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2. 7, 2
☞ 산행날씨 :맑은 날씨에 엄청나게 더움
☞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2.4km / G.P.S 23.8km / 10시간 40분소요
☞ 산행코스:대곶사거리-대곶초교-90봉-만덕사와 공단간판-(주) 뉴팜-장승고개-동인기연- S.K통신기지-공장지대-공동묘지
군부대-72.8봉- 해병대2사단 헌병대-80봉-통진두레문화센터-것고개(해병대2사단 1연대 정문))-정육점 식당
푸르미아파트-대한폴리텍-문배술 양조장-문덕제-군초소-120봉-고정리지석묘-12번군도(남정곡고개)-95봉-공단
공동묘지-에덴농축-에덴농축 정문-5비루고개(6번 지방도 삼거리)-80봉-각개전투장-100봉-군사도로-22번 군도
새싹유치원-문수산성-문수산-전망대-문수산성 암문-문수산성 북문 갈림길-헬기장-문수산성 북봉-동막골 갈림길
270봉(두류봉)-군부대 참호-갈림길-145봉-보구곶리
☞소 재 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통진읍, 월곶면
더워도 너무 덥다. 오늘 드디어 3년 7개월에 걸친 1대간 9정맥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산행을 하는 날이다. 이 땅의 山河를 거닐면서 참으로 많은 걸 느꼈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 그리고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갈갈히 찢겨 나가는 이 땅의
산하을 걸으면서 참으로 인간이란 존재는 이기적이고 오만 그 자체인것 같다.
분명 이 땅에는 인간만 사는건 아닐진저 동.식물 하다못해 조그만 微物들도
생명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면 적어도 相生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거늘
인간들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는 느낌이다
佛家에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단어가 있다.
육조 혜능선사가 말한 것으로 본래부터 아무 물건도 없다는 무소유를 가리키고
있건만 인간들은 왜 그리도 집착을 하는지...
범여의 산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겠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한남정맥의 지도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속리산 천황봉(1,508m)
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하여 칠장산(492m)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서
다시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이 나누어진다.
한남정맥은 칠장산(492m)에서 시작하여 북서쪽으로 이어지면서 한강 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분계한다.
이 산줄기를 이루고 있는 산들은 도덕산(366m), 국사봉(440m), 달기봉(415m), 구봉산(456m),
함박산(349m), 부아산(403m), 할미성(349m), 형제봉(448m), 광교산(582m), 백운산(564m),
수리산(469m), 수암봉(398m)을 넘으며 김포평야의 낮은 등성이와 들판을 누비다
계양산(395m)과 가현산(215m)을 지나 강화도 앞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에서 끝을 맺는다.
서울역(06:40)
1대간 9정맥의 마지막 구간인 한남정맥 마지막 구간인 대곶사거리에서
보구곶리까지를 가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와서 김포가는 M버스를
타기 위해서 서울역으로 간다.
서울역 광장에는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고 노숙자들이 여기저기 누워있다.
서울역전 우체국 앞(06:50)
서울역 광장에서 염천교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서울역전 우체국이 나오고 이곳에는
서울에서 경기도로 운행하는 광역버스 정류소인 모양이다. 이곳에서 김포가는
광역버스인 6117번 M버스를 타고 감포로 향한다. 광역버스라 엄청 빠를 줄 알았는데
김포 시내에 들어서서 일반버스와 마찬가지로 아파트 단지 곳곳을 다니는 바람에
별로 빠르다는 느낌이 안든다. 1시간 정도 시간이 걸린 다음에 뉴고려병원 앞에 도착한다.
김포 뉴고려병원(07:40)
김포 뉴고려병원 앞에서 내려서 대명항까지 가는 60-3번 버스를 타고
대곶사거리에 내리니 08시 10분이다. 오늘도 날씨가 엄청 더울것 같다.
대곶사거리(08:10)
일찍 집을 나온탓에 이곳에서 아침을 해결해야 하는데 식당에 문을 연 곳이 없다.
편의점에 가서 햇반으로 아침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곳은 시골이라 그런지
편의점도 없다. 더운 날씨탓인지 가계 문을 연 곳은 전혀없고 직업소개소 앞에
오늘 일자리를 잡지못한 일용직 근로자들만 어깨가 축늘어진 채 앉아있다.
가다가 식당 있으면 아침을 해결하기로 하고 들머리인 대곶초교쪽으로 간다.
대곶초등학교 입구
대곶 사거리에서 서울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다가 좌측으로 꺽어져 들어간다.
대곶초등학교 정문(08:20)
대곶초등학교 정문에서 좌측으로 돌아서 정맥길을 이어간다.
학교 옆을 돌아서니 주택단지가 나오고 솔로몬 학원 골목 사이로 간다.
학원을 지나자 주택들이 나오고 주택을 지나자 조그만 도로가 나온다.
고개 너머로는 공장지대가 보이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올라선다.
고개에서 처음으로 반가운 시그널을 만난다... 늘 고마운 존재들
참으로 개념없는... ?
등로에 접어들자마자 정맥길이 무참히 끊겨버렸다. 새로 신설한 공장이 있다.
이곳에 허가를 내 준 공무원 한번 만나고 싶다. 이 나라의 능선들이 무참히
잘려 나가고 있다. 일제시대에 조선 반도의 맥을 끊기위해서 명산 곳곳에
쇠말뚝을 박은 일본놈들은 보다도 더 잔인하게 말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공장 절개지를 우측으로 돌아서 나가니 철조망으로 2중,3중으로
설치해놔서 갈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아래 절개지에는 공장이 있다.
그렇다고 이곳은 안 지나가는 정맥꾼들이 얼마나 될까?
약이 올라서라도 악착같이 지나가야겠다... 왜냐고? 정맥길을 이어가기 위해서.
참으로 고약한 사람
그렇다고 안지나가나. 베낭을 벗어서 건너쪽으로 던져놓고 스틱은 철조망 아래로
보내고 몸만 휀스 담장을 넘는다. 바지가 휀스에 걸리고 벌써부터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펜스 절개지로 올라서서 능선으로 접어든다.
과연 후답자들이 이곳을 지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다.
아직 공장이 가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공장이 가동되면
정맥꾼들과 공장 사이에 마찰이 아주 심할 것 같다.
공장 능선을 지나니 이번에는 콩밭이 정맥길을 짤라먹고 있다.
콩밭 밭두렁을 따라 걸어간다. 밭 끝머리에는 주택에서 세워둔 차들이 있다.
밭사이의 조그만 도로를 올라가니 丹城李公 묘지가 나타나고 다시
오름길을 올라가니 좌측으로 철조망이 또 산꾼에게 태클을 건다.
철조망을 계속 따라가니 호화로운 덕원군의 묘지가 좌측에 나타난다.
이곳이 90봉이다. 90봉 주위에는 철조망으로 둘러쌓여 있다.
덕원군의 묘소(08:35)
덕원군(德源君, 1449년 3월 6일 ~ 1498년 7월 22일)은 조선 전기의 왕자, 왕족으로,
세조의 서자이며 근빈 박씨 소생이었다. 예종 때 남이의 옥사을 평정한 공으로,
수충보사정란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휘(諱)는 서(曙)이고, 자(字)는 정수(晶叟)이며 호는 종덕암(宗德菴)이다.
조선 세조와 근빈선산박씨(謹嬪善山朴氏) 사이의 서자로 세종 31년(己巳年-1449년) 3月6日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단종3년(1455) 甲戌年 어머니를 여의고 부왕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부왕 세조가 등극한뒤 세조4년(1458) 戊寅年 8월 10세에 덕원군에 봉군(封君)되고
세조8년(1462) 임오년(壬午年) 14세에 혼인하여 사저(私邸) 60여칸을 하사받고 출궁,
이때부터 궐밖 건천동(乾川洞)에서 생활했다.
덕원군은 평소 효심이 지극하여 부왕을 정성껏 모셨으며 부왕이 거동할 때에는 항시 배행(陪行)하였다.
부왕의 온양온천 행차에 배종(陪從)하면서 진위군 종덕면 막금리(振威郡 宗德面 幕錦里) - 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現 京畿道 平澤市 古德面 堂峴里)에 당도하니 옛날 나라에서 지표(地標)를
묻어둔곳(埋標處)인데, 덕원군이 세조의 어가 앞에 나아가 이 땅을 자신에게 내려주실 것을 엎드려 청하니,
세조가 쾌히 승낙하여 그 땅을 덕원군의 사패지 전지로 하사하였다.
