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2. 3. 11
☞ 산행날씨 : 맑은 날씨,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에 무척 고생
☞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6.7km : G.P.S 거리:27.58km / 8시간 30분 소요
☞ 산행코스 : 수랑재-물래산-팔봉중교-공동묘지-삼원농장-중말-굴포운하지-하창마을-인평3리 마을회관-도루째
소한말-도내1리-북창마을-붉은재-오석산-130봉-백화산-돌탑-모래기재-태안여고-예비군부대 정문
퇴비산-차도고개-유득재-시목구판장-도루개-88봉-우렁각시탑-쉰재-장재
☞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인지면, 팔봉면 / 태안군 태안읍, 원북면, 소원면, 근흥면
春來不似春이라... 오늘 같은 날에 꼭 어울리는 단어다.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아파트 단지의 차량위에는 잔설이 꽤나 쌓여있다.
벌써 3월중순이고 春分도 열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날씨가 제 정신이 아니다.
하긴 요즘들어 인간들이 제 정신이 아닌데 날씨인들 제 정신일까?
다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며칠전 모 진보정당 비례대표 후보인 28살의
젊은 처녀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는 해군을 해적이라
부르지 않나... 이게 무슨 망발인가? 니가 군대 문밖이나 갖다 와봤어
데모로 해서 이름 좀 날리더니만 이제 公人이 되었으면 말도 가려해야지.
아무리 현 국가정책이 본인의 뜻에 맞지않는다고 국가를 수호하는 군인을
해적이라니...저런자를 진보정당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하는 정당도 문제구나.
요즘은 정신나간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 같은데 80%이상 침묵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좀 귀울려었으면 한다. 제발 맑은 정신으로...
오늘(3월 11일)이 성철스님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성철스님이시여! 요즘 무지몽매한 衆生들에게 생전에 내리시던
추상같은 당신의 불호령으로 정신을 차리게 해주소서...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아파트 단지에 내린 눈
새벽 4시에 일어나 샤워를 끝내고 베낭을 챙겨 아파트를 나선다.
바람이 차갑게 불어오고 밤에 눈이 왔는지 차량들 위에는 잔설이 쌓여있다.
이렇게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는 3월 중순에 들었건만 몽니를 부리고 있다.
강남고속터미널 지하철역(05:07)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고속터미널역에 도착하여 새벽 고속버스
탈때마다 끼니를 해결하는 김밥천국집에 들려 아침을 먹으러 간다.
낙지덮밥
이곳은 대체로 음식값이 저렴한 편이다. 강남에서 6000원을 안가지고 밥한끼
해결하기 어려운데 이곳은 거의 4500원 이하이다. 낙지덮밥이 4500원 먹을만하다.
식사후 모닝커피까지 한잔하고 느긋하게 고속터미널로 향한다.
서울행 서산발 고속버스 티켓
서울에서 서산가는 고속버스(06:00)
평소에 습관대로 차에 오르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진다.
차는 서해대교를 지나 서산I.C를 빠져 나오면서 잠에서 깬다.
차창밖의 논밭에는 밤에 내린 눈으로 인해 하얀 세상으로 변해있고
차창밖에 보이는 가야산과 석문봉, 일락산 등에도 눈으로 덮혀있다.
서산 공용터미널(07:20)
버스는 서울에서 출발한 지 1시간 20분만에 서산에 도착한다.
이른 새벽이라 빨리 온 모양이다. 이곳에서 태안가는 버스를 타고 수량재로
가야하는데 다음 차시간이 07:55분이라 35분을 대합실에서 기다린다.
대합실을 어두컴컴하고 추워서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산행후에 태안에서 서울로 올라갈 버스시간표를 확인하고...
태안가는 버스(07:55)
태안가는 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수량재에 내려 달라고 부탁을 하니 수량재가
어디냐고 오히려 반문을 한다... 그러면 차1리에 내려달라고 하니 거기도 모른단다.
또다시 서산 예비군 부대앞에 내려달라고하니 그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런...싸가지하고는 지난번 날머리에선 분명히 이정표에 ‘수량재교차’로라고 되어
있는걸 봤고 차1리 정류장도 봤는데... 봉사정신 개념도 없는 이런자가 운전을 하다니...
오늘의 들머리인 수량재(08:10)
차1리의 마을
버스에서 내려 32번 국도를 무단횡단을 하면 10분정도의 시간을 버는데 아무래도 서산에서
태안과 안면도쪽 가는 차량이 많아 부득히 지하차도를 통과하여 차리1리로 간다.
마을 뒤에 태풍으로 인해 나무를 베어버린 곳이 물래산이다.
장비를 점검하는 사이에도 손이 엄청시렵다. 해가뜨면 기온이 올라가는 법인데도
오히려 바람은 더 거세시고 기온이 더 내려가는 기분이다.
굴다리를 지나서 우측으로 올라서니 송림씽크 공장이 보이고...
송림씽크 공장을 지나서 비닐하우스를 끼고 좌측 콘크리트 임도로 올라선다.
잠시후에 주택이 정맥길을 점령하는(?) 바람에 밭을 돌아 숲으로 접어드니 쓰러진
나무로 인하여 등로는 엉망이다. 초반부터 고생길이 접어드는 느낌이다.
