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2.02,19
☞ 산행날씨 : 맑음, 엄청난 추위(체감온도 영하 30도는 되는 느낌)
☞ 참석인원 : 백두사랑 산악회 21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17.3km G.P.S거리: 약 20 km / 9시간 30분 소요
☞ 산행코스 : 밀치-강섭산-소황매산-떡갈재(황매산 터널)-967봉-황매산 황매봉-중봉
-박덤삼거리-668.2봉-구름재-두심 삼거리-허굴산 갈림봉-정지골재-월계치
☞ 소 재 지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 산청군 차황면, / 합천군 대병면, 가회면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雨水가 오늘이건만 아마 올겨울 산행중에 가장 추운 날씨인것 같다.
자꾸만 날씨가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2월이 1월보다도 더 추우니 말이다.
환경의 변화인가?... 요즘은 뭐가 뭔지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 금요일(17일)은 이 시대의 영원한 스승인 法頂스님이 열반하신지도 벌써 3년째다.
무소유를 실천한 진정한 스승이었는데 자꾸만 그립기만 하다.
갈수록 삶의 질이 팍팍해지고 힘이드는 세상에 마음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 당신이 그립습니다.
(원본클릭)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전구간 트랙 도표
밀치(03:50)
도로 옆의 둔덕(차황방면)에는 2008년도에 설치한 밀치 수준점(B2-02-00-39-08)이
있는데 해발고도는 503m이다. 산청군 차항면과 거창군 신원면의 경계로 59번 국도가
지나가는 우측 신원면의 소룡산 아래에 있는 소룡마을의 가로등만 마을임을 알려준다.
칡흙같은 어둠속의 새벽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듯한 수많은 별들과 정월 스무
여드렛날의 하현달만 새벽 산꾼들을 반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고개를 밀재라고 하면 모르고 밀짐재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로부터 거창군 신원면입니다’라는 노란표시가 된 표시석이 수줍은듯 나무뒤에 숨어서 산꾼을 반긴다.
이곳은 산청군쪽은 마을이 없고 거창군의 소룡마을이 밀치를 지킨다. 신원면에서
설치한 ‘ 오늘도 좋은 날 되소서’ 라는 표시석을 접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산행장비를 점검한다.
이곳이 해발고도가 500고지가 넘다보니 날씨는 차가우나 오지라서 그런지 공기가 어찌나 맑은지 코가
뻥둘리는 느낌이다. 간단하게 찹쌀모찌와 함께 커피 한잔을 마시고 산행을 준비한다.
밀치에 있는 수준점
오늘 산행을 시작하다 (04:15)
오늘은 산행거리가 짧아서 조금늦은 새벽 4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으나 우리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사님의 수면시간을 고려해서 조금 일찍 출발한다.
좌측 임도로 접어들어 ‘강섭산 1.1km’ 라고 붙인 이정표를 따라 마루금에 접어든다
몇번의 오르내림을 반복하지만 그리 힘은 들지 않는다. 좌측의 신원면 대현리 박산마을
인듯한 곳에 불빛이 유난히 아른거린다. 60년도 지난 거창양민학살사건의 무고한 원혼들의
한맺힌 불빛이련가. 국가에서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아직도 무주구천을 헤매고 있는 영혼이여
한많은 모든것을 이젠 용서하고 부디 서방정토로 향하소서... 사바세계에 억울한게 어디 그뿐이겠소.
강섭산(646m:04:40)
산행시간 25분만에 기맥 마루금에서 약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강섭산을 들린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강섭산은 고도가 646m로
아래쪽 도로에서는 이정표가 잘되어 있더니만 정작 강섭산에는 아무런 이정표가 없었다.
이곳은 아무런 표식도 없고 온 천지에 간벌을 하고 정리가 안된 나무로 인해 어둠속에
등로찾기가 엄청나게 힘이든다. 강섭산을 놓쳤다가 G.P.S로 확인한 후에 다시 되돌와
강섭산에 들리니 손바닥보다 조금 큰 어느 개인이 설치한 표시석이 자리잡고 있다.
지도상에 엄연히 표시되어 있는 강섭산의 내력을 아는곳은 아무도 없었다. 하도 궁금하여
며칠전 산청군 차황면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물었더니 면사무소 직원이 하는 말 ‘ 우리 지역에
그런 산도 있어예?’ 하는 대답이다. 거창군 신원면 사무소도 모른다는 대답뿐이다.
추측컨데 강섭산은 혹 가섭산(迦葉山)이 세월이 지나 변음되어 강섭산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범여의 생각 中에서) 실제로 가섭산은 한남금북정맥을 타다보면 음성읍내를 외호하고
있는 뒷산이 가섭산이고 그 산명을 여러군데에 있기도 하고...
우리나라 명산의 산명의 대부분이 불교지명인걸 보면 충분히 추측이 간다.
부처님의 10대제자중의 제1인 가섭(迦葉)존자의 명칭이 아닌지 하는 궁금증을 가지면서
추위 때문에 얼른 다시 길을 떠난다.
갈밭재(04:55)
거창군 신원면 소야리와 산청군 차황면 장박리를 잇는 고개이다.
강섭산에서 다시 기맥 마루금을 되돌아와 한참을 길을 헤맨다.
