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고택(崔浚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조선시대 만석꾼 최부자 관련 주택으로 최씨의 9대조가 요석궁터[瑤石宮址]라
전해오는 길지(吉地)에 건축한 집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안마당 맞은편에
있던 사랑채는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22일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안채와 천석곳간만이 남아 있다.
집의 배치는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ㄱ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 그리고 一자형의 중문간
행랑채를 연속하여 건축하였다. 서당으로 사용하던 별당과 천석곳간·사당은 따로따로 건축하였다.
남향한 대문간 행랑채를 들어서면 곧바로 사랑마당이 되고, 왼쪽(서쪽)으로 一자형 별당이 동면하여
서 있으며, 사랑채가 남면하여 서 있다.
사랑채는 사랑대청·사랑방·침방이 ㄱ자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방과 누마루가 남쪽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다.
중문을 돌아 들어가면 안마당이 되고, 안채가 부엌·안방·대청·건넌방으로 늘어선다.
여기에 또 다른 방들이 전면으로 돌출되어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안채 북쪽으로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크기로 건축되어 있다.
소실된 사랑채의 구조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직한 기단 위에 요석궁터에서 모아온 것으로
생각되는 다듬은 돌초석들을 놓고 방주(方柱)들을 세워 납도리를 받친 납도리집양식이었다.
가구(架構)는 오량으로써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판형의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있다.
다시 이 위에 원판모양으로 깎아 만든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데,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구조는 사랑채와 같으나, 다만 대청의 전면기둥 한 개와 안방 앞 툇마루에 선 기둥 세 개만은
원기둥으로 되어 있다. 부엌 앞쪽의 방 툇마루에는 계자난간을 가설하였다. 천석곳간은 단순한 민도리집양식으로
맞배지붕의 양쪽 박공에 풍판(風板)을 달았다. 뜰에는 석련지(石蓮池)·대석(臺石) 등 석물(石物)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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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흔히 최부자 고택이라고 부르는 집이다.
1700년대에 지어진 집으로 건축적으로, 정신적으로, 조선시대 대지주 종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건물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가 어려웠지만 최근 1928년 일본잡지 ‘건축화보’에
실린 배치평면도가 발견되면서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지금 사랑채가 복구되었지만 ‘건축화보’에 실린 배치평면도를 보면 사랑채 서편에 별당이 있었고,
안채 동편에 커다란 곳간이 자리 잡고, 다시 안채 대문 바깥에 더 큰 곳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 정원이 꾸며진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이 집의 원래 규모의 반도 안 되는 규모다.
이 어마어마한 대지주의 종가에서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이 사랑채 뒤쪽에서 사당으로 가는 길이다.
최준 고택은 곳간이 두 채가 있지만 사실 이 터의 안산인 도당산이 풍수상 창고사라고 불리는 곳간 형상이다.
그런데 집 뒤의 주산이 약하다. 그래서 이 집의 북쪽에는 쌍으로 심어진 나무가 무성하다.
일종의 비보림(裨補林·부족한 곳을 채우는 나무)인 것이다. 이 비보림이 뒷산에서 사당을 통해 사랑채까지 이어진다. 사당은 보통 집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이 집은 방위보다는 터에서 가장 높은 곳을 잡다보니 서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여느 종가보다 사당이 높지 않고 편안한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 잡고 있어 늘 푸근하다.
그러나 이렇게 곳간 형상의 안산이 있고, 비보림으로 약한 지세를 꾸몄다고 해서 아무나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부를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이 집의 준엄한 가풍 때문이다. 일컬어 ‘육훈’이라고 하는 게 그것이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시집 온 후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육훈’을 충실히 지키면서 경주 최씨는 12대 만석꾼을 배출했다.
최준은 일제강점기에 백산상회를 설립해 안희제를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댄 바로 그 사람이다.
정직한 자본은 만인을 살리며, 따뜻한 자본주의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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