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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백두 대간및 9정맥 후기♣/한남정맥 (終)

한남정맥 제7구간 - 와우고개(전진A)에서 징맹이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2. 6. 11.

산행일자 : 2012. 5.27

산행날씨 : 맑은 날씨에 박무, 무척 더운날씨

 참석인원 : 나홀로 산행

 산행거리 : 도상거리 : 22.7km G.P.S 25.4km / 9시간 10소요
산행코스 : 전진아파트(와우고개) 앞-거마산-208.4봉-군부대 유격장-비루고개(불심정사 표시석)-
서울외곽고속도로(장수 J.C)

                  수현마을-187봉-철마산(광학산)-인천시립공동묘지-S.K농장주유소-구름다리-만월정-만월산-배수지-은혜유통

                  46번국도-지인사-온누리장작구이-110봉(동암산)-산불감시초소-경인선 철도-십정과선교-부평아트센터-십정현

                 부평도서관-6번 송전탑(함봉산)-호봉산-구르지고개-호봉산-사각정자-장고개-142봉-철마산-새사미아파트-173봉

                 원적산-원적정-164.3봉-134봉-경인고속도로-아나지고개-하나아파트-군부대-226봉-철마산-286봉(폐초소봉)

                중구봉-징맹이고개

☞소 재 지: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인천시 남동구, 부평구, 서구, 계양구 

 

오늘 아침에 이제 3번 남은 한남정맥길을 나선다.

지난번에 다리가 부어서 다 마치지 않은 구간이 있고 등로에 숲이 없는 구간이라

고생을 해야하는 코스이지만... 어차피 누가 대신 걸어주지 않는 정맥길이라

새벽 4반만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베낭을 챙긴 다음에 집을 나선다/.

아들과 딸 방문을 여니 아이들은 아직도 한밤중이다.

아침 5시 30분에 버스 정류소에 나와 10분 정도를 기다린 다음에 버스에 오른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을지로 입구 버스 정류장(06:20)

지난번 구간에 일찍 나가서 고생한 경험 때문에 오늘은 좀 늦게 집을 나선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35분만에 을지로 입구 롯데백화점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지하철 시청역으로 향한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06:35)

시청역에 도착하니 인천행 열차가 방금 떠나 버리고 10분을 넘게 기다린 뒤

지하철에 올라타니 자꾸만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을 참기가 힘이든다.

잠깐 눈을 붙이는 사이에 열차는 부천역에 도착하여 하차한다.

부천역(07:10)

부천역에 도착하니 날씨가 이른 아침인데도 후덥지근하다.

아침을 해결해야 하기에 역전앞 식당을 찿기 위하여 두리번거린다.

마침 역전 우측 시장안에 조그만 식당을 발견하고 식당으로 향한다.

조그만 식당인데 일반 식당은 상상하기 하기가 힘들정도로 식대가 저렴하다.

황태해장국 2,500원, 순대국밥 3,500원이다. 국밥 한그릇을 시키는데 김치 달랑

한가지에  모든게 셀프이고 식대도 선불이다. 그래도 훌륭하게 아침을 해결한다.

부천 남부역(07:50)

식사를 마치고 버스 정류소로 향한다. 역에는 부천역이라고 써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부천남부역으로 부른다. 외지 사람들은 상당히 헷갈린다.

이곳에서 전진아파트 가는 버스는 6번과 6-2번 버스가 있는데 6번 버스가

먼저오는 바람에 버스에 올라타는데 이놈의 버스는 부천대학, 시청, 롯데백화점

뱅뱅 돌아서 버스 탄곳 맞은편으로 다시 오는게 아닌가... 나 원참 집나오니 개고생이구먼

길 건너서 타야 되는데... 그러는 바람에 전진 아파트가 있는 와우고개에 도착하니

08시 30분이 넘어버린 시간이다.

와우(臥牛)고개(08:40)

소가 누운 형태라는 와우고개는 군부대가 점령을 하고있고 좌측에는 군부대

관사인 전진아파트가 자리를 잡고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와우고개는

잘 모르고 전진아파트로 알려진 곳이다. 이 앞에는 버스종점이 있다.

와우고개와 거마산을 점령(?)하고 있는 군부대 정문

이곳에서 우측으로 아파트 철조망 담벼락을 들머리로 접어든다.

소래산 방향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군부대 철조망이 나타나고...

 거마산 (巨馬山:205.6m:08:40)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에 있는 산이다.

거마산의 위치는 동쪽이 부천시, 서쪽은 비루고개, 남쪽은 장수동, 북쪽은 만수산이다.

거마산의 이름은 산의 모양이 마치 '큰 말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거마산은 장수처의 발원지이다.

이조 말에는 산이 깊고 험하여 도둑들의 소굴이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소세골, 뒤골, 장골 등이 이 산에 속해있다.

 

거마산 아래 마을이 검디인데, 검디는 검데이 또는 검대라고 하여 신성한 제를 지내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고,

주변에 화장 터가 있어 검게 된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거마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거마회라는 모임에서 철조망 밖에다 표지판을 세워놨다. 

이곳에서 독도주의에 바짝 신경을 써야만 하는 곳이다.

길이 두 갈래로 나있다. 좌측 철조망을 따라 내려가면 인천대공원 가는 쪽이고

우측으로 사람들이 많이가고 막걸리 장사가 있는곳은 구산동 하산길이다.

등산객들은 이곳으로  거의다 양쪽 길로만 다닌다. 그러나 정맥길은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고 길이없는 직진 방향으로 가야 한다.

7851부대는 철조망 콘크리트 기둥마다 번호를 부여했다.

이곳 903번 철조망에서 바로 직진하여 길이 없는곳을 내려간다.

소나무가 넘어지고 바위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니 군부대 진지가 보이며 희미한 등로가 나타난다.

땡비 싸리나무가 보이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곳에 도라지 한뿌리가 보인다. 스틱으로 도라지를 캐서 수확을 한다

이곳은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고 군부대 유격장이라 길을 아는

정맥꾼 이외는 전혀 다니지 않는 곳인데 조금 내려와 교장에 들어서니

이른 아침인데도 40대 중반쯤 되는 남.녀가 사랑놀음(?)을 한다.

지난구간에도 생비디오를 봤는데... 오늘도 안볼것을 본다.

에이! 좀 숲속으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은 곳에서 하던지... 젊잖치 못하게...

유격장 부대안으로 접어든다.

탄피도 보이고...

훈련 표지판을 따라 내려간다.