칠흙같은 어둠속에 간벌을 하고 정리안된 소나무땜에 도대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가 시그널도 보이지 않고... 한참을 헤맨끝에 다시 길을 찾아서 몇번의 오르내림을
한끝에 도착하니 콘크리트 임도가 나타나고 이곳이 갈밭고개이다.
거창군 신원면쪽의 이정표
갈밭재를 지나서 조금 오르니산청군에서 다시 거창군 지역으로 들어온다.
이곳은 소야마을로 가는 편안한 임도가 나타나고 다시 꺽어서 오르니 철쭉을 비롯한
잡목이 얼기설기 있고 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안부 아래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다시 어둠속에 급경사를 치고 오른다. 철쭉을 비롯한
키작은 잡목들이 얼굴을 마구 할키는 바람에 쓰라럽기 시작한다.
너덜길을 지나 조금 오르니 소황매산이 나타나고 살을 에이는 듯한 새벽의 칼바람이 분다.
소황매산(843m:05:45)
경남 거창군 신원면과 산청군 차황면, 합천군 대병면이 맞닿는 3면 경계봉이다.
여태껏 지난 3구간에 덕갈산과 수영덩이 고개에서부터 시작되던 거창군 신원면과
어둠속에 이별을 고하고 좌측으로 합천군 대병면을 새로이 맞이한다.
소황매산이란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초라하기만 하다. 어둠속에 합천호 주변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해가 뜨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자꾸만 바람과
추위의 강도는 더 심해지고 이젠 발까지 시려온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분기되는 능선이 거창의 월여산으로 이어지는데 어둠속에 알길이 없다.
소황매산에서 우측으로 급경사의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어둠속에 무명묘지를 지나니 과수단지 같은 곳이 나오고 깨끗하게 간벌을
한 곳에는 몸이 밀릴 정도로 바람이 세기만 한다. 하도 추워서 베낭속에 자켓을 꺼내
하나를 더 껴입고 장갑도 두꺼고 보온이 훨씬 잘되는 고어텍스 장갑으로 교체한다.
급경사로 치고 내려오니 콘크리도 도로가 어둠속에서 나타난다.
참 희한하게 생긴 갈참나무
떡갈재(665m:06:15)
경남 합천군 대병면과 산청군 차황면의 경계로 이 고개아래로 황매산터널이 지나간다.
도로로 내려서니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 삼거리가 나타나고 아크릴로 표시된 떡갈재
표시판은 깨어져 있고 삼거리 우측으로 가니 이정표와 황매산 등산 안내도가 있다.
이곳에서 후미가 올때까지 10여분간 휴식을 취한다. 추워서 베낭을 벗을수도 없어
선 채로 휴식을 취한다. 꿀맛같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마루금으로 들어선다.
이별을 준비하는 새벽달
어둠속에 서서히 황매산의 실체가 드러난다. 임진년 정월 수므여드렛날의 하현달은
산꾼과 이별을 준비한다. 서서히 고도를 높혀가긴 해도 그렇게 힘은 들지는 않는다.
이곳은 안부의 음지 방향이라 그런지 바람도 고요하고 여태껏 구경도 하지못한 눈이
꽤나 쌓여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니다. 조심스럽게 산을 오른다.
다시 안부능선에 오르니 엄청난 바람이 산꾼을 괴롭힌다. 바람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이다보니 더욱 더 힘이든다. 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다시 옷에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도 귀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합천호도 모습을 들어내고
그 뒤의 산에선 해가 떠오르려는지 산이 벌개지기 시작을 한다.
967봉(06:50)
너백이라고 하는 967봉에 오르니 날이 완전히 밝아오고 저 멀리 지나온 남덕유산과 기백산
그리고 지난구간을 거쳐온 거창의 감악산과 소룡산이 보이고, 능선 아래에는 강원도 만큼이나
오지인 산청군 차황면이 겨울잠에 푹 빠진듯 조용하기만 하다. 우측으로는 마치 수미산처럼이나
신비롭게 보이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안만큼이나 포근하게 보이는 눈에 쌓인 지리산이 보인다.
산 정상에는 헬기장과 벤치, 그리고 안전뱅이 소나무가 추위에 지친 산꾼을 반긴다.
이곳 주위는 바람을 막아줄 나무는 전혀없고 주위에는 억새와 철쭉만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카메라 뱃터리가 얼어 버렸는지 작동이 되질 않아 뱃터리를 뽑아 품안 주머니에 넣는다.
산청군 차황면 상중마을 가는 갈림길(07:10)
너백이재에서 황매산가는 길은 이곳이 철쭉축제로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등로관리와 이정표는 잘되어 있고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황매산이 보인다
967봉에서 황매산 정상가는 길의 황매평전은 그야말로 룰루랄라 길이다.
지독하게 불어되는 칼바람만 빼고는...
황매산 가는 길
아직도 지난해의 무슨 미련이 남아 있는지 떠나지 못하고 황매산 가는길에 서있는 고엽(枯葉)
이 힘든 사바세계에 무슨 미련이 있길래... 어쩌면 이 범여의 자화상같이
나 역시 이제 정든 인연들과 서서히 이별 연습을 해야하건만 맘대로 안된다.