이윽고 편안한 임도를 따라 배수장까지 편하게 올라선다.
차1리를 비롯한 이 지역의 상수도물을 공급하는 배수장
서산시 인지면의 모습
배수장을 지나고 간벌지역을 넘어 올라서니 물래산이 나타난다.
물래산( 145m : 08:30)
충남 서산시 인지면과 팔봉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이라기 보다는 조그만
봉우리에 불과하다. 그저 밋밋하고 아무 특색도 없어 ‘준.희’님이 붙여논 표지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가 딱 좋은 곳이다. 직진하면 역마산이다.
물래산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급한 내림길을 내려오니 쓰러진 나무들로
인해 걷기가 심히 불편하다. 10분을 내려와 좌측으로 꺽어지니 밭과
농장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농장의
개쉬끼 3마리가 산꾼을 보고 짖어대며 난리부루스를 친다.
산이 마을로 마실을 온 모양새다. 인간사의 뭐가 그리도 궁금한 지...
빼꼼히 내려다보고 있다. 궁금할 게 하나도 없소이다.
팍팍한 인간들의 삶이 너무나 힘이드요... 그래도 인간들이 산을 다니는 거 아니것소.
이곳에부터 태안군 태안읍 북창마을에 있는 붉은재까지 1시간 20분을 학교, 공동묘지.
농장, 민가, 교회 목장, 마늘밭을 둘레길 걷듯이 지루하게 걸어가야 한다.
이곳 서산 태안지방은 마늘의 주산지인 모양이다. 가는곳마다 마늘밭이다.
마늘밭을 지나니 우측에 민가를 끼고 32번 국도 아래의 지하차도를 지난다.
팔봉중학교 앞에서 본 팔봉산
아침 햇살은 받은 팔봉산은 참으로 멋있다. 자꾸만 바람의 강도가 세어진다.
팔봉중학교(충남 서산시 팔봉면 소재 : 09:10)
작아서 아름다운 팔봉중학교란 구호가 멋있어 보인다.
내 객지 친구론 30여년 가까운 친구가 이곳 팔봉중학교 출신이 있다.
그 친구말로는 장애자인 기독교 전도사분이 설립한 학교란다
미션계의 학교인 모양이다. 팔봉중학교 운동장을 거쳐서 이 건물을 끼고 우측으로 돈다.
다시 학교 뒷마당을 지나면 동백나무를 심어논 계단으로 오르면 정맥길이 이어진다.
학교뒤의 능선을 오르니 좌측의 농장에서 친 철조망 사이로 걷는다.
그러나 이곳도 엄연한 정맥길이기에... 산꾼 범여는 묵묵히 걷는다.
팔봉중학교 지나는데 산 전체가 쓰레기장으로 버려진 양심을 본다.
굉장히 지저분하다. 양반의 고장 충청도에서 이게 뭡니까?
10여분간을 공동묘지의 묘를 이리저리 피해서 걸어야 하고...
버려진 무우도 보이고...
우측 조경수를 심어논 태안농장과 마늘밭을 사이를 직진하니 3개 통신사 팔봉 중계소를 지나고...
조경수를 잔뜩 심어논 삼원 1.2농장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배나무와 마늘밭을 지난다. 이곳은 거의가 황토밭이다.
그리고 고도가 낮아 조금만 정리하면 밭을 만들수 있는 땅이다.
삼원레저 입구(09:27)
지도에도 없는 최근에 지은듯한 골프 연습장과 노래방 등
레저시설을 갖춘 연수원같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계속해서 도로를 한없이 걷는다.
이곳부터 여태껏 정맥길을 같이해온 서산시 팔봉면과 이별을 하고
태안군으로 접어든다. 금북정맥의 다 되어 간다는 징조이다.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과 민가있고
조금 지나니 역사적으로 실패한 운하인 굴포운하지가 나타난다.
좌측의 마늘밭에는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의 손놀림은 바쁘기만 하다.
굴포운하지(堀捕運河址(09:30)
'굴포마을안내도'와 '굴포운하지' 안내도가 있다.
마루금은 바로 북쪽에 보이는 나지막한 능선이나 능선은
운하를 만드느라 흙은 파낸 곳이라 마루금이 끊겨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운하로 알려진 굴포운하는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흥인천과 가로림만과의 약 3km에 달하는
지역을 연결하는 운하로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서울로 운송할 때
배가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항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는데
안흥량은 해중에 암초가 있고, 급격한 조류로 인해 빈번히
배가 전복되거나 파손되어 국가적인 손실이 컸다.
하여 세곡미의 안전수송과 운송기간 단축을 위해
이 곳 굴포에 운하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고려 인종 때(1123~46)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임진왜란 직전까지 비록 단속적이기는 하였지만 400여 년간
수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운하공사를 계속하였으나 운하 건설지의
지질이 화강암층이라 당시의 기술로는 암석을 뚫는데 어려움을
겪은데다 높은 간조의 차를 극복하지 못해 성공치 못했다.
