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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여(梵如)의 世上사는 이야기
♣ 9기맥 자료및 산행후기 ♣/영산기맥(終)

(전남대 수련원-영산기맥 분기점-양고살재) 산행참고자료

by 범여(梵如) 2012. 9. 26.

 

- 영산기맥 분기점 -
영산기맥은 호남정맥 내장산에서 갈라져 나와 영산강의 북쪽 벽을 이루며 입암산. 방장산. 태청산. 불갑산. 승달산 등을 거쳐 목포 유달산에 이르는 도상거리 154Km의 산줄기로서 영산기맥은 공식명칭은 아니고 조석필 님께서 그의 저서 '태백산맥은 없다. 이 땅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이다'에서 산경표를 좀더 윤택하게 쓰기 위해 명칭이 없는 몇몇 산줄기를 기맥으로 부르자고 했고 그 중 영산강의 북쪽울타리인 이 산줄기를 '영산북기맥'이라 하였습니다.


★입암산성(笠巖山城)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북하면(北下面) 신성리(新城里)에 있는 고려시대 석성. 길이 약 15㎞, 높이 3m.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성벽을 협축법(夾築法)으로 축성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1256년(고종 43) 송군비(宋君斐)가 이 성을 지키고 몽고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 축성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1409년(태종 9) 현감 이귀(李貴)가 수축하고 1593년(선조 26) 이유형(李惟馨)이 포루와 군량창고를 쌓았으며 1653년(효종 4) 성벽의 나비와 둘레를 넓혔다. 현재 남문과 북문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성내에 정유재란 때 전사한 윤진(尹軫)의 순의비가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2호.
-자료인용-

-입암산성 자료-

 

입암산성은 전북 정읍과 경계를 하면서 전라남도 장성군 北下面 新城里 산 20번지 외 20필지에 있는 석축의 고로봉형(包谷式) 산성으로서, 입암산 능선을 따라 주위에 축성하였으며, 남쪽을 제외한 3면이 급경사를 이룬 산세가 높고 험한 곳에 쌓은 가히 天險(험)의 군사 요새지이다. 서쪽의 갓바위에서는 영산북기맥(노령산맥)을 남쪽으로 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감시할 수 있고, 사방이 높고 중간은 깊고 넓어 흡사 말의 구시통 같은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밖에서 성안을 들여다보고 측량할 수 없게 한 옛부터 호남의 요새지인 것이다. 옛문헌에는 정읍 입암산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기초 부분에 종출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천연암반을 이용하여 지표수가 자연스럽게 방출된 점 등에서 선조들의 자연 이용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성곽의 높이는 약 3.6m, 연장길이 약 5,208m로 기록되어 있으며, 평지부분이 경사진 부분보다 높게 쌓는 등 최대한 자연을 이용한 노력이 엿보인다고 한다.


