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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금북정맥 (終)

금북정맥 제10구간 - 육괴정(수덕고개)에서 무르티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2. 2. 12.

○ 산행일자 : 2012. 02. 12

○ 산행날씨 : 맑은 날씨에 박무 약간, 상당히 더운날씨

○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6.2km / 9시간 소요     

○ 산행코스 : 육괴정-덕숭산-수덕사 갈림길-나들본 고개-뒷산-402봉-385봉-한티고개-헬기장-한서대학갈림길

                   427봉-470봉-485봉-643봉-649봉-가야산-원효봉 갈림길-삼거리 안부-609봉(암봉)-석문봉-640봉

                   604봉-사잇고개-516봉-일락산-전망대-개심사 갈림길-358.8봉-쉼터안부-삼화목장 초지대-상왕산

                   NO119송전탑-206봉-NO114송전탑 -가루고개-NO110송전탑-모래고개-173봉-동암산-무르티고개
○ 소 재 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

 

참으로 요즘 나라꼴이 한심스럽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학생들은 자꾸만 조폭들 흉내를 내고

국회의장이란 자는 돈봉투 사건으로 초라한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창피를 당하고...

4월에 총선을 앞둔 국회의원이란 나리들은 앞뒤 생각도 없이 표얻을 생각에 지키지도 못할

온갖 공약을 남발하고 있고... 물가와 전세등이 폭등하여 민초들은 마지못해 살고있는데

은행이라는데는 지난 한해 12조원이라는 단군이래 최대의 영업이익을 얻었다고 자화자찬이다.

그게 자기들의 노력으로 얻은것인가? 치졸한 잔머리의 꼼수로 민초들의 등골을 뺏어 얻은 것이지

 

정말 매스컴만 대하면 이 나라는 탐욕과 오만 이기주의로 인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매스컴에 나오는 나쁜 20%보다는 나오지 않은 착한 80%가 있기에 이 사회는 돌아가겠지

 

지난주에 동아일보 기사에서 신선한 충격을 접했다. 대만의 최대 해운회사인

 창룽(長榮:영문명:에버그린)의 창업자인 장룽파(張榮發)회장이 사후에 전 재산인 1조 9000억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것이다

자신은 업보(karma)를 신봉하는 사람이며 돈은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고 재산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참으로 존경스럽다, 이 나라의 재벌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골목골목마다 소상공인들이  하는 빵집이나 구멍가계(편의점)이나 해서 코묻은 돈 쉽게

벌 생각하지 말고 크게 외국 나가서 벌어올 생각이나 좀 하시면 안될까?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영등포에서 삽교가는 열차표

야심한 새벽의 영등포 역전앞(04:50)

새벽 3시 40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베낭을 챙긴 다음에 아들이 영등포까지 차를 태워줘

편안하게 도착하니 시간적 여유가 많이 남았다. 지난번에 해장국에서 바퀴벌레 나온 기억

때문에 식사를 편의점에서 도시락하나 사서 전자렌지에 데워서 아침을 해결하고 김밥 한줄과

컵라면 하나 소주와 막걸리 한병을 사서 베낭에 넣고 영등포 역으로 향한다.

역에 도착하니 아직도 대합실 문은 열지 않았고 여기저기 곳곳에 누워자는 노숙자들만 보인다.

장항선의 열차시간표

영등포역 플렛폼(05:47)

열차에 오르자마자 평소 습관대로 잠을 청하는데 옆좌석에 대학생인듯한 4명이

주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댄다. 그런데도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한 놈을 불러다가 훈계를 한다. 학생인 넘들이 다른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되느냐고

혼을내니 이내 조용해진다.  젊은이들도 문제지만 어른들도 문제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꾸짖어야 하고 正道로 이끌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으니...

요즘 학교 폭력 문제도 그건 잘못 가르키고 방치한 전적으로 어른들의 책임이 아닐까싶다

삽교역(07:34)

오늘은 1분의 연착도 없이 정확하게 삽교역에 도착하여 시간을 줄이기 위해 택시로

 육괴정(수덕고개)에 도착하여 산행을 준비한다.

육괴정(수덕고개:07:50)

2주전에 버스시간을 잘못알아 개떨듯이 추위에 떨어던 추억을 떠올리며 장비를

점검하고 산행에 나선다. 오늘은 날씨가 많이 풀리고 바람도 없는탓에 고어텍스

자켓을 처음부터 벗어서 베낭에 넣고 가벼운 폴리스 자켓만 걸친체 산행을 시작한다.

홀로가는 산꾼이 막아논 철조망쯤이야 간단하게 넘는다.

정맥길을 철조망을 막은  당신네들이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저 멀리 예산군 덕산면에 소재한 용봉 저수지와 수암산이 보인다.

이곳에 있는 삽교와 덕산은 삽교는 읍이고 덕산은 면인데도 불구하고

삽교가 덕산의 절반밖에 되질 않는다고 한다. 덕산은 유명한 덕산온천이 있어

유동인구가 많고 삽교는 마땅한 시설이 없어 자꾸만 사람이 준다고 한다.

이곳인 삽교와 홍성의 경계지역에 아마 충남도청이 이곳으로 이전해올 모양이라

거기에 많은 기대를 건다고 한다. (삽교 택시기사의 말)

지난번 구간을 지나온 저 멀리 홍성 백월산과 홍동산이 보인다.

저 멀리 홍성읍이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상왕산(개심사)-가야산(가야사)-덕숭산(수덕사)으로

 이어지는 내포지역 덕숭산과 가야산 일대는 한때 절집이 100개를 넘었을 정도로 ‘부처의 꽃심땅’이었다.

일제강점기 경허, 만공선사가 선풍을 일으킨 곳도 역시 이곳 내포 땅이었다.

스승인 경허선사는 활달하여 거침이 없었다. 만공은 따뜻하고 소탈했다. 경허는 끝내 이름을 바꾸고

저잣거리에 몸을 숨겼다. ‘어촌이나 주막집/어찌 숨을 곳이야 없으랴마는/

감출수록 그 이름 더 새롭게 알려질까/다만 그것을 두려워하노라.’

