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의 뿌리를 찾아서...
상촌공파 동영상 제작팀이 처음 촬영에 들어간 곳은 경기도 고랑포에 위치한 경순왕릉(敬順王陵)이었다. 경기도 파주 적성면 두지리에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의 긴 흐름과 새소리의 효과음을 담고, 녹음이 우거진 경순왕릉비가 총알에 흠집이 난 것을 보면서 남북이 가로막힌 적막한 분단현장임을 실감한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님이 왜 여기에 계실까? 통일의 염원을 안고 계신 경순왕님의 크신 덕을 기리면서 묘역을 화면에 담았다. 경순왕은 시조이신 대보공 김알지(大補公 金閼智)의 28세손이며, 상촌의 8대조 태사공 김인관(金仁琯)은 중시조이다.
김인관(金仁琯)의 8세손인 상촌(桑村) 선생(金子粹)의 묘역이 위치한 경기도 신현리. 상촌(桑村)선생의 절의정신을 상징하는 순절비각과 묘소 신도비와 누워 있는 와비가 집안의 할아버지임을 상징하듯 준엄하면서도 따사롭다. 삼강행실록에까지 올라 있는 安東사림(士林)의 가장 추앙받았던 도덕학자 상촌(桑村)선생의 효자비가 비오는 날 현대를 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선생의 혼을 모시고 있는 타양서원에 가 보니 일직손씨 정평공 손홍량님의 영정이 촬영팀을 반겼고 그 옆자리에는 외조부님과 함께 계시는 상촌공의 위패가 보인다.
대목에서 절정에 이르며,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부끄럽게 한다. 생각하면서 황희(黃喜)가 선생의 죽음을 애도한 시가 적혀 있는 신현리 묘역을 스케치했다. 듣고 국사편찬위원회 김현영박사의 해설을 담았다. 그리고 오후 늦게 상촌선생의 유일한 유품인 유장을 발견하였는데 구중궁궐 그윽한 곳에 잘 모셔진 새악시를 만난 듯, 겹겹이 포장된 모습으로 나타난 600년 전 유품을 촬영하였다. 선생의 아드님(少尹公) 휘(諱) 근(根) 묘소는 상촌공 묘 西南 300步아래 건너편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고,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부터 세종7년(1425년)까지 증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셨는데, 여기서 長子 영년(永年), 2子 영원(永源), 3子 영전(永 ), 4子 영유(永孺)의 4분 손자가 나셨고 후대에는 수십명의 판서와 정승 그리고 왕후까지 있어 촬영의 순서에 어려움이 느낄 정도였다.
청백리 공적이 있고, 묘역은 뒷산 중턱에 있으며 이곳에는 판관공 영년선생의 강당인 선지당이 우람히 서 있고, 그 옆에는 충효사(자수,세필,홍욱,경연,추,은)와 효자정려간판이 보이나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한다리김씨의 텃밭을 일군 조선조 중기이후 세도가의 명문으로서 큰 가계를 이루는데, 여기서 정순왕후와 정승 그리고 20여명이 넘는 판서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좌랑의 후계에서 추사 김정희에 이르는 기획이야말로 화면이 너무 아름다워 힘든 줄도 모르고 촬영에 임했다. 다음촬영으로 미룬 점에 대하여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상촌공 4손 공평공(恭平公) 영유(永孺) 호(號) 퇴재(退齋)선생은 대사성과 대사헌을 지내고 성종 때 경남감사 재직시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간행한 학자이자 명신인데, 명나라 정조사로 갈 때 흰 산까치를 황제에 조공으로 바친 것이 예사로운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매사에 공평하게 일처리를 잘한 덕으로 공평이라는 시효교지가 내렸으며, 선생의 후예들은 조선조 사림의 맥을 이어가다가 사화 때마다 변을 당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십청헌 문간공 김세필 기묘명현이고, 두 번째가 을사사화 때 화을 당한 암행어사 충민공 김저선생이다. 충민공 묘역에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모친에 남긴 고결시를 새긴 비가 서 있다.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큰 도로에서 수지로 들어와 죽전동에 이르면 경기도 문화재 92호로 지정되어 있는 김세필 묘역이 나온다. 문화재 및 보호구역 지정에 공을 쏟은 것은 바로 후손이며 상촌공 종회장인 김경재이다. 이 묘역의 김세필선생 신도비에는 우암 송시열선생이 찬한 글이 있다.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가꾸어진 양반가의 묘역이자 사화를 당한 명현의 묘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청백리공적비가 있는 현감 남곡 김의선생의 묘역에도 최근 참배객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상촌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 후손이 줄줄이 향사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심은 것으로, 200년이 넘은 흰 소나무의 자태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 딸로서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인 월성위 김한신(漢藎:추사의 증조)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젊은 나이에 죽자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은 열녀옹주로서 조선왕실에서 유일한 열녀이다. 추사고택 옆에 위치(예산군 신안면 용궁리 202)한 화암사(華岩寺)는 월성위 김한신이 중건한 절이며 추사의 친필(천축고선생댁, 시경)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서산에 가면 성암서원(聖巖書院)에 김홍욱(弘郁:1602-1654)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학주 김홍욱선생은 대동법을 실시한 대학자로서 강빈을 구하려는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의 친국에 의해 장폐당한 名賢이고, 송곡사(松谷祠: 서산시 인지면에 위치한 서원)에는 단구자(丹丘子)김선생 휘 적(積: 학주의 父)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서산 음암면 유계리에는 김홍익(弘翼:1581-1636)이 연산현감으로 재직 중 순국한 것을 기리는 충신문이 있다. 한다리 경주김씨 세거지인 이곳에 정순왕후(김홍욱의 4대손인 국구 김한구의 장녀, 영조의 왕비) 생가와 순국선열 백림 김용환의 묘비가 서 있다. 사육신과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 숭모비는 김임이 연산군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서 계성군(鷄城君)에 봉작된 비이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선생이 제주도 대정에서 8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추운겨울에 그 가치가 드러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제자 이상적의 정성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한다. 이 세한도의 그림과 흡사한 소나무가 대정향교 내에 있는 의문당(추사가 후학을 가르치던 강당)에 있었다.
이성무, 이영춘, 고성훈, 이상태 박사의 해설, 그리고 상촌선생 문집3권 및 생애와 사상을 펴낸 명지대 신천식박사의 귀중한 해설을 담은 것은 큰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상촌의 후예 및 공평공 김영유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펴낸 김동진박사의 해설을 담지 못한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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