후삼국시대때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후백제의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다고 하며, 고려 고종 23년(1236년)에는 宋君斐(비)장군이 몽골의 제 3차 침입때 이곳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며[ 어떤 곳에는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고 6차 침입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고도 하고 있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방어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고, 1597년(宣祖30;丁酉) 정유재란 때는 산성별장이던 尹軫(진)장군을 비롯해서 高阜(부)의 李敬國(慶州李氏) 李安國형제등 인근의 지사들이 관군과 의병, 승병을 모아 왜장 소서행장이 지휘하는 왜적에 대항하여 치열한 접전을 하며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 성은 까마득한 옛날이긴 하지만 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건장한 군졸들이 목숨을 내걸고 나라를 지켜려고 했던 현장이었으니 국난극복의 요충지이며 유서깊은 호국유적로서 학생들의 현장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했으면 좋을 듯하다. 그 가장 미세한 정신적 유산이라도 마음 어느 한 곳에나마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피와 땀으로 내 나라를 지키려던 조상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려 마냥 고개가 숙여진다. 산성터 안에는 마침 낙엽송들이 붉으레한 잎을 달고 있어 그 시절의 조상들의 피를 연상시키고 있어 숙연해진다. 산 정상 부위라고 하지만, 커다란 분지에 깨끗한 개울까지 흐르고 있어 국가가 위급할 때 이 지역 방위를 위해 수많은 백성이 머무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전라도내의 산성 가운데 남원의 교룡산성과 담양의 금성산성, 순천의 건달산성, 강진의 수인산성 등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정읍의 이 입암산성이 天險의 요새로 되어 있어 난을 당하여 병화를 피하는 데는 이보다 좋은 데가 없다고 했다. 문헌에는 선조 30년에 수축하였고 효종 4년에 둘레 2,795보, 砲褸(포루) 4개, 샘물 14개로 개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성내에 흐르는 계곡물로 만들어진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을 더 파서 물걱정이 없게 하였고, 성안에는 5개의 사찰이 있어 승장 1명을 두었으며, 각종 무기를 두는 창고와 군량 7천석 이상을 비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히 웅장했던 성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총연장 약 5km(5,208m?) 중 약 3.2km가 남아 있으며, 현재 남문과 북문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1993년 11월 10일 사적 제384호로 지정받았다. 지정면적 130만 8,429㎡[350,868평; 132ha(사적 121ha, 보호지역 11ha)]. 남문은 남아 있지 않고 수구가 따로 없이 그냥 틔어져 있어 개울물이 흘러내리고 사람이 들락거릴 뿐이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남문에서 1km를 가야 겨우 100미터가 높아질 정도로 드넓은 골짜기안 분지는 평활하다. 마치 허허벌판에 서있는 듯하다. , 중간에 허물어진 집이 있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퇴락하여 집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남은 지붕뿐이다. 이 골짜기 안에서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사람들처럼 혼인 전에는 댕기를 길게 따고 혼인 후에는 쪽을 찌거나 상투를 틀고, 사서삼경을 익히며 '유불선합일갱정유도회'를 믿었던 교인들이 1975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1986년까지 3가구가 살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후 그들은 용인 민속촌으로 이주되었지만 "우리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다"는 말을 남기고 남창골 입구의 자하동과 지라산 청학동으로 은거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이 살았던 집터 주변엔 조릿대가 무성하고, 집터의 흔적인 듯한 축대가 가끔씩 나타난다고 한다. 연못을 만들었던 제방의 흔적도 보이고 논과 밭터도 있다고 한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느 동네 어귀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골짜기의 끝지점에는 시골 외딴집을 연상케 하는 폐허가 된 초가집과 돌담이 있다고 한다. 확인해 보고 싶다. 그리고 성안은 더욱 평탄하고 주위가 제법 드넓어 능히 수많은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는 요지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 산성의 축성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본디 삼국시대부터의 옛성을 고려. 조선시대에 수축 혹은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 유서깊은 곳이다. 어떤 곳에서는 삼한시대 혹은 백제시대, 혹은 고려시대의 성으로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어 혼란스럽다. 성의 밑부분은 백제 것이며, 상부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는 곳도 있다.

 