유격장에서 바라본 거마산의 모습

유격장 시설물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다시 좌측으로 올라서니 최근에 지나간듯한 울산 참고래산악회와, 대전 출신인

 똥벼락님 그리고 보령 잡도리님의 깨끗한 시그널이 반갑게 산꾼을 맞이한다.

조금을 더 가니 군부대 철조망이 처져있고 구멍난 철조망을 통과하여 직진한다.

다시 군부대 훈련장이 나타나고 ‘목표상 전투’라는 팻말이 나타난다.

능선을 거쳐서 내려가니 독도법이라는 콘크리트 기둥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길이 잘 나있는 좌측길을 버리고 우측의 희미한 길을 따라 한남정맥길을 이어간다.

우측의 희미한 등로를 따라 내려오니...

넘어진 아카시아 나무들이 자꾸만 태클을 건다.

분.소대 전투기술 훈련장이란 팻말을 보고 직진하니 또다른 부대가 나타난다.

이곳도 정맥길에는 어김없이 군부대가 정상을 점령하고 있어서 부득히 우측으로 우회한다.

철조망을 따라 홀로 걷는데 군부대 안에 있는 잘생긴 하얀 개한마리가 엄청나게 짖어댄다. 

새로운 군부대가 나타나며 높다란 초소가 나타난다.

철조망을 따라 나오니 군부대 정문이 나타나고 초병이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를 한다.

부대 안에는 일요일에 장병들이 군부대 진지 보수작업을 하고있다.

공터를 지나서 콘크리트 도로를 타고 내려오다 꺽어지는 부분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조금 내려오니 가스실과 통나무와 외줄타기 시설물도 나오고...

군부대 시설물을 벗어나 내려오니 텃밭이 나타난다.

텃밭을 지나니 박씨농원이란 간판이 나타나며  좌측으로 유격장 올라가는 도로가 나온다.

박씨농원(09:20)

박씨농원 음식점을 지나서 우측 굴다리로 빠져 나간다.

박씨농원에서 굴다리를 빠져 나가니 지하통로가 나오는데 이곳이 원 정맥길이건만

이곳 지하통로 역시 군 시설물이 차지하고 있어서 좌측으로 돌어나간다.

이 위에는 일산과 안양을 잇는 서울외곽고속도로 장수J.C 이다.

굴다리를 빠져나오니 불심정사라는 표시석을 끼고 좌측

도로를 따라 인천대공원 방향으로 내려간다.

비루고개(09:30)

부천시 소사구 구산동과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을 잇는 왕복 8차선의 도로이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일반도로가  겹쳐있는 이곳이 성현이라고도 불리는 비루고개,

백제시대부터 이어진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로 알려진 곳이지만 안내판 하나 없고

 길 찾기가 아주 어려운 한남정맥의 요주의 구간중 한 곳이다. 

 

비루고개는 또다른 이름으로 별고개라고도 부르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인조대왕시절인 1642년(임오년)에 중국 사신이 서울에 특사로 왔다가 궁중에 머무는 동안

공주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 사신은 공주와 결혼을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할 날이 되어 서로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신이 한양에서 새벽에 귀국

길에 올라 본산(현 수산동)에서 중국가는 배를 타려고 할 때, 궁궐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공주가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중국을 가려다가 나라의 법이 엄하여 이별하게 되어 별류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이후 이곳을 별류현, 별고개, 성현, 박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비루고개의 또다른 유래는 이 고개를 비루가 넘어 문학산에 미추홀 왕국을 세웠다고 해서 비루고개

라고도 하며 백제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가족들과 이별한 고개라고 하여 별이고개라고도 불렀단다.

무네미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100여m 정도를 내려오니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진도개중앙회 표지판을 끼고 내려간다.

이곳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꺽어진다.

조금 가면 전봇대를 끼고 장수J.C 올라가는 오바브릿지 밑으로 해서

우측으로 꺽어져 지나간다. 완전히 미로찿기 게임을 하듯이...

오바브릿지를 지나 철조망을 타고 계속 걸어가니 다시 도로를 만난다.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우측에 수현마을을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나무 계단을 내려가니 인천대공원 가는 길이다.

계단을 타고 내려와 좌측 인천대공원 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굴다리가 나오고 굴다리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이곳을 직진한다.

굴다리를 지나니 버드나무집이 나온다.

버드나무집(09:45)

한남정맥길에 이정표가되는 중요 포스트 중에 한 곳인 버드나무집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수현마을로 향한다. 버드나무집에 있는

군부대 법당이 상당히 큰모습으로 보이고 일요법회를 하는지 군인들이

보인다. 산에 미치기 전에 지난 5년간을 나도 한달에 한번씩 군법당 봉사를

 다녔는데 이젠 그런것도 못하니... 산에 미쳐서리. 1대간 9정맥중에 오늘 끝나면

2구간만 남는다... 봉사활동 못한지가 4년이 넘었으니 이젠 봉사활동도 좀 해야겠다.

 

이곳에서 ㄱ형으로 꺽어져 수현마을로 향한다.

다시 도로를 만나고 수현파크빌이란 연립주택을 끼고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오가백숙집을 지나니 버스 정류소가 나온다.

수현마을(09:55)

비루고개에서 직전거리로 5분이면 올 수 있는 곳을 끊어진 정맥길을 25분이상을

에둘러 둘러온다. 한남정맥은 도시화(?) 덕에 하면 할수록 힘이든다.

이곳 장수동에 위치한 수현마을은 예전에 조그만 촌락이었으나 지금은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아직도 중간중간에 예전에 농촌마을임을 확인하는 밭들이 많이 보인다.

감나무농원앞의 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간다.

이곳 우측의 160봉 산 정상도 군부대가 점령을 하고 있다.

도로옆 원형 철조망 근처에는 보리를 심어 수확을 하는 모양이다.

오랫만 탐스런 보리이삭을 보니 갑자기 고향생각이 난다. 

고개를 넘어가기전에 황제카센타라는 팻말을 지나서 우측으로 접어든다.

텃밭사이로 올라간다.

소담스런 뱀딸기가 있어서 한움쿰 따서 입에다 넣는다. 그런데 예전 맛이 아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한다. 이곳은 마치 관악산 같은 느낌이다.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없으니... 아침에 출발하기전에 얼굴에

선크림을 발랐건만 약효가 떨어졌는지 얼굴이 따가워진다.

힘들게 산 능선을 치고 오르니 정상은 철조망이 가로막아 가지도

못하고 옆구리 능선을 타고서 걸어가다가 조금후 군사도로를 만난다.  

군사도로를 만나서 50여m 를 가다가 다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서 정맥 마루금으로 들어선다.

