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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남강(진양)기맥(終)

진양기맥 제3구간 - 춘전치에서 밀치까지

by 범여(梵如) 2012. 2. 5.

 

 산행일자 : 2012.02,05(무박산행)

산행날씨 : 흐린 날씨에 박무, 약간의 눈발, 포근함

 참석인원 : 백두사랑 산악회 23명의 회원과 함께
 산행거리 : 도상거리: 17.53km / 8시간 50분 소요
 산행코스 : 춘전치-88고속도로-식기봉-덕갈산-수영덤이-매봉산 갈림길-갈전산-갈전재

                  -철마산-705.1봉-흰머리재-638봉-임도-예동고개-바랑산-702봉-안부 사거리

                 -세이덤-소룡산-소룡고개-정수지맥 분기점-밀치

 소 재 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신원면 / 함양군 수동면 / 산청군 생초면, 오부면 , 차황면

 

지난 며칠간 서울은 2월의 기온치고는 55년만에 가장 추웠단다.

기온이 영하 15도에서 17도를 오르내리며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를

넘기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주말에 풀리는 바람에 편안한

마음으로 산행을 준비한다. 토욜은 봄이 시작된다는 入春이다.

24절기의 기준이 중국의 하남지방을 기준으로 하여 조금 다르긴 해도

그래도 기가 막히게 맞는다. 흔히들 음력을 쓰면 미신적인 요소가 많다고

무시를 하면서 서양의 약력인 양력(日)을 쓰나 범여가 보기엔 음력(月)이

훨씬 잘맞는 느낌이다.  오늘도 모든걸 잊고 베낭을 메고 야심한 밤에

양재역으로 향한다. 내맘은 아직도 春來不似春이건만...

오늘구간의 산행지도와 고도표

오늘 산행구간의 전체트랙

춘전치(04:00)

서울에서 밤 11시에 출발하여 산악회의 여러가지 공지사항을 하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자정이 되어서야 차량에 소등이 된다. 이런저런 사유로 인해 당체 잠을 잘수가 없다가

어느 휴게소인지 모르는 곳에 들릴즘에 잠이 오길 시작하는데  휴게소에 내리지도 않고

잠을 청하는데 다시 잠이 달아나 버린다. 잠을 청하기 위해 별짓을 다해 보지만 잠은

오지랂고 차는 꿍쾅거리면서 시골길로 접어든다. 새벽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오늘의

들머리인 춘전치에 도착하여 버스에 시동을 켠체 새벽 4시가 오기를 기다린다.

 

이건 산악회 시스템에 좀 문제가 있는듯 싶다. 이럴것 같으면 차라리 서울에서 한 30분

늦게 출발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어디든지 교통이 좋아 4시간안에 도착을

충분히 있는데 말이다. 집행부의 고충도 이해는 한다마는 이런건 참고했으면 한다.

 

경남 거창군 남상면과 함양군 수동면의 경계인 이곳 춘전치의 새벽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밖에나가 기상사항부터 먼저 살피니 며칠간의 혹한이 물러나고 날씨는 상당히 포근하다.

고어텍스 자켓은 입지 않아도 될것같아 처음부터 벗어 베낭에 넣고 잔설은 땅에 꽤나 쌓여

있으나 처음부터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새벽 4시에 산행을 시작한다.

88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다.

춘전치에서 우측 시그널이 잔뜩 달려있는 88고속도롤를 무단으로 건너 4차선 확장공사중인

들머리로 향한다. 말이 고속도로이지 이곳은 일반국도보다 못하다. 이곳은 적정속도를 시속

60km라고 표시해놨고 새벽이라 그런지 우리일행이 다 건너는 10분동안 차량이 겨우 2가 지나간다.

88고속도로 확장구간

고속도로를 새로 확장하는 공사구간의 절개지로 처음부터 힘을 빼면서 미끄러운 길을 오른다.

이곳의 기맥길도 또 짤리는구나. 같이 달리고 있는 1084번 지방도와 88고속도로 위를 묶어

그 위로 에코브릿지를 설치하면 맥길도 연결하고 좋으련만 이 나라의 공무원 나리들의

머리에 그런생각이 아무래도 없을듯 싶다. 제발 생각 좀하고 일을 좀했으면 한다

눈이 꽤 많이 쌓여있다.

초반에 춘전치에서 식기봉까지 고도를 250정도 치고 오르니 꽤나 땀을 쏟아야 했다.

거기다가 이곳은 남덕유산의 자락이라 그런지 눈이 꽤나 쌓여있고 낙엽위라 상당히 미끄럽다.

할수없이 아이젠을 착용하고 정리되지 않은 산길에 잡목과의 사투를 벌이면 식기봉으로 향한다.

