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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한국의 옛집

[함성호의 옛집 읽기]<55>‘초기 성리학의 관용’ 소수서원

by 범여(梵如) 2012. 4. 17.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제56호)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이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경상도관찰사 안현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했다.

이 시기의 서원은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황은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을 바로잡기 위해서 서원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소수서원은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했다.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등과 141종 563책의

장서가 남아 있다.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림한 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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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리학은 많은 점에서 뒤틀린 모습을 보인다.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 성리학을 주도한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이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성리학은 남명학파 외에는 거의 이기에 치중했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 해도 조선 후기의

양상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우암 송시열이 떠받들어 마지않았던 명나라는 이미 성리학이 아닌 양명학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암은 명나라를 떠받들면서 양명학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렇다면 명은 사문난적으로 가득 찬 나라 아닌가?

도대체 우암이 떠받들었던 명(明)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모르겠다.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 서원은 주세붕이 안향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연 서원이다.

그 후 1550년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으며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소수(紹修)’란 무너진 유학을 다시 닦게 한다는 의미다. 말 그대로 이때는 250년간 중국의 학풍을 휩쓸던 주자의

성리학이 무너지고 양명학이 세를 떨치던 시기였다. ‘소수’라는 사액에는 중국에서 무너진 주자의 성리학을 다시

이으려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자존과 당대의 동아시아 지식사회의 변화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은 죽계천을 따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자리한다.

그런데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게 바로 당간지주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지,

최초의 서원은 아니다. 그러나 서원의 배치가 확립되기 전의 서원임은 분명하다. 초입부터 당간지주가 나오는 것은

소수서원이 있던 자리가 원래 ‘숙수사’라는 절터였기 때문. “흐르는 물도 머물고 간다”는, 절 이름치고는 좀 속되다.

 

계류를 따라 걸으면 취한대와 경렴정이 나오고 소, 돼지, 염소 같은 육고기를 검사하던 생단(牲壇)이 눈에 띈다.

생단을 지나면, 누마루도 없이 일주문 같은 사주문이 나온다. 그리고 만나는 강학당의 옆면, 이것도 어리둥절하다.

강학당 앞에 좌우로 놓여있어야 할 동재와 서재도 한 몸인 채 강학당 뒤쪽에 있다. 아직 서원건축의 전형이 확립되기

전이고 조선 성리학이 딱딱해지기 전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도 그 관용의 품속에 있는 것이다.

시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