능선에서 내려서니 조그만 고개가 있는 안부가 나오고 우측에는

엄청나게 큰 부대가 장수J.C 아래에서 부터 이곳까지를 차지하고 있다.

우측에 커다란 부대를 바라보면서 지나가는데 훈련장 시설물들이

온 산에 설치가 되어있다. 이곳은 응급처치를 전문으로 훈련시키는 곳인가보다.

187봉 올라가는 길은 옛날 시골길 비포장도로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자갈로

가득하고 가뭄탓인지 먼지로 인하여 목은 아프고 더운 날씨땜에 땀은 비오듯 한다.

187봉(10:35)

힘들게 정상에 올라서 물한모금을 마시고 다시 안부를 따라서  직진을 한다.

정상에는 꽤나 넓고 평평하며 폐벙커같은 시설물이 있으며 서너명의 사람들이 있다.

오늘 산길은 참으로 힘이 든다. 그늘이 별로없는 산길이라 마치 관악산을 걷는 기분이다.

안부 능선을 조금 따라가니 군부대 철조망이 나타나면서 오르막으로 오른다.

원형 철조망을 따라가다가  좌측으로 가는길과 철조망이 뚫어진 군부대

안쪽으로 가는 길이있다. 어차피 정상으로 올라가면 만나는 길이지만

엄연한 정맥길은 부대안쪽이기에 뚫어진 철조망을 따라 올라간다.

187봉에서 군부대 철조망을 우측에 끼고 10분정도를 안부를 타고 올라오니

철마산이란 정상 표지판을 만난다. 첫번째 철마산인 셈이다.

지도상에는 광학산이란 표시도 나오고 산 아래 좌측 동네가 만수동이라 만수산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는데 외지에서 산꾼은 상당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철마산(鐵馬山:202m:10:45)

남동구 만수3동과 부평구 일신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철마산(鐵馬山)이 있다.

‘광학산 또는 ‘만수산(萬壽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산인데, 『동국여지승람』이나

『인천부읍지』 등에는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시내 다른 곳에 같은 이름의 산이 2곳

더 있어 혼동하기 쉬운 이름이기도 하다. 인천시내에는 이 산 말고도 서구 가정동과 심곡동,

부평구 효성동 사이에 걸쳐 있는 철마산이 있고,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가좌동 사이에도 철마산이 있다.

 

철마산이라는 이름은 대부분이 ‘옛날 산꼭대기에 철마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쇠[鐵]로 만든 말’이라는 그 철마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또는 언제 누구에 의해 그것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어 그 유래를 알 수 없게 한다.

철마산 정상의 뙤약볕은 너무나 따갑다. 얼굴이 화끈거려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다시 선크림을 바르고 오늘은 반팔은 입어서 그런지 팔뚝도 시커멓게 타는 느낌이라

베낭에서 쿨토시를 꺼내서 착용하니 훨씬 나은 느낌이다. 진작에 찰걸...

만수산(?: 10:55)

철마산(광학산)에서 10분 정도를 내려오니 넓은 공터에 여러개의 벤치가 있고

운동시설들이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나 많아 보인다.

커다란 베낭을 메고 지도를 가지고 이것을 메모를 하는 나를보고 신기한듯 쳐다본다.

나이 지긋한 분에게 철마산이 왜 3개나 있냐고 물어보니 금시초문이란다.

하긴 한남정맥 자체가 뭔지 모르시는 분에게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거 아닌지...

그러면서 지금 이 자리가 만수산이란다... 에~잉, 그런 이유는 이 봉우리 아래로

터널이 지나가기 때문이란다. 이 아래 터널 이름은 만월산 터널이라... 에공 머리 아파라.

이곳 우측에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큰 공동묘지가 나타난다.

인천시 중심가에 이렇게 큰 공동묘지가 잇다니...

벤치가 있는 봉우리에서 철계단을 내려가니 공동묘지 순환도로가 나온다.

순환도로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니 우측에 쉼터가 있고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이곳은 가족단위로 온 등산객이 많이 보인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나를보고 막걸리 한잔을 하고 가란다. 고맙게 한잔을 얻어 마신다.

쉼터에서 10여분을 내려오니  상천불사로 내려가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상천불사 표지판에서 10여m 정도를 내려가서 좌측에 있는 바리게이트를 넘어

산속으로 접어든다. 산속에 접어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산꾼을 반긴다.

인천시립공동묘지

인천 시내 한가운데 엄청난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은 예전에는 인천의 변두리였는데 도시가 확장되면서

 시내 중심지가 되버린 느낌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길을 한남정맥이 지나가고 있다.

공동묘지 가운데는 첨단 화장장도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한다.

숲속에 접어드니 저 아래 상천불사에는 사시예불을 드리는지

스님의 천수경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온다.

5분 정도를 내려오니 갑자기 공장 담장이 정맥길을 가로 막는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나와 좌측 도로에 내려서니 우측 언덕에 대진금속이 있고...

도로를 타고 공장 사이로 나오니 커다란 4차선 도로가 나온다.

인천 만수동과 부평농장을 잇는 고개이다.

도로를 나오니 좌측에는 만월산으로 연결되는 구름다리가 있고 만수동이 보인다.

우측에는 S.K농장 주유소가 있다.

S.K 농장 주유소(11:10)

원 정맥길은 주유소 맞은편이나 지금은 엄청난 절개지에다 철책

펜스로 막혀있어 좌측 구름다리로 올라서야 한다

진돗개 월드라는 보안회사 간판을 끼고 좌측 펜스뒤로  올라간다.

만월~만수산을 연결하는 멋진 구름다리를 지나서...

이정표에 한남정맥 표시를 따라 구름다리를 건너 등로로 접어든다.

인천(仁川)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인천의 최초 명칭은 미추홀(彌鄒忽)이다.
이 지역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475)로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 한자식으로 바뀌어
소성현(召城縣)이 되었다.


고려 숙종(1095~1105) 때 숙종 어머니의 내향(內鄕)이었던 관계로 경원군(慶源郡)
으로 개칭·승격되었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內鄕)
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승격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다시피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환원되었다.


그것은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왕실과 관련이 있는

왕비가 탄생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경원부는 다시 인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 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현재의 인천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그날 (1413년 10월 15일)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 이 제정되었다.

만월정가는 길에 산불감시탑과 K.B.S 만월 중계기지가 보인다.

K.B.S 만월 송신소(11:30)

이곳에 올라서니 인천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짙은 박무로 인해

가시거리가 좋지는 않는다. 요즘 인천시의 재정만큼이나...