후일 덕원군은 수구(水口)에 긴 뚝을 쌓고 안산(案山)에 작원당(作願堂)을 짓고 탑(塔)을
세우며 대로(大路)를 평택쪽으로 옮기니, 이곳이 훗날 공(公)의 묘소가 있는 사패지(賜牌地)이다.
이때부터 매표처동강종덕(埋標處東岡宗德)이라하고 공(公)의 호 또한 종덕(宗德)에서
유래 하였으며 사시(賜諡)는 소간(昭簡)이시다.
세조14년(1568년) 무자년 덕원군의 나이 20세에 세조가 승하하고 이복 동생 예종이 즉위하였다.
예종조에는 국정을 돌보고 문충공 신숙주, 한명회, 유자광 등과 협력하여 남이의 옥사을 평정한 공으로,
수충보사정란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성종조에는 종부시도제조(宗簿寺都提調)를
명받아 종실을 바로 살피고, 선원보(璿源譜)를 관장하였으며, 선왕의 제향소(祭享所) 일을 맡아보았다.
연산조에는 바른 말을 진언하여 잘못된 정사를 다소 시정케하였다.
공(公)께서는 세종대왕이 성리(性理)에 심취한 유지를 받드러 성현의 학문을 전수하고,
역(易), 례(禮)를 밝히니 일대의 유종(儒宗)이라 칭송을 받았다.연산군 4년(1498年) 7月 22日
한성부 건천동(乾川洞) 자택에서 사망하니 향년 49세였다.
등로에서 바라본 김포의 모습
우리나라의 역사중 삼국시대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며 김포지역은
백제의 영토 였으나 장수왕 63년(서기475년)에 3만 군사로 친정(親征)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게된 이후 김포일대를 비롯한 한강하구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 비로소 김포일대가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게 되는데 삼국사기 지리지 편에는 현재의 김포시
일부와 검단면지역이 검포현(黔浦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서는 '김포현은 본디 고구려의 검포현인데 경덕왕이 고친이름으로
지금도 그대로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金浦縣本高句麗黔浦縣景德王改名今因之).
김포지역은 신라의 국운이 쇠퇴하여 후삼국이 정립하고 있을때는 잠시 궁예(弓裔)의 수중에 있기도 했다.
고종원년(1864년) 김정호가 쓴 大東地志 김포군 전고(典故)편에는 신라 진성왕 11년(897년)
궁예가 검포를 격파했다고 기록되어있다.(新羅眞聖王11年弓裔擊破黔浦)
여기서 검포현(黔浦縣)의 黔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한자 黔은 검다의 뜻으로 사용될때는
音이 검이고 신명(神名)의 뜻일때는 '금'이되고 감(고어)과 통하는 글자로 신(神) 또는
존장(尊長), 왕(王)의 의미를 가진다. 감(고어)의 음운변화는 '금, 감, 검'등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浦자는 해안지대의 지명에 사용되어온 일반명사 또는 지명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는 글자라고 하겠다.
黔浦縣은 존장(尊長) 또는 부족장(部族長:제사장)이 다스리는 고을이란 의미가 된다.
金의 古音도 금이며 김포라는 지명도 '금포'라는 음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영조 때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에서는 '금을 소이'라는 두음절로 기록하고 있는데(東俗金謂之蘇伊)
여기서는 소생할 소(蘇)를 쓰고 있어 정조13년인 1789년의 '호구총수'에서 所자를 쓰고 있는 것과
차이가 나지만 이들 한자는 취음(取音)한 것이기 때문에 뜻과 관계없이 '소'라는 음만 가지면 되며
이(伊)는 고대의 표기방법에서 모음 '이'를 표기하기 위한 것이다.
金浦(금포)는 所伊浦(소이포)로 우리말로 쓰면 '소+이+개'를 표현한 것이고
그 당시는 '쇠'를 '소이'처럼 두개의 모음으로 발음하던 시대이어서 '쇠'로 발음이
변하는 과도기인 18세기 후반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가 고안된 것이다.
소이개(金浦)에서 '개'는 모음사이에서 '애'로 발음 되는 것이 보통이어서 '배고개'는
'배오개'로 '학고개'는 '하오개'이므로 '소이애'가 된 뒤에는 모음 셋이 충돌하므로
이것을 발음하기 편하게 하기위해 '소야'로 발음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32년) 학부 편집국에서 간행한 지리서인 '조선지지'에서는 金浦를
'소야'라는 고유지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금포(金浦)란 지명은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며 하나는 '쇠가 나는 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감(고어)계의 어휘중의 하나로 신앙과 관계되는 신(神)의 뜻이다.
예전부터 金浦는 한강물이 밀려오는 강변마을로 수재로부터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농사의
풍요를 비는 고대 토속신앙이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며
신앙과 관계되는 의미로 추정되는 것이다.
金浦라는 명칭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어왔다.
고구려 장수왕 63년 서기 457년에는 黔浦縣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인 757년에는
金浦縣으로, 고려시대인 공양왕 3년인 1391년에도 金浦縣으로 존치되고 있었으며
인조10년인 1632년에는 金浦郡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金浦郡이 확대개편'되었다. 이러한 세월의 변화 속에서 金浦라는
명칭은 역사적 변천과정을 겪으며 현재의 김포(金浦)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자리공이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덕원군 묘소를 지나서 숲길을 계속 걸어간다.
잠시후에 도로가 나오고 좌측으로는 공장지대 간판이 보인다.
만덕사 입구(08:40)
지도에 "고개"라 되어 있는 지역의 2차선 도로를 따라 좌측 북서쪽방면으로
약2km 이상 석정리,월곶방면으로 직진한다. 우측 남동쪽 방면은 초원지리 방면이다.
이곳에서부터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서 걸어간다
배가 몹시 고파온다. 도로변에는 식당과 구멍가게가 간간히 보이지만
이 지역은 공장지대라서 그런지 전부 문을 닫혀있다. 구멍가게에 가서
문을 두드려봐도 인기척이 없다. 할 수없이 간식으로 가져온 참외 한개를
꺼내서 허기를 면한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도로를 따라서 계속해서 월곶 , 석정리 방향으로 향한다.
더운 날씨탓인지 사람이라곤 찿아볼 수가 없다.
구멍가게를 찾아서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어야 할것 같은데
가게는 보이질 않고... 집나오니 개고생이구먼.
여러개 공장을 지나고 오르막을 올라오니 좌측으로 장승첨단산업단지
입구가 나오고 계속해서 우측으로 걸어가니 알뜰주유소가 나오고
산꾼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뉴팜이라는 회사의 표시석이 보인다.
한남정맥 산꾼들에게 등대같은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뉴팜의 표시석
장승고개(09:10)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와 석정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고개에는 쌍둥이처럼 붙어있는 장승이 지키고 있다.
이곳 우측에는 아웃도어와 유아용품을 생산하는 (주) 동인기연이 자리잡고 있다.
아스팔트 열기를 받으며 걸어온 도로와 이별을 하고 장승 뒤의 밤나무 밭으로 들어선다
장승옆의 동인기연 철조망에는 반가운 시그널이 보인다.
철조망에는 반가운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 시그널도 보인다
장승뒤로 접어드니 아카시아를 비롯한 잡풀들이 산꾼을 괴롭힌다.
조금을 더 진행하니 꽤나 큰 밤나무단지가 나타난다.
밤나무 단지를 지나서 오르막에 오르니 개사육장이 나타난다.
밤나무단지 오르막을 오르니 꽤나큰 개집에서 여러마리의 개들이
갑자기 난리부르스를 치면서 짖어대기 시작한다. 송아지만한 개도 있다.
밤나무 단지를 벗어나니 조그만 임도가 나타나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정맥길이 이어진다.
S.K 옹정리 이동통신 기지(09:20)
정맥길에는 김포 원시한증막이 설치한 철대문을 굳게 잠겨있어 맥길을 막고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이곳에서 뚫어진 철조망 사이로 갔다고 했는데
땅주인이 얼마나 철조망은 다시 잘 쳐놓았는지 아무리봐도 빈틈이 보이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우측으로 아래로 내려간다.
부득히 우회길을 만들어놨고 하는 수 없이 이 길을 계속간다.
내리막길에는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간간히 보인다.
