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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한국의 옛집

[함성호의 옛집 읽기]<35>‘기단이 높은 집’ 우복종택

by 범여(梵如) 2012. 3. 25.
우복종택(愚伏 宗宅:대한민국 국가민속 문화재 제296호)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에 있는 조선후기 우복 정경세 관련 주택으로 안채·사랑채·행랑채·사당채와

대산루, 계정·도존당 등이 현존하며 1600년경부터 창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복정경세(鄭經世)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뒤 관계에 나아가 예조좌랑등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와 병마수군절도사등을 지내는 중에 광해군 때 탄핵받아 귀향한다.

이 시기에 중요 건축물들이 경영되었다고 추정한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게 되었으므로 이후에는 집 짓는 일이 불가능하던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건물 가운데 계정(溪亭)은 어려서 공부하던 곳이라 한다. 종택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ㅁ자형에 가깝게 배치되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데 2칸 방과 마루 그리고 방이 있다.

 

대청 앞에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설치하였다. 홑처마, 팔작지붕의 둥근 굴도리 오량(五梁)집이다.

안채는 ㄱ자를 뒤집은 듯한 평면인 {{#063}}형이며, 남쪽에 사랑채, 동편에 행랑채가 자리잡았다.

안채 몸체는 겹집 8칸이며 이어지는 부분은 홑집인데 안방아랫방과 부엌을 지었다.

안방 북쪽에 1칸의 윗방, 우측에 4칸 대청, 건넌방 1칸이 계속되었다.

자연석 주춧돌의 덤범 주초(柱礎)를 한 모난 납도리 오량집이고 날개 부분은 3량집,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행랑채는 뒤주, 광, 방의 순서로 조성된 맞배지붕의 5칸 3량집이다. 사당은 종가 동쪽에 따로 일곽을 만들었다.

 

정면 3칸 측면 칸 반에 앞퇴가 열렸고 초익공(初翼工)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주초는 고복형(鼓腹形)이다. 대산루(對山樓)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T자형 다락집이다.

방 두 칸과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어서 나머지 1변에 5칸의 간 반 통 넓이의 건물을 접속시켰다.

 

앞쪽으로 구들을 들인 방이 있고 나머진 대청인데 난간을 둘러 마감했고 사방이 개방되었다.

다락 하층에 구들을 구조한 하부 구조가 있고 이어 불 지피는 아궁이를 부엌처럼 만들었고 이어 광을

만들고 벽체로 폐쇄하였다. 계정은 초가 2칸이며 1칸은 방, 나머지는 마루다. 마루는 앞쪽만 트고

옆과 뒷벽은 분합문으로 개폐할 수 있게 하였다.

 

초가이긴 하나 기와집 격조와 대등하다. 도존당(道存堂)은 전면 5칸 측면 2칸 반의 1고주(高柱) 오량집이고

초익공에 홑처마 팔작기와 지붕을 하였다. 좌우 툇간에 2칸의 방을 각각 설비하고 나머지는 넓은 대청이다.

보통 서원(書院)에서의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과 같다. 자연석 덤벙 주초에 두리기둥[圓柱]을 사용하였다.

 

도존당 앞에 평상문형 출입문이 있다. 또 동편에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063}}자형 평면, 방과

부엌과 곳간이 적절히 포용된 건물로 도존당의 반대편을 보고 돌아 않은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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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종택이 자리한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동천은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1563∼1633)가 38세 되던 해 내려와 살던 곳이다.

그 후 영조가 남북 십리, 동서 오리의 땅을 하사하자 그의 5대손인 정주원이 우복을 기념하여 지은 집이다.

옛 사대부가는 집을 지을 때 항상 덕망 있는 선조의 위업을 빌렸다.

자기가 지은 집이라 해도 항상 조상의 음덕으로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겨울철에 북서풍이 심한 이 지역의 기후에 맞게 안채는 겹집 ‘ㄱ’자로, 그 옆에 ‘ㅣ’자로 곁채를 마련했고, 다시 트여 있는

부분에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의 사랑채인 ‘산수헌(山水軒)’을 배치했다. 그래서 건물 전체로는 튼 ‘ㅁ’자를 이루고 있다.

산수헌은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두 단의 기단 위에 앉아 있는데 기단의 높이가 1.2m에 가깝다.

특히 경사지에 있어 그 모습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우람해 보인다.

사랑채뿐만이 아니라 안채의 경우도 기단이 높다. 상주지역 사대부가의 특색 중 하나는 산등성이에 있든,

평지에 있든 모두 기단이 높다는 것이다. 집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독 이 지방의

유림들만 독불장군일 리는 없다. 당시의 건축법은 ‘성현들이 하던 대로’라는 묵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수와 낙동강 유역의 범람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있을까?

상주와 안동은 반원을 그리며 흐르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안동이 낙동강의 원 안에 자리하는 반면 상주는 바깥에 자리한다. 자연히 홍수가 났을 때 상당한 피해를 볼 수 있다.

연간 강수량도 1050mm로 낙동강 유역의 다른 지역보다 약 50mm 많다. 그러나 상주지역은 깊은 침식지형이고,

사질토라 물빠짐이 좋다. 이 지역이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많은 것도 그 이유다. 단순히 홍수피해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눈이다. 상주지역의 적설량은 전국 최고를 기록할 때도 많다. 비는 금방 빠진다.

그러나 눈은 지속적으로 쌓여 있다. 이 적설에 대비한 가옥 형태가 바로 기단을 높이는 방법이다.

눈이 많이 오면 마당이 아니라 연결된 기단을 통해 채를 드나든다. 산수헌의 높은 마루에서는 솟을대문 너머로 노악산,

천봉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이 내리는 겨울, 이 마루에서는 온 우주가 고요할 것 같다.

시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