만공은 스승의 시신을 거두고 덕숭산에서 묵묵히 제자를 길렀다.

덕숭산 오르는 길은 수덕사의 영향인지 길은 상당히 좋다.

곳곳에 위치한 멋진 암릉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좌측에 백월산과 우측에 삼준산과 그 넘어 보개산과 태봉산도 보이고...

덕숭산(德崇山:495m:08:30)
수덕산(修德山)이라고도 한다. 금북정맥 줄기로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지점에 있다.

높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계곡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많아 예로부터 湖西의 금강산이라 불려 왔다.

문화재로는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수덕사대웅전(국보 49)과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

(修德寺盧舍那佛掛佛幀:보물 1263)이 유명하다.


수덕사에서 동쪽으로 4㎞ 떨어진 산 아래에는 덕산온천이 있어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많
이 찾는다.

그 밖에 유명한 비구니스님인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 입적했다는 비구니 도량 견성암(見性庵)이 있고,

산 정상에는 수덕사와 1,020개의 돌층계로 이어지는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1

973년 3월 덕숭산과 인근 가야산(伽倻山:678m) 일대가 덕숭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홍주 고을에 수덕이라는 도령이 살았는데, 어느 날 노루 사냥을 하는 도중에 멀리서 덕숭 낭자를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수덕 도령이 덕숭 낭자를 찾아가 혼인을 하자고 졸라대자, 덕숭 낭자는 절을 세워주면

혼인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리하여 수덕 도령은 절을 지었으나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은 탐욕 때문에

절이 불타 버렸다. 그 뒤 부처님만 생각하고 절을 다시 지어 결혼할 수 있었으나, 덕숭 낭자는 자신의 몸

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를 참지 못한 수덕 도령이 강제로 덕숭 낭자를 안는 순간 사람은 사

라지고 낭자의 버선 한쪽만 남았다. 그 자리는 바로 바위로 변했고 하얀 버선꽃이 피었다고 한다. 관음

보살의 화신인 덕숭 낭자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덕숭산’이라 하였고, 수덕 도령의 이름을 따서 사찰을

‘수덕사’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덕숭산에서 수덕사 앞 들녘을 배경으로 셀카로 인증샷을 남긴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곳은 인적의 흔적조차 없다. 그 대신에 박무가 끼긴

했지만 온 사방이 다 보인다. 가야할 가야산과 그 옆의 원효봉. 우측으론

덕산과 에산읍내까지 앞쪽으로 지나온 홍성의 백월산을 비롯한 모든 산들이...

산 아래 내려다 보이는 수덕사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 이란 노래 때문에 일반적으로 수덕사를 여승들만 기거하는 비구니

도량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건 아니다. 수덕사는 5대 총림중에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고 스님들이 합천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대찰(大刹)이다. 수덕사 내에 있는 비구(남자)

스님들이 계시는 정혜사가 있고 우리나라 3대 비구니(여자) 도량으로 유명한 견성암이 있다.

범여의 초등학교 선배이자 친구의 외사촌 누나인 운녀스님도 여기에 계신다.

출가하신지가 40년이 넘었으니... 이젠 거의 원로스님급은 됐겠지. 뵌지가 10여년이 다됐으니

시간이 되면 뵙고 인사라도 하련만 갈길이 멀기에 사찰을 향해 저두 3배의 예를 올리고 간다.

덕숭산 자락엔 천년고찰 修德寺가 자리하고 있다.

1308년에 창건되었의 그 역사가 700년이 넘는 수덕사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고, 

조계종  5개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자리하고 있다.
수덕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큰 산맥인 경허, 만공선사의 禪脈이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3德'이 모인 곳이라고 부른다.

산 이름 '德崇'과 절 이름 '修德', 마을 이름 '德山'이 바로 三德이다. 덕을 숭상하여

천년을 한결같이 덕을 닦아 덕이 넘치는 곳...

 

수덕사(修德寺)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이다.
창건이나 그 이후 역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절의 연혁을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백제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말에 경허(鏡虛)선사가 선풍(禪風)을 일으킨 뒤 1898년(고종 35) 그의 제자인 만공(滿空)
선사의 중창으로 번성하여 현재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5대총림(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의 한 곳이다.

 백제 말에 창건된 수덕사는 근·현대에 들어서서 경허 성우(鏡虛 惺牛) 스님을 비롯해

만공 월면(滿空 月面)·수월· 금오 태전(金烏 太田) · 벽초 경선(碧超 鏡禪)· 대의(大義)·

청담 순호(靑潭 淳浩)· 묘리 법희(妙理 法喜)·일엽 하엽(一葉 荷葉) 스님 등의 고승이

주석, 선(禪)의 중흥지로 뿌리내려져  있다.

 

 1984년에 덕숭총림(德崇叢林)을 개설한 수덕사는 종합수도도량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혜암 현문(惠庵 玄門)· 벽초스님이 었있다. 수덕사의 산내암자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을 비롯하여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선풍을 휘날리던 정혜사와

금선대 등이 있다. 수선도량으로서 수덕사는 선(禪)의 생활화와 선풍진작의 계승을 위해

 선실천(禪實踐) 수련대회를 갖는 등 일반인들에게 우뚝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경선(碧超 鏡禪)· 원담 진성(圓潭 眞性)스님 등이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수선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이어오고 있다. 또한 1996년에는 승가대학을 개설해 총림의 위상 제고에 힘쓰고 있으며

 일주문 밖의 상가 등을 정비하여 수행환경 정화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조사당(1377년)

강릉 객사문과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며 현존하는 건축물로 건축사연구는 물론 미술사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평가받는다.

 

수덕사 대웅전은 일제강점기 1937년에도 한번의 수리공사가 있었다.

