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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밀양(비슬)지맥(終)

밀양(비슬)지맥 제1구간 - 숙재(숲재)에서 대천고개까지

by 범여(梵如) 2018. 2. 26.

☞ 산행일시: 2018년 02월 24일~25(무박산행)

☞ 산행날씨: 흐린 날씨에 짙은 박무...아침에 간간히 비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4.5km  + 어프로치 1.6km/ 9시간 02분소요

☞ 참석인원: 코뿔소 산악회 지맥팀 따라서

☞ 산행코스: 숲재-생식마을-비슬지맥 분기봉-산불감시초소-시루미기 갈림길-사룡산-541봉

                 시루봉 갈림길-김녕김공 묘-암봉-오재-마일리 갈림길-517봉-수암재-수암사 갈림길

                 암봉-부처바위-무지터 갈림길(왕복)-무지터-구룡산-갈림길-구룡재-매남리 갈림길

                 650봉-갈림길-617.9봉-암봉-무명봉-정상재-538봉-588.1봉-무명봉-발백산

                 군계 갈림길-임도-541봉-안부-494.6봉-영천최씨 묘-NO87 송전탑-임장재-송전탑

                 508.4봉-477봉-남양서공 묘-용림마을-NO37 송전탑-332.9봉-NO38송전탑-무명봉

                 임도-351.4봉-무명봉-NO42송전탑-350봉-NO43송전탑-육동배수지-비오재-경주이공 묘

                 갈림길-318.1봉 갈림길-274.6봉-이동통신탑-대천고개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서면, 산내면 / 영천시 북안면 / 청도군 운문면 / 경산시 용성면


늘 마음속에 응어리진 곳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밀양(비슬)지맥 1구간이다

어느 기.지맥이던 1구간의 접속구간이 문제이긴 하지만 특히 낙동정맥에 딸려있는

지맥길 1구간 접속구간은 교통이 좋지않고 오지이다 보니 독립군 산행(나홀로 산행)을

즐기는 범여로선 시간이나 경비면에서 가장 고민이 많았던 곳이 밀양(비슬)지맥 1구간이었다

 

그런데 공작산 아우님한테서 카톡 한통이 날라온다 ‘형님! 비슬지맥 첫 구간 갈겨’...OK하고

약속을 하고 토요일 밤 늦게 산악회 버스를 탄다...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당진~영덕간 고속도로

화서 휴게소에 들렸다가 새로 개통된 상주~영천간 고속도로 신녕I.C를 빠져나와 좁은 도로를 따라서

꼬불꼬불한 길을 헐떡거리며 한참을 올라간 다음에야 버스가 들머리인 경주시 최오지인 산내면 우라리에 도착한다(03:30)

 

버스가 도착하니 산행대장이 4시경에 산행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난 이 산악회와는 난생 처음 산행을 하고 더군더나 거의다가 나홀로 산행을 한 터이라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지맥길은 상당히 부담스럽다...첫번째는 어둠속에 산행을 2시간 이상 한다는

부담스럽고, 두번째는 여러 사람들과 산행을 하다보면 내 페이스를 잊어버려 남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부담스럽다...사실은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상당히 많이 망설였는데 다행히 아시는 분들이 서너명 되어따라

나서긴 했는데 많이 걱정이 된다

 

밀양(비슬)지맥의 지도와 개념도

밀양(비슬)지맥은 낙동정맥의 사룡산(四龍山 : 683m)에서 분기해서 남서쪽으로 구룡산, 발백산, 대왕산,

선의산, 용각산, 상원산, 봉화산, 삼성산, 우미산을 거치며 이어가던 능선은 비슬산(琵瑟山:1.083.6m)에

이르러 다시 남쪽-남동쪽으로 이어가며 조화봉, 수봉산, 묘봉산, 천왕산, 배바위산, 호암산, 화악산, 형제봉,

종남산, 팔봉산, 붕어등을 일으키고 밀양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146.5km의 지맥이다.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밀양지맥이라 부른다

 

낙동정맥과 함께 밀양강물을 애워싸며 돌다 밀양강을 낙동강에 합수 시키고,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

오우진 나루에서 그 맥을 다하는데, 밀양강 건너편에는 영축지맥, 낙동강 건너편에는 무척지맥의 끝점과 마주본다
비슬지맥 (琵瑟枝脈)은 낙동정맥의 사룡산(四龍山 683m) 북쪽 400m 지점에서 분기하여 서진하며 사룡산(683m),

룡산(674.8m),발백산(674.5m), 대왕산(607m), 선의산(756.4m), 용각산(692.5m), 상원산(674.1m),

삼성산(668.4m)에 이어 지맥의 최고봉인 비슬산(琵瑟山. 1083.6m)에서 남진하여 조화봉(1057.7m), 수봉산(592.5m),

묘봉산(514m), 천왕산619.2m), 호암산(611.2m), 화악산(930m), 형제봉(556.7m), 종남산(663.5m), 팔봉산(391.4m), 붕어등(278.8m)을 지나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에서 낙동강에 발을 담그며 그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146.5km가 되는 산줄기를

신간경표에서는 비슬지맥이라 부르며, 대한산경표와 영남의 일부 양식있는 산꾼들은 밀양지맥이라 부른다
 밀양(비슬)기맥을 흔히 '용의 기운이 흐르는 산줄기'라고 이야기한다. 사룡산 , 구룡산, 용각산 등 밀양(비슬)지맥

산군의 산 이름에 유독 '용(龍)' 자가 많이 들어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산꾼들을 태우고 아주 좁은 도로를 따라서 숙재(숲재)에 도착한 버스는 가뿐 숨을 헐떡인다

난 평소의 버릇처럼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는데 짙은 박무가 가득하긴 해도 날씨는 춥지않다

산악회 총무님이 타 주시는 커피한잔을 마시고 산행 채비를 한다 

숙재(淑嶺:475m:03:30)

경북 경주시 서면 천촌리와 산내면 우라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숲재로 되어 있으나

고개가 아화 방향으로 급하게 숙이고 있다고 숙재라고도 하는데 숲재는 誤記인듯 하다

아화쪽 아랫 동리 이름도 숙골이고 거기있는 저수지도 숙곡지이고 숙재(淑嶺)라고 쓴다.

버스 승장장 안에는 생식마을을 말하는 시루미기라고 적혀 있다.