요즘 인천시가 지방자치제 중에서도 가장 재정압박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자치단체들의 보여주기 행정으로 인하여 방만한 운영을 하다가 그리된 모양이다

 

자치단체장은 말그대로 주민들을 대신하여 자치를 해 얼마나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주민들을 잘 살게해야 하는데 어찌된 건지 자치단체장은 자기들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 자기 지갑에 있는 돈 빼쓰다가 이렇게 된 건 아닌지...

 

하긴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일부 행정가 분들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한적이 있는가...

19대 국회가 개원된 지가 얼마인데 아직도 원 구성도 못하고 자기들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으니...민간 기업 같으면 해고를 당해도 몇번은 당했을 판인데

안부 능선을 따라가는데 햇빛이 없어서 엄청나게 덥고 힘이든다.

저 멀리 능선따라 길이 보이고 만월정이 보인다.

하도 더워서 우측 그늘에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분다.

이곳에서 웃옷을 벗어서 스틱에 걸어 놓으니 옷에서 금방 땀이 떨어진다.

웃통을 벗고 10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막걸리 한통을 비우고 다시 출발한다. 

만월정(滿月亭:11:50)

만월정에 오르니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고 인천시내와 부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만월산 아래 부평쪽 골짜기엔 문둥이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 하운님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문둥이 시인’으로 알려진 한하운은 거렁뱅이 생활을 끝내고 부평에 정착해 한센병환자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꿈을 실천해가기 시작한다.

그의 시 구절처럼 ‘앞날이 없는 문둥이는 / 돌아서 돌아서면서 무너지는 가슴에’ 희망을 갖기

어렵지만 그는 하루빨리 구걸이나 구호에 의지하지 않는 생활과 경제의 독립을 성취하고 싶어 했다.

 

 함경남도 함주 출생인 한하운은 1948년 월남한 후 문전걸식을 하며 쓴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가 출판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명동성당 안의 방공호, 용산 삼각지 다리 밑, 강릉, 수원 등지를 헤매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한하운은 서울, 경기,

강원 일대의 한센병환자들을 모아 부평에 수용하자는 정부의 교섭안을 받아들여 1949년 12월 30일 밤 우선 70여명의

환자를 이끌고 부평 공동묘지 골짜기로 향한다.  한하운은 부평의 요양원을 성혜원(成蹊院)이라고 이름 붙였다.

 

‘도리지하 자성혜(桃李之下 自成蹊)’라는 글귀에서 따왔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으나 그가 한때 일본에 머물며

몸담았던 곳이 도쿄세이케이고등학교(東京成蹊高等學校)였으니 아직은 온전한 몸으로 일본, 북경 등지를

유랑하며 문학가를 꿈꾸던 아름다운 한 시절을 잊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리라.

본래 이 말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실린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에서 유래하는데

복숭아와 오얏꽃은 달리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천형의 낙인을 찍고 세상과 등져야 하는 지독한 외로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울타리를 치고 지친 몸을 쉬게

하고 싶은 패배감.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고 싶은, 꿈틀대는 갈등이 또한 이 말 속에 담겨있다.
 부평을 기지로 하여 시 창작과 한센병환자 복지사업에 더욱 몰두하던 한하운은 <보리피리>, <나의 슬픈 반생기>

등을 연이어 출판하고 보육원, 제약회사, 출판사 등을 운영하며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1976년 십정동에서 사망한 그의 묘는 지금 김포공원묘지에 자리 잡고 있다.

한하운은 아무도 찾지 않는 만월산의 골짜기를 그들만의 낙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며 그가 부평에 내딛은 첫 발자국의 자취는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한하운은 인간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영원한 ‘이상촌(理想村)’과 자연과 벗하며 지낼 수 있는

문인들의 마을을 건설하고 싶어 했다. 그 꿈의 흔적만이라도 부평에 재현해 볼 수는 없을까. 죽어서

파랑새가 되고 싶었던 한하운의 힘겨운 날갯짓을 우리가 거두어 줄 때가 되지 않았나.

마루금에서 본 부평(富平)의 모습

고려시대인  1310년(충선왕 2년)에 부평부(富平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이곳이 황무지였으나 농경지를 개척하여  넓은 곡창지대가 되고 수확량이 많았으므로

‘부할 부(富)’자와 ‘넓은 평(平)’자를 써서 부평이라고 하였단다.

만월정 능선에 서니 지나온 인천시립공동묘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만월산(滿月山:187m:12:00)

인천 광역시 남동구와 부평구의 경계능선에 있는 나즈막한 산으로서

광학산 좌측 능선은 U자 형태로 왼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고  그 남서쪽을

만월산이 막아주고 있는 형태로 인천 시립공원묘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만월산(滿月山)’의 원 지명은 ‘원통산(怨通山, 元通山, 圓通山)’이다.

이 산의 흙과 돌이 모두 붉은 빛이라 朱자와 산의 형국이 기러기가 나는 것

 같다하여 雁자를 붙이어 주안산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1861년에 간행된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는 한문 표기에

'雁을 岸'으로 바뀌어 朱岸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주안산(朱雁山, 朱岸山)’, ‘선유산(仙遊山)’, ‘약산(藥山)’이라고도 한다.

怨通’이 ‘元通’으로 바뀐 것은 영조 때 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원통산(怨通山)’은 굴포운하 실패 이후 당시 주민들에 의해 붙여진 지명이다.

당시, 공사에 동원된 인구를 읍지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기록된 동소정면의 인구는 162가구 636명이다. 1가구당 약 4명 정도이다.

노동할 수 있는 인구를 가구당 3명으로 본다면 약 480여 명이다.

 국가의 사업으로 인해 생업(농사)을 포기하고 부역(賦役)에 강제로 동원된 것

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이에 원통해서 ‘원통(怨通)’의 지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의 만월산(滿月山)이름은 1920년경 보월(普月:韓性安)스님이 산 정상에 올라서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동서남북이 한눈에 다 보이고, 특히 산세가 인천 도심쪽을 향해 좌우로 팔을 벌려

모든 만물을 감싸 안을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동방만월세계약사유리광불 (

東方滿月世界藥師琉璃光佛)이 계신 연원을 취한 데서 유래되었다.
만월산의 약사사(藥師寺)는 전통 불교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전통사찰로, 전설을 지닌 ‘돌우물 약수터’에서

흘러 모아진 연못에 꽃과 각종 생태들이 생존하고 있어서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다.

만월산 삼각점

만월산을 비롯한 인천의 산에 설치된 삼각점은 다른곳에서 본 삼각점과는 다르다.

삼각점의 기준이 되는 수준원점이 인천시 남구 용현동 인하공업전문대

 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좀 특이하게 한 모양이다. 

