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 최고의 여류시인,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 시로 사랑을 말하다
지난 22일! 한국인들은 1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절기, 동지(冬至)를 맞아 따뜻한 안방에서 찐밤과 고구마에 동치미를 들이키며 가족끼리, 이웃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옛 시절의 따뜻함을 떠올렸다.
천문학적으로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과 황경(黃經) 270도에 도달하는 때인 ‘동지’는 지구가 태양에서 가장 먼 지점에 있는 날로 ‘동지 섣날 긴긴 겨울밤’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정확한데, 동지의 기나 긴 밤을 절묘하게 풀어낸 시가 있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님을 기다리는 ‘긴긴 겨울밤’과 님과 함께 있는 ‘봄날의 짧은 밤’을 대조시키는 고도의 수사법으로 임을 향한 마음을 유쾌하면서도 애절하게 담아낸 조선시대의 고시조. 지금도 시조 시인들이 최고의 고시조로 뽑는 이 작품은 〈청구영언〉에 수록된 황진이의 대표작이다.
신분상의 운명을 버리고 자유를 택하다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재위 1506∼1544)대의 인물인 황진이의 일명은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로 그녀는 기녀였다.
때문에 정사(正史)에는 나오지 않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송도기이(松都奇異)’나 ‘어우야담(於于野談)’과 같은 조선의 야사나 설화로 전해져 왔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황진이는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진현금’이라 불렸던 천민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지만, 16세기 조선사회의 규범에 따라 양반의 첩이 될 운명이었던 황진이는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녀의 세계(妓界)에 투신한다.
조선의 기녀는 술을 파는 여인을 넘어 시(詩)·서(書)·화(畵)에 능했고 사랑과 지조를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던 예인(藝人)으로 아름다운 외모에 재능까지 겸비했던 황진이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풍류낭, 황진이
그렇게 신분상의 운명을 버리고 자유를 택한 황진이는 수많은 남성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최고의 군자로 불리던 벽계수와 불가(佛家)의 살아있는 부처로 통하던 지족선사로 먼저, 황진이는 달 밝은 가을 밤, 개성의 명소인 만월대로 오른 벽계수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으며 마음을 전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할제 쉬어감이 어떠하리.
그녀의 격조있는 구애시 앞에 벽계수는 마음을 빼앗겼고, 이어 30년간 벽을 보고 수도한 지족선사까지 파계시키며 유명세를 탄 황진이는 도학자로 유명한 화담 서경덕이 진실한 군자인지 거짓 군자인지 밝히기 위해 이번에는 서경덕을 유혹한다.
하지만, 그녀의 미색에도 불구하고 빙긋이 웃기만 한 채 요지부동인 화담 선생의 높은 덕망 앞에 감복한 황진이는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 후 한양 제일의 소리꾼인 이사종을 사랑해 6년간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빼어난 자연을 소재로 구슬같이 아름다운 시를 끝없이 읊었던 황진이는 40세에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자신의 유언대로 개성 어느 길가에 묻혔는데, 세월이 흘러 개성에서 그녀의 무덤을 발견한 평안감사 임백호는 그녀의 부재를 슬퍼하며 시 한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워난다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혀난다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황진이의 화려한 부활
신분은 비록 미천한 기녀였지만 미모와 학식, 예술성을 두루 갖춰 선비들의 벗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던 황진이는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남김이 없었고, 삶에 있어서 거칠 것이 없었던 여인이었다.
특히 여성에게 굴레를 씌워 사회적 활동을 제약하는 조선의 풍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자 시인의 대명사로 이름을 떨친 황진이의 삶은 특별했기에 지금도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누가 길가의 한 점 흙으로 사라진 황진이의 짧은 일생을 불우하다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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