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 2012.01,29
☞ 산행날씨 : 맑은 날씨이나 운무가 꽤나 많음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 도상거리: 24km G.P.S거리: 25.2km / 6시간 15분 소요
☞ 산행코스 : 수원목장-3층 주택앞-아홉골고개-열녀 난향의 묘-갈마고개-갈마차도-
161.9봉-신성역-마온 아파트-꽃조개 고개-만해동상-남산-수리고개-맞고개
-하고개-해태상-홍주병오의병 주둔지 기념비-136.2봉-살포쟁이 고개
-330봉-백월산-산신각-팔각정-전망암-까치고개- 홍성군 폐기물 매립장
-125봉-190봉-홍동산-용봉산 갈림길-육괴정-삽교역
☞ 소 재 지 : 충남 홍성군 광천읍, 홍동면, 구항면, 홍성읍, 홍북면 / 예산군 덕산면
갑자기 가수 서유석의 “가는세월 ” 이란 노랫 가삿말이 생각이 난다.
♪♪ 가는세월 그 누구가 막을수가 있나요. 흘럭가는 저 구름을 잡을수가 있나요♬♬
어쩌면 요즘 나의 맘을 가장 대변해 주는듯한 노랫말 같다. 정말이다
가는 세월을 막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어느 누구도 그걸 할 수가 없으니.
壬辰年 새해가 밝아온지가 얻그제 같은데 벌써 한달이 세월이 흘러 버렸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流水같다고 햇나보다... 이제사 그 뜻을 조금은 알 수 있을것만 같다.
올해의 첫 단추를 잘 끼어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내 주위에 병으로,
경제적으로 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다들 완쾌되고 경제적 어려움에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12월에는 밝은 웃음으로 마무리를 바라며 1월의 마지막 산행을 떠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서울에서 홍성가는 기차티켓
용산역 대합실에 걸려있는 가슴에 와닫는 詩
용산역 대합실(20:35)
토욜이고 마감을 해야하는 현장이 있어 정신없이 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에와서
샤워를 한 다음에 베낭을 메고 용산역을 향한다. 도착하니 19:50분이다.
저녁먹을 시간을 될것같아 순두부를 하나 시켜 적녁을 먹고 플랫홈에 들어서
열차에 몸을 싣는다. 평소 같으면 차에 오르면 잠이 쏟아지는데 오늘은 눈만 말똥말똥...
2시간 20분만에 홍성역에 도착한다.
홍성역(22:50)
원래는 다음역인 광천역에 내려야 하는데 광천은 찜찔방이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읍의 규모도 크고 찜질방이 3개나 있는 홍성역에
내려서 찜질방에서 자고 내일아침 첫차로 광천역을 갈 예정이다.
홍성읍 가는 길
홍성역에서 내려 시내로 15분정도 걸으니 찜질방이 나온다.
오늘은 여기서 여장을 풀어야 될듯싶다.
이런 소규모의 읍에까지 대기업의 엄청나게 큰 마트가 들어서 있다. 이곳은 복합 쇼핑몰이다.
내일 아침에 이곳에 있는 공영 주차장에서 광천가는 버스시간을 확인하고 찜찔방을 향한다.
요즘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사업확장과 일감 몰아주기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듯 하다.
대기업 2.3세들이 빵집, 커피집, 떡복이, 순대에다 수입차 딜러까지 돈대는 건 닥치는대로 다하는
바람에 구멍가계들이 설 자리가 없다. 이곳 홍성에 이런 롯데마트 하나서면 구멍가계 100개는
간단히 없어질듯 싶다. 서로 상생의 길을 가야하는데 재벌들의 탐욕은 끝이없는 느낌이다.
범여가 하는 인테리어업도 그 위기는 마찬가지다. 제조를 하는 L.G, 한샘, KCC, 같은 대기업이
직접 유통까지 하는 바람에 우리업계도 상당히 심한 편이다. 요즘 고민이 많은 편이다.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사적 제 231호)
조양문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글이라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없어졌고, 복원한 것이다.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홍성읍 오관리(五官里)에 있는 석축읍성. 둘레 약 800m. 백제의 주류성(周留城)으로
짐작되나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까지 개축에 관한 기록이 없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세종실록》 지리지에 <성의 둘레가 533보 2척이며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1451년(문종 1) 각 관읍의 읍성을 새로운 규식으로 바꿀 때 성 둘레 4856척, 높이 11척 규모로 수축되었다.
이후 현종 때와 1824년(순조 24) 중수되었다고 전하며, 1870년(고종 7) 조양문(朝陽門)·경의문(景義門)·망화문(望華門)·
관영(官營)이 건조되었다.
이 가운데 건조 당시 팔작지붕에 3칸의 다포계 문루건물로서 대원군이 친필을 하사하였다는 조양문은
1975년 완전 해체 복원되었으며, 성의 구조상 남문이 없는 것과 북문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특히 이 성은 1906년 민종식(閔宗植)·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 등이 이끄는 의병이 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공격, 덕산(德山)으로 퇴각시킨 전적지로도 유명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읍터로 별다른 변동없이 전해진 점과 조선 초기 새로운 축성 규식으로 축성되었다는
점에서 연구와 보존의 가치가 있다. 1978년 10월 지진으로 붕괴된 성곽 일부는 1982년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다.
홍성에 있는 서울 스포렉스 24시 찜질방(23:20)
6000원을 내고 샤워를 한 다음에 수면실로 들어갔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개판이다.
어느 놈이 담배를 피웠는지 담배냄새가 진동을 하고 술취한 취객 2명이 서로 시비를
하고 한 놈은 애인한테 실연을 당했는지 술에 취에 적어도 3시간을 전화를 붙잡고
지랄이다. 후론트에 잠을 못자겠으니 제지를 해달라고 하니 전화하는걸 뭐랄 수 없다고
하며 수수방관이다. 거기다가 이빨가는 놈, 기차화통만큼이나 코를 고는 놈...미치겠다.
거기다가 수면실은 왜이리 추운지. 잠을 한숨도 자지못하고 5시에 수면실에 나와서
샤워를 하고 찜질방을 나온다. 버스터미널이 가까워서 숙소를 잡았건만...
