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4년 2월 16일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18km + 어프로치 3km / 9시간 20분소요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기맥갈림길-서우재-두루봉-380봉-살우치-소두랑봉-장군봉갈림길-구황산-450봉-경수지맥갈림길-불개미재-390봉영산기맥 3구간을 나서려니 괜시리 마음만 급해진다
금욜날 오랫만에 절에가서 정월 대보름 법회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어오니 상가에서 대보름 행사로 윳놀이와
막걸리 파티로 시끌벅적하다... 그 바람에 막걸리에 취하고 ㅋㅋㅋ
다음날 양평에서 농장을 하고 계시는 셋째 형님 생신이 일욜날이라 부득히 토욜에찾아뵙고 점심을 같이한
다음에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와 잔무를 처리한 후에베낭을 챙겨 도망자처럼 쫒기듯 열차를 타러 영등포역으로 가서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신선님 블로그 자료인용)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영등포발 장성행 열차티켓
19시 03분에 영등포에서 장성가는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는데 오늘은 승객들이 많다.
휴일이라 그런지 열차 안은 시끌벅적하니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어서 눈만 멀뚱멀뚱
열차가 익산역을 지나서야 조금 조용해지는 느낌이라 잠깐사이에 눈을 붙인다
장성역(23:18)
오늘따라 열차가 계속해서 연착이 되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15분 늦게 도착한다.
열차에서 내려 역에서 약 10분정도 걸어서 찜질방에 도착한다.
삼호 찜질방(23:30 ~ 05:30)
이 찜질방도 벌써 3번째이다 보니 쥔장이 또 오셨소 하면서 베낭을 넣겠끔 락카키를 하나 더준다.
배려해 주심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샤워를 마친 다음에 찜질방이 아닌 수면실로 향한다.
오늘도 수면실은 달랑 나혼자이다... 쥔장한테야 미안하지만 난 손님이 없을수록 편하다.
너무나 편하게 잔 나머지 04시 3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05시가 넘은 다음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와 어제 예약한 택시기사와 통화를 하고 역으로 가는데 문을 연 식당이 보인다
식당에 들어가서 순두부 백반을 시켰는데 금액이 4,500원인데 가격대비 음식맛이 일품이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손바닥만 동네라서 그런지 기사분이 귀신같이 나를 알아보고 식당앞에 와있다.
밥을 먹고 커피까지 한 잔 한 다음에 추암마을로 향하는데 추암마을에서 지난번 날머리 구간까지
어프로치를 3km 가량 걸어야 하는데 시간이 늦어서 걱정이다.
그래서 넌즈시 서우재까지 비포장 도로인데 갈 수 있냐고 물으니 기사양반이 태워주시겠단다.
너무나 고맙기만 하다... 비포장도로를 20여분을 올라가서 서우재 가기전에 내린다.
나를 내려주고 가는 택시(06:10)
지난번 내려왔던 갈림길에 나를 내려주고 택시는 장성으로 향하는데 고맙기만
한데 거기다가 택시비까지 2,000원을 깍아 주신다 (22.000원인데 20,000원)
이곳에서 내려 헤드렌턴을 켜고 어둠속에 장비를 점검한 다음에 우측 산으로 들어선다.
추암마을 이정표(06:20)
지난번에 이곳으로 내려 왔으니 오늘 산행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좌측으로 어둠속에 사각정자가 보이고 지난번 낮에 내려올때와는 딴판이다.
약간의 혼란도 오고 벌목으로 인해서 선답자들의 띠지들도 보이질 않는다.
잠깐 사이에 우왕좌왕 하다가 겨우 우측으로 가서 길을 찾아 임도로 내려선다.
서우재(西牛峙 350m:07:00)
조금을 내려가니 좌측으로 농장 내려가는 도로에 바리게이트가 처져있고 기맥길은 우측 임도로
따르는데 이제 날이 밝아 헤드렌턴을 베낭에 넣으려고 호주머니르 정리하는데 아뿔싸 택시에서
내릴 때 차비를 주려고 꺼낸 돈주머니와 핸드폰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으니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노래지는 느낌이다... 하는 수 없이 베낭을 등로 주위에 숨겨놓고 임도를 따라
마라톤 하듯이 달려서 택시에서 내린 자리까지 도착을 하니...
다행히 택시에서 내린 임도에 돈주머니와 핸드폰은 얌전히 주인을 기다린다.
내가 치매가 오나... 졸지에 아무 연고도 없는 장성땅에서 고아가 될뻔 했네그려 ㅋㅋㅋ
임도 갈림길(07:45)
왕복 3km를 40분만에 갔다오니 그만큼의 시간이 아깝기만 하다.
임도에서 우측 오르막으로 올라선다.
임도를 따라서 계속 걸어가는데 공작산 아우님이 붙이고 간 연두색 띠지가 반갑게 반긴다
지난번 구간 문수산 아래에서 만난 분들도 지나간 모양이다... 그때 얻어마신 물값을 갚아야 하는데
임도 갈림길(07:50)
서우재에서 이곳까지 편하게 걸어온 넓은 임도를 버리고 산으로 접어든다.
