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충절의 표상, 정몽주
세월이 지나도 전해 내려오는 충절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옳지 않으면 행하지 않으며 어려움에 처해도 정면 돌파할 뿐,
구차하게 모면하지 않는 선비의 가슴에는 ‘지조(志燥)’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선비의 높은 지조가 나라를 향할 때, 그 마음을 ‘충절(忠節, 충성스러운 절개)’이라 하는데...
5천년이 넘는 한국사에 충신으로 이름을 남긴 이들 중 우리는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600여년 전, 세상을 떠난 그가 지금도 충절의 표상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방 성리학의 시조
정몽주는 1337년 11월 22일, 영천에서 태어났다.
‘몽주(夢周)’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인 정운관이 꿈에 중국의 주공(주나라 문왕의 아들, 정치가)을
보고 낳았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24세 때 치른 과거시험에서 삼장(三場:초장?중장?종장)!
즉, 1·2·3차 시험을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며 특별한 이름을 세상을 알린 정몽주는 이후 당대
최고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362년 예문검열(藝文檢閱:정9품직)로 관직에
첫 발을 내딛었고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며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실제로 정몽주가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논어(論語)’등 사서에 관한 주자의 주석서)》밖에 없었는데도
정몽주의 강의에는 막힘이 없었는데, 훗날 들어온 경전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을 비교해보니,
단 한 곳도 틀린 곳이 없어 사람들이 그를 고려 성리학의 창시자로 부르게 되었다.
명분의 길을 걷다
주자학에 정통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어
‘동방이학의 시조’로 추대된 정몽주는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일생 동안 확고부동한 ‘명분의 길’을 걸었다.
신하로서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명나라 6회, 왜(倭) 1회 등 총 7차례의
사행(使行)으로 외교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특히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그런가하면 1377년에는 왜(倭)에 사신으로 파견돼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나라 사이에
교류하는 의리와 이해관계를 설명해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오는 외교력을 보여줬다.
그렇게 외교가로도 뛰어났던 정몽주는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로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며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또 한 번 뜻을 세운다.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1392년,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정도전과 조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이들을 귀양 보내며 고려 왕조 지키기는 선봉에 나선 것이다.
그런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이성계의 아들, 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고저.
<하여가>를 지어 쓰러져가는 고려 대신 대신할 새로운 왕조에 동참하자는
설득의 마음을 전했는데, 이에 대한 정몽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단심가>로 전한 것이다.
정몽주의 충심을 확인한 이방원은 결국 선죽교에서 습격해 피살하니,
1392년 4월 4일,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개월 뒤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 조선을 열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고려를 부여안은 정몽주의 절개는 선죽교에 서려있어
사후에도 그의 핏자국은 사라지지 않고,
다리 주위에는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돋아나니
선죽교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에 한 떨기, 붉은 마음(丹心)이 피어나며
정몽주의 기개와 충절은 가시지 않는 역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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