이후로도 국가의 재원이 되는 세곡미 운송을 위해 조선 현종 때에는
운하 건설지 주변에 많은 조창(漕倉)들을 설치하였으나 그 마저도
행정상의 문제들로 인해 결국 폐창되고 운하건설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조창과 관련하여 천수만과 가로림만의 해로를 따라
많은 촌락이 형성되고 발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실패한 굴포 운하지에는 지금은 주위에는 마늘밭과 목장과 농장이 즐비하다.
운하지였던듯한 곳에는 억새만 가득하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4대강 사업도 이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다. 갖가지 여러곳에 문제가
대두가 되고 있는데 자꾸만 숨기는듯한 징후가 보인다.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은 제발이지 자기의 개인 치적이나 정치적 공약을 이행하려고
하지말고 정말 당신들의 행동에 국익에 부합되는 행동인지 신중하게 생각하시길...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굴포운하지를 걸으면서 생각을 해본다.
멋진 노거수 한그루 뒤로 구세군 진장교회(태안읍 진장리 소재)를 지나니...
인평3리 마을회관(09:40)
산꾼들의 산행기에 전속으로 등장하는 마을회관을 지나 계속 직진을 하고...
가도가도 황토밭길이 나타난다. 시인 한 하운님이 문둥병에 걸려
소록도를 가면서 읊조린 황토밭은 아닐테고...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다
낯선 친구 우리 만나면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가도 황톳길 숨막히는 더윗길
길을 가다 신발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하나 없고
남은 두 개 발가락 잘릴 때까지
천 리 먼 전라도 길
씨감지를 심고오는 시골아낙이 이 추운 날씨에 따뜻한 집에있지.
사서 고생을 하냐고 하면서 홀로걷는 산꾼을 도저히 이해를 못한다.
도내1리(도루째:09:45)
이곳에서 오거리에서 파란지붕을 끼고 좌측의 축사 방향으로 향한다.
이곳은 마치 몇구간 전의 충남 홍성군 광천읍과 비슷하다.
끝없는 농로를 걸어가는것도 같고... 주위에 지천인게 목장이고 농장이다.
가끔 보이는 인삼밭도 비슷하고 저 앞에 보이는 산도 오서산과 발음이
비슷한 오석산이고...
계속해서 콘크리트 도로를 걷는다. 정말 이런길은 싫다.
벌써부터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을 한다.
소한말(09:50)
계속해서 직진으로 고고~~~
채석장으로 인해 망가져 있는 내가 가야할 오석산이 보이고...
이곳에서 빨간 지붕이 보이는 오석산이 보이는 좌측으로 향한다.
북창마을 버스 정류소(10:05)
이 지역 주변의 지명들이 하창, 상창, 북창,창평, 창벌이라 불리고 있는데 이는 이전
굴포운하지의 창고가 있었던 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 버스 정류장에서 곧장 직진을 하면 우측에 커다란 목장이 나오고
좌측으로 채석자으로 연결되는 곳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붉은재(10:15)
나무는 없고 붉은 흙만 있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임도 옆에는 옛 채석장인듯한 공터가 있고 그 공터에는 원상복구
형태로 어린 소나무들을 많이 심어놨는데 마사토지형이라
장마로 인해 흙이 많이 유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곳 붉은재에서 좌측으로 올라 다시 산으로 접어든다. 1시간 20분만에...
채석장으로 활용했던 곳에 원상복구를 한답시고 어린 소나무를 개념없이
촘촘히 심어놨는데도 불구하고 장마로 인한 토사유출이 심해 이리저리 골이 파져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직도 뭐가 그리도 부족한 지 채석장으로 인해 오석산을 갉아먹고 있다.
이러다가 다음에 올 후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오석산이 어떻게 표현될까? 두렵다.
소나무를 식재한 곳을 지나니 또다시 지난번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들과의 전쟁(?)을 해가며
겨우겨우 오석산으로 향한다. 저 멀리 아직도 팔봉산은 외로운 이 산꾼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석산(烏石山:169m:10:40)
충남 태안군 태안읍에 위치한 산으로 산 정상에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삼각점과
최근에 국립지리원에서 설치한 삼각점 안내판이 있고 온 주위가 나무가 꽉 들어차서
주위가 전혀 보이지 않는곳에 산불감시초소가 들어서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불을 어떻게 감시하는지 머리가 나쁜 범여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곳에 까마귀가 많아서 까마귀 오(烏)자를 썼는지? 또 다른 이름으로 검을 흑(黑)자를
써서 흑석산으로 기록한 자료들도 보인다... 아뭏든 조류가 많았던 산인 모양이다.
용도폐기가 된듯한 산불감시초소와 표식을 알 수없는 삼각점이 있는 오석산 정상
시간이 늦은 점심대였으면 오늘같이 바람이 많은 날에 라면끓여 먹는 장소론 안성마춤인데...
아침을 일찍히 먹었던 탓인지 허기가 져 우유와 빵으로 허기를 때우고 우측 등로로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이곳은 바람의 영향을 덜 받은곳인지 넘어진 소나무가 별로없고
대체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니...