콘테이너 박스를 끼고 좌측으로 들어간다. 일부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이곳에서 직진을 하여 좌측으로 올라가서 묘지에서 위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마루금을 이어서 가신분도 있으나 조금이라도 마루금을 가까이 가는게
맞을것 같아 컨테이너를 지나 내려가니 폐농장 같은 곳이 나오고 배밭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폐목재 쌓아둔 원시한증막 야적장으로 올라간다.
폐농장지대를 지난다... 이곳 안에는 방치된 농기구가 즐비하다.
부처꽃도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라고 범여에게 격려를 보내고...
폐농가를 좌측으로 꺽어져 올라가니...
배밭이 나타난다. 이곳은 조금전 철대문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서 정맥길을 이어간다.
은행나무가 흐드르지게 늘어져 있는 황톳길로 직진을 한다.
개쉬끼들이 난리부르스다... 그래 어제가 중복이니 20여일만 버텨라.
몸간수 잘하거라... 이런 복날에 니 넘 목숨 노리는 사람들이 한둘이냐.
20여m를 내려오니 철조망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고 정맥꾼이 안 가는건 아니잖니... 솟다리인 범여는 위로는
도저히 통과를 할 수가 없어서 베낭을 철조망 위로 던져놓고
철조망 아래로 기어서 철조망을 통과한다... 꼭 이래야 하는지?
좌측으로 철조망을 통과하니 등로는 뚜렸하고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반긴다.
조금을 가니 커다란 절개지 아래에 공단이 들어서 있고 정맥길은
끊겨있다. 아슬아슬한 절개지를 돌아 내려가니 공장이 나오고
도로를 건너서 산으로 들어선다.
산으로 접어드니 숲에는 잡목으로 걷기는 힘이 들지만
그래도 선답자들의 시그널로 인하여 등로는 뚜렸하다.
정맥 마루금은 파란 공장 사이로 정맥길이 이어지는데 선답자들은
이곳을 지나갔건만 지금은 절개지로 내려서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다시 절개지로 올라와 우회로로 내려간다.
정맥길은 공장이 몽땅 점령해 버리고 끊어진 길을 우회로
돌아서 저건너 가야할 공동묘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회로 묘지에는 도라지와 원추리꽃도 보인다.
우회로를 내려오니 농업용수 수로가 나타난다.
졸지에 山自分水嶺 원칙에 위반을 한다.(?)
조금전 절개지로 내려와서 도로를 빠져나와 할 날머리구간의 모습
아무리 원칙도 좋지만 정말 이 길로는 빠져 나올수는 없더라.
태성종합기술 공장에서 직진을 계속한다.
절골로(09:50)
김포시 통진읍 매수리와 절골안을 연결하는 도로로 이곳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다가 우측 공동묘지로 올라선다.
공동묘지 올라가는 길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숲이 무성한 공동묘지를 지나고...
공동묘지에서 바라본 정맥길을 점령하고 있는 지나온 공장지대
공동묘지 위로 올라가니 김포지역에서는 드물게
육군포병부대가 정맥길을 가로막고 있다... 김포하면 해병대 천하인데.
이곳 초소에서 철조망을 끼고 좌측으로 내려선다.
좌측으로 내려서니 엄청난 절개지 아래로 꽤나큰 창호(알미늄 샷시) 공장이 있다.
군부대 철조망과 절개지 사이를 곡예하듯이 걸어간다.
철조망을 우회하여 다시 오르막을 올라간다.
78.2봉(10:00)
군부대 정상에 올라가니 78.2봉이 나타난다. 78.2봉 삼각점은 10m 정도
벗어난 절개지 위에 있다. 이곳은 삼각점 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정맥길은 부대 철조망을 끼고 우측으로 이어진다.
넋놓고 길이 잘 나있는 길을따라 좌측으로 무심코 가면 알바하기 쉽상이다.
78.2봉 4등삼각점(△김포 409 1987재설:10:00)
78.2봉에서 바라본 해병대 헌병대와 2사단 1연대의 모습이 보인다.
부대 철조망을 따라 계속 따라간다.
부대의 철조망을 3분정도를 따라가다가 좌측으로 등로로 올라선다.
좌측으로 오늘의 마지막 산인 문수산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은 조금만 방심하면 길을 놓치기 딱 좋은 곳이다.
바짝 신경을 써야하는 곳인데... J3 멤버들이 이정표를
잘 만들어 놨다. 너무나 고맙기만 하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내려오니 포장도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 옹벽 아래로 정맥길을 진행한다.
개쉬끼가 가는 단독주택 대문에서 우측으로 정맥길을 이어간다.
뚜렸한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하니 좌측에 또 한채의 단독주택이 나온다.
단독주택을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호박과 참깨가 심어진 밭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한다.
조그만 고개에서 다시 내려오니 해병대 제2사단 헌병대가 나온다.
철조망을 타고 내려오니 헌병대 후문 위병소가 나오고 위병소를
지나서 군부대 옹벽 아래로 떨어진다.
헌병대 옹벽을 타고 올라가 80봉으로 향한다.
헌병대 철조망을 타고 올라가다가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철조망을 타고 올라가다 우측으로 꺽어지니 소나무숲이 꽤나 울창하다
이곳에서 100여m 떨어진 80봉으로 올라간다
80봉 삼각점(10:32)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이 2개나 있다. 다시 되돌아와서
내려오니 통진두레문화센터가 나온다.
통진 두레문화센터 뒤쪽으로 내려와 청룡사에 들린다.
해병대 제2사단 1연대 군법당 청룡사(10:40)
해병대 헌병대 뒷산인 80봉에서 내려서니 청룡사가 나온다.
일요법회가 열리는지 법당앞에는 군 장병들이 많이 보인다.
군법당 우측에는 무의도 한방병원이 있고...
조금을 지나니 통진두레문화센터라는 커다란 건물이 나온다.
이제 배가 고픈데도 땀을 너무 흘린 탓인지 밥생각은 없고 자꾸만 마실것만 생각난다.
통진두레문화센터(10:45)
통진두레놀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벼농사가 시작된 통진읍 가현리 일대의 두레에서 비롯됐다.
1997년 제38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통진두레놀이는 1998년 4월 13일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됐다. 통진두레놀이는 매년 단오제와 김포문화예술제
등에서 볼 수 있으며 통진읍 48번 국도변에 통진두레문화센터가 건축되어 전승보전되고 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농경문화의 집합체인 통진두레놀이는 한강과 임진강에 접하여
농업이 발달한 김포평야와 자연을 벗하는 선인들의 심성 속에서 자라나 해학과
풍자적인 내용을 담고 많이 불려져왔다.
통진두레놀이의 특징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전래되지 못하고 대부분이 잊혀졌으나 광복이후 60년대
중반까지 두레를 조직하여 농악을 울리면서 흥겹게 농사를 짓던 풍속이 되살아나는 듯 하였다.
통진두레놀이 중 논김매기 소리의 노랫말은 방아타령과 몸돌을 제외하고는 대개 4구씩 구성되었다.
선소리꾼의 앞소리를 농부들이 후렴처럼 받아 넘기는 식으로 이어지는데 처음에는 길고 구성진
가락의 긴 방아에서 시작되어 힘든 것을 잊고자 하는 흥겨운 가락(자진방아)을 거쳐 좀 더 빨리
행동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 중중모리(상사디야오)로 해서 막모를 내었던 데서 유래되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모음돌(휘몰이)로 끝을 맺고 있다.
통진두레놀이 구성 (12마당)
통진두레놀이는 김포 지방의 후덕한 인심과 온화한 기후 등의 영향으로 놀이 자체가
매끄럽고 경쾌하게 이어지는데 1년 농사의 전체를 12마당의 놀이로 표현하고 있다.
통진두레놀이는 흥겨운 풍물악기 가락에 맞추어 농사를 천직으로 삼았던 농민의 마음을
노래했으며 자연을 벗하는 선인들의 심성속에서 마음껏 자라나 해학과 풍자적인 내용을
주로 담아 불려져 왔다.
한반도 최초의 쌀재배지가 이곳 김포(통진)이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김포쌀
김포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주 접하는 문구가 “김포 금쌀”이란 단어이다.
조선시대 진상미로 소문이 난 이천쌀과 마찬가지로 김포지역의 쌀 역시
진상미였다고 한다. 이천의 자채미와 김포의 자광미인데 자채미의 경우에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인 7월말이나 8월초에 수확이 되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수확이 된 쌀이니 수라상 진상미로 올린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김포의 자광미는 이보다 수확이 다소늦은 9월초인데
그래도 추석 이전에 추수가 가능했다고 한다.