연두색 띠지... 공작산 아우님 고마우이, 복받을 겨
두루봉(441.5m:07:58)
전북 고창군 고수면 두평리와 전남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잡목과 잡풀만 가득하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만 몇개 걸려있는 초라한 봉우리에
삼각점(△고창435-1984재설)만이 외로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두루봉 정상에 있는 선답자들의 시그널
두루봉에서 내려와 좌측 능선으로 영산기맥 길을 이어가는데 선답자들의
후기에 표기된 지독한 구간이 시작되는데 잡목과 잡풀, 그리고 넘어진 나무들은
태고의 원시림을 방불케 할 만큼 무질서 그 자체이다... 바짝 긴장을 한다
길은 잘 보이질 않고 넘어진 나무들을 넘는것이 마치 허들경기하는 기분이다
소머즈부부님 -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반갑습니다
잠시동안 편안한 등로를 만나서 걷는데 그것도 잠깐이면 끝나 버린다
우측 등로 사이로 보이는 조산저수지(고창군 고수면 두평리 소재)
조금은 더 진행하니 이젠 아예 길은 보이질 않는다... 자꾸만 산행시간이 더뎌진다
이곳 산에는 왠 넘의 가시나무는 많은지... 초반부터 지치기 시작한다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암릉으로 된 봉우리가 나오는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없고
우측 옆사면으로 길이 나있어 편안한 옆사면 등로로 영산기맥 길을 이어 나간다
옆사면의 등로로 내려서니 급경사이긴 하지만 등로는 뚜렸하다
거기다가 다행인 것은 이곳에는 눈이 전혀없어 아이젠을 차지 않으니 시간을 줄일 수 있겠다.
조금을 더 내려서니 커다란 고목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군초소가 있는 살우치가 나온다.
살우치(殺牛峙:310.6m:08:35)
전남 장성군 삼계면 통안리와 전북 고창군 고수면 두평리에 걸쳐있는
고개로 ‘소를 죽인다’는 섬뜩한 표현을 쓴 고개이지만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1918년 발행 지도에 沙泥峙(사니치)로 표기되어 있다고 하는는 걸 보면
아마도 고개이름으로 흔한 싸리치가 변음되어 살우치가 된게 아닐런지?
육군포병학교장의 경고문구와 함께 관리가 안된 폐초소가 고개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우측의 고개 위로 올라서는데 원형 철조망이 처져있다.
살우치에서 20분간을 잡목과 가시나무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조그만 능선에 올라서니
지난 구간의 문수산과 조금전에 지나온 두루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담양~고창간
고속도로와 고창군 고수면 두평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능선에서 바라본 문수산과 두루봉의 모습
담양~고창간 고속도로의 모습
저 멀리 방장산도 어렴풋이 보인다
소두랑봉(470m:09:00)
전북 고창군 고수면 두평리와 전남 장성군 삼계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이름의 유래는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어 궁금증을 더해 주는 곳이지만 이곳부터는 지독한 잡목구간으로우리나라 산을 탈만큼 탄다고
자부하는 범여도 이런곳은 처음일듯 싶다.왜 선답자들이 영산기맥은 여름에 하지 말라는 이유를 알 듯 싶다
도저히 이 구간을 뚫고 나갈 자신이 없어서 좌측 옆사면으로 내려서는데
선답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그 쪽으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자연동굴도 보이고...
한참을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하사와 병장이란 시그널이
보이는데 2014,2,15이란 숫자가 써있다. 그렇다면 어제 이 곳을 탔다는 이야기인데...
힘들게 잡목구간을 치고 나오니 암릉구간이 나오고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암릉구간으로 들어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짧지만 산죽지대 구간도 지나고...
또다시 지독한 잡목구간을 지나니...
다시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또다른 암릉구간으로 접어든다
멋진 암릉이 하나 보이면서 곧이어 513.4봉이 나타난다
513.4봉(09:20)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장군봉이 나온다.
513.4봉에 정상에 오르지 않고 옆사면으로 나오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인다.
이곳에서 직진으로 가면 장군봉이고 영산기맥 길은 우측으로 꺽어져 급경사로 내려선다
건너편에 가야할 구황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제 지나가신 분들의 흔적인지 나무가 꺽어져 있다.
급경사로 내려서자 마자 또다시 좌측으로 꺽어진다
급하게 내려서니 뚜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안부 능선으로 내려오니 좌측으로는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시원한 편백나무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잠사후에 올라야 할 구황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고...
편백나무 숲을 지나니 또다시 지독한 가시나무가 태클을 건다.
내가 왜이리 사서 고생을 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뭐가 아쉬워서...말이다
가시나무에 손등이 할키고 얼굴이 할키어 피가 난다.
배가 고파서 오름길에 베낭을 내리고 쥬스 하나에 빵 하나를 먹고 5분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오르막을 낑낑거리며 올라선다.
등로 우측으로 고창축협농장과 그 너머로 고수면 두평리가 보인다.
암릉으로 등로가 형성된 구황산 오름길은 참으로 힘이든다
딱다구리가 소나무 한그루에 온통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 넘 재주 한번 좋다... 범여는 나있는 구멍도 힘이없어 못 뚫는데 이 넘은 이렇게 딱딱한 걸...ㅋㅋㅋ
나만큼이나 고단한(?) 삶을 살고있는 소나무도 만나고...