이렇게 작은 소나무로 터널을 이룬 임도를 지나니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시멘트 임도(11;100
충남 태안읍 산후리 원산후 부락과 상옥리 고일마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고개를 지나 올라서니 인삼수확이 끝난 밭 주위에는 인삼밭을 끝낸 땅에
잡초가 무성하고 주위에는 쓰레기로 지저분하다. 인삼밭을 한번 경작하고
나면 토양이 기운이 다 빠져버려 20여년간은 일반농사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오늘 지나온 산능선과 저멀리 서해바다가 보이고...
다시 쓰러진 나무를 피해 올라가니 이곳에는 ‘푸른태안 21’이라는 단체에서 이렇게 나무들에
표찰을 달아놨는데 근데 하는 짓거리라곤 ‘자연을 사랑합시다’라는 미사여구로 표현해 놓고
이렇게 나무에다 못을 박아 표찰을 걸어놨다. 참으로 개념없는 자들이다.
저들은 학교다닐때 이름표를 옷에다 핀을 안꽂고 살갗에다 핀을 꽂았나... 당장 못을 뽑으시요
산불이 난 241.7봉 아래에는 이처럼 간벌을 하여 민둥산으로 만들어 놨다.
시원한 조망으로 인해서 저 멀리 팔봉산이 한눈에 보이고... 그 옆에 지난구간에
지나온 금강산과 장군산도 보인다. 야트막한 산으로 오늘 정맥길도 이어오고...
241.7봉(10:55)
산불이 난 지역에는 나무를 베어버려 전망은 좋으나 안타깝기만 하다.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유명한 은행나무가 있는 흥주사가 나오고
금북정맥길은 우측으로 내려간다. 바람의 세기는 자꾸만 강도를 더해간다
바람으로 자꾸만 체온이 빼앗겨 서둘러 정상에서 하산을 한다
흥주사(興住寺)
태안군 태안읍 상옥리 산 1154번지 백화산(白華山)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修德寺)의 말사(末寺)이다.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전설에 따르면
222년(구수왕 9)에 흥인조사(興仁祖師)가 창건하였다 하나 역시 신뢰성은 떨어진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백화산성(白華山城) 내 군영사찰로 1417년 산성과 함께 창건된 것으로 보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두 설 모두 정확한 근거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지며, 현존하는 유물 등을 볼 때
흥주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28호)은
구조나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창건 이후의 역사 또한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1993년 만세루를 해체하였을 때 1527년(중종 22)년에 건립한 뒤 1691년(숙종 17), 1751년(영조 27),
1798년(정종 22)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이후에도 1944년에 해체 복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세루는 1990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33호로 지정되었다.
이외에 1722년(영조 48)에는 원통전을 중수하였다는 내용을 적은 기록이 있어 원래 흥주사의 주불전은
원통전이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도 불사가 있었던 것 같다. 원래 대웅전에 있던 후불탱화는
1861년(철종 12)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화였는데 지금은 수덕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흥주사 은행나무
태안 흥주사 은행나무는 태안읍 백화산(白華山)에 있는 흥주사의 약 40m 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흥주사 경내에는 만세루와 삼층석탑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득히 먼 옛날 먼길을 가던 노승이 백화산 산기슭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꿈인 듯
하얀 산신령님이 나타나 노승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가리키며 이곳을 장차 부처님이 상주할
자리이니 지팡이로 이곳에 표시를 하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기이한 일이구나
생각한 노승은 꿈에 산신령님이 가리킨 지팡이를 그곳에 꽂아두고 불철주야 기도를 하니 신비스럽게도
지팡이에서 은행나무 잎이 피기 시작하였고 노승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더욱더 기도에
정념하니 또다시 산신령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길 이 나무에 자식 없는 자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게 되고
태어나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얻어 부처님을 모실 것이니라 하며 사라지셨다. 그 후 몇 십 년 후
산신령님 말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해 사찰이 지어졌고 이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탐스런 은행과
항상 푸르름처럼 부처님의 손길이 자손만대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노승은 절의
이름을 흥주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태안 흥주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9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0m, 둘레 8.5m이다.
이 은행나무는 약 4m 높이까지는 외줄기로 되어 있고 그 위부터 몇 개의 줄기가 곧게 하늘을 향해 갈라져 있다.
은행나무의 주간부(株間部)가 외형적 손상없이 완전하고 수피도 깨끗하며 생육상태가 양호할 뿐
만 아니라 나무의 형태도 아름다워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
241.7봉 내림길은 태안읍내가 가까운 관계로 등로는 잘되어 있다.
다만 이곳 토양이 마사토로 인하여 상당히 미끄럽다.
백화산이 가까운 관계로 주위에 하얀 차돌백이가 보인다.
임도(11:55)
태안읍 오룡동과 냉정골을 잇는 고개로 직진을 하여 백화산으로 올라선다
백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
이런 호젓한 억새길도 나오고...
조금 올라서니 산후리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원래는 이곳으로 올라 백화산 줄기를
타야 하는데 이곳은 공군부대가 자리를 잡고있어 부득히 직진으로 올라가 안부능선에 도착한다.
백화산 우측을 점령하고 있는 8423부대 때문에 안부에서 좌측 백화산 정상으로 향한다.
부대장의 예전에 매설된 지뢰를 조심하라는 경고문도 보인다
백화산은 태안의 진산답게 사람이 많이 다니는지 길은 반질반질하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산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난다. 이곳에는 등산객이 꽤나 많다.