김포시농업기술센터의 자료에는 진상미로서의 자광미를 ‘자광벼는 약 300년전
중국 길림성에 갔던 사신들이 밥맛이 좋다는 볍씨를 가져와 당시의 통진현
(지금의 김포시 월곶면) 밀다리 밑에서부터 심은것으로 유래되어 밀달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광벼는 쌀의 색깔이 옅은 자색(紫色)을 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밥맛이 끈기가 잇고 구수한 향기가 있어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진상미로 꼽혔다고 한다.
벼(나락),쌀의 어원?
한반도에 벼가 유입된 것은 최소한 43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며,
한반도에 유래된 벼(나락)는 인도와 동남아, 그리고 중국에서 비롯 되었다고 한다
인도말 "브리히"가 벼, "니바라"가 나락으로 유래 되었다는 일설이다.
조선조 후기 "동이록"에 벼를 "라록"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 관리들의 급료를
벼로 주었기 때문에 신라의 봉록이라는 말에서 "나록"이 "나락"으로 변천됨.
(충청도 이남지방은 "나락", 이북지방에서는 "벼"라고 함.)
淸眼! 고마우이...
오늘 졸업산행을 한다고 하니 이곳 김포에 사는 불알친구 淸眼이 빵과 음료수
캔맥주, 복숭아, 참외, 자두 등을 잔뜩 싸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권한다.
너무 배고고파서 눈이 들어갈 정도였는데 우선 캔맥주 하나를 먹고 과일과
빵을 먹고나니 세상이 눈에 조금 들어오는 것 같다. 조금후에 축하산행을
동참하기 위해 한네산 산악회의 설악반달 아우와 쌀집아제가 동참을 하고
또 조금 있으니 바람형님과 민박사가 도착을 한다... 모두 다 고맙기만하다.
이곳에서 서로 시간이 맞질 않아서 1시간을 넘게 쉬다보니 몸이 늘어진다.
바람친구와 민박사는 이 더운 날씨에 산에 다니는것 이해를 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다음에 가면 되지 왜 미쳤다고 이 더운 날씨에 다니느냐고 힐난을 한다.
이보시게! 산꾼이 덥다고 안다니고 춥다고 안다니면 언제 산에 다니나...
친구들과 이별을 하고 반달아우와 쌀집아제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선다.
정확하게 1시간 30분을 휴식을 취한 끝에...
것고개(12:15)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와 옹정리를 잇는 고개로 48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북서쪽은 강화도로 이어지고 남동쪽은 김포공항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는 도로로 해병대 제2사단 1연대가 있는 곳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것고개란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해병대 삼거리로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원 정맥길은 해병대 제2사단 1연대 부대 안의 능선인지라
신호등을 건너서 부대 정문에서 우측 정육점 식당쪽으로 향한다.
축하산행을 해주기 위해 같이하는 동료산꾼이 있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육점 식당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서 20분을 걸어간다.
해병대 1연대 관사를 지나서 계속 도로를 따라간다.
해병대 관사를 지나니 대한폴리텍 공장이 나오고 계속 도로를 따라간다.
도로를 10분정도 걸어간 다음에 문배술 중요무형문화재라는
간판 표식을 따라서 좌측으로 꺽어져 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다시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도로를 따라서 간다.
문배술 공장(12:35)
이곳에서 우측 도로로 접어든다.
여러나라를 보면 그 나라를 대표로 하는 술이 있다
프랑스의 꼬냑, 영국의 위스키, 일본의 사케, 독일의 맥주등 각 나라를 대표로 하는
술들이 있는데 우리나라를 대표로 할만한 술은 어떤것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대중화된 전통주인 안동소주와 경주법주가 있지만 문배술도 거기에 빠지기
힘든 우리나라를 대표로하는 전통주에 속한다고 한다
시기상으로 보면 몽골군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벌하고 세계를 호령할때 아랍의 알콜
증류법을 도입해서 증류삭 술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니 역사가 꽤오래된 모양이다.
당시에 몽골군에서 유명한 술은 마유주(말의 젓을 발효시켜서 만든 술 )인데술을 워낙
좋아하던 민족이라 새로운 증류식 소주도 그들의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다.
13세기 초 몽골군의 진격에 고려군도 어쩔수 없이 지배를 당하는데 그당시 그들이 주둔을 했던 평
양에서도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좋은 술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문배술의 시초라고 한다
고려시절에 그 맛이 너무나도 좋고 유명해서 왕에게만 진상이 되다가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러서
양조비법을 퍼트려서 서민들도 마실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맥이 끊겼다가 평양에서 3대째 전수자이신 이경영옹께서 아버지께 비법을 전수를 받다가
6.25가 일어나자 남한으로 내려오셔서 서울에서거북선이란 이름으로 문배술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간에 양곡 관리법으로 중단이 되었지만 80년대에 들어서 다시금 생산을 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5대째 전수를 받아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문배술은 특이하게 쌀이랑 누룩을 사용하는지 않고 밀과 수수, 조를 원료로 하여서 술을 빚는 삼양주 이다
(한번만 빚는 술이 단양주, 밀술에 덧술로 이뤄진 술을 이양주 여기에다 덧술을 한번 더 빚어서 만드는 술이 삼양주 이다)
잡곡으로 만든 순곡증류주 이지만 맛이 깔끔하고 뒷끝이 없어서 높은 도수임에도불구하고 (40도가 되죠) 술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술이다
잡곡으로 만들었지만 야생 돌꽃배의 향기가 난다고 해서 문배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문배술이 또 유명한 것으론 2000년 남북정상들이 만남을 가졌을 당시에 우리측에서 제공하여
건배를 했던 술로도 유명하다 술의 맛은 도수가 높지만 깔끔하게 넘어가고 뒷끝이 없다
그리고 원래 돌꽃배의 향기가 난다고 한다.
문배술은 40도의 도수를 자랑하는 문배술과 23도를 도수인 문배술 순이 있다
문배술 공장을 끼고 우측 도로를 따라 내려오니 文德齊라는 표시석이 나온다.
표시석을 지나서 콘크리트 수로 아래로 지나서 군부대를 끼고
우측으로 가다가 다시 좌측으로 꺽어져 담장을 끼고서 계속 올라간다.
군부대 끝나는 지점인 문덕제 앞에서 좌측으로 접어든다.
문덕제(文德齊:12:45)
海州 崔氏 김포문중의 제실로서 시조인 온(溫)을 모시고 있으며 사적비도 있다
문덕제 앞에 있는 해병대 부대 철조망을 끼고 계속 걸어간다.
철조망을 끼고 나무계단을 올라가는데 축하산행을 따라오신 쌀집아제가
벌써부터 힘들어 하신다. 이제 2km 조금 더왔는데 이걸 어쩌나...
괜스레 미안하기만 하다.
군초소(12:55)
것고개에서 여태껏 해병대 1연대가 자리잡고 있는 마루금을 우회하여 오다가
본격적으로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를 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부대 철조망을 따라간다.
철조망을 2~3분정도를 내려가다가 우측으로 내려선다.
임도에서 곧바로 좌측으로 꺽어져 타이어로 만든 교통호를 지난다.
이곳에서 5분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캔맥주 하나로 목을 축이는데
몸에 땀냄새 때문에 산모기들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면천박씨묘지을 건너서 폐타이어길로 들어서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타이어로 만든 벙커를 지나고...
다시 이곳에서 급하게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타이어 진지를 계속 내려가니...
이 곳은 숲이 우거져서 길이 보이질 않는다
풍양조공가족묘 좌측 철책따라 내려선다.
군부대에서 위장막을 쳐놓은 곳을 지나니 안부가 나오고 우측으로 12번 군도가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 계단을 올라간다. 쌀집아제는 보이지도 않고 반달이 아우도 힘들어 한다.
여기서 다시 휴식을 취하고... 아무래도 쌀집아제는 컨디션 난조로 탈출을 한다.
계단을 올라서니 고정리 지석묘가 나타난다.
고정리 지석묘(支石墓:13:30)
분류 : 지방기념물 제91호 (1986. 5. 7 지정)
소재지 : 김포시 통진읍 고정리 산 114-3
시대 : 청동기
규격 : 길이 - 약 2.3m, 두께 - 0.83m
고정리 지석묘(支石墓)는 선사시대(先史時代)에 해당하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돌맨(DOLMEN) 또는 고인돌이라 불리고 있다.