홍성읍내에는 찜질방이 3개나 있다. 산꾼들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한다.
홍성읍내로 10분정도 더 가면 좋은 찜질방이 2개나 더 있다고 한다.
정말 좋지않는 감정을 가지고 잠 한숨 못자고 찜질방 문을 나선다.
하긴 범여가 이곳에 두번다시 올일도 없지만 말이다.
편의점에서 2800원짜리 도시락으로 아침식사를 하다.
혼자서 장거리 산행을 할때는 최소한 베낭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먹는것과 갈아입을 옷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기 위에선 아침식사를 하고 산에 들어서야 한다. 이곳은 이른 아침에
식당을 영업하는 곳이없다. 24시간 영업하는 곳을 한곳 찾기는 했는데
손님이 없는 탓인지 주방 아줌마가 식당 방바닥에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있어 도저히 깨울 용기가 나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마트에 가서 2800원
주고 도시락 한개사서 전자렌지에 데워서 아침을 대신하고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홍성 공용버스 터미널(06:30)
터미널에 도착하여 06시 40분발 군내 농어촌 버스표를 사고 차에 오른다.
홍성에서 광천가는 버스표(06:40)
홍성 농어촌 버스 시간표
홍성에서 광천가는 농어촌 버스(06:40)
버스에는 손님이 나혼자다. 버스는 홍성역을 비롯한 읍내를 한바퀴를
돈 다음에 광천읍으로 향한다.
광천역(07:10)
이곳은 충남 홍성군 광천읍으로 예전에는 이곳이 유명한 새우젓과 김으로 인해
홍성읍 보다는 훨씬 컷다고 하는데 지금은 게임이 안될 정도로 외소하다.
이곳 광천 사람으로 내가 좋아하는 장 사익 선생이 있다.
광천역 앞에 도착하여 유명한 새우젓 시장을 돌아보고 지난번 탔던 택시를
콜하니 5분만에 오신다. 수원목장까지 7000원 주고 산행 들머리에 도착한다.
장사익 (1949 ~ )은 가수이자 국악인이다. 충남 홍성군 광천에서 태어나, 선린상고 와 명지대를 졸업하였다. 46세가 되던 해인 1995년 8월, 1집 《하늘 가는 길》을 발매하며 가수로 정식 데뷔하였다. 그의 대표곡은 〈찔레꽃〉이다. 2007년 환경재단이 선정한 '2007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의 목록에 올라갔다. 넥타이 매고 직장 다니던 장사익이 어느 날 가수가 됐을 때, 그 꺼벙한 표정과 엉거춤한 자세야 말로 한 신화가 생겨나는 덤불같은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보기엔 어수룩해도 툭 터지며 불붙었다. 평범이란 한을 담는 깊이도 얕을 거란 생각이, 장사익 앞에선 여지없이 깨진다. 보통인생 속에도, 길어도 길어도 끝나지 않는 한의 우물이 숨었다는 걸, 그는 보여준다. 장사익 이전의 찔레꽃이 다르고 장사익 이후의 찔레꽃이 다르다. 그 하얀 작은 꽃잎이 덧없이 지는 걸 보면 눈물이 안나는 게 이상하다. 이 노래, 듣는 이의 목이 더 쉰다. (펌글)
광천 토굴 새우젖 젖갈시장
광천읍에서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옹암포구 등에 새우젓 장터가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조선말에
서해안 10여 개 섬의 선박들이 새우를 팔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활성화되었다.
1960년대부터는 대천항 등에 주도권을 빼앗겼다가, 1960년 지역주민인 윤명원이 굴(窟) 속은 온도가
일정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독특한 새우젓 저장법을 개발한 이후 다시 젓갈시장으로서 활기를 찾았다.
토굴새우젓은 14℃의 일정한 온도에서 약 3개월간 숙성시키기 때문에 맛과 향이 다른 지방의
새우젓보다 월등하다. 옹암리 독배마을 바위산 밑으로는 활석암 암반을 꼬불꼬불 파들어간
새우젓 토굴이 40개가 넘는데, 주로 폐광을 활용하였고 높이가 2m, 길이가 200m나 된다.
새우젓을 담은 수백 개의 드럼통에서는 연간 2,500톤의 새우젓이 생산된다.
새벽 버스에서 내려 역전까지 5분정도 걸어 도착해 시장을 구경하고
택시를 부르고 주변을 둘러본다. 광천은 김으로도 유명한가 보다. 김을 파는 가게가 많다.
현재는 광천지역에서 직접 김이 생산되지는 않지만 서해안 김의 집결지로 광천이
예로부터 유명해 지금까지광천김이 유명하게 되어 김시장(김전)은 광천역(장항선)을
기준으로 주변에 형성되게 되었다고 한다.
수원목장(07:35)
택시를 타고 15분만에 오늘의 산행 날머리인 수원목장(충남 홍성군 광천읍 소재)
입구에 내려 산행을 시작한다. 날씨는 생각보다도 춥지는 않다.
이곳은 홍성군 광천읍 용운리 축산단지로 이 아래 도로가 장곡면과 광천면계를 가르는 지점이다.
수원목장과 홍광농장에서 100m 정도 가다가 초록색 둥근 사일로가 보이는 곳에서
좌측으로 90도를 꺽어서 도로를 따라서 계속 걸어간다. 오늘은 초반에 5km 가까이는
산은 전혀 밟을수가 없고 고도가 100정도 안되는 길을 목장과 양돈장 그리고 밭만
지나가는 곳이다. 주변 양돈장의 악취가 코를 찌른다.
우측에 인삼밭과 목장이 보이고 황톳길 도로로 계속 쭈욱 걸어간다.
좌측 나무에 달린 시그널만이 이곳이 금북정맥임을 알려준다.
홍성축협이라고 써있는 사일로에서 우측으로 진행하고...
이곳은 주위가 전부 목장과 양돈장으로 광천읍과 홍동면 일대는
홍성한우로 유명한 축산단지라고 하는데 난 오늘 그 목장길을 걷고있다.
지도상에는 미생물환경 자원연구(주) 라고 표기되어 있는 (주) 녹색비료 앞을
지나 사거리가 나오는 곳에서 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을 한다.
