王(임금 왕) 옆에 日(날 일) 자가 붙어 있어 일제가 王(왕)을 자기네 왕인 日王(일왕)이라고 조작한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1995년 광복 50년을 맞이해 몰매

를 맞고 쫓겨났다. 그 후 평창군의 發旺山(발왕산)과 加里旺山(가리왕산). 中旺山(중왕산)이 똑 같은 이유로 쫓겨났다. 과연 그럴까.

 

日王(일왕)은 일본 국민이 아닌 딴 나라 사람들이 일본의 왕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은 자기네 왕을 왕이라 칭하지 않고 천황이라고 한다. 지배당한 우리 백성이 천황 숭배에 반발해 총독부 뒤에 있는 인왕산의 ‘王’ 자에 ‘日’을 붙여 '천황은 우리와 상관없는 너희네 왕이다' 하는 뜻으로 ‘仁王山’을 ‘仁旺山’으로 바꿔 썼다고 한다면 몰라도 우리 백성을 천황의 신민이라고 하던 그들이 천황을 왕으로 낮추고 굳이 일본 왕이라고 하여 우리 백성을 일본과 구분하는 명칭으로 바꿨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표2>는 지명을 변경고시 하기 전에 산 이름의 가운데 旺(왕) 자가 들어있던 산들이다. 일제 지형도에 표기된 산은 8개이고, 이 중 서울의 인왕산과 영동의 대왕산은 "旺"이 아닌 "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현지 사람 외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간오지의 산들은 旺 자로 고치면서 서울 한복판의 인왕산은 그대로 뒀다가 나중에 바꿨을까(지명변경 주장이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 후에 바꿨다는 자료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2 훈련도감 척후복병편에 '호위할 때에는 척후와 복병은 도성의 분담구역에 따라서 지키는데, 북악ㆍ 인왕산(仁旺山) ㆍ안현ㆍ돈의문 밖 삼거리'라는 기록에서도 仁旺山을 찾아볼 수 있다(위 일제 지형도 인왕산 부근과 만기요람의 원문 참조).

만기요람은 조선 23대 순조 8년(1808년)경에 시임(時任)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와 부제학 심상규(沈象奎)가 함께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찬진(撰進)한 것이다.  

 

 

<표2> 최초고시 당시 가운데에 旺 자가 들어있는 산

소재지 한글지명 높이       한자이름
시군 읍면 1961년 최초 고시 1995년이후 변경 고시 일제 지형도
평창군 진부면 가리왕산 1,561 加里旺山 加里王山 加里旺山
양평군 양동면 금왕산 488 金旺山   金旺山
영동군 양산면 대왕산 304 大旺山   大王山
평창군 도암면 발왕산 1,458 發旺山 發王山 發旺山
화순군 도암면 선왕산 414 仙旺山   없음
밀양시 청도면 열왕산 663 烈旺山   烈旺山
서대문구   인왕산 338 仁旺山 仁王山 仁王山
괴산군 청천면 주왕산 408 周旺山   없음
평창군 진부면 중왕산 1,377 中旺山 住王山 中旺山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 757 火旺山   火旺山

 

일제 조작이라는 산이름이 고전에 있는 것들

 

이런 신문기사가 있다.

‘서울 북한산의 이름이 삼각산으로, 이 산의 백운대는 백운봉으로 바뀐다. 인천 강화 마니산은 마리산으로, 지리산 천황봉은 천왕봉으로, 경기 양평 유명산은 마유산으로 각각 개명될 것으로 보인다.’

 

9일 산림청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시작된 ‘우리 산이름 바로찾기’ 캠페인을 통해 접수된 국민제안 중 향토 사학자와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친 47개의 제안을 최종 확정, 정부지명위원회에 이름을 바꾸도록 요청했다. 지명위원회가 이를 수용하면 이들 산이름은 바뀌게 된다.

 

산림청에 따르면 지리산 천황봉의 경우 원래 이름은 천왕봉이었으나 일제가 천황을 빗대어 천황봉으로 바꾸었던 것을 이번에 원래 이름을 되찾도록 권고했다. 또 일제가 임의로 변경한 충북 영동 민주지산도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된 백운산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일제 때 신작로가 생기면서 이화령(경북 문경)으로 이름이 바뀐 이우릿재가 이번에 이름을 되찾도록 했고, 대전 계족산은 일제가 산의 격을 낮추기 위해 바꾼 것을 이번에 원래의 봉황산이란 이름을 되살리도록 했다.

 

서울 강북구와 경기 고양시 경계지역에 위치한 백운대 역시 원래 이름은 백운봉이었으나 일제가 자연적인 봉우리 의미를 축소하고 인공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멋대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도 ▲춘천 우두산은 소슬뫼 ▲구미 금오산은 대본산 ▲춘천 가리왕산은 갈왕산 ▲충북 제천 작성산은 까치성산으로 각각 개명될 것으로 보인다.

<출처www.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10091813491&code=940100>

 

하나씩 살펴보자.

 

삼각산은 유식한 사람들은 그 모습에 감탄하면서 그렇게 이름 짓고 많은 글들을 남기고 산경표나 대동여지도 등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몽매한 많은 일반 백성들은 북한산성이 있으니 알기 쉽게 북한산으로 부르면서 구전되어 오다가 일제는 지형도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북한산으로 기재했다. 남대문, 동대문 등과 같은 경우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3권 영처문고1(?處文稿一) 서(序)에 북한산(北漢山)으로 독서하러 가는 이중오(李仲五)를 보내는 서(序) 등에 북한산 명칭이 나온다.

 

백운대 와 같이 대로 불리는 것은 북한산 백운대, 속리산 문장대, 지리산 만복대, 북한 자강도 동신군과 전천군 경계의 백산 청학대(1,875m) 등이 있고, 정약용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 2권 시(詩)의 산 중에서 지은 절구[山中絶句] 등에도 백운대 명칭이 나온다.

 

강화 마니산은 신숙주(1417-1475)의 국조보감(國朝寶鑑) 제10권에 마니산(摩尼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전 계족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회덕현(懷德縣)편에 계족산(鷄足山)으로 되어 있고, 구미 금오산은 신숙주의 국조보감 권13에 선산 의 금오산(金鰲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경 이화령은 김홍욱(金弘郁?1602-1654)의 학주전집 제2권(鶴洲先生全集 卷之二)에 한자는 다르지만 문경 이화령( 伊火嶺)이 보인다. 제천 까치성산은 鵲(까치 작)성산의 풀어쓰기이고, 춘천 소슬뫼는 山(뫼 산) 자를 쓰는 다른 산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데 굳이 거꾸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일제가 조작한 산이름은 없었는가

 

위에서 일제가 만든 지형도에 표기된 산들의 이름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정말 일제는 산이름을 조작하지 않았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제일 중요한 민족의 영산 백두산 정상에 자기네 천황 '대정(大正)'을 붙였다.

 

'백두산 대정봉', 이것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기를 누르려는 의도가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패망과 함께 그 이름은 사라지고 오로지 그들이 만든 지형도에만 그 오만했던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산이름은 세월이 지나면서 변한 것도 있고 현지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전해지는 이름을 무시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멋대로 이름 지어 기록으로 남긴 것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기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현재와 과거의 기록이 다르다고 무조건 과거로 돌아가자고 우기는 것도 문제가 있고, 더 문제가 있는 것은 그것을 일제가 조작했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