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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밀양(비슬)지맥(終)

팔공기맥과 밀양(비슬)지맥의 개요

by 범여(梵如) 2012. 9. 5.

 

*백두대간과 팔공산(이우형)

우리나라의 산은 저 혼자만의 산이 아니다.
크고 유명한 산이나 해안가 낮은 구릉의 이름 없는 산이라도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산줄기로서
그 모두는 물줄기를 가름한 분수령으로서 물뿌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 지리인식의 기본인 산경원리(山經原理)이다.

조선시대 문헌인 여암 신경준(1712~178 1)의 <산수고(山水考)>와 찬표자 미상인 <산경표(山經表)>는
이 땅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하였다.

이들 산맥 가운데 주산맥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내린 우리땅의 근골(筋骨)로물줄기를 크게 동서로 가르고 있다.
여기서 가지친 정맥은 큰 강의 유역능선, 즉 분수령을 이룬 산맥으로서 장백정간, 낙남정맥,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이다.
이 산맥들은 조선시대의 지도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도류는 가장 오래된 1500년대의 조선방역지도류에서부터
1750년대 정상기(1678 ~1753)유형의 <동국대전도>와 <동국팔도분도>
그리고 1850년대 김정호의 <청구도>와 <동여도>, <대동여지도>로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지도의 지형표현은 산경원리를 철저히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대동여지도의 산맥표현은 이 전통기법을 바탕에 두고
정맥에서 다시 가지친 기맥에 이르기까지 그 줄기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현대지도의 등고선에서 읽혀지는 산계와 같은 것으로
수계중심의 지형지세도로 더욱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산경원리를 정립한 것이다.
 그 크기는 약 1:216,000으로 남북이 6m60㎝가 되는 대형의 전도이다.
우리나라 옛 지도에서 보이는 독특한 산맥의 표현기법은 나라땅의 모두가 산으로 이루어져
그 줄기들에서 생성된 물줄기를 표현했으며,
이와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공통된 지리 상식을 그대로 지도에 옮겨 놓은 것이다.
지도는 그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공통의식이 담아져야 지도로서 가치기준이 인정되며,
독도(讀圖)의 이해력과 정보적 이용도가 점진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경원리인식은 이 땅의 사람들 누구나 느끼고 인지하는 이 땅에 대한 고래의 지리심성에 바탕을 둔
지극한 생활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산경표가 규정한 대간과 정맥의 15개 산맥들은 모두가 그 산의 유명도와 크고 높은 것과 관계하지 않았다.
아무리 낮고 이름없는 구릉이어도 강줄기와 관계한 자연지리적 분수령으로 북으로부터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금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의 유역을 분계하고 있으며,
해안에서는 동, 서, 남해의 해안지방 영역도 쉽게 가름할 수 있게 하였다.

정맥에서 다시 가지친 기맥들은 2차적인 강과 내를 이룬 산맥이다.
내(川)의 의미는 곧 삶의 터전이 되는 곳이다.
아울러 그 하나하나의 골에 생성된 도시 발달과 그 역할을 일러주며, 도시간의 수로연계를 쉽게 파악하게 한다.

지역적인 기상의 차이로 농업과 기타 산업에 따른 의식주의 문화가 창조되었다.
자연스런 언어권의 분계로서 특이한 멋과 가락을 낳게 하며 자랑스런 풍속도 갖게 하였다.
모두가 세분화되는 생활문화권의 권역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팔공산은 대구사람들의 북쪽 머리산이고, 남쪽의 산은 비슬산이다.
산경표와 지리지의 내용은 이들 두 산의 줄기는 모두가 백두대간이 태백산으로 이어지기 전

구봉산에서 갈라져 낙동강의 동쪽 분수산맥을 이루며 부산의 다대포 몰운대까지 이어진

낙동정맥에서 가지친 기맥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으며 지도 또한 정확하게 표현해 놓았다.

 

팔공산의 기맥은 낙동정맥의 보현산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의 방입산에서 셋으로 나뉘어진다.
한줄기가 화산으로 이어져서 팔공산에 이르고,
남쪽으로 하양의 무락산, 서쪽으로 가산산성이 되고
소나치를 사이에 두고 소학산, 유악산, 천생산에서 인동의 옥산으로 낙동강에 이르렀다.

 

 


남쪽의 비슬산은 낙동정맥의 사룡산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구룡산, 삼성산, 대룡산, 대왕산, 마암산에 이르고
성현과 팔조치에서 불끈 솟아 비슬산에 이르렀다.
다시 한 가닥은 북쪽으로 대구의 연귀산, 서쪽으로는 현풍의 소이산 봉수로 금호강에 내려 앉고,
남쪽으로는 멀리 창녕의 화왕산, 밀양의 화악산으로 연결됨을 기록했다.