식기봉(04:40)

경남 함양군(수동면),산청군(생초면),거창군(남상면)이 만나는 지점이라 그 의미를  상징하기 위해

설치한 정상석이 있고 어둠속이라 그런지 보기엔 조망도 별로고 특징없는 봉우리이다. 오늘 산행중에

 처음으로 만나는 봉우리로 5분간의 휴식을 취하고 약간의 내리막을 향해서 편안한 길을 걸어간다.

덕갈산 삼각점( 거창 462)

덕갈산(669.2m : 05:10)

경남 거창군 남상면과 산청군 생초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삼각점과 덕갈산 표지판이 있는 정상,보기보단 조망도 없고 특징이 없는 산이다.

 뚜렷한 직진길은 감악산 가는 지능선, 감악산까지는 약 10km,월현산을 거쳐

 합천호까지는 25km되는 거리로 감악단맥을 이루는 능선이라 할 수 있다.  

정월 열나흘날의 달빛은 서산으로 넘어가버리고 칠흙같은 어속에 급경사의 내리막길은

 내려가는데 약간의 혼란스런 길이 나타나 헤매다가 도착한 곳이 덕갈재(수영덩이)다.

수영덤이( 덕갈재:05:25)

경남 거창 남상면과 신원면,산청군 생초면의 3면 경계 고개로

1034번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1951년 2월 빨치산을 일망타진한다는 명분하에 당시 국군 11사단 병력은

무고한 양민 719명을 학살하고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공비와의

전투를 벌여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왜곡하여, 이를 수상히 여긴

중앙정부가 합동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아 조사단의 안내를 맡은

군 당국은 이곳에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사건현장의 길목인 이 수영덤이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하는 만행을 저지른

슬픈 아픔을 간직한 길을 걷고있다.

이에 사건발생 5개월여만에 군법회의는 관련자에게 실형언도를 했지만 일년도 못가 풀려나고..,

 그 책임은 국가임에도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기회만 생기면 탄압을 가했는데 실 예로,

1961년 5.16 군사정부는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 투옥을 시키고,

같은 해 희생자를 합장하여  놓은 박산합동묘소에 개장 명령을 내린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묘역을 파헤쳐 유족들에겐 뼈가루 묻은 흙한줌으로 유골을 대신하여

거주지 공동묘지에 개인별로 이장하라 하였고, 애초 박산합동묘소에 세워졌던 위령비는 글자를

 모두 지워 땅속에 파 묻음으로써, 제2의 학살인 부관참시를 자행한 사건이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수영덤이이의 아픔을 간직한 체 도로를 타고 우측 신원면쪽으로 5분정도 올라가다 다시

좌측 갈전산쪽으로 기수를 돌린다. 여태껏 좌측으로 같이 걸어온 거창군 남상면과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신원면을 맞이한다. 

신원면(神院面)

거창군의 남쪽 끝에 자리하며 동쪽은 합천군과, 서쪽과 남쪽은 산청군에 맞닿았다.

 1914년까지는 삼가군(三嘉郡)이었으며, 동쪽은 율원면(栗院面)으로 수원리 ㆍ 양지리 ㆍ

 구사리가, 서쪽에 신지면(神旨面)은 과정리 ㆍ 와룡리 ㆍ 대현리 ㆍ 중유리 ㆍ 덕산리 ㆍ

 청수리 6개 리가 있었다. 1914년 삼가군이 합천군과 합하면서 신지, 율원 두 면을 묶어서

신원면으로 고쳐서 거창군에 편입시켰다. 지금은 9개 리로 나뉜다.

갈전산 등로입구(05:30)

신원면계의 표지판을 끼고 우측의 갈전산으로 접어든다. 좌측에 어둠속에 확인할 길이

없지만 여러가지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고 뭔지 모르지만 시끄러운 기계음이 조용한

새벽산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조그만 나무다를 건너니 잔설때문에 꽤나 미끄럽다

우측에는 약초재배단지인듯한 곳에 철조망이 쳐저있고 S자 형태로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어둠속에 길을 걸어간다. 사진 몇컷트 찍는 사이에 동료산꾼들은 어디까지 가버렸는지

헤드랜턴 빛은 보이지 않고 홀로 걷는 어둠속에 새벽길... 호젓하고 너무나 좋다.

얼마나 아플까?

우측은 산청군 생초면으로 이곳은 동의보감의 저자이자 명의로 소문난 허준의 스승인 유 의태公의

고향으로  약초의 고장으로 표방하는 곳이다.  그런데 약초재배단지의 쥔장의 형태로 봐서는

약성(藥性)이 별로 없을듯 싶다. 모든게 인품따라 온다고 했는데 약초를 보호하려고 철조망을 치려면

말뚝을 박아서 해야하는데 돈 몇푼 아끼려고 나무에다  못을 박아 철조망을 치는 바람에 철조망이

나뭇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아무리 말을 못한다고... 사람들은 손톱밑에 가시만 하나 박혀도 얼마나 아픈가...