합천호도 아침을 맞이하고... 황매평전에서 바라본 합천호의 모습
저 구름너머로 신비로운 자태로 눈에 휩싸여 있는 지리산의 모습
우측으로 약간 고개를 돌리니 백두대간의 등줄기인 백운산과 영취산
그리고 그 앞에는 괘관산이 눈에 휩싸인체 신비로운 모습으로 아련하게 보인다.
마치 어염집 기생의 치마폭에 싸여 보일락말락 하며... 산꾼의 애간장을 다녹인다.
황매산 오름길에 북풍한설은 얼마나 센지 고통을 감내하기가 너무나 힘이든다.
배는 고파오는데 밥상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먹어야만 하기에...
우측 능선 아래로 바람을 피해 밥상을 펼친다. 베낭에서 도시락을 꺼내는 사이에
손이 얼어버린다. 우선 버너를 켜서 손부터 녹이고 오뎅국을 끓여 동료산꾼인
젠틀맨님과 우선 아침해장술을 먼저 한잔하고 밥을 먹는다.
식사시간(07:35~08:00)
젠틀맨님과 산에서 만난 고향 선배님인 한회장(의령 대의출신)과 입담 걸쭉한 심마니 김 선생과
잘 모르는 한분과 쭈꾸미를 매운 고추장에 비벼서 밥을 먹고나니 조금은 살것만 같다.
얼른 베낭을 챙기고 옷매무새를 고쳐서 다시 황매산을 향한다. 그사이에 손은 얼었는지
이젠 감각조차도 없고 발끝은 발톱이 빠져 나가는듯한 통증이 찾아온다. 추워도 너무 춥다.
황매산 정상에서 바라본 산그리메
정말 미치도록 아름답다. 이 맛에 산에 오는게 아닐까?
오늘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인데 하필이면 올 겨울 산행중에 아마
가장 추운날이 아닐까싶다. 이곳 황매산 정상의 날씨는 태풍급 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 30도쯤은 되는듯 싶다. 모든게 다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다.
그래도 주위의 조망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바람의 세기로 봐서는 아마 이곳에
올해 많이도 가물었던 모양이다. 봄의 기지개를 켜는 나무들이 大地를 움직이는
바람에 거센 바람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눈.비가 많은 해에 산에 올라와 보면
바람이 거의없다시피 하는데 바람의 강도가 센걸로 봐서 이곳에 많이 가물었던 모양이다.
황매산 갈림길(08:05)
칼바람의 강도는 자꾸만 드세진다. 기맥 마루금에서 우측으로 100m 정도 떨어서 황매산의
주봉인 황매봉으로 향한다. 조금 내려서니 커다란 바위가 잠시나마 바람을 막아준다.
10분정도 미끄러운 눈길을 걸어 황매봉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발 아래에 황매평전과 황매산 영화 촬영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황매평전과 영화 촬영장
철쭉과 억새로 유명한 황매평전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로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드라마 ‘단적 비연수’ , ‘무사 백동수’등을 촬영한 세트장이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온다.
산청군 차황면과 저 멀리 지리산도 보이고...
황매산 황매봉(黃梅山 1108m:08:15)
경남 합천군 대병면·가회면과 산청군 차황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영남의 소금강으로
불릴만큼 뛰어난 암릉과 멋진 평전이 자리를 잡고있다.
백두대간 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황매산은 무학대사가 수도를 한 산로서 정상에
올라서면 주변의 풍광이 활짝 핀 매화꽃잎 모양을 닮아 황매산이라 부른다.
황(黃)은 부(富)를, 매(梅)는 귀(貴)를 의미하며 전체적으로는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특히, 5월이면 수십만평의 고원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선홍색깔의 철쭉꽃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황매산은 효의 산. 3무(無)의 산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왕사 무학대사가 황매산에서
수도을 할 때 어머님이 뒷바라지를 위해 산을 오르내리면서 칡덩굴과 땅가시에 발등이 긁혀 넘어지고
상처가 나고 뱀에 놀라는 일이 자주 있어 황매산 산신령에 100일 기도를 드렸다. 이후 지금까지
뱀과 땅가시 그리고 칡덩굴이 자라지 않아 3무(無)의 산이라 한다, 무학대사의 어머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은 전설로 이어져 오고있다. 무학(無學)의 의미는 불경에서 더 배울것이 없는 경지를 뜻 한다.
황매산은 중국 황매산이 육조 혜능선 사가 전법계을 받은 산의 이름과 같다.
진양기맥의 허리부분에 위치한 황매산은 발원지 남덕유산에서 남강땜까지 이어지는 진양기맥의
산줄기중에 금원산, 기백산군을 제외하고는 해발고도1,000를 넘는 유일한 산으로 황매평전의
고산철쭉자생지와 목장지대가 있으며 주위에는 허굴산(681.8m), 전암산(696m), 정수산(828m),
감악산(851m), 월여산(863m) 등이 있다. 북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양기맥의 산줄기가 뻗어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이검이고개, 천황재가, 북쪽의 작은 황매산에서 진양기맥의 산줄기가 중봉의
동쪽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 전체의 사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에는 산정상에는
고원지대가 펼쳐지고 있다. 동남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합천군 가회면의 사정천으로
흘러들며 북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황강지류인 옥계천을 이룬다.