만월산 능선 걷기는 참으로 힘이든다. 등로에서는 햋빛을 피할 그늘이

전혀없고 거기다가 비포장도로같은 자갈길을 걷다보니 피로도가 훨씬 많다.

부평 삼거리 주변의 모습

만월산 TV 공청 안테나가 있는 곳에서 내려서니 데크목 계단으로

정비를 잘해놨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약사사가 나오고

정맥길은 우측인 부평 삼거리로 내려가야 한다.

녹색 펜스가 있는 배수지를 내려가니 주택가가 나타난다.

은혜유통(12:20)

주택가를 내려서니 은혜유통이란 조그만 마트가 나온다.

이곳 골목에서 직진하면 인천시 남동구 간석오거리와 부평구

부평삼거리를 잇는 46번 국도가 나온다.

46번 국도(12:22)

예전에 이곳은 십정동에서 약사사로 넘어가는 고개였다고 한다.

굴포천을 뚫어면서 국가의 사업으로 인해 생업(농사)을 포기하고 부역(賦役)에 강제로 동원된 것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이에 원통해서 ‘원통(怨通)’의 지명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원통고개 또는 원테이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건널목을 건너서 한미 부동산, 타올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간다.

건널목을 건너니 도로에 ‘정양사’라는 표시석을 따라 좌측으로 계속간다.

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좌측에 총지종 사찰인 지인사가 우측에는 엄청나게 큰

갈비집인 온누리 장작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개 냄새 땜에 갑자기 배가 고파온다.

 

지인사에서는 법회를 하는가보다. 밀교종단인 까닭에 ‘옴마니반메훔’이란 진언만 들려온다.

조금을 더 올라가니 주택단지가 끝이나고 포장된 도로가 나타난다.

동암산 입구 표지판을 따라 2분정도 올라가다가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 등로로

접어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그러다 곧 포장도롤를 만나면서 110봉이 나온다.

동암산(銅岩山:110m:12:40)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에 위치한 조그만 봉우리로 지도상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이름으로 이곳에 옛날에 구리 광산이 있어서 동암산(銅岩山)이란 지명으로

불리워 진다는데 정상에는 그 아무런 표지판도 있지않다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넓은 공터에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서 편안길로 계속 직진을 한다.

그러나 엄청나게 더운 날씨에 햇볕을 피할 그늘이 없어서 고통스럽다.

송전탑을 포스트로 해서 계속 걸어간다.

좌측으로 신동아 아파트가 보이고 백운초등학교와 테니스장이 보인다.

다시 송전탑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삼각점을 지나 3시방향으로 내려선다.

갑자기 절개지 같은 곳으로 뚝 떨어지니 양쪽으로 펜스가 있고 보도블럭이

깔린 길을 따라 우측으로 걸어간다. 바로 아래에는 경인선 철로가 지나간다.

철재 펜스를 쭈욱 따라간다. 그리고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니 십정과선교라는 철도위를 지나는 다리가 나타난다,

십정과선교(12:50)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에 위치한 다리로 바로 우측에 백운역이 보인다.

십정동(十井洞)은 우물이 열개가 있어서 열우물이 있는 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이곳에 흐르는 개울이 선래천(仙來川)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잘못 표기된 거라고 한다. 옛날에 이곳에 배(船)가 들어와 선래천(船來川)

이었는데 이곳에 간척사업을 하면서 바다가 육지로 바뀌면서 ‘신선 선(仙)’

으로 바뀌는 바람에 선래천(仙來川)이 되었다고 한다.

 

과선교는 옛날에 배가 통과하는 다리라 하는 과선교(過船橋)라 부르는 모양이다.

지금은 배가 아닌 열차가 지나가고 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곳이다.

철도가 정맥길을 짤라먹는 바람에 부득히 다리를 또 건넌다.

다리를 건너니 부평아트센터라는 멋진 건물을 만난다.

부평아트센터(12:55)

부평아트센터 맞은편에는 멋진 백운공원이 있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부평도서관 쪽으로 향한다. 첫번째 신호등을 건너서 등로로 접어든다.

열우물 고개(十井峴)

백운역에서 동암역 사이의 고개를 열우물고개[十井峴]라 하고 이 고개 너머 산중턱에

 있는 마을을 열우물이라 한다. 열우물은 다른 마을에서는 대동우물 하나 파기에도

 온 마을 사람들이 서둘러 몇 날 몇 달이 걸렸는데 이 마을에서는 혼자서 몇 시간이면

 우물을 팔 수 있어서 몇 집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우물을 파서 한 마을에

우물이 열 개도 넘는다 하여 열우물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십정이나 십정리는 열우물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일설에는 십정(十井)은 십정(十丁)의

 오기로 십정리(十丁里)는 이곳에서 산맥이 십(十)자로 교차되어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즉 소래산 산맥이 서쪽으로 흘러 주안산에 이르러 크게 꺾이어 계양산 남쪽 줄기인

 원적산 줄기와 교차되어 대정(大丁)도 생기고 십정(十丁)도 생겼다는 것이다.

건널목을 건너서 데크목 울타리를 따라서 마루금으로 접어든다.

이곳은 부평 도서관 뒷산인데 함봉산 둘레길 안내도란 표지판이

있다.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는 산이다. 산에 오르니 우리동네

뒷산처럼 여기저기 조그만 길이 많이 나있다.

조금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5개의 돌탑이 우측에 있다.

산불감시초소(128m:13:10)

퇴약볕을 걸으니 자꾸만 피로가 밀려오고 잠이 쏟아진다.

6번 송전탑과 산불감시초소를 내려오니 편한 길이 나타나고

곳곳에 휴계용 벤치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점심 겸 지침(13:15~13:50)

오늘 점심은 감자와 토마토, 그리고  삿포로 생맥주 한캔이다.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단체 산행엔 갈아입을

옷과 기타 장비는 버스에 두고 가지만 나홀로 산행에는 모든걸

베낭에 다 짊어지고 가야하기에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는 먹는걸

줄일 수 밖에 없다.  감자 3알(2알은 간식용)과 토마토를 먹고 시원한 캔맥주 캬~아

이 맛에 산에ㅔ 오는거 아닌감...  4년전 일본 홋카이도에  갔다가

삿포로 맥주공장 견학에서 무료 시음에서 원없이 먹어본 추억땜에

삿포로 맥주 한 캔을 샀는데 시원한 맥아맛이 일품이다

그리고 시원한 벤치에서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 없어서 벤치에서

베낭을 베고 20분정도의 꿀맛같은 낮잠을 즐기고나니 몸이 날아갈 것 같다.

 NO2송전탑을 지나 내려선 구르지고개.