에이 나쁜 사람들... 먹이사슬의 최상위 계층에 인간들은 참으로 잔인한 모양이다.

약초재배 단지의 표지판 

神醫 柳義泰 先生

조선시대(중종 ~ 선조)의 명의로 당대 제일의 하늘이 내린 신의로 칭송 받았던
류의태 선생
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옛지명 丁台)에서 출생하여
금서면 화계지구에서 의술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학식과 의술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품이 호탕하고 기인(奇人)으로서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기고 있는데 이 류의태가 바로 허준의 의학적인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었다는 것이 여러 각도로 미루어보아 부합되는 점이 있어 수긍이 간다.

이 류의태는 의술이 고명하고 다박다재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외척전횡의 정치와 양반계급의

횡포와 노략질 등 부패한 세태에 대한 매도와 의분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풍자와 정론(正論)으로 사회를 통박하고, 늘 해어진 옷과 세립(細笠)을 쓰고 산천을 유랑하며

자유분방한 멋으로 생을 즐겼으므로 당시 경상도 일대의 뜻있는 인사들 사이에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의인(醫人)의 길은 단순히 기술적 기교가 뛰어나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뒷받침 되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류의태 선생은 진정한 의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非人不傳"(중국의 서성 왕희지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으로 허준(醫聖으로 불려지고 있는

 동의보감의 저자임)을 제자로 두어 의학적인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며, 특히 의술의 발전을

위해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제공한 살신성인을 실천한 스승으로 회자되고 있다.

(산청군 홈페이지 인용)

매봉산 갈림길(06:00)

호젓하게 컴컴한 새벽길을 기분좋게 홀로걷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소리가 들린다.

먼저간 동료산꾼들이 매봉산 갈림길에서 쉬면서 소주 한잔을 권한다.

이른 아침에 마시는 해장술에 속이 짜리리한 느낌이 쿨하다. 이곳에서 매봉산까지

0.4km라고 표시해놨지만 기맥길도 아니고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볼품도 없는 곳에

지금 늦게 홀로가서 달도 지고없는 컴컴한 새벽에 체조할 일도없고하여 표기하고

술 한잔을 마신다. 큰 독수리가 살아서 부르는 매봉산을 포기를 하고...

다시 산행을 시작한 지 30분만에 갈전산에 도착한다.

갈전산(葛田山:765.1m : 06:30)

경남 거창군 신원면과 산청군 생초면 청수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예로부터 칡이 많아서 갈전산이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새벽이라 그런지 몰라도

 칡넝쿨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는 삼각점(△거창 314 1982재설)이 서 있고

날씨만 밝으면 전망이 멋진곳일것 같으나 아직도 어둠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날씨가 추워 서둘러 갈전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산친구님들이 붙여논 표시판엔 763.9m라고 표시해놨으니 바로앞의 국립지리원의

삼각점 이정표에는 765.1m라고 표기해놔서 범여는 삼각점을 따르기로 한다.

갈전산 삼각점

춘전치-갈전산 구간의 트랙

어둠속에 갈전산을 뒤로하고 조그만한 잔봉우리 몇개를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춰 안부 능선을 타고 걷는다. 며칠전 55만년에 2월 추위로 가장

추웠다는 혹한을 염려했지만 오늘은 푸근한 날씨에 바람한 점 없는 그야말로

산행하기에는 금상첨화이다. 산행에는 겨울산이 가장 맛있긴 하지만 추울때는

손발이 너무 시려오는 고통이라 싫다. 거기다가 먹는것도 힘이들고...

안부 능선 우측에 있는 이 약초농장은 참으로 양심적이다

나무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철조망을 이쁘게 잘 쳐놨다... 이렇게해야 맞는것이지

갈전재(06:50)

경남 거창군 신원면 갈밭마을과 산청군 생초면 향양리 고촌마을을 잇는

고개로 예전에는 꽤나 통행이 많을법한 고개로 보이나 지금은 소나무가

고개를 다 점령해 버렸다. 다시 고도를 높혀서 힘들게 내려온 만큼 올라간다.

묘비없는 무명묘지는 눈속에 파묻혀 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무 편하게...

철마산 가긴전 이정표(07:20)

이제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사물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멋있는 산들이 보인다. 그런데 오늘은 포기해야 할 듯 싶다. 

생각보다 박무가 심해서 시야확보가 힘들것 같은 느낌이다. 

즐거운 아침만찬(07:30~08:30)

진양기맥을 시작한 지 처음으로 아침다운 아침을 여유롭게 먹어본다.