멋진 암릉구간이 형성된 구황산 정상으로 오른다
구황산(九皇山:500m:10:20)
전북 고창군 고수면과 성송면 그리고 전남 장성군 삼계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구황산의 명당에 묘를 쓰면 9대에 걸쳐 임금이 나온다는 속설 때문에 지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황산 서쪽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뒤에 있는 삼태봉도 신라 시대에 윤씨, 유씨, 하씨 성을 가진
삼정승이 태어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계당리 선동(仙洞)마을은 구황산의 신선이 놀았다는 곳으로
가뭄이 들면 마을사람들이 구황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영산기맥에 암봉으로 이루어진
구황산 정상에 서면 고창 일대와 장성쪽은 지나온 문수산과 멀리 무등산이 아련히 보인다.
정상의 암봉에는 5~6명이 들어갈 수 있는 삼각굴이 있다고 하지만 확인은 못했다.
고창에는 또다른 구황봉(299m)이 있어 혼돈되기도 하는데 이는 선운산 도립공원내에 있다.
구황산은 네개의 산줄기로 나누는 요충지로 북쪽은 2.4km 거리의 추산봉(273m)과
11.3km 거리에 있는 태봉(110.9m)가 있고 남쪽으로는 광주로 뻗어있는 수련산, 동구산,
용진산의 산줄기가 있고 구황산을 조금 지나면 선운지맥을 나누어 놓고 영산기맥은
남서쪽의 목포 유달산으로 향한다
물줄기는 부곡의 조산저수지를 통해 주진천(인천강)에 합류하여 줄포만(곰소만)의
서해로 흘러가고 남쪽은 평림천을 지나 영산강을 통해 목포 앞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구황산 정상에서 삼각대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남기고...
구황산 정상은 명성에 초라하고 옹색하기 그지없다
암릉구간이 대여섯사람 서 있기도 좁을 정도이고 사람들이라고는
영산기맥 산꾼 이외는 다니지 않는지 사람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서 직진을 하여 내리막으로 내려서니 길은 별로 보이지 않다가
급경사를 한참을 내려오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보이고 등로가 나타난다.
孺人 晋州姜氏之墓(10:30)
구황산에서 급경사로 내려오니 관리가 안 된 진주강씨 묘지 1기가 나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유인(孺人)이란 생전에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를 높혀서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비석의 갓은 생전에 벼슬을 한 사람에게만 사후에 비석위에 갓을 씌우는데 이 묘지는
남자도 아닌 여자의 비석에다가 갓을 씌운것이 참으로 독특하다
집에가서 잘아는 지관에게 꼭 한번 물어봐야겠다
진주강씨 묘지에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니 등로 우측 10m지점에 구황산 서봉이 있다.
구황산 서봉 갈림길(10:35)
구황산 서봉(450m)
영산기맥길에서 10여m 우측에 있는 구황산 서봉에 올라서니 이름모를 무명묘지 1기가 있다.
지도상에는 450봉으로 표기되어 있는 서봉에서 내려다보니 고창군 고수면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며 경수지맥이 연결되는 능선이건만 능선이 워낙 낮아 구분이 쉽게 안간다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고창군 성송면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커다란 채석장 하나가 산능선을
다 파먹고 있어 이 산꾼의 눈에는 상당히 거슬린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구황산 서봉에서 바라본 고창군 고수면의 산그리메
경수지맥 갈림길
선답자들의 산행기중에 이곳이 경수지맥 분기점이라고 표기가 되어있고 범여도 지형상 보면
이곳에서 분명히 우측으로 등로가 뚜렸하고 띠지도 가끔 보이는데 우리나라 脈 산행의 大家이신
박종률님께서는 서봉 남쪽 250m 지점 묘지 3기에서 갈라진다고 했는데 250m 지점에서 묘지를
보지 못했으니 집에와서 자료를 정리하면서 참으로 난감하다
경수지맥(鏡水枝脈) 개념도
영산기맥의 구황산 서봉( 445m)에서 남서쪽으로 250m쯤 내려선 표고 약 395m되는 곳에서(묘 3기있음),
서북 방향으로 가지를 쳐 내려가서 23번국도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건너 비산비야지대의 태봉산(95.3m),삼태봉(三台峰.197m. -0.3km), 왕제산(王帝山.151.1m.-0.8km)등 얕은 산줄기를 이루며 무장배수지가 있는 106m봉에 이른다.106m봉에서는
서북으로 송림산(松林山. 295.3m),장사산(269m),덕림산(德林山.141.5m),망덕산(望德山.104m),봉대산(284m),금정산(金井山.263.7m)으로 이어지는 길이 약 21km쯤되는 큰 산줄기 하나를 떨궈놓고 선운사가 있는 경수산을 향하여 북진하며
한제산(漢堤山.211m),지장제산(152m)을 일구고 선운산도립공원으로 들어서서는 국기봉(國旗峰.336m),청룡산(靑龍山.314m),
개이빨산(345.1m),천왕봉(327m), 경수산(鏡水山.444.3m)을 일구고 고막재와 20.6m봉을 거쳐 용기마을옆 바닷가에 잠긴다.