공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백화산 우측 능선
백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태안읍(太安邑)의 모습
태안의 명칭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준말로서 국가가 태평하고 국민이 평안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태평하고 안락하다」는 의미인 태안은 가장 살기좋은 곳이란 뜻이다.
백제가 기원전 18년 한강유역인 위례성에서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어 근초고왕이 마한의
전지역과 대방군 등을 병합하여 고대정복국가(古代正服國家)로 등장하면서 발전해갔다.
369년에 근초고왕이 마한 54개국을 완전 정복하여 백제국에 병합할 때 이곳 태안에 위치했던
「신소도국」과「고랍국」도 예외가 아니여서 백제의 판도에 편입되는데, 이때 태안은
성대혜현(省大兮懸)으로 개편된다.
태안군은 타의에 의해 서산군에 병합되어 75년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
법률 제 4050호에 따라 태안군에 복군됨으로서 군민이 모두 군세 발전에 활기 찬
전진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리고 태안군은 현재 행정구역상 8개 읍면에 65개 법정리,
186개 행정리에 822개의 반, 그리고 493개의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동으로는 서산, 서쪽으로는 서해바다, 남으로는 보령군의 원산도를 마주보고, 북쪽으로는
경기도의 덕적군도를 접하고 있다. 결국 동쪽을 접하고 있는 서산으로 가는 길이 내륙으로
통하는 육상교통의 유일한 관문이다. 태안반도에서 바다로 315km 정도를 나가면 중국의
산둥반도를 통하는데 일찌기 대륙문화가 서해를 통해 태안반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 옛날 백제시대 불교문화가 이곳 태안을 통해 들어와 번창하였고 안흥만(安興灣)은
여송무역선(麗宋貿易船)의 기항지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또 안흥만의 북쪽의 원북면
청산리는 해상 교통이 발달하여 인천항을 내왕하는 정기 여객선이 1960년대까지 성황을
이뤄 京仁文化 유입에 한 몫을 했으나 육상교통의 발달로 이제는 해상교통이 완전두절 되었다.
백화산(白華山:284m:12:20)
충남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에 위치한 태안 8경중 제1경에 속하는 태안의 진산이다.
산 전체가 흰돌로 덮혀있어 그 모양이 괴이하여, 봄이면 마치 부용화(芙蓉花) 같기도 하고
또 가을이면 돌꽃이 활짝 핀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즉 백화(白花)가 난만한 느낌을
주는데, 이 백화산은 서울을 등지고 있기에 조선조 500년동안 태안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가
한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백화산은 작고 아담한 산이지만, 서해 바다를 끼고 있어 풍경이 아름답다.
산에는 기암괴석들이 많고, 바위들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고,
특히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최고의 경관이다.
백화산 정상의 봉화대지
백화산은 서산시 팔봉면의 금광산(金光山)의 줄기가 도내리와 어은리로 뻗어내려 오석산을 이루고
다시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한갈래는 서우산 한갈래는 옥녀봉을 이루는데 옥녀봉에서 갈라져나온 산이 백화산이다
.백화산은 산전체가 바위로 되어있는데 한때는 산림이 우거져 거목이 많았다고하는데 남벌로 암석만 남아
백화산(白華山)이되었다니 가슴아프다.
백화산 정상의 백화산성은 고려 충열왕때 축조되었으며 두개의 우물과 봉화대가 설치되었다고 하며
현재는 정상에 봉수대터와 700m의 성곽만 남아있다.
백화산성 터(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212호)
백화산 정상에 축조된 백화산성은 고려 충열왕(1275-1308)때 축성되었으며, 성의 규모는 길이 700m, 높이 3.5m로
성 안에는 2개의 우물이 있고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어 동쪽으론 서산의 북주산, 남쪽으론 부석의 도비산과 연락을 취했다
지금은 폐성되어 700여m의 성곽만이 남아 있다.태안읍지(1872년)에 의하면 축성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현재는
퇴락하였으나 지세가 사면이 절벽으로되어있어 사람이 발붙이기 어려운 곳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쌍괴대(雙槐臺)
2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커다란 고목으로 백화산 정상에 있던 느티나무를
어느 마차꾼이 마차바퀴를 만든다고 베어 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백화산에서 태안읍내를 조망하고 여기저기를 구경한 다음에 200여m 내려오면 군부대와
태을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금북정맥길은 우측 군부대쪽으로 내려가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그러나 어차피 태을암을 지나가야 하기에 태을암에 들린다.
태을암(太乙庵:12:50)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산42번지 백화산(白華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이다.
절이 창건된 것은 고려시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는 왜구가 서해안에 출몰하며 한창 기승을 부릴 당시인데,
바닷가에 면한 태안 지방은 인근의 서산과 마찬가지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어 군민 대부분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할 정도였다.
이 같은 사정은 조선이 개국되면서 많이 좋아져, 1413년(태종 13) 태안군이 되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1479년(성종 10) 경상북도 의성현(義城縣)에 있던 태일전(太一殿)을 이곳 백화산으로 옮기고 그 때 함께
이운한 단군 영정을 봉안하게 하였다. 그것은 곧 국조신(國祖神)이랄 수 있는 단군을 이곳으로 모셔옴으로써
그의 가호를 받아 민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옮겨 온 태일전 아래에는 백제시대에 조성한 마애삼존불상이 있었으나, 태일전과는 직접적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일전은 이렇듯 바다의 안녕을 바라는 목적이 짙었는데, 그러나 실제 거리가 연해(沿海)와는
다소 먼 곳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을 느꼈다.