"우라리(牛羅里)"는 마을 모양이 소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산내면 아니 경주에서도 최오지인 우라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내면이지만 생활 환경은

서면에 있는 아화쪽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고개 정상에 있는 버스정류장 이름은 시루미기이다

우라 생식마을이 있는 이곳을 시루미기라 부르는데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고개 정상에는 ‘우라생마을’과 ‘우라二리 청년회’ 표시석과 버스 정류장, 석두암 표지판이 보인다 

산행을 시작하다(03:48)

산행대장께서 04:00부터 산행을 시작하겠다고 했는데 성질 급한(?) 산꾼들은 벌써 출발한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 밖에 없다...2010년 7월 25일 낙동정맥길에 걸었던 길이다

우라생식마을 표지판이 있는 도로를 따라서 가는데 시루미기(우라리)라 부르는 우라생식 마을은 

1940년대까지는 민가가 없었다고 하며 6.25 당시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1950년 9월 

북한군의 공세로 인접한 영천 북안에서 임포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빨치산이 거점 삼아 밀려오는 등 일대가

격전지가 된 시루미기는 1970년 전후 한 신앙인이 들어가 생식마을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면모가 달라져,

 40여 호 100여 명의 마을로 성장했다고 한다

생식마을 식물분석장(04:02)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니 생식마을 식물분석장 철대문이 길을 막는다.

다행히 철문은 열려있고, 마을 골목길에는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있는데 마을에서 스피커로 들려오는 소리...

기독교식의 새벽 예배인지? 불교식의 새벽 예불인지...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2010년 7월 25일 낙동정맥 산행때의 사진

생식마을은 일반인이 따라하기에 쉽잖은, 이곳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하는 수준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세속과 달리 약초 캐고 양봉을 하여 자급자족하며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듯했다.

안내문에 쓰여진 문구를 잠시 읽어보니 독특한 종교적 신념을 갖고 생식으로 살아가는 집성촌인 듯하다.

생식의 좋은점은 식생활을 간편하게 할 수 있고, 환경오염 해방과 건강유지 그리고 욕심이 줄어든다.

생식의 신생은 약초... 약초는 먹은 후에 안다. 라는 글은 공감이 가는 문구이다

 

 

2010년 7월 25일 낙동정맥 산행때의 사진

이곳은 특정종교인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모든걸 자급자족하면서 생식을 한다고 하는데 야심한 새벽에 

기도중인지 알지도 못하는 소리가 스피커를 향해 들려오고 어둠속에 마리아상도 보이고 성경구절도

보이는가 하면 합장이란 불교 용어도 보인다. 그런가하면 유교적인 면도 약간 보이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만병통치교(?)인가. 정통 종교에서 보면 이단으로 보일법하다

이 글귀를 보면 기독교인듯 하고...

이건 또 뭔지?...도통 이해가 안 간다

기독교에서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곳에 있는 황소상과 사자상은 뭘 의미하는지?

갈수록 이해가 안된다 

영문(靈門:04:08)

어둠속에 생식마을 정문을 지나 사룡산을 향하는 곳에 영문(靈門)이 나온다... 이건 道敎의 형태인데...

생식마을 지나서 능선으로 오르는데 개소리만 요란하다

밀양(비슬)지맥 분기봉(659m:04:16)

이곳 낙동정맥에서 분기하여 사룡산에서 구룡산, 대왕산, 용각산, 달성의 비슬산, 천왕산,

화악산, 밀양 종남산을 거쳐 오우진나루까지 약146.5km. 밀양강과 낙동강을 가르다가 모은다.

이 분기봉(分岐峰)에는 정상 표석(標石) 하나와 금속 이정표 하나가 서 있었다.

 

돌에는 ‘비슬지맥 분기점 / 656m / 2007년 5월 21일 청도산악회’라고 새겨졌고,이정표에는

‘밀양기맥 분기점 / 2007. 3. 18. / 부산 같이하는 산악회’라 씌어 있었다.

대구, 경북사람들은 대구생활권을 중심에 둬 금호강 수계를 따라 ‘비슬지맥’이란 개념을 정립하려는 데

반해, 부산-경남 사람들은 밀양과 밀양강을 더 중시해 ‘밀양기맥’으로 설정하려는 모양이다.

분기점에서 인증샷

산불감시초소(04:18)

8년전 낙동정맥길에 없었던 산불감시초소를 어둠속에서 만난다.

이곳은 조망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맑은날에 이곳에 서면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과

영천 보현산을 비롯해 북쪽의 산그리메가 모두 다 조망되는 곳인데 어둠속이라

모든게 아쉽기만 하고 날씨가 풀린 탓인지 짙은 薄霧가 자꾸만 등로로 밀려온다

우라생식마을(시루미기) 갈림길(04:21)

좌측으로 내려가면 우라생식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의 뚜렸한 등로로 사룡산으로 향한다

8년전 낙동정맥길에 이곳에서 바라본 경부고속전철과 팔공산의 모습

등로에는 페인트통들이 매달려 있는게 많이 보인다

마치 군부대철조망에 달린 깡통처럼...

사룡산(山:685m:04:28)

경북 경주시 산내면 우라리, 영천시 북안면 당리,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에 쳐 있는 해발 685m의 산으로, 서쪽으로

구룡산, 남쪽으로 장륙산, 정족산과 이어져 있으며, 주봉과 더불어 시루봉, 문방봉(645.2m),조래봉(585m)으로

결되어 있고, 옛날 용 네 마리가 승천한 산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사룡산은 이웃한 경주 오봉산의 부산성과 연결되는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시대 병사들이 이 산을 거점으로 삼아 적을

물리쳤다하여 영천 사람들은 사룡산을 전방산이라고도 부르고, 연세 많은 어르신들은 '전배이'이라고 부른다. 
낙동정맥과의 분기점을 아래쪽에 따로 표시하기도 하지만, “사룡산에서 낙동과 갈린다”는 말이 어긋난 말은 아닐 것이므로,

사룡산 정상이 낙동정맥에서의 분기점이고 비슬지맥의 시작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산경표와 대동여지도의 표기 또한 그러하다.

사룡산은 경주시와 영천시, 청도군의 3시.군봉이 된다.
예전에는 정상석 3개와 정상목이 하나 있었는데 하얀 정상목은 보이지 않는다정상석 바로 아래에는 靈山辛公의 묘지가 있다  

 

사룡산은 직현천(直峴川)의 발원지로 사룡산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내칠리를 거쳐 남쪽으로 흘러 밀양강의

최상류 중 하나인 동창천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직현천의 이름은 내칠리의 자연 마을 중 하나인 직현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직현()은 순우리말 이름인 곧은터를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내칠리()는 안옻밭의 한자 표기인

내칠전()에서 칠()을 칠()로 바꾸고, 전()을 생략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호구총수』(경주)의 산내면에는 칠전리()로 기록되어 있다.