대웅전 전각건물이 퇴락하여 일본인들에 위해 해체수리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리를 받치는 장여(長舌)와 화반(花盤)의 밑둥에서 발견된

'지대 원년 무신 4월 17일에 기둥을 세웠다(至大元年戊申四月十七日立柱)'는 묵서명을 통해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1528년(중종 23)과

1688년(숙종 14), 1751년(영조 27), 1803년(순조 3)에 각각 몇번의 보수공사

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삼존불

수덕사 대웅전에 봉안된 삼존불은 만행산(萬行山) 풍국사에서 조성된 불상을 1938년

남원 귀정사(歸政寺)에서  만공스님이 이운해왔다고 전한다. 풍곡사는 현존하지 않고,

귀정사는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현재는 복원되었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삼세여래를 협시하고 있는 보살입상은 문수와 보현보살이다.

수덕사 대웅전의 기둥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신전건축물의

기둥에서 보이는 엔타시스기법(고전건축에 사용된 기둥)과

그 맥을 같이한다. 기둥의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기둥의

지름이 커지다가 기둥높이의 1/3지점에서 다시 기둥의 지름은

좁아진 형태를 띠는데, 이를 일러 배흘림기둥(위와 아래는 좁고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기둥형태)이라고 한다.

건물을 보다 안정감있게 보이게 하려는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 만공 스님 존영

 

만공스님의 법문 중에‘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뚫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라는 법문으로 유명하다... 참 맞는 말이다. 스님이 민망스럽게 그런 법문을 하셨냐하겠지만

어쩌면 정곡을 찌르는 법문이 아닌가 싶다. 요즘 자꾸만 힘든 세상에 위축되고 어깨가 축

쳐진 남자들...가장(家長)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에 밤일인들 제대로 되겠는가?

어쩌면 나의 이야기인지도 모르지...아버지란...가장이란 이름아래 자꾸만 쪼그라드는 불쌍한 이 나라의 남자들이여... 애들한테 따돌림 당하고 마눌한테 눌려사는 불쌍한 신

세타령을 어느 누구한테 할 수도 없는 이 산꾼의 맘을 만공스님이 대신 해주는구료.

 

 
 
 
 
 
 
 
 
 
 
 
 
 
 
 
 
 
 
 
 
만공스님(1871~1946)은 만공(滿空)스님은 한국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성우(鏡虛 惺牛)스님의
전법제자로 일생의 대부분을 수덕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진작했던 고승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호가 바로 ‘만공’이다.

스님은 14살이 되던 1884년 동학사에 들른 경허스님의 인도로 충남 서산 청장사에서

 태허스님을 은사로, 경허스님을 계사로 득도했다.

만공스님은 경허스님으로부터 조주(趙州)의 무자(無字)화두를 들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스님은 이후 서산 부석사와 부산 범어사 계명암에서 경허스님을 시봉하며 정진하다가

1901년 양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 종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스님은 본사인 천장사로

 돌아와 1904년 경허스님에게 깨달음을 인가받고 전법계를 받았다. 이 때 받은 법호가 ‘만공’이다.

이후 스님은 전국 산천을 유람하다가 1905년, 예산 덕숭산에 금선대를 짓고 납자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1902년 초 선학원 설립운동을 일으켰으며, 선승들의 결사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의 지도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만공스님은 덕숭산에 머물면서 수덕사를 중창한 것을 비롯해 정혜사 능인선원과 비구니

선원 견성암을 개설하는 등 한국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수덕사 갈림길(08:40)

좌측 내리막길로 가면 수덕사이고 정맥길은 직진으로 하여 능선길로 접어든다.

이곳은 음지라 그런지 눈도 많이 쌓여잇고 얼어있어 미끄럽긴 하지만 새로산

등산화가 브레이크가 잘 걸리는 덕분에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스틱으로

조심조심해서 나본들 고개로 향한다.

이런 눈길을 이른 아침에 홀로 걸으니 정말좋다. 이 맛에 나홀로 산행을 즐기는가...

서산시 해미와 예산을 연결하는 시원스런 45번 국도가 보이고...

지금 내가 가야할 능선

급경사를 내려오니 이곳은 불이난 지역인지 나무가 어지럽게 넘어져 있고 길이없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워 이리저리 살펴서 정맥길을 찾아서 간다.

나본들 고개 내려서기 직전에 있는 묘지의 상석에는 좀 특이한 비문이 있다.

이건 좀 연구대상이 아닌지?

‘조선국 대고종 황제 4왕자의 후손이라’ 묘지를 내려서니 나본들 고개가 나타나고

좌측 방호벽 옆에는 버섯 종균장이 자리잡고 있다

나본들 고개(165m:09:10)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에 있는 고개로 해미와 예산을 잇는 45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으로 ‘남은들 고개’ 라는  말에서 유래되어 변음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사람들은 풍구고개라고 부른다. 

이곳이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나본들 국도에서 바라본 내가 오늘 가야할 좌측의 가야산과 우측의 원효봉

이곳에서 지하차도로 돌아서 오려면 최소한 10분이상 지체되기에... 차량이

그리많치 않아 간단하게 무단횡단으로 길을 건넌다.

길을 건너니 45번 옛날 국도가 나타나고 고려한식부페라는 음식점 좌측

절개지로 올라서서 밭길 가운데로 걸어간다.

45번 옛날길

고속도로보다도 더 시원하게 뚫린 신국도에 옛 영화를 내줘 버리고...

양쪽에서 갉아 먹으면서 들어오는 정맥길은 이곳도 곳 없어질 모양이다

밭길을 지나니 쥔장이 가지말라고 길을 막아놨다. 그렇다고 가지않을 정맥

산꾼은 하나도 없을듯 싶고...

며칠전에 눈이 왔는데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는지 사람의 발자국은 없고

혹 홀로가는 산꾼이 길을 잃어버릴까봐 착한 짐승들이 가이드 역할을 한다.

눈덮인 조그만 대밭도 지나니...

밤나무와 두릅나무가 있는 임도를 지나고...

조금 올라가니 컨테이너가 하나있고 그 옆에는 시골에서는 꽤나 잘지어진

황토로 지은 집이 한채 나온다. 은행나무를 끼고 밭가운데를 지난다.

대나무 사이를 지나 경주이씨와 청주한씨 합장묘를 지나서 다시 등로로 접어든다.