그래서 1480년 태일전은 그대로 두고 단군 영정만 안흥진 성 안으로 이안하였고, 남은 태일전
건물에는 불상을 모시고 태을암이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태을암이 창건된 것이다.
더군다나 태일전 아래에는 마애삼존불상이 있으므로 절을 창건하기에는적합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약 80여 년간이 지나니 건물은 점차 퇴락되어 가는데, 그 규모가 워낙 크므로 쉽사리
중수하기에 벅찼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최근에는 1978년 법당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절에서 서쪽으로 10여m 지점에 태안마애삼존불상이 봉안된 보호각이 있다.
마애삼존불 오른쪽으로 바위에는 태을동천(太乙同天)글씨가 바위에 오르면 바둑판이 새겨져있고
일소계(一笑溪)라 새긴 석판이 세워져 있는데 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런 글귀는 이곳 벼슬아치나 유생들이
이곳을 유유자적하며 풍류를 일삼던 곳이였으리라 짐작된다.
계해년 한가을에 김 규항이 썼다는 이 글은 신성한 사찰내에 이 무슨 망발인가?
조선시대에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한 단면을 보는것 같아 씁쓸함이 앞선다.
태을동천 아래에 일소계(一笑溪)라고 새겨진 글씨는 김규항의 자손인 김 윤석이란
자가 쓴 글이라고 한다. 태을동천 아래에 작은 연못과 연결되어 있다.
감모대(感慕臺)
태을암 뒷쪽 도로의 축대 아래에는 높이 850mm의 8각으로 되어있는 감모대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의 한 단면을 보는것 같아 불자인 범여로서는 가슴이 아프다.
당시 유생들이 이곳 감모대에서 바로 아래에 있는 삼존불 부처님께 돌을 던져 맞히는
놀이를 하였고, 한 문중(金海 金氏)의 족보보관 장소로 사찰내에 있는 일소계 일대의
장소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맞은편 바위위에 새겨진 바둑판은 이런 유생들이
남긴 훼불의 흔적이라고 한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泰安 東門里 磨崖三尊佛立像 : 국보 제307호)
놓음으로써, 1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불상과 달리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2구의 불입상은 양감 풍부한 얼굴에 크게 번지는 미소, 넓게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장대한 체구, U자형 주름과 y형
내의가 보이는 착의법, 도톰한 듯 날카로운 대좌의 연꽃무늬 등 세부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양식 특징을 보인다.
좌우 두 불상 사이에 끼여 있는 듯 뒤로 물러나 작게 새겨진 보살입상은 높은 관에 아무런 무늬도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원형으로 길고 통통한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원만상이다.
어깨를 덮어 내린 천의는 길게 내려와 무릎 부분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며 묵중하게 처리되었으며 배 앞에 모은
두 손은 오른손을 위로 하여 보주를 감싸 쥔 이른바 봉보주인(捧寶珠印)을 나타내고 있다.
불신의 하반부가 노출되어 백제시대의 연화대좌가 확인됨으로써 그 도상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상 요충지에 자리함으로써 6세기 중반 경 중국 북제양식 불상과의 영향 관계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에 선행하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불상이란 점에서 국보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
삼존불 안내판
태을암 삼성각
태을암의 사찰규모는 생각보다는 크다. 그러나 사찰내에는 등산객들만 왁자지껄하고
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그리고 사찰내에서 사찰에 대한 예를 표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무례한 등산객들이 이 범여의 눈쌀을 지푸리게 한다.
더 이상의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대웅전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를 갖추고 길을 떠난다.
태을암을 지키는 이 개도 佛性이 있는지 참으로 얌전하다.
태을암을 나와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내용을 알 수 없는 백조암을 만난다.
바위뒤로 보이는 태안의 모습은 아름답고 가야할 퇴비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백조암에서 바라본 태안읍 삭선리의 모습
백조암에서 100여m를 내려오다가 좌측의 등로로 접어든다.
이곳으로 접어드니 좌측에서 보는 백화산과 태을암이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조금 내려가니 태을암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내려온다.
좋은 길을 가다가 다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을 버리고 한가한 정맥길로 접어든다.
백화산과 태을암을 바라보며 조금가니 동경대(同庚臺)라고 써있는 낙조봉이 나타난다.
낙조봉(落照峰:13:10)
백화산 중턱에 위치한 매모양의 낙조봉은 소성팔경의 하나로 낙지봉 또는 동경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어 진다.
화창한 날 이곳에 오르면 서해를 감싸안고 도는 저녁노을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 보듯 장관이어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곳이라 한다.
낙조봉의 안내판
우측 맨끝에 내가 가야할 태안여고가 보인다.
낙조봉이 유명하건만 이곳으로 태안사람들은 거의 오질않고 정맥꾼들만 다닌다.