동쪽 낙동정맥의 산들은 고라산, 보현산, 법수현, 관령, 칠감산, 분수현, 운주산, 소산, 성령, 자옥산, 마이현,
무학산, 사룡산 등이다.
이 모두의 산들과 낮은 고갯마루들의 연결은 대동여지도에서 보면 한눈에 그 사실적인 의미가 보다 쉽게 읽혀진다.
이 지도의 주인공들은 그 안의 땅을 금호강의 유역으로 읽었다.
당연한 지리정보이다.
이와 같은 기초지리를 이 지도가 담고 있고, 담고 있어야 했던 까닭도 있는 것이다.
이 땅에 대한 기초지리는 현대에도 적극적으로 유효한 것이다.

 

이 산줄기에서 가장 높은 산은 1,192m의 팔공산이고 남쪽줄기에서는 1,084m의 비슬산이다.
두 산이 낙동강 동쪽 유역 내륙에 버티고 있어 이 지방 문화권을
안동, 대구, 밀양권역으로 크게 삼분하고 있음도 쉽게 파악하게 한다.

 
팔공산기맥은 안동으로 흘러드는 청송의 남천과 의성의 위천에 대하여는 남쪽,
금호강에 대하여는 북쪽을 가름하는 분수기산맥이 되고,
비슬산기맥은 금호강에 대하여는 남쪽, 밀양의 무흘천상류인 청도의 자천에 대하여는 북쪽을
경계하는 분수기산맥이 된다.
자연히 낙동정맥의 서쪽은 금호강 유역이고, 동쪽은 경주의 형산강유역이다.
두 산줄기, 즉 이름 붙여 금호기맥과 비슬기맥이 안고 있는 강이 금호강이다.

 

금호강은 낙동강의 11개 지류 가운데 남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주류의 길이 118.4㎞, 전체 하천의 총연장 5,123㎞, 유역면적이 2,088㎢이다.
금호강은 그 원출(原出)이 보현산에서 남류하는 을하천이다.
동쪽의 죽장천과 합하여 남천이 되어 영천을 만들고,
서쪽으로는 화산을 끼고 앉아 서천에서 신녕을 낳았다.


북쪽의 시천과 남쪽의 범어천이 다시 남천이 되어 하양이 되고, 남쪽 오목천은 자인고을을 만들고
황률천에 흘러드는 남천에는 경산을 있게 했다.
상류의 강물을 모아 낙동강에 쏟아넣기 위해
금호강은 남북에 거대한 팔공산과 비슬산 사이 드넓은 분지에 대구라는 거대한 도시를 품게 했다.
팔공산은 비슬산과 더불어 금호강을 형성했다.


그 안에 금호강문화권을 형성하고 대구, 경산, 영천문화권과 다시 세분화되는 삶의 문화를 일구어내게 하였다.
현대의 지도에서도 이 산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 산과 고개이름들, 골짜기의 이름들은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다.
그러나 그 지형만은 옛 지도와 다름이 없다.


 
현재의 지도에서는 낙동정맥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영천군 죽장면 상옥리의 600m 고지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달의령(742m), 면봉산(1,113m), 보현산(1,124m), 방각산(605m)의 드높은 산으로 연결되고
노귀재로 내려 앉았다가 다시 방기산(755m)에서 화산(822m)으로 연결되고
여기에서 남쪽으로 이 산맥의 우두머리산인 팔공산(1,192m)으로 이어졌다.


팔공산은 서쪽 한티재로, 다시 가산(902m)으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북쪽으로 위천의 적라산으로,
또 한줄기는 백운산(713m), 소화산(622m), 장원봉(486m)에서
끝으로 금호강 하구가 내려 보이는 성산(274m)으로 이어졌다.

 

 

 

비슬산 산줄기도 낙동정맥의 사룡산(685m)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구룡산(675m),

장백산(650m), 대천고개, 대왕산(605m), 성현, 상원산(669m), 삼성산(663m)으로 이어져서
비슬산(1,084m)으로 그 마지막 위세를 떨치며 금호강을 남쪽에서 끌어 안고 있다.


팔공산을 옛 선조들은 하나의 산으로 보지 않았다.
울타리를 쳐놓은 팔공산도립공원 그 안만을 팔공산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 산의 그림자가 미치는 모두의 땅을 그 산의 지경으로 인식했다.
이어진 줄기는 생명의 시작인 물의 산지적 의미로 받아들였다.


성호 이익(1681~1763)의 글에는 산과 물의 조화로운 합이 우리에게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한다는 글이 있으며, 60의 나이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는 애국이라는 말은 그 땅과

그 땅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라 하고,  그 땅의 됨됨이도 모르면서 애국을 이야기한다면 허공의 것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