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慶州金氏-桑村公派 ♣

老學者의 忠魂(노학자의충혼)

by 범여(梵如) 2012. 12. 12.

老學者의 忠魂(노학자의충혼)

金子粹(김자수)는 高麗末의 儒學者, 고려가 망하고 이조가 성립되어 큰 벼슬을 주었으나,

그는 단연코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마저 끊어 버렸다.
효도 지극한 글방의神童(신동) 어릴 때 이름은 金子粹라고 불린 소년은 글방에선 재주 좋은 神童으로 이름났고,

집과 이웃에선 天生孝子 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사람다운 길은 효도가 근본이요, 효자의 집에서만 충신이 난다.】

마음에서 효성이 극진했던 자수소년이 의식적으로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려고
결심한 것은 글방에서 孝經을 배우다가 이런 대목에 감동한 때부터였다.

 

【나는 남의 두 배 효도를 어머니한데 해야한다.】

소년 때부터 그런 결심을한 자수는 자기를 지극히 사랑해 주는 어머니가 홀로 고생하는 과부였기 때문이다.
三司副使를 지낸 조부 英伯의 얼굴을 본 기억도 없고, 禮部副使知制誥(예부부사지제고)였던 父親 오에 대해선

그 예법 높은 謹嚴(근엄)한 인상만이 평생의 家訓으로서 영향을 주었다. 예부의 지재고란는 벼슬의 직책은

王의 勅書(칙서)를 기안하는 고급비서관 격이었고 王에 대해서도 기탄 없이 그 잘못을 諫告(간고)하는 권한과

직책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자수의 부친 오통은 특히 왕에게 준엄한 이론으로 잘못을 추궁하는 忠勇으로 부패한 관리들을

겁내게 했으며 政敵들의 미음도 샀던 것이다. 자수가 나중에 왕의 측근에서 가혹하리만큼 잘못을 들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諫官의 직책을 완수한 것도 부친의 기질을 이어받은 지도 몰랐다.


【사람은 公에서나 거짓이 없이 정직해야 한다. 거짓을 하긴 쉽고 정직하긴 어렵다.

부모에게 거짓이 없으면 자연 효도가 되고, 임금에게 거짓이 없으면 자연 충신이 된다.】

 

이런 부친의 교훈을 어려서 받은 자수는, 이 遺訓을 실행하는 것이 부친의 영혼에 대한 효도요,

홀어머니에 대한 사람의 도리라고 느꼈으며, 그것이 거의 天性처럼 습관으로 되었다.


【우리 慶州金氏문중에 효자가 났다.】

宗中에서도 소년 자수의 효성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 당시에 거짓 없는 진짜 효자는 나라에서도 민간에서도 가장 존경하고 우대하는 인격의 상징이었다.

 

【네가 나한데 대하듯이, 장차 커서 임금에 대하면 충신이 될 것이요. 그런 지성으로

세상사람을 대하면 군자의 경존을 받을 것이다.】

부친 없는, 외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훈계하는 모친의 속마음은 오히려 칭찬하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도 모친의 옆을 떠나지 않고 했다.

그것은 모친의 잔심부름까지 때를 잃지 않고 해 드리기 위해서였다.

 

【넌, 왜 어린애처럼 내 곁에만 붙어 있느냐. 모든 시간을 네 공부에 써도 모자랄텐데,

내 시중하느라고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 암만해도 내가 빨리 죽든지 머릴 깎고 중이라도 돼야지,

내가 집에 있다간 네가 공부를 못하겠구나】모친은 너무 지극한 아들의 효성을 도리어 걱정했다.

 

【자식은 부모에겐 늙기까지 어린애가 아닙니까.】

그런 웃음의 말도 했지만, 그것은 응석이나 보채기 위한 것이 아니요,

오직 모친의 손발이 대신 되기 위한 정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친이 걱정하던 그의 공부는

천품과 노력의 공으로 날로 대성해 갔다. 청년문장으로 자부하게 된 자수는 恭愍王23년 4月에,

進士 시험에 응했는데 王이 친히 뽑아서 及第시킨 33名의 젊은 인재 가운데는 특히 자수의 이름이 빛났었다.