사룡산 정상에 있는 靈山辛公의 묘지

정상서 모든 산꾼들이 모여 인증사진을 찍고 선 채로 휴식을 취하는데 妄者에 민폐가 되는것 같아 미안하다

이곳에서 묘지를 끼고 급하게 좌측으로 꺽어져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오재 방향으로 향한다 

어둠속에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고 급경사의 내리막길

오랫만에 그것도 아주 오랫만에 무박산행을 한 탓에 헤드렌턴 건전지가 다 된 모양이다

불빛이 희미하여 등로가 잘 보이질 않는다...안부를 지나 앞 사람의 헤드렌턴에 의지하여 오르막에 오르니

준.희 선생의 산패가 있는 541봉에 도착하고...좌측 능선 아랫쪽에 생식마을의 불빛이 보인다

숙재에서 분기봉과 사룡산을 찍고 오재로 향하는 등로는 ∩로 이어진다

541봉(14:48)

시루봉 갈림길(17:01)

우측으로 희미한 시루봉 갈림길이 나오고 암봉이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우회한다

처사 김녕김공 묘(05:02)

시루봉 갈림길에서 내려오니 어둠속에 김녕김공 묘지를 만나고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암봉(05:03)

암봉을 우회하여 내려서니 또다시 아주 급경사의 내리막길... 건조한 날씨탓인지 등로는 아주 미끄럽다

조금을 더 내려서니 데크목 등로가 나오고 잠시 후 오재에 도착한다

오재 정상에 있는 사룡산. 구룡산 등산 안내도

오재(375m:05:13)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와 영천시 북안면 상리의 경계에 위치한 재(峙)로 921지방도로가 지나가며 영천시쪽에 쉼터가 있다.

사룡산과 구룡산의 등산기점이기도 한 곳으로 사룡산은 영천시쪽에, 구룡산은 청도군쪽에 각각 등산입구안내 푯말이 세워져 있다.

지도상에는 오재를 밤재로 표기한 지도가 많다. 국토지리정보원 2005년도 1/50.000 지형도에도 오재를 밤재로 표기돼 있다.

밤재는 오재에서 서쪽으로 산등 하나를 넘어서 있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와 영청시 북안면 상리를 내왕했던 옛 고개로

921지방도로가 지나가는 다른 고개인데 이곳을 밤재라고 표기를 한 모양인데 誤記인 듯 싶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밤재는 율령으로도 불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여지도서』에서 청도의

물산()에 밤이 언급되고, 고개 아래에 밤재골·밤재못과 같이 '밤' 자가 들어가는 것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이 고개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서 밤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향토지에

의하면 옛날에 밤재는 영천과 청도를 연결하는 지역민과 보부상들의 주요 교통로였다.

한국전쟁 때 북안면 사람들이 모두 밤재를 통해 피란을 갔었다. 하지만 이 고개에서 동쪽으로 약 800m

정도 떨어진 곳에 영천과 청도를 연결하는 921번 지방도가 개설된 이후에는 통행량이 크게 감소하였다


고개 정상에는 쉼터와 애국지사 이 형표 선생의 추모비가 있는데 이곳 영천지역은 유난히 애국지사가 많은 곳이다
그런 연유인지 영천지역에는 국립영천 호국원도 있는 곳이다

오재쉼터 소공원에 있는 애국지사 이형표의 추모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직후인 1906년 3월 정환직,정용기,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에 참가하여 영천 남부지역

책임자로서 구룡산일대를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는등 활발한 대일항전을 전개한 이형표 애국지사의 추모비다.

영천에는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지역인데 일점 강점기에 일본에 대항한 신남의진 대장 정환진, 정용기 부자를 비롯해

강봉학, 권규섭, 김수곡, 박광, 박한규, 손진구, 이규식, 이형표, 전응팔, 조상환, 최치환, 황보근 등이 신남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이외에도 구봉서, 이학로 등이 의병활동을 한 지역이다

오재 정상의 운문면 표지판

비슬지맥 146.5km중 101.5km가 청도군계와 함께 걸어야 하는데 밀양(비슬)지맥 전체의 70%나 차지한다고 한다

한강기맥길의 홍천군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 하다 

오재 쉼터 소공원에서 반대편으로 가니 구룡산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어둠속에 임도로 이어지는 지맥길...초반이기는 하지만 등로는 아주 좋다

이제 내 헤드렌턴은 완전히 꺼져 버렸다

공작산 아우님이 예비로 가지고 다니는 손전등을 주는 바람에 아쉬운대로 쓸만하다

마일리(馬日里) 갈림길(05:25)

청도군 운문면에 있는 마일리는 ‘마일’이란 지명은 오래전부터 산골에 마을이 있어서, 청도 말로 마을인

마알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마일로 변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마을로는 아랫마을·평지마·

구 마실·안 마실·외두리·음지마·새집마·신당·괴기[괴틀]·수암[아래 수암, 윗수암] 등이 있는데
청도의 제일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영천시 북안면 상리와 맞닿은 곳에 있는 청도군의 최오지 마을이다

구룡산 높은 봉우리가 북쪽을 막고, 그 주봉들인 우라봉과 마일봉이 마을의 앞과 뒤를 막으면서 마을은 가운데

계곡에 주로 형성되어 있다...경작지는 마일천 양안으로 논이 있고, 산비탈에는 계단식 밭을 일구어 대부분

고추와 콩 등을 경작하고 있다.

어둠속에 오르막에 올라 숨한번 크게 내쉬고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안부(05:33)

517봉(05:52)

어둠속에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잔뜩 걸린 517봉에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안부로 내려서니 우측으로 희미한 갈림길이 보이긴 하나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휴게용 벤취가 있는 조그만 봉우리를 지나 내려서니 시멘트 도로가 있는 수암재에 도착한다

수암재(岩峙:445m:06:04)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 아래 수암마을과 영천시 북안면 상리 경계에 있는 삼거리가 있는 고개이다

수암사로 향하는 이정표가 서 있는데 어둠속이라 모든게 아쉽기만 하다

지명의 유래는 고개 아래에 있는 수암마을에서 따온듯 한데 수암()은 구룡산 아래 500이상 고지에

아랫수암과 윗수암, 2개 마을로 형성된 청도의 강원도라 할 수 있다.

물과 나무와 바위가 풍부하므로 수암() 또는 수암()으로 쓰여 왔다고 한다

수암재의 이정표

수암재에서 선 채로 물한모금 마시고 구룡산으로 향하는데 구룡산 무지터라는 표식이 보인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급경사의 오르막길로 향한다

수암사 갈림길(06:10)

수암사는 신라 때 다섯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인 수암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점차 절이

쇠락함에 따라 민가가 들어서면서 절은 폐사되었는데 15년전 혜국스님께서 토굴을 짓고 수행을

했으며 스님의 상좌였던 성천스님과 병천스님께서 수암사 복원 불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암봉(06:20)

암봉을 지나  구룡산 오르는 길에 산불의 흔적을 만나는데 사흘전인 22일 뉴스에 나온 곳인 모양이다

아직도 화재로 인한 메케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위에 박힌  소나무를 지나니 부처바위가 나온다

어둠속에서 만난 부처바위(06:27)

부처바위 사진...모셔온 사진

바위의 생김새가 미륵부처님상이다

3m 정도의 기암(奇巖)으로 기도하는 부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소나무와 바위가 어울어져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부터 영험있는 미륵골 돌부처라 하여 소원을 비는 이가 많았으며, 지금도 부처바위를 찾아 소원을 비는 이가 많다고 한다

부처바위 안내판

무지터 갈림길(06:30)

이곳에다 베낭을 벗어놓고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무지터로 향한다 

무지터(06:33)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와 영천시 북안면 상리 구룡산(영천) 9부 능선에 위치한 구룡산 용의 눈에

해당되는 명당으로영천 사일의 남원곡 사람들은 구룡산 9부 능선에 위치한 천 년의 마르지 않는

옹달샘을 두고 무지터라 부르면서 산신의 음용수이자  자신들의 삶의 젖줄이 되어준 물길로 믿었던 것이다.  
무지터는 구룡산을 의지하고 살아온 남원곡 사람들에게 신령수를 넘어 기우제를 올리는 제단이었다.