이곳도 초입에는 임도 수준의 좋은길이 나타난다.

조금 오르니 너덜지대 비슷한 암릉구간이 나타나고 약간의 힘을 뺀다.

이곳에서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지난 가을 금남구간 계룡산 천봉에서 만난

김해의 홍길동 아우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그 먼 남쪽지역에서 이곳을 산을

헤매고 있으니... 하였던 경상도 사람들의 산사랑 대단혀요

뒷산 갈림길(09:35)

정맥마루금은 우측으로 90도를 꺽어져 내려간다. 이곳은 음지라 그런지

눈이 꽤나 많이 쌓여있고 상당히 미끄럽다. 스틱과 나무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 경계가 되는 뒷산능선으로 여기서 만난

해미면은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운산면을 접하며 일락산까지 이어간다.

뒷산(449m:09:37)

충남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 뒤에 있는 산으로 지도상에는 뒷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느 산꾼이 갈산지맥이란 이정표도 표시해놨다.

뒷산에서 갈라져 갈산면 방향으로 뻗어 연장이고개-삼준산-계봉산-

갈산초등학교까지의 마루금인듯 하다

저 멀리는 산하나가 통채로 떨어져 나가는듯한 느낌이다. 인간의 탐욕이란....

뒷산을 내려와 402봉과 385봉으로 고도를 낮추더니 한티고개가 나타난다.

한티고개(307m : 09:50)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을 잇는 고개로 예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꽤나 많았다고 한다.

넓고 커다란 고개라고 한다. 신유, 기해, 병오, 병인년 박해 등 조선 후기에 천주교 박해기간

동안에 이곳 내포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고을 포졸들이 압송해가던 고개로

천주교의 성지순례의 고개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넓고 큰 고개가 아닌

한이 맺힌 고개라고나 할까. 넓은 공터엔 나무 십자가가 있고 화장실과 정자가 설치되어 있고

곳곳에 천주교의 기념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서산아라메길 안내도도 있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천주교 기념물

좌측으론 천주교 해미순례성지 도보길도 보이고...

한티재엔 서산 아라메길 안내도도 있고...

가야산 가는 길에서 바라본 한티재의 모습

가야산 오르는 길 좌측에는 오늘도 열심히 산을 갉아먹는 태양석산과 대일석산이라는

2개의 업체가 기계의 굉음소리가 산 전체가 울릴 정도이다.

이른 새벽에서 편의점에서 먹은 도시락 땜에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배가 고프다.

바나나 한개와 커피 한잔의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뫼솔 산악회의 최대장과 선두 2명이 같이 올라온다. 한분은

2년전 낙남정맥을 같이 하신 분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주력이 엄청나신 분들을

보내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길을 나선다.

411.2봉(10:30)

억새가 가득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폐헬기장을 지나니 아무런 표시가 없는체

어느 산꾼이 초록색 펫트병으로 표시를 해논 411.2봉이 나타난다.

한서대학 갈림길(10:32)

한서대학교 푯말이 있고 지도를 보니 좌측으로 361m봉-상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있다

 정맥마루금은 우측직진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조금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눈이 제법 쌓여있다.

우측으로 예산군 덕산면과 지나온 덕숭산이 보이고 시원스런 45번 국도도...

서서히 가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도 화마가 지나갔는지 불에 탄 소나무가 불탄체로 여기저기 쓰러져 있고

소나무를 대신하여 갈참나무와 억새들이 자리잡고 있어 걷기가 심히 불편하다.

얼굴이 할키고 베낭이 걸리고 자꾸만 시간이 지체된다.

485봉이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오늘 내가 가야할 석문봉과 일락산 방향도 보이고...

저 멀리 해미면 소재지도 보이기 시작하고...

진행중 좌측으로 한서대학교와 산수저수지가 발아래 가까이 다가오고...

내가 오늘 지나온 금북정맥의 능선들... 덕숭산이 자꾸만 멀어진다.

가야산 안부에는 발목이 묻힐만큼 눈이 쌓여있다. 암릉이라 걷기가 힘이든다.

이 아래에는 산삼을 심어놨다는 표시와 함께 경고문도 붙어있다.

너무 걱정마소... 정맥 산꾼들은 그런데 관심도 없고 산삼과 도라지를 구분 못하는

산꾼도 의외로 많으니  신경을 안쓰셔도 좋을듯 하오

자꾸만 눈의 양이 많아진다... 걷기도 불편하고

원효봉 갈림길(11:35)

가야산 정상은 KT중계탑과  KBS 송신소 그리고 대전방송국 송신소가 가야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어 원효봉 갈림길에서 좌측을 돌아서 겨우 정맥을 이어간다.

主客이 전도되어도 한참되었다. 언제가지 이런 짓거리를 할것인가? 그럴려면

우회로라도 제대로 만들어 주던지... 울화가 치민다.

정상을 시설물에 빼앗긴  가야산(伽倻山: 678m)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운산면, 해미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방송시설과

통신사가 점령하고 있는 주봉인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605m), 석문봉(石門峰:653m)

옥양봉(玉洋峰:593m) 등의 봉우리가 있으며 신라시대에는 가야사를 짓고 중사(中祀: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 덕산 현감이 봄, 가을로 고을 관원을 시켜 제사를 올렸던 곳으로

능선을 따라 피어있는 진달래와 억새의 경치가 수려하다. 덕숭산(德崇山)과 함께 1973년 3월에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제때는 상왕산(象王山)이라 불렀는데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에

이 산밑에 가야사를 창건한 뒤에 가야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흔히들 가야산이라고 하면 합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곳 가야산도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유난히 불교유적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다.

국보급 문화재인 일명 ‘백제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해 보원사지

명암사지,명종대왕태실, 개심사, 일락사, 문수사, 송덕암 등 명사찰과 명소들이 모두

이곳 가야산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

길이없는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는 마루금을 따르지 못하고 좌측  우횟길로 들었는데 잡목이 엉켜있는데다

길까지 거칠고 눈으로 인해 미끄럽다.. 
철조망 안쪽에서 버린듯한 폐타이어를 비롯한 온갖 쓰레기들로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

지뢰밭 같은 우횟길로 뒷쪽 암릉을 타고 오르니 진행방향으로 석문봉과 그 우측에 옥양봉이 우뚝하다.