황매산 가운데 합천군 일대의 면적 17.99㎢ 지역은 1983년 11월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기암괴석이 곳곳에 분포되어 경치가 아름다우며, 정상부 북동쪽에 위치한 합천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가회면 둔내리에는 신라시대의 절터인 합천 영암사지(사적 131호가 있으며
영암사지귀부(보물 제489호) 영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 영암사지3층석탑(보물제480호)
등의 유물, 유적이 있다.
밀치-황매산 구간의 트랙
황매산 중봉가는 길에서 바라본 대병면의 모습
그너머로 다음 다음구간에는 내고향 의령의 모습이 보이겠지...
합천군 대병면의 위치도
합천군 서북쪽에 위치한 면으로 면소재지는 회양리이다.
황매산(1,108m)을 비롯하여 허굴산(682m)·금성산(580m) 등이 솟아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300~800m의 산지를 이루고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이 북동부지역을 곡류한다.
소규모의 경작지가 황강의 지류를 따라 전개되어 있다. 주산업은 농업이며, 무·배추의 생산이 많다.
그밖에 소·돼지의 사육과 양봉이 활발하다. 상천리-성리를 잇는 합천 댐이 1985~88년에 완공되어
이 지역 농업용수와 전력을 공급해주고 있다. 장서리·하금리·대지리·회양리 일대에 고분이 있으며,
대지리사지(大枝理寺址)를 비롯한 유물·유적이 많다.
황매산의 능선에는 눈이 바람에 밀려서 쌓이고 녹고하다가 기막힌 조각작품으로 남는다.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참으로 멋진 작품으로... 황매능선은 암릉구간으로 참으로 멋있다.
주위의 가시거리가 50km이상이 될 정도로 멋진 조망이지만, 너무 추워서 다 귀찮기만 하다.
이 능선에는 눈이 많이 쌓여 부득히 아이젠을 착용을 한다. 암릉이 너무나 미끄럽다.
내가 가야할 멋진 황매산 삼봉의 멋진 모습이 산꾼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중봉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미끄럽고 위험한 암릉구간이다.
그 아래로 우회길이 있긴 하지만 한발자국도 맥길을 벗어나길 싫어하는 산꾼 범여는
원칙을 고집하며 편한 우회길을 마다하고 험한 암릉길을 택해서 마루금을 이어간다.
내가 지나온 구간의 능선
자꾸만 황매산 정상이 멀어지는데 진한 아쉬움만 남는다.
황매산 삼봉의 안내판
황매산 삼봉중의 중봉 (1103.5m:40)
경남 합천군 대병면과 가회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삼봉(3개의 봉우리) 중에 가장 높은
중봉이다. 산 정상에는 정맥과 기맥꾼들에게는 빛과 소금역할을 해주시는 ‘준.희’님이
걸어논 아크릴 정상 표지판과 삼각점(△산청23-1991재설)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부터는 여태껏 우측으로 함께해 온 산청군 차황면과 이별을 고하고 완전히 합천땅으로
접어든다. 저멀리 대병면의 3산인 약견산, 금성산, 허굴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합천호 너머로
법보종찰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도 보이기 시작한다.
황매산 중봉의 삼각점
정자(08:55)
삼봉 능선에 위치한 멋진 정자에서 동료산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합천호의 모습
경남 합천군 대병면, 봉산면에 걸쳐있는 합천호는 합천댐이 준공되면서 생긴 호수로 면적이
785만 평, 댐 높이 96m, 길이 472m, 총 저수량이 7억 9천만 톤의 인공 호수로 1988년 12월
준공된 다목적 댐이다. 이 곳 합천호는 준공 이후 계속 치어 방류 사업으로 인해 최근들어 조과가
좋은 곳으로 아직까지 낚시 금지 구역이 많은 것이 흠이지만 향어, 잉어, 송어, 붕어 등 다양한
어종을 공략할 수 있는 자연이 수려한 아름다운 곳이라 할 수 있다. 포인트 또한 규모가 방대해 한 번
이동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로 하는 곳이다. 주요 포인트는 댐을 기준으로 좌측편 중류지역 술곡리
옥계 주변과 상류 봉산교 주변, 그리고 우측편 중류 계산리 지역인데 이곳은 교통이 불편한 반면
손맛을 톡톡히 볼 수 있는 지역이다. 특히, 아침 햇살에 피어오른 물안개가 신비함을 더하며 호반
도로의 100리 벚꽃은 전원의 풍요와 낭만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 받고 있다. 동서로 길게 황강을
끼고 병풍처럼 이어진 그림같은 능선과 합천 호반이 이루어진 벚꽃길은 전국 최고를 자랑하며,
주변의 유명한 고가들과 함께 무릉 도원을 연상케 한다.
합천군의 산그리메
합천군은 경상남도 서북부의 위치한 산간내륙 지대로서 동남쪽으로는 창녕군과 의령군, 서쪽로는
거창군과 산청군에 접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고령군과 성주군에 접하고 있다.
가야산, 매화산, 황매산 등 높고 낮은 산맥이 첩첩으로 이어져 있는 곳으로 산이 많으며, 평야는 협소하다.
70km에 달하는 황강이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데, 강폭은 넓으나 수심은 얕은 편이다.