빨리 정설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조선에 와서 太宗10年(1410·丙寅)에 수축하고 임진란 중에 1503년(宣祖26) 12월 휴전의 틈을 타서 備邊司로부터 전라감사에 명하여 南原 蛟(교)龍山城, 潭陽 金城山城, 順天 乾達山城, 康津 修因山城 ), 井邑 笠岩山城을 수축케 하였으며 1653년(孝宗4)과 1676년에도 개축하고 성내의 우물을 정비하였다. 성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점점 달라졌으니 東國輿地勝覽 井邑古跡에는 석축주위가 12,028척이고, 文獻備考에는 「동쪽이 1,300파(把;한발) 서쪽이 1,400파(把)」라 하였으며, 長城邑誌(輿地圖書)는 4,139척이라 하였으니, 量尺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갖지 않기 때문에 그 기록 또한 각각 다르다. 여하튼 조선시대에 이르러 포루와 군량 창고를 짓고 효종 때 산성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고 보인다. 성내에는 정유재란 당시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윤진 장군 순의비'가 있다. 1894(高宗30)년 甲午東學농민革命 당시에는 그 주역인 녹두장군 全琫準이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패전한 후 부하 10여명을 거느리고 당시 산성별장 이종록과 친분이 있어 입암산성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서울에 진입하여 내외 정세를 살피기 위해 변복을 하고 이곳 입암산성을 벗어나 순창 피노리(白羊寺?)로 피해가기 위해 하룻밤 묵고 간 일도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山城別將 李鍾祿이 처벌을 받기도 했으며 그 후에는 별장이 없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甕(옹)城式 남문의 門道와 주변의 배수구시설, 성벽 하단에 縱出礎石을 둔 성벽축조 방식이 특이하고, 특히 성내에 크고 작은 防築을 두어 水源을 확보하여 장기간의 농성이 가능하도록 배려한 점 등이 조선 후기 關方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남문은 문도 중앙에 암거를 가진 水口를 겸한 형식으로 되어 있고, 門口部 내외에 門墩(돈)을 겸한 옹성식 문도를 형성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계곡을 이룬 남쪽 성벽 하단 기토부분에 40~50cm 돌출된 종출초석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아 축조한 특수한 구조이다. 또 남문에서 50m 떨어진 곳에 集水用 연못이 있고 出水를 위한 배수구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배수구 외향의 경사면은 자연암반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그 위에 대형 방위를 놓아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엄폐된 특수한 구조를 보이고, 지표수가 자연스럽게 방출게 하였다. 선조들의 자연 이용의 지혜에 그저 탄복할 따름이다. 아직까지도 정연하게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은 곳이 많은데다 남북의 2문이 남아 있어서 웅장했던 성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으며, 피와 땀으로 내 나라를 지키려던 조상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매우 유서깊은 호국유적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특히 가을철에 입암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호남평야의 황금들판과 산성 중심부에 널찍한 분지에 하얗게 핀 억새가 좋은 대조를 이루며 장관을 이룬다고 하니 올 가을에는 가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성곽을 따라 비스듬히 오르내리는 길은 마치 중국의 만리장성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였다. 성돌이 들쭉날쭉 하련마는 '정갈하다'싶게 고르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산돌들이 어찌 저리도 딱딱 아귀를 맞출 수 있을까. 축성연대조차 모호한 옛 성벽은 켜켜히 쌓여진 돌들만큼 무수한 사연들의 무게를 묵묵하게 웅변하고 있다. 이 산성을 보노라니 이끼와 잡목으로 대변되는 세월의 침탈을 견디고 있어 감동을 준다.


옛날에 호남내륙에서 한양에 갈 때는 방장산과 입암산 사이에 있는 장성갈재와 입암산과 내장산 사이에 있는 장성새재를 넘어야 했는데, 이 재들은 험준하고 높은 방장산과 입암산 등을 끼고 있어 도적떼들이 한양가는 행인을 괴롭히고 봉변을 주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산성이 담당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해안/호남내륙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이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 지역은 너무 멀어, 왜구나 도적들이 출몰했다는 전갈을 박고 입암산성에서 출영했을 때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었단다. 결국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축성된 것이 고창읍성이다.


성곽의 높이도 상당한데, 북한산성 의상봉 능선의 총안이 있던 성곽유적의 높이보다 더 높아 보인다. 능선에서는 북쪽의 입암산 자락은 능선의 성벽을 따라 100명의 군사가 포진하고 있으면 가히 1,000명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산록이 급준한데, 이처럼 성의 남쪽과는 판이한 산세를 보면서 이곳이 요새지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아래인 노령의 북쪽인 입암면의 들판이 내려다보이는데 매우 평탄하고 넓어 개미 한마리가 움직이는 동태도 파악될 지경이다. 그래서 입지를 잘 선택한 조상들의 지헤에 그저 탄복할 따름이다. 능선 턱위에 올라서니 내장산의 망해봉이 뾰족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고 그 서북쪽의 산줄기들이 파도처럼 옅은 이내속에 일렁이고 있다. 그 안쪽은 정읍일대의 넓은 들판이다.
입암산성의 군병은 長城, 高敞, 興德, 井邑, 泰仁을 속읍으로 하였다.