통상적으로 정맥이나 기맥 산꾼들은 식사시간을 20분이내 끝내는게 불문율이다.

거기다가 우리 산행대장은 속칭 산신령이다. 얼마나 걸음이 빠른지 솟다리인 범여는

정말 죽을지경이다. 그런 대장을 따라가려면 먹는시간 쉬는 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안되기에... 오늘은 대장님이 너무 여유를 부린다. 그것도 아주 멋있게(?)

정말 맘에 쏙들정도로... 산은 늘 거기에 있는데 왜 그리 죽기살기 가는지 이해를 못할 정도였는데.

대장님 앞으로의 구간도 아렇게 해주실거죠. 오랫만에 전 산꾼들이 같이 모여서

철마산 가기직전 어느  망자의 묘지를 점령하고 아침상을 펼친다.

여느때는 상상도 못할정도로 푸짐하다. 삼겹살, 쭈꾸미, 오뎅탕에다가 막걸리, 소주, 복분자, 솔방울술 등등

1시간을 넘게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여유만만인데 너무 쉰 탓인지 추위가 엄습해온다.

베낭 정리를 마치고나니 동료산꾼들은 다 도망을 가고 오늘도 졸지에 후미가 되 버린다.

山이 맑아 山淸이라네
국립공원 1호가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3개도와 다섯 개의 시군(산청군, 함양군, 하동군, 구례군, 남원시)이

걸쳐있는 명산 중의 명산이다. 지리산의 주봉은 1,915m의 천왕봉으로 산청쪽으로 치우쳐 있고 대원사나

 법계사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어 지리산하면 산청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는다.

(天鳴猶不鳴)」는 남명선생의 말처럼 그 광대무변의 지리산은 산청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산청읍에서 원지쪽으로 내려오는 3번 국도는 경호강을 끼고 펼쳐지는 조망이 여간 아름답지 않다.

 그 경호강 물줄기 건너편이 바로 지리산 줄기이니 오죽 장쾌하랴. 사실 지리산이 펼쳐놓은 산청의

 산세는 어디를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산이 맑아 산청임에는 틀림이 없다.

 

경남에서도 가장 오지이며 내 고향 의령만큼이나 낙후되어 있는 이곳 산청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유학의 거두인 남명조식(南冥曺植)선생... 그 분의 고향은 인근 합천군 삼가출신이지만

사실 산청으로 분류될 정도로 산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신 분이다.

허준의 스승인 신의 유의태,  목화를 중국에서 가져와 민초들의 의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준 문익점,

민안부, 오건, 곽종석과 한국불교의 획기적인 한 획을 그으신 가야산 호랑이로 통하셨던 퇴옹당 성철

(退翁堂 性徹) 대종사가 이곳 산청출신이다.

철마산 정상 가기직전에 잘 관리된 헬기장이 하나 있고 그 아래엔 통시바위가 있다.

통시란 화장실의 경상도 방언인데 통시란 부르기엔 너무 큰 느낌이다.

철마산 정상에 오르니 정말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다. 저 멀리 눈덮인 남덕유산이 정말 멋있고

그 앞에 지난구간 지나온 금원산, 월봉산, 기백산이 안개에 가려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좌측으론 백두대간 능선인 백운산과 영취산 그리고 그 앞의 괘관산... 눈을 약간 돌리니

거망산과 황석산 거야말로 환상 그 자체이다. 아쉽다면 저 박무가 산꾼의 애간장을 다 녹이는구나.

저 아래 산청군 생초면의 한가로운 모습도 눈 안에 들어오고...

농은 민안부 장군의 정취가 느껴지는 이곳 생초다

 

농은 민안부 선생은 본관이 여흥으로 고려말 송경(지금의 개성)에서 살면서
예의판서를 지냈다. 이때 1375∼1388년(고려 32대 우왕)에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시기로 1388년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임명하고 우군 도통사에는
이성계, 좌군 도통사에는 조민수를 임명하여 명나라의 랴오둥을 정복하여 사기를
꺾어 놓고자 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조민수를 구슬려 마침내 군대를 돌이키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 이다 . 이성계 장군은 군대를 돌이켜 돌아와 실권을 잡아 1392년에
조선을 세웠다.

고려가 이렇게 망하고 보니, 많은 충신들은 이성계에 불복하므로 정몽주, 이색, 조민수, 권근 등이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다른 충신들도 관복을 벗고 두문동으로 들어 갔다.

두문동이란 조선이 세워지자 이에 반대하던 고려의 신하들 72명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숡에

들어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싸우다가 이성계로부터 죽임을 당한 곳이다.

이러한 곳인 두문동에 민안부 선생도 들어갔다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물러났다.

그리하여 민안부 선생은 멀리 남쪽을 향해 이 고장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 한계에까지 내려와 숨어 지내며,

산과 강을 벗삼아 농사를 짓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았다.