이른 아침에 홀로가는 산꾼이 이상해 보이는지 강아지 2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따라온다.
오서산이 눈에 뒤덮인 채로 멋진 자태를 뽐내고...
이곳을 지나는 금북정맥 산꾼들의 산행기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등대같은 존재인 멋진 3층집이 보이기 시작하고...
홀로걷는 산꾼의 등 뒤로는 이미 아침해는 중천까지 올라와 버렸고...
아홉골 고개(84m : 08:05)
홍성군 광천읍 월림리와 홍원면 홍원리의 경계로 2차선의 지방 군도가 지나가고 있고
광천읍이란 팻말뒤로 노란 타포린을 쳐논 농장을 끼고 우측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측에 있는 마을 이름이 아홉골이라 아홉골 고개라 부르는 모양이다.
농장 마당으로 들어서서 빨간색 지붕뒤로 올라선다.
개 우리에는 개 3마리가 같이 있는데 한넘만이 유독 경계심을 나타내며
산꾼을 잡아먹을듯이 짖어댄다. 니 넘이 짖든지 말던지 나는 간다.
다시 밭두둑을 밟고 지나가다 앞에 보이는 하얀집(폐가) 우측으로 돌아선다.
폐가(廢家)를 돌아나오니 다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이곳은 나말고도 산꾼들이 많이 지나다니는지 목장주인이 수고한다고 인사를 건낸다.
목장을 지나 Y자의 길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계속해서 걸어간다.
계속해서 편안한 길을 걸어간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그리 춥지는 않다.
잔뜩 껴입은 옷을 벗고나니 상당히 가벼운 느낌이다. 먹을것도 없는데
배가 아파와 이곳 밭에서 시원하게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다시 길을 간다.
아홉골 마을의 모습
밭 가운데의 농로를 따라 계속 직진을 한다. 이곳 좌측은 축산 단지가 자리를
잡고있고 그 뒤는 열녀 난향의 묘비가 아련히 보인다.
열녀 난향(蘭香)의 묘(08:20)
조선 때 황흠(1639∼1730) 이라는 사람이 평양 감사로 있었다. 그 아들은 황규하였는데 책상도령으로 부친을 따라 평양에서 머물렀다. 평양에는 기생 난향이 있었는데 황규하 도령과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황 대감이 다시 한양으로 발령을 받아 황 도령도 부친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한양에 도착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봐서 황 도령을 찾아가 보니 고향인 홍주로 내려갔다고 했다. 난향은 평양에서 한양까지 그리고 또 다시 홍주까지 천리를 넘게 걸어서 황 도령을 찾아갔으나, 이미 죽었고, 죽기 전에 혼인까지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난향은 평생 남편으로 여긴 황 도령이 혼인까지 하고 죽었다는 사실에 큰 실망을 하였지만 동네사람들에게 부탁하여 황도령 산소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오랜 여행으로 병들고지친 몸이지만 마지막으로 절개를 지켜 아내의 역할을 하려고 한 것이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황 도령의 산소 옆에 난향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난향의 절개가 아름답고도 불쌍하여, 죽어서라도 황 도령과 함께 있으라고 황 도령 산소 옆에 난향의 산소를 만들어주었다.
훗날 황 도령의 자식들이 장성하여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난향의 묘는 그냥 두고 황도령의 묘만 이장을 하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황 도령의 유골이 언덕 아래로 옮겨갈 때, |
난향의 묘에서 오색 무지개가 피어오르며 황 도령의 상여를 따라갔다고 한다.
황씨 문중에서는 기생이지만 절개를 지킨 난향을 기려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산소를 깨끗하게 단장하고 있다한다.
난향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지아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요즘 여인들에게도 좀 있었으면 한다. 갈수록 위축되어가는
남자들이 자꾸만 불쌍한 것은 이 범여만이 해당사항은 아닐터이고
자꾸만 강해지는 여인들의 파워에... 이런 여인은 없을까?
묘지에 비문을 읽어보고 우측으로 돌아서니 조금만 집이 두채가 있고 다시
밭길 가운데를 걸어간다. 중간중간 수확하다 포기한 배추밭도 보인다.
배추밭 사이로 오서산은 자꾸만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밭을 지나니 다시 호젓한 길이 나타나고...
다시 대파밭이 나타나고 좌측에 있는 인삼밭과 멋진 소나무를 지나고...
갈마고개(08:25)
홍성군 광천읍과 홍동면을 이어주는 지방도가 지나가고 있다.
갈마고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 있어 갈매재 또는 말고개라고도
불렀다고 하고, 이곳에 역정(驛丁)이 있을 때 말이 목을 축이던 연못이 있어서 얻은
이름이라고 하면 주위에는 축산농가들이 자리잡고 있고 광천쪽에는 광천쪽에는
농산물 가공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갈마고개에서 앞에 보이는 포장도로를 따라 금북정맥을 이어가고 있다.
보림농장
갈마고개에서 갈마차도고개에 이르는 구간은 평지 수준이며 마루금 좌 우측으로
간혹 논이 보이지만. 거의 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부 묵은 밭도 거치게 된다.
(주)보림 농장을 지나 우측으로 농로를 가다 다시 좌측으로 접어들면 성주 이씨
묘지를 끼고 우측으로 가야한다.
농로길 밭둑길 소롯길 묵은 밭과 묘지를 지나 편안한 수레길을 걸어간다.
묘지를 지나 다시 편안한 수레길을 지나가다 보면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갈마차도고개(08:30)
지형도에 따르면 이 도로는 기타도로에 해당되며 96번 국가지원지방도와 609번 지방도 그리고 21번
국도와 이어져 있으며, 남쪽으로 광천읍 월림리와 북쪽으로 원천리를 이어주는 읍도에 해당한다.
수원목장에서 이곳까지 1시간에 약 5.5km정도를 걸은 셈이다. 정맥 산꾼들은 이렇게 편안길에
볼것이 없는 곳에서는 가급적 속보로서 거리를 줄이는게 불문율이다. 오늘 처음으로 산으로
접어든다. 잡풀과 덩굴이 우거진 지역을 거쳐 치고 오르니 간벌을 시작했는지 곳곳에 잘려나간
나무들이 딩굴고 있고 넓은 묘지를 지나 소나무 숲으로 접어든다.