총 3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이 가운데 1기는 탁자식 고인돌이고, 나머지
2기는 받침돌부분이 땅속에 묻혀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 어렵다.
확인이 가능한 탁자식 고인돌의 덮개돌 길이는 약 2.3m이며, 두께는 0.83m이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뚜껑돌을 덮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고정리 뒤편의 구릉지대에 3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 가운데 1기는 탁자식 고인돌로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3m, 두께 0.83m이다. 나머지 2기는 받침돌 부분이 땅 속에 묻혀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 어렵다.
고정리 고인돌은 한강 하류 지역에 나타난 고인돌 문화와 사회, 그리고 고인돌 축조 방법과
기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남정곡고개(12번군도:13:40)
지석묘를 지나 삼거리에서 90도 좌측으로 내려서니 "떡갈나무 숯불갈비" 간판이있는 남정골고개(12번군도)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10여m 도로로 가다가좌측 안부로 올라간다
12번 군도(김포시 통진읍 고정리 소재)를 따라서 우측으로 가다가
안부 능선으로 올라서니 간간히 불어주는 바람이 고맙기만 하다.
그래도 땀은 비오듯이 한다... 지금까지 먹은 물만 3리터가 넘는다.
캔맥주,이온음료, 쥬스를 빼고도... 오늘 하루동안 밥을 못먹어서 그런지
자꾸만 느낌상 빨리 지치는 것 같다.자꾸만 다리는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95봉 삼각점(13:50)
소나무숲이 가득한 능선에 오르니 무명봉이 나타나고 반달이 아우는
자꾸만 뒤처진다. 날고뛰던 아우님은 요즘 산을 잘타지 않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올라가니 95봉 삼각점이 나타난다.
95봉에서 쭈~욱 아래로 내려오니 이곳도 정맥 마루금을 이곳에 조성되고
있는 공단이 완전히 허리를 짤라 버렸다. 절개지 안부를 따라 우회를 한다.
문수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을 한다.
공단(14:00)
대성공조가 있는 파란색 지붕을 우회하여 도로를 따라오니
동호엔지니어링이 나오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접어들어 절개지로 오른다.
공단을 조성하다가만 절개지 뒤로 올라선다
뒤돌아 본 95봉의 모습
오늘은 정말 쾌청하다. 뒤돌아 본 95봉과 그 아래에 정맥 마루금을
갈갈이 찢어서 만든 공단이 산꾼으로서는 얄밉기만 하다.
기독교 공원묘지(14:15)
절개지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니 기독교공원묘지가 정맥길의
주인인양 행세를 하고 있다. 오늘 햇볕은 너무나 따갑다.
105봉(14:22)
105봉에서 별로 건강하지 않은 소나무숲을 따라서 내려가니
가축분뇨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러면서 폐가가 나온다.
폐가를 끼고 우측으로 돌아서서 나오니...
인적이 끊겨버린 골프 연습장이 나오고...
부도가 난듯한 에덴농축 사무실이 나타나는데 잡초가
가득하고 거미줄이 뒤덮혀서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에덴농축 정문앞(14:40)
에덴농축과 청림농장이란 간판을 끼고 좌측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간다.
청림농장 & 에덴농장 앞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서...
포장도로를 따라서 계속 내려간다
만복농장 입구(14:50)
만복농장이 나타나고 개짖는 소리로 시끄럽다. 아마 개사육장인 모양이다
도로를 계속 따라오다가 너무 더워서 이곳에서 맥주 한켠을 마시면서
3분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반달 아우님의 얼굴이 완전히 익어버린 느낌이다.
자꾸만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이젠 물도 떨어져 가는데 아직도 갈 길은 멀고.
조금을 가니 경포농장이라는 꿩요리 전문점이 나타난다.
이곳에 들려서 양해를 구하고 물을 1.5리터 보충을 하면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후에 다시 길을 걷는데 아스팔트 열기가 너무 괴롭다.
경포 농장에 핀 상사화
K.T 중계기지도 지나고...
솔밭집 가든도 지나고...
오늘 인증샷도 남기지 못해서 반사경을 상대로 혼자놀기도 한다.
비루고개(15:10)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와 개곡리를 잇는 고개로 56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곳으로 다도박물관 간판이 있다 좌측에 보이는 컨테이너 박스를
끼고서 1시방향으로 돌아서서 숲으로 접어든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무오사화 때 스물여덟의 나이로 죽고, 갑자사화 때 다시 부관참시의
2번 죽임을 당한 사림의 풍운아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의 묘와 사당이 있다.
부패한 권력의 시대를 사상과 담론의 시대로 옮기고자 했던 조선의 초기 사림이 굴절되는
수난기에 거푸 참혹을 당한 그의 생애를 위해 한번쯤 들러보는 일도 괜찮을 성 싶고,
또 그가 생전에 지었다는 「다부(茶賻)」는 지금 다도 박물관으로 쓰이는 모양이다.
도로 우측에는 아이젠이라는 커다란 공장이 있고...
숲으로 접어드니 콩밭이 정맥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좌측으로
우회하여 등로로 올라서는데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올라가는데 도라지들이 꽤나 보이건만 한뿌리를 캐보니 뿌리가
너무 작아서 그냥 포기하고 서둘러 오름길로 진행을 한다.
80봉(15:25)
등로 가운데 있는 삼각점을 확인하고 내림길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이곳에는 시그널이 많이 있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직진을 하기 쉬운 곳이다 (알바주의)
조금을 내려오니 통훈대부사를 지낸 김녕김공 묘지가 나타난다.
이곳에 도착하니 나홀로 한남정맥을 하시는 분을 만난다.
왜그리 반가운지... 그런데 반달이 아우가 오질않아서 전화를 하니
도로가 나온단다. 아마 80봉에서 직진을 한 모양이다
경기도 시흥에서 오셨다는 아주 知的인 용모를 풍기는 분이시다.
여유롭게 독립군(나홀로 산행)으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가 보다.
이 분과 잠깐 대화를 나누고 서로가 갈길이 바빠서 헤어진다.
좌측에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계속 가는데 숲이 너무 우거져서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기 그지없다. 더군더나 개옻나무 때문에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철조망을 계속 타고 올라가다가 조금 지나니 각개전투장이 나온다.
각개전투장 표지판에서 철조망과 작별을 하고서 우측으로 올라선다.
각개전투장 위로 올라서니...
100봉(15:45)
각개전투장 오름길에는 지휘소가 있고 정상에 올라서니 벙커가 있다.
벙커 옆에는 삼각점이 있다. 이곳에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Y삼거리 임도가 나온다.
계속하여 군사용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조금을 지나니 황토길의 비포장 도로가 나오고...
헬기장(16:00)
임도 한가운데 헬기장이 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서서히 문수산이 보이는데 모든게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고 했던가?
376m 밖에 되지 않는 문수산이 1376m나 되는 것처럼 높아보이니.
아직도 저곳을 올라야만 하니... 자꾸만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다
임도가 끝나고 드디어 22번 군도가 보인다.
22번 군도(16:05)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와 용강리를 연결하는
22번군도가 지나는 곳으로 이 지역은 해병부대가
많은 탓인지 도로이름도 쌍룡대로라고 써있다.
22번 군도에서 잊어버린 반달이 아우를 다시 만난다.
도로를 따라서 1시간 가까이를 걸어온 모양이다.
도로를 건너서 등로로 접어드는데 새싹유치원에서 펜스를 쳐서
등로길을 막아 버렸다. 부득히 우회를 하여 걷는다.
새싹 유치원(16:15)
새싹 재단이라는 곳에는 운영하는 유치원의 규모가 왠만한 학교보다도
더 큰 느낌이다. 대도시도 아닌 최전방 지역인 이곳 월곶면에서 말이다.
난생처음 이렇게 큰 유치원을 본 적이 없다. 이곳 능선에서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이젠 먹을거라고는 캔맥주 한개와 빵 2조각밖에 없다.
배가 고파서 아우님과 빵을 나눠 먹는데 목이 말라서 먹히질 않는다.
둘이 다 절반도 먹지 못하고 캔맥주 하나만 나눠서 마신다.
그래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는 바람에 옷을 벗어서 말리고 나니 조금은 낫다.
등로에 올라서도 유치원이 길을 막아버렸다. 해도 너무하는거 아냐
이 산꼭대기에 새싹재단의 국기봉이 설치되어 있는데 보는이에 따라
다르긴해도 내가 보기에는 자연과의 언발란스로 흉물스럽게만 보인다.