면적은 983.39㎢로 경남의 9.4%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경남의 시·군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이며
서울의 1.6배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인구는 약 53,000명이 23,000여 세대를 이루고 살고 있으며,
1읍 16면의 행정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합천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여러개의 소규모 부족국가가 있었으며, 가야시대에는 옥전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다라국이 있었으나,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발흥한 대가야국이 영역을 확장하면서 대가야에 병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 23년 대가야국이 신라에 병합되므로서 합천지역은 신라에 영속되었다.
신라는 대가야를 병합하고 나서 백제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대야주를 설치하고 도독부를 두었으며,
군사요충인 대야성을 축조하였다. 삼국통일 이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없어지자 경덕왕 16년
주에서 군으로 강등되고 강양군으로 개칭되었다. 강양군에는 초계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팔계현, 대병 지역의
삼지현이 속현으로 있었다. 그리고 야로면 지역에는 야로현이 설치되었는데 야로현은 고령군에 속해 있었다.
고려시대 현종 9년 강양군이 합주로 승격 되었으며, 거창, 가수, 삼기, 초계, 산음, 단계, 가조, 함음, 이안,
신반, 야로, 함양 등 12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충숙왕 3년에는 초계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태종 13년 합주가 합천군으로 개칭되었다. 초계현은 초계군으로 개칭되고 삼기현(지금의 대병)과
가수현(지금의 삼가)은 합병되어 삼가현이 되었다.
1914년 합천군과 초계군, 삼가현이 합쳐져 현재의 합천군이 되었다. 이 때 합천군의 궁소면이 의령으로
편입되고 삼가현의 신원면은 거창군으로 편입되었다 (합천군 홈페이지 인용)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합천은 역사에 남을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죽죽장군은 합천이 자랑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신라의 충신 죽죽장군은 대야성사람이며, 당시
신라의 재상 김춘추의 사위인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당하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원래 김품석은
용감한 화랑이었으나 대야성 도독이 되고 난 후부터는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선덕여왕 11년 백제의 장군 윤충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침공하였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갈팡질팡하던 신라군은 백제의 항복 권유에 따르고자 하였으나, 죽죽장군은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대야성 싸움을 계기로 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가져오게 되었다. 대야성 싸움에서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이 후 대당외교정책을 펴 삼국통일의 의지를 굳혔던 것이다.
박서장군은 몽골군의 침략에 항거한 고려시대의 장수이다. 고종 18년 서북면 병마사 재임시 몽골의 장수
살리타이가 침입하여 구주를 공격하자 김중온, 김경손 장군과 함께 구주성을 끝까지 사수하였다.
박서 장군은 무학대사의 조부이기도 하다.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일조한 승려이다. 조선 개국 후 왕사를 지냈으며, 이성계의
'대사는 꼭 돼지 같아 보이오.'라는 말에 '전하께선 꼭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하며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응답한 일화가 유명하다.
남명 조식선생은 삼가가 고향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여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정치인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혁규 전 경남지사,
안경률, 유재중 국회의원이 합천 출신이며, 경제인으로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한국여성경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안윤정 회장이 합천 출신이다. 스포츠인으로는 김인식 前 한화 이글스 감독이 있다.
무학대사의 존영
합천군지』의 무학대사에 관한 기록을 보면 전무학.후무학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의 도읍지를 서울로 정한 조선태조 王師 무학은 대병면에서 출생한 실존인물로서
, 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이고 호는 무학이다. 출생지는 삼가군으로 지금의 대병면이며
, 아버지 박인일과 어머니 공성채씨 사이에서 고려 충숙왕 14년(서기1327년)에 출생하여
조선 태종 5년(서기 1405년), 79세 되던 해 타계하였다. 『오사설림초기』에 의하면 이성계가
왕에 등극하기전,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그꿈에 넘어지는 집에서 재목인 서까래 세개를 등에
걸머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다음날 사냥을 하러 갔는데 우연히 산중에서 수도하고
있는 무학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끝에 이성계가 간밤에 꾼 꿈이야기를 하니 무학이 해몽하기를
장차 왕위에 오를 꿈이라고 하면서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말대로 왕이 되었다고 한다.
(꿈을 해몽해 보면 3개는 석삼자(三)이고, 그것을 등에 짊어졌으니 이것이 임금왕(王)자가 된 것이다).
무학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며, 대병면의 여러전설로 보아 어린시절에는 효행도 바른 분이었다.
태조 등극 후, 세 관찰사를 보내 무학대사를 찾아와서 태조를 크게 도왔다. 무학이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자고 하였고 정도전이 반대하였으나 태조는 무학의 말대로 한양땅에 도읍지를 정한 것이다.
무학이 설명하기를 한양땅에 도읍을 정하면 500년을 연존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2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다. 『산수비기』에 의하면 신라의 의상대사가 중의 말을 듣고 도읍을 정하면 오래갈 것이고
정씨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代를 지내지 못하고 화가 생겨 200년을 못 넘길것이라고 했다.
중이란 무학을 두고 한 말이요, 정씨란 정도전을 두고 한 것이다. 이처럼 무학은 이태조를 도와 왕사로서
공이 많았으며, 『무학연대록』,『무학전』등 많은 기록도 남겼다
남명(南冥)조식(曺植)선생의 존영
합천군 삼가현 출신인 조식(曺植) 선생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호는 남명(南冥)이며,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학,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나 명종과 선조에게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뤄 당시의 경상도의
남,북을 나눠 북 이황, 남 조식으로 경상도 남북을 영도하는 사림의 태두가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관직으로 나서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명의
문도들을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에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인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지금도 지리산 아래에 위치한 진주, 산청, 합천, 의령, 함양 등의 사람들은
남명 선생의 영향으로 강직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것 같다.