이곳에서 태안읍내를 감상하고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오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으로 가면 대림 아파트가
나오고 정맥길을 벗어나는 대형알바 하기가 쉬운 곳이다(알바주의)
이곳에서 바로 직진을 하면 이곳은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 정맥길에 꼬리표가
간간히 보인다. 10여분만에 모래기재가 보인다.
이런 호젓한 길을 내려간다. 일반 등산객은 전혀 없는 곳이다
빨간 벽돌 건물인 태안 교육청이 보이고... 저기 서 있는 차량쪽으로 돌아서...
‘다-오리’라는 오리고기집 마당을 거쳐 내려오니 태안과 안면도를 잇는 도로가 나타난다.
모래기재(13:20)
충남 태안읍 삭선리와 남문리를 잇는 603번 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마루에는
태안여고와 태안 교육청 그리고 태안초교가 자리를 잡고있다.
태안여고(13:23)
태안여고 정문에서 우측으로 돌면 태안여고 로즈홀 옆 도로를 따라 마루금을 이어간다.
태안여고 강당인 로즈홀
여고 옆길은 이렇게 길이좋다.
200여m 정도를 가다가 굽은 도로 직전에 좌측으로 올라서면 등로가 나타난다.
임도파들은 이 길로 쭈욱 가도 다시 마루금을 만난다.
태안여고 뒷산인 산죽터널도 지나고...
조금 올라가니 태안여고 학습림인 밤나무 단지 가운데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태안여고 학습림인 밤나무 단지
계속해서 밤나무 단지 가운데로 직진을 한다.
92.5봉(13.35)
밤나무 단지를 지나니 삼각점(△서산 436)이 나타나고 다시 낮은 산아래로 내려선다.
넘어진 나무 사이로 이리저리 피해 내려가니 다시 마을이 나타난다.
오늘은 산보다는 농로를 더 많이 걷는다. 오후에 접어들었건만 세찬 바람에
귀가 시릴정도이다. 무작정 걷기만 한다. 저 멀리 퇴비산이 보인다.
계속해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마을길을 길게 지나야 한다. 시멘트도로 따라 길게 진행한다.
마을을 지나 언덕위 에 오르면 'T자형 삼거리'가 나온다. 배가 심하게 고파오는데 바람이 심해
마땅히 식사를 할만한 장소가 눈에 띠질 않는다.
농사를 포기하고 버려진 채로 얼어버린 김장무우
양쪽에 마늘밭을 끼고 계속해서 농로를 따라 걷는다.
오늘 지나온 구간이며 가장 높았던 백화산의 모습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계속해서 걷는다. 발바닥이 아파온다.
사찰인지 재실인지 구분이 안되는 멋진 건물도 보이고...
태안 동원 예비군 부대앞에는 새로 생길 도로공사로 인해 정맥길이 잘려 나가고 있다.
도로 공사장을 지나니... 태안 순복음 교회가 우측에 보이고...
태안 동원 예비군 부대 정문 (14:10)
모래기재에서 태안여고 뒷산으로 올라 15분 정도 숲길을 걷다
마을로 내려서서는 2km 넘게 시멘트길로 예비군훈련장까지 왔다.
이후로는 예비군 훈련장 담장 우측으로 난 길을 따르다가
왼쪽으로 철조망을 넘은 흔적이 있는 곳에서 산으로 든다.
예비군 부대 담장을 끼고 올라가다가 철조망을 넘어 훈련장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허기가 져서 걸음을 못걷겠다. 바람을 피할곳이 마땅잖아 여기까지 왔다.
바람 피하기야 비닐하우스 농막만큼 좋은곳이 없지만 농부들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차마 그곳에 들어가 불을 피우지 못하겟더라...
훈련장 안으로 들어서니 벙커가 있다 바람을 피하긴 최적의 조건이다.
이곳에서 떡라면을 끓여서 막걸리 한병을 먹고나니 조금은 살것 같다.
20분만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산으로 오른다. 서서히 피로도가 몰려온다.
정맥길 산 전체가 예비군 훈련장이다
퇴비산 갈림길 이정표
퇴비산 갈림길(退飛山:159.7m: 14:40)
충남 태안군 소원면에 위치한 산으로 표지판에 이곳을 퇴비산으로 표현했으나
지도상에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봉우리가 퇴비산이이다.
산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고 이곳에서 다시 조그만 봉우리를 오르내린다.
퇴비산 갈림봉 삼각점
개봉산(150m:14:50)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은 봉우리에 ‘서래야 박건석’님이 개봉산이란 코팅지를 붙혀놨다.
차도고개 근흥면쪽의 모습
정맥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90도 꺾여서 떨어진다.
그러다 TV안테나가 있는 분기봉에서 좌측으로 내려 간다. TV안테나 선이 따라 내려오고 있다.
계속 내려 가면서 두어번 오르내린 후 좌측에 서해산업이란 레미콘 업체가 보이고
'32번 도로'가 지나는 '차도고개'에 내려 선다. 오늘 32번 국도를 3번째 만난다
차도고개 소원면쪽의 모습(15:00)
충남 태안군 소원면과 근흥면의 경계로 태안에서 안면도로 가는 32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이곳에서 32번도로를 건너 구수산 갈림길을 올랐다
우측으로 휘감아 내려 다시 32번도로에 내려서야 하는 형태이다.
