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학자 명재 윤증 관련 주택으로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월 29일 논산명재고택(論山 明齋 古宅)으로 문화재 지정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이 건축하였다고 하나 후대에 개수 등이 있었던 듯 현존건물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고택은 파평윤씨(坡平尹氏)들의 세거지인 옛 이산현에 있는 이산(尼山)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인공 방지(方池)를 파고 조그마한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한 훌륭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정원에서 4단석계의 축대를 오르면 오른쪽에 앞으로 돌출한 사랑채가 있다.
그 뒤로 연접하여 사랑채 후면에서 1칸 물려 왼쪽으로 一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ㄇ 형의 안채는 북쪽으로 중문간채와 1칸 떨어져 있어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또, 안채의 서익(西翼) 바깥쪽에 광채가 있다.
기와를 얹은 맞담이 중문간채 좌우로 뻗어서 이 광채를 포함한 안채의 양측을 둘러쌌고 배후는 야산이 막아섰다.
따라서, 전체적인 배치는 튼口자의 안채에 독립된 사랑채가 접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안채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대청이 있다. 그 왼쪽으로 2칸 윗방, 2칸 안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2칸 건넌방, 1칸 마루방이 배치되어 있다. 좌측의 안방 전면에 4칸의 넓은 부엌을 돌출시켰고,
우측의 마루방 앞으로는 2칸 안사랑방과 1칸 작은부엌을 달아내었다.
대청 좌우익의 각 방들은 툇마루나 마루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배면은 심벽으로 처리하고 쌍여닫이 골판문을 설치하여 놓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전퇴를 둔 2칸의 사랑방이 놓이고 그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되었다.
사랑방 좌측에는 1칸 마루방과 하부에 부엌을 둔 작은사랑방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방 뒤퇴에는 드나드는 입시에 작은마루방이 배설되어 사랑방과 연결되며, 작은사랑방의
뒷방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중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좌측 두 번째 칸에 중문을 내고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1칸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 안채는 회반죽으로 마감한 자연석 허튼층 쌓기를 한 기단 위에 화강암 덤벙초석을 놓고 모두 방주(方柱)를 세웠다.
주상에는 주두 없이 도리와 장여만 있는 민도리집이다.
대청·상부가구는 5량가로 동자주 없이 중도리의 장여를 대량 위에 끼워 걸쳐놓은 간소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종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뜬창방을 올려놓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장여와 종도리를 받고 있다.
사랑채는 5량가로 안채의 구조기법과 유사하다. 다만, 화강암바른층쌓기 한 기단과 네모뿔의 화강암정평초석을
사용한 것이 다르다. 이 집은 모든 부재의 마감이 치밀하고 구조가 간결하면서 견실하여 아름다운 외관과
함께 신선한 맛을 풍기는 조선후기 주택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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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를 위한 자본주의라는 말이 들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주의가 아니다.
적어도 주의라면 다수를 위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묵가나, 자기 가족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유가나, 내 몸의 털 하나를 뽑는 대가로 천하가 태평해진다 해도 나는 털 하나를
뽑지 않겠다는 양주나, 모두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금융자본주의의 폐해가 더욱 횡행할수록 생각나는 집이 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윤증(尹拯) 고택이다.
이 집은 윤증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지은 집이다. 먼저 이 집에 들어서기 전에 집 앞의 방지(方池)가 눈에 띈다.
운조루의 방지와 비교하면 마을과도 잘 어울리고 집의 본채에서 밖으로 툭 튀어 나온 누마루인 사랑채와도 잘 어울린다.
반가로서 안채의 폐쇄성을 유지하면서도 사랑채를 외부와 적극적으로 만나게 하는 동시에 누마루로 들어 올려
수직적인 구분을 꾀하고 집 앞의 방지와 마을로 지세와 집의 모양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간다.
사실 이 집은 윤증이 지은 집이기도 하다. 원래 윤증은 다 쓰러져 가는 형편없는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윤증이 가난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윤씨 가문은 대단한 부호였으며, 아버지 윤선거도 그렇고
외증조인 성혼도 당대의 거유였다. 학문적 업적과 부를 쌓은 당대 최고의 명문이 윤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윤증은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지극히 검소한 성격으로, 오죽 했으면 윤증의 집에 찾아 온
손님이 동구 밖에서 먹은 음식을 토할 정도로, 윤증은 스스로 거친 밥에 거친 옷을 입으며 생활했다.
그런 윤씨 일가의 가풍은 마을 주민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한 번은 양잠에 필요한 뽕잎을 양반인 윤씨들이 수탈해서 주민들의 원성을 산 일이 일어났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윤증은 “우리 가문이 선대 이래로 이곳 노성리에 와서 살게 된 지 백년이 넘도록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았다.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씨 집안에선 원망의 원인인 양잠을 지금부터 일절 금지하라”고 명했다.
이것이 윤씨 가문의 종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동네 슈퍼마켓에서 떡볶이까지 손을 대는 요즘
대기업의 작태로 보면 격세지감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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