 오른쪽이 산곡동 방향이고 왼쪽이 가좌동 방향이다

조금을 지나가니 멋진 데크목이 나오고  곧이어 구르지고개가 나타난다.

 

가좌동의 유래를 보면

가재가 많이 사는 건지(乾池)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큰 가재 한 마리가 건지에서 나와

 ‘가재울’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가재리(佳裁里)’라 하였고, 이후 ‘가재’가

변음되어 ‘가좌(佳佐)’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곳을 건지가 있던 곳이라 하여

 ‘건지골’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구르지고개(九老峴:13:55)

인천광역시史에 나오는 지명유래를 보면

화랑농장에서 서쪽 산을 넘어 가좌동이나 십정동을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구르지 고개는 6.25전쟁이후에 생선장수나 소금장수들이 많이 넘어 다녔는데

경사가 급하여 그만 ‘굴러 넘어지지’ 하는 뜻에서 붙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또 다른 설은 일제때 군용으로 이 곳 산에다가 굴을 많이 파놓았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즉 구르지는 군용지(軍用地)의 변음으로 본다.

얼마전까지도 새우젖 장수들이 이곳 굴에다 새우젖을 보관하기도 하였단다.

구르지 고개를 오르는데 이곳은 호봉산이란다. 산허리를 도는

호룡산 둘레길이 있다. 지도상에는 나타나지도 않은 산이다.

구르지고개에서 퇴악볕에 15분만에 올라선다.

호봉산은 넓은 공터에서 100여m 우측에 있다.

호봉산(136m:14:10)

지도상에는 136봉으로 표기되어 있는 호봉산 정상에는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4등 삼각점(△ 인천 416 1994 재설)만이 정상을 덩그러니 지키고 있다.

정상을 들렸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우측 정맥길로 걸어간다.

계속해서 여러개의 송전탑을 바라보며 걷는다.

좌측 산 아래에는 커다란 변전소가 보이고...

호봉산을 내려서니 또다시 군부대 담장을 만나면서 오르락 내락을 계속한다.

등로 옆에는 김해 백두산악회 홍길동 아우님의 시그널을 만난다.

무척이나 반갑다. 오늘도 어느 산을 열심히 헤매고 있겠지... 범여처럼...

군부대 담장을 끼고 계속 걸어간다.

정자가 나타나고 계속 걸어가니 장고개가는 내리막길이 나온다.

장고개(14:40)

효성동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부평조병창까지 초지가 무성한 넓은 들판이 있었는데

옛날에 이곳을 마장뜰(馬場)이라 불렀었고 말을 키우며 훈련하던 곳이었고

장고개는 이 마장뜰에서 넘는 고개라는 뜻에서 붙혀진 이름이라 場고개인데

많은 사람들이 마당 장(場)을 긴 장(長)으로 잘못 알고있다.

 이 고개는 군부대가 점령을 하는 바람에 확실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장고개를 내려서니 좌측엔 텃밭과 버스 종점이 보이고 서구노인문화센터가 보이고

우측에는 군부대 블럭 담장과 군부대 망루가 있으며 고개가 막혀버려 고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이 있어 山自分水嶺을 위반(?)한다.

 

군부대 너머 조병창은 일제시대에 1939년 조병창 공사가 시작되면서 일제의 군수공장들도 같이 들어와 섰다고 한다.

그 최초의 기업이 ‘홍중(弘中: 히로나까)’이고, 1943년 삼릉(三菱: 미쓰비시)에 인수됐다.

이 공장 터가 현재는 ‘부평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를 공장 남쪽

맞은편에 만들었고 이곳을 ‘삼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도로 주변 상점에는 ‘삼릉약국’, ‘삼릉갈비’ 등의 상호를 볼 수 있다.

이 일대는 1960년대에 현재의 부평 6동과 2동을 합해 ‘동수동’이라고 했고,

1970년에 부평6동이 정식 행정동인 ‘동수동’이 됐다가 1977년에 부평6동으로 개칭됐다.

장고개에서 군부대 담장을 우측에 끼고 조금 올라오니

서구노인문화센터 내려가는 길이 나오고 어느 유치원에서 만든 여러가지 조형물이 있다. 

조금 지나니 우측에 묘지 2기가 나타나면서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우측으로 커다란 부대가 보인다. 오늘은 완전히 군부대 둘레길 걷는 기분이다.

산불감시초소(14:50)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니  등로에 345,000V가 흐르는 27번 송전탑을 지나고...

등로에는 4개의 커다란 깃대가 있다. 산 아래에 있는 군부대 사격시에

빨간 깃발을 올려서 등산객을 통제하는데 쓰는 것이라고 한다.

2번째 깃대를 지나고... 오늘은 더워도 너무 덥다.

철마산(鐵馬山:165m:14:57)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인천을 통과하는 한남정맥길에

오늘 2번째 만나는 철마산이다. 이 지역사람들은 명신여고 뒷산으로 알려져 있다.

산 정상에는 철마산이란 표식은 그 어디에도 없고 군부대에서 설치한 깃대만 있다.

이곳에서 급경사의 미끄런 자갈길을 내려가니 엄청난 절개지에 터널공사가 한창이다

이 터널이 생기면 끊어진 한남정맥길이 이어지겠구나.

미끄러운 자갈길을 따라 우측으로 내려서니...

우측에는 5층짜리 새사미 아파트가 보이고...

텃밭을 지나서 철계단을 내려서니 새사미아파트 정문이 나타난다.

새사미 아파트 정문(15:05)

새사미 아파트 정문을 나와서 횡단보도를 건너서 좌측으로 간다.

터널공사 중인 곳으로 걸어가니...

새사미아파트 버스 정류장에서 우측 등로로 접어든다. 등로관리는 잘되어 있다.

자꾸만 다리가 무거워진다. 힘들게 데크목 계단을 치고 오르니 원적산에 도착한다.

원적산(元積山:196m:15:25)

인천시 부평구와 서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2개의 표시석과

만월산에서 만난 똑같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전망대도 있다.

우측의 부평과 좌측의 인천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박무로 인하여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大東地紙”에는 원적산(園寂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여암 신경준의 山經表에는 “元積山 富平西十五里”라고 표기되어 있다.

 

원적산  표시석 뒤에 기록된 원적산의 유래

뚜렷한 등로를 따라서 원적정을 향한다.

원적정(元積亭:15:35)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철마정으로 나와있는데 최근에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원적정으로 바뀌었고 정자도 상당히 깔끔하다.

원적정의 유래 표지판

원적정에는 막걸리 장사가 있는데 이곳은 서울의 산에서 파는 잔막걸리가 아닌 캔막걸리를 판다.