이 산줄기에서 제일높은 경수산(鏡水山.444.3m)에서 이름을 빌려와 경수지맥(鏡水枝脈)이라 부르며
도상거리는 약 35km되고 주진천(길이 29km,면적 228.68㎢)의 우측 물막이가 된다.
박종률님의 산경표 자료인용
불개미재(10:52)
구황산 서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맥길을 이어가는데 이곳은 그저 평이하고 편안하지만
등로는 그리 뚜렸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홀로 산행을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로 길을 찾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평이한 이곳이 지도상에 불개미재라는데 아무런 표식이 없다
가끔 가다가 만나는 공작산 아우가 지나간 흔적인 연두색 시그널이 반갑기만 하다
다시 약간의 오르막이 오르면서 암릉구간이 시작되는데 뒤돌아보니 구황산은 자꾸만 멀어진다
암릉사이로 난 아기자기한 등로를 걷는 맛도 꽤나 솔솔하다
지나온 구황산은 자꾸만 멀어지고...
쓰러진 나무들이 자꾸만 태클을 거니 산행속도를 제대로 낼 수가 없다
쓰러진 나무를 지나 옴팍한 곳에서 바람을 피해 빵 한개와 바나나 우유 하나를 먹으면서
10분정도의 휴식을 취하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무릎의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이럴땐 휴식을 취해줘야 하는데 매주 이렇게 다리를 혹사하니 그럴만도 하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기에 구급함에서 아스피린 한알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누가 대신 걸어주지 않을 이 길...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등로에서 바라본 장성군 삼계면 죽림리의 모습
우측으로 꺽어져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무명묘지 한 기를 만난다
우측으로는 암치제가 보이고...
이곳 산행은 참으로 힘이든다... 이렇게 힘들게 산행을 해본적은 없다.
산이 높거나 험해서가 아니라 잡목과 잡풀과 태풍으로 넘어진 나무들이 발목을 잡는다
진주강씨 묘지(11:25)
등로를 따라서 다시 조금을 내려오니...
좌측으로는 새로 조성한듯한 전주이씨 묘지를 만나 편한 길을 내려간다
묘지를 지나니 편백나무 숲이 나오고 곧이어 도로가 나온다
이곳이 암치재가 있는 893번 지방도로로 내려선 다음 우측으로 올라간다
암치(岩峙:200m:11:35)
전남 장성군 삼계면과 전북 고창군 성송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893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암치재, 암치고개라고 부르며 지명은 북쪽에 있는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서 따온듯하다
암치리에는 꽤나 큰 암치제(저수지)가 있으며 장성군 삼계면에서는 바위가 많은 재라고 해서
암치(岩峙)라고 부른다고 한다
문화유적은 석불좌상과 강응환 수사의 교지, 홍패 고지도 2점, 사당 우림정, 산당 설운정, 청용경당이 있다.
암치리 석계정은 구황산과 고산의 맑은 물이 돌 사이를 흐른다는 의미며, 석계정의 시원한 계곡물은 암치저수지의 수원이 된다.
암치재 - 고창군 성송면쪽의 모습
암치재 - 장성군 삼계면쪽의 모습
암치재에서 좌측으로 올라서 대성농장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니 넓은 임도가 나오고
10분정도를 올라가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목이 타올라 물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오늘은 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한여름을 방불케 할만큼 덥고 땀이 비오듯 흐른다.
거기다가 겨울옷까지 입었으니...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래도 식수가 모자랄 것 같은 느낌이다. 남은 식수라고 500ml 밖에 없고 점심때 떡꾹
끓여먹을 물 1,000ml 밖에 없는데 자꾸만 갈증이 나니... 물 먹는 것을 조절한다
등로에서 바라본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의 전경
좌측에 헬기장이 있고 10m 정도를 더 진행하니 넓은 공터에 좌측으론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
내려가는 넓은 임도가 나있고 우측으론 암치리 목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직진을 하여 조금 올라가니 다시 y자의 길이 나오는데 좌측의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좁은 小路를 따라서 등로로 올라선다... 쳐다보는 고산은 상당히 가팔라 보인다
산죽밭이 펼쳐지는 옆사면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 갈림길(12:10)
능선에 올라서니 공작산 아우님의 흔적과 나에겐 애증이 교차되는 모 산악회의
시그널이 걸려있고 이곳에서 좌측 옆사면으로 빙돌아서 고산으로 향한다
다시 산죽밭 가운데로 치고 오르니 조그만 봉우리를 만난다.
무명봉(12:25)
무명봉에서 좌측으로 돌아 빤히 보이는 고산으로 향한다
또다른 산죽길이 나오고 다시 좌측 사면을 치고 오르니 고산입구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산꾼을 반긴다.