문수산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
오늘은 가시거리가 너무나 좋다. 내가 지난구간에 거닐었던
계양산과 가현산, 수안산이 다보이고 인천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문수산 오르는 길에도 진안 마이산과 석질이 많이 닮은 역암(礫岩) 많이 보인다.
문수산의 암질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고 하는 사질역암(礫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래나 점토가 자갈과 섞여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응축된 돌이라고 하는데 마이산 암질도 이에 속한다.
문수산 바위를 잘 살펴보면 크고 작은 자갈이 돌에 박혀서 마치 콘크리트를 한 것 처럼 보인다.
자갈이란 냇물이나 강바닥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깎이고 갈려서 모양이
둥글고, 표면이 반들반들해진 돌을 말하는데. 따라서 문수산이 오랜 옛날에는 평지이다가
지각변동에 의해 땅이 융기되어 산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암(礫岩:conglomeate) - 쇄실성 퇴적암이라고 하는데 퇴적된 암석중에
크기가 2mm 이상인 입자인 자갈같은 암석을 말하며 마치 자갈이 섞인
시멘트에 자갈을 섞어 믹서한 레미콘 같은 것이다.
드디어 문수산 정상에 오른다. 마지막 구간에 참으로 힘이든다.
문수산 정상은 오늘 정말로 一望無際이다. 저 멀리 인천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서울 관악산, 북한산이 손에 잡힐듯이 다 보인다.
이곳에서 반가운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 백두대간 졸업산행인 미시령에서
진부령구간에 축하해줬던 J.R아우님이 일요일 오후에 문수산 북문에
차를 세워놓고 이곳 문수산 정상에서 아주 시원한 막걸리 2병과 직접
농사를 지은 풋고추를 가지고 와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
오늘 하루종일 밥을 먹지못해서 그로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막걸리 3잔을
연거푸 마시고나니 세상 부러울게 없다. J.R 아우님 너무 고마웠어요
문수산(文殊山:376m:17:00)
한강하류인 김포반도의 서쪽 끝자락인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 위치한 산이다.
김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한남정맥의 최 북서쪽에 위치한 문수산은 산의 경치가
사계절 아름다워 ‘김포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문수산은 휴전선 최북단, 서울의 관문이자 수도 서울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며, 강화도가 지척에 있는 특이한 지형으로 인해 늘 역사의 현장이 되어왔다.
멀게는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때 이곳 문수산 일대가 격전지였고 가까이는 1866년(고종 3년)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군과의 일대 격전이 있었다. 이때의 격전으로 성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됐다
그리고 6.25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분단의 최전이어서 북한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다.
맑은 날에는 문수산 북단에 서면 북한땅이 강건너 손에 닿을듯 있으며 연백평야와 예성강하구를
희미하게 볼 수 있고 개성 송악산도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다
문수산 정상에는 문화재 발굴을 하는 관계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지막 구간의 마지막 산에 그 흔한 인증샷 남길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남정맥의 마지막 산인 문수산(文殊山),
그러나 정상 주변으로 출입을 할 수가 없다. 문수산 정상은 조선후기에 쌓았다는 문수산성의
장대지(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하여 지휘하던 곳으로 보통 산성의 정상부에 있는 곳)가 있는
지역으로 유적지 발굴작업 예정이라고 해서 정상석 주변 으로 울타리를 설치해 놓았다.
삼국시대 유물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문수산성 이전에도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라고는 하지만 정상석의 문수산 글씨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마지막구간인 마지막 산에서 인증샷 하나 남기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서
축하 산행을 나온 아우님들과 전망대쪽으로 향한다.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철종(조선 25대 임금)의 애뜻한 사랑이 서려있는
강화도와 마니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민과 행상으로 살던 그는 양순이라는 천민 처녀를 만나게 된다.
시골도령으로 자라다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철종은 강화에서 살 때 양순과 혼약을 맺은 사이였다.
하지만 천민은 궁녀조차 될 수 없는 엄격한 규범 때문에 양순을 궁궐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양순을 잊지 못한 철종은 상사병을 앓는다. 그러자 왕가의 사람들은 양순을 은밀하게 죽여버린다.
일설에는 그의 방탕한 생활과 죽음의 원인을 양순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철종은 비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는 것이다.
갈 수 없는 북녘땅의 모습
말없이 흐르는 한강 너머로 북녘땅이 손에 잡힐듯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다와 뭍이 그만하고 하늘과 땅이 그러하므로 인간이 철책선 몇 겹으로 가로막은 남녘과
북녘의 경계마저도 다만 속절없이 부질없다.
1.5km. 딱 그만큼 덧없는 時空을 사이에 두고 우리가 남한이라 부르고
또 북한이라 부르는 지구상에 하나 남은 분단국의 휴전선이 江心에 걸려있다.
그런 것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제일 큰 지류 임진강을 맞아들인 한강이
祖江이 되어 강화바다와 주고받는 점입가경의 통과의례가 참 눈물겨우면서도 가슴
시리도록 웅장하고 또 황홀하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강 건너 북녘땅을 바라보며 착잡하기 그지없다.
장대지에서 전망대쪽으로 가니 정상은 해병대 2사단 1연대가 접수하고 있다
이곳 문수산성은
명칭은 문수사(文殊寺)에서 유래하였다. 강화도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가,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포용하여 해안지대를 연결한 포곡식의 산성으로, 현재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門樓)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은 본래의 것이 남아 있다.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포내리에 위치한 산성으로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어있다.
강화의 갑곳진을 마주보는 김포쪽 육지의 문수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성체이다.
이 성은 갑곳진(甲串鎭)과 더불어 강화입구를 지키는 성으로 숙종 20년 (1694)에축성되었고
순조 12년(1812)에 중수되었으며 고종 3년 (1866) 병인양요때에 불란서군과의 격전을 치른 곳이다.
1866년 9월 8일 불란서 함대가 600명의병력을 이끌고 강화성을 점령한후, 동년 9월 18일 문수산성을
침공하여 올 때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 한성근이 대원군의 명을 받고 성을 수비하여 불란서군과 싸웠으나
결국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후퇴하고 말았다
문수산 정상에서 남기지 못한 인증샷을 마중나온 J.R아우님과
멋진 포즈를 잡고 한컷을 남긴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강 건너는 지금은 개성직할시 판문군이 된 옛 개풍군 땅이다.
고려도읍 송도의 진산 송악산(해발489)을 경계로 북쪽이 개성이요 그 남쪽이 바로 개풍군이다.
고려의 첫 임금 태조와 마지막 임금 공민왕의 능(陵)이 나란히 그곳에 있고, 조선건국을 반대했던
고려 72현이 들어가 숨어 살았던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이다. 조선시대에는 그곳을
해풍군 또는 풍덕군이라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힌 당시 인구는 792호에 1381명이다.
그리고 개성 송악산과 개성공단이 서울의 북한산과 관악산보다 가까워 보인다.
북한 땅이 선명하게 보인다... 너무도 선명하게.
민둥산으로 변해버린 황해도 개풍땅의 산들과 민가들도 보인다.
남쪽의 山河와 하나도 다를바 없건만 왜 개도 물고가지 않는 이념때문에
가지 못하는 저 산하를 언제쯤 갈수 있으려나...
한강너머 바로 앞 화개산에서 임진강과 예성강의 물길을 가르며 내려온 임진북예성남정맥,
백두대간의 분수령 추가령에서 흘러내려 한강하구 장명산에서 맥을 다하는 한북정맥, 그리고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이곳 문수산까지 잘리고 깍이고 파헤쳐지면서 어렵게 이어온 한남정맥,
이 부근은 그야말로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나는 정맥 셋이 함께 모이는 요지로 이 앞을 흐르는
한강하구를 할아비의 강 즉 '조강(祖江)'이라고도 한다.
남쪽 아래로는 충청북도 속리산 천왕봉 기슭에서 거슬러온 물줄기도 있고, 북쪽으로는 함경
남도 덕원군의 마식령이나 아호비령(임진강 발원지) 자락에서 내려온 물줄기도 있다.