 

120여년 전, 모질게도 가물었던 그 해 유월, 모내기를 앞둔 마을 사람들은 애타게 비를 기다렸다. 
햇살은 이미 하지를 훌쩍 넘어섰지만 밭나락(육도) 조차 심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논밭은 말할 것도 없고 저수지도 말랐는데 못해 자라등 같은 땅 껍질이 일어나자 하늘을 우러러

비를 기다리던 민초들의 맘도 하얗게 타들어 갔다.

마침내 남원곡 사람들은 무지터를 찾아 기우제를 올리기로 하였다.

 

제주(祭主로 뽑힌 최씨는 먼저 무지터를 깨끗하게 치워내고 새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앞에서 온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자신을 반추하고는 맑디 맑은 새암 물을 한 독

길러 천천히 마을로 내려왔다... 제물을 준비할 정화수라 한 방울이라도 허투루 사용할 수 없었다

삼일동안 정성껏 준비한 최씨는 마을의 제관 아홉 사람과 함께 다시 무지터에 올랐다.

샘 남쪽 서른 평이나 족히 될 넓은 마당 바위 위에 정성스럽게 제상을 마련한 최씨와

마을 사람들은 무지터를 향해 머리를 조아려 비를 내려 달라 빌고 또 빌었다.

청하는 소리가 통곡이 되자 산도 따라 울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제단을 돌아나서는 제관들의 발 길 위에 난데없는 굵은 빗방울이 뚝뚝 듣기

시작하면서 오래지 않아 폭포와 같은 빗줄기가 온 산과 들녘을 달게 적셔주었다.

무지터의 영험일까. 하늘은 순천백성들의 기원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던가 보다.

그 후 무지터의 기우제는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구룡산 정상에서 동북쪽 아래로 불과 50여m 지점에 위치한 이 옹달샘은 북안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무지터에서 흐르는 한 줄기 물길이 남원곡 땅을 흠뻑 적시고 400여 년전 노계가 살다간 도계를 지난다.

그리고 다시 영천시 도동 고갯마루 완귀정 앞 개울을 만들고 자호천과 합류하면서 마침내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이 되는 것이다.

  
무지터는 가는 명주실 꾸리 하나쯤 족히 풀어 내릴 만큼 아주 깊은 샘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매몰되었다.

지금도 1m 정도의 깊이와 폭을 가진 이 샘은 여전히 맑은 물이 가득 고이고 흐른다. 
사람들은 구룡산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승천하였다고 하면서 이 무지터를 용의 눈이라고도 한다.

무지터는 마치 큰 광주리를 앉혀 놓은 듯 넓고 펑퍼짐한 지형에다 햇살마저 비켜 갈 줄 모르는 양지녘이다.

잔설이 서둘러 녹는 자리에 갯버들 흰 잎새가 돋아나고 연이어 연분홍 진달래가 무리 지어 피어나는 곳이다.  

박종률 선생님의 산경표를 따라서에서 인용

영천 북안천의 발원지이자 용의 전설이 서린 구룡산 중에서 용의 눈 부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가뭄에도 샘이 마르지 않아 옛날부터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영천 사람들은 무지터를

신성시하고 옛날부터 근처에 무덤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무지터에는 넓은 바위에 제단같은게 보이지만 너무 어두워 사물의 식별이 어렵다

그리고 주위는 상당히 지저분한 느낌이라 별 감흥이 없다

서둘러 베낭을 벗어둔 등로로 되돌아 간다

다시 무지터 갈림길(06:38)

무지터에 갔다온 사이에 졸지에 내가 꼴찌가 되어 버렸다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서둘러 구룡산으로 향한다

0알에 요령소리가 나도록 부지런히 올라서니 구룡산 데크목 광장이 나오고 동료산꾼들이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구룡산(九龍山:674.8m:06:42)

경북 영천시 북안면과 청도군 운문면, 그리고 경산시 용성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데크목의 전망대와 정상석 그리고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영천과 청도, 경산이 맞다은 3군 경계봉으로 이 산에서 사방으로 갈라져 있는 주능선이 아홉개로 되어있고
그 현이 용과 같다고 하여 구룡산이라 부른다고도 하고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전에 이 산 바로 아래에 있는

연중 마르지 않는 '무지터'라고 불리는 샘에서 9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구룡산이라 부른다.

무지터 바로 옆 넓은 너럭바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무지터 주변에는 무덤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도 포획하지 않는 등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신성시하였다.

판독이 불가능한 구룡산 정상 삼각점

 

구룡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옛날 동해의 용왕님에게는 서딸이 있었는데, 용궁에서 학대받음을 안타깝게 여긴 용왕님은 그 딸을 육지에 살도록 했다.

해동 조선의 정기를 지닌 금강산에는 이미 용왕님의 동생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태백산 줄기를 따라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보니 수목이 울창하고 꼭대기가 넓고 편편한 이상스러운 산을 발견하고, 이곳 영천에 자리를잡게 하였다.

이 용은 때때로 구름을 낳고, 비를 내리게 하여 육지의 억조창생을 도왔다.

 

비를 내리게 한 용은 열마리의 귀여운 새끼를 낳았고,날이 갈수록 탐스럽게 자랐다.

다른 새끼들은 모두 어미 용의 말을 잘 듣고 효성이 지극한데 유독 막내새끼 용은 항상

말썽을 부리고 불효막심하였다...어미 용은 항상 막내를 타일렀지만 끝끝내 말을 듣지 않음으로

하는 수 없이 동해의 용왕님에게 벌을 주도록 청하였다.

 

용왕님은 고생한 어미용을 용궁으로 부르고, 9마리의 용은 넓은 하늘나라에 올라가게 하여 이 세상의

비와 구름을 관장케 하고 말썽꾸러기 용은 그곳에서 쫓아냈다.