목이 말라서 미칠지경이다. 캔막걸리 하나에 2,500원이다. 단숨에 2캔을 비우고 나니

몸이 훨씬 가벼운 느낌이다... 갈길이 멀어 서둘러 길을 나선다.

원적산에서 북쪽으로 내려서니 좌측에 이동식 화장실이 있고 계속 내려간다.

24번 송전탑을 지나고 나니....

가정동 갈림길 - 돌탑봉(15:50)

24번 송전탑을 지나니 곧바로 커다란  돌탑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직직을 하면 가정동 내려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정맥길이다.

이곳에서 가정동으로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독도에 주의를 요함)

 

조선시대 개국공신인 숙위공(肅魏公) 조반의 별장인 가정(佳亭)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된 동명이라고 한다.

돌탑봉에서 우측으로 90도 꺽어져 내려오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이정표에‘청천도시숲 →’ 으로 내려간다.

돌탑봉에서 계속 내려오니 우측에 청천동 공장지대가 나타나고

서구에서 조성한 조림지가 나타나고 정자가 있다.

이쪽에서 우측 공장으로 내려가는  나오고 좌측은 한신빌리지 내려가는 길이다.

원적산 등산 안내도를 끼고 좌측으로 내려간다.

 

이 우측에 공장지대가 옛날의 안하지골이다.

철마산 동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 청천(淸川)의 발원지이다

. 이 골짜기는 도둑의 소굴로 ‘도둑굴’이라 불렀는데 조선조 말기 이 곳을 본거지로

 신출귀몰한 도둑의 두목이 있어 행인들을 몹시 괴롭혔다. 고종 22년 정병하(鄭秉夏)가

당진현감에서 부평부사로 승진되어 와서 이 도적떼를 소탕시켰다 한다.

 일제 때에는 일본군 포병대가 병참(兵站)에서 이 깊은 골짜기에 대포를 쏘아 연습하던 곳이기도 하다.

조금을 내려오다가 길이 좋은 한신빌리지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다시 우측으로 꺽어지니 공장 담벼락이 나타난다.

공장 담벼락과 도로 펜스의 길을 개구멍 통과하듯이 빠져 나오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면서 도로로 내려선다.

좌측으로 내려오니 깔끔한 조아모텔 앞의 도로 신호등을 건넌다.

가정동과 청천동을 잇는 4차선 도로를 건너니 멋진 공원이 나온다.

공원에 들어서서 능선으로 올라가지 말고 ㄱ자 방향으로 계속간다.

한신 빌리지 굴뚝도 나타나고...

조금 지나니 공원 관리소와 화장실이 나온다... 계속해서 직진을 한다.

계속해서 한신 빌리지 담벼락을 따라 걸어간다.

담벼락을 따라 가다가 한신 빌리지 후문에 컨테이너를 보고

우측으로 꺽어지니 경인고속도를 건너는 육교가 나온다.

경인고속도로(16:00)

서울 인천 사이 잇는 고속 도로. 길이 24킬로미터, 너비 20.4미터로, 정식 명칭

 ‘서울 인천 고속 국도이다. 1969 7월에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 고속 도로이다.

경인고속도로 육교를 지나서 우측으로 꺽어내리니 아나지고개이다.

안하지 고개(16:05)

안아지 고개는 부평구 청천동과 서구 가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럴 듯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청천동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구 가정동 앞바다에서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군.”
그때부터 한자의 기러기 안(雁)자를 써서‘기러기가 내려 앉는다’는 뜻으로 안하지(雁下地)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이다. 이성계는 새 도읍지를 정하려고 무학대사를 시켜

적당한 장소를 찾게 하였다. 무학대사는 한양을 거쳐 부평에 왔다.
“이곳은 들이 넓고 비옥하여 새 나라의 수도로 삼을 만하군.”
무학대사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 탄식했다.
“아, 참으로 아깝군. 풍수의 이론으로 보면 이곳에 백 개의 고개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아흔 아홉 개밖에 없지 않은가.”
그의 말에 따라 그때부터 아흔아홉 번째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그것이 안하지로 바뀌었다.
위에서 말한 원통현도 이 전설과 연관하여 또 다른 뜻이 있다.
무학대사는 탄식했다.
“아, 고개가 아흔아홉 개밖에 없으니 원통하다.”
그래서 이때부터 원통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위의‘굴포천과 원통이 고개’에서 말한 김안로의 운하사업과 관련된 전설이다.

그때 운하를 만들면서 세 번째 시도로 굴포천에서 현재의 청천동 청천천과 연결시켜 수로를 깊이 팠다.
“여기도 실패하면 그 때는 끝이야. 어떻게든 성공해서 전하와 조정의 걱정을 덜어야 해.”
그는 일꾼들을 독촉해 청천천을 깊이 팠다.
그때 깊이 판 청천천이 고개 안에 있는 형상이 되었던 터라 ‘고개 안에 있는 낮는 땅’이라는 뜻으로

‘내하지(內河地)’라 했는데 그 말 중 한자의 안 내(內)자가 우리말로 변해 안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주막에서 술을 파는 여인의 이름과 관련된 전설이다.
1884년 조선 조정은 현재의 원창동 갯말(한자음을 빌어 포리라고도 했다)에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포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 전조창이라는 세곡 보관 창고를 지어 세곡을 보관했다가 때에 따라 필요한 만큼 우마차에 싣고 한양으로 갔다.
우마차 짐꾼들은 현재의 가정동과 청천동 사이에 있는 고갯길을 넘으면서 한 번씩 쉬며 지친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자신들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그들이 쉬고 간 주막에‘안아지’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여러분, 애쓰셨어요. 어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세요.”
그녀가 반색하여 외치면 우마차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마차를 세웠다.
“안아지, 그대는 참 아름답소. 그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준다면 우리는 더욱 행복할 것이오.”
사람들은 땀을 닦으며, 막걸리를 마시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아지라는 여인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주막 밖으로 나와 노래를 불러 주었다.
우마차꾼들은 그렇게 한숨을 돌린 뒤 다시 정부 세곡을 실은 우마차를 끌고 서울로 향했다.


한 곳의 땅이름을 두고 이렇게 네 가지 전설이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고개였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 서울대학교에 있는 조선 시대의 관립 도서관인 규장각 도서 중에 옛 지도가 있는데

그것에는 안하지 고개가 ‘구십현(九十峴)’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실려 있다. 

아나지 고개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올라가니 철수한 군부대가 보이고

GM 자동차 사원아파트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하나 3차아파트 정문에서 조금 올라가 우측 골목으로 들어간다.