또한, 그의 아들 민유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벼슬하지 않았다.

그후 후손이 번영하였는데, 조선 500년간 산청 민씨의 시조가 되었다.

농은 민안부 선생의 절의와 지견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민안부 선생은 이 고장에 은둔하면서 고려의 왕실을 그리워하며, 생초면 대포리와 금서면 화계리에

걸쳐있는 왕산 중턱의 큰 바위까지 올라가 항상 고려의 옛 서울인 송경(현재의 개성)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그 뒤, 큰 바위를 망경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손들이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후손들이 ‘대포향사’

를 생초면 대포리에 세워 봄, 가을에 향사로서 그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철마산(鐵馬山 :744m:08:50)

경남 산청군 생초면과 거창군 신원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鐵馬山이란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오는 지명이다. 

 우리나라 철마산 이름이 20여개 되는데 말발굽형태를 지닌 산이란 뜻도 있고

 말을 탄 장군이 탄생한 곳이란 뜻도 있고 여러가지 어원에서 전이된 산도 있어

그 어원은 여러가지인데 아마 여기는 말발굽형태의 철마산이란 뜻일 것으로

추측되고 6.25때 지리산빨치산과 국군토벌부대인 107연대와 대치했던 곳이다.

그래서 맞은편 신원면 대현리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하여 인근주민 700여명이

학살되었던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철마산은 소가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성이 있는 곳이다.,내림길의 철마산성의

 흔적을 확인하고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온다. 이곳은 소나무가 상당히 많은 곳이다.

가끔가다가 무명 묘지도 나타나고 한참을 내려오니 강원도의 화전민 부락같은 곳이 나온다.

철마산 정상은 정말 떠나기 싫은 곳이다. 이처럼 시야확보 할 수 있는 곳은

산행을 하면서 그리 쉬운 곳은 아니다. 사방팔방으로 뻣어있는 산줄기의 모습이

환상적인 그 자체이다.  우측 능선 너머로 거창 감악산이 보이고 지나온 진양기맥의

줄기와 저멀리 지리산의 모습도 아련히 보이고 다음구간에 가야할 황매산도 보인다.

갈전산-철마산구간의 트랙

꼭 강원도 화전민 마을을 연상케 하는 마을과 가야할 바랑산과 소룡산 그리고

저 멀리 합천 황매산도 보인다.

흰머리재(595m:09:20)

산청 생초면 노은리에서 거창 신원면 중유리로 넘어가는 흰머리재

철마산에서 급경사의 길을 내려오다 키가 3m가 족히 넘을듯한 산죽(조리대)

군락지를 지나 내려오니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흰머리재란다.

이 아래 마을이 산꾼들의 산행기에는 신촌마을로 등장하는데 지도상에는

신예동마을로 표기가 되어있다. 아마 예동마을에서 새로 떨어져 나와 마을이

형성된 마을인 모양이다. 그런니 신촌과 신예동으로 표현한 것이 맞을듯 싶다.

콘크리트의 농로에 접어들었다가 다시 갈대밭과 정리 안된 등로의 숲길을 걷다가

마주친 인삼밭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인삼밭이 기맥길을 짤라먹은 형태가 되는 셈이다.

인삼밭 두둑을 지나 절개지를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듯 걷는다.

인삼밭을 지나니  아마 인삼밭 주인의 소유인듯한 가건물 앞에는 쓰레기를 소각한

지저분한 현장과 개쉬끼 한마리가 심하게 짖어대고 있다. 이곳의 임도를 따라 오르니

미끄러운 마사토의 언덕이 나타나고 다시 관리가 안된 소나무숲이 나온다.

잠시후에 다시 임도로 접어드니 우리 앞에가는 동료 산꾼들을 만난다.

호젓한 소나무 숲을 지나가고...

철마산에서 내려와 흰머리재에서 인삼밭을 지나 능선을 타고 빙빙 우회하여

이 길로 접어든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이곳에서 마을 앞을 지나온

사람들도 있고 엉뚱한 곳으로 간 사람들도 있어서 이곳을 진행하면서 길을

찾는데 애를 많이먹은 흔적들이 보이는 곳인데 우린 리더를 잘 만난 탓인지

편안하게 기맥길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부터 우측 능선은 여태껏 같이 걸어온

산청군 생초면과 이별을 하고 오부면으로 접어든다.

예동마을의 모습(거창군 신원면 중유리 소재)

한적하고 정겨운 모습이 내 고향마을처럼 포근하게 느껴진다.

예동마을 뒤에 보이는 산이  보록산(645m)이다.

보록산은 마고할미의 아들이고 월여산은 마고할미의 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지명에 관한 설화를 보면 마고할미라는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온다.