잡목과 잡풀들 사이로 길이 나있고...
조금전에 멧돼지가 산을 난도질을 해놓았는지 아직 흙도 마르지 않았다.
161.9봉(08:50)
오늘 처음으로 산 정상을 밟아본다. 산 정상에는 다소 알아보기 힘든 삼각점이
있고 산친구 산악회에서 코팅지로 팻말을 붙여놨다.
이곳에서 다시 편안길을 따라 길을 걷는다.
저 멀리 홍성군 구항면 구항논공단지가 보이기 시작하고 저 너머 오늘 가야할
홍성 남산과 백월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좌측에 쭈욱 같이 걸어온 광천읍과
이별을 하고 새로운 구항면으로 접어든다.
홍성군 홍동면의 전경
161.9봉에서 계속해서 방화선 임도같은 느낌이 드는 편안길로 계속해서...
오늘 걸어오면서 길에서 토끼똥을 많이 만난다.
최하위 먹이사슬인 토끼가 있다는 것은 이곳 산이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다.
와계교(09:05)
홍성군 구항면 청광리와 홍성읍 신성리에 장항선이 지나는 신성역 부근에 있는 철길위에
다리인 와계교(2009년 12월20일 완공)이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예전에는 신성역 부근에서
철길을 건너야 했으나 현재는 신성역은 북쪽으로 이전하여 있고 와계교를 새로 설치하여
관계자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없이 와계교를 통하여 진행할 수 있어 전보다 한결 수월하다.
이곳부터는 우측으로 여태껏 같이해온 홍동면과 이별을 하고 홍성읍으로 접어든다.
와계교 위에서 바라본 신성역의 모습(홍성군 홍성읍 소재)
신성역은 천안에서 익산까지 연결된 장항선의 중간역으로 복선화가 되면서
역사도 번듯하게 신축을 했지만 화물전용 역사라 한다.
와계교를 지나서 내려오다 다시 좌측으로 접어들면 도로 전봇대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앞에 보이는 단층 슬라브집을 끼고 우측으로 들어서야 한다.
슬라브집 옆으로 접어들면서 파란대문옆의 小路로 접어들어 올라간다.
다시 마을 도로가 나타나고 좌측에 인삼밭을 끼고 빨간색 지붕이 있는
집을 따라 좌측으로 올라가야 한다.
앞에 보이는 지붕에서 좌측으로 돌아서 가니 개쉬끼가 또다시 달려든다.
스틱으로 경계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길을간다. 이곳은 마을이 정맥길을 잘라먹고 있다.
비닐하우스와 주택사이로 해서 능선길을 걸어간다.
집 뒤를 올라서니 커다란 보리밭이 시야에 들어오고 겨우 찾은 산으로 접어든다.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아있는지 청미래(망개나무)는 슬피 울고 있다.
이곳은 잡목과 잡풀로 엉켜져 있어서 걷기가 심히 불편하다.
이윽고 135봉 정상에 오르니 홍성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洪城은 넓을 홍(洪)자를 쓰는 이름 그대로 들이 넓은 고장이다.
그래서 금북정맥도 이 고장에서는 몸을 한껏 낮추어 非山非野의 나즈막한
구릉지대를 형성하여 길게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135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니 엄청나게 높은 절개지 아래 마온
아파트가 정맥길을 잘라먹고 있어 부득히 우측으로 우회를 한다.
마온 아파트 C동(09:20)
이곳 홍성군 구항면 마온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요동(堯洞) 온동(溫洞)
마근동(麻根洞)을 병합하여 마근(麻根)과 온동(溫洞)의 이름을 따서 마온리(麻溫里)라
하여 홍성군(洪城郡) 구항면(龜項面)에 편입되었다.
마온 아파트를 우회하여 내려오니 홍성읍을 우회하는 외곽도로가 시원스레 달린다.
21번 국도 절개지로 내려오니 마온 모텔과 GS 주유소 웨딩타운과
음식점이 자리잡고 있고 길을 건너서 교차로 쪽으로 향한다.
꽃조개 고개(09:25)
우측으로 홍성남부순환도로와 21번 국도가 교차하는 날머리꽃조개고개다
꽃조개란 특이한 지명은 풍수설에 의하면 홍성 남방에 風吹羅帶
(비단허리띠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임)의 형국인 명당이 있고,
이 고개가 옷고름을 맨 모양이라 하여 '고쪼개'라 칭한 바
발음의 변화로 꽃조개가 되었다는 국립지리정보원의 설명이다.
그러나 홍성군 홈페이지에는 옛날에 진달래가 많이 피어
꽃동산을 이루어서 봄 꽃구경을 즐기던 고개라 한다.
꽃조개 고개 교차로를 지나서 소나무 한우전문 식당쪽으로 길을 이어간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홍성에서 광천가던 그 길이다. 우측에는 대학교가 3개나 있다.
이 조그만 읍에 청운대학교, 혜진대학, 홍성폴리텍 대학이 있다.
소나무 가든을 지나니
만해 한용운 선사의 동상이 우뚝 서있었고 동상 밑에는 만해 선사가 지은 “님의 침묵”이란 시가 쓰여있었다.
만해선사는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문의 행동 강령인 공약 삼장을 썼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우리 근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큰 스님이요, 독립운동가이시다.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에 거쳐하면서 조선총독부가 보기싫어 북쪽으로 집을 짓고 살다 가신분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직도 일본이란 나라는 아직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고 중국이란 나라는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날조하여 동북공정으로 자기네 역사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는데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모두다썩어 버렸는지 아무도 역사적 사명의식을 가진자는 보이지 않고 있다.
요즘 터져나오는 비리를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고 비리의 악취가 진동을 한다.
與다 野다 할것없이 복지, 복지하면서 표만 생각하건만 요즘 유럽이 왜 망하나 한번생각이나 해봤나,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인데 포플리즘으로 정권을 잡아 어케 할것인가?
제발 정신 좀차리고 진정 민초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시죠. 이 시대에 만해선사 같은분은 진정 없는 것인가 만해선사께 경건히 참배하고 길을 재촉했다.