그 뒤 恭讓王(공양왕) 2年봄에는 成均館, 祭酒(제주)로 있다가 世子侍學이 되었는데, 이때까지의 그의 벼슬은 많은

문장과 도덕의 학자적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공양왕 4년에 左常侍가 된 뒤로부터, 禑王(우왕)때의 正言을

거쳐, 高麗末期의 道觀察使(도관찰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정치생활을 했었다.


자수가 관계에서 높은 正言에 있을 때도, 모친을 모신 집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한날 어린애로 돌아가서

어렸을 때부터의 효도로 봉양했다. 늙은 뒤로 잠을 늦게 자는 모친이 잠들 때까지는, 아침에 입고 출근했던

관복의 띠를 풀지 않고 사사로운 기거동작까지 삼갔다.


그렇게 봉양하던 모친이 별세를 하자,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모친 산소 옆에 지운 묘막에서 만 삼년상을 입었다.

그동안에 그는 단 한번도 자기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며, 거의 斷食祭(단식제)를 계속 하다시피 삼년동안 된밥을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멀건 죽 한 그릇씩을 조석으로 두 번 취할 뿐이었다.

그 단식기도와 같은 효자가 조석으로 모친 묘전에서 슲이 통곡하는 수척한 모습은 지나던 행각과

나무꾼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런 효성의 靈場(영장)으로 이름이 높아진 묘막을 위문한 친구 南乙珍(남을진)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지 않을 수 없었다.

 

來見居廬子(래견거려자)〓 묘막 사는 자네를 찾아와 보니
苦前祭禮明(고전제례명)〓 엎드려 있는 거적자리 앞엔 제사범절이 분명하도다.
筍生誠意切(순생성의절)〓 자네 정성으로 땅에선 곧은 대순이 솟아있고
栢苦孝心傾(백고효심경)〓 송백나뭇가지들도 효성에 귀 기울여 꾸부러져 있도다.

 
이렇게 지극한 효성이 왕에게까지 들려지자, 왕은 자수의 집에 孝子 旌章(정장)을 달아 주어서 가문을 빛내게 했다.

왕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유명한 畵家(화가) 龍眠(용면)에게 묘막을 나오는 그림

【出居廬之圖〓출거려지도】을 제작케 해서 東國三綱事實錄(동국삼강사실록)에 수록해서 역사적인 龜鑑(귀감)으로 삼았다.

 

세 大學者의 詩로 엮은 友情


고려말기의 三大文章이요. 또한 고려의 운명과 함께 비통한 충절을 완수한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

牧隱 李穡(목은 이색),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의 우정은 각별했다. 자수의 초기의 이름은 한자로 子粹였으나,

나주에 自粹로 고쳤다. 그러나 입으로 부르는 발음은 똑 같았다. 字도 처음에는 去石廣(거광)이라고 했으나,

나중에는 純仲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號는 桑村이라 했다. 자수는 자기의 이름을 自粹와 자 純仲에 대해서 항상 자랑을 했다.

그와 목은 이색사이에 행하여진 그의 이름풀이 문답은 유명한 문헌으로 남게 되었다. 牧隱은 상촌의 선배였으나,

牧隱은 후배인 상촌을 친구로 사귀었다.


【이름 自粹라함은 스스로 勤勉服膺(근면복응)하려는 뜻이요,

자 純仲이라 함은 剛健中正(강건중정)의 뜻입니다. 이름과 자를 합해서 純粹가 되는데,

순수는 精乾(정건)의 德을 의미하죠. 文王의 덕도 요컨대 精乾이 아녔습니까.】

이런 자랑에 대한 목은의 대답은 우정에 넘치는 흥미 있는 解明(해명)이었다.

【선비는 賢(현)하기를 바라고, 현한 뒤엔 聖(성)하기를 바라며, 성한 뒤엔 天(천)되기를 원하는 법인데,

당신은 이름의 自粹와 자의 純仲으로서 그것을 자부하는군요. 일반의 말에도 君子는 自强不息(자강불식)한다고 하지 않소.

자강하면 굽히지 않고 (不撓=불요)하고, 불식하면 폐하지 않는 不廢(불패)데, 自强不息하고 不撓不廢하면 極에 달합니다.

