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권행 관련된 고려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인 권행(權幸)의 재사이다
초창(初創)은 1653년(효종 4) 관찰사 권우(權堣)가 종인(宗人)들과 논의하여 마루·방·곳간 등 16칸을 건립하였고,
그 뒤 1683년(숙종 9) 관찰사 권시경(權是經)이 누각 7칸을 추가로 지었다. 그러나 1743년(영조 19)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어 중건하였다.
1896년 다시 화재를 입어 당시 70여 칸의 건물 중 임사청(任事廳)·전사청(典事廳) 등 몇 칸만 남기고
모두 소실된 것을 1896년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재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 왼쪽에 높은 축대를 쌓아 추원루(追遠樓)를 전면에 내세워 문루를 삼았다.
누문 안의 큰마당 건너 우뚝 솟은 재사 큰채와 그 앞 양쪽에 늘어선 동재·서재가 튼ㅁ자를 이루었다.
또 동재의 뒤쪽에 임사청·전사청·주사(厨舍)가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 배치가
日자를 옆으로 뉘어놓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추원루는 누하 어칸에 다락문을 내고 그 앞에 여러 단의
자연석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하게 하였다.
통로의 좌우에는 일부 흙과 판자로 벽을 치고 수장(收藏)공간을 마련하였다.
능동재사는 사랑채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방 2칸, 오른쪽에
방 1칸을 둔 정면 5칸집이었으나 왼쪽 끝에 방 2칸을 첨가하여 규모를 증대시켰다.
동재(안사랑채)·서재(헛간채)는 각 3칸으로 서재는 방 2칸에 부엌 1칸, 동재는 방 2칸에 전사청 마당으로
통하는 문간이 1칸 놓여 있다. 임사청(별당)은 주사(안채)와 일곽을 이루며 북편의 축대 위에 배치되었는데,
어칸이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에 방을 1칸씩 드렸다.
전사청(곳간채)은 ‘공성재(供城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정면 3칸집의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그 뒤쪽에 수장고를 3칸 두었기 때문에 제기고(祭器庫)라고도 한다.
집의 구조를 보면 추원루의 누하주(樓下柱)는 8각주로 자연석 초석 위에 놓았다.
누상주(樓上柱)는 두리기둥에 주심포계(柱心包系) 이익공(二翼工)의 공포를 형성하였는데 쇠서는
초각(草刻)과 봉두각(鳳頭刻)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 가구는 5량가(樑架)로 종보 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운 윗몸에 첨차를 끼워 마루도리를 받고 있다.
능동재사(陵洞齋舍)는 높은 잡석 축대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운 전퇴(前退)집으로
대청상부는 5량가의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종보 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우고 그 윗몸에 첨차를 끼워서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이 집은 구조적인 면에서 큰 특징은 없으나 재사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의 건물로 조선시대
제례행사의 성대한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훌륭한 건물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이 조선사회에서도 이어져 문중과 혈연을 중심으로 한 씨족들 간의 결속이 강화됐고,
이는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과 결합해 더욱 견고해졌다. 안동의 사대부들은 묘제나 제사를 통해
혈연공동체를 더욱 강화했고, 지역사회에 대한 자기 힘의 과시, 그리고 다른 가문에 대한 경쟁으로 묘제나
제사를 위한 건물인 재사를 앞다투어 건축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그마한 암자를 사들이거나 빼앗아
재사로 꾸민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남흥재사나 가창재사는 모두 원래 암자나 법당으로 쓰던 건물이었다.
불교를 억압했던 시대였던 만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얘기다.
안동의 능동재사(陵洞齋舍)는 안동 권씨의 재사다.
아마도 재사로는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 아닌가 싶다. 화재도 빈번히 나서 그때마다 후손들이 돈을 모아 다시 지었다.
화재가 난 일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새로 지을 수 있었고, 막대한 헌금이 모이는 모습은 다른 문중에
과시용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었을것이다.
안동 서후면의 능골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웅장한 누각이 길 왼편에 나타난다.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이층 누각이 있는데 보통 재사의 아래층이 흙벽이나 돌벽으로 돼 있는 데 반해 판재로 돼 있다.
그리고 이층에는 벽이 없는 누마루가 있고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둘러 재사의 누마루 같지 않게 화려하다.
처마 밑에는 ‘추원루(追遠樓)’라는 현판 글씨가 묵직하게 걸려있다.
서지재사가 살림집을 변형했고 가창재사가 원림을 이루려고 했다면, 능동재사는 서원건축을 재사건축에 적용했다.
누마루에 들어가면 정면에 대청이 있는 큰채가 있고 그 앞에 동재와 서재가 있어 능동재사는 제례공간인 안뜰과,
제례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임사청, 관리공간인 주사가 각각 독립적인 마당을 갖고 있다. 이처럼 재사건축은 다양하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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