하나 2차 아파트 담벼락을 타고가니 데크목 계단이 나온다.

데크목 계단을 올라 등로를 올라가는데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멋진 나리꽃이 지친 산꾼을 반기고...

등로 안부로 올라서니 NO 1 송전탑이 나타나고...

천마바위 유래 표지판.

이 표지판 아래에 있는 산중턱 바위에 말발자국이 있다고 해서 마제봉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도 인천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조금 올라가니 돌탑봉이 나오고... 계속해서 직진을 한다.

다시 군부대를 만난다.

철마산(鐵馬山:221m:16:35)

인천시 서구 가정동과 계양구 효성동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오늘 한남정맥길

인천구간에서 3번째 만나는 철마산이다. 대체적으로 천마산(天馬山)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서 용마가 났다고 하여 용마골이라 부르기도 하고 산 중턱 바위에

 말발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마제석이라 하기도 하고 마제봉이라 하기도

 하고, 다른 하나의 구전은 이 곳이 고려말 합천 이씨의 집성촌인데 문중에 날개 달린 장사

 아기가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이레만에 걸어 다니고 양 어깨에 날개가 있어 날아 다니기도 하였단다.

 

 당시 나라에는 이런 아기가 태어나면 구족까지 멸하는 법이 있어 후환이 두려운 부모는

 아이를 다듬이 돌로 눌러서 죽였다고 합니다. 그 때 하늘에서 천마가 나타나 집 주위를 돌면서

구슬프게 울어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곳을 天馬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천마산 정상 삼각점(△ 김포 328 1993 복구)

천마산에서 바라본 산 중턱에 있는 말발자국이 있다는 바위

산 정상에 전망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오늘 가야할 폐초소봉과 저멀리 인천의 진산인 계양산이 보인다.

계속해서 깃대봉을 만난다.

하나 아파트에서 능선으로 올라서서 엄청나게 큰 9100부대를 C자 형으로 빙 둘러서

한남정맥길을 이어간다. 등로의 표고차는 별로 없으나 등로의 먼지땜에 목이 엄청나게 아프다.

군부대에서 설치한 듯한 삼각점

천마산에서 여기까지 3번이나 헬기장을 만난다.

군부대의 경고판을 지나서 다시 오르막을 향해 올라간다.

폐초소봉(286m:17:10)

인천시 서구 심곡동과 계양구 효성동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전체가

군부대이다. 이곳은 군부대 초소가 있어서 초소봉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군부대가 철수하여 등산객들이 마음대로 왕래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막걸리 장사와 정자와 벤치들이 설치되어 있고 인천 사람들이 효성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저멀리 계양산과 바로앞의 중구봉도 보이고...

폐초소봉에 내려오니 조그만 고개에 돌탑이 2개있고 이곳도 막걸리 장사가 있다.

다시 내려온 만큼  중구봉으로 치고 올라간다.

중구봉 삼각점(17:25)

힘들게 치고 오르니 좌측에 철조망이 있고 중구봉 삼각점이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정상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 중구봉 삼각점은

3분정도 못 간 거리에 따로 설치가 되어있다.

중구봉(重九峰:275m:17:28)

인천시 계양구 효성동과 서구 심곡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경명산(景明山)으로도 불린다.

중구봉은 고려시대에 붙혀진 이름으로 인천이씨들의 전성기인 고려시대에 인천이씨

가문에서 왕비들을 많이 배출하여 ‘왕비들의 친정’ ‘御鄕’으로 불리면 많은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중구봉은 고려시대때 불교행사인 중구절(重九節: 음력 9월9일)의

행사를 치른 산이라 하여 중구봉이라고 되었다고 한다.

중구봉 정상에는 엄청나게 큰 돌탑이 있고 이곳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계양산으로 향한다.

이젠 징맹이고개까지는 무조건 내리막길이다.

대체적으로 등로는 편안한 편이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비비꼬인 소나무도 만나고...

징맹이고개  생태통로에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하고 좌측 계단으로 내려선다.

계단에서 수통에 남은 물로 수건을 적셔 대충 몸을 닦아 땀냄새를 제거하고

물티슈로 얼굴과 머리를 닦고는 옷을 갈아입고는 도로로 내려선다.

징맹이고개(17:50)

계양산 서쪽을 관통한 서곶에서 부평으로 넘나들던 고개로 옛날 중국으로 통하는 큰길이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삼남 지방에서 개성으로 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징맹이고개 라고 부르는 이 고개를 중심으로 동서(한남정맥)의 능선을 따라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중심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어지고 성문 공해루가 있던 초석만 남아있다고 한다.

 

징맹이 고개란 말은 매를 징말한다는 징매에서 나왔는데 고려 중엽에 매를 길들여 꿩, 비둘기 등을

잡는 매사냥이 성행해 나라에서는 도성 안에 매방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매 때문에 주민의 피해가 커지자

충렬왕은 이를 경명현으로 옮기면서 징맹이고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징맹이고개 서쪽 50m 지점인 공촌동에는 고려 때 나라에서 세웠던 국영 매방자리가 있다.

고려 충렬왕은 매사냥을 즐겨 송도에 있던 매방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자주 이 곳을 찾아오게 되고,

그래서 계양 도호부를 길주목이란 목사 고을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심곡동은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이 탁운봉 바로 밑 깊숙한

골짜기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이 고개는 고려 때 고을 이름을 따서 ‘수주고개[樹州峴]’라 이름하였는데, 원(元) 간섭기

충렬왕(忠烈王)이 매사냥을 즐겨 국영 응방(鷹坊)을 이곳에 설치하고 재위시 다섯 차례나

이곳에 들러 좋은 매를 징발한 것에 유래하여 ‘징매이고개[徵鷹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변음되어 ‘징맹이고개’가 되었고 한자로 표기하면서 다시 ‘경명이고개[景明峴]’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한편 ‘경맹이고개’라고도 하는데, 이는 충렬왕이 매사냥을 즐길 때 매를 경쟁시켜 산짐승을 잡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징맹이고개에 내려서니 차량들이 상당히 많다.

도로에 내려서니 버스 정류장이 상당히 멀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지나가는 차량들을

상대로 히치를 하는데 5분만에 지나가는 1톤 트럭이 선다.

내 나이 또래되는 분인데 고맙게 지하철 계산 역까지 태워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지하철을 탄다.

계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공항철도 환승역인 계양역에서 김포공항으로 공항철도를 타고와서

다시 지하철 9호선을 타고 고속터미널역에서 3호선을 타고 도곡역에 내려 집에오니 8시경이다.

어렵게 한구간을 마쳤다. 이제 1대간 9정맥이 2구간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