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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 2019년 7월 6일,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옥산서원은 이보다 앞서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1574년 사액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화합·토론 등 서원 내의
여러 행사 때 사용하는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는 곳인 민구재(敏求齋)·은수재(誾修齋),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 이언적의 신도비를
모신 신도비각(神道碑閣), 내사전적(內賜典籍)과 이언적의 문집 및 판본을 보관하던 경각(經閣)·판각(板閣) 등이 있다.
구인당의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구인당 안 대청마루에는 한호(韓濩)가 쓴 '구인당'
편액이 걸려 있다. 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김부식(金富軾)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이 국보 제322-1호로,
이언적의 수필고본이 보물 제586호로, 1513년 간행된 활자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이
보물 제524호로, 〈해동명적(海東名蹟)〉 2책이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수도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는데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산서원이 포함된 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 7월 31일 브라질에서 열린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10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이 두 마을은 한국의 전통적인 씨족마을을 대표하는 사례로 마을의 입지와 건축의 전통에서
조선 시대 유교 사회를 탁월하게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양반씨족마을의 구성요소인
종가,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과 서당, 주변의 농경지와 자연경관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이들과
관련된 많은 의례, 놀이, 저작, 예술품 등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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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각 지역 사림들의 본거지였던 만큼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처음에는 강학이 주된 기능이었지만 점차 문서를 보관하고 책을 편찬하는 기능이 추가되면서 비슷한 시기에
선현을 배향하고 제향하는 기능까지 추가되었다. 그러다 강학 기능이 점점 작아지고 선현에 대한 제향 기능이
강화되면서 집회의 성격이 강해졌다.
서원건축의 누마루는 이즈음 나타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재사건축이 가문 간의 결속을 위한 콘퍼런스 홀이었다면,
서원건축은 후기로 갈수록 학파의 정치적 결속을 위한 콘퍼런스 홀로 변해갔다.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서원건축이 갖고 있는 기능 가운데에서도 서책을 보관하고 편찬하는 기능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1572년 건립했는데, 다음 해인 1573년 경주부에서
‘삼국사기’를 옥산서원에 수장하게 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옥산서원 경각에 있는 서책 일부가 홍문관으로
옮겨졌는데, 이때 ‘삼국사기’는 홍문관으로 보내지 않고 옥산서원 근처의 독락당 어서각의 서책과 함께 도덕암에 일시 보관되었다. 그러다 난리가 끝난 후 다시 독락당 어서각에 보관되어,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유실되지 않고
전해지다가 1972년 옥산서원에 수장고인 청분각(淸芬閣)이 세워지자 독락당 어서각에 있던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과
함께 청분각으로 이관되었다. 실로 유구한 세월 동안 책을 보관하는 임무를 충실히 한 것이다.
배우는 학생들을 어르고 때리는 매로써 그만한 게 없을 것 같다. 이 이층 무변루에는 특이하게도 온돌방이 설치되었다.
일층을 메워 적당한 높이에 고래를 들이고 이층 온돌방을 데우게 했다.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까.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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