황매산 하봉(993m :09:20)
이곳은 황매산 삼봉중에 하봉에 해당하는 곳이다.
← 삼거리 1,0km →황매산 임시주차장 2.3km라고 표시되어 있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고 경남소방 2-5의 구조목과 산꾼들이 쉴수있는 벤치도 설치되어 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걸어가는데 아직도 매서운 칼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이곳부터는 완전한 합천군이다. 우측에 산청군 차황면에서 합천군 가회면으로 바뀐다.
급한 내리막길은 잔설로 인하여 상당히 미끄럽다. 스틱을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내가 오늘 가야할 진양기맥의 능선길이 뚜렸하다.
거창군 신원면 출신인 동료산꾼이 합천호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있다.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소나무
이곳은 능선에는 나무들이 거의 없고 바람이 세찬 때문인지 이곳 능선에 있는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키가적고 가지가 남쪽으로 뻗어있다. 참으로 자연에게 많은것을 배운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게 아름답게만 보인다. 자연은 인간에게 위대한 스승이다.
삼거리(09:35)
합천군 대병면과 가회면을 넘나드는 삼거리에서 독립가옥이 표시된
우측으로 길을 걷는다. 고도를 800까지 낮춘 탓인지 바람은 많이 잦아졌고 이젠 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키작은 소나무와 암릉사이를 피해서 고도를 계속 낮춘다.
자꾸만 멀어져가는 황매산의 주봉인 황매봉의 모습
몇차례의 오르내림을 한끝에 너덜길을 오른다. 이젠 눈도 거의없고
암릉구간이라 아이젠을 벗어서 베낭에 넣고 너덜길을 올라서니 커다란
돌탑이 길을 막고 할미산성과 치마 덤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할미산성과 치마 덤(09:50)
이 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로 ‘황매산성’ 이 구전되어 오면서 ‘할미산성’으로
변형되어 오늘에 전해지며 이 산성아래 넓은 바위를 치마 덤이라 하여 선녀가
황매산 아래 소(沼)에서 목욕을 하고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치마덤이라고 전해진다.
할미산성
이곳 합천은 가야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가 첨예하게 대립한 곳이 대야성(지금의 합천)이다.
신라와 백제가 영토 확장이 치열했던 곳... 백제가 신리의 수도 서라벌(지금의 경주)를
치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이곳 합천이었고 신라 역시 백제를 치기 위해서
이곳이 아주 중요한 거점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기에 이곳 할미산성도 그런곳이 아닌가 싶다.
황매산 영화 촬영장과 박덤의 모습
합천호 옆에 있는 대병면의 3산인 좌측으로부터 약견산, 금성산, 허굴산의 모습
금성산은 무쇠 성[金城]` 이란 말로 옛 고려시대부터 통신수단의 하나인 봉화대(烽火臺)가 정상에
자리하고 있어서 일명 봉화산(烽火山)이라고도 한다.
어떤 기록에는 동남쪽의 허굴산(墟堀山ㆍ681.8m)과 중간의 금성산(金城山ㆍ592.1m), 북쪽의
악견산(岳堅山ㆍ620m)을 합쳐 삼산(三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금성산 정상에 자리한 봉화대는
자연 암반 주위에 돌을 쌓고 불구덩이[煙臺]와 건물을 조성하였는데, 불구덩이는 현재 1m 정도만
남아 있다.주위에 건물을 지었던 터가 있는데, 그 터 안에는 봉화대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자연 암반에 새겨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봉화대는 조선 정조 2년(1778년) 조성하였다고 한다.
금성산 정상 서쪽 벼랑에는 수백 척이나 되는 암벽이 있고, 중간에 넓은 반석으로 널따랗게 펼쳐져 있어
이를 가리켜 금반현화(錦盤懸花ㆍ비단 소반에 꽃을 단 것)란 이름을 붙여 부르기도 한다
고도를 낮춘 뒤 오르내림을 계속 반복한다. 음지에는 약간의 잔설이 있긴 하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고 암릉구간도 지나고 이젠 추위 걱정도 문제가 되질 않는다.
조금 지나니 조그만 너덜지대를 지나 이젠 편안길만 남았다.
옛말에 ‘등 따시고 배부르면 엉뚱한 생각(?)을 한다’ 는 말이 있듯이 추위를 이기니
동료산꾼 젠틀맨님과 함께 막걸리 한병을 나눠 마신다. 정말 꿀맛이다.
갈림길(10:15)
630봉에서 내려와 우측으로 독립가옥으로 표시된 편안한 길을 내려온다.
조금 내려오는 파평 윤씨 묘지 한기가 있고 연꽃설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 습지가 하나 있는데 이 지역이 연꽃처럼 생겼다고 해서 연꽃설이라고 한다.
연꽃 설의 유래
이 지역은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하서 연꽃 설이라 전해지며 연꽃이 수중에서 자라므로
이 지역 도한 연꽃처럼 생겨 샘물이 솟아 오르고 이 샘은 산 아래 지역의 식수원으로 공급된다.
