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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한국의 옛집

[함성호의 옛집읽기]<44>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삼가헌

by 범여(梵如) 2012. 4. 2.

삼가헌(三可軒)

삼가헌(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고택으로,

대구의 대표적 고택(古宅) 중 하나다. 조선시대 세종과 문종 때의 집현전 학자로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에 맞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1417~1456·39세).

그가 반역죄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때 그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 이씨도 관비(官婢)가 되었는데,

당시 성주 이씨는 임신 중이었다. 법률에 따라 아들이 태어나면 죽임을 당하고, 딸이 태어나면 노비(奴婢)가 될 운명이었다.

 

해산(解産)을 하니 아들이었다.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아기를 바꾸어 키움으로써

그 아이는 목숨을 보전(保全)할 수 있었고, 박팽년의 핏줄도 이어질 수 있었다.

아이는 외조부에 의해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양육되고, 성종 때 사육신에 대한 면죄(免罪)가 이뤄지자

‘박비’도 그 과정에서 자수해 사면을 받게 되었다. 사면을 받은 ‘박비’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달성군 하빈면 묘골(묘리)에 정착, 대를 이어 살아가게 되었다. 이후 ‘박비’는 박일산(朴壹珊)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가 할아버지 박팽년을 기려 사당을 세운 것이 오늘날 육신사(六臣祠)의 발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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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三可軒)은 충정공 박팽년(朴彭年)의 11대손인 박성수(朴聖洙)가 1769년에 지은 집이다.

당시에는 초가였던 것을 현재와 같은 모습의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하게 된 것은 그의 아들인 광석이 1826년

아버지가 지은 초가를 허물고 새로 지으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삼가헌이란 당호는 박성수의 호로 ‘중용’에서 따온 것이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도 있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었으며,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었지만

중용은 불가능했다”는 공자의 탄식에서 유래됐다. 선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이라는 뜻이다.

삼가헌은 안채와 사랑채가 ‘ㄱ’자와 ‘ㄴ’자로 따로채로 구성돼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중문을 통해서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 안채의 마당에 이른다.

이 집에는 세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첫째는 사랑채를 정면에서 보면 이상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왼쪽 ‘ㄴ’자로 이루어진 아래 획의 왼쪽 부분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오른쪽 부분은 부섭지붕(벽이나 물림간에

기대어 만든 지붕)으로 삼각형의 꼭짓점을 누인 채 한 면으로 경사져 있다.


둘째는 서까래다.

대부분 오량집(다섯 개의 도리로 짠 지붕틀로 지은 집)은 중도리에서 주심도리로 긴 서까래를 걸고,

다시 위쪽 종도리로 짧은 서까래를 걸어 지붕이 높아진다. 그런데 삼가헌은 오량집인데도 서까래가

종도리에서 중도리를 거쳐 주심도리까지 하나의 부재로 내려온다. 결과적으로 중도리에서 경사가

달라지지 않고 모두 일직선상에 있게 되어 지붕이 낮아졌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박성수의 아들은 적어도 사랑채만큼은 아버지가 지은 초가집을 부수지 않고,

지붕만 기와로 얹은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사랑채의 왼쪽 지붕도 이어진 채가 없으므로 간단하게 부섭지붕으로 처리된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다. 박광석은 이 집을 기와집으로 개보수 할 때 이 중문만은 초가로 그냥 두었다. 사랑채와 대문채를 아래위로 비끄러매어 중문을 만들고 초가지붕을 그냥 둠으로써 청빈한 사대부가라는 걸 과시했다.

아버지의 손길을 중문에 남겨 두려는 아들의 마음이 전해져서 나는 이 삼가헌의 중문이 괜히 따뜻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 집의 세 가지 특이한 점들은 모두 아버지와 아들이 집으로 나눈 대화 같기도 하다.

함성호 시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