쫒겨난 용은 지금의 용산(경산시 용성면 용산리 소재)에서 살다가 본래 살던곳(구룡산)이 그리워

찾아가다가 용왕님의 노여움을 사서 병을 얻어 죽고 말았는데 그곳이 지금의 반룡산이라고 하며

이 구룡산은 아홉마리의 용이 올라간 뒤부터 구룡산이라 불렀으며,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 지역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구룡산,사룡산,반룡산,회룡지,운룡사,구룡마을,용호리,용전리 등등

정상석을 찍고 이정표쪽으로 되돌아 와서 발백산 방향으로 향한다

다른 산꾼들이 가지 않은 무지터를 갔다오는 바람에 졸지에 꼴찌이다

더군더나 이 산악회와는 처음으로 하는 산행이기에 남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길을 떠나는데 조금은 부담스럽다

갈림길(06:44)

날이 충분히 밝을 시간이지만 잔뜩 흐린 날씨에 짙은 안개로 인해 아직까지 등로는 어둡다.

직진의 뚜렸한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야 하는 곳이니...독도에 주의해야 할 듯...

좌측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선답자들의 시그널 서너장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나도 먼저간 동료 산꾼들이 무심코 직진으로 갔다가 알바를 한 모양이다...되돌아 오고 있다

낙타나무인가?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오니 능선 좌측으로 호화로운 묘지들이 보이고 이윽고 억새가 무성한 밭을 지난다

구룡재(九龍峙:590m:06:52)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시멘트로 포장된 삼거리이다

이정표(←운문면 정상리 ↑발백산 4.2km. 국가지정번호 마마32386077)가 있고 날이 밝아오고 있다.

이곳에서 공작산 아우님을 만나고, 동료산꾼들이 많이 보인다

 

1/5,000 지형도는 유축에 있는 조그만 저수지를 ‘다방못’이라 표기해 놓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재니 고개니 하는 뒷말 없이 그냥 ‘다박’이라 불리던 땅이라 했다.

그러니 굳이 재라 부르려면 ‘다박재’ 정도가 맞을 터인즉 구룡재는 비슬지맥을 종주하는

산꾼들에 의해 붙혀진 지명인듯 하고 이 지역 사람들은 다박재라 부르는 모양이다

구룡고개를 올라서니 최근에 조성된 듯한 처사 김해김공 묘지가 보인다

處士란 벼슬이나 세속 떠나 시골 묻혀 읽고 지내는 선비를 말하기도 하고

오늘날 처사나 거사는 주로 머리 깎고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의 법명(法名)을 가진 남자 신도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매남리(梅南里) 갈림길(06:54)

경산시 용성면의 자연부락인 매남리는 구룡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로

비교적 고도가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남쪽에 외곡지, 이암지, 상도삼지 등이 분포해 있어

수원은 풍부한 지역이며 자연마을로는 매남, 가만골, 구룡 마을 등이 있다. 매남 마을은 매방우가 있어

매암 마을이라 불리며, 가만골 마을은 새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룡 마을은 구룡산 밑에 위치한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사근달 마을은 사기를 구웠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매남리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꺽어지니 억새와 소나무가 무성한 안부가 나오는데 동료산꾼들은 

구룡재에서 아침 밥상을 펼치는가 보다... 공작산 아우님과 난 조금을 더 가다가 아침을 먹을 요량인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일기예보로는 아침 6시에서 9시까지 비가 온다곤 했지만 지맥길 걸어면서

구라청(기상청)의 예보를 전혀 믿지 않았는데, 오늘은 기가 막히게 맞춘다... 이럴땐 틀려도 되는데...

비가 더 많이 오면 청승맞게 밥을 먹는것도 그렇고 해서 등로옆에 밥상을 펼치고 번개불에 콩꾸어 먹듯이

10분만에 아침 식사를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자마자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급경사의 오르막길로 올라선다

능선에 올라서니 매남리로 이어지는 등로와 이정표가 있는 구룡산이라는 정상석이

보이는데 조금전에 지나온 구룡산은 뭐며, 이곳 구룡산은 뭐란 말인가... 상당히 헷갈리네...

구룡산?(650.8m:07:20)

경산시 용성면 매남리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경산시에서 설치한

구룡산이란 표시석이 있는데 고도와 기록 등 모든게 엉터리이다

경산시가 왜 여기에다 구룡산이라 주장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산행기를 보면 지나온 구룡산이 영천 구룡산이고, 이곳을 경산 구룡산이라 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경산 구룡산?

경산시청이 “구룡산, 675m, 태백산맥 줄기에 위치했다”고 새긴 돌을 세워 둔 곳이다. 하지만 그건 엉터리다.

이 봉우리는 675m 구룡산이 아닐뿐더러 태백산맥에 있지도 않다. 기껏해야 ‘651m 제2구룡산’으로 불리는 정도다.

더욱이 경산 구룡마을에서는 이걸 ‘안산’(案山)이라 부를 뿐이다. 마을의 남쪽에 솟은 마을 앞산이라는 뜻이다.

651m봉에서 정말 주목할 바는 일대가 가톨릭 성소로 다듬어져 있는 사실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높다랗게 섰고 짧잖은 거리가 ‘십자가의 길’로 꾸며져 있다.

이 봉우리 바로 동편에 자리한 ‘청도구룡’ 마을의 오래된 역사에 기인한 일이라 했다.

(대구 매일신문 자료 인용)

경산시장 나리... 지자체가 나서서 산꾼들을 惑世誣民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정상석 하나 세울때도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모든 자료를 검토하한 다음 지명위원회를

열어 충분히 검토한 다음에 시행해야지...이렇게 하시면 안되죠...민초들이 힘들게 벌어서 낸 세금 함부로 쓰면 안됩니다

엉터리(?) 구룡산을 지나  좌측으로 내려서니 넓은 등로에 십자가들이 보인다

650.8봉 아래에 있는 십자가상

1815년 을해박해 때에 청송 노래산과 진보의 머루산의 교우촌이 파괴됨으로 인해 영천과 경주 지방으로 피난하여

산재하여 있던 신자들이 더 깊은 산속을 찾아 이곳 구룡산에 모여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어 자급자족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신중하고 은밀하게 인근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구룡산 지역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여 모여든 곳으로 경상북도 남부 지역의 주요 피난처였으며, 인근의 

대구, 영천, 경주, 밀양 등지에 산재해 있던 신자들간의 교류가 빈번하였고 경상남북도를 잇는 주요 통로 였다.
한편 구룡 공소는 박해로 인한 순교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배교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인근 주민들과의 관계도 우호적이었던 연유로 사료된다.

구룡 공소는 교난을 피하여 온 사람들로 형성된 교우촌이지만 신부가 주재하여 사목하였으므로 성당으로 건립된 곳이다.

1921년 12월 11일 안세화 주교의 사목 방문을 기념하여 새 성전의 건립을 추진하여, 20년간 전 교우 절미 운동을 전개,

1933년 9월 13일에 성전의 준공을 이루었다.
1993년 이문희 대주교가 부활 미사 집전 후 성지로의 개발을 지시하여, 1995년 공소를 복원하고 피정의 집을 마련하였다.