이곳에는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는 곳으로 생태연구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뒤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하여 누구나 이곳에 묘를 쓰기를 희망하는 지역으로 이 지역
윤씨문중에서 묘지 1기를 안장하였다.
우측으로 편안길을 내려온다. 이곳이 사유지인지 곳곳에 철조망이 처져있고 그것을 뚫린
흔적으로 보아 사유지 주인과 산꾼과의 실랑이가 많은 지역인 모양이다.
박덤고개(10:40)
기맥길은 사유지로 철조망이 처져있어 출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악착깥이
이정표 뒤의 철조망을 뚫고 기맥길을 고집하며 간다. 길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
조금후에 능선에 오르니 커다란 멋진 암릉이 나타난다.
668.2봉(10:50)
암릉으로 구성된 668.2봉에 오르니 바로 아래에는 황금으로 입혀진 커다란 탑 2개가 있는
법연원이 있고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가 보이고 그 뒤로 대기 저수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668.2봉에서 - 저 뒤로 허굴산이 보인다.
668.2봉 삼각점(△삼가 403 1988 재설)
삼각점 암릉 봉우리 숲속에 잘 보이지 않는곳에 있어서 무심코 지나치면
못 볼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는 아예 등로가 보이질 않는다. 잡목을 피해서
이리저리 헤쳐 내려가니 꽤나 넓은 임도가 나타나고 다시 산으로 들어섰다가
임도로 내려가니 600봉에 헬기장이 나타난다.
이곳은 아예 길이없다. 기맥가는 길이 정말 고역이다.
600봉 헬기장(11:05)
헬기장에 오래만에 많은 동료 산꾼들이 모여 단체 사진을 찍고 과일을 비롯한
간식을 나눠 먹는다. 다시 길을 떠나는데 아침에 추위에 너무 떨었던지 모두들
여유가 없어 보인다.
추위속에서 난(蘭)은 꿋꿋이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구름재(11:20)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덕만마을과 상두실마을 연결하는 1069번 2차선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오지의 도로답게 차량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길을 건너 밤나무 단지로 연결되는 기맥길로 접어든다.
황매산-구름재 구간의 트랙
밤나무 단지를 돌아서 다시 길이없는 등로로 접어든다.
밤나무 단지에서 쫒겨나와(?) 다시 길이 없는 기맥길 등로로 접어든다.
겨울에 와서 망정이지 여름에 왔으면 거의 포기해야 할것 같다.
길을 찾기가 무척이나 힘이든다. G.P.S 화면에 촉각을 곤두 세운다.
순간 방심하면 길을 놓치기가 딱 십상이다.
밤나무 단지의 밤나무에는 아직도 지난해의 밤송이가 달려있다.
조금 지나니 밤나무 단지의 임도가 나타나고 밭두둑의 가운데 길로 간다.
경주 최씨 묘지를 지나니 밤나무 단지의 콘크리트 농로가 나타나고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간다. 좌측으로 가회면 두실마을을 끼고 걷는다.
커다란 두엄 무더기를 지나고...
우측 밤나무 단지에는 연안이씨 추모동이란 비석도 서있고...
중두실 마을로 내려가는 삼거리에서 우측 도로를 가다가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아예 길이없다. 한참이나 헤맨끝에 좌측으로 내려서서 밤나무 단지를
지나니 조그만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를 끼고 좌측으로 내려간다.
두실마을 앞산에 조성된 밤나무 단지
도로 삼거리를 끼고 우측으로 올라가니...
다시 산으로 오른다. 밤나무 단지에 있는 농가주택을 올라서니...
두실마을 뒤로 황매산 정상이 빼꼼이 지나가는 산꾼을 바라본다.
다시 밭 가운데를 내려가니 도로가 나타나고 황매산 만남의 광장이
있는 두심삼거리가 나타난다.
두심 삼거리(11:50)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두심 마을의 삼거리로 의령과 합천을 잇는
1089번 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황매산 만남의 광장이 있는 곳이다.
두심 삼거리 이정표
황매산 만남의 광장(20분간 휴식)
이곳 만남의 광장에서 이곳지역 소주인 무학 화이트와 오뎅을 먹으면서
20분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길건너 밤나무 단지로 이어지는 기맥길을 나선다.
밤나무 단지로 올라서니 두릅나무들이 많이 보이고 단지를 가로질러
다시 등로로 접어드는데 아예 길이없다. 합천군은 아예 등로를 없앤 느낌이 든다.
밤나무 단지위의 등로를 걷다 다시 숲으로 접어드는데 숲이 잡목과
넘어진 소나무에 아예 길이없다
밤나무 단지 넘어로 보이는 앞의 금성산과 뒤의 약견산의 모습
칙미기(12:40)
겨우겨우 길을 찾는데 걷기가 너무 힘들다.
이곳은 나홀로 산행은 애초부터 포기해야 할 지역이다.
이곳에서 엄청나게 헤맨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헤매다가 겨우
낡은 꼬라표 하나를 찾아서 올라서니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다시 내려서니 좌측 밤나무 단지옆에 뭔가 부스럭 소리가 난다.
바로 아랫마을에 어느 아낙이 올라와 나무를 하고 있다.
조그만 고개를 올라서 밤나무 단지를 지나 또 숲으로 들어와 잡목과의 사투를 벌인다.
