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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황룡사지는 현재 발굴이 중단된 상태인데, 앞으로의 발굴기는 상황에 따라 발굴 계속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한다.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一塔)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신라삼보(新羅三寶) 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존불(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화성(畵聖)
솔거(率居)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慈藏)이 《보살계본 菩薩戒本》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元曉)가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을 연설한 곳으로,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던 7일 동안에는
감로운무(甘露雲霧)가 내려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또,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친행(親幸)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講)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이 절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龍春)이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는데, 총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립(粒)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한,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중화(中華)·오월(吳越)·탁라(托羅)·응유(鷹遊)·말갈·단국(丹國)·여적(女狄)·
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년(고종 25)에 몽고군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하였다.
현재 목탑의 각 초석은 지름이 약 1m 내외로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그 중앙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다. 그 심초석은 다른 육중한 돌로 덮여 있다. 1964년 12월에 도굴꾼이 이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을 훔쳐갔으나, 그 뒤 도굴단의 적발과 함께 사리함을 회수하였다.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함은
사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이는 서천축(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전한다.
이 금과 철을 서울인 경주로 실어 와서 574년(진흥왕 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3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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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무렵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 간다. 집들과 나무와 풀꽃과 바위의 그림자들이 모두 길게 동쪽으로 누워 있다.
서둘러 귀가하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바쁘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황룡사는 지상에 아무것도
드리우지 않는 곳이다. 2500여 평의 늪지를 메워 금당을 세우고 높이 80m의 9층 목탑이 있던 자리는 지금 통째로 비워져 있다.
주위에는 거대한 주초석만이 드문드문 남아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남아있는 주초로 짐작해 보면
한 변의 길이가 22.2m, 이 거대한 9층 목탑을 불태우며 몽골의 병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카라코룸(몽골제국 초기의 수도)의 에르데네주 사원도 황룡사만큼 크지 않다. 도통 뭘 남기려 하지 않고, 사는 집마저
말 등에 싣고 다니는 그들에게 이 엄청난 집이 주는 감상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553년인 진흥왕 14년에 궁궐을
지으려다 계획을 바꿔 착공한 황룡사는 16년 만인 569년에 완공되었다. 처음부터 9층탑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9층 목탑이 세워진 것은, 다시 4년 뒤 말 그대로 1장 6척(약 4.5m)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조성하고, 584년인 진평왕
6년에 금당을 조성하고 난 후인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9층 목탑은 진흥왕과 진평왕, 선덕여왕 3대에 걸친
대공사였으며, 재위 기간이 짧았던 진지왕까지 포함하면 4대가 되고, 공사 기간만 따져 봐도 90년이 넘는 대역사였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깨비 대장 비형랑의 실제 인물이라고 짐작되는,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 이 9층 목탑의 건축을 현장에서 지휘했다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귀교(鬼橋)를 세웠던 비형랑과, 9층 목탑의 역사를 이룬 김용춘이 더더욱 가까워 보이는 이유다.
요즘에는 다들 도깨비 대장이나 된 듯 오래 차근차근 해야 할 일들을 불과 몇 년 만에 뚝딱 해치우고 업적이고,
치적인 양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코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신라가 불국토임을 증명하려 했던 그 모든 노력들도,
그것을 불태운 초원의 전사들도 사라져 버렸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이 저녁, 모두들
긴 그림자를 드리울 때 황룡사는 다시금 거대한 허(虛)로 남는다. 저것이야말로 시간의 집일 것이다.
시간의 그림자는 지상에 드리우지 않는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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