임도파들은 그냥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5분이면 유득재로 도착하겠다.
원칙을 고집하는 범여는 당연히 산으로오른다.
능선으로 올라서니 사유지인 밤나무 단지가 나타나고 한차례 능선 마루금에 오르고
우측으로 잠시 올라 봉우리를 하나 넘는다.
곧이어 나타나는 두번째 봉우리는 허물어진 '옛 산성터'이다.
봉우리 정상엔 누군가 성돌을 주워다 돌탑을 쌓아두었다다시 조금 내렸다 오르면 '구수산 분기봉'이다.
잠시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 오는데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잡목으로 인해 길찾기가 힘이든다.
길이 잘 나있는 임도를 버리고 희미한 우측등로를 경겨우 찾아서 내려오니 유득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길게 내려오니 'S OIL 주유소와 관광버스 주차장'이 있는 '32번 도로'에 다시 내려 온다.
오늘들어 4번째 32번 국도를 만난다.좌측으로 조금 내려가니 '등나무 슈퍼'가 있는 '유득재'가 나타난다.
유득재(15:30)
충남 태안군 소원면 유득마을에 있는 태안과 안면도를 연결하는 32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고개라기보다는 그냥 평지이다. 아직도 바람은 그칠줄 모르고 불어댄다.
등나무재
마치 백두대간의 남원 매요리에 있는 할매집처럼 입구에 산꾼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날씨도 너무 춥고 매요리 할머니집 막걸리 생각이 나서 수퍼에 들렸더니
매요리 할매집과는 전혀 다른 그낭 밋밋한 시골 구멍가계이다.
그냥 나오기 뭐해서 마음에도 없는 캔맥주 한통 사마시고 다시 수퍼를 나온다.
수퍼를 나와 농기계 수리센타를 끼고 시목초등학교 팻말을 끼고 우측으로 간다.
유득재부터 오늘에 3번째 기나긴 도로를 따라 길을 걷는다.
시목 구판장과 삼은교회를 지나고...
할머니 손메주 공장과 향토밭을 지나고...
조금 더 가니 공장마당이 지저분한 서해철망 공장에서 우측으로 돌아간다.
장대1리 버스 정류소도 지나고...
도루개(15:55)
태안군 소원면 장대1리 삼곳말 버스 정류소가 있는 삼거리이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비포장도로를 계속 걸어간다.
보리밭을 지나고...
도루재에서 5분정도 비포장도로를 지나니 저 멀리 전원주택 단지를 조성하는 곳을
바라보면서 우측 임도를 따라 황토길을 계속 걸어간다.
이런 절개지를 지나는데 갑자기 어두워진다.
이 내리막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넔놓으면 알바하기 좋은 곳이다.
저 멀리 백화산이 보이고 태안군 소원면의 농촌마을 모습이 한가롭다.
88봉(16:10)
전원주택 뒷능선 길가운데 주먹만한 이정표 하나가 박혀있고 시그널에
88봉이라고 써있다. 이곳은 소나무들이 작아서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소나무 터널을 내려오고...
이곳에서 좋은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져야 한다.(알바주의)
이렇게 황토밭을 끼고 내려온다.
별의미도 없는 88봉을 갔다오는데 20분이나 더 허비했다.
아까 그 전원주택 단지에서 계속 임도를 따라와도 되는데 말이다.
다시 산속으로 올랐다가 임도를 내려서 계속 걸어가니 우측에
우렁각시탑이 나온다.
우렁각시탑(16:25)
우렁각시 전설이 호남과 충청도 지방에 널리 퍼져있다는 데
이 마을도 그런 전설이 있는지 우렁각시탑이 세워져 있다.
일년 내내 농사지어 소작료로 빼앗기고, 군역에 부역에 시달려야 했던
이 땅의 민중들은 때로는 아내까지도 빼앗겨 저항하다 아내와 같이 죽거나,
아니면 아내와 함께 지혜를 발휘해 관리나 임금을 죽여 세상을 바꾸었다는
전설은 어쩌면 현대에 들어서도 형태만 바뀌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렁각시탑에서 계속해서 이런 도로를 타고 내려오니 32번 국도를 5번째 만난다.
쉰재(16:38)
장재(16:40)
오늘의 날머리인 장재이다. 이제 금북정맥도 한구간만 남았다.
이곳에서 산행을 마무리하는 스틱을 접는다. 바람때문에 너무나 춥다.
장재 버스 정류장
장비를 점검하는데 버스가 와서 타고 태안으로 향한다.
버스에서 뫼솔산악회로 온 낡은모자님께 전화를 하니
태안여고로 오란다. 산악회 버스에 자리가 있다고...
염치불구하고 태안여고로 가서 밥 한그릇과 막걸리 2잔을 얻어먹고
차까지 얻어타고 서울로 온다. 오늘은 관광버스를 히치했다 ㅋㅋㅋ
오늘 산행구간의 G.P.S 기록
오늘도 양재동에서 내려 아지트(?)에서 낡은모자님과 각 생맥주 500cc
2잔과 이스리 한병 죽이고 집으로 간다. 기분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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