그 가운데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시작하여 가장 먼 길을 달려온 물줄기는 497.5km,
물경 1,240리 길을 흘러왔다. 달려온 길의 길고 짧음이야 또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금강산 아래 무산에서 흘러온 물도,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월악산에서 흘러온 물도 거대한
외줄기 長江이 되어 바다에 몸을 섞는 것을. 화엄경에 이르면 여타의 모든 경전들이 다
부질없으므로 그저 화엄대해(華嚴大海)라 부르듯, 한반도 중부지방의 여울이란 여울은 죄다
이곳에 모여 다만 祖江이란 이름으로 바다에 든다.
김하돈 시인의 '조강(祖江), 영원한 한반도의 할아비 강'중에서
땅에서도 물이 산을 만나면 이내 돌아서고 산이 물을 만나면 금세 산이기를 접지 않았던가.
하물며 바다 앞에 이르러서야 산이든 물이든 이제 강산의 섭리와 추억을 거두어들이고 육지
존속으로서의 한남정맥 마지막 숨결이 이곳에서 함께 잠든다.
이곳 문수산 정상에서 바라보니 평양감사와의 애뜻한 사랑이 깃든
애기봉과 조강 저수지도 보이고 있고 그 너머로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일산과 파주, 교하가 한 눈에 들어오고 북한산과 도봉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애기봉은 병자호란때 평양감사와 기생인 애기와의 슬픈 일화가 서려있는 곳으로 지금은
북녘땅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기쁨과 아픔이 교차하는 곳이다.
이북에 서 마주 건너다 보이는 산으로 크리스마스가 되면 대형 트리를 세워 성탄을 축하하고,
4월 초파일에는 법회를 여는 등 각종 종교행사도 열린다. 서울에서 교통도 편리하고 단체로
견학할 수 있는 곳이며, 실향민의 망배를 위하여 '93년에 망배단을 세웠다.
서서히 범여의 1大幹 9正脈을 마감하는 장소인 한강이 보인다.
우리는 저 보이는 강을 대부분 한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한강이 아니라 조강(祖江)이다
백두대간과 한강기맥이 분기하는 오대산 두로봉에서 발원하여 정선과
평창을 거치면서 여러 계곡을 물줄기들을 만나서 오대천, 골지천, 임계천, 송천
등의 꽤나 큰 물줄기가 정선읍까지 이어지며 조양강(朝陽江)이라는 강의 모습을 갖춘다.
이 조양강에 동남천 물줄기가 합해지는 정선읍 남쪽 가수리 수미마을에서부터
영월에 이르는 51km 구간을 동강(東江)이라고 부른다.
이 동강은 영월에 이르러 다시 서강(西江)과 합쳐지면서 부터 남한강(南漢江)이라 부른다.
남한강은 단양, 충주, 여주를 거쳐서 양수리(두물머리)로 흘러 들어와 이곳에서 청평에서
내려온 북한강(北漢江)과 합처져 한강(漢江)이라는 이름으로 수도 서울을 거쳐서
파주의 오두산전망대가 있는 교하(交河)에서 임진강을 만나 남, 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강화도를 거치면서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교하라는 지명은 큰 강이 2개가 만난다고 해서 생겼으며 교하에서 강화도앞 까지를
우리나라 강의 원조라고하여 할아버지의 강이란 뜻의 조강(祖江)이라고 한다.
저 아래 해병부대와 문수사도 보인다.
문수사 비로전
문수사 비로전내 비로나자불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문수산성 안에 자리한 신라시대 사찰이 이다.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사찰인 문수사(文殊寺)는 신라 혜공왕(765-780) 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876년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경기도 전통사찰 62호인 문수사는 광해군6년(1613) 도욱화주가 중창하였고, 다시
순조9년(1809)에 중창되었다 합니다. 옛날에는 수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신도가 많았으나,
인근에 해병대 산악교육대가 자리하면서 출입이 불편해 찾는 이도 많지 않은 곳이다.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있으며 대웅전 동쪽 옆에는 고려 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5층석탑의 잔해가 남아있고,
요사채 앞에는 고려말 유물로 불상을 올려 놓는 사각연화대좌가 있다.
대웅전에서 서쪽 오솔길을 따라 가면 탁트인 언덕에는 풍담대사부도및비가 놓여 있다.
풍담 대사 부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91호
비로전 서쪽 능선 끝에 있는 부도로 조선시대(朝鮮時代) 고승(高僧)인
풍담대사(楓潭大師)의 사리(舍利)를 모신 승탑(僧塔)이다.
부도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양식으로, 사각의 지대석 위에 차례로 팔각의 상대석ㆍ중대석ㆍ하대석을 얹고
원형의 탑신과 옥개석을 올렸다. 옥개석 위로는 보주(寶珠)형태의 상륜부가 있는데, 전반적인 비례는
상륜이 옥개석과 탑신에 비해 다소 육중한 느낌으로 둔탁한 분위기를 준다.
이외 부도 옆에는 풍담대사의 행적(行蹟)을 기록한 비가 있다.
비문은 숭록대부 전판중추부사 조경(趙絅, 1586-1669)이 짓고, 통훈대부 전행사헌부지평 이하진(李夏鎭, 1633-?)이
글을 썼으며, 머릿돌의 전은 이서우(李瑞雨, 1633-?)가 쓴 것으로 당대의 명필과 문신들이 풍담대사의 고향인
이곳에 뜻을 모아 세운 것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비신이 꽂혀 있으며, 그 위의 머릿돌은 비신과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 윗부분에는‘풍담대사비’라 새겨져있고, 그 아래로 대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어서 마치 여러 송이의 꽃을 보는 듯하며, 비신을 받치는
대좌에는 복련과 정자(正字)가 추상구도로 선각되어 있다.
비는 비문의 기록으로 1668년(현종 9)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280㎝이다
풍담 대사 부도비
김포군지 등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풍담 대사는 어렸을 적에 뜻한 바 있어 전국을 돌며 불교를 전파하였다.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일원의 사찰과 주민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불교를 전하고
한강을 따라내려 오던 중 문수곡(文殊谷)에 다다랐을 때였다. 불도 세 사람이
어떻게 알았는지 “대사님 잘오셨습니다.”하면서“저희들은 이 절의 불도(佛徒)이온대
스님들의 생활상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니 잠시 들르셔서 스님들을 일깨워
올바른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대사께서 불도들의 앞에 서서 가는 도중 뒤를 돌아보니 불도 셋은 어디론지 없어졌다.
풍담 스님이 문수사에 머물게 된 전설인데 스님의 고향이 바로 이곳 통진(通津)이니
억불정책과 임진왜란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하고 불교 중흥을 일궈낸
풍담 스님은 이후 남방으로 내려가면서 서산 문하의 기암(奇巖), 소요(逍遙) 등을
강화대교와 갑곶이 보인다.
김포와 강화를 잇는 강화대교가 있는 바다가 강줄기처럼 보인다고 해서 염하(鹽河)라고 한다.
강화쪽 다리옆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갑곶진으로 다리가 없던 시절에 육지에서
강화도로 통하는 나루터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걷고있는 이곳 문수산성이 한국 근대사의
슬픈 한페이지를 장식한 병인양요의 현장이다.
옛부터 교통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던 이곳에 산성을 쌓았다.
고려시대에는 징기스칸이 고려를 침략하여 이곳까지 왔으나 강같은 바다인
저 염하를 건너지 못하였고 1866년 병인양요엔 그 당시 최신 무기로 중무장한
프랑스 함대가 염하를 건너 문수산성으로 진격하여 구식무기로 무장한 조선
관군과 전투를 벌여 양쪽 다 상당한 피해가 있었던 곳이다.
프랑스군이 전투엔 승리했으나 프랑스 군 역시 피해가 엄청나서 자국으로 철수하면서
그 당시 조선의 조정이 국가의 중요무서와 역사기록 등 많은 기록물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분산 배치시킨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중요 기록물 340점을 본국으로 가져 갔으며 나머지
6,000여점의 도서와 외규장각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해외에 반출된 외규장각을 끈질기게 돌려달라고 했으나 돌려주지 않다가
지금은 임대형식으로 몇년전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갑곶(甲串)은 강화도의 염하(鹽河)쪽으로 강화도에서 육지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현재 강화대교 시작점 부근의 지명으로 고려 23대 고종때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무신정권의 실질적 집권자였던 최우(崔瑀)가 조정을 이끌고
건너간 곳으로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김포반도의 끄트머리에 툭 튀어나온 모양의 월곶면은 북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개풍군(현 판문군)과 마주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염하(鹽河)를 건너면 바로 강화도다.
곶(串)은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형을 이르는 말이다.