오늘 걷는 이곳도 곳곳에 마고할미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월여산, 보록산, 바랑산, 세이덤, 송곳바위, 소룡산 등이 마고할미에 관련된 곳이다.

 

이곳과 관련된 지리산 마고할미는 천왕봉 산신인데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 살면서 딸만 여덟을 낳았다. 그러던 가운데

반야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을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들었다. 그러나 반야는 마고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끝내 숨지고 말았다. 찢겨진 옷은 반야봉으로 날아가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다

밭사이의 콘크리트의 임도길을 계속 걸어간다.

저 멀리의 바랑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 거창 감악산이 박무에 가린체 아련히 보이기 시작한다.

5개의 송신탑은 보일듯 말듯하고...

임도로 계속 걸어가도 바랑산 올라가는 예동마을 삼거리가 나오지만

명색이 정통산꾼을 자처하는 범여에겐 그게 통하질 않는다.

밭고랑을 지나서 잘려진 절개지로 올라서니 사과밭이 나타나고 쥔장나리가

길을 가로막고 철조망을 쳐놔서 부득이 우회를 해야한다.

사과나무밭 절개지를 고집스럽게 지나간다. 편안한 임도를 두고...

예동마을 삼거리(09:50)

바랑산 가기전 1.4km 지점의 이 예동고개는 시멘트임도가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

예동마을과 산청군 오부면 왕촌리 신촌마을을 연결한다

예동마을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돌아 바랑산을 올라가는 수레길을 걷는다.

평소같으면 벌써 도망가버렸을 나하고 2년을 낙동정맥과 호남정맥을 같이한

말그대로 젠틀님이 젠틀하게 범여하고 이상하리만큼 늦은 황소걸음으로...

같이 동행한 도히님과 도로가에서 판을 벌인다. 막걸리 한병을 게눈 감추듯이

없애 버리고 쿨한 마음으로 바랑산을 향한다.

임도 끝에서 다시 급경사의 마루금으로 접어든다. 탁배기 한사발로 인해 기분은

쿨했지만 오르막엔 힘이든다. 도히님이 자꾸만 쳐진다. 소나무에서 우러나오는

피톤치드의 영향 때문인지 머리가 상쾌하다.

바랑산 정상에서 바라본 황매산은 박무로 인해 보일락말락... 애간장을 다태운다.

바랑산(796.4m:10:30)

경남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와 산청군 오부면 왕촌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2만5천분의 1 지형도에는 바람산으로 기재 돼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나 산꾼들은

 모두 바랑산으로 안다. 바랑은 '배낭'이 변한 말로 스님들이 지고 다니는 볼록한

주머니다. 산청 바랑산은 원래 마고할미의 주머니였다고 한다.

 인근 소룡산의 새이덤은 마고할미가 바랑에 넣고 가다 흘린 돌무더기. 옆에 있는

월여산은 딸. 보록산은 아들이라고 한다.'마고할미 설화'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뼈대'가 있다는 것이다.  진양기맥 좌측 능선엔 마고할미가 바랑에 돌을

넣어 정상으로 가다 흘린 길이 1km가 넘는 너덜이 있는 용두암과 괭이바위에

관한 전설이 전해오는 길이 있다고 하는데 기맥길이 아니라 확인을 못하고 소룡산으로 향한다.

철마산-바랑산 구간의 트랙

바랑산 정상에 오르니 앞에가던 대장이 또 우리를 기다린다.

뭐가 잘못됐나(?) 오늘은 참으로 헷갈린다. 멋진 사진도 찍어주고...

이렇게 기분좋은 날 여기서 젠틀맨님과 또 막걸리 한병을 비우고

편안 걸음으로 솔밭길 내리막을 향한다. 

큰재 (10:40)

바랑산과 소룡산의 중간지점인 큰재는 거창군 신원면의 대현리와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를 잇는 옛길로서 서낭당의 돌무덤이 보인다.

702봉(10:50)

소룡산 오르기전에는 건강한 소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다.

이곳은 소룡산 산림욕장이 있고 그 아래는 소룡산 8부 능선에

 천지사란  절이 있다고 한다.

안부

세이덤 올라가는 길에서 뒤돌아본 오늘 내가 걸어온 길과 바랑산의 모습

소룡산과 바랑산은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의 오지에 위치한 왕촌, 신촌, 오휴마을 등을 에워싸고

있으며, 바랑산은 북쪽방향의 왕촌과 신촌마을의 뒷산이고, 소룡산은 남쪽방향의 오휴마을 뒷산이다.

이 산은 서로 능선을 같이하고 있으며, 거창군 신원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세이덤 올라가는 길의 전망대 바위에서 낙동과 호남정맥 동지인 젠틀맨님과...