고산 정상 초입에 있는 멋진 소나무
고산 정상에 오르니 지나온 영산기맥길이 한 눈에 보이고 조금전에 지나온
암치재와 그 우측에 삼계면 생촌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장성군 삼계면 생촌마을은
고성산성이 있어 생마을이라 했는데 생마을로 변했고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로 무생말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고 성암은 마을이 배형국이라 해서
뱃골이라 하며 뱃골과 무금치로 이어지는 마을을 성암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도로 우측에 있는 암치마을은 고려 중엽에 청주한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고
풍수설에 의하면 암치마을에 큰부자가 난다는 설이 말이 있었으며 장성군 삼계면에
통하는 재가 있는 마을로서 바위가 많은 재라고 해서 암치(巖峙)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산 정상에 서니 온 사방이 다 보인다... 그야말로 一望無際이다
운무가 끼긴 하지만 그래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고산(高山:527m:12:30)
전북 고창군 대산면, 성송면, 전남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의 남쪽 계곡물은 와탄천으로, 북쪽 계곡물은 대산천으로 흘러가다 법성포로 흘러든다.
높은 고(高)를 쓰는 이 산은 고창 들녘에 높이 솟아있어 주변의 조망대 역할을 한다.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고창의 숨은 명산으로 세계문하유산인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석묘(고인돌) 300여기, 후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진
고성산성(약 4.1km) 등 문화유적의 寶庫라고 알려져 있으나 관리상태는 부실하다
고산은 비록 해발이 527m이나 평야에 위치해 장수지역의 1,000m대 산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며 350m까지는 육산(陸山)으로 송림이 울창하고 6부능선부터는
고성산성이 있으며 암봉과 산죽이 어우러져 산행미를 더해준다.
고산에는 용추골, 각시봉, 깃대봉, 매바위, 용두암, 거북바위, 촛대봉, 치마바위 등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복부나 산딸기 평전과 늪지대 등이 잘 보전되어 있다고 한다
고산 정상에서 인증샷
고산 정상에는 자연석에다가 “高山”이라고 표기된 표시석 앞에다가 고창군에서
또다른 오석으로 표시석을 만들어놨는데 기왕 할거라면 조금옆에 하지 이게 뭡니까?
고산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
한사람이 커다란 사냥개 2마리를 데리고 고산 정상으로 올라온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냐 하면서 이것저것을 물어보면 왜 혼자 다니냐고 한다.
속으로 ‘당신이 홀로산행의 맛을 알어?’ 할려다가 가만히 있는데 묻지도
않은 온갖것을 다 이야기한다... 자기 나이가 68세란다(내가 물어봤냐고)
그러면서 이 고산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했더니만 저 아래
고창군 성송면을 가리키면서 저 아래서 대통령이 나올 곳이란다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 산소가 거기에 있다고 하면서 자랑을 늘어놓는다.
속으로 그 골치아픈 대통령 왜 하려는데 하려다가 참고 고산을 내려온다.
가야할 고성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북 고창군 대산면의 모습
고산 정상에서 되돌아와서 내려오니 양지 바른곳에 해맞이기원제단이 있다.
임도사거리(12:50)
임도사거리 우측에 도리깨나무라고 쓴 표지판이 있는데
난 오늘 처음으로 도리깨나무를 알았다.
고성산성터
후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는 고성산성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고산산성(古山山城)은고산에는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수백여기가 있으며 후삼국시대에축조한 고산산성이 자리를 잡고있다.
길이는 4.1km정도이고 높이는 5m인데 지형에 따라 다르며 자연을 따라 이용한 토성 혼축성으로 축성 양식은
포곡형이고 석축의 공법은 내탁법(內托法)이고 외면은 석축으로 쌓았고 내면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서 축성하였다.
외면은 자연석을 수직 혹은 물림 쌓기로 아랫돌에 비해 윗돌을 5~6cm씩 안으로 물려 쌓은 방식을 썼다.
성문은 남문과 북문의 형태가 남아 있으나 동문과 서문은 찾아볼 수 없다.
문헌에는 산성의 둘레가 8,100척(2,400m)이고 내유3천(內有三泉)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성내에는 용지(龍池)와 서봉사(瑞峯寺), 수고암 (水庫庵)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산성의 형태는 600m 정도가 남아 있고 거의 도태된 상태이다.
신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등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전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촛대봉(12:53)
이곳에서부터 북쪽으론 고창군 성송면에서 대산면으로 면계가 바뀌지만
남쪽은 계속해서 장성군 삼계면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가릿재 0.9km 방향으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촛대봉 정상에 있는 고성산성 안내판
촛대봉에서 좌측으로 꺽어져 내려서니 길은 참으로 좋다
갈림길(12:58)
촛대봉에서 잘 관리된 편한길을 5분정도 내려오다가 고속도로(?)같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능선으로 접어드는데 길은 보이질 않고 가끔 선답자의 시그널만 보인다
다시 우측으로 꺽어지니 겨우 희미한 등로가 보이나 이젠 넘어진 나무들이 태클을 건다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서니 묵혀진 묘지 1기가 보이고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이젠 아예 길조차 보이질 않고 우측 임도를 따라 편한 길을
내려갈 껄... 기맥길 원칙을 고집하다가 죽을 지경이다... 얼굴과 손등엔
나무에 할키어 피가나고 내가 뭐가 아쉬어 이짓거리 하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안된다
10분이상을 내려서니 겨우 등로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길이 전혀 보이지 않은곳에 걸린 시그널이 왜그리 반가운지...
다시 조금 더 진행하니 육군보병학교에서 설치한 콘크리트 말뚝이 보이고...