십자가상에서 바라본 구룡공소가 있는 마을의 모습

짙은 안개로 인해 모든게 五里霧中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높다랗게 섰고 짧잖은 거리가 ‘십자가의 길’로 꾸며져 있는데, 이 봉우리 바로 동편에

자리한 ‘청도구룡’ 마을의 오래된 역사에 기인한 일이라 했는데 마을에 따르면 청도구룡은 조선조 후반 참혹했던

천주교 탄압시기에 숱한 신자들이 피신해 살던 곳이다. 하지만 다른 신앙촌들과 달리 이곳에선 희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았다. 그

리고 이 산 속 마을에 170여 년 전 벌써 공소가 설치됐다. 또 지금까지 수많은 성직자를 배출했다. 가톨릭에 특별한 마을인 셈이다.

이 마을은 본래 ‘비석리’였으나 ‘구룡’이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타면서 ‘청도구룡’이라고 별칭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본명은 잊혀지고 모두 구룡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의 거룩한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가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곳에서 시작,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혔다가

부활한 무덤까지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이 없었다면 죽음을 넘어선 부활도 없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오늘도 수많은 순례객들이 걷고, 기도한다.

예수에게 극형인 십자가형이 선고된 곳이 로마 집정관 빌라도 관저로 여기가 제1처다.

 ‘십자가의 길’ 시작점이다. 제2처에서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진 예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다.

제3처는 십자가의 무게를 못 이겨 예수가 첫 번째로 넘어진 곳이다. 슬픔에 젖어있는 성모 마리아를 만난(제4처) 뒤,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다(제5처). 피땀을 흘리며 걸어가는 예수의 얼굴을 베로니카가 손수건으로 닦아준 제6처.

제7처는 시끄러운 바잘거리와 교차하는 지점으로 제7처에서 두 번째 넘어졌다. 

제8처 돌벽에는 ‘예수는 승리하셨다.’는 뜻을 담은 희랍어 ‘NIKA’가 새겨져 있다. 

제8처를 왼쪽으로 돌아서 시장길을 더 걸어가 돌계단을 올라서니 예수께서 세 번째 넘어진 제9처가 나온다.

제10처는 예수가 옷벗김을 당한 곳이다. 그 옆 제11처에서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제12처에서 운명했다. 예수의 주검을 성모 마리아가 내려받은 곳이 바로 제13처이다.

예수가 묻힌 무덤이 제14처로, 죽음이 생명으로 변모된 부활의 현장이다.

9처를 지나면서 십자가상과 작별을 한다

좌측으로는 구룡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천주교 순례길의 14처는 영인지맥 마지막 구간인 공세리 성당의 그곳과 비슷한 느낌이다

갈림길(07:27)

안부를 지나 능선을 치고 오르는데 낙엽으로 인해 등로는 생각보디 미끄럽다

617.9봉(07:30)

준.희 선생님의 산패가 걸려있다...오룩스맵에서는 617.9봉으로 되어있다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그치고, 이곳까지 동행한 공작산 아우님은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가버린다... 젊음이 좋긴 좋쿠먼...

암봉(07:34)

예전의 성터인지 집터인지 알 수 없는 돌담도 보이는데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다

무명봉(07:42)

로프가 있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생각보다 상당히 미끄럽다

너덜길에서 살짝 우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또 다시 로프지대가 나오고...

곧이어 시멘트 도로로 내려선다

시멘트 도로에서 만난 이정표

정상재(峙:424m:07:53)

경산시 용성면 매남리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8번군가 지나가며 공소입구를 알리는

표시석과 소공원,장승 등이 있고 구룡산 펜션으로 내려가는 길도 보이는데 좌측 아래마을이 정상리라서

산꾼들은 이곳을 정상재로 기록한 것이 많이 보이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질매재라고 부른다

 

질매란 소 등허리에 얹어 짐을 싣거나 우마차 채를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든 ‘길마’가 그것인데

고개가 길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질매재라 불렀다고 하며 청도의 정상리 사람들이 질매재를 넘어 경산으로 왕래했다

구룡공소로 이어지는 도로가 8번 군도이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 얼마나 오지이기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뒤돌아본 정상재(질매재)의 모습

청도군 운문면에 속하는 정상리(, )는 경주 최씨 소유의 정자인 구은정() 위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정상이라고 했다고 전해지며 오로동()이라고 하였다는데 이것은 오리(), 즉 후미진 곳이라서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정상재에서 우측 임도로 오른 다음에 다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경산시 경계 숲길 종합 안내판

이정표를 뒤로하고 발백산 정상으로 향한다 

소나무가 있는 능선을 지나니...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나온다

538봉(08:07)

낙엽이 수북한 등로를 호젓하게 걷는다

로프가 있는 능선을 올라 고도를 높혀간다

588.1봉(08:10)

588.1봉 삼각점(△영천 343 / 1982재설)

등로는 지금 간벌중이다

또다시 고도를 높혀 능선으로 오르는데 로프가 처져있고 우측 능선 아랫쪽엔 정상재에서 헤어진 임도가 보인다

무명봉(08:30)

무명봉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발백산으로 향한다

발백산으로 가는 길

발백산으로 오르는 길은 꽤나 땀을 흘려야 한다

로프를 부여잡고 올라서니 조망바위가 나오고 지나온 능선은 짙은 안개로 오리무중이다

힘들게 정상에 오르니 준.희 선생의 산패가 산꾼을 반긴다

발백산(髮山:674.5m:08:43)

경산시 용성면 매남리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 봉화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 산속에

머리가 하얀 신선이 있었다고 하여 그 신선의 머리카락을 의미해서 발백산이라 하였고

국가지형도에도 ‘머리카락 발(髮)’ ‘흰 백(白)’ 자를 써 ‘발백산’이라 적어뒀으나 그게 뭣을 뜻하는지?

이 지역의 인근 마을에서는 대신 그걸 ‘바리배기’(바리박이) ‘바리박산’이라 불렀다.

바리박산을 그 소리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서 저런 희한한 명칭이 돌출한 것 아닌가 싶다

발백산 정상의 이정표

직진 방향으로 가면 반룡산이라 표기를 해놨다마는 지맥길과는 거리가 멀다

반룡산(盤龍山:630m)은 전설에는 열 마리의 용이 구룡산 무지터에서 승천하려다 아홉 마리만 승천하고 막내인한 마리는 떨어져 구룡산 일대에서 방황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경산과 청도의 경계에 위치한 반룡산이라 한다. 무지개터에서 용10마리가 승천하다가 낙오된 한마리가 반룡산 근처에서 헤메다가 용성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엔 용(龍)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상당히 많다

발백산 정상에서 인증샷

오늘 산행을 하면서 아침을 먹고는 처음 온 산악회의 식구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오다가보니 이곳까지 공작산 아우님에 이어 2번째로 발백산 정상에 도착하여

물 한모금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산객 2분이 발백산 정상으로 올라온다

공작산 아우님은 진작에 도망을 가버려 만날 길도 없고...