만해(卍海)한용운(韓龍雲:1879-1944 :09:30)
만해 한용운은 고종16년(1879) 8월 29일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이라는 곳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한 선생은 어릴때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 (卍海, 혹은 萬海)라 한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고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을 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독립선언을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독립의 서(獨立의 書)를 써 명문을 남겼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지조가 곧고 절개가 있어 일제와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바치다가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였다.
묘지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 정상에 부인유씨와 같이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홍성군은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에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 님의 침묵 / 한용운 -
님은 갔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굳고 빛나던 옛맹서는 차디찬 티끌이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의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되고
놀란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줄 아는까닭에 걷잡을수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희망의 정수박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것을 염려 하는것과 같이
떠날때에 다시 만날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것을 염려하는것과같이
떠날때에 다시 만날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선사의 동상옆으로 나오니 만남의 숲이라는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 놓고
그 옆에는 충령사가 있다 편안한 길을 올라가는데 인위적을 만든 돌탑이 10여개
정도가 있고 조금 올라가니 나무 계단이 나온다. 묘지너머로 구항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홍성 충령사
만남의 숲옆에는 홍성 출신의 독립 유공자와 월남참전 기념비가 있고
이곳 홍성출신의 선열들을 모신 충령사가 자리잡고 있다.
남산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구항면의 모습
둘레길 안내판
이곳 홍성군 남산에는 홍성의 둘레길격인 ‘재너머사래긴밭 가는 숲길’이라는
긴 이름의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날씨가 추운탓인지 사람들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돌탑을 지나서 편한 길을 걸어간다.
금북정맥 갈림길(09:45)
정맥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야 한다. 정맥길에서 200여m 정도 떨어져 있는
홍성의 남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남산으로 향한다.
남산의 지적 삼각점
남산의 팔각정에서 바라본 홍성읍내의 모습
이곳 홍성은 애국자와 독립운동가 의인이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고려의 명장ㆍ재상인 최영(崔瑩:1316-1388)은 홍성 홍북출신이다.
고려말 왜구들이 창궐할 때 왜구들을 격파하였고, 1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함락 시키자 이를 격퇴한 이도 최영장군이다.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ㆍ이동을 요동에 예속 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름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絶臣)으로 꼽힌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능지처형(?遲處形)을 당했고 집안도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님의 침묵’의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며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 (卍海, 혹은 萬海)라 한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고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을 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독립선언을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독립의 서(獨立의 書)를 써 명문을 남겼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지조가 곧고 절개가 있어 일제와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바치다가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였다.
‘청산리 대첩’의 백야 김좌진장군(金佐鎭:1889~1930)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하고 용력이 뛰어나 18세때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과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7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촤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31세가 되던 해에 서백리아에 출전중이던 일본의 가납연대 3,000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연대장 가납 이하 1,200명을 함몰시키고 천수백명 을 전상자로 만든
7일 간의 전투가 바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금자탑을 이룬 1920년 10월 21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 이다.
1925년 김혁, 최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국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취임하여 재미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던중 1930년 1월24일(음 12월 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부근의 정미소앞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홍성군은 어느 곳이나 생생한 역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고장이며, 사라져만 가는
우리 문화 전통이 아직까지 곳곳에 베어있어 어느 누구나 이웃하고 싶은 곳이다.
너그러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홍성은 계절에 따라 먹거리 또한 풍성하다.
남당리의 대하와 새조개, 광천의 토굴새우젓, 홍성의 한우고기, 용봉산의 더덕구이 등등...
홍성의 남산(09:50)
홍성읍의 남쪽에 위치하여 남산이라 부르는지(범여의 생각中에서) 이곳에는
각종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고 팔각정과 지적 삼각점도 있다.
이곳 팔각정 위에 오르니 홍성읍을 비롯해 내가 가야할 백월산과 그 앞의 용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멋진 조망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박무로 인해 희미하다는 점이다.
이곳에 오르니 오늘 처음으로 서너명의 사람을 만난다. 다시 삼거리로 와 정맥길로
이어간다. 약간 서있으니 추위가 엄습해와 서둘러 달리기하듯 뛰어간다.
수리고개 터널 위(09:55)
수리고개에서 홍성 남부우회도로와 21번 국도가 흐르는 "꽃 조개 고개" 그리고 지나온 정맥을 잡아본다.
부실하게 먹은 아침 때문인지 허기가 찿아와 베낭에서 두유 한개와 밀감2개, 곶감과 초콜렛을
꺼내서 호주머니에 넣고 걸어가면서 먹는다. 추운날씨에는 쉬면 추위가 오기에 걸어면서
먹는게 시간도 줄이고 추위도 잊고 일조이조인 느낌이다.
수리고개(10:05)
홍성읍 동리(東里)에서 구항면(龜項面) 마온리 수리너머 마을로 가는 고개를 수리고개라고 부른다.
또한 서낭댕이 고개라고도 부르는데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 해서 서낭당고개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서낭당도 없고 사람의 왕래도 뜸하다.
고개 우측으론 신설도로인 홍성남부 우회도로가 건설되어 차동차들이 고속도로 수준으로 과속을
하고있고 홍성군 둘레길을조성하면서 사각정자와 돌탑이 조성되어 있고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다.
수리너머 마을위로 직진을 하여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이곳은 잡목과 잡풀들이 마구 뒤엉켜 있긴 하지만 것는데 큰 불편함이 없다.
다시 편안한 능선에 오르다 내려서니 밭고랑 가운데로 지나가는데
포도나무를 심어 밭의 경계로 만들어 놓았고 다시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맞고개(10:15)
홍성읍에서 구항면 육골마을로 내려가는 길로 한적한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이곳에는 홍성읍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있고 다시 밭위로 오르니 소나무를
식재한 곳에는 다른곳에서 볼 수 없었던 초록색 송전탑이 이채롭다
초록색 송전탑을 올라서니 산에서 간벌작업을 하는지 전기 톱소리가 요란하다.
보개산 갈림길
편안한 길을 올라서니 좌서북쪽으로 보개산 가는길이 나오고 우측 옥암리쪽으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연달아 공전탑이 계속 나타난다.
도로에는 약간의 잔설이 깔려있긴 하나 그리 미끄럽지는 않다.