좌측 장성군쪽으론 편백나무 숲이 보이고 우측 고창군쪽은 밤나무 단지가 있다.
장성군쪽의 편백나무 숲
좌측 장성군의 편백나무 숲, 우측 고창군의 밤나무단지 뚜렸하게 대비가 된다
가릿재(235m:13:15)
전북 고창군 대산면과 전남 장성군 삼계면, 그리고 영광군 대마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가미재(加味峙)로 표기가 되어있다... 고개에는 육군 보병학교장의 경고문 간판과
원형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으며 성황당같은 커다란 돌무덤 하나가 고개를 지키고 있다.
농기구를 뜻하는 가리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가릿재는 옛날 해상인 법성포와 육상의 장성역을 잇는 보부상들의 물물교환의 통로
역할을 한 중요한 고개인 동시에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주위에는 편백나무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머리가 상당히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이곳부터 북쪽 시작부터 쭈~욱 같이해 온 전라북도에 이별을 하고 이제 영산기맥은
온전히 전라남도로 접어들어 목포로 향해간다
고산과 고성산 사이의 고개 안부인 가릿재에는 전설이 있다.
삼계면 생촌리 추동 마을 뒷편에 고성산(高城山), 546.3m과 고산(高山, 526.7m)이 나란히
솟아있는데, 이 두 산 사이의 낮은 언덕을 넘으면 고창과 영광으로 통한다.
옛날, 기골이 장대하고 마음씨 착한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들은 힘을 겨루어 보기 위하여 이 두산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기간을 정하여 형은 고성산에, 아우는 고산에 성을 쌓은 후 중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고산과 고성산 사이에 있는 가래재는 옛날 해상인 법성포와 육상의 장성역을 잇는
보부상들의 물물교환의 통로 역할을 한 중요한 고개인 동시에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두 형제가 살았는데, 아우는 북쪽의 고산성을 쌓고, 형은 남쪽의
고성산성(古城山城)을 쌓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날짜까지 성을 쌓지 못하거나 가래재에 늦게
도착한 사람이 목숨을 내 놓기로 했다. 결국 아우가 약속한 날짜를 어기자 형이 아우를
가래(삽)로 쳐 죽이고, 고산에 올랐다. 아우가 명천수(明天水)가 솟아나는 용추굴을 주변을
이용하여 약속보다 갑절이나 많은 산성을 쌓느라 늦은 것을 알고 후회한 나머지 가래로
자기 목을 쳐서 자살해서 가래재 전설이 전해온다.
지석묘군(支石墓群)
가릿재를 지나니 우측으로 여러기의 고인돌을 만나는데 아무렇게나 방치된 고인돌 앞에는
스텐레스 표지판에다가 숫자를 표시해놓고 있는데 이곳이 고창 상금고인돌군이다.
고창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하는데 세계문화유산이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되는 걸 보니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수준의 한심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곳은 고창 고인돌군이나 행정구역상 엄격하게 따지면 영광군 대마면이다.
한반도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 밀집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대동강 유역의 1만여기와 전남북 지방의 2만여기를
합쳐 한반도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는 무려 3만여기로 전 세계 고인돌 5만여기의 60퍼센트에 해당된단다.
최근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군과 함께 전북 고창군의 고인돌들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큰 돌을 괴어 놓은 돌무덤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썼던 무덤이다. 극소수 지배자만이 아닌 지배계층 모두가 썼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지석묘군을 지나니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나온다.
편백나무 숲을 가로질러 급경사의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310봉(13:30)
가릿재에서 고성산 정상 오르는 길은 길도 험하거니와 고도를 300이상 치고 오르는데
완만한 능선이 아닌 급경사라서 체력이 다 고갈되는지 다리에 힘이 빠지고 목이 타건만
이젠 남은 식수는 달랑 200ml 밖에 없으니 한 입에 톡 털어 넣을수도 없고 미치겠다.
넘어진 나무사이로 길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참으로 힘들다.
갈색바위를 지나니 펑퍼짐한 암릉구간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점심을
먹지 않은 탓인지 너무 배가 고파서 이곳에서 가져온 떡국을 끓인다.
점심시간(14:05~14:30)
나홀로 산행은 늘 베낭이 무겁기에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선 먹는걸 줄여야 하니
먹는 것 자체가 부실하다... 오늘은 떡국에다 김치, 그리고 어제 양평에서 사 온
지평막걸리 한 통이 전부다... 그래도 혹 몰라서 막걸리 한통을 아껴놨다.
허기가 질 땐 시간도 줄이고 허기를 면하기엔 막걸리만큼 좋은것도 없다.
떡국을 끓이는 사이에 막걸리 한 통을 게눈 감추듯이 비우고나니 살 것만 같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 산죽밭과 넘어진 잡목을 넘어 낑낑대며 올라서니
군부대에서 사격장에서 사격때 올리는 깃대봉이 넘어져 있고 뒤돌아보니
지나온 구황산과 고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영광군 대마면의 산그리메가 보이기 시작한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능선이 보이고 촛대봉 좌측으로 하얀 바위위에
고산5봉 중에 하나인 띠구리봉이 보인다.