극은 바로 天이 되겠지요.】
牧隱이 이런 해명까지 해서 준 것은 단순한 글자풀이가 아니고,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뒤에, 正言이라는 顯官에

있으면서도, 甲寅年 과거에 청년 준재들에 끼어서 응시하고 명예의 壯元에 급제한, 그 순수한 향학심과

근면 수양하는 이 격에 감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수가 장원을 했을 때, 이색은 여간 감격하지 않았다.

자수의 스승이었던 廉東亭(염동정)이 제자의 짐으로 축하하려고 가는 길에, 牧隱의 집에 들려서 같이 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때 마침 병석에 누워있던 牧隱은【내가지금 病中이라 廉先生과 함께 못가는것이 유감입니다.

그 대신 잠깐만 기다리시오. 내가 축하의 시 한수를 지어서 전하리다.】하고 목은은 병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지었다.

斯爲盛事足驚世(사위성사족경세)세상이다 놀라는이런경사에 축하못가는 이몸의병이 한이로구나

只恨病軀難出門(지한병구난출문) 인생의 모였다 헤졌다 함이 부평초와 물과 같듯이

聚散却同萍興水(취산각동평흥수) 즐겁고 고달픔을 다만 술잔에 맡기는 세상이어
閒忙只合酒盈樽(한망지합주영준) 아아 내 몸이 언제 쾌차해서 함께 소요하리요
四支調適知何日(사지조적지하일)
風雨簫簫獨倚軒(풍우소소독의헌) 비바람 소리 쓸쓸한 집에 홀로 누어 있자니,

 

牧隱은 빨리 자유로운 몸으로 쾌차해서 자수와 정몽주와 더불어 송학 도 다니며, 서로 믿는 우정으로

천하를 탄식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가보지 못하고 글로만 축하하면서, 일찍이 상촌과 圃隱과

더불어 송악 산에 올라가 놀았을 때에, 상촌이 읊었던 비통한 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시는 그의 문장과 더불어 愛國忠君(애국충군)의 지성이 애타고 있었던 것이다.

 
春風蹇馬看山客(춘풍건마간산객) 봄바람에 말을 타고 산 구경을 왔건만
步步遲來萬樹陰(보보지래만수음) 말도 느릿느릿 걸으며 숲속에 졸려고 하네.
澗畔林深無怪石(간반림심무괴석) 개울가의 깊은 숲엔 바위도 없이 그욱만 한데
山章崖花落총新禽(장애화락총신금) 저편 쪽 절벽에선 꽃이 져서 새들을 울리는구나
三杯酒氣論今日(삼배주기론금일) 석잔 술에 흥분해서 세상사를 탄식하면
一曲松聲報古琴(일곡송성보고금) 한 곡조 소나무 바람소리가 옛날 거문고를 울리는구나.
故國蒼茫如昨事(고국창망여작사) 아아 아득한 역사가 어젯일과 같아서
忠臣烈士共爭吟(충신열사공쟁음) 충신 열사들이 슬픈 회포를 읊어 마지 아니 함이고.

 

牧隱은, 상촌이 일찍이 고려 조정의 운명이 날로 기울어 가는 것을 한탄하면서,

그 운명과 더불어 고달퍼하는 왕을 동정한 상촌의 다음의 애국 시로 생각이 났다.

忠臣烈士今安在(충신열사금안재) 충신 열사들은 어디 가고 여기 없는고
飛去山禽語古春(비거산금어고춘) 날아가는 산새만이 옛날 봄을 그리워하네.
玉階花心風後老(옥계화심풍후노) 대궐안 뜰의 꽃도 모진 바람에 다 늙었으매
金陵樹色雨中貧(금능수색우중빈) 임금님 사랑하시던 나무 빛도 우중에 초라하다.
應知日短淸香閣(응지일단청향각) 아아, 날이 이미 기운 이 추운 청향각에서
想必天寒觀德人(상필천한관덕인) 오직 그리운 것은 나라 구할 충신의 덕이로구나.
感淚振衣臺上客(감루진의대상객)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씻고 고궁의 섬돌에 선 누가
此時幾泣我王身(차시기읍아왕신) 가엾은 임금의 몸을 울어 위로 할 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