도도히 흐르는 한강 북쪽으로 일산과 북한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강 남쪽으로는 김포와 거대한 서울의 모습과 관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용강리 갈림길 이정표
→문수산정상0.4km / ↑용강리1.7km / ←북문1.8km 가 있는 전망대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니 착잡함이 앞선다.
통일이 되어 저너머 북녁땅의 정맥인
임진북예성남정맥
길을 내 생애에
한번 걸어볼 수 있으려나...
반달아우가 사진을 찍어주고...
문수산 북문 암봉
다시 내리막을 내려서 삼거리에서 "북문하산로"표시가 있는 곳으로 직진(우측길 독도주의)하여 내려서면 암문을 지난다
문수산 북문 갈림길
이곳에서 동막골 방향으로 향한다. 바람은 불어대건만 땀은
여전히 비오듯이 흘러 내린다.
가야할 마지막 봉우리인 270봉(두류봉)이 너무도 높아 보인다.
문수산 북봉(17:40)
월곶의 모습
월곶은 한강 하류가 두 갈래로(남쪽:염하 서쪽:조강) 갈라지는 지점으로 그 지형이 제비
꼬리와 같다하여 정자의이름을 연미정(燕尾亭)이라 붙였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영조20년(1744) 증건한 것인데 그 뒤 여러차례 보수 하였다고 한다.
인조5년(1627) 정묘호란 때 강화에 피난해 있던 인조가 후금과 강화조약을 맺은 곳 이기
도 하다. .
월곳돈대 내부에 위치한 연미정은 조선 영조 20년(1744)중건한 것인데 그 뒤 여러차례
보수 하였다고 한다
월곳돈대는 숙종5년(1679) 김석주가 축조 하였던 48개 돈대중의 하나로 월곳진 첨사의
통제하에 있었다.
돈대는 해안가 또는 산지등 전망이 좋은곳에 위치하여 적의 움직임을 정찰하고 경보하는
척후의 기능과 접근하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의 기능을 모두 갖는 방어구조물이다.
동막골 갈림길 안부
←정상2.2k ↑동막골1km →경기도 학생야영장 2km의 이정표에서
경기도 학생야영장쪽으로 올라간다.
힘들어 하는 반달이 아우님
염하(鹽河)의 모습
육지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마치 강물처럼 흐르는 바다를 예부터 염하(鹽河)라 하였다.
바다이되 강을 닮았으니 참으로 맞춤한 이름이다. 중국 사람들은 민물의 이름을 크기에
따라 천(川), 강(江), 하(河)로 나누어 불렀다. 중국의 황하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종종
우리나라엔 하(河)가 없다 하지만, 분명 이곳 염하는 우리 선인들의 인문학 수준을
보여주는 절묘한 강이면서 바다이다.
270봉 (두류봉:18:20)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에서 바라본 북녘땅은 너무도 선명하다.
최전방인 탓인지 이곳도 어김없이 군벙커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남정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270봉 삼각점
지나온 문수산의 모습
270봉 정상에 올라서니 유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산줄기에 가려져 모습을 보이지 않던 머머리섬(유도)도 이곳에선 온전히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헤엄쳐 가면 금방이라도 건널 수 있을 것 같고 손내밀면 닿을 것 같은 북녘땅이 지척이다.
유도(留島)
한강에서 떠내려가던 섬이 멈춰서 머무른 곳이라 留島라고 부른다.
유도는 조선시대까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섬이라고 한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배들이 한양의 마포나루로 올라가기 위해선 서해바다의
간조 시간을 맞춰 밀물때 올라가려고 대기하였던 장소라고 한다.
그래서 저 섬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개성과 개풍군의 지도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북녘땅의 정맥길은 어제 걸어볼 수 있으려나?
270봉의 이정표
마루금을 버리고 급경사의 좌측으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초소를 지난 다음에 다시 우측으로 꺽어져 안부 능선을 따라간다.
TV 안테나를 지나고 성주전씨 가족묘와 벙커를 지나 내리막을 내려서면 한남정맥 종착지인
보구곶리에 마지막 발을 내디면서 3년 7개월에 거친 1대간 9정맥의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보구곶리(19:00)
3년 7개월에 걸친 도상거리 3,600여km의 산길을 걸어 이곳에서 스틱을 접는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 대견스럽기만 하다. 백두대간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한 지
3년 7개월... 이젠 그 마침표를 이곳 북녘땅이 지척인 보구곶리에서 마무리를 한다.
후배 산꾼 반달이와 J.R 아우님의 축하속에 인증샷을 남기고...
그 동안 무탈한 산행을 위해 이 범여를 외호해주신 1대간 9정맥의
山王大神님께 소박하지만 감사의 잔을 올립니다.
부디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쥔장 잘못 만난 내 足이여
정말 미안하구나. 그리고 고맙다.
여기는 대한민국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甫口串里)!
뒷산에 큰 정자가 있어서 그 산을 정자산이라 부르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대간과 정맥 개념은 1769년 여암 신경준이 펴낸 『산경표』(山經表)라는 지리서에 나타난다.
선조들은 산과 강을 하나의 유기적인 자연구조로 보고 그 사이에 얽힌 원리를 찾는데 그 근간을 두었다.
『산경표』에 나타난 1대간 1정간 13정맥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라 하겠다.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한 것은 어느 개인의 돌출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축적된 지리인식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산맥이란 일본인들의 개념이 그대로 교과서에 실려 오늘날까지 우리 아들 딸들에게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하는
산맥명칭은 이제 우리고유의 산줄기 인식에 따라 백두대간,호남정맥,
한북정맥 등의 명칭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지질학자였던 고토 분지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명을 받아
14개월의 연구 조사 끝에 1903년 '조선 산악론'을 발표했다.
이 연구 조사의 목적은 효과적인 자원 침탈이었다.
그는 이 목적에 맞게 이 땅의 산악체계를 가르고 쪼개었다.
그 결과 이 땅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던 인문지리학적 관점은 폐기되었다.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되었던 한국의 山下는 모든 지형적 연관성을
상실한 채 찢겨지고 나뉘어 졌다. 이 땅에서 지리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외우느라 고생하였던 산맥들이 바로 그것이다.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에 의해 나눠지고 붙여진 이름들이다.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낭림산맥, 적유령산맥, 묘향산맥, 언진산맥, 멸악산맥,
마식령산맥, 광주산맥, 태백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 등이 그것이다.
고토분지로가 ‘조선 산악론’을 발표한 지 110년이 훨씬 지나고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67년이 지난 지금도 이 땅의 학생들은 일제총독부에 의해 만들어진
산맥들의 이름들을 그대로 배우고 있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의 역사적 인식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말인가?
일본이 독도를 다께시마(竹島)라고 우길때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대응하려면 우리 국민들의
지리와 역사부터 먼저 가리켜야 되는데이 나라는 어찌된 일인지 국.영,수만 학문이고 지리.
역사는 학문 취급도 하지 않으니 철학과 역사의식이 없으면 진정한 인격완성이 되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중국은 우리의 역사인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동북공정에
편입시켜 중국 역사로 둔갑시키는데... 과연 이 나라의 역사학자나 지도층의 인사들은 뭘 한단 말인가...
중국의 속국도 아닌데 말이다 제발이지 정신들 좀 차리시요...
3년 7월에 걸친 이 나라의 山河를 거닐면서 뿌듯한 자부심과 성취감보다도 착잡함이 앞선다.
3년전 백두대간을 마쳤을 때와 같이 또다시 한동안 우울증으로 시달리겠지.
늘 친구넘들이 나보고 미친넘이라고 놀리듯이... 이젠 그 執著에서 벗어나고 싶다
서해로 떨어지는 落照의 모습
祖江으로 떨어지는 落照가 너무나도 황홀하기만 하다
택시를 불러서 J.R 아우님의 차가 있는 북문까지 가는데 바람친구 한테서
전화가 빗발친다. 그리고 닥달같이 차를 타고와 낚아채서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에서 바람과 민박사와 두 아우님과 쭈꾸미를 겸한 축하주를 마신다.
난 일찍 나오느라 생각도 못했는데 마침 오늘이 내 생일이다.
친구들과 아우님들의 축하주를 받으니 너무 기분이 좋다.
이 웬수는 언제 갚아야 할 지... 기다리다가 간 청안과 허총, 쌀집아제와
음.양으로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면서 산행을 마감하는 스틱을 접는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世世生生 福 받을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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