띠구리봉은 고산정상에서 보면 북서쪽 골짜기를 둘러싼 봉우리로
특이한 이름의 ‘띠구리’는 삼이나 칡 따위로 세 가닥을 지어 굵다랗게 꼰,
나뭇짐 따위를 묶는 줄을 참바라 하는데 참바의 전라도 사투리가 띠구리라고 한단다.
능선에서 바라본 영광군 대마면과 고창군 대산면의 모습
힘들게 치고 올라온 다음에 능선 안부를 걸어가는 재미는 쏠쏠하다.
멋진 암릉과 주위의 조망은 끝내주는데 아쉽다면 잡목이 없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능선아래 보이는 넓은곳은 장성군 삼계면에 자리잡고 있는 지도상의 추동목장이다.
잠시후에 무명봉에 오르는데 육군보병학교장의 경고판이 서있다
아래서 볼 땐 엄청난 고도에 힘이들어 올라 왔는데 올라와서 암릉 안부를 걸으니
유순한 양만큼이나 부드러운 산이다... 저멀리 광주시내가 아련히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만나는 멋진 암릉
힘들게 지나온 高山을 다시한번 뒤돌아보고...
암봉(14:45)
암봉을 지나면서 산죽길과 잡풀이 우거진 등로를 걷는데 여름에는 참으로 힘들겠다.
선답자들이 왜 영산기맥은 겨울에 하라고 충고하는 이유를 알것만 같다.
고성산에 있는 헬기장은 잡풀에게 완벽하게 점령(?) 당해 버렸다.
고성산 (古城山 546.7m:14:50)
전남 장성군 삼계면과 영광군 대마면의 경계 능선에 위치한 산으로 남도지역의
산으로는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지만 주위에 산이 아닌 들녘에 우뚝솟은
산이라 그런지 상당히 높아 보이는 위엄을 갖춘 산으로 산세도 남.북으로 주능선을
길게 늘어뜨리며 양옆으로는 자잘한 지,능선을 흘러내리는 형국이다
정상에는 스텐레스 표지판에 고성산 깃대봉이라고 표기가 되어있다
산의 중턱에는 갖가지 동물형상을 하는 아기자기한 암릉들이 있으며 정상에는
억새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방인 산꾼이 보기에는 억새보다는 잡풀이 유명할 듯 싶다.
이 산은 이름에서 알수 있듯 고풍스런 산성(古城)이 산의 4부 능선인
남쪽 부성리 비탈에 내성과 외성이 남아있다고 한다 남
사면에 빙 둘러 축조되어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져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산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 내려오지 않아 언제 축조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옆에서 바라본 고성산 정상의 모습
정상에는 삼각점(△고창23),1980복구이 있고 멀리 광주 무등산이 박무속에 아련히 보이고 다음구간에
가야할 바로앞에 월랑산과 그너머로 태청산이 보이기 시작한다고성산성은 이곳이 아닌 고산에 있는데
이곳을 고성산이 부르니 약간은 혼란스럽다
고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장성군 삼계면 농공단지의 모습
저멀리 산 중턱에는 장성추모고원도 보이기 시작하고...
고성산에서 깃재로 향하는 길은 여태껏 잡목과 가시, 넘어진 나무들에 시달린
산꾼에게 보상이라도 하려는지 길은 양호하고 로프시설이 잘되어 있다.
조금 급경사이긴 하지만 콧노래를 부르면 깃재로 향한다.
유난히 푸르름을 자랑하는 소나무
깃재로 향하는 등로의 모습
계속해서 이어지는 멋진 암릉구간
암릉구간을 급하게 내려서니 또다른 멋진 소나무를 만나고 그 아래의
무명묘지를 만나면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이른 새벽에 타고 온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한다... 15시 30분까지 깃재까지 와달라고... 그러면서 물한병만 부탁을 한다.
장성에 와서 3번째 이용하는 택시기사인데 68세이신 이 분 참으로 친절하다.
이제 완전히 평지로 내려와서 편안한 안부 능선을 콧노래를 부르며 간다
안부에서 뒤돌아 본 고성산의 모습
임도 갈림길(13:20)
대간이나 정맥, 기,지맥을 타다보면 날로 먹는 산행은 한번도 없는것 같다.
오늘도 마지막에 다왔다 싶었는데 마지막 봉우리 하나가 나를 시험하려 든다.
좌측의 넓은 임도로 내려가면 간단한데 임도로 가고픈 유혹이 앞서건만
명색이 정통을 자처하는 산꾼 범여가 힘들게 18km를 넘게 잡목과 가시나무에
시달리며 사투를 벌였는데 명색이 그럴수는 없지... 뒤도 안돌아보고 능선으로 오른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그래도 괜찮다
정상에는 무명 한기가 있고...
바로앞에 또다른 무명묘지 한 기를 지나 우측으로 꺽어지는데 아예 길이없다
대다수 기맥 산꾼들이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 흔한 띠지도 보이지 않고 길도 없으니 알아서 걸을 수 밖에...