조금 더 내려오니 좌측에 철조망을 쳐놓은 곳이 나타나고 철조망과
함께 탱자나무가 쭉 심어져 있다. 조금 내려가니 연달아 29. 30번의
송전탑이 나타나고 콘크리트의 경사진 도로가 나타나며 하고개가 보인다.
하고개(10:30)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와 구항면 황곡리를 연결하는 29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황우고개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洪州牧使가 홍주읍내를 바라보기 위해자주 올랐던 고개이며
홍주(지금 홍성의 옛지명)를 지나 서산으로 가는민초들이 쉬면서 말과 소에게 풀을 먹이고 한숨을
돌리는 고개라 하여 하고개 또는 하우고개, 황우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홍성라이온스 클럽에서 설치한 라이온스상이 서있다.
도로를 건너기 위해 지하도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에둘러 가야 하기에 차량도
그리많치 않아서 차량의 흐름을 살핀 다음에 간단하게 무단횡단을 감행하여
길을 건넌다. 하긴 정맥길 타면서 목숨을 건 무단횡단 이런 짓거리 어디 한 두번인가
하고개 서산 방면의 모습
무단횡단을 감행하여 밭두둑을 걸어나와 무단으로 버려진 폐타이어를 비롯한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는 길로 올라서니 "홍주병오의병 주둔 유지비"가 설치되어 있고
고갯길로 오라서니 유지비 입구에 유지비 설명 판이 설치된 구(舊 도로) 하고개이다.
도로 윗편에는 홍성민속 테마박물관 상호라는 음식점이 보인다. 유지비를 둘러보고
유지비 우측 등로로 접어든다
홍주병오의병주둔지 '하우령고개'(10:40)
홍주의병은 1906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다음 해에 결성되었으며, 당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의 봉화가 홍주의 하우고개에서 맨 처음 올라, 의병들이 홍산, 서천, 남포, 보령을 거쳐 광천에 와서
대부대가 되었으며, 이 주력부대가 광천에서 구항 마을과 신당곡을 거쳐 하우고개에 당도하였고, 천북, 결성,
서부에서 궐기한 의병들도 서산도로를 따라 하우고개에 집결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홍주성 탈환의 진군나팔이 울리어
1906년의 병오의병 거사가 발화되었다고 한다.
유지비 옆 좌측 등로로 올라서니 다시 오솔길이 나타나고 노끈으로 쳐놓은
곳에는 마치 희말라야 메리설산에서나 볼 수 있는 시그널이 걸려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아는 시그널도 꽤나 보이니 반갑기 그지없다.
이 시그널 뒷쪽으로 계속 올라가 소나무 숲을 지나간다.
우측에는 홍성읍내가 한 눈에 보이고 백월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모든 기준점이 민속촌이란 말뚝으로 시작된다.
136.2봉(10:47)
산친구 산악회에서 붙여논 코팅지와 함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삼각점(△홍성 439)이 서있다. 별 특징이 없는 밋밋한 산이다.
서서히 홍성 백월산이 시야의 사정권에 들어온다.
우측에 밤나무 단지도 지나고...
살포쟁이고개(11:05)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와 구항면 황곡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옛날에 이 고개에서 죄인이나 짐승들을 죽였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당산나무가 있고 허물어진 돌탑 흔적이 있다.
살포쟁이 고개를 오르니 비석에 安東張氏의 묘지가 있다.
흔히들 安東 張氏라 하질 않고 仁同張氏라고 하는데 표기에 약간의 의문점이 든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힘이들게 올라간다. 조금 오르니 급경사에 암릉이 나타난다
음지인 곳에서는 약간의 잔설이 있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암릉을 타고
330봉으로 올라가니 서해쪽이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저 아래의 구항면과 궁리저수지와 보개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미끄러운 눈길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니 백월산 정상아래까지 콘크리트 임도가
나있고 새로 만든듯한 헬기장이 나타나 다시 우측에 등로에 섰다가
다시 올라서니 홍성 백월산이 나타난다
천주교의 순교지로 이곳 홍성이 유명하다
바다로 돌출된 지형을 이루는 내포지방은 곳곳에 포구가 발달하여 수도로 운송하는 길목역활을 하였다.
특히 태안반도와 같은 곳은 바닷길의 기착점으로서 중국과의 교섭에서 열린 형세를 이루었다.
따라서 내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홍성은 잘 발달된 뱃길을 통하여 백제시대의 불교, 마카오를
통한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될 수 밖에 없었다. 해양문화의 개방성과 다양성은 내포지역에 천주교의
초기 전래 및 빠른 유포를 가져왔으며 서구열강의 침략의 원인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조선의 대책강구는 천주교의 박해로 이어졌으며 내포출신의 초기 조선인 성직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최방제 프란치스코(홍주) 신부를 배출하였다.
감시 카메라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산꾼을 감시하고 있고
통신사 송신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는 백월산에 도착한다.
백월산 정상에서 내포(內浦) 문화의 중심 홍성(洪城)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여리쯤에 가야산이 있습니다.
서쪽은 큰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남쪽은 오서산에 가려져 있는데 가야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맥으로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고을을 내포라 한다."고 언급되어있다.
가야산 앞뒤의 10고을은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 등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는 내포지역을 홍주목(洪州牧, 지금의 홍성군)이 관할하던 충남
서천에서 경기도 평택까지의 20여 고을을 지칭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내포지역은 충청도 지역중에서 서해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주와 결성을 합쳐서 홍성이된 뒤 내포지방에서 가장 큰 고을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어패류의 최고 산란지로 꼽혀온 천수만을 서쪽에 거느리고 옹암포와 광천,
동산포 등의 작은 포구들이 결성으로 연결되어 풍부한 해산물이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홍주는 호서의 가장 큰 고을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의 고장으로 일컬어왔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성읍내
가운데 있는 홍주성이 그것을 대변해 준다. 배산임수형인 홍주성은 홍동산~백월산~오서산
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적의 침입을 막는 1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반타원형의
평지성(平地城)으로 옛부터 내포지방 방어에 핵심 역할을 해왔다.