반갑구먼

군계 분기봉(08:54)

이곳부터는 분기봉부터 같이 동행한 영천시와 완전히 작별을 하고 좌측은 청도군 우측은 영천시를

벗어나 온전히 경산시 용성면으로 들어서는데 분기봉에는 좀 특이하게 생긴 이정표가 서있다

이곳에서 뚜렸한 직진길을 버리고 급하게 꺽어져 좌측의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군계 분기봉에 서 있는 이정표

임도(08:57)

임도에서 좌측으로 꺽어진 다음에 곧바로 시멘트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내려선다

능선으로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잠시후 시멘트 도로로 내려선다(09:00)

2분정도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걷다가 다시 우측으로 꺽어진다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은 잡목을 헤쳐며 내려서니...

조금전에 헤어졌던 시멘트 도로를 다시 만난다.

임도파들은 곧바로 시멘트 도로를 따르는게 편하겠다

안개가 몰려오는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형 도로에서 도로를 벗어나 산으로 들어선다(09:05)

숲으로 들어서자마 좌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541봉(09:10)

등로가 거칠은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안부(09:17)

좌측 0.5km지점에 수변 관찰로가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유인김해김씨 묘지를 지나서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촘촘한 소나무 능선으로 올라선다

시후에  494.6봉에 도착한다

494.6봉(09:30)

난생 처음보는 4자리 숫자의 삼각점

아마도 영천 410의 삼각점을 4100으로 한 모양이다... 국립지리원은 확인도 안하는가 보다

좌측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간다

孺人 永川崔氏 묘(09:37)

영천최씨 할머니 묘지를 지나니 빡쎈 오르막이 시작된다

생각보다 힘든 오르막길

NO87 송전탑(09:45)

송전탑에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철조망을 따라서 계속되는 내리막길

임장재(402m:09:48)

경산시 용성면 부일리와 송림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우측에는 동아임장이라는 생산임지가 있고

우측으로 동아임장이 개인 땅이니 출입하지 말라는 플랑카드와 나무 벤취 2개가 있으며

좌측의 이정표에는 산촌생태 체험관 1.5km 이정표가 서 있는 임도에 도착한다

 

고개 우측에는 동아임장이라는 회사는  ‘동아임장’이라는 생산임지가 있는데 산을 들판의

 ‘농장’에 상응할 ‘임장’(林場)으로 가꿔놓은 99만㎡(30만평)에 달하는 산지가 조성되어 있다

경고문구를 뒤로하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송전탑(10:00)

송전탑 아랫쪽 억새밭을 지나고...

앙증맞은 바위가 산꾼을 반긴다

508.4봉(10:05)

508.4봉 삼각점(△영천494 / 1986재설)

508.4봉 정상의 모습

508.봉을 내려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산꾼 범여를 반기는 듯 하다

안개가 자꾸만 밀려와 음산함을 느끼지만 이곳까지 나홀로 산행의 여유를 느끼며 걷는다

477봉(10:18)

고도를 낮추면서 계속되는 내리막길

조금은 거칠어진 잡목지대를 내려서니 호화로운 묘지가 나타난다

南陽徐公 묘(10:35)

남양서공과 부인 경주이씨 묘지를 빠져 나오니 묘지 주변으로 멋진 울타리가 처져 있는게

이채롭다... 아마도 후손들이 뫳돼지의 횡포에서 묘지를 지키려는 고육책이 아닌지...

묘지의 울타리를 빠져 나오자마자 묘지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숲속으로 향한다

남양서공 묘지를 지나 숲으로 들어서니 무명묘지가 나오고 곧이어 조금전의 임도를 만난다

넓은 임도를 따라서 부지런히 내려간다

임도 좌측의 어느곳엔가 절이 있는 모양이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사시예불소리가 들린다

임도 바리게이트를 지나니 우측으로 대추밭이 보인다

 

다시 임도를 버리고 대추밭으로 들어선다

대추밭 울타리는 전기선으로 되어있다...지난해 12월 변산지맥길 걷다가 전기가 통하는

울타리를 넘다가 졸지에 황천길 갈뻔한 탓에 스틱으로 확인하니 다행이 전기는 안 통한다

대추밭을 지나니 연등이 달린 농로가 나오고... 지맥길은 우측의 대추밭 가운데로 이어진다

가시와 잡목으로 인해 더 이상 치고 나갈수가 없다...임도로 되돌아 간다

대추밭을 지나 우측으로 보이는 저 능선이 지맥길인데...

편안한 시멘트 도로를 따르면서 바라본 율농지의 모습

시멘트 도로를 따라서 우측으로 지맥길을 이어간다

용림마을(230m;10:55)

경산시 용성면 가척리와 송림리의 경계에 있는 마을로 모든 주택들이 폐가처럼 보이고

가옥에 붙어있는 도로명 주소에는 ‘용림로’ 라고 해놨는데 이곳이 용림이란 지명에 확신이 없다.

좌측에 보이는 저수지는 ‘조고못’이라 부르다가 ‘율능지’라 바뀌었다고 하며 지형도 또한 ‘율능지’로 표기하고 있다.

2005년 용성면 지명위원회서 “그쪽 길의 모습이 용 같아서” 용림로란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전답이나 가옥들이 사람들이 살 지 않는지 모든게 을씨년스럽게만 보이는데 자료를 살펴보니

이곳에다가 18홀 규모의 골프장을 조성하려고 준비중이란다...또 맥길이 끊어지겠구나

보이는 폐가를 바로보며 좌측의 능선으로 올라선다

이 회사가 골프장을 건설하려나보다

뒤돌아 본 용림마을의 모습

반갑습니다

묘지를 지나...

잡목지대를 치고 나가니...

농장의 철조망이 등로를 가로 막는다...이 농장도 골프장 용지로 수용된 모양이다

언제 골프장이 완성될 진 몰라도 골프장이 완공되면 후답자들이 이곳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잡목길을 헤치고 올라서니...철조망 안쪽에 송전탑이 보인다

NO37 송전탑(11:14)

332.9봉(11:15)

철조망 바깥쪽의 등로를 따른다

NO38 송전탑(11:17)

무명봉(11:19)

자동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를 만나는데 아마도 용림마을로 이어지는 임도인 모양이다

나홀로 임도를 따라 편안하게 걷는다

351.4봉 오르는 길에서 만난 돌탑

무인감시카메라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351.4봉으로 올라선다

351.4봉(11:24)

351.4봉 삼각점(영천 338 / 2007복구)

351.4봉에 올라서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산꾼 2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겨울이라 물이 많이 필요하진 않지만 그래도 수통의 식수가 달랑달랑하여

초소를 향해 소리를 지르니 산불감시요원이 얼굴을 내민다

물을 좀 달라고하니 보온통의 물을 준다...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기왕에 뜨거운 물을 줬으면 커피도 달라고 하니 커피까지 주는게 아닌가

피곤할 때 커피한잔을 얻어 마시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다시 길을 나선다

비오재로 향하는 등로는 참으로 편안하다... 공작산 아우가 도망을 가는 바람에 여태껏

혼자서 걸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동료산꾼 2명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비오재로 향한다 

무명봉(11:38)

NO42 송전탑(11:42)

350봉(11:46)

등로가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NO43 송전탑(11:52)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니...