5분이상을 잡목과 사투를 벌인끝에 오늘의 날머리인 깃재로 내려선다
깃재(204m:15:28)
전남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와 영광군 대마면 복평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고성산과 월랑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고개 정상 우측에는 영광쪽에는 깃재산장이란 음식점이 있고
고개 남쪽 장성쪽 우측에는 장성추모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갯재라고도 부른단다.
조선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절에는 왜군들이 서해안을 따라서 영광쪽에서 장성지방으로
진격할 때는 고개위의 산인 고성산에 있는 산성에서 관군과 격전지가 된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장성사람들이 영광 법성포항까지 공출(세금)을 갖다 바치는 민초들과 애환을
같이했던 수탈로의 고갯길이기도 했으며 이 고개의 형국이 갯벌의 게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갯재로 불리우다가 지금은 깃재로 불린다고 한다.
깃재 - 장성방향의 모습
오늘은 아침부터 지갑과 스마트폰을 분실해서 1시간 가량을 허비하고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잡목과 가시나무와의 사투를 벌이면서 정말 힘들게 산행을 마친다.
깃재에 내려오니 택시기사는 당연히 임도로 내려오는 줄 알고 저너머 임도 앞에서 기다린다.
택시에 도착하니 기사양반이 물 한통을 건네주면서 좋은길 놔두고 힘들게 산행을
하냐고 하면서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이다.
필암서원과 장성추모공원 표지판이 있는 이곳에 도착하여 기사분이 사온 물한모금 마시고
오늘 조금 일찍 끝냈으면 장성읍 근처에 있는 필암서원을 들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서울 올라가는 시간 때문에 곧바로 장성역으로 향한다
다음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필암서원의 정문격인 확연루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門樓)로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추구의 엄정함으로
압도할뿐만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拱包)는 엄숙하면서도 고졸(古拙)한 맛을 풍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詩烈)의 글씨다.
2층 18칸 13평 [자료출처:장성군 홈페이지 인용]
필암서원은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황룡강변 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효종 10년(1659) 필암서원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필암서원
장성 사람들의 꼿꼿한 기질과 은근한 자존심의 바탕이되어온 곳으로 도의 절의, 문장이 탁월하여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신곳으로 1590년에 세워졌으며 1662년에는
유생들의 요청으로 필암(筆巖)이라는 액호를 현종(顯宗)으로부터 하사 받았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도
다치지 않은 채 오늘에까지 이르는 호남에서 단 한곳만 남은 유서깊은 사액 서원이다.
필암서원 선현에 대한 제사의 공간이자 교육및 학문 수련의 공간 등조선시대 서원의 기본 구조를 갖춘 전형적인
서원으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서원 창건시부터 간직해 온고문서 등이 서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단다.
서원의 정문 역학을 확연루(廓然樓)는 2층 누각으로 보통 유생들의휴식공간으로 쓰였던 곳으로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라고 한다.
장성일목(長城一目)이 장안만목(長安萬目)보다 낫다던지장성가서 글 자랑하지 말라(文不如長城)’ 라는 말이 있듯이
장성은 광주, 나주, 창평과 더불어 선비가 많고 학문이 성한 곳으로 전라도에서 장성 문장이 첫번째로 꼽았으며
특히 나라가 어려울 때 의병을 일으켜 호남 의병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으며 봉암선원에는임진왜란 때 변이중 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3대 발명품중에 하나인 화차가 있다고 한다.
장성역(15:57)
장성역에 내려서 열차표를 에매한 다음에 장애인 화장실에 들려서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베낭을 정리하고 나오니 열차를 탑승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장성발 → 영등포행 무궁화 열차표
표를 예매하려는데 오늘도 계룡역까지만 좌석이고 그 이후는 서서 가야하는 입석표만
있다고 하는데 지난번의 학습효과로 아예 열차표를 입석표를 끊어니 4,000원 차이가 난다.
캔맥주 2개 값이라 이게 웬 떡이냐... ㅋㅋㅋ
목포행 → 용산행 무궁화 열차가 16시 20분에 장성역으로 들어온다.
입석표를 끊어 열차에 올라 4호차인 식당차에 오르니 오늘은 자리가 널널하다.
이곳에서 제일 명당자리에 잡아 캔맥주 2개와 오뎅 하나를 사서 마시고 그것도
모잘라 비상식량(?)으로 남겨둔 막걸리 한통을 마시면서 넓은 호남들녘의
석양을 바라보니 이 기분 마치 내가 난고(蘭皐) 김삿갓(金炳淵) 이라도 된 기분이다.
매주 토욜마다 이 나이에 아무런 제약없이 이렇게 홀로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人生事 성공한 인물이 아닐까 ㅋㅋㅋ 그런 착각속에 헤매는
사이에 열차는 영등포로 향하는데 불알친구인 바람한테서 전화가 온다.
자기가 어제 외제차를 한 대 뽑았으니 막걸리 한사발하고 스크린 골프를 하잔다.
그럼 지금 어디냐고 닥달을 하는데 지금 신탄진이라고 하니 실망을 한다.
이 넘이 힘들게 산에 갔다온 넘한테 스크린이라니... 누구 죽일일 있나.
화욜에 막걸리 한사발하자고 약속을 한 다음에 영등포에 도착하니 20시 15분이다.
오늘도 멋지게 그리고 힘들게 한 구간을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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