산 정상을 점령했으면 피래미 뭣만큼의 양심이 있으면 우회 등로라도 좀 만들어주던지...

길을 헤쳐나가는데 난감하기가 그지없다.

암릉에 쌓인 눈에 미끄러지고... 철조망에 옷이 찢어지고 피해(?)가 많다.

천신만고끝에 데크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논 곳에 오니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서

올라오는 전망대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내가 가야할 칼날능선같은

석문봉과 저 멀리 일락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물한모금 마시고

휴식을 취한다. 지금부터는 상가리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과 석문봉에서

오는 등산객이 꽤나 많다. 거기다가 뫼솔산악회의 정맥꾼과 어울려 산행을 한다.

낙남과 백두대간 호남정맥을 같이한 안면있는 산꾼도 많이 보인다.

가야산 정상 표지판이 있는 데크목에서 내포지역을 배경으로...

내포(內浦)는 ‘내륙 깊숙이 들어앉은 포구’를 말한다. 오늘날 태안,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등

 가야산을 중심으로 열 고을이 바로 그곳이다. 아산만, 가로림만, 천수만에 연결된 하천을 통해

 내륙 깊숙이까지 뱃길이 닿았다. 중국의 불교문화가 이곳을 통해 곧바로 백제에 밀려들었다

.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예산화전리 사면석불 등이 바로 그 흔적이다.

 

당시 내포지역은 한반도의 불교문화 선진지역이었던 것이다.  이곳을 통해 백제의 불교가 일본으로

건너갔고  천주교가 이곳 내포지역으로 들어왔던 곳이다. 그리고 내포지방은 일본 천황가의 뿌리나라(根國)

라고 한다. 백제가 망하자 백제의 왕족들이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황실을 건설했다고 한다.

정상을 빼앗긴 채 정상석 하나없이 산꾼들이 설치한 가야산

내포(內浦)는, 충남 아산에서 태안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을 총칭한다.

 

내포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언급된 용어로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청양 지역을
말하며 이 지역에서 태동한 문화를 '내포문화'라고 하는데, 조선후기의 서경덕 이지함 홍가신 등

많은 실학자를 배출했고, 천주교 성지 또한 이곳에 집중된 것 또한 이 지역 사람들의 경직되지 않고

진취적인 사상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가야산 데크목에서 바라본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의 모습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동쪽 기슭 상가리 오얏골에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는

흥선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이구의 묘가 있다.

 

대원군이 부친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으로 이장한 후 두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인 즉,

흥선 대원군은 무너져 가는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방법을 명당에서 찾기로 하고, 10여 년간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다가 지관인 정만인을 만나게 되고,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부탁하니 그가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자리가 있으니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이고,

광천 오서산에 만대에 걸친 영화를 누리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느냐" 하니 흥선은 이대천자지지를 선택한다.

흥선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에 이르러 연천에서 상여가 운구되어

오는데 상여가 도착하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동원되었고 마지막으로 상여를 내린 마을이 광천리 남은들 마을이다.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는 명당에 남연군의 묘까지 이장한 후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까지 보위에 오르게 되니 남연군의 묘터가
예언대로 이대천자지지임에는 확실하게 맞은 셈이다

가야산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석문봉으로 향한다 우측의 덕산면이 계속

따라온다. 저 지역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김정희영정 (金正喜影幀)

 

한국사에서 19세기 최고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篆刻) 또한 최고의 기술을 가져

천재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추사의 고택의 전경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어릴 적 이름은 원춘(元春)이다. 김정희만큼 호가 많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외에도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천축고(天竺古先生) 등 생전에 100여 가지가 넘는 호를 바꿔가며 사용했다.

 

천재의 출생이니만큼 탄생 일화가 없을 리 없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이 아닌 24개월 만에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어날 무렵 시들어가는 뒷산 나무들이 아기 김정희의

생기를 받아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탄생일화는 천재를 포장해주는 이야기일 뿐이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정희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더불어 조선후기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한진은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 인물이다.

 

김정희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실사구시’로 요약할 수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청나라 고증학자 고염무가 주창한 것으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김정희는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문학에 대한 식견도 괄목할 만한 정도였다. 일식과 월식 현상 등 관측에 근거하여

 서양천문학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제주도 유배기간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최고의 걸작품인 ‘세한도’도 이 시기에 그려졌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이다.

609봉(11:55)

멋진 모습의 암릉이 정맥길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도 아주 멋진 모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로프도 있어서 평소같으면 기필코 올라 갔으련마는

오늘은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고 가야할 길이 너무 멀고하여 우회로 돌아간다.

지나온 가야산의 모습 그 뒤의 원효봉이 아쉬운지 자꾸만 눈길이 간다.

또다시 멋진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위에 소원을 비는 돌멩이 하나를 얹어놓고 간다.

석문봉가는 이정표

어머니가 두팔을 벌려서 아들을 안으려는 시늉을 하는 소나무(범여의 생각중에서)

석문봉 올라가는 길

능선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등산객을 보니 갑자기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석문봉(石門峰:653m:12:20)

석문이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혀진 봉우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과 운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인근의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덕산도립공원에 속해있는 암릉의 산이다. 가야봉으로 부터

북쪽으로 1.7km정도 떨어져 있고 일락산과 가깝다.  석문봉을 정점으로 옥양봉과 일락산

사이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용현계곡에는 산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역내(驛川)는 이곳 석문봉에서 발원하여 서산시로 흘러 당진읍,고대면, 정미면을 걸쳐

퇴적평야를 이루며 기름진 평야지대가 형성되었다. 전망이 매우좋아 남쪽으로는 가야봉과

옥양봉, 북서쪽으로는 일락산이 있고, 서쪽인 해미로는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동쪽 아래의 넓게 형성된 골짜기에는 예산 가야사지(伽倻寺址:충남기념물 150호)가 있다

정상석 뒷면에는 "내포의 정기 이곳에서 발원하다"가 새겨져 있다.