백월산(白月山 : 394.3m : 11:30)
홍성의 진산으로 홍성읍 월산리, 구항면 오봉리, 홍북면 중게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기암괴석에 ‘누어백월산기암벽상(樓於白月山奇岩璧上)’라고 써논 비가 있다.
백월산은 이조 말엽에 홍주 이방으로 있던 명필이며 문장가인 이 종근의 시에 나오는
‘백월산하(白月山下) 라는 구절을 따서 백월산이라 한다’ 는데 여암 선생의 산경표와
고산자 선생의 대동여지도에는 백월산도 일월산도 아닌 월산(月山)이고
국립지리원의 고시지명에는 일월산으로 되어있다.
백월산 정상에서 주위의 탁트인 홍성의 모습을 감상하고 주위분에게 인증샷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저 너머에는 산신각과 팔각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수만의 서쪽을 제외하곤 삼면이 대부분 구릉지대로 둘러쳐진 백월산 정상에선 앞쪽으로
홍동산(308.9m) 좌측의 앞편에는 삼준산(490m), 우측의 앞쪽엔 용봉산(381m), 그리고 지나온
오서산(791m)이 아련히 조망이 된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많은 유적지를 품고 있는 구간이다.
특히 전국의 유명한 무당들이 성지순례하듯이 이곳을 다녀간다는데 그 연유는 이곳이 기도빨이
가장 효험이 있고 강신 하나만큼은 확실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코뿔소처럼 생긴 바위
백월산 정상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여기서 가족들이 소풍오듯이
밥통째 들고와서 맛있게 밥을먹고 있다.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온다.
산신각이 설치된 암봉과 백월산 정상석과 시냇물 돌탑으로 만든 산불감시초소가 설치된 사실상의
백월산 정상부 중간 안부에는 화장실 한 동과 산지기관리소 한 동이 설치되어 있다.
등로위로 올라 산신각으로 올라가는 길에 바위에 폭파인 바가지처럼 생긴 곳이있다.
백월산 산신각(11:37)
산신각 내에 들어서니'홍주청난사중수비'와 산신각이 있고,
산신각 안에는 백월산신과 '홍가신(洪可臣)'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홍가신'은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되자 선조 30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홍주목사로 있던 홍가신이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봉해진 인물이라고 한다.
산신각 내 마당에 있는 홍주청난사중수비
백월산 산신각 전망대에서 바라본 홍성읍내 홍주성
홍주성은 풍수지리에서는 앉음새가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많은 사건을 겪게된다.
변산반도의 개암사(전북 부안소재)의 울금산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추정되는 홍주성은 고려이후 무려 열여섯 차례나 왜구의 침략을
받았고 근세에는 동학농민항쟁이 벌어졌을 당시 동학군은 내포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홍주성인 이곳으로 집결하여 관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많은
동학군들이 희생되었다.
또 구한말에는 홍주성에서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이조참판이었던 민 종식은 1906년 의병을 이끌고 홍주성을
공격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에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기사에는 약 1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홍주의병이 비록 실패하긴 했으나 우리 의병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커다.
홍주의병은 민종식 이하 유생들이 주도했지만 당시 농민과 보부상 등 강제 해산
당한 병사들이 참여해 민중의병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백월산 팔각정(11:40)
백월산 팔각정에 도착하니 이곳 홍성사람들이 새해 산신제를 지내고 나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음복을 하고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갈 수 있으랴
음복으로 막걸리 2잔과 시루떡 한조각을 얻어먹고 나니 속이 든든하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전망바위를 향해서 간다.
산신제를 끝내고 한해 소원을 적어서 걸어놓은 소지종이
전망대 바위(11:45)
전망대 바위에 도착하니 온 사방이 가슴이 뻥 둘린 느낌처럼 다보인다.
바로 앞의 삼준산,홍동산과 용봉산도 보이고 저 너머 불국토로 장엄된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도 보이고 그 너머 가야산도 아련히 보인다.
바로 아래에는 홍성군 홍북면과 갈산면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전망대 바위 아래의 급경사로 내려선다. 이곳은 눈에 익은 시그널이
반갑게 홀로가는 산꾼을 맞이하는데 음지라서 눈이 많아 상당히 미끄럽다.
그런데 한가지 고민이 생긴다. 날씨가 추웠던 탓인지 카메라 밧데리가 눈금이
하나밖에 없다. 아무래도 덕숭산을 넘기는 힘이들것 같아 고민이 된다.
에라 모르겠다 가는데 까지 가보자.
20여분의 미끄러운 길을 내려오니 다시 편안한 임도가 나타나고 우측에는 주택 몇채와
과수원 농가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가지말고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폐허가 되버린 교회종과 건물뒤로 지나간다.
폐허가 되버린 교회(12:05)
까치고개(12:07)
홍성군 구항면 갈오리와 홍성읍으로 통하는 홍북면 미력골 마을을 지나는
지방도가 있고 고개 우측에 있는 '고개쉼터'식당 마당으로 내려서
홍성군 폐기물처리장 앞으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까치고개 삼거리의 모습
이 지역 사람들은 까치고개라는 용어는 잘 모르고 그저 휴게소 고개라고 부른다.
까치고개 삼거리를 지나 홍성군 쓰레기 매립장 정문 도로로 직진으로 가다가 좌측의 등로로 접어든다.
우측에 홍성환경사업소 정문에서 좌측으로 휀스를 따라 한동안 걸어간다
홍성 환경 사업소 정문(12:10)
휀스를 따라 꽤 지나가니 방화선 같은 임도가 나타나고 마사토의 미끄러운
길을 계속 걸어간다. 그리크지 않은 고도차의 능선길을 빠른 속도로 걸어간다.
카메라 밧데리가 거의 소진이 다 되어 가는 느낌이다. 카메라를 캐면 밧데리에
빨간불이 자꾸만 깜박거려 밧데리를 빼서 품안에 넣어보지만 별 효험이 없다.