참고로 입암산성 등산코스는 어느 계절이나 좋지만 가울과 겨울이 특히 좋다고 한다. 가을에는 남창계곡에서 시작하는 단풍이 아름답고, 특히 입암산성에서 내려다보는 호남평야의 황금들판과 산성안의 분지에 하얗게 핀 억새가 좋은 대조를 이루며 장관이기 때문이다. 겨울도 산이 유순해 산행이 무난하고,  활엽수의 앙상한 나무가지에 탐스럽게 맺힌 하얀 눈꽃이 별천지를 이루며 성안의 분지는 칼바람을 막아 주어 온화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여름은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시원한 수림이 좋다. 성곽을 따라 가는 갓바위로 오르는 길은 마치 중국의 만리장성 위를 걷는 듯하다고 한다.

===================이종환님의 산행기 중에서=============


▲방장산(734m)
전남 장성과 전북 고창, 정읍 경계에 솟은 방장산(734m)은 내장산 서쪽 줄기를 따라 뻗친 능선 중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이다.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주위의 내장산, 백암산, 선운산 등의 명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코 기세가 눌리지 않은 당당함을 보이고 있다.
 

지리산을 달리 방장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신이 살 듯한 신비로운 산에만 붙이는 이 이름은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를 숭상하던 조선조의 선비들이 중국의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방등산이라고 불리웠으며 백제가요인 방등산가는 바로 이산을  무대로 해서 지어진 노래이다.


- 먼 옛날 방등산에 숨어든 도둑의 무리들이 한 여인을 납치해갔다. 남편이 구해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남편이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울다가 지쳐서 부른 노래가 방등산가라는 것.
-자료인용(한국관광공사)-

 

▲벽오봉(640m)
방장산이라 표기된 벽오봉은 옛날에 벽오봉이 바다였을 때 오동나무를 싣고 가던 배가 난파되자 그 자리에 오동나무가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벽오봉에 서면, 쾌청한 날에는 곰소만은 물론 경수산 너머 서해바다와 위도 구시포해수욕장의 가막도까지 조망권에 들어 온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방장산 패러글라이딩 진입로가 방장산 휴양림에서 628.4봉(억새군락지)까지 2.08km가 개설되어 패러글라이딩 레포츠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있다. 방장산 활공장은 지형과 기후 조건 등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 1996년 공군 참모총장배 패러글라이딩 대회 이후 고창 모양성제 기간 중에 동호인들이 자주 이용하던 곳이다.  벽오봉과 연결되는 억새봉은 넓다란 공간에 갈대숲이 가을에는 장관을 이룬다. 전주이공 지묘 주변의 넓은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이 자리하고 있다. 서북방향으로 311.4봉을 지나 성두리 산자락에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선생이 잠들어 있는 묘소가 있다. 판소리의 성두본과 연계성이 있는 선생께서는 사후에도 성두를 잊지 못하고 영원한 안식처로 삼은 것이다.


-자료인용(고창코리아신문)-
■양고살재 유래
고창읍에서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과 연결되는 국가지원 지방도 15호 선상,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양고살재가 있다.
 양고살재는 병자호란때 고창 출신 박의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인 적장양고리(陽古利)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의(朴義)는 1599년(선조 32년) 고창군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고창 입향조인 관찰사 양오공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용기가 대단하고 말을 잘 타며 총을 잘 쏘아 박포수라 불렀다. 1624년(인조2년)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서울이 함락당하고 임금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수모를 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근위병을 거느리고 수원근교 광교산에서 적을 만나 싸워 여러번 이기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내린 폭설을 만나 양군이 격전을 벌인 끝에 아군이 패하게 되었다.  박의는 적군의 이동로인 방장산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자 적의 대장을 초탄에 명중시켜 쓰러뜨렸다. 죽은 적의 상장은 양고리라는 만주 정황기인으로 누루하치의 사위로서 창평전투에서 58회나 승리하여 청태종의 총애를 받던 명장이었다. 이때에 예친왕 다락을 따라 왔다가 박의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청나라 사기에서 보듯 청태종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무훈왕을 봉하였다 한다. 양고리가 죽은 뒤에 산에서 조급히 몸을 피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청군이 저 사람이 양부마를 쏜 사람이라 하니 활을 잘 쏘는 애륵을 시켜 잡아 목을 바치었다 고 한다. 박의의 묘소는 고수면 예지리 양정에 있으며 후손은 고수면 장두리와 아산면 중월리등에 살고 있다.
-자료인용(고창코리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