산 정상에는 서산 해미산악회가 백두대간 종주를 기념하는 돌탑이 있고

우측으로 석문지맥이 시작되는 분기봉이기도 한다.

석문지맥 분기점

석문지맥은 안성 칠장산에서 태안의 안흥진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충남 서부의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과 운산면 등 3개면이 만나는 석문동에서 북동쪽으로 기수를 돌려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의 아산만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말한다.

 

도상거리는 약 48.3km이고 석문봉(石門峰:653m),옥양봉(玉洋峰:621.4m), 서원산(書院山:472.7m)

오봉산(五峰山:225.3m), 몽산(夢山:290m), 135.2봉, 국사봉(國師峰:148m), 오룡산(五龍山:114m)

철마산(鐵馬山:91.8m), 망객산(望客山:64m), 아굴산(42.1m), 석화산(石花山:46.4m) 등을 지난다.

산줄기의 동쪽이나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덕산천, 효교천, 대천천, 남원천으로 흘러들어 결국

삽교천으로 흘러들어 아산만에 이르고 북쪽이나 서쪽의 물은 대방들천, 백석천, 서원천이 되어

황해로 스며 들거나 일부는 아산만으로 흐른다.

석문봉을 뒤로하고 일락산으로 향한다.

석문봉에서 내려오는 길은 눈이 많은 사람들이 밟아놔서 미끄럽다.

조금 내려오니 커다란 평상이 하나있고 뫼솔 산악회 식구들이 점령하고 점심을

준비한다. 안면이 많은 친구들이 꽤나 많아서 꼽사리 끼여 같이 점심을 먹는다.

당일 산행팀이라 그런지 하였턴간에 베낭에서 엄청나게 먹거리가 많이 나온다.

닭똥집에다, 김치찌게, 막걸리, 맥주, 소주, 귀한 진도홍주까지... 거기다가

호남정맥을 같이한 낡은모자님은 소고기를 가져와 구워서 맛있게 ...

느긋하게 1시간의 식사시간을 끝내고 난 가야할 길이 멀어 먼저 출발을 한다.

사잇고개(13:25)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을 잇는 고개로 이곳까지 아마 차량이 올라오는 모양이다.

좌측으로 일락사 가는 방향이고 우측은 용현계곡 휴양림 내려가는 곳이다.

이곳은 산에서는 보기힘든 솟대가 설치되어 있고 시를 쓴 비석도 보이며 간이의자도 있다.

 저 아래에 일락사와 항락 저수지(서산시 해미면 소재)도 보이고...

사잇고개에 설치되어 있는 솟대와 시비

우측 용현계곡 내려가는 길은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고 정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부터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무르티고개까지는 올래길이나 지리산 둘레길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편안한 길이다. 우측으로는 여태껏 같이해온 예산군 덕산면과 이별을

하고 서산시 운산면으로 접어들면서 정맥길도 서산시로 접어든다.

일락산(日樂山:521m:13:45)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덕산도림공원에 속하며 석문봉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의 산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고 정상에도 정자하나 달랑 있는것 외는

별 특징이 없는 산으로 석문봉으로 오르는 중간지점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산의 북쪽에는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 8년(648년)에 혜감대사가 창건한

개심사가 있고 서쪽 계곡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일락사라는 비구니 도량이

자리를 잡고있다. 문화재로는 개심사대웅보전(보물 143호)과 주변에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상, 보원사지, 보원사 5층석탑이 있다.

보원사지 가는길

서산 보원사(普願寺) 터는 서산마애삼존불과 가깝다.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하다.

산에 빙 둘러싸인 강당계곡 ‘너른 우묵 땅’이다. 장대한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 화엄 10찰의 하나였다. 의상대사가 이끄는 화엄종은 통일신라의 통치이념이다.

수준 높은 내포지역의 백제 유민들은 웬만한 불교 종파에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통일신라로선 우선 내포지역 백제 유민들의 마음부터 사로잡아야 했으리라.

 

보원사는 서산마애삼존석불 개심사 가야사 사이에 놓여 있다.

 백제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절집과 마애석불 사이에 통일신라가 새 절을 지은 것이다.

 스님이 한때 1000명이 넘었다니 통일신라의 관심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청정계곡인 용현계곡의 모습 우측 능선에 옥양봉이 있다.

국보 제84호 서산마애삼존불상 표시석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자리잡고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중앙에 석가여래 입상을 기준으로

 왼쪽에 제화갈라보살 입상, 오른쪽에 미륵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 백제 후기의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자연 암석에 선을 새겨 넣거나 도톰하게 솟아오르도록 다듬어 만든 불상을 말한다.

 

삼존불은 6~7세기 동북 아시아에서 유행한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입상 보살과 반가 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중국이나 일본, 고구려, 신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 불상은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2.8미터의 거대한 불상으로 단정하고 유연하게

조각된 솜씨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용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충남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 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백제의 수도인 부여로 가던 길목이었다.

 

6세기 당시 불교 문화가 크게 융성하던 곳으로 서산마애삼존불상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보통 백제의 불상은 균형미가 뛰어나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귀족 성향의 불상과 온화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서민적인 불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민적인 불상의 대표적인 예가

서산마애삼존불상이라고 하겠다. (서산마애삼존불상 안내문 내용 인용)

석가여래가 미소

내포 땅엔 어디에나 돌미륵부처가 널려 있다. 길가에 배시시 웃으며 서 있다.

낡은 민가 귀퉁이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헌헌대장부 얼굴로 우뚝 서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누가 말 걸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천년만년 산처럼 바다처럼 서 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경주남산을 ‘절집들이 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고, 탑들은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 같이 줄지어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고 표현했다. 경주남산 40여 골짜기엔

 절터 122곳, 돌부처 57개, 돌탑 64개, 왕릉 13곳, 고분 37곳이 남아 있다.

내포 가야산 주변의 절집과 탑들도 경주남산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나같이 무성한 잡초와 나무에 묻혀 있다.