마루금에서 바라본 용봉산의 모습
381m인 용봉산은 서원산에서 수덕산에 이르는 산지능선의 동측에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6.5km의
길이와 2km의 폭으로 뻗어 있다. 용봉산지역은 수암산(260m)에서 용봉산에 이르는 곳으로서 평야지역에
솟아있는 고립구릉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중립지혹운모화강암으로 구성되어 화강암지역에 나타나는
이반적인 암석미지형들이 분포하고 있다. 용봉산의 고립구릉의 능선은 양측 끝의 암봉을 중심으로
중앙부가 안부(鞍部)를 이루고 있는 암석구릉으로서 토르, 암주, 암봉 등 암석미지형이 가장 대표적인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용봉산능선에서 대부분의 암석미지형들이 분포하고 있는 곳은 300m 이상의
지역으로서 악귀봉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150m 부근에 암주와 토르들이 분포하고 있다.
차량이 올라올 정도로 큰길이 나오는데 비에 흙이 많이 파져있는 편안한 길을 올라간다.
이제는 왠만한 것은 카메라에 담지않고 그냥간다.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산불이 난 지역을 지난다. 꽤나큰 소나무들은 다 타버려 이리저리 딩구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소나무의 빈 자리에 억새와 같은 잡초와 싸리와 아카시아 같은
잡목이 자리잡고 있어 걷기가 심히 불편하다. 길이 거의없다시피하여 얼굴이
잡목에 할키고 베낭이 자꾸만 걸려 자꾸만 시간이 지체된다.
190봉을 치고 오르니 바로 지나온 125봉과 낙상리 저수지가 보이고 지나온 백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금만 암릉위를 지나니 다시 소나무 사이로 편안한 안부를 걷는다.
홍동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홍성군 홍북면의 모습
오서산 아래에서 부터 시작한 금북정맥 마루금은 이곳 능선에서 부터 홍성군과 이별을
고하고 예산군 덕산면으로 접어든다. 여기서도 고도편차없이 능선길을 빠른속도로 걷는다.
오늘 산행을 예정했던 나들본까지는 아무래도 카메라 때문에 육괴정에서 접어야 할듯 싶다.
저 아래에 사찰같기도 한 건물도 줌으로 땡겨보고...
홍동산(弘東山 :309m : 13:10)
홍성군 홍북면에 있는 홍동산은 "서쪽으로는 산이 첩첩으로
쌓여있고 이 산에서부터 동편이 열려 있다"라는 의미라 한다.
용봉산 갈림길(13:25)
홍성군을 관통하며 북진하던 금북정맥 마루금은 말미고개에서
홍성군과 작별하는데 옛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한 군으로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를 지주사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군이 되었고, 1914년
옛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이 되었다. 홍성은 홍주성(洪州城)의
줄임말로 산경표나 대동여지도에는 모두 홍주로 기재되어 있다.
호서지방의 주요 읍성이었고 이 고을을 중심으로 발전한 홍주는
서쪽에 일월산, 북쪽에 용봉산이 홍주를 호위하는 형국이란다.
마루금에서 1.5km 가량 벗어나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은
산이 크고 험하지는 않으나 산 전체가 기묘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릴만큼 아름답다. 산 이름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듯한 형상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육괴정 날머리(13:50)
홍동산 갈림길에서의 내리막길은 음지라 그런지 잔설이 꽤나 많이 쌓여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거기다가 소나무를 비롯한 커다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운치도 있어 보이고 S자형태로 걸어내려오니 차량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차피 카메라 때문에 더 이상 산행을 진행할 수가 없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스틱을 접는다.
육괴정(六槐亭 :132m)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고개로 수덕사를 넘나드던 고개라고 하여 이 지역사람들은
수덕고개라고 하며 해미에서 예산을 잇는 40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육괴정이란 조선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로 중심으로 지차주의와 현상정치를 추구하던
신진사류들이 몰락하고 이때 난을 피해 낙향한 남당 엄용순이 건립했다는 정자이다.
육괴정이란 이름은 당대의 명현인 모재 김안국을 비롯 규정 강은, 계산 오경, 퇴유 임내신,
두문 성담령, 남당 엄용순 등 6명의 선비가 모여 시회와 학문을 강론하며 우의를 기리는 뜻에서
정자 아래에 못을 파서 연을 심고 각자 한그루씩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연못은 매워지고 6그루의 느티나무중에 3그루가 또한 고사하여 후손들이
다시 심어 지금도 그 푸르름을 자랑한다.
옛날 내포지역에서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이곳을 거쳐야만 했는데 바로 이곳에 주막이
있었고 사람들은 주막에서 쉬어가곤 했다. 지금의 식당과 여관 역할을 한 곳이다.
자연식당이란 곳에서 비빔밥 한그릇과 막걸리 한사발을 한 다음 삽교역 버스를 기다린다.
역전가는 버스가 자주 있느냐는 질문에 굉장히 자주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식사를 하고 베낭을 메고 길가에 서 있는데 40분이 지나도 오질 않는다.
옷을 갈아입을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서있는데 추워서 미치겠다.
14:45분에야 버스가 도착한다. 충청도 사람들의 표현‘ 정말 애매합니다.’ 딱 부러지는
맛이 없이 그저 두리뭉실하게 구렁이 담 넘어가는 스타일 범여는 딱 질색이다.
해미에서 덕산으로 넘어가는 수덕고개
삽교역(15:10)
삽교역에 도착하니 15시 19분 무궁화 열차 입석표가 있다.
열차가 8분정도 지연되어 15:27분에 열차에 오른다. 통로에 서있다가
도저히 쏟아지는 잠을 참을수가 없어서 천안쯤에서 식당칸 열차에 가서
캔맥주를 마시고 어디 눈을 부치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틈이없다.
겨우 매점 바로앞에 비집고 앉아서 죄없는 맥주 3캔만 안주도 없이 작살을 낸다.
삽교역 대합실(충남 예산군 덕산면 소재)
열차를 타고 용산역에 도착하니 17:15분 정도이다. 해를 보면서 서울에 도착하는게
얼마만이더냐. 용산역에서 국철을 타고 옥수역에서 3호선 열차를 갈아타고 집에오니
집은 텅비어 있다. 우리 식구들은 전부 각각등보체인지... 자꾸만 난 순번에서 밀려나
TV 다음으로 밀려놨다. 강아지가 없어 천만다행이다. 강아지 사면 또 한등급 강등되겠지
집에와서 샤워를 한 다음에 중국집에 짬뽕 한그릇 시키고 막걸리 한 병마신 다음에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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