허굴산을 배경으로
허굴산(墟堀山 : 681m)은 경남 합천군 대병면에 위치한 산으로 산 아래 길목에서 바라보면
산 중턱 굴안에 부처님이 앉아 바랑(걸망)을 벗어놓고 쉬는 모습인데 산에 올라가 보면
부처님은 안 계시고 허굴(언덕에 있는 굴)만 있다고 하여 허굴산이라고 한다.
이 산의 7부 능선위에 기암괴석이 형성되어 있는데 신선들이 약천수를 마시면서 놀았다는
장군덤과 절벽사이에 햋빛이 들지 않는 솟에 신선들이 기거했다는 수리덤이 잇다.
임진왜란 당시 이 산아래에 있는 청강사의 부처를 숨겼다는 땅바위의 전설이 있는 곳으로
100여명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한다.
그 이외도 용이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용바위도 있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양리와 송정 소류지의 모습
496봉(12:55)
496봉 정상에서 청정지역 가회면의 산그리메를 감상하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이곳 역시 등로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 할 정도이다
일반적으로는 산 등뼈가 거의 마루금이지만 이곳에서는 그것이 거의 적용이 안된다.
암릉으로 내려왔서 좌측에서 다시 우측으로 와서 밤나무 단지 가운데 있는
억새밭 가운데를 질러 내려오니 소나무를 자르기만 했지 정리를 하지 않아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조금 내려오니 오랫만에 잘 관리가 된 묘지를 만나고
한적한 도로로 내려선다.
합천군은 간벌을 하고는 이렇게 마구 흐트려 놔서 길찾기가 참으로 힘이든다.
합천군수 나으리 이게 뭡니까? ‘뒷간에서 볼일보고 똥구 안 닦은 것 처럼’...
정지골재(13:10)
합천군 가회면의 동네를 지나는 1041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2차포장도로 차량들은 구경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하기만 하다.
도로에 내려오니 아까 황매산 만남의 광장에서 뒤에 남아서 소주를
마시던 심마니 김 선생이 먼저와서 기다린다. 깜짝 놀랐다.
축지법을 쓰시나? 알고보니 등로를 타지않고 도로를 걸어서 예까지
오신 모양이다. 자유분방인 奇人이다. 도로를 건너서 다시 어지럽게
간벌된 산으로 접어든다
다시 힘든 잡목과의 마지막 사투를 벌이며 마무리 산행을 한다.
편안하게 잠든 망자의 묘지 옆에서 마지막 베낭을 풀고 막걸리 한잔을 마신다.
마지막의 봉우리인 462봉이 왜그리도 높게 보이는지...임도를 따라 이리저리
길이 아닌 길을 넘으니 편안한 임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편안한 임도를 따라 날머리인 월계치로 향한다
저 멀리 황매산과 우리가 가야할 식사장소인 모산재가 멋진 자태를 뽐낸다.
콘크리트 도로를 내려오니 월계치가 나타난다.
월계치(13:45)
경남 합천군 가회면 산두마을과 월계마을을 잇는 고개이다. 고도가 400m가 되는
꽤나 높은 고개로 1041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오지중의 오지이다.
정말 추위 때문에 너무나 힘든 산행을 마무리 하면서 스틱을 접는다.
오늘 산행구간의 G.P.S 기록표
구름재-월계재 구간의 트랙
월계치에서 버스를 타고 10분정도를 와서 모산재에서 닭백숙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식당마당에서 바라본 모산재(茅山峙)
경남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 능선에 연결된 모산재는 잣골듬이라고도 부르고,
`신령스런 바위산`이란 뜻의 영암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산이나 봉이 아닌 `높은 산의 고개`라는
뜻의 재라는 것이 특이하다 모산재는 한글학회지명총람에 모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정상의 표지석은 모산으로 하는 것이 옳다 모산재는 정상에서 북쪽에 있는 고개를 지칭이다.
모산의 의미는 띠의 산 이다. 띠는 잔디 보다 키가 크서 옛날에 농가에서 띠잎으로 도롱이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사용 하였다.띠는 풀중에 가장 순결한 풀이다.
모산은 순결한 산을 의미하며 정상부근에 순결바위가 있음이 우연이 아니다,
(茅 는 草木之 潔草 沙 는 土中之 潔土)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덩어리로 보이는
모산재는 한폭의 한국화 를 연상케한다. 각양각색의 형태를 한 바위하며 그 바위틈에서 살아가는
소나무의 모습이 화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산 정상에는 작은 표지석에 `황매봉(黃梅峰)`이란
글이 음각돼 있다. 베틀봉. 황매봉. 중봉. 하봉. 삼봉이 주능이다. 박쥐골, 노루바위, 국사봉, 효렴봉,
흔들바위, 장군바위, 촛대바위, 거북바위, 신선바위, 망건바위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신비에
감탄한다.정상에는 한국 제일의 명당자리로 알려진 무지개터, 바위 끝 부분이 갈라진 커다란 순결바위.
평소 생활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이 바위의 틈에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 한다는 말이 전해진다.
영암사지 절이 처음 지어진 연대는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 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 홍각선사비 중에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이는데, 홍각선사비 가 886년에 세워졌다.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 > 남강(진양)기맥(終)'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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