망한 나라 백제의 운명과 닮았다. ‘목 없는 불상’이나 무너진 탑조차 찾아볼 수 없다.

주춧돌 등 땅바닥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서산 01-21 119 구조목이 있는 Y삼거리에서 좌측 오르막으로 진행한다.

편안한 길을 걸어가고...

삼거리 갈림길

 마루금은 보원사지방향의 표시가 있는 우측임도를 따라간다.

 좌측은 해미면 황락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있다.

임도삼거리

 마루금은 좌측의  편안길의  보원사지/전망대 표시가 된 이정표 방향으로 진행한다

 우측 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임도쪽에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

 마루금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앞쪽에 전망대 육각정자가 있어서

 올라갔더니 전망대 육각정자를 만들어 놨지만 주변 나무를 정리를 안한 탓에

조망은 전혀없고 실망만 하고 다시 내려온다.

개심사 입구(14:05)

개심사(開心寺)

예산 수덕사, 공주 마곡사, 부여의 무량사와 함께 충남의 4대사찰로 꼽히는

개심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로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신검당과 무량수각이 있고 정면에 안양루가 있는 표준형으로 지으진 아주 소박하고 단아한 사찰이다.

 

654년(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惠鑑)가 절을짓고 개원사(開元寺)라하다가 고려 충정왕 2년(1350년)에

처능(處能)스님이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불렀다고 한다

 

개심사(開心寺)는 ‘마음의 문을 여는 절집’이다. 소박하다.

심검당의 ‘구불퉁한 기둥’이 자연스럽다.

경허와 만공선사도 이곳 개심사에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654년(무열왕 1)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할 당시에는

 개원사(開元寺)라 했는데, 1350년(충정왕 2) 처능대사(處能大師)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라 했다고 한다.

1484년(성종 15)에 대웅전을 중창했으며 1740년 중수하고 1955년 전면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구릉형을 따르면서도 산지형(山地形)으로 변천한 일탑형(一塔型) 가람배치를 보인다.

평탄한 지역에서 북으로 자연계단을 오르면 3단 가량으로 조성된 평탄한 사지(寺址)가 보인다.

 2단에 안양루(安養樓)가 남면(南面)하여 서 있고 중정(中庭)으로의 입구는 안양루와

 무량수전(無量壽殿) 사이의 협소한 가설문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尋劍堂)과 무량수전이 있고 정면에 안양루가 있는 표준형이다.

이외에도 명부전(冥府殿)과 팔상전(八相殿) 등의 당우가 남아 있다

358.8m봉(14:15)

 편안한 등로를 지나는 좌측에 자리하고 있어 관심을 갖지 않은 산꾼들은 모두 다

그냥 지나쳐 버린다.  관심을 갖고 올라가니 4등 삼각점(당진 447)이 있고  국립지리원의

삼각점 표시판이 붙어있다. 다시 되돌아 와 편안길을 내려온다.

쉼터 안부

벤치 안부에는 등산객 서너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정표와119 구조목이 있는 쉼터에서 좌측으로 90도를 꺽어서  좌측 임도방향으로 내려서니 

수많은 표지기가 길라잡이를 하고 있다 쉼터에서 좌틀 임도따라 S자로 두번 꺽어 내려와

 진행하여 다시 목장 임도와 만나 직진 진행임도를 잠시 따르자 마자 삼화목장 초지와 만나고

 초지를 좌측에 두고 우측에 있는 목초지 경계 철책을 따라 진행하며 초지 능선을 지난다.

삼화목장 초지 능선을 계속해서 지나가야 하고...

초지를 걸으니 저 멀리 용비저수지도 보이고 초지에는 토끼똥과 이름모를

짐승들의 분비물이 초지에 어지럽게 널려있다.

초지끝에서 철조망을 넘어 다시 등로로 접어든다.

상왕산방향 표식 아크릴판이 있는 삼거리에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 숲길로 진행한다

 초지와 헤어져 6분여 임도를 따르다 만나고 무심결에 임도따르다가는 알바하기 딱 좋은 곳이드라

느긋하게 걷다가 갑자기 능선으로 오르니 힘이들고... 낙엽이 가득한 길을 걷는다.

상왕산(象王山 309m :15:05)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위치한 산으로 정상에는 2등삼각점(△ 당진 28 1985 복구)이

설치되어 있다.

309m의 별 특징없는 봉우리를 '임금왕(王)'자까지 붙혀 이름 지은 것을 보니 보통산은 아닌 것 같아

확인해보니 상왕산이 조선시대 12대 진산중 하나였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상왕산이란다.

그러나 산위에 오르니 특징없는 그냥 밋밋한 산이다. 다시 길을 떠난다 .

상왕산 삼각점

280봉(15:10)

상왕산에서 출발한 지 5분만에 280봉에 도착한다.

산친구 산악회에서 코팅지로 붙여논 280봉을 확인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NO  119번 송전탑을 지나고...

우측으론 호수만큼이나 큰 고풍 저수지가 나무사이로 보인다

이곳에서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정맥길로 향한다.

철사줄이 쳐진 울타리를 따라 한동안 진행을 한다

206m봉

 206봉 삼거리에서 90도를 꺽어 좌측  내림막 등로로 진행을 한다

 철사줄 울타리에 수많은 표지기가 메달여 있어 알바는 안하겠드라

206m봉에서 7~8분여 내려서는 앞쪽에 송전탑이 있고 좌측에 목장 임도가 보이고

 좌측으로 목장임도따라 진행을 한다.

넓은 삼화목장은 계속같이 정맥길과 같이 한다.

조금 내려서니 엄청나게 많은 소나무들이 한결같이 북쪽으로 쓰러져 있다.

다시 삼화목장 안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다시 임도길로 접어들어 등로를 지난다.

또다시 수레길로 접어들어 목장초지로 향한다.

저 멀리 서산시내가 조금씩 보인다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문이 굳게 잠겨있어 우측으로 우회하여 임도로 올라선다.

목장내 콘크리트 도로로 나오고...반사경 우측 숲길로 들어서 앞쪽에 보이는 No114 송전탑을 향해 오르고...