세이덤 오름길에서 바라본 恨이 많은 동네인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의 모습

대현리(大峴里)는 골짜기 전체를 한재골이라 해서 괘현이라고 쓰며, 내탄 ㆍ 외탄 ㆍ

 도토점 ㆍ 진목평 ㆍ 하대현 ㆍ 대현 ㆍ 중대현 ㆍ 상대현 등 여덟 개 마을이 있다.

“탄”이란 골짜기를 뜻하는 고구려 말이라고 한다.  저 멀리 1950년대 거창 양민 학살이

이루어진 박산골이 희미하게 다가와 갈길바쁜 산꾼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예전의 그 원한은 부디 잊어 버리시고 부디 왕생극락 하옵소서...

비석 받침대 위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박산 합동묘지 위령비

1951년 2월 10일 한국전쟁 중 신원면에서 일어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95년

12월 18일 국회에서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통과해 1998년 합동위령사업을

시작해 2004년 추모공원을 지어 완공함으로써 반세기가 넘어 국가가 잘못을

인정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거창문화원에서 발행한 ‘거창 명승지의 역사와 전설

(2008)에 따르면 신원면의 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시작됐다. 민가 78채가 불타고 주민 84명이 숨졌는데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 5명이 당시의 정황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2월 10일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며 과정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로

 집결시켰다. 와룡리 주민 100여 명을 집결지로 데려오는 도중 대현리 탄양골에서

 집단 사살했다. 2월 11일 날이 밝자 군인·경찰·공무원 가족만 가려낸 다음 517명을

 과정리 박산골로 끌고 가서 무차별 사격하고 죽은 시체 위에 솔가지를 덮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다른 지역에서도 주민 18명이 학살을 당하는 등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 총 814가구의 1583채가 불탔고 719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였다. 1951년 2월 11일 신원면의 하루는 그렇게 무참하게 저물어갔다.


박산 합동묘지. 이곳에는 어른남자·어른여자·아이의 유골이 세 곳에 나눠 묻혀 있다.

 

속절없는 세월은 흘러갔고 우여곡절 끝에 1954년 신원면 주민들은 박산골에 방치돼

있던 학살현장의 유골을 수습했다. 누구의 유골인지 구분할 수 없어 어른남자, 어른여자,

아이로만 구분해 뒷산에 묻었다. 1960년 5월11일 박산 합동묘역 석물 운반 작업 중에는

분노가 폭발한 주민들이 면장을 살해하는 또 다른 비극이 생기기도 했다.

1960년 11월 18일 신원초등학교 옆 언덕에 남자합동지묘(109구), 여자합동지묘(183구)

두 개의 봉분을 만들고 아이들 유골(235구)은 봉분 없이 소아합동지지라고 표지해 두었다.

1961년 5·16군사정부는 박산합동묘지의 개장명령을 내리고 묘역에 세운 위령비는 글자를

정으로 쪼아서 뭉갠 다음 땅에 파묻어버렸다. 1987년 민주화의 열풍이 불자 유족회는 땅속에

묻혀 있던 위령비를 꺼내 비석 받침대 위에 걸쳐 놓았다. 박산골 합동묘소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추모문, 천유문, 위패봉안각, 위령탑,

부조벽, 묘역, 조각, 역사교육관 등이 있다. (거창사건 추모공원 홈페이지 인용)

소룡산 산림욕장에서 세이덤을 좌측으로 끼고 소룡산 오름길은 경사도가 대충

어림잡아 75도 정도는 되는가 싶다. 급경사의 직벽을 오르는데 여태껏 마신

탁배기가 거꾸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이든다. 20여분을 죽을 힘을

다해 오르니 안부 정상에는 이름모를 묘지 한기가 있다. 대충 처음봐서도

온 사방이 탁 트인 그야말로 명당이나... 요즘 후손들은 엄청나게 힘이 들겠다.

산을 좋아하는 산꾼들은 몰라도 책상머리에 앉아 펜대나 굴리는 후손은 얼마나

조상님이 원망스러울까? 정상으로 오르니 사방이 탁트인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또다시 젠틀맨님의 베낭에서 어김없이 막걸리통이 나온다. 도히님과 셋이서 또 한병 해치운다. 

 세이덤 송곳바위

마고할매가 가죽옷을 꽤멜때 쓴 바늘이라고 한다

세이덤(11:30)

소룡산 오르는 급경사의 옆에 멋지게 생긴 바위群이 나타나는데 이 바위군을 세이덤이라고

부른다 . 이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거창군과 산청군의 지명에 관한 사이트를 검색해도

알길이 없다.  어느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면 마고할미가 바랑에 넣고가다가 흘린 돌무더기라고 한다.