넓은 임도가 나오고 좌측에는 배수지 물탱크가 보인다

육동배수지(11:54)

편안한 임도를 따라서 내려가니...

철문이 나온다

들풀애 입간판이 서 있는 비오재로 내려선다

비오재(248m:11:58)

경산시 용성면 부제리와 대종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비오재, 비리재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이 고개 부근 마을에 금술이 좋은 소금장사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소금 장삿길을 떠난

남편이 돌아오는 길에 변을 당하여 죽었다... 이 소식을 모르는 부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고갯마루에서

남편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둔 후 죽은 부인의 한이 까마귀로 변하여 이 고갯길을 맴돌며

남편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고개이다

고개를 가로질러 포도밭 가운데를 따라서 지맥길을 이어간다

밭 가운데를 지나니 아카시아 군락지가 나오고 곧이어 묘지로 올라선다

慶州李公 묘지(12:05~15)

경주이공 묘지에서 조금전부터 같이 걸었던 산꾼 2명과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나선다

묘지를 지나니 시멘트 농로가 나오고...

갈림길(12:19)

대부분의 산꾼들이 이곳에서 그냥 임도를 따라서 가나 조금전부터 걸었던 2명의 산꾼과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318.1봉 갈림길(12:23)

좌측으로 조금만 가면 지맥길에서 살짝 떨어진 족보가 있는 318.1봉이 있는데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나

대장님을 비롯한 산꾼들이 모두 다 임도로 가버리는 바람에 눈치가 보여 포기하고 우측으로 내려간다

발백산을 지나 군계 분기점을 지나 청도군과 헤어져 온전히 경산시 용성면 지역 능선을 걷다가  이곳부터

또다시 좌측으로 청도군의 군계 능선을 다시 만나 대천고개(곱들고개)로 내려간다

묘지로 내려서니...

이 친구들도 F.M대로 갔구먼

또 다시 좌측으로 꺽어지니...

묘지가 나오고...

대천고개로 이어지는 뚜렸한 등로를 만난다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등로 좌측으로 커다란 대추밭이 보인다

소나무가 무성한 등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진다

274.6봉(12:44)

소나무 숲사이로 내려선다

등로에서 바라본 용성면 곡란리(谷蘭里)의 모습

경산시 용성면에 위치한 곡란리는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는 번답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서쪽에는 용산지, 갈리지자, 버들못, 죽곡지, 가전지 등이

분포하고 있어 수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자연마을로는 곡란, 남역, 수동 마을 등이 있다.

곡란 마을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다 해서 골안 또는 고란이라 불리다가 후에 곡란 마을이라 개칭되었다.

남역 마을은 곡란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수동 마을은 냇물 동쪽에 자리한다는 의미에서 수동 마을이라 불린다.

문화재로 시도유형문화재 80호인 난포고택 ()이 있다.

난포고택

난포고택(최해근 가옥)은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임진왜란 때 전라도도사로 전주를 방어했던 난포 최공철이 지은 집이라고 전한다. 명종 원년(1545)에 지었다고 하는데, 건축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대략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집으로 보인다.
‘가경 14년’(1809)이라고 쓰여진 막새기와가 발견돼, 순조 9년(1809)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정침·아랫사랑·중사랑·방아실·행랑채와 마루 그리고 사당 등이 고루 갖추어진 집이었으나, 지금은 정침·행랑채·사당만 남아있다. 정침은 앞면 7칸·옆면 1칸 반의 규모로 ㅡ자형이며 지붕이 특이하다

 

이동통신탑(12:48)

표고버섯 재배 비닐하우스를 지난다

나홀로 산행을 하다가 오랫만에 무박산행을 하면서 상당히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산행을 했다

배려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오늘의 산행 날머리인 대천고개로 내려선다

대천고개(210m:12:52)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에서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91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산꾼들은 이 고개를 대천고개라 부르지만, 지형도는 곱돌내재, 랜덤지도에는 곡들내재로 표기되어 있다

 

이 고개를 곱돌이재라고도 부르는데, 곱돌이라는 말은 '도로나 물길이 굽어 돌기를 곱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고개의 양편에 봉우리가 있어서, 고갯길은 두 개의 봉우리를 피하기 위해 먼저 반원을 그리면서 하나의 봉우리를

돌아간 후 또 하나의 봉우리를 돌아가기 위해 다시 반대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곱돌이'를 하기 때문에

곱돌이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고개 아래에는 곱돌지라는 저수지가 있다.

 

산꾼들이 부르는 대천고개는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따온 듯 하며 대천리는 운문면의 중심지였는데

대천리의 옛터에 운문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현재의 대천리는 수몰민들의 이주 단지로 운문면 대천리와

방지리로 갈라졌다... 운문산과 가지산, 문복산에서 내려온 물들이 무척천을 이루고, 마일리와 정상리에서 내려온

물이 합처쳐 봉화천과 경주시 산내면 지역에서 내려온 물이 또다시 만나 ‘큰내’를 이룬다고 해서 大川이라 부른다고 한다 

대천고개에 있는 버스 정류장

나를 태우고 온 愛馬와 먼저 내려온 산꾼들이 막걸리  한잔을 하고 있다

나보다 먼저온 공작산 아우가 나한테 막걸리를 권한다...먼저 도망간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니 30분 먼저 왔다고 한다... 젊은것이 니는 안 늙을 줄 아냐...ㅋㅋㅋ

늘 산에서 만나면 반갑고 정겨운 얼굴이다

삼성현의 고장 용성면이란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스님이셨던 원효스님과 그의 아들 설총

그리고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선사께서 이곳 출신인줄 오늘에서야 알았다

대천고개 정상에 있는 수준점

후미그룹들이 다 도착한 다음에 이곳에서 가까운 자인면 시장으로 가서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자인시장 안에 있는 북삼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목욕탕으로 갔는데 처음에 약정한 금액이

도착하니까 돈을 더 달란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일부는 목욕탕으로 향하고 일부는 식당으로 향한다

나 역시 식당으로 향하는 길 근처에 커다란 노인정이 있다

 

나홀로 노인정에 들어가 어르신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에 샤워장에서 깔끔하게 씻고 衣冠整齊를

하고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어르신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커피까지 마시고 가란다

갑자기 양넘 지갑 줏은 기분이다...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배운 노하우... 갈수록 뻔돌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식당에 제일 먼저 도착하여 잠시 후 도착한 동료산꾼들과 맛있게 식사를 하고 귀경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