목장내부의 축사모습

송전탑을 지나자 마자 희미한 좌측의 숲길로 무조건 진행하면...

파란색 축사지붕이 보이는 철사 울타리가 나오고...

철사 울타리를 통과하여 우측으로 돌아나와 어수선한 목장 임도를 2분여 따르다

목장내 콘크리트 도로와 만나 도로따라 우측으로 계속 진행을 한다.

소똥이 잔뜩 퍼놓은 도로를 지나고...

삼화목장의 모습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 위치한 목장으로 삼화목장보다는 김종필 목장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一人之下 萬人之上이었던 전 국무총리는 난데없는

목장개발계획을 들고 나와 조선시대 12진산(鎭山)의 하나였던 상왕산의

울창하던 숲을 베어내고 638만 평의 이 나라 최대의 목장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5공시절에 불법재산축적이라는 판결을 받고 국가에 헌납(?)을 했다.

현재는 축협에서 씨소를 키우고 있는 목장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이곳의 목장면적이 여의도의 5배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는데만도 1시간 반이상 걸린다. 

 목장을 빼앗기고 속이 울매나 아플까. 너무 속쓰려 하지마소.

‘초발심자경문’이란 책에보니 이런 글귀가 나옵디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 삼일의

 마음 수양은 천 수레의 보물과 같지만 백년을 탐해서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의 티끌과 같으니라.

 죽을때 입고가는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다고 하지 않았소

어차피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껀데 뭐.

돈많은 이병철, 정주영회장도 동전한잎 가져갔다는 소릴 듣지 못했소

마음 비우고 사소 버리는 만큼 편한 삶은 없지않소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내려오니 목장에서 출입을 금지라는 철문이 있다.

간단하게 우회하여 나오니 목장 가운데를 지나는 가루고개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뫼솔산악회의 버스가 기다린다.

낡은모자님이 같이 가자면서 이곳에서 산행을 접어라고 성화이다.

난 가야할 길이 멀어 그냥 길을 떠난다

가루고개(16:00)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소중리와 용장리를 잇는 647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목장안 시멘트 길을

따르다 닫혀있는 문을 옆으로 빠져나와  내려서니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는 가루고개다.

고갯마루에는 소중1리를 알리는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있다.

진행방향에도 초지가 조성되어 있다.

초지 옆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니 능선 삼거리가 나온다.

이 도로에서 우측으로 올라간다.

삼화목장은 여기서 이별을 한다. 약 2시간을 삼화목장과 함께 해온다.

참으로 엄청나게 큰 목장이다. 황토길을 올라서니 여러기의 묘지가

나타나고 편안한 등로를 지나니 요란한 자동차소리가 들리면서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타난다.

삼화목장 끝머리에서 바라본 서산시 운산면의 전경

서울과 목포를 잇는 서해안 고속도로

모래고개(16:20)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위치한 모래고개는 정규도로는 아니고

콘크리트로 포장한 농로수준이다. 마루금은 절개지를 따라 내려서다

고속도로 아래로 난 통로를 따라 서해안 고속도로를 건너 이제 마지막 봉우리
동암산을 향해 맞은편 나무계단으로 올라 고속도로를 우측에 두고 산으로 든다.. 

고속도로 지하통로를 지나니 호화로운 주택을 좌측에 두고 우측 통로로 오른다

계단을 오르니 다시 편안한 등로가 나타난다.

저 멀리  서산시내와  성암저수지위에 떠있는 해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173봉

 벤치2개가 있는 쉼터 공터봉우리가 나타나고...

능선의 안부는 마치 길이 고글처럼 생겨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온다.

동암산(銅岩山 176.3m:16:40)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와 가좌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한참만에 나온 정상에는 벤치와 체육시설과 정맥꾼들이 걸어놓은 코팅지가 있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오래된 삼각점이 있는 동암산은 고작 176m 밖에 안되지만
이름으로 보아 주변에 광산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마지막 산이다. 이제 서서히 해는 서산으로 저물고 있다

 

우측에 노란 지붕의 집이 보이면서 도로가 보인다.

묘비없는 묘역을 지나고 다시 좌측에 경주최씨 묘역을

지나 내려서면 무르티 고개가 나타난다

무르티고개(16:50)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과 음암면을 잇는 고개로 서산에서 당진으로 잇는

32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663년 백제의 부흥운동때 부흥운동군이 주류성(周留城)에서

패한후 그의 가족과 같이 최후로 모여 있었던 곳이 '무테' 였는데 '무티울' '무르티고개' 등은

바로"무테"에서 얻은 것이 아닐까 추정이 된다

갈산1리 버스정류장이 있는 오늘 날머리 무르티 고개.
고갯마루에는 주유소가 있고 뒷편에 서해컨벤션웨딩홀이 있다.
건물의 몰골로 봐서 아마 웨딩타운과 주유소가  영업을 하지 않는지

먼지가 자욱하고 인기척이 전혀없다.

32번 엣날 국도의 모습

무르티 고개 버스 정류장

이곳에서 스틱을 접고 베낭을 정리하는 사이에 버스가 지나가 버린다.

해는 저물고 갑자기 걱정이돼 옷을 갈아입고 히치 하이킹을 시도하는데

한번에 지나가는 트라제 승합차가 서서 운산면 차부까지 태워준다

복받을겨

경기 46거4762 승합차가 운산면 차부까지 태워준다.

내가 그렇게 안쓰러워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혼자 무슨재미로

산을 다닌다고 묻는데 이럴땐 어케 대답을 해야하나 난감하다.

운산에 도착하니 타고온 승합차 바로뒤에 서울가는 버스가 따라온다.

버스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얼른가서 표를 사서 버스에 오른다.

차를 태워준 승합차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차를 태워준 보시공덕 세세생생 복받을겁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서 서울오는 버스표

서울 남부터미널(18:50)

운산에서 차를 타자마자 차에서 잠에 떨어진다.

서울에 도착하니 허기가 진다. 개포동으로 와서 순대국에다

소주 한병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깊은 잠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