 

그런데  세이덤에 가면 그 돌무더기에 묘지 1기가 이곳에 묻혀있다

‘세이’라는 뜻은 경상도 방언으로  형님이란 뜻이고 ‘덤또는 ‘덤바꾸’란 뜻은 경남지방에서

바위라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아마 앞으로도 진양기맥 구간엔 이란 단어가 들어간

바위를 많이 만날것이다. 유추해 보건데 세이덤이란 형님이 묻힌 산소가 있는 바위라서

세이덤이란 단어가 생긴거 아닌지 모르겠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세이덤 위 안부에 있는 묘지

안부 능선에 바라본 신원면 와룡리와 그너머 합천의 진산인 황매산의 모습

소룡산(巢龍山:760.9m:11:55)

경남 산청군 오부면(梧釜面에 있는 위치한 산으로 정말 때묻지 않은 오지의 산이다.

'소룡산'이라는 이름을 굳이 뜻풀이 하자면 '용의 둥지'쯤이 될 법하다.

지나온 바랑산과 소룡산의 글자 지명은 바랑산의 ‘바랑’은 새의 둥지를 뜻하고, 소룡산의

‘새집 소(巢)’자도 둥지 또는 집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산의 이름대로 본다면 바랑산은

모든 새의 둥지이고, 소룡산(巢龍山)은 용의 둥지를 뜻하므로 새와 용의 보금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바랑산은 스님이 바랑을 짊어지고 넘은 산이라고 하여 바랑산이란 말도 있다.

8부 능선에는 천지사(사찰)가 위치해 있다

소룡산 정상에 있는 이정표

소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의 모습

마치 강원도의 최오지 산행을 온 느낌이다. 소룡산 정상에서

베낭의 마지막 막걸리 병을 비운다. 너무 마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즐겁게 마시니 술도 약이되는 모양이다.

소룡산 정상의 헬기장

소룡산에서 고도를 200정도를 낮추면서 소룡고개로 향한다.

정상에서 대장님과 이곳 신원면 출신인 산사람님, 젠틀맨님과

그외 몇분이 함께 하산에 동행한다. 산사람님에게 이곳에 대한 존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오늘은 구간이 짧기도 하지만 참으로 여유로운 산행을 한다.

소룡고개(12:30)

소룡산에서 20분정도를 내려오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소룡고개이다.

좌측에는 남쪽에서는 보기힘든 커다란 오미자밭이 나타난다.

오미자란 좀 추운곳이 경북 문경 동로면의 황장산 아래와 속리산 아래인 상주시

화북면이 주산지인데 이곳도 겨울에는 꽤나 추운 모양이다.

소룡마을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 굉장히 큰 오미자밭을 끼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정수지맥 분기점이 나타난다.

정수지맥 분기점(12:35)

정수지맥이란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뻗어 내려오던 진양기맥의 산줄기가 

소룡산(760.9m)에서 밀치(59번국도)로 내려서기전 627.6봉우리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산줄기인데...

이 정수지맥은 매봉(599m), 구인산(583m), 정수산(825m), 가재산(841m), 둔철산(811.7m),

마제봉(190.5m), 적벽산(160m)으로 이어진 도상거리 37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정수지맥 분기점에서 좌측 강섭산쪽으로 하여 오늘의 날머리인 밀치로 향한다.

임도길의 편안한 능선을 걷다가 솔밭길로 접어들고 다시 편안길을 내려가니

소룡마을의 커다란 밤나무 단지가 나타난다.

부드러운 임도와 밤나무 단지를 지나니 날머리인 밀치가 보인다.

도로에 들어서니 신원면에서 세운 오늘도 좋은날 되소서라는 비석이

산꾼을 반갑게 맞아준다. 범여의 화답 Have a nice day 감사 감사 또 감사

치(密峙:12:50)

경남 거창군 신원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인 날머리 밀치에 도착한다.

이곳은 거창과 산청을 연결하는 59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지만 오지라

그런지 차량통행이 상당히 뜸하다. 지명을 보니 예전이 이곳이 숲이

상당히 우거졌던 모양이다.

예전에 비해 그리길지 않은 구간을 마치 일반산행하듯 여유롭게 8시간 50분의

 여정을 마치고 산행을 마감하는 스틱을 접고 버스로 향한다.

바랑산-밀치구간의 트랙

선두와 후미와의 시간차가 별로없어 곧바로 오늘의 식사장소인 산청읍내로 향한다.

20분간의 좁고 꼬불꼬불한 재를 넘어 경호강 근처에 자리잡은 식당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G.P.S 표시

오늘 식사 장소인 지리산 약두부집

경상도 음식치고는 그래도 좀 먹을만 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밥 한공기와 반주로 소주에다 맥주를 말아서

서너잔 연거푸 마시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거창군 신원면 출신인 산사람님이 식사를 스폰서하고 건배제의를 한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이 